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원이 시선을 내려뜨리며 미소 지었다.“사실 제가 별로 한 것도 없는걸요. 전 그냥 아이들한테 종이학과 별을 접는 방법을 가르쳤을 뿐이에요. 그것도 다 예전에 육진우가 가르쳐줬던 거고요…”원장이 그녀한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정원아, 네가 지금껏 진우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진우는 좋은 애였어. 다만 안타깝게도…”그녀가 갑자기 원장의 말을 끊었다.“원장님, 거기까지만요.”“정원아, 넌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해.”원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슬프긴 마찬가지였다.“이제는 너 자신을 좀 사랑해 줘.”하정원이 어떻게든 붙잡고 있던 마음속 그 한 가닥이 그 순간, 툭 하고 끊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오해해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다만 육진우는 예외였다.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누르고 있던 고통이 화산처럼 폭발해 버렸다.원장이 가슴 아파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원장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정원아 이제 그만 진우를 잊어.”“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그녀가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원장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목메어 울었다.“만약 저까지 그를 잊으면 누가 그를 기억해요. 그 사람은 저 때문에 죽었는데.”원장은 가슴이 아팠다.육진우는 보육원에서 자라난 아이였다. 그는 아무런 집안 배경 없이 어릴 때부터 원장의 손에서 키워졌다.원장한테 육진우는 자기 아들과 마찬가지였다.육진우는 말도 잘 들었고 철이 빨리 들었었다. 햇살처럼 밝은 아이라 웃기 좋아했고 모든 사람한테 친절한 남자아이였다.그는 한평생 착하게 살았지만, 하정원과 연애를 하고 좋지 못한 결말을 맞았다.하진석은 그가 자기 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몰래 두 사람을 제지했다. 심지어 자기 딸을 이용해 납치 사건까지 계획했다.원래 그는 그 일을 통해 육진우
진여훈이 잠깐 침묵했다.“예전에도 왔었나요?”“네. 왜요?”“아닙니다.”그가 시선을 내려뜨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조사를 보냈던 사람한테서 연락이 온 것이다.상대편이 말했다.“도련님, 제가 Eden 씨에게 직접 물었는데, Eden 씨는 하정원 씨와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저 두 번 정도 마주쳤을 뿐 연락처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날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하정원 씨와 마주쳤는데, 하정원 씨가 전시회에서 그와 접점이 있었던 이유로 밥 한번 샀을 뿐이랍니다.”진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때 누군가가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고개를 숙여 확인하니 일곱,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삼촌, 정원 언니 찾으러 왔어요?”진여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하정원 그 여자는 언니라고? 자신이 그렇게 늙어 보이나?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허리를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마주치며 답했다.“그런데 왜?”여자아이가 물었다.“그럼 정원 언니한테 잘해줄 거예요?”그가 멈칫거리더니 입술을 깨물었다.“삼촌, 정원 언니는 되게 좋은 사람이니까 괴롭히면 안 돼요. 언니는 우리한테 종이학 접는 방법도 알려주고, 종이별 접는 방법도 알려주고, 그리고 글이랑 그림이랑 피아노도 가르쳐줘요. 삼촌이 만약 언니 괴롭히면 우리가 화낼 거예요.”진여훈의 동공이 흔들렸다.“안 괴롭혀.”“그럼 손가락 걸어요. 그 말 지키셔야 해요.”여자아이가 손가락을 내밀었다.그가 멈칫거리더니 곧바로 소리 내어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고 여자아이와 약속했다.“지킬게.”하정원은 육진우가 생전에 머물렀던 방에 앉아있었다. 원장이 계속 청소하고 있었기에 방은 육진우가 살아있을 때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방에는 스케치판이 가득했다. 육진우는 그림 그리기 좋아했고 재능도 있었다. 그 이유로 하정원은 그림을 배웠고 그를 위해 전시회를 열었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그가 남긴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림 속
하정원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그의 손을 쳐내며 새빨개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맞아. 내가 선택한 길이야. 그게 뭐 어때서. 이건 내 일이야. 당신들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자격 없다고.”“그래서.”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스스로 원한 타락의 길에서 정말로 원하는 건 찾았어? 그렇게 자기 명성을 깎아내리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하정원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린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실렸다.죽은 사람이 어떻게 돌아온단 말인가?아무리 그녀가 바라고 바라도, 그런 기적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일은 이미 벌어졌다. 육진우의 죽음은 그녀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가 화장되던 날, 그녀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의 마지막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 남자 대신 자기 목숨을 내줄 수도 있었다.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렇다고 해도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야.”진여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하정원이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그는 신경 쓰지 않았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알게 되었어도 그는 그저 그녀가 멍청하고 유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죽어버린 사람 때문에 자신을 망가뜨리고 타락한 삶을 살아가다니. 그녀를 동정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미 죽어버린 남자가 더 불쌍했다.“그 남자가 자기 목숨까지 바쳐서 당신을 살려냈는데, 당신은 그 소중한 목숨을 이렇게 허비하고 있다니. 차라리 그 남자가 아니라 당신이 죽어버리는 게 더 나았겠어.”순간 하정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모든 화면이 정지된 것 같았다.진여훈이 그녀한테 가까이 다가갔다.“당신은 그 남자가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친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그는 당신을 살리기를 선택했지만, 이런 결과는 당신 스스로가 자처한 거야.
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렸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육진우의 일로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어머니의 걱정을 간과하고 있었다.이제 보니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지금껏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이기심을 받아주고만 있었다. 단지 그녀가 증오와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눈이 멀어 그들의 마음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사실 그녀한테도 그녀를 관심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녀는 육진우의 죽음을 겪고 자신은 행복하게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오늘에서야 그의 진짜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그가 그녀를 살린 건 그녀가 자책감 속에서 살아가길 바라서가 아니었다.이틀 뒤.진철은 언론에 하정원을 자기 양손녀로 들인다는 소식을 공포했다. 그와 동시에 하정원이 자기 손자와 이혼한 원인은 하정원의 품행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진일보 알아갈 필요가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그는 언론에 하정원의 품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고, 왜곡된 진실을 보도한 언론사를 엄하게 꾸중했다.진철이 직접 나서서 하정원의 편을 든 건 지금껏 그녀를 욕했던 사람들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인 것과 다름없었다.하정원은 빠르게 실시간 검색 일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마리아 보육원 원장도 나서서 하정원의 편을 들어주었다.곧이어 하정원이 지금껏 몰래 전시회를 열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다는 일도 밝혀졌다. 하정원은 비밀리에 기부와 공익활동을 하면서 그녀 이름 대신 “우진 미술관”의 이름을 남겼다.그 때문에 아무도 우진 미술관의 배후 사장이 하정원일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배운 것도 없고, 재능도 없이 방탕하기만 한 하 씨 가문의 아가씨가 이렇게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우진 미술관은 작년 이래 최고의 호황기를 맞이했다. 미술관에 전시된 모든 초상화나 유화는 사람이건 풍경이건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그림 속에서 빛이 났다.강성연과 반지훈이 우진 미술관에 도착했다. 미술관에 손님들이 들끓는 걸 보니 그들도 기뻤다
그녀가 테이블 옆으로 걸어가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아니.”그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벽에 표구되어 걸려있는 그림을 훑어보았다.“그냥 단순히 하정원 씨의 미술관을 참관하러 왔을 뿐이야.”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낮에 올 줄 몰라?”그가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며 답했다.“낮엔 시간이 안 나.”하정원이 혀를 차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표구를 계속했다.“이 밤에 미술관 참관하러 왔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뭐야.”진여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너 말 좀 예쁘게 해.”“난 쭉 이랬거든.”하정원이 순간 뭔가를 떠올렸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참, 나 이제 당신 동생이잖아. 그럼, 오빠로서 존중을 해줘야 하나?”진여훈이 헛웃음을 지었다.“할아버지께서 우리 남매보고 잘 지내라고 하셨잖아. 설마 이렇게 얼렁뚱땅 넘기려고?”“그 말 들어봤어?”“무슨 말.”하정원이 씩 웃었다.“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 당신은 뭐 나랑 잘 지낼 마음이 있기나 해?”진여훈은 답을 하지 않았다.하정원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됐어. 나도 당신과 내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안 했거든. 당신이 나를 욕하지 않는 걸로 아주 감사하다고 생각해.”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정원이 다시 표구에 집중했다. 그녀는 그가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고개를 드니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왜 아직도 안 가고 거기 서 있어?”진여훈이 창밖을 내다봤다.“비와.”그녀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당신 차 있잖아. 비 오는 게 무슨 걱정이야.”“그럼 넌, 돌아갈 차 있어?”하정원이 순간 멍해졌다. 몇초 후 그녀는 빗줄기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설마 나 데리러 온 거야?”그는 대답이 없었다.하정원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진여훈은 자신을 싫어했다. 이혼하고도 자신을 싫어하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데리러 왔겠는가?
어떤 것들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봐야 한다.-날이 화창하고 볕이 따뜻한 날이었다.하정원은 세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서 놀았다. 그런데 하필 그곳에서 민서율과 진여훈 두 사람을 만났다.두 사람은 그들보다 늦게 도착했다.강유이는 웃으며 그들에게 달려갔다.“서율 오빠, 여훈 삼촌!”강시언과 강해신은 하정원을 바라봤고 하정원은 팔짱을 두르며 혀를 찼다.“내 동생이 언제부터 저 녀석이랑 같이 놀았지?”게다가 진여훈이 놀이공원을 온다고?정말 희한한 일이었다.민서율은 그들을 보고 말했다.“우연이네요.”강해신은 코웃음을 쳤다.“그러게, 정말 우연이네요.”우연이다 못해 뜻밖이었다.하지만 민서율은 혼자가 아니라 진여훈과 함께 있었기에 굳이 따지고 들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아이들은 무리 지어 저희끼리 놀러 갔다.그렇게 하정원과 진여훈 두 사람은 그곳에 버려졌고 한참 뒤에야 하정원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어젯밤에는 고마웠어.”어제 그가 우산을 남겨준 덕에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다.진여훈은 덤덤히 대꾸했다. “그런데 넌 언제부터 놀이공원에 올 만큼 한가했어?”하정원은 진여훈을 훑어봤다. 오늘 그는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어 놀기 좋은 차림이었다.진여훈이 이렇게 캐주얼하게 입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조금 정식적인 차림이거나 정장을 입었었다.진여훈은 그녀를 바라봤다.“너도 시간이 있는데 나는 시간 있으면 안 돼?”하정원은 시선을 옮기며 당당하게 말했다.“내가 너랑 같아?”그녀는 원래 한가해지고 싶으면 한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진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정원은 길가에 인형 뽑기 기계가 있는 걸 보고 문득 하고 싶어져 그곳으로 다가가 동전을 게임머니로 바꿨다.등 뒤에서 진여훈의 목소리가 들렸다.“할 줄 알아?”“날 얕보는 거야?”하정원은 스틱을 잡고 조종하기 시작했다.“난 인형 뽑기 고수야.”하지만 그 말은 곧 부정당했다.인형을 집긴 집었지만 꺼내지는 못했다. 매번 중요한 순간에 인형이 떨어
그들은 저녁이 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원래 강유이 등 세 아이는 하정원과 같은 차를 타려 했는데 하필 네 아이가 같은 차를 타게 됐다.하정원은 그들이 자신을 버리는 걸 보고 혀를 찼다.“진짜 너무해.”아이들은 분명 사전에 짜놓았을 것이다.진여훈은 차창을 내리고 시선을 들었다.“안 가?”하정원은 당황했다.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코웃음을 쳤다.“난 네 차 안 앉을래.”그날 진여훈이 구청에 자신을 버리고 간 일을 그녀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진여훈이 또 무슨 속셈인지 누가 알겠는가?진여훈은 하정원이 여전히 그 일로 삐져 있는 걸 알고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이번에는 진짜 바래다줄게.”“진짜 바래다준다고?”하정원은 코웃음을 쳤다.“네가 날 고속도로에 버릴지 내가 어떻게 알아?”예전이었다면 하정원의 반박에 진여훈은 인내심이 닳아 기사더러 출발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안 그래.”하정원은 그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왠지 이혼하고 나니 진여훈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하지만 하정원은 결국 차에 탔다.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조용했고 아무도 그 고요한 분위기를 깨부수지 않았다.진여훈은 고개를 돌려 하정원을 바라봤다. 그녀는 줄곧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창문 유리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정신이 딴 데 팔린 것 같기도,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조금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진여훈은 시선을 거둔 뒤 헛기침했다.“밥 뭐 먹고 싶어?”하정원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너랑 내가 밥을 먹는다고?”진여훈은 그녀를 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그렇지 않으면?”하정원은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솔직히 얘기해 봐.”그녀는 진여훈에게 바짝 다가갔다.“설마 귀신이라도 씐 거야?”운전하던 기사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진여훈은 이를 악물고 웃으며 그녀에게 다
“지현아,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천지현의 아버지는 안색이 흐려졌다.그도 진씨 집안 체면을 고려해야 했다. 설사 진씨 집안이 정말 하정원을 이미지 메이킹 해줬다고 해도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천지현은 이를 악물었다.“허튼소리라뇨? 하정원만 아니었으면 전 이미 경원 씨랑 결혼했을 거예요. 다른 사람의 남자친구를 빼앗는 불여우가 제 앞에서 깨끗한 척하고 있잖아요.”“진여훈 씨, 당신 이 여자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이런 빌어먹을 여자에게 홀린 거예요?”천지현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면서 하정원을 바라봤다.“빌어먹을, 벌써 진씨 집안을 손에 넣어서 자기편을 만들다니. 내가 보기엔 아마 할아버지와 손자의 시중을 드...”“짝!”천지현의 아버지가 천지현의 뺨을 때렸다. 천지현은 넋이 나갔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아빠?”천지현의 아버지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알고 있어?”진여훈의 앞에서 진여훈의 할아버지까지 입에 담다니, 만약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의 성격을 봤을 때 천지현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천지현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전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이에요. 쟤 같은 여자는...”“하정원이 어떤 여자인데요? 그리고 천지현 씨도 그렇게 떳떳하지는 않을 텐데요.”진여훈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천지현은 두려움이 들었다.“무... 무슨 뜻이죠?”진여훈은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은 김씨 집안 큰 도련님 김경원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 같네요. 그는 이미 결혼했어요.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 뿐이죠.”“말도 안 돼요!”천지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거짓말하지 말아요. 경원 씨에게 여자가 많다고 해도 그는 솔로예요. 저야말로 그의 떳떳한 여자친구라고요!”진여훈은 소매를 느슨하게 만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