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훈이 그녀를 감싸 안은 채 서재로 향했다. 그가 문을 꼭 닫았다.“수연의 과거를 알아냈어.”강성연이 놀라 물었다.“그 여자의 과거요?”반지훈이 책상 옆으로 다가가 서랍에서 웬 서류를 꺼내 올려놓았다.“이게 다 우리 아들 시언이 덕분이지.”강성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 위에 적힌 DNA 감정서를 확인한 그녀가 경악했다.수연과 서영유의 혈연관계 유전자 검사 결과가 95% 일치라니.“두 사람이 자매라고요?”반지훈이 담담하게 응하고 답했다.“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달라.”강성연은 순간 그녀가 전화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던 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녀의 어머니는 서영유 아버지의 상간녀였던 것이다!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수연은 이 일을 알고 있었군요.”그녀는 서영유와 자신들 자매가 이복자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반지훈이 자신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위에 적혀있는 날짜를 보면 알 수 있어.”강성연이 날짜를 확인했다. 감정서에 적혀있는 날짜는 이미 몇 년 전이었다. 그건 서영유가 수지로 위장하고 다녔던 시기와 겹쳤다.종이가 새것 그대로인 건 단지 감정서를 다시 복사했기 때문이었다.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희승이 들어왔다.“대표님, 사모님.”반지훈이 고개를 들었다.“어떻게 됐어.”희승이 답했다.“동료로 보이는 두 사람은 도망쳤고 수연도 몸을 숨겼습니다.”강성연이 입술을 깨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반지훈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그들은 서울을 벗어날 수 없어. 절대 오래 숨어있지도 못할 거야.”*외진 폐공장 안. 벽에 걸린 누런 전구만이 어스름하게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창밖에는 이미 지독한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리사는 테이프에 입이 막힌 채 붙잡혀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손발이 묶인 채 벽에 기대어 있는 아이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리사의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두 남자가 옆에 놓인 테이블에 마주 앉아 포커를 치면서 술을 마시
리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졌다. 마치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손발이 차가워졌다.정말로 자신이 유이를 불러내야 하나?하지만 그건 유이를 배신하는 일인데.유이는 자신의 친구지 않는가.리사가 고민하는 것을 눈치챈 수연이 아이를 놓아주었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싸늘한 눈빛으로 리사를 바라보았다.“싫어? 그럼 그 애 대신 네가 죽으려고?”그 말에 놀란 리사가 두려움에 울먹였다.“하지만… 하지만 전…”“하지만 뭐? 원래 우정이 가장 깨지기 쉬운 거야. 그 애는 귀하디 귀한 반 씨 가문의 아가씨라서 너보다 훨씬 목숨 값이 비싸. 그 애 대신 네가 죽는 게 수지가 맞는다고 생각해?”수연이 웅크려 앉아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꼬마 아가씨, 사람들은 말이야. 가끔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밑천을 끌어내 희생시키기도 해. 친구까지도 말이야.”“친구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면 그럼 네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넌 살고 싶어 아니면 죽고 싶어?”수연이 돌연 리사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말해!”두피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리사는 감히 큰 소리로 울지 못했다.“저… 전 살고 싶어요.”수연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이를 자신의 눈앞에까지 끌어당겼다.“당연히 그래야지. 내일 내가 널 학교에 데려다줄 거야. 그럼 넌 무조건 반지훈의 딸을 불러내와야 돼. 만약 도망치면.”수연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바로 죽여버릴 거야.”리사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수연이 돌아서서 두 남자를 바라봤다.“잘 감시해. 도망치려 들면 다리를 분질러버려.”두 남자가 씩 웃었다.“걱정 마세요. 절대 우리 손에서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요.”수연이 떠난 후 리사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낮은 소리로 울먹였다. 리사는 너무나 두려웠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갈등되었다.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리사는 강유이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무서웠다.창
강유이의 말에 리사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응…”리사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수연이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가 리사의 휴대폰을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한테 건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울고 있는 리사를 보더니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다독였다.“무서워하지 마. 너희들 친구잖아. 그러니까 네가 그 애를 배신해도 그 애는 너를 이해해 줄 거야.”곧이어 강유이는 리사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리사는 교문 앞 주차장에 있다고 말했다.교문 앞에까지 달려 나온 유이는 갑자기 보디가드들한테 제지당했다.“아가씨 어디 가시려고요?”“저 친구 데리러 갔다 올게요.”강유이가 보디가드를 밀어냈다.하지만 보디가드는 꿈쩍하지 않고 서서 유이의 앞길을 막았다.“나가실 수 없습니다. 대표님한테서 하교하기 전까지 절대 아가씨와 도련님더러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강유이는 화가 났다.“나 잠깐 내 친구 마중 나가는 것뿐이에요. 친구가 지각했는데 욕먹을까 봐 두렵다고 마중 나와 달랬거든요. 친구가 부탁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보디가드들이 여전히 비켜줄 의향 없이 자신을 막고 있자 강유이가 씩씩거리며 두 팔로 허리를 짚었다.“아저씨들 비키지 못해요?”고개를 숙이고 있는 보디가드들은 전혀 물러설 의도가 없었다.“아가씨, 저희들을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아니…”강유이가 뭐라 말하려고 하던 그때 강해신이 나타났다.“유이야.”유이가 해신이한테 쪼르르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오빠, 나 나가서 리사 데리고 와야 되는데 이 사람들이 못 가게 하잖아. 오빠가 설득 좀 해줘!”강해신이 미간을 찌푸렸다.“리사가 너한테 마중 나와 달라고 했으면 넌 여기서 그 애를 기다리면 되잖아. 왜 굳이 나가려고 해.”유이가 당황했다. 유이는 리사가 너무 걱정된 나머지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강유이는 얼른 리사한테 전화를 걸었다.그쪽에서 전화를 받자 유이가 말했다.“리사야, 나 지금 학교 문
강성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수고 많으셨어요.”경찰이 답했다.“별말씀을요. 이게 다 사모님 덕분입니다. 사모님께서 범인을 잘 설득해 주신 덕분에 자백을 받아냈으니까요.”강성연이 싱긋 미소 지었다. 설득보다는 협박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남자는 수연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강했다. 그는 수연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려고 했다.경찰서에서 나온 강성연이 강역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신의 큰아버지한테도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까.그녀가 막 차에 올라탔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강성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녀는 전화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강성연 씨, 당신 애들이 무사하니까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죠?”강성연이 이성을 유지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수연 씨,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당신들이 날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고 해서 내가 이대로 가만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강성연 당신이 자기 아이들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다른 집 부모들도 자기 아이의 목숨이 소중하겠죠. 안 그래요?”수연의 말에 강성연이 멈칫거렸다. 강성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또 무슨 수작이에요.”수연이 웃음을 터뜨렸다.“당신 딸의 친구가 지금 내 손에 있거든요. 이름이 뭐 더라. 리사 맞죠?”리사, 강성연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유이의 친구!’강성연이 입술을 깨물었다.“당신 지금 무고한 아이를 잡아두고 나한테 협박하는 거예요?”“그래요. 당신은 무고한 사람들한테 피해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하지만 어쩌죠? 당신 딸은 이미 피해를 준 것 같은데. 당신 딸이 자기 옷을 다른 애한테 빌려주지만 않았다면 이 애가 당신 딸로 오해를 받아서 나한테까지 올 일도 없었겠죠.”“이 아이가 죽게 되면 그건 당신들 때문이에요. 무고한 아이가 당신 딸 때문에 죽으면 앞으로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겠죠? 하하하.”강성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
리사의 참담한 모습을 본 순간 강성연의 안색이 삽시에 달라졌다.“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리사가 입은 치마에 피가 얼룩덜룩 묻어있었고, 파랗게 멍이 든 얼굴은 너무 부어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입가에도 핏자국이 있었다.리사는 고문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눈빛이 색채를 잃어 공허하고 암담했다.남자는 리사를 밀었고 리사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중심을 잃고 비참하게 바닥에 쓰러졌다.그 광경을 본 강성연은 이를 악물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부모라면 자기 자식이 소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 아이가 저렇게 학대를 당했다면, 엄마라면 당연히 미쳐 버릴 것이다.비록 리사가 그녀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강성연은 부모로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강성연의 눈빛에서 한기를 읽은 수연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사람처럼 더욱더 즐겁게 웃었다.“왜, 다른 집 아이인데도 마음이 아파요? 당신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수연은 강성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이 아이가 당신 딸 대신 고통받은 거잖아요.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 꼴이 된 건 당신 딸이었을 걸요.”강성연은 두 팔이 단단히 묶였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수연 씨, 수연 씨는 정말 미쳤네요.”“만약 서영유 언니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서영유 언니도 이랬을걸요?”수연은 들고 있던 담뱃불을 껐고 담배꽁초와 그 재가 강성연의 발치에 떨어졌다.“제가 서영유 언니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남자를 얻으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사람이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죠. 서영유 언니는 결국 죽을 운명이었던 거예요.”강성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연을 바라봤다.“그건 당신의 결말이기도 해요.”수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성연이 다리를 확 들어 올려 그녀에게 발길질을 했다. 강성연에게 걷어차인 수연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 남자가 제때 그녀를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넘어졌을 것이다.다른 남자가 강성연을 붙잡았는데 강성연은 박치기로
강성연은 수연을 향해 걸어갔다.수연은 웃음을 터뜨렸고 미친 사람처럼 들고 있던 리모컨을 높이 쳐들었다.“어디 더 다가와 봐요.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길 바란다면 말이죠.”강성연은 걸음을 멈추고 수연이 들고 있는 리모컨을 바라봤다. 강성연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제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제가 왜 당신에게 오라고 했겠어요? 전 사실 당신이 사람을 데리고 오든 데리고 오지 않든 걱정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반지훈 씨나 경찰을 불렀다고 해도 전 당신들 중 누구도 무사히 빠져나가게 두지 않았을 거예요.”수연은 의기양양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강성연은 심호흡하며 침착을 유지했다.“처음부터 같이 죽을 생각이었어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자신의 등 뒤 다친 두 남자를 가리켰다.“저 사람들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어요. 심지어 그중 한 명은 당신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죠. 저 사람들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요?”수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저 사람들이 죽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저 사람들이 절 위해 일하는 건 돈 때문이에요. 전 돈을 주고 저 사람들은 저 대신 죽는 거죠. 당연한 일 아니에요?”강성연은 차갑게 웃었다.“수연 씨, 당신은 서영유 씨가 당신보다 수단이 더 악랄하다고 했죠. 하지만 전 오히려 서영유 씨가 당신보다 마음이 약했던 것 같네요.적어도 서영유 씨는 반씨 집안 사람들에게는 양심 있는 사람이었어요. 무고한 사람을 해치기는 했지만 반지훈 씨와 자신을 길러준 반씨 집안 사람들에게 모질게 군 적은 없죠.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친언니인 수지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어머니도 당신의 약 때문에 죽었죠. 제 말이 맞나요?”수연은 점차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눈빛이 매서워졌다.“그것까지 조사해 냈네요.”“맞아요. 당신에 관한 일들은 다 알고 있어요.”강성연은 앞으로 걸었고 수연은 소리를 질렀다.“감히 오려고요?”하지만 강성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연은 뒷걸음질 쳤고 리모컨을
반지훈은 경찰과 얘기를 나눈 뒤 강성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확 끌어안으며 팔에 힘을 꽉 주었다.강성연은 그의 몸에서 나는 기분 좋은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웃었다.“당신이 제때 올 줄 알았어요.”반지훈은 강성연의 정수리에 힘껏 입을 맞췄고 소리 없이 웃으며 탓하는 어조로 말했다.“넌 언제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면 넌 지금쯤 죽었을 거야.”강성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난 당신이랑 해신이를 믿었어요.”수연을 찾아가는 길에 강성연은 반지훈의 전화를 받았고 강해신도 반지훈의 곁에 있었다.그들은 수연이 있는 곳의 범위를 확인했다. 네트워크만 있으면 그녀의 위치와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경로를 찾을 수 있었다.수연이 선택한 곳에 마땅한 도주 경로가 없다는 건 처음부터 도망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고, 그렇다면 아마 더욱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그것은 바로 동귀어진이었다.그래서 그들은 수연이 묵고 있는 호텔로 사람을 보냈고 수연이 해외에서 원격 조종이 가능한 폭탄을 구매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설치된 폭탄은 물리적 제어 시스템이 아니었고 리모컨으로 폭탄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필요했기에 그 구역의 네트워크를 차단하면 리모컨으로 폭탄을 터뜨릴 수 없었다.강성연은 반지훈과 강해신을 믿었기에 수연이 리모컨을 누르는 순간 폭탄이 터지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반지훈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정말 못 말린다니까.”집으로 돌아오니 강해신과 강유이가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해신과 강유이는 다급히 다가갔다.“엄마.”강유이는 강성연의 품에 안겼다.“미안해요, 엄마.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리사를 해쳤어요. 리사에게 제 옷을 입혀서는 안 됐어요.”사실 납치당했어야 할 아이가 자신이란 걸 알게 된 강유이는 무척이나 미안해했다. 강유이가 리사에게 옷을 빌려줘서 리사가 납치된 것이니 말이다.강성연은 손을 들어
그 말을 다시 되짚어 보니 등골이 오싹했다.다음 날, 희승은 반씨 저택으로 와서 반지훈에게 보고를 올렸다. 수연이 정신질환 진단을 받아 잠시 수감되었다고 말이다.강성연은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정신질환이요?”희승은 고개를 끄덕였다.“간헐적 인격인지 장애라고 하는데 정신 분열 증상 중 하나라고 해요.”강성연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반지훈은 강성연의 손등을 감싸며 희승을 바라봤다.“간헐적 정신질환자라고 해도 정신이 멀쩡할 때 범죄를 저질렀으면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형사 책임을 져야 해. 그건 피할 수 없는 거야. 만약 수연 씨가 정신질환을 핑계로 이 소송을 진행할 생각이라면 끝까지 상대해 주겠어.”희승이 말했다.“이미 변호사에게 그녀의 유죄 증거와 판결문을 제출하라고 공지했습니다.”희승이 떠난 뒤 강성연은 소파에 앉아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반지훈은 그녀를 안았다.“왜 그래?”“수연 씨가 한 수 남겨둘 줄은 몰랐어요.”수연은 정신질환을 핑계로 형사책임을 피하려는 걸까? 혹시라도 정말 그녀의 뜻대로 된다면 사회의 가장 큰 해악이 될 것이다.반지훈은 웃었다.“그 사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난 소송에서 져본 적이 없거든. 수연 씨가 정말 그런 질환이 있다고 해도 형사책임을 피하게 놔두지는 않을 거야.”강성연은 반지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뭔가 준비한 거예요?”반지훈은 강성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재판이 시작되면 알게 될 거야.”일주일 뒤, 재판 당일 좌석은 만원이었다. 강성연과 반지훈은 원고석에 앉고 맞은편에는 피고 측 변호인이 있었다.구의범도 현장에 있었는데 범죄 사건에 관한 결정을 책임졌다.수연은 네 명의 여경에 의해 법정으로 끌려왔다. 그녀는 수갑을 차고 있었고 머리는 엉망에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원고석에 앉아있는 강성연을 바라보더니 도발하듯 입꼬리를 차갑게 끌어올렸다.강성연은 허벅지에 올려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고 표정도 굳어졌다.판사는 손에 든 자료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