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용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해 보이는 경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덮개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그만들 해. 사적으로만 이야기하고 너희들끼리 알고 있으면 돼. 그 일은 그때 하 회장님이 덮으라고 했으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젊은 경찰 두 명이 입맛을 다셨다. 말하지 못하게 하니 나가서 일이나 할 수밖에.문밖에 서 있던 사람은 진작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하정원은 유치장 안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가 특별히 유명한 호텔에서 직접 배달시킨 음식이었다. 특수상황이라 경찰도 그녀가 배달시키는 걸 허용했다.“이런 곳에서 잘도 음식이 넘어가나 보네.”진여훈의 목소리에 그녀가 움직임을 멈췄다.그녀는 머리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뭘 먹든 내 마음이야. 경찰도 괜찮다는데 당신이 뭔 상관이야.”“상관한 적 없어.”진여훈이 무덤덤하게 말했다.“할아버지가 당신 데리고 나오래.”하정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철 어르신은 확실히 그녀한테 너그럽고 잘 대해주었다.하지만 그녀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손주며느리로 들어온 후 진 씨 가문의 얼굴을 깎은 적이 한두 번이 아녔는데 할아버지는 종래로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어느새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밤안개에 휩싸인 네온사인이 몽롱하게 빛을 발했다.차가운 겨울바람도 안개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하정원이 그와 함께 경찰서에서 나왔다. 보디가드가 차를 몰고 오자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백미러로 진여훈의 눈치를 살피던 보디가드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제야 차를 몰기 시작했다.강유이는 강성연과 함께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정원이 집으로 들어오자,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갔다.“숙모 돌아오셨어요?”하정원이 미소 지으며 유이의 볼을 꼬집었다.“나 걱정했어?”유이가 답했다.“엄청나게 걱정했어요.”강성연은 강유이와 하정원이 가깝게 지내는 걸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아이의 숙모였으니까.하정원은 강성연과 처음 대면하는 거라 어색하게 인사했다.
반지훈이 피식 웃었다.“강제로 여훈이를 장가보낸 게 그런 이유였다니. 그거 여훈이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니에요.”진철이 반지훈을 지그시 바라보며 태연하게 답했다.“두 사람이 이혼하겠다고 하면 나도 반대하지 않을 거다. 사실 난 정원이를 내 양손녀로 더 들이고 싶었어.”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진여훈이 때마침 그 말을 듣게 되었다.진철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 역시 예전에 정략결혼의 길을 걸어왔었다.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강제로 결혼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책임감은 누가 강요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압박 속에서 아내와 서로 존경하며 살아가기로 타협했다고 해도 연에 대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연은 그가 그녀를 가장 사랑했던 시기에 죽어버렸다.그녀가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잊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미련이 계속 남았다.당시 진철은 Y 국을 떠나면서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사람 마음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 응어리째 남아버린 그 미련은 어떡해도 지워지지 않았다.진철이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때가 되면 하 회장과 아이들 이혼에 관한 얘기를 나눌 생각이야. 다만 이 일로 정원이의 평판이 더 나빠질까 걱정이구나. 난 다른 사람들이 그 아이한테 문제가 있어서 이혼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아.”“그렇기 때문에 정원 씨를 진 씨 가문의 양손녀로 들이겠다고 하셨던 거였네요.”강성연은 진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확실히 하정원은 군오에서 소문이 좋지 않았다. 또한 각종 스캔들까지 있어서 만약 이 시기에 이혼까지 하면 외부 사람들이 그녀의 품행이 좋지 않아 진 씨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그런데 만약 진 씨 가문에서 그녀를 양손녀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달라진다.반지훈이 진여훈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그럼, 우리 동생 의견을 한번 들어보죠.”진철과 강성연은 그제야 진여훈을 발견했다.
강시언이 손에 들고 있던 연줄을 진여훈에게 건네고 해신과 유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하정원이 잠깐 당황하더니 팔짱을 끼고 줄을 풀고 있는 진여훈을 바라보았다.“당신은 왜 왔어?”“내가 우리 집에서 마음대로 다니는 것도 안 되나?”그가 너무 맞는 말만 하니 하정원이 반박하지 못했다.확실히 여긴 진여훈의 집이었다. 진여훈이 자기 집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걸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좋아. 그럼, 혼자 천천히 날려보든가.”그녀가 돌아가려는 걸 눈치챈 강유이가 얼른 소리쳤다.“숙모가 이대로 돌아가도 이따가 지면 숙모도 벌칙 받아야 해요.”사실 그들은 연날리기 내기를 하고 있었다. 더 높게 연을 띄우는 팀이 이는 걸로. 도중에 줄이 끊겨도 지는 걸로 쳤다.지는 팀은 이긴 팀의 소원을 들어줘야 했다. 이건 내기를 하기 전 그들이 합의하고 세운 규칙이었다.순간 당황한 하정원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그럼, 시언이 네가 다시 들어와.”강유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지금은 삼촌이 숙모랑 한 팀이잖아요.”“갑작스러운 팀원 교체는 받아들일 수 없어!”“안 돼요.”강유이가 이어서 말했다.“한 팀에서 한 사람만 기권할 수 있어요. 큰오빠가 이미 기권했으니 숙모 혼자 남았잖아요. 마침 빈 자리를 삼촌이 채워줬으니 내기는 계속 진행 중인 거예요.”시언과 해신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우기는 거라면 아무도 자신들의 동생을 이길 사람이 없었다.하정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어쩐지 이 세 아이가 합심해서 자신을 골탕 먹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곧바로 그녀는 자신의 느낌이 맞다고 확신했다.진여훈이 들고 있던 연줄이 갑자기 툭 하고 끊겨버린 것이다.강유이가 팔딱팔딱 뛰며 기뻐했다.“숙모팀 연줄이 끊겼어요. 숙모랑 삼촌이 졌어요!”하정원이 진여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나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다.“당신 일부러 그런 거지?”진여훈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였다.“내가 줄을 끊기라도 했어?”“그러니까 왜 갑자기 쓸데없이
“자, 아빠가 할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유이 넌 네 오빠들한테 가봐.”유이가 네 하고 답하고 서재를 나갔다.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두 오빠와 민서율이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깜짝 놀란 그녀가 물었다.“서율 오빠?”민서율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유이야. 나 너한테 줄 선물도 갖고 왔어.”“어떤 선물이에요?”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민서율을 향해 달려갔다.민서율이 그녀에게 선물 박스를 내밀었다. 유이가 웃으며 박스를 받아 곧바로 열어보았다.박스 안에는 핑크로 된 크리스털 팔찌가 들어있었다. 팔찌는 특별 주문된 것이었다.해신이 쳇 하고 혀를 찼다.“유이 주려고 특별히 선물까지 챙겨오다니. 우리들 건 없어?”민서율 이놈, 제법 머리 좀 굴렸나 본데!유이한테 잘 보이려고 기를 쓰는군!민서율은 해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지 웃으며 말을 이었다.“다른 사람들 것도 다 있어!”그가 경호원에게 선물 박스를 갖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세쌍둥이 중 누구 하나 빠짐없이 선물을 준비해 왔었다.“좋아. 우리 몫도 준비한 걸 봐서 용서해 줄게.”해신이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선물을 받았다.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둘째 오빠,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어? 서율 오빠가 선물까지 줬잖아.”해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시험을 잘 쳐서 반에서 일 등 하면 네 말 들어줄게.”“진짜지?”“큰형이 보증하잖아. 진짜야.”“좋아.”강유이가 해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나 꼭 시험에서 일등 할 거니까. 두고 봐!”해신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거꾸로 일등이나 하지 마.”그녀가 양팔로 허리를 짚으며 말했다.“그럴 일 없거든. 만만하게 보지 마!”-그날 저녁. 하 씨 가문 사람들이 진 씨 가문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하진석과 한혜숙은 반지훈과 진철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식사 중 한혜숙이 웃으며 말했다.“반지훈 대표님과 사모님이 이
이건 난륜 아닌가?진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아이들의 이혼에 대해 자네들과 상의하려 하는 게 아니겠나?”그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하 씨 집안 사람들은 상당히 괴이하게 느껴졌다.그들이 아는 진철은 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런 말에 하진석은 동의할 수 없었다.“어르신, 어르신께서 지금 저희 두 가문이 맺은 혼인을 애들 장난으로 취급하시는 겁니까?”진철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잠깐 침묵했다.“하 회장, 우리 두 가문 사이의 관계는 굳이 혼인으로만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네.”그가 하정원을 돌아보았다.“그래서 내가 정원이를 내 손녀로 들이고 싶다는 거네.”“지금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정인 줄은 아시는 겁니까.”하진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살필 겨를도 없이 말을 이었다.“어르신이 직접 들인 손주며느리를 손녀로 삼겠다뇨. 부부에서 남매가 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랍니까!”진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그러면, 자네 딸이 계속 염문설을 일으키고, 자네한테 반항하며 살아가게 하는 게, 그게 자네가 바라는 모습인가!”하진석이 그대로 얼어붙었다.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하진석 자네는 너무 고집스러워.”“그해에 벌어졌던 비극을 벌써 잊은 건가? 자네 딸이 어쩌다 오늘 이 모양이 되었는데!”하정원이 경악하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떻게 그 해 일에 대해 알고 있지?하진석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두 가문이 함께한 식사 자리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곧이어 하진석이 떠났고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강성연과 반지훈이 방으로 돌아왔다. 방금 그들의 대화에서 하진석이 그 해 일을 엄청나게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훈 씨.”그녀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저 정말 너무 궁금해요. 어떡하죠?”반지훈이 피
“나를 원망하느냐?”하정원이 두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할아버님께서 저를 아껴주신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할아버님을 원망하지는 않아요.”그녀가 일부러 온갖 염문설을 뿌리고 다니며, 진 씨 가문의 체면도 깎아내렸는데도 진철은 한 번도 그녀를 나무란 적이 없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녀가 진철한테 미안한 점이 더 많았다.“원망하지 않는다니 다행이구나.”진철이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걱정 말거라. 너희들이 이혼해도 너는 계속 내 손녀야. 너랑 여훈이 부부가 될 수 없다면, 남매로 지내는 건 괜찮지 않겠어?”하정원이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사실… 다 제 잘못이에요. 할아버님, 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진여훈이 그녀를 싫어한 이유는, 그녀를 정말로 소문 속 그런 여자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거리낌 없이 그 많은 황당한 일을 벌일 수 있었다.그렇게 너무 자기 생각만 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자신한테 베푼 친절을 간과하고 있었다.확실히 그녀가 너무 이기적이었다.오늘날까지 할아버지가 그녀를 걱정하는 모습에 그녀는 더욱 자괴감이 들었다.“나도 안다. 이번 일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할아비는 그저 너희들이 나처럼 살지 말길 바랐을 뿐이야.”그는 개탄했다. 젊었을 적 그 역시 이익을 탐했고 야심도 있었다.하지만 연이 죽고 난 뒤 그는 다 부질없음을 깨달았다.그는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연의 복수를 위해 살았었다. 그러면서 황당하고 어리석은 일을 벌이기도 했었다.그 사이에 복수의 대상을 잘못 고른 적도 있었다.하진석은 하정원의 아버지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질렀지만, 하정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원망할 뿐 복수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걸 선택했다.이렇게 가슴 아픈 아가씨를 그가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하정원이 서재에서 나왔다. 고개를 드니 진여훈이 복도에 서 있었다.그
그가 운전석을 툭툭 치며 기사한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하정원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차가 그녀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갔다.하정원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뭐 그쪽 차 아니면 타고 갈 차가 없는 줄 알아!”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사실 연락처에는 몇 명 없었다.그녀의 차는 집 차고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혼 수속하러 나왔기에 지갑도 두고 온 상태였고 텔레뱅킹도 되지 않았다. 진여훈이 자신을 버리고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그녀는 이혼 후 진 씨 놈이 더 이상 자신한테 못되게 굴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허, 완전한 착각이었다.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결국 자기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몰래 숨어 그들이 법원에서 나온 장면부터 그녀가 그에게 버려지는 장면까지 속속들이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다음날.진철이 책상 위로 잡지를 내던졌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이게 네가 나한테 약속했던 거냐.”진여훈이 잡지를 바라보았다. 그건 바로 어제 그들이 법원에서 이혼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 장면이었다.두 사람은 우선 이혼 사실을 공개하지 않기로 할아버지와 약속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장면이 파파라치한테 찍혔을 줄이야. 이제 언론에서도 그들의 이혼 사실을 추측하고 있었다.그가 입술을 깨물더니 조금 있다 입을 열었다.“어차피 언론에서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는데, 지금 밝혀진다고 해서 뭐 다를 게 있겠어요.”할아버지가 하정원을 손녀로 들인다는 사실도 어차피 공개해야 할 일이었다.진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너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만, 너 정원이 생각은 해 봤어?”“내가 너희 이혼을 허락한 건 맞지만, 분명 정원이를 손녀로 삼겠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잖니. 그런데 이게 뭐냐. 언론에서 이 사진을 근거로 정원이한테 어떤 기사를 쏟아낼지 생각이나 해 봤어?”하정원과 그의 이혼이 사실로 밝혀지면 언론에서는 하정원의 행실이 나
강성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두 가문이 억지로 사돈을 맺고 정원 씨가 진 씨 가문으로 들어왔어. 너는 정원 씨가 너희 집안의 얼굴에 먹칠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외부인들은 너희 진 씨 가문을 동정하고 있어. 그런 여자를 집에 들였다고.”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진짜 온갖 비난을 듣고 있는 사람은 하정원 씨 한 사람뿐이었다고. 재밋거리가 필요한 사람들도 오직 정원 씨만 비웃었어. 근데 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 왜냐면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원했던 결과였으니까.”“결혼하기 전부터 정원 씨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자기 명성을 떨어트리기 시작했어. 너는 이 결혼이 불만족스럽고,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면 정원 씨는 이 결혼에 만족했을까? 이제와서 두 사람이 이혼하게 된 게, 어쩌면 정원 씨가 애초에 가장 바라고 있던 결과일 수도 있어.”“확실히 가장 멍청한 건 정원 씨가 맞아. 네 말 그대로야. 정원 씨의 염문설은 그녀 스스로가 쌓아 올린 거지. 본인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지만 말이야. 그런데 과연 세상 어떤 여자가 정말로 자기 명성이 더럽혀지는 걸 신경 쓰지 않을까?”만약 그녀가 하정원의 과거를 몰랐다면, 그녀 역시 하정원이 왜 기를 쓰고 자기 명성을 떨어트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정원은 자기 명성을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었다.단지 그녀의 심장이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도 같이.그녀의 아버지는 분명 그 일의 주모자이자, 이 비극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게 만들어 놓고, 여전히 그녀에게 각종 혼인을 주선해 주었다.어쩌면 사실 그녀는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약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죽어버렸을 수도 있었다.아무도 그녀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모른다. 단지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그녀를 나쁜 여자로 단정 지어 버렸다.그녀를 둘러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