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용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해 보이는 경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덮개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그만들 해. 사적으로만 이야기하고 너희들끼리 알고 있으면 돼. 그 일은 그때 하 회장님이 덮으라고 했으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젊은 경찰 두 명이 입맛을 다셨다. 말하지 못하게 하니 나가서 일이나 할 수밖에.문밖에 서 있던 사람은 진작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하정원은 유치장 안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가 특별히 유명한 호텔에서 직접 배달시킨 음식이었다. 특수상황이라 경찰도 그녀가 배달시키는 걸 허용했다.“이런 곳에서 잘도 음식이 넘어가나 보네.”진여훈의 목소리에 그녀가 움직임을 멈췄다.그녀는 머리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뭘 먹든 내 마음이야. 경찰도 괜찮다는데 당신이 뭔 상관이야.”“상관한 적 없어.”진여훈이 무덤덤하게 말했다.“할아버지가 당신 데리고 나오래.”하정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철 어르신은 확실히 그녀한테 너그럽고 잘 대해주었다.하지만 그녀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손주며느리로 들어온 후 진 씨 가문의 얼굴을 깎은 적이 한두 번이 아녔는데 할아버지는 종래로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어느새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밤안개에 휩싸인 네온사인이 몽롱하게 빛을 발했다.차가운 겨울바람도 안개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하정원이 그와 함께 경찰서에서 나왔다. 보디가드가 차를 몰고 오자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백미러로 진여훈의 눈치를 살피던 보디가드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제야 차를 몰기 시작했다.강유이는 강성연과 함께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정원이 집으로 들어오자,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갔다.“숙모 돌아오셨어요?”하정원이 미소 지으며 유이의 볼을 꼬집었다.“나 걱정했어?”유이가 답했다.“엄청나게 걱정했어요.”강성연은 강유이와 하정원이 가깝게 지내는 걸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아이의 숙모였으니까.하정원은 강성연과 처음 대면하는 거라 어색하게 인사했다.
반지훈이 피식 웃었다.“강제로 여훈이를 장가보낸 게 그런 이유였다니. 그거 여훈이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니에요.”진철이 반지훈을 지그시 바라보며 태연하게 답했다.“두 사람이 이혼하겠다고 하면 나도 반대하지 않을 거다. 사실 난 정원이를 내 양손녀로 더 들이고 싶었어.”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진여훈이 때마침 그 말을 듣게 되었다.진철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 역시 예전에 정략결혼의 길을 걸어왔었다.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강제로 결혼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책임감은 누가 강요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압박 속에서 아내와 서로 존경하며 살아가기로 타협했다고 해도 연에 대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연은 그가 그녀를 가장 사랑했던 시기에 죽어버렸다.그녀가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잊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미련이 계속 남았다.당시 진철은 Y 국을 떠나면서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사람 마음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 응어리째 남아버린 그 미련은 어떡해도 지워지지 않았다.진철이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때가 되면 하 회장과 아이들 이혼에 관한 얘기를 나눌 생각이야. 다만 이 일로 정원이의 평판이 더 나빠질까 걱정이구나. 난 다른 사람들이 그 아이한테 문제가 있어서 이혼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아.”“그렇기 때문에 정원 씨를 진 씨 가문의 양손녀로 들이겠다고 하셨던 거였네요.”강성연은 진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확실히 하정원은 군오에서 소문이 좋지 않았다. 또한 각종 스캔들까지 있어서 만약 이 시기에 이혼까지 하면 외부 사람들이 그녀의 품행이 좋지 않아 진 씨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그런데 만약 진 씨 가문에서 그녀를 양손녀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달라진다.반지훈이 진여훈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그럼, 우리 동생 의견을 한번 들어보죠.”진철과 강성연은 그제야 진여훈을 발견했다.
강시언이 손에 들고 있던 연줄을 진여훈에게 건네고 해신과 유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하정원이 잠깐 당황하더니 팔짱을 끼고 줄을 풀고 있는 진여훈을 바라보았다.“당신은 왜 왔어?”“내가 우리 집에서 마음대로 다니는 것도 안 되나?”그가 너무 맞는 말만 하니 하정원이 반박하지 못했다.확실히 여긴 진여훈의 집이었다. 진여훈이 자기 집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걸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좋아. 그럼, 혼자 천천히 날려보든가.”그녀가 돌아가려는 걸 눈치챈 강유이가 얼른 소리쳤다.“숙모가 이대로 돌아가도 이따가 지면 숙모도 벌칙 받아야 해요.”사실 그들은 연날리기 내기를 하고 있었다. 더 높게 연을 띄우는 팀이 이는 걸로. 도중에 줄이 끊겨도 지는 걸로 쳤다.지는 팀은 이긴 팀의 소원을 들어줘야 했다. 이건 내기를 하기 전 그들이 합의하고 세운 규칙이었다.순간 당황한 하정원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그럼, 시언이 네가 다시 들어와.”강유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지금은 삼촌이 숙모랑 한 팀이잖아요.”“갑작스러운 팀원 교체는 받아들일 수 없어!”“안 돼요.”강유이가 이어서 말했다.“한 팀에서 한 사람만 기권할 수 있어요. 큰오빠가 이미 기권했으니 숙모 혼자 남았잖아요. 마침 빈 자리를 삼촌이 채워줬으니 내기는 계속 진행 중인 거예요.”시언과 해신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우기는 거라면 아무도 자신들의 동생을 이길 사람이 없었다.하정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어쩐지 이 세 아이가 합심해서 자신을 골탕 먹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곧바로 그녀는 자신의 느낌이 맞다고 확신했다.진여훈이 들고 있던 연줄이 갑자기 툭 하고 끊겨버린 것이다.강유이가 팔딱팔딱 뛰며 기뻐했다.“숙모팀 연줄이 끊겼어요. 숙모랑 삼촌이 졌어요!”하정원이 진여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나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다.“당신 일부러 그런 거지?”진여훈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였다.“내가 줄을 끊기라도 했어?”“그러니까 왜 갑자기 쓸데없이
“자, 아빠가 할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유이 넌 네 오빠들한테 가봐.”유이가 네 하고 답하고 서재를 나갔다.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두 오빠와 민서율이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깜짝 놀란 그녀가 물었다.“서율 오빠?”민서율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유이야. 나 너한테 줄 선물도 갖고 왔어.”“어떤 선물이에요?”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민서율을 향해 달려갔다.민서율이 그녀에게 선물 박스를 내밀었다. 유이가 웃으며 박스를 받아 곧바로 열어보았다.박스 안에는 핑크로 된 크리스털 팔찌가 들어있었다. 팔찌는 특별 주문된 것이었다.해신이 쳇 하고 혀를 찼다.“유이 주려고 특별히 선물까지 챙겨오다니. 우리들 건 없어?”민서율 이놈, 제법 머리 좀 굴렸나 본데!유이한테 잘 보이려고 기를 쓰는군!민서율은 해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지 웃으며 말을 이었다.“다른 사람들 것도 다 있어!”그가 경호원에게 선물 박스를 갖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세쌍둥이 중 누구 하나 빠짐없이 선물을 준비해 왔었다.“좋아. 우리 몫도 준비한 걸 봐서 용서해 줄게.”해신이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선물을 받았다.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둘째 오빠,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어? 서율 오빠가 선물까지 줬잖아.”해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시험을 잘 쳐서 반에서 일 등 하면 네 말 들어줄게.”“진짜지?”“큰형이 보증하잖아. 진짜야.”“좋아.”강유이가 해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나 꼭 시험에서 일등 할 거니까. 두고 봐!”해신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거꾸로 일등이나 하지 마.”그녀가 양팔로 허리를 짚으며 말했다.“그럴 일 없거든. 만만하게 보지 마!”-그날 저녁. 하 씨 가문 사람들이 진 씨 가문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하진석과 한혜숙은 반지훈과 진철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식사 중 한혜숙이 웃으며 말했다.“반지훈 대표님과 사모님이 이
이건 난륜 아닌가?진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아이들의 이혼에 대해 자네들과 상의하려 하는 게 아니겠나?”그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하 씨 집안 사람들은 상당히 괴이하게 느껴졌다.그들이 아는 진철은 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런 말에 하진석은 동의할 수 없었다.“어르신, 어르신께서 지금 저희 두 가문이 맺은 혼인을 애들 장난으로 취급하시는 겁니까?”진철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잠깐 침묵했다.“하 회장, 우리 두 가문 사이의 관계는 굳이 혼인으로만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네.”그가 하정원을 돌아보았다.“그래서 내가 정원이를 내 손녀로 들이고 싶다는 거네.”“지금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정인 줄은 아시는 겁니까.”하진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살필 겨를도 없이 말을 이었다.“어르신이 직접 들인 손주며느리를 손녀로 삼겠다뇨. 부부에서 남매가 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랍니까!”진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그러면, 자네 딸이 계속 염문설을 일으키고, 자네한테 반항하며 살아가게 하는 게, 그게 자네가 바라는 모습인가!”하진석이 그대로 얼어붙었다.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하진석 자네는 너무 고집스러워.”“그해에 벌어졌던 비극을 벌써 잊은 건가? 자네 딸이 어쩌다 오늘 이 모양이 되었는데!”하정원이 경악하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떻게 그 해 일에 대해 알고 있지?하진석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두 가문이 함께한 식사 자리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곧이어 하진석이 떠났고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강성연과 반지훈이 방으로 돌아왔다. 방금 그들의 대화에서 하진석이 그 해 일을 엄청나게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훈 씨.”그녀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저 정말 너무 궁금해요. 어떡하죠?”반지훈이 피
“나를 원망하느냐?”하정원이 두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할아버님께서 저를 아껴주신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할아버님을 원망하지는 않아요.”그녀가 일부러 온갖 염문설을 뿌리고 다니며, 진 씨 가문의 체면도 깎아내렸는데도 진철은 한 번도 그녀를 나무란 적이 없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녀가 진철한테 미안한 점이 더 많았다.“원망하지 않는다니 다행이구나.”진철이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걱정 말거라. 너희들이 이혼해도 너는 계속 내 손녀야. 너랑 여훈이 부부가 될 수 없다면, 남매로 지내는 건 괜찮지 않겠어?”하정원이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사실… 다 제 잘못이에요. 할아버님, 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진여훈이 그녀를 싫어한 이유는, 그녀를 정말로 소문 속 그런 여자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거리낌 없이 그 많은 황당한 일을 벌일 수 있었다.그렇게 너무 자기 생각만 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자신한테 베푼 친절을 간과하고 있었다.확실히 그녀가 너무 이기적이었다.오늘날까지 할아버지가 그녀를 걱정하는 모습에 그녀는 더욱 자괴감이 들었다.“나도 안다. 이번 일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할아비는 그저 너희들이 나처럼 살지 말길 바랐을 뿐이야.”그는 개탄했다. 젊었을 적 그 역시 이익을 탐했고 야심도 있었다.하지만 연이 죽고 난 뒤 그는 다 부질없음을 깨달았다.그는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연의 복수를 위해 살았었다. 그러면서 황당하고 어리석은 일을 벌이기도 했었다.그 사이에 복수의 대상을 잘못 고른 적도 있었다.하진석은 하정원의 아버지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질렀지만, 하정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원망할 뿐 복수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걸 선택했다.이렇게 가슴 아픈 아가씨를 그가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하정원이 서재에서 나왔다. 고개를 드니 진여훈이 복도에 서 있었다.그
그가 운전석을 툭툭 치며 기사한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하정원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차가 그녀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갔다.하정원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뭐 그쪽 차 아니면 타고 갈 차가 없는 줄 알아!”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사실 연락처에는 몇 명 없었다.그녀의 차는 집 차고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혼 수속하러 나왔기에 지갑도 두고 온 상태였고 텔레뱅킹도 되지 않았다. 진여훈이 자신을 버리고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그녀는 이혼 후 진 씨 놈이 더 이상 자신한테 못되게 굴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허, 완전한 착각이었다.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결국 자기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몰래 숨어 그들이 법원에서 나온 장면부터 그녀가 그에게 버려지는 장면까지 속속들이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다음날.진철이 책상 위로 잡지를 내던졌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이게 네가 나한테 약속했던 거냐.”진여훈이 잡지를 바라보았다. 그건 바로 어제 그들이 법원에서 이혼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 장면이었다.두 사람은 우선 이혼 사실을 공개하지 않기로 할아버지와 약속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장면이 파파라치한테 찍혔을 줄이야. 이제 언론에서도 그들의 이혼 사실을 추측하고 있었다.그가 입술을 깨물더니 조금 있다 입을 열었다.“어차피 언론에서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는데, 지금 밝혀진다고 해서 뭐 다를 게 있겠어요.”할아버지가 하정원을 손녀로 들인다는 사실도 어차피 공개해야 할 일이었다.진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너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만, 너 정원이 생각은 해 봤어?”“내가 너희 이혼을 허락한 건 맞지만, 분명 정원이를 손녀로 삼겠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잖니. 그런데 이게 뭐냐. 언론에서 이 사진을 근거로 정원이한테 어떤 기사를 쏟아낼지 생각이나 해 봤어?”하정원과 그의 이혼이 사실로 밝혀지면 언론에서는 하정원의 행실이 나
강성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두 가문이 억지로 사돈을 맺고 정원 씨가 진 씨 가문으로 들어왔어. 너는 정원 씨가 너희 집안의 얼굴에 먹칠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외부인들은 너희 진 씨 가문을 동정하고 있어. 그런 여자를 집에 들였다고.”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진짜 온갖 비난을 듣고 있는 사람은 하정원 씨 한 사람뿐이었다고. 재밋거리가 필요한 사람들도 오직 정원 씨만 비웃었어. 근데 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 왜냐면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원했던 결과였으니까.”“결혼하기 전부터 정원 씨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자기 명성을 떨어트리기 시작했어. 너는 이 결혼이 불만족스럽고,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면 정원 씨는 이 결혼에 만족했을까? 이제와서 두 사람이 이혼하게 된 게, 어쩌면 정원 씨가 애초에 가장 바라고 있던 결과일 수도 있어.”“확실히 가장 멍청한 건 정원 씨가 맞아. 네 말 그대로야. 정원 씨의 염문설은 그녀 스스로가 쌓아 올린 거지. 본인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지만 말이야. 그런데 과연 세상 어떤 여자가 정말로 자기 명성이 더럽혀지는 걸 신경 쓰지 않을까?”만약 그녀가 하정원의 과거를 몰랐다면, 그녀 역시 하정원이 왜 기를 쓰고 자기 명성을 떨어트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정원은 자기 명성을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었다.단지 그녀의 심장이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도 같이.그녀의 아버지는 분명 그 일의 주모자이자, 이 비극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게 만들어 놓고, 여전히 그녀에게 각종 혼인을 주선해 주었다.어쩌면 사실 그녀는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약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죽어버렸을 수도 있었다.아무도 그녀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모른다. 단지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그녀를 나쁜 여자로 단정 지어 버렸다.그녀를 둘러싼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