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훈이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강성연은 유리에 비친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얼른 몸을 돌렸다. 그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미소 지었다.“당신이 어쩐 일이에요?”그가 외투를 의자 등받이에 걸치며 손에 든 도시락을 흔들어 보였다.“우리 여보한테 도시락 배달 왔지.”강성연이 커피를 내려놓더니 그를 향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반지훈은 있는 힘껏 달려와 안긴 그녀 덕분에 뒤로 주춤거렸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그렇게 기뻐?”“남편이 직접 도시락 배달을 왔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그에게서 도시락을 건네받은 그녀는 얼른 테이블로 가서 도시락 통을 열어보았다.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반지훈이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로 자신의 턱을 기대며 말했다.“나 오늘 출장 가야 돼.”그 말에 강성연은 순간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어디로 출장 가요?”“잊었어? 한지욱이 레이문 프로젝트를 나한테 넘겼잖아.”반지훈이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었다.“그 일로 화성에 감찰하러 가게 되었어.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강성연은 그제야 레이문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그녀가 몸을 돌려 반지훈의 목을 감싸 안았다.“잘 다녀와요. 제 생각 하는 거 잊지 말고요.”그리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자기 몸도 잘 돌봐야 돼요 알았죠? 아파서도 안 되고, 힘들게 일해서도 안 돼요. 안 그럼 나 화낼 거예요.”반지훈이 쿡하고 웃으며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알겠어요. 우리 여왕님.”강성연이 발꿈치를 들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반지훈이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더욱 깊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반지훈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가씨, 밖에 웬 노인분이 찾아오셨어요.”강성연이 실눈을 떴다. 그녀는 누군지 짐작이 갔다.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윤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지윤이 말하기를 그들을 접대실로 모시려했는데 거절했다
“네가 나서지 않았다고? 그럼 지금 네가 강현을 꼬드긴 게 아니라는 거냐?”강 노부인은 강성연이 강현을 꼬드겼다고 확신했다. 예전의 강현은 절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었다.강성연이 노부인 앞에 서서 피식 웃었다.“할머니, 사람은 원래 변하기 마련이에요. 왜 그런 생각은 안 하세요? 강현이 왜 진성에 있는 강 씨 가문을 떠나서 독립했는지.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노부인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처음에 강현이 서울로 가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 모두 동의했었다. 그들은 강현이 강성연을 찾아가는 게 나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을 떠난 그가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줄을 몰랐다.그러니 그녀는 강성연이 그를 꼬드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쓸데없는 말 하지 말거라. 너랑 엮여서 좋은 꼴 나는 걸 못 봤어. 경고하는데 넌 이제 시집간 몸이니 더 이상 우리와 한 가족이 아니다. 우리 강 씨 집안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어. 이제 강현이도 사업에 성공했으니 더 이상 그 아이한테 신경 쓰지 말거라!”노부인이 친척 둘과 함께 돌아섰다.강성연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레절래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강현은 이율을 회사 밑에까지 바래다주었다. 이율이 안전벨트를 풀며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강현이 그녀를 붙잡았다.이율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이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그녀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며 얼굴이 또다시 새빨갛게 익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그녀가 물었다.“참 오늘 아침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혹시 아버님을 놀래 킨 건 아니겠죠?”강현은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걱정하는 모습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그럴 리가요. 전 이율 씨가 그렇게 용감하게 달려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그는 겁이 많고 담이 작은 그녀가 방 안에 숨어서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이율이 시선을
곽의정은 동영상을 저장했다.“와, 엄청난 사기극을 발견했어. 다른 자식의 아이를 데리고 내 매부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다니!”“당신 매부가 누군데 그러는 거야? 미쳤어?”정수정은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 쪽으로 걸어와 휴대폰을 빼앗으려고 했다. 곽의정은 재빨리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내 매부가 바로 네가 말하던 강현이야.”곽의정은 정수정의 멱살을 잡으며 싸늘하게 말했다.“같은 여자로서 여자들 체면 좀 살려줄 수 없어? 당신처럼 밖에서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봐.”“너——”“내가 뭘? 왜 말은 더듬고 그래. 알려줄게, 난 너희들처럼 사지가 멀쩡한데 남자 지갑에서 어떻게 돈을 홀려낼까 생각만 하는 여자들을 제일 싫어해. 너 거지야?”정수정은 표정이 어두워졌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다른 손님들도 모두 그녀들을 바라보았다.이때 커피숍 매니저가 걸어왔다.“고객님, 죄송합니다. 저희 사장님께서 고객님들을 환영하지 않으신다고 하네요. 나가주십시오.”곽의정이 자신을 가리키며 뭐라 말하려고 하자 매니저가 재빨리 해명했다.“고객님 아니고 저분들만 나가면 됩니다.”정수정은 너무 화가 났다.아까 전에 곽의정한테 욕을 먹고 지금 커피숍에서 쫓겨나게 되자 참을 수 없었다.“무슨 뜻이죠? 저희도 같은 손님인데 왜 저희만 쫓아내는 거예요?”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사장님께서 두 분이 저희 커피숍에서 어떻게 남자의 돈을 홀려낼까 토론하고 계시니 저희 커피숍 남자 고객님들의 지갑을 위해 출입을 금지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주위 손님들이 모두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웃었다.정수정과 함께 있던 친구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정수정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정수정의 친구가 가방을 가지고 커피숍을 나갔다.정수정은 친구가 떠난 걸 보고 그들을 한번 노려본 후 함께 밖으로 나갔다.곽의정은 고개를 돌려 매니저를 바라보았다.“이 가게 사장님은 정말 유머러스하시네요. 한 번 만나보고 싶어
남자가 담담하게 웃었다.“고객님 동생은 이런 언니가 있어서 정말 좋겠어요.”“뭘요, 저희는 그렇게 친하지 않아요.”곽의정은 고개를 숙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전 회사에 가봐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가게 점원이 테이블을 정리할 때 명찰 하나를 발견했다.“사장님, 이건 아까 그 손님이 놓고 가신 물건 같은데요.”남자는 명찰을 건네받은 후 흘깃 보았다.J 과학 기술 책임자 - 곽의정그 시각, 강 노부인은 유성 엔터 카운터에서 손자인 강현을 만나겠다고 했다. 하지만 카운터 직원은 일찍부터 통지를 받은 건지 사장님이 없다고 대답했다.강 노부인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강현이 어떻게 없을 수 있어? 여긴 내 손자 회사라고, 난 강현의 할머니야. 눈치 없는 것들, 얼른 강현 사무실로 안내해.”카운터 직원은 고개를 들었다.“할머니, 자꾸 소란을 피우시면 경호원을 부를 거예요.”강 노부인이 화를 내며 뭐라 하려고 하자 곁에 있던 친척이 말렸다.“아이참, 됐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 강현이 피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강현 집에 가서 기다리는 건 어때요? 어쨌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갈 거 아니에요?”강 노부인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카운터 직원을 흘겨본 후 몸을 돌려 떠났다.카운터 직원이 행정 부서에 전화를 하자 강현이 전화를 받았다. 카운터 직원의 말을 들은 강현은 가볍게 웃었다.“고생했어요.”통화가 끝난 후 카운터 직원은 강현을 위해 가슴 아파했다.“우리 새 사장님이 얼마나 좋은데, 왜 저런 막무가내인 할머니가 있는 거지?”다른 직원이 다가오며 말했다.“사장님 친척들이 찾아와서 자식들의 직업을 안배해달라고 부탁했대, 하지만 사장님이 거절하신 거야.”“정말 이상해, 왜 그 친척들을 도와줘야 할까? 전에 사장님도 친척들만 채용하다가 회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잖아. 난 지금 친척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쳐.”-저녁이 되었을 때, 강현은 퇴근한 후 이율을 데
그녀는 삶을 대하는 데 있어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손에 많이 넣었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었다. 사는데 지장이 없으면 그만이다.사람은 살면서 만족을 할 줄 알아야 한다.강현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와 함께 지낸 후, 그녀가 작은 일에도 만족해하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율은 특히 눈이 맑았다.그녀에게는 강현을 세속적인 잡념으로부터 떨쳐버리게 하는 일종의 순진함이 담겨 있다.많은 사람들은 직장에 출근한 후 순수한 자아를 보존하기 어렵다. 형형색색의 복잡한 사람들을 많이 접하면 자연스레 괴팍한 사람이 되기 마련이었다.하지만 이율은 줄곧 순수한 마음을 지켜냈다.늦은 시간이 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강현을 강 노부인과 친척들은 한참이나 기다렸다. 수십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신호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노부인은 하는 수없이 강역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역은 노부인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이 내 속을 긁네!” 아들과 손자에게 화가 난 노부인이 몸을 떨었다. 노부인의 친척들은 하루 종일 배까지 곯아가며 그녀와 함께 힘들게 뛰어다녔지만 결국 아무런 이득도 볼 수 없었다.“그러니까, 어르신 아들과 손자는 이제 어르신 말씀을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네요.”“그러게 말이에요. 남자들은 손에 권력만 쥐면 가족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더니. 강현이 그놈도 사장직을 달더니 이제 할머니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거죠.”친척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과 강현을 떠올렸다. 만약 두 사람 모두 노부인을 보살피지 않겠다고 하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이제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해변가.강현과 이율은 기다란 벤치에 앉아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은 치킨을 시키고 양손에는 꼬치구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후덥지근한 열기를 씻어주었다.이율은 맨발로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밟으며 끝없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직원들은 이미 퇴근했고 카페 사장 혼자 카운터에 앉아 가계부를 보고 있었다. 노란색의 은은한 조명 아래, 그는 짙은 회색의 셔츠에 재킷을 입고 있었고 소매는 살짝 걷워 피부가 드러났으며 손목시계 줄은 시장에서 보기 드문 가죽으로 된 레트로 스타일이었다.그가 입고 있는 옷들 중 럭셔리 브랜드는 거의 없었고 다 핸드메이드였다.심플하고 편안하며 청량해 보였다.그는 고개를 들며 서랍을 열었다.“전 당신이 놓고 간 물건을 가져가려고 오후쯤에나 올 줄 알았어요.”곽의정은 멋쩍은 표정으로 다가갔고 그가 사원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걸 보며 말했다.“정말 죄송해요. 이 가게에 물건을 두고 갔을 줄은 몰랐어요.”곽의정은 사원증을 줄곧 가방 안에 넣고 꺼낸 적이 없는 걸로 기억했다. 설마 계산하려고 지갑을 꺼낼 때 실수로 떨어뜨린 걸까?곽의정은 뭔가를 떠올렸다.“제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회사 프런트 데스크에 연락해서 번호 물어봤어요.”베이 테크놀로지 회사 직원이 오늘 마침 야근을 했으니 그는 정말 운이 좋은 편이었다.곽의정은 웃으며 사원증을 거두어들였다. 그녀의 시선은 선반 위 어긋난 것 같지만 가지런히 놓인 술병으로 향했다. 주방 벽도 온갖 칵테일로 가득 차 있었다.“카페를 차리신 분이 이런 것도 하세요?”그녀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오늘 낮에 왔을 때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남자는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돌렸다.그가 한쪽으로 걸어가 스위치를 누르자 벽장이 움직였고 곧 낮에 곽의정이 봤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곽의정은 넋이 나갔다.“미안해요. 바꾼다는 걸 깜빡했네요.”남자는 직접 만든 칵테일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저희 가게 직원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곽의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제가 당신 가게의 비밀을 알게 된 첫 번째 손님인가요?”남자는 천천히 술을 들이켜더니 눈꺼풀을 들고 소리 내어 웃었다.“그러네요.”“예전에 바 차린 적 있어요?”그는
강현의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할머니, 누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상관없지만 사람을 모함하지는 마세요.”하정화가 화를 내려는데 강역이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어머니, 현이가 여자친구랑 같이 어머니를 뵈러 왔잖아요. 왜 자꾸 화를 내고 그러세요?”여자친구?두 친척과 하정화의 시선이 이율에게로 향했다.이율은 그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며 그들에게 선물을 건넸다.“할머니, 몸이 편찮으셔서 입원하셨는데 화내지 마세요. 자주 화를 내시면 몸에 좋지 않아요. 이건 제가 할머니 드리려고 산 영양제예요.”하정화는 이율을 훑어봤다. 옷차림이 평범한 걸 보니 형편이 좋은 집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손자의 권세를 탐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너희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니?”이율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하정화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받지 않고 팔짱을 둘렀다.“우리 강씨 집안에 발을 들이려면 부잣집 딸이어야지. 너희처럼 평범한 여자아이들은 꿈도 꾸지 마. 우리 손자는 이제 막 사장이 되었어. 너 우리 손자 돈이랑 신분이 탐나서 그런 거지?”욕은 없었지만 듣기 거북한 얘기였다.이율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강현은 안색이 한없이 흐려졌다. 그는 이율이 들고 있던 영양제를 빼앗아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받기 싫으면 마세요. 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세요?”말을 마친 뒤 그는 이율의 손을 잡고 병실을 떠났다.“강현, 이 자식, 돌아와!”하정화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그녀의 손자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그녀는 화를 내며 테이블 위 물건들을 쓸어내렸다.“이 자식, 역시 강성연에게서 저 고약한 성질을 배운 거야.”“어머니.”강역은 심호흡하면서 볼을 부풀렸다.“제가 정말 어머니를 잘못 봤어요.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고집불통이네요. 강씨 집안이 불행해진 건 전부 어머니 탓이에요.”강역은 문을 열고 떠났다.하정화는 얼이 빠진 채로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강현은 이율을 데리고 차 앞으로
“할머니는 저한테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가르쳐준 적이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옳든 그르든 항상 절 도와주셨죠. 그래서 전 제가 큰 사고를 쳐도 할머니가 절 도와줄 거라고 굳게 믿었어요.”“그런데 제가 틀렸더라고요. 전 타락하고 나쁘게 변했어요. 심지어 밖의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도 몰랐죠. 만약 성연 누나가 아니었더라면 전 아마 천천히 심연으로 추락했을 거예요.”“저희 친누나 강예림 알아요? 누나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할머니에게 무시당했어요. 심지어 할머니의 고리타분한 교육 때문에 인생을 망쳤어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누나가 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도 할머니는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다른 친척들이 가족보다 훨씬 더 중요했거든요.”이율은 순간 심장이 저려와 두 손으로 강현의 뺨을 감싸 쥐었다.“당신 마음 이해해요.”강현은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더니 웃으며 말했다.“성연 누나가 말한 것처럼 이제 전 제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더는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꼭두각시가 될 필요가 없죠. 가족이라고 해도 제 인생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할 수 없어요.”점심이 되자 하정화는 아들과 손자에게 전화를 몇 통이나 걸었지만 그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당황한 하정화는 부랴부랴 병실을 나섰다.계단을 지날 때 그녀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쳐다봤다. 두 친척이 복도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저 늙은이 우리 앞에서만 체면을 차린다니까. 며칠 동안 늙은이 옆에서 분주히 뛰어다녔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잖아. 이 문제는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면서, 강현이 자기 말을 들을 거라고 하더니, 역시 그 말을 믿어서는 안 됐어.”두 친척은 의논한 뒤 짐을 정리하고 진성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막 몸을 돌린 그들은 하정화가 문가에 서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하정화는 두 친척이 자신의 뒷담화를 하자 기분이 씁쓸했지만 그와중에도 체면을 생각했다.특히 친정 쪽 친척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