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정 뒤에 있던 남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흰색 랜드로버를 보고 상대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닫고 덤벼들지 못했다. 이곳은 다른 사람의 구역이었고 혹시라도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들은 다친 남자를 일으킨 뒤 떠났다.뒷배가 사라지자 자신감도 하락했는지 정수정도 황급히 도망쳤다.곽의정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고 남자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괜찮으세요?”곽의정은 그를 보고 당황했다.“당신은...”익숙한 카페 매니저였다.그는 웃으며 대답했다.“사장님이랑 마침 이곳에 있었거든요. 밖으로 나오다가 우연히 봤어요.”흰색 랜드로버에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편해 보이는 정장에 안에는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이너가 얇은 탓에 몸 선이 뚜렷하게 보였는데 균형 잡힌 탄탄한 근육은 전혀 과하지 않았다. 과했다면 슬림한 핏의 옷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고 너무 말라도 예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그는 딱 좋은 편이었다.그는 스타일리시하고 우아하며 매너도 있었다.“괜찮아요?”곽의정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웃어 보였다.“괜찮아요. 두 분을 만나서 다행이에요.”그녀에게서 술 냄새를 맡은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음주운전은 안 돼요. 어디 살아요? 제가 가는 길에 바래다 드릴게요.”그는 말하면서 차 키를 매니저에게 건넸다.매니저는 키를 받아 들고 랜드로버로 돌아갔다.곽의정은 조금 전 일 때문에 술이 반쯤 깼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는 운전해서 끌고 가야 했지만 음주운전으로 걸리면 큰일이라 곽의정은 동의했다.차 안에 앉으니 차 내부가 넓었다. 아주 비싸고 고급스러운 차인 듯했다.“고마워요. 남강로 곽씨 별장까지 데려다주면 돼요.”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인 뒤 차를 타고 떠났다.가는 길에 곽의정은 술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 남자는 곽의정에게 뚜껑을 따지 않은 물을 건넸다.“물 마시고 정신 좀 차려요.”“고마워요.”물을 건네받은 곽의정은 뚜껑을 열었다.“그런데 당신도 마침 이곳에
반지훈은 화성에서 사업상의 이해관계가 없고 서인그룹 회장은 화성에 졸개가 꽤 많고 인맥도 넓기에 자기 구역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그가 부리는 수작들은 대부분 여자를 이용한 것이었는데 많은 사업가가 그의 함정에 당했었다. 사실 그는 남자들의 욕망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남자가 회식 자리에서 뭘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었다.철저히 준비해서 사람의 경계를 늦춘 뒤에 기회를 틈타는 것이다.반지훈은 들고 있던 찻잔을 살살 흔들며 물결치는 찻물에 시선을 돌렸다.“화성 10대 도박장이 전부 그 사람 거야?”희승이 대답했다.“주식은 있는데 평소에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고가 터져도 바로 발뺌할 수 있는 거죠.”반지훈은 코웃음 쳤다.“할 일을 찾아줘야겠네.”그에게까지 손을 뻗어 없애려고 하다니, 정말 그가 화성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카페는 평소와 다름없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곽의정은 문을 열고 들어간 뒤 평소처럼 라테 한 잔 포장해달라고 했다.매니저가 앞치마를 두른 채 휴게실에서 나왔다. 점잖아 보이는 남자인데 사람을 때릴 때는 가차 없었다.그는 카운터로 향했다.“커피 포장하러 오셨어요?”“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계산했고 카페 안을 힐끗 보고 말했다.“오늘 장사 잘되네요.”매니저는 그녀에게 영수증을 건넸다.“이 근처 대학생들이 방학이라서 그래요.”영수증을 받은 곽의정은 옆에서 잠시 기다렸다. 몇몇 여학생들이 주문을 한 뒤 사장님은 안 계시냐고 물었다.매니저가 그들에게 뭐라고 했는데 곽의정은 듣지 못했다. 그녀는 이 카페에 여학생들이 대부분이고 커플도 몇 쌍 있는 걸 발견했다.카페 인테리어는 사진을 찍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약속을 잡기에 좋았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그리고 또 사장이 잘생기고 성숙하며 차분한 남자라 나이가 어린 여학생들은 우아하고 준수한 어른 남자들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서도준은 위층에서 내려왔다. 그는 검은색의 주
“여자들은 술자리에 적게 나가는 게 좋아요. 안 나갈 수가 없다면 최대한 적게 마시든가 해요.”서도준은 잠깐 뜸을 들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마시는 척하는 것도 안 될 건 없죠.”곽의정은 멈칫하더니 피식 웃었다.“서도준 씨는 술 안 마시려고 마시는 척만 해본 적 있나 봐요?”마시는 척만 한다는 건 혼란한 틈을 타서 술을 피하는 스킬로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의 술잔에 있는 술을 다른 술잔으로 옮겨 담거나 쏟아버리는 것이었다.물론 친구들끼리 술을 마실 때는 가능하지만 회식 자리에서는 좋지 않았다. 발각되지 않으면 좋은 일이지만 혹시라도 발각된다면 상대방은 성의가 없다고 생각해 거래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서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전 남자니까 회식 자리에서 술을 얼마나 마시든 손해 볼 건 없죠.”곽의정은 당황했다. 예전에 성운테크에 있을 때는 다들 그녀가 성운테크 딸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녀에게 깍듯했다.그러나 신분이나 배경이 없는 여직원들은 달랐다. 여자들은 회식 자리에서 남자보다 훨씬 더 손해를 봤다. 상사가 술을 덜 마시도록 막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고객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함께 술을 마셔줘야 하니 말이다.건강을 해치는 건 물론이고 취하면 성희롱당할 때도 있었다. 요즘에는 여직원이 술을 덜 마실 수 있게 도와주는 상사가 정말 드물었다.곽의정은 그를 보고 말했다.“사장님은 여자들에게 다 이렇게 다정한가요?”서도준은 솔직하게 말했다.“여성을 존중하는 건 남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존중과 다정은 서로 다른 뜻을 가지고 있었다.여성을 존중한다는 건 개인적 수양일 뿐이고, 여성에게 다정하다는 건 오해를 불러일으켜 애매한 관계로 발전하기 쉬웠다.다정한 남자는 보통 모든 여자에게 잘해주기 때문에 거리감이 모호했고, 여성을 존중하는 남자는 그보다 조금 더 거리감이 확실했다.곽의정은 오래 있지 않고 이내 카페를 떠났다.이틀 뒤, 화성 용호 3대 그룹이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터졌다.
그는 수단이 교활하여 사람들의 미움을 샀지만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에게서 이득을 본 동시에 약점을 잡혔기 때문이다.그런데 똑같은 수단으로 반지훈을 상대하려 하다니, 그야말로 자기 무덤 자기가 판 셈이었다.반지훈은 하 대표를 보고 말했다.“용호 제3구역은 화성에서 아주 값진 곳이에요. 하 대표님은 그쪽과 분쟁을 겪고 있으니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할지 말지를 잘 고려해 보세요.”하 대표는 침묵했다.삼십 분 동안 얘기를 나눈 뒤 반지훈은 레스토랑에서 떠났다. 희승은 차를 문 앞에 세웠고 반지훈은 차에 올라탔다.“서인그룹은 지금 어떤 상황이야?”희승이 대답했다.“화성 쪽과의 거래를 끊고 있어요. 서인그룹 회장은 그쪽에서 몇천억에 달하는 이익을 봤으니 일에 휘말릴까 봐 아주 두려울 거예요.”희승이 물었다.“대표님, 하 대표님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반지훈은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글쎄.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지. 용호 제3구역이 사업을 독점했고 그 탓에 지난 몇 년 동안 억눌려 있었는데 그가 이 기회를 놓칠 것 같아?”희승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서인그룹 회장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반지훈을 건드리다니, 반지훈이 오랫동안 조용히 있어 스스로 총구 앞에 선 셈이었다.-저녁 열 시, 카페는 문을 닫았고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어와 서도준을 찾았다.서도준이 휴게실에서 나왔다. 이제 막 일을 마친 그는 느긋하게 거두었던 소매를 내리며 평온하게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서 회장님이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서도준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마무리를 책임진 직원에게 먼저 퇴근하라고 했고 직원이 떠나자마자 말했다.“지금 시간 없습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그에게 다가갔다.“도련님, 가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저희를 탓하지 마세요.”서도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그들이 손을 쓰려고 하는데 서도준이 테이블 위 술병을 쥐고 상대방의 머리를 가
그는 두 문을 닫았다.“이해관계라는 건가요?”그는 고개를 돌려 곽의정을 바라보았다.“이 세상에 영원한 이익은 없어요.”곽의정은 대답하지 않았다.서도준은 돌아서서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절 도와 정리 좀 해주실래요?”곽의정은 고개를 돌려 엉망이 된 바닥을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도 정리하지 못한 컵들이 있는 걸 본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서도준 씨는 손님에게 청소까지 부탁하나요?”그는 카운터로 돌아갔다.“지금 곽의정 씨는 손님이 아니고 전 사장님이 아니에요.”달리 말한다면 이미 퇴근했으니 사장과 고객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곽의정은 그를 도와 테이블 위 컵을 치웠다. 비록 집에 도우미가 있었지만 컵을 씻는 것쯤은 어려운 것 없었다.그녀는 싱크대를 닦는 서도준을 바라봤다.“조금 전 당신을 찾아온 그 두 사람, 당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던데요?”서도준은 멈칫하더니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전 도련님이 아니에요.”“서도준 씨는 비밀이 많네요.”서도준은 그녀를 바라봤다.“저한테 관심 있어요?”곽의정은 흠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비밀스러운 사람일수록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죠.”“전 그런 호기심인 줄 알았는데.”“네?”곽의정은 이해하지 못했고 서도준은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청소를 마친 뒤 서도준은 벽 등만 남기고 메인 등은 껐다. 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왔다.곽의정은 손목을 주물렀다. 설거지하는데 손목이 이렇게 저릴 줄은 몰랐다. 서도준은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감사의 의미로 내일 한턱 낼게요.”곽의정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네온사인 아래 윤곽이 흐릿해졌다가 뚜렷해지기를 반복했다.그녀는 잠깐 당황하더니 다급히 시선을 옮겼다.“내일요?”서도준이 말했다.“네.”“그래요.”곽의정은 차 앞에 서서 차 문을 열었고 뭔가 떠올린 건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저 내일 일곱 시에 퇴근해요.”곽의정은 차를 타
곽의정은 우산을 서도준 쪽으로 기울였다.“그냥 혼자 써요.”서도준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난 괜찮아요.”차에 앉은 뒤 곽의정은 그가 운전석에 오르는 걸 보았다.“비도 오는데 레스토랑에서 기다리지 그랬어요.”직접 그녀를 마중 나오기까지 하다니, 그의 뜻을 알 수 없었다.“제가 한턱 내는 거잖아요.”그는 안전벨트를 했다.“성의가 있어야죠.”곽의정은 그를 바라보며 아무 얘기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비록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지만 편안하고 조용했다.직원이 그들을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직원은 미소 띤 얼굴로 곽의정에게 메뉴판을 건넸고 곽의정은 그것을 건네받은 뒤 서도준을 바라봤다.“뭐 추천하는 거 있어요?”그는 곽의정을 바라보며 웃었다.“곽의정 씨 먹고 싶은 거 먹어요.”곽의정은 직원의 소개를 들은 뒤 음식들을 시켰다.직원이 떠난 뒤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이곳은 조용하네요.”다른 가게와 달리 시끌벅적하지 않았다.서도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여기 와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했어요.”“서도준 씨는 이곳에 사람을 많이 데려왔었나 보죠?”곽의정은 약간 의아한 얼굴로 서도준을 바라봤다.서도준은 그렇다고 했다.“손님, 동료, 상사.”그는 차를 따른 뒤 곽의정을 향해 웃었다.“그들도 들어가나요?”곽의정은 흠칫하더니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도준 형, 정말 형이네.”룸 밖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이 레스토랑의 직원인 듯했는데 다가와서 서도준에게 안부를 묻다가 곽의정에게 시선을 옮겼다.“여자친구야?”찻잔을 들었던 서도준의 손이 멈칫했다.“친구야.”곽의정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서도준의 어깨를 두드렸다.“난 형이 연애하는 줄 알았잖아. 그것보다 왜 갑자기 일을 그만둔 거야? 2년만 더하면 부국장이 될 수 있었을 텐데.”서도준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그쪽 일이 많이 위험하긴 하지. 스파이 일은 어렵잖아.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곽의정은 그의 얘기에 깜짝 놀랐다. 그가 스파이었다니 정말 의외였다.스파이는 위험한 직업이긴 했다. 발각되면 목숨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처음 서도준을 만났을 때 서도준은 우아하고 점잖으며 매너가 좋아서 그냥 평범한 카페 사장인 줄 알았다.어젯밤 그가 술병으로 남자의 머리를 가격하는 걸 봤을 때, 그는 정말 무자비했다.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는 표정으로 깔끔히 처리했으니 말이다.남자는 곽의정을 보며 무던하게 웃었다.“전 조금 전에 도준이 형 여자친구인 줄 알았어요. 도준이 형이 밥 사주려고 데려온 사람들은 전부 남자였거든요.”“여자는 없었나요?”“형한테 무슨 여자가 있겠어요.”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걱정했다.“스파이를 할 때 자기 목숨도 지킬 수 없는 사람이 남을 신경 쓸 새가 있겠어요? 저 직업은 감정이 생기면 약점이 되거든요.”“도준이 형은 오랫동안 스파이를 했어요. 적들이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유가 바로 도준이 형이 신경 쓸 것이 없었기 때문이에요.”곽의정은 말없이 그의 얘기를 들었다.그 말은 사실이었다. 스파이라는 직업은 특별했다. 감정에 얽매이게 되면 쉽게 일을 망치게 되고 쉽게 산만해지며, 만약 적에게 노려진다면 위협이 된다.서도준은 통화를 마친 뒤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씩 웃었다.“형 돌아왔으니까 전 이만 일 보러 갈게요.”그는 고개를 돌려 곽의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가 나가자 직원이 음식을 들고 문 앞에 섰다. 남자가 직원에게 뭐라고 얘기하자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음식을 다 올린 뒤 와인을 한 병 건넸다.분명히 남자의 뜻이었다.곽의정은 술병을 들고 봤다.“당신 친구 세심하네요.”서도준은 그녀를 보고 말했다.“아까 그 녀석이 뭐라고 했어요?”곽의정은 술을 따랐다.“당신 일을 얘기했죠.”서도준이 침묵하며 뭔가 생각하는 듯하여 곽의정이 해명했다.“제가 물은 거예요. 궁금해서요.”서도준은 웃었다.“곽의정 씨는 제가 궁금한가 봐요?”곽의정이 반문했다.“궁
곽의정은 당황했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서도준의 그윽한 눈빛을 마주했다.그녀는 심호흡했다.“서도준 씨... 농담이죠?”그와 정략결혼이라니?몇 번 만난 적 없는, 알게 된 지 보름도 안 된 남자와 말인가?서도준은 그녀를 응시하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결혼한 뒤에 제가 곽의정 씨의 자유를 제한할 일은 없을 거예요. 곽의정 씨는 곽의정 씨가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곽의정은 한참을 침묵했다.“거래를 말하는 건가요? 허울뿐인 결혼 같은 거 말이에요.”서도준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것은 묵인이었다.곽의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저죠?”서도준은 시선을 거두어들인 뒤 와인잔을 바라봤다.“당신은 결혼 때문에 속박되는 게 싫고 전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삶을 싫어해요. 굳이 선택하려면 곽의정 씨가 가장 잘 맞을 것 같아서요.”곽의정은 침묵했다.형식적인 결혼은 각자의 수요를 위해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그저 혼인신고만 하는 것이었다.곽의정은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목표가 있었다. 그녀는 여자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도 멋지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곽의정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서도준 씨는 언젠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 그녀가 당신이 이미 결혼했다는 걸 신경 쓰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아요?”서도준은 흠칫했다.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는 술잔을 들고 천천히 마셨다.“만날 리 없어요.”곽의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는 걸까?그는 고개를 돌려 곽의정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곽의정 씨가 앞으로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제게 얘기하면 돼요.”곽의정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흔들었다.“전 사업가의 딸이에요. 형식적인 결혼이라고 해도 제가 얻어야 하는 이익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곽의정은 아무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