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의정은 당황했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서도준의 그윽한 눈빛을 마주했다.그녀는 심호흡했다.“서도준 씨... 농담이죠?”그와 정략결혼이라니?몇 번 만난 적 없는, 알게 된 지 보름도 안 된 남자와 말인가?서도준은 그녀를 응시하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결혼한 뒤에 제가 곽의정 씨의 자유를 제한할 일은 없을 거예요. 곽의정 씨는 곽의정 씨가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곽의정은 한참을 침묵했다.“거래를 말하는 건가요? 허울뿐인 결혼 같은 거 말이에요.”서도준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것은 묵인이었다.곽의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저죠?”서도준은 시선을 거두어들인 뒤 와인잔을 바라봤다.“당신은 결혼 때문에 속박되는 게 싫고 전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삶을 싫어해요. 굳이 선택하려면 곽의정 씨가 가장 잘 맞을 것 같아서요.”곽의정은 침묵했다.형식적인 결혼은 각자의 수요를 위해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그저 혼인신고만 하는 것이었다.곽의정은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목표가 있었다. 그녀는 여자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도 멋지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곽의정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서도준 씨는 언젠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 그녀가 당신이 이미 결혼했다는 걸 신경 쓰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아요?”서도준은 흠칫했다.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는 술잔을 들고 천천히 마셨다.“만날 리 없어요.”곽의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는 걸까?그는 고개를 돌려 곽의정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곽의정 씨가 앞으로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제게 얘기하면 돼요.”곽의정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흔들었다.“전 사업가의 딸이에요. 형식적인 결혼이라고 해도 제가 얻어야 하는 이익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곽의정은 아무
곽 회장은 신문을 펼치다 말고 멈춰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건 왜 물어?"곽의정은 밥을 우물우물 먹으며 말했다."만약 제 정략결혼 상대가 그 사람 아들이라면 어떡해요?"곽 회장은 잠깐 멈칫하더니 쾅 소리 나게 신문을 밥상에 내려놓았다."너 미쳤니?"곽 부인은 잔뜩 놀란 모습이었다. 회사 일에 대해 잘 몰랐던 그녀는 다른 일보다 곽의정이 스스로 '정략결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는 게 더 놀라웠다.곽의정은 곽 회장이 서현식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씨 집안과 정략결혼을 하게 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그녀도 서도준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르는 남자와 결혼할 바에는 서도준이 나을 것 같았다."제가 자기랑 결혼하면 서인그룹 주식의 5%를 주겠다고 했어요. 솔깃하지 않아요?"곽 회장의 안색은 급격하게 변했다."누가 그러더냐?"곽의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당연히 서인그룹 도련님이죠."곽 회장은 심호흡을 했다. 만약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일로 숨이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의정아, 혹시 나랑 장난하는 거니?""아닌데요.""네... 네가 서인그룹의 도련님을 만났다고?"곽의정은 곽 회장의 질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되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모든 사람이 서도준을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서인그룹의 주식을 주겠다고 했으니, 그녀는 당연히 서인그룹의 도련님일 것으로 생각했다.곽 회장은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의정아, 서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은 네가 절대 만날 수 없는 곳에 있어. 서 회장의 아들 서강우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어 외부인과 접촉한 적 없거든. 너 사기꾼한테 당한 건 아니니?"곽의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같은 시각, 서씨 저택."쓸모없는 자식! 어쩌면 사람 한 명 잡아 오는 일도 못 하는 거냐!"서현식은 경호원을 향해 사정없이 발길질했다. 바닥에 쓰러진 경호원은 머리를 숙인 채로 말했다."죄송합니다, 회장님
서도준의 목소리에 정신 차린 곽의정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앞으로 걸어가서는 팔짱을 꼈다."서도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저한테 거짓말할 수가 있어요?""거짓말이요?"서도준은 옷매무새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 곽의정을 바라봤다."제 아버지 말로는 서 회장님한테 아들이 한 명밖에 없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정신병 때문에 밖에 나오지도 못하는 아들이요."서도준은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뭘 웃어요?"곽의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서도준은 느긋하게 커피를 따르며 대답했다."거짓말 아니에요.""그럼... 도준 씨 혹시 병이 있었어요?"곽의정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서도준은 커피를 들고 소파로 가서 앉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밝혀진 아들이 한 명이니까요."곽의정은 서도준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서 회장을 입에 담을 때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돈이 많을수록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돈 많은 남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니 서현식에게 숨겨둔 아들 한 명쯤 있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도준 씨 서자에요?"곽의정은 말을 뱉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그녀의 질문은 과하게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서도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커피를 마시고는 대답했다."혹시 서자는 싫어요?"곽의정은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테이블을 짚으며 말했다."제 답을 듣기 전에 도준 씨의 목적부터 알려줘요.""저는 다른 세력의 힘을 빌려 권력을 얻고 싶어요. 답이 되었나요?"서도준은 곽의정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서도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커피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서도준의 몸에서는 담배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곽의정은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담배 냄새로 가득한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키스하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갑자기 떠오른 키스라는 단어에 곽의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서현식이 왜 서강우의 양육권을 포기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매년 병원에 어마어마한 돈을 보내준다고 했다.서강우는 병원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아무리 환자라고 해도 서현식의 아들이니 자연히 잘 보이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정신병은 선천적이었고 가끔 정상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발작을 시작하기만 하면 통제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반지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하나뿐인 아들이 그렇게 된 건 안타깝군.""회장님한테는 아들이 한 명 더 있습니다.""아들이 한 명 더 있다고?""네, 사모님 말로는 서 회장님의 사생활이 아주 문란했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임신했을 때도 밖에서 여자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몰래 아들까지 낳았다고 합니다. 불륜녀가 건강한 아들을 믿고 사모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고 얼마나 치를 떠시던지... 아무튼 회장님은 사모님 인맥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하고 있는지라 결국 돈으로 무마했다고 합니다. 아들 중에서도 호적상 아들을 더 신경 쓰지, 밖에서 낳은 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요."반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무실에서 나온 연희승은 강성연과 지윤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성연 씨, 오셨어요. 대표님은 사무실에 계세요."강성연은 지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반지훈은 곧바로 자료를 내려놓고는 팔을 벌려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오늘 안 바빠?"강성연은 반지훈의 목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네. 곧 있으면 아빠 생신이라 오늘은 선물 고르러 가려고요."반지훈은 잠깐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예전에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잖아?""이번 해는 생일 연회를 좀 크게 열 거예요. 선물도 조금 다르게 준비하려고 시간을 통째로 비웠어요.""우리 성연이 착하네."강성연은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가 저를 친 자식처럼 사랑해 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이번 생일 연회도 제가 직접 준비할 거예요."반지훈은 강성연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연희승은 안경을 다시 썼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지윤은 또다시 손을 뻗어 안경을 벗기려고 했지만, 연희승이 잽싸게 피해갔다."그만 해요, 사모님도 계시잖아요.""연 비서님 안경 낀 모습 진짜 못생긴 거 알아요?""..."강성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지윤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지윤 씨, 연 비서님이 아무리 만만해도 괴롭히면 안 되죠. 이러다 우등생에서 진짜 찐따가 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네, 아가씨."연희승은 지금의 상황에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강성연과 지윤은 AM그룹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강성연은 지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지윤 씨, 연 비서님이 그렇게 싫어요?"지윤은 멈칫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저 연 비서님 안 싫어하는데요.""그럼 왜 자꾸 괴롭혀요? 저는 당연히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싫어하는 게 아니라 재미있어서 그러는 거예요."지윤은 연희승과 투덕거리는 것이 아주 재미있었다. 연희승은 성격이 좋아서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화를 내지 않았고, 모든 힘을 다해 반항한 적도 없었다. 이건 그녀가 예전에 괴롭혔던 사람들이 준 적 없는 느낌이었다.X를 따라 메트로폴리탄에 가기 전, 지윤은 생계를 위해 일을 가리지 않고 받았다. 그중에는 목숨을 건 일도 물론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자주 괴롭힘을 당했고, 반대로 복수를 하기도 했다. 싸움이 나는 것은 밥을 먹는 것처럼 흔한 일이었다.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침착한 성격이 필요하다는 도리를 지윤은 X를 만난 후에야 깨달았다. 연희승은 싸움질할 줄을 몰랐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그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단지 차분한 성격 덕분에 마음이 넓어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이것이야말로 반지훈이 오랜 시간 동안 연희승을 중요시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모든 사람에게 인내심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연희승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지윤은 한계를 존중하는
곽의정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저랑 이율이 어떻게 같아요? 이율은 남자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저는 아니라고요.""너...!""여보, 의정이를 탓하지 마요. 늦게 결혼하는 것도 나쁜 건 아니잖아요. 결혼은 맞는 사람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해요."곽 부인의 다정한 말에 곽 회장은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렸다."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아이라면 사기도 당하지 않았겠지.""아빠, 그건 사기가 아니에요.""사기가 아니라고? 그럼 아직도 그 사람이 서인그룹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서현식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곽 회장은 여전히 서인그룹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이율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서인그룹 아들이요?"곽의정은 이율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가 만난 사람은 서 회장님의 숨겨진 아들이에요. 그리고 아주 솔깃한 조건을 걸어줬죠."곽 회장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결혼이 장난인 것 같으냐?""결혼은 그냥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사는 거잖아요. 아빠가 저한테 결혼을 재촉하는 것도 남자를 찾으라는 말 아니에요? 제 요구에 맞는 남자를 대충 찾아서 살아보겠다는데, 뭐가 문제에요?""곽의정!"곽 회장은 언성을 높였다.이율은 불안한 듯 강현을 바라봤고, 강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안심시켰다.이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곽 회장은 한참 듣고 있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래. 내가 바로 회사로 갈게."전화를 끊은 곽 회장은 머리를 돌리며 강현에게 말했다."너희들은 계속 얘기하고 있어. 난 급한 일이 생겨 이만 가봐야겠다."강현이 머리를 끄덕였다.곽의정은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이율이 강현의 귀가에 대고 무언가 말했다. 그러자 강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가봐요."이율은 후다닥 쫓아가 방 앞에서 그녀를 불러세웠다. 곽의정은 문틈에 기대며 물었다."왜?""방금 한 말... 무슨 뜻이에요? 언니 누구랑 결혼해요?"곽의정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싱긋 미소를 지
곽 회장은 비서에게 나가보라는 눈치를 주고 소파로 와서 앉았다. 비서는 바로 사무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우리 회사와 합작하겠다고 허풍 친 사람이 자네였군. 자네 서현식 회장과 어떤 사이지?"곽 회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을 보고 서도준도 숨김없이 대답했다."저는 서현식 회장님의 아들입니다.""서 회장의 아들은 서강우 한 명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네는 뭐지?"서도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회장님은 서자를 외부에 밝힐 분이 아니시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요."곽 회장은 약간 넋이 나갔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서자를 좋게 보지 않는다. 대단한 권세의 자식이라고 해도 평생 어둠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게 서자의 운명이었다.호적상 아들이 정신적 질병으로 인해 가업을 물려받지 못하게 되니 숨겨둔 자식을 찾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곽 회장이 알기로 서현식은 서자에게 가업을 물려줄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설사 그럴 의향이 있다고 해도 지금 와서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곽 회장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서자가 나와 합작을 운운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한테는 서인그룹을 통제할 만한 권력이 없을 텐데. 서 회장의 성격으로 힘들게 쌓아온 업적을 어울리지 않는 사람한테 주지도 않을 것 같단 말이지.""저는 서 회장님한테서 아무것도 받지 않을 겁니다. 비열한 방식으로 운영하는 회사는 준다고 해도 싫습니다. 화성의 용호 제3구역이 조사받기 시작한 시점에 회장님이 저를 찾기 시작한 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회장님은 본인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쓸 사람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곽 회장은 멈칫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서도준을 바라봤다."네가 그래도 꽤 똑똑한 모양이구나. 만약 서인그룹을 대표해서 온 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나와 합작하겠다는 것이냐? 그리고 서인그룹 지분의 5%는 어떻게 의정이한테 준다는 말이냐?""지분이라면 양도할 수도 있으니까요.""양도라...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회사의 지분을 내 딸한테 넘기는 건, 책임
"맞아요. 예전과 다른 선물을 고르는 게 여간 일이 아니네요. 한참 고민하다가 골동품 매장에 와봤어요."라민희는 강성연과 몇 마디 주고받다가 눈치껏 먼저 떠났다. 젊은이들끼리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말이다. 김아린과 강성연은 근처의 카페로 와서 디저트를 먹으며 얘기를 나눴다."나 오늘 그 사람을 본 것 같아."김아린이 물었다."누구?""서도준 씨."오래간만에 서도준이라는 이름을 들은 김아린은 약간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서도준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어디서 봤는데?""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갔어. 어쩐지 낯익다 했더니 서도준 씨였더라고."강성연은 김아린을 바라보고 피식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왜? 설마 아직도 마음이 있어?""아니거든! 괜히 천광이 귀에 들어가게 하지 마. 그 질투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어.""아니면 됐어. 난 또 잊지 못하고 슬퍼할 줄 알았네.""말도 안 돼!"솔직히 말하자면 김아린은 서도준에게 약간의 아쉬움 정도만 남아있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사람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슬픔이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천광 씨는 서도준 씨에 대해 알고 있어?""당연히 모르지. 내가 말했겠어?""그럼 빨리 말해. 서울이 얼마나 좁은지 몰라? 괜히 나중에 마주쳤다가 오해가 생길 바에는 먼저 말하는 게 낫지."강성연은 김아린이 과거를 완전히 내려놓기를 바랐다. 청춘 시절의 아쉬움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골드 룸살롱도 그렇고, 서도준도 그렇고, 김아린이 아직도 마음 한쪽 구석에 아쉬움을 품고 있다는 것을 강성연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전부 과거에 불과했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천광이었다.서도준도 서울에 살고 있는 모양이었기 때문에 마주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그래서 강성연은 과거를 들추면서까지 김아린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김아린이 집으로 돌아오자 아주머니는 구천광이 위층에서 아이를 보고 있다고 했다. 서재에 들어가 보니 그는 구희나를 안은 채로 의자에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