그가 운전석을 툭툭 치며 기사한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하정원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차가 그녀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갔다.하정원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뭐 그쪽 차 아니면 타고 갈 차가 없는 줄 알아!”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사실 연락처에는 몇 명 없었다.그녀의 차는 집 차고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혼 수속하러 나왔기에 지갑도 두고 온 상태였고 텔레뱅킹도 되지 않았다. 진여훈이 자신을 버리고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그녀는 이혼 후 진 씨 놈이 더 이상 자신한테 못되게 굴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허, 완전한 착각이었다.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결국 자기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몰래 숨어 그들이 법원에서 나온 장면부터 그녀가 그에게 버려지는 장면까지 속속들이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다음날.진철이 책상 위로 잡지를 내던졌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이게 네가 나한테 약속했던 거냐.”진여훈이 잡지를 바라보았다. 그건 바로 어제 그들이 법원에서 이혼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 장면이었다.두 사람은 우선 이혼 사실을 공개하지 않기로 할아버지와 약속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장면이 파파라치한테 찍혔을 줄이야. 이제 언론에서도 그들의 이혼 사실을 추측하고 있었다.그가 입술을 깨물더니 조금 있다 입을 열었다.“어차피 언론에서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는데, 지금 밝혀진다고 해서 뭐 다를 게 있겠어요.”할아버지가 하정원을 손녀로 들인다는 사실도 어차피 공개해야 할 일이었다.진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너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만, 너 정원이 생각은 해 봤어?”“내가 너희 이혼을 허락한 건 맞지만, 분명 정원이를 손녀로 삼겠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잖니. 그런데 이게 뭐냐. 언론에서 이 사진을 근거로 정원이한테 어떤 기사를 쏟아낼지 생각이나 해 봤어?”하정원과 그의 이혼이 사실로 밝혀지면 언론에서는 하정원의 행실이 나
강성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두 가문이 억지로 사돈을 맺고 정원 씨가 진 씨 가문으로 들어왔어. 너는 정원 씨가 너희 집안의 얼굴에 먹칠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외부인들은 너희 진 씨 가문을 동정하고 있어. 그런 여자를 집에 들였다고.”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진짜 온갖 비난을 듣고 있는 사람은 하정원 씨 한 사람뿐이었다고. 재밋거리가 필요한 사람들도 오직 정원 씨만 비웃었어. 근데 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 왜냐면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원했던 결과였으니까.”“결혼하기 전부터 정원 씨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자기 명성을 떨어트리기 시작했어. 너는 이 결혼이 불만족스럽고,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면 정원 씨는 이 결혼에 만족했을까? 이제와서 두 사람이 이혼하게 된 게, 어쩌면 정원 씨가 애초에 가장 바라고 있던 결과일 수도 있어.”“확실히 가장 멍청한 건 정원 씨가 맞아. 네 말 그대로야. 정원 씨의 염문설은 그녀 스스로가 쌓아 올린 거지. 본인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지만 말이야. 그런데 과연 세상 어떤 여자가 정말로 자기 명성이 더럽혀지는 걸 신경 쓰지 않을까?”만약 그녀가 하정원의 과거를 몰랐다면, 그녀 역시 하정원이 왜 기를 쓰고 자기 명성을 떨어트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정원은 자기 명성을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었다.단지 그녀의 심장이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도 같이.그녀의 아버지는 분명 그 일의 주모자이자, 이 비극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게 만들어 놓고, 여전히 그녀에게 각종 혼인을 주선해 주었다.어쩌면 사실 그녀는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약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죽어버렸을 수도 있었다.아무도 그녀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모른다. 단지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그녀를 나쁜 여자로 단정 지어 버렸다.그녀를 둘러싼
나중에 그녀는 아예 전화기를 꺼버렸다. 그제야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기자가 일부러 하정원의 말을 왜곡해서 기사를 낸 탓에, 하정원은 “방탕하고 건방진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덕분에 새해 연휴가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사이버폭력을 당했다.모든 사람은 하정원이 건방지고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혼 후에는 횡포를 부리며 기자한테 대들기까지 했으니, 각종 언론과 댓글에는 그녀의 욕설이 난무했다.화가 난 진철이 악성 기사를 낸 잡지사에 전화를 걸었다. 진철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잔뜩 겁을 먹은 잡지사 사장이 당장 연예부로 달려가 물었다.“어제 인쇄한 잡지 오천 부는?”“다 출간했는데요.”잡지사 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당장 배포한 곳에 연락해. 그 잡지들 당장 돌려받아야 한다고. 그거 출간하면 안 돼. 큰일 난다고!”부서 사람들이 오전 내내 바쁘게 일했지만 회수한 잡지는 삼천 부가 조금 넘는 정도였다. 이미 천 부가 넘는 잡지는 사람들에게 팔고 없었다.잡지사 사장이 머리를 잡아 뜯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새해 연휴에 이 기사로 이목을 많이 끌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진철이 하정원을 위해 직접 나설 줄이야!진철이 군오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라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는 하정원과 진여훈이 이혼했으니 진 씨 가문에서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상관하지 않을 줄 알았다.그가 물었다.“남은 천 부는 누가 사 갔어?”부하가 답했다.“천 씨 가문의 따님이요.”잡지사 사장이 입을 다물었다.천 씨 가문의 딸이라면, 하 씨 가문과 트러블을 일으켰던 그 여자?천지현은 곧바로 자신이 사들인 잡지 천 부를, 폭로 전문인 다른 잡지사에 넘겨, 잡지 사천 부를 추가 발행했다.그녀는 하정원이 누명을 벗을 수 있도록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하정원이 이틀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자, 한혜숙이 직접 진 씨 가문으로 찾아왔다. 그녀의 물음에 진철이 놀라 되물었다.“집에 안 들어갔
하정원이 시선을 내려뜨리며 미소 지었다.“사실 제가 별로 한 것도 없는걸요. 전 그냥 아이들한테 종이학과 별을 접는 방법을 가르쳤을 뿐이에요. 그것도 다 예전에 육진우가 가르쳐줬던 거고요…”원장이 그녀한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정원아, 네가 지금껏 진우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진우는 좋은 애였어. 다만 안타깝게도…”그녀가 갑자기 원장의 말을 끊었다.“원장님, 거기까지만요.”“정원아, 넌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해.”원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슬프긴 마찬가지였다.“이제는 너 자신을 좀 사랑해 줘.”하정원이 어떻게든 붙잡고 있던 마음속 그 한 가닥이 그 순간, 툭 하고 끊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오해해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다만 육진우는 예외였다.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누르고 있던 고통이 화산처럼 폭발해 버렸다.원장이 가슴 아파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원장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정원아 이제 그만 진우를 잊어.”“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그녀가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원장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목메어 울었다.“만약 저까지 그를 잊으면 누가 그를 기억해요. 그 사람은 저 때문에 죽었는데.”원장은 가슴이 아팠다.육진우는 보육원에서 자라난 아이였다. 그는 아무런 집안 배경 없이 어릴 때부터 원장의 손에서 키워졌다.원장한테 육진우는 자기 아들과 마찬가지였다.육진우는 말도 잘 들었고 철이 빨리 들었었다. 햇살처럼 밝은 아이라 웃기 좋아했고 모든 사람한테 친절한 남자아이였다.그는 한평생 착하게 살았지만, 하정원과 연애를 하고 좋지 못한 결말을 맞았다.하진석은 그가 자기 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몰래 두 사람을 제지했다. 심지어 자기 딸을 이용해 납치 사건까지 계획했다.원래 그는 그 일을 통해 육진우
진여훈이 잠깐 침묵했다.“예전에도 왔었나요?”“네. 왜요?”“아닙니다.”그가 시선을 내려뜨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조사를 보냈던 사람한테서 연락이 온 것이다.상대편이 말했다.“도련님, 제가 Eden 씨에게 직접 물었는데, Eden 씨는 하정원 씨와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저 두 번 정도 마주쳤을 뿐 연락처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날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하정원 씨와 마주쳤는데, 하정원 씨가 전시회에서 그와 접점이 있었던 이유로 밥 한번 샀을 뿐이랍니다.”진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때 누군가가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고개를 숙여 확인하니 일곱,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삼촌, 정원 언니 찾으러 왔어요?”진여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하정원 그 여자는 언니라고? 자신이 그렇게 늙어 보이나?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허리를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마주치며 답했다.“그런데 왜?”여자아이가 물었다.“그럼 정원 언니한테 잘해줄 거예요?”그가 멈칫거리더니 입술을 깨물었다.“삼촌, 정원 언니는 되게 좋은 사람이니까 괴롭히면 안 돼요. 언니는 우리한테 종이학 접는 방법도 알려주고, 종이별 접는 방법도 알려주고, 그리고 글이랑 그림이랑 피아노도 가르쳐줘요. 삼촌이 만약 언니 괴롭히면 우리가 화낼 거예요.”진여훈의 동공이 흔들렸다.“안 괴롭혀.”“그럼 손가락 걸어요. 그 말 지키셔야 해요.”여자아이가 손가락을 내밀었다.그가 멈칫거리더니 곧바로 소리 내어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고 여자아이와 약속했다.“지킬게.”하정원은 육진우가 생전에 머물렀던 방에 앉아있었다. 원장이 계속 청소하고 있었기에 방은 육진우가 살아있을 때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방에는 스케치판이 가득했다. 육진우는 그림 그리기 좋아했고 재능도 있었다. 그 이유로 하정원은 그림을 배웠고 그를 위해 전시회를 열었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그가 남긴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림 속
하정원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그의 손을 쳐내며 새빨개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맞아. 내가 선택한 길이야. 그게 뭐 어때서. 이건 내 일이야. 당신들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자격 없다고.”“그래서.”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스스로 원한 타락의 길에서 정말로 원하는 건 찾았어? 그렇게 자기 명성을 깎아내리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하정원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린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실렸다.죽은 사람이 어떻게 돌아온단 말인가?아무리 그녀가 바라고 바라도, 그런 기적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일은 이미 벌어졌다. 육진우의 죽음은 그녀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가 화장되던 날, 그녀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의 마지막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 남자 대신 자기 목숨을 내줄 수도 있었다.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렇다고 해도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야.”진여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하정원이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그는 신경 쓰지 않았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알게 되었어도 그는 그저 그녀가 멍청하고 유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죽어버린 사람 때문에 자신을 망가뜨리고 타락한 삶을 살아가다니. 그녀를 동정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미 죽어버린 남자가 더 불쌍했다.“그 남자가 자기 목숨까지 바쳐서 당신을 살려냈는데, 당신은 그 소중한 목숨을 이렇게 허비하고 있다니. 차라리 그 남자가 아니라 당신이 죽어버리는 게 더 나았겠어.”순간 하정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모든 화면이 정지된 것 같았다.진여훈이 그녀한테 가까이 다가갔다.“당신은 그 남자가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친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그는 당신을 살리기를 선택했지만, 이런 결과는 당신 스스로가 자처한 거야.
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렸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육진우의 일로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어머니의 걱정을 간과하고 있었다.이제 보니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지금껏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이기심을 받아주고만 있었다. 단지 그녀가 증오와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눈이 멀어 그들의 마음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사실 그녀한테도 그녀를 관심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녀는 육진우의 죽음을 겪고 자신은 행복하게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오늘에서야 그의 진짜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그가 그녀를 살린 건 그녀가 자책감 속에서 살아가길 바라서가 아니었다.이틀 뒤.진철은 언론에 하정원을 자기 양손녀로 들인다는 소식을 공포했다. 그와 동시에 하정원이 자기 손자와 이혼한 원인은 하정원의 품행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진일보 알아갈 필요가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그는 언론에 하정원의 품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고, 왜곡된 진실을 보도한 언론사를 엄하게 꾸중했다.진철이 직접 나서서 하정원의 편을 든 건 지금껏 그녀를 욕했던 사람들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인 것과 다름없었다.하정원은 빠르게 실시간 검색 일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마리아 보육원 원장도 나서서 하정원의 편을 들어주었다.곧이어 하정원이 지금껏 몰래 전시회를 열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다는 일도 밝혀졌다. 하정원은 비밀리에 기부와 공익활동을 하면서 그녀 이름 대신 “우진 미술관”의 이름을 남겼다.그 때문에 아무도 우진 미술관의 배후 사장이 하정원일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배운 것도 없고, 재능도 없이 방탕하기만 한 하 씨 가문의 아가씨가 이렇게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우진 미술관은 작년 이래 최고의 호황기를 맞이했다. 미술관에 전시된 모든 초상화나 유화는 사람이건 풍경이건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그림 속에서 빛이 났다.강성연과 반지훈이 우진 미술관에 도착했다. 미술관에 손님들이 들끓는 걸 보니 그들도 기뻤다
그녀가 테이블 옆으로 걸어가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아니.”그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벽에 표구되어 걸려있는 그림을 훑어보았다.“그냥 단순히 하정원 씨의 미술관을 참관하러 왔을 뿐이야.”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낮에 올 줄 몰라?”그가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며 답했다.“낮엔 시간이 안 나.”하정원이 혀를 차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표구를 계속했다.“이 밤에 미술관 참관하러 왔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뭐야.”진여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너 말 좀 예쁘게 해.”“난 쭉 이랬거든.”하정원이 순간 뭔가를 떠올렸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참, 나 이제 당신 동생이잖아. 그럼, 오빠로서 존중을 해줘야 하나?”진여훈이 헛웃음을 지었다.“할아버지께서 우리 남매보고 잘 지내라고 하셨잖아. 설마 이렇게 얼렁뚱땅 넘기려고?”“그 말 들어봤어?”“무슨 말.”하정원이 씩 웃었다.“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 당신은 뭐 나랑 잘 지낼 마음이 있기나 해?”진여훈은 답을 하지 않았다.하정원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됐어. 나도 당신과 내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안 했거든. 당신이 나를 욕하지 않는 걸로 아주 감사하다고 생각해.”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정원이 다시 표구에 집중했다. 그녀는 그가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고개를 드니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왜 아직도 안 가고 거기 서 있어?”진여훈이 창밖을 내다봤다.“비와.”그녀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당신 차 있잖아. 비 오는 게 무슨 걱정이야.”“그럼 넌, 돌아갈 차 있어?”하정원이 순간 멍해졌다. 몇초 후 그녀는 빗줄기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설마 나 데리러 온 거야?”그는 대답이 없었다.하정원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진여훈은 자신을 싫어했다. 이혼하고도 자신을 싫어하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데리러 왔겠는가?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