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지만 조한은 여전히 김신걸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동자는 어른이 봐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지만 눈앞의 이 아이는 무섭지도 않은지 여전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 눈싸움?’뒤에 서 있던 고건이 생각했다.“뭘 봐?”잠깐 동안의 대치가 이어지고 김신걸이 먼저 입을 열었다.차가운 목소리에 흠칫하던 조한이 곧 입을 삐죽 내밀었다.“아저씨 본 거 아니거든요!”‘하, 이 자식 성깔있네?’“엘리베이터는 어른이랑 같이 타야 하는 거 몰라?”아이라면 질색인 자신이 이름 모를 남자애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김신걸 스스로도 놀라웠다.“난 애 아니고든요!”‘하이고, 고집은…… 울리면 재밌긴 하겠네…….’김신걸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엘리베이터가 다시 도착하고 조한이 쪼르르 그쪽으로 달려갔다.엘리베이터에 탄 조한은 다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김신걸을 자세히 훑어보았다.잠시 후, 롤스로이스 문이 열리고 김신걸을 에스코트한 고건이 조수석에 탔다.“이쪽 토지는 고급 빌라로 다시 개발할 예정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무조건 성공할 거예요.”고건의 말에도 김신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백미러로 김신걸의 눈치를 살피던 고건이 문득 물었다.“대표님, 아이 좋아하십니까?”“아니, 완전 싫어해.”조한이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화장실을 찾아내 티슈를 뽑아내고 다시 돌아갈 무렵,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당황한 원유희와 여채아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쇼핑몰 CCTV라도 확인해 봐야 하나 하고 생각하던 그때 아이 한 명이 원유희의 다리에 퍽 하고 부딪혔다.“악!”제대로 넘어진 조한은 바닥에서 두 바퀴나 구른 뒤 벌떡 일어서긴 했지만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도 솜사탕과 티슈는 손에 꼭 들고 있었다.“조한아?”“엄마, 나 티슈 찾았어요!”조한이 전리품을 자랑하듯 티슈를 흔들었다.한걸음에 달려간 원유희가 조한을 꼭
조한이 팔을 끝까지 뻗어올렸다.‘도대체 얼마나 닮았길래 애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야? 누구지? 설마…… 김신걸? 김신걸이 여기로 온 건가?’“우리 아빠야?”“아빠는 하늘나라에 있어!”상우의 질문에 유담이 고개를 저었다.“엄마, 아빠 사진 보여준다면서요?”“아, 집에 가서 보여줄게.”조한의 질문에 흠칫하던 원유희가 말했다.“그리고 너희들이랑 닮았다는 그 남자…… 아빠 아니야.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다음에 혹시나 다시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는 거야. 특히 얼굴은 무조건 숨겨야 해. 알겠지?”“네…… 알겠어요…….”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엄마의 말이니 일단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는 삼둥이었다.집에 도착하고 삼둥이는 원유희 아빠라고 주장하는 사진속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복잡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채아가 원유희를 한쪽으로 끌어당겼다.“저 사람은 누구야?”“저도 몰라요. 사진관에서 대충 합성해 준 거라.”“정말…… 괜찮겠어?”“어쩔 수 없죠. 정말 김신걸 사진을 보여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이때 삼둥이가 사진을 들고 쪼르르 달려왔다.“엄마, 할미! 우리 이 사진 걸어둬요!”“매일 아빠한테 인사 할래요!”“향도 피울래요!”“풉, 안…… 안 그래도 돼.”‘향을 피운다니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날마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어휘력에 깜짝깜짝 놀라는 원유희였다.“어쨌든 그런 거 안 해도 괜찮아. 늦었다. 얼른 씻고 자자~”아이들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까 싶어 원유희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샤워를 마치고 원유희가 조한의 몸을 닦아주던 그때, 거울속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에 원유희가 웃음을 터트렸다.“거울속으로 들어가겠다. 뭘 그렇게 봐.”“엄마, 정말 닮았어!”“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긴 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정말 김신걸을 만난 걸까?’다음 날, 출근하기 전, 원
“하, 그래. 네가 무슨 염치로 말하겠어. 도둑X 주제에.”원수정이 표독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애초에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요.”이제 살인사건도 다 해결되었겠다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는 여채아가 단호하게 돌아서자 혼자 남은 원수정이 거칠게 핸드백을 바닥에 내던지며 화풀이를 대신했다.‘여채아의 유일한 약점이었는데…… 감옥에 처넣으면 영원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빨리 나온 거야?’사실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분명 유희가 김신걸 그 자식한테 부탁한 걸 거야…… 돈 없고 백 없는 걔가 무슨 수로 엄마를 빼냈겠어. 그런데…… 유희는 그렇다 치고 김신걸 그 자식이 부탁을 들어줬다고? 하, 내 마음대로 되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거지? 나도 이대로 참고는 못 살아.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며칠 뒤, 출근 중인 원유희는 고모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네? 밥이요?”“그래. 고모랑 단둘이서. 레스토랑 예약도 고모가 다 끝냈어.”“무슨 날이에요?”원유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우리 조카랑 밥 한 끼 할 수 있는 거지. 꼭 무슨 특별한 날이어야 하니?”“그건 아니죠. 그런데 낮에는 출근해야 해서…… 시간이 있을지…….”“그 성형외과는 직원들 쉬는 시간도 안 주니?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밥 먹을 시간은 있을 거 아니야. 그리고 네 백이 누군지 잊은 거야? 다른 직원들이 눈치줘? 고모가 가서 뭐라고 할까?”“아, 아니에요. 그래요, 밥 먹어요.”한숨을 내쉰 원유희가 결국 제안에 응했다.어차피 점심 시간에 나가면 시간도 얼마 안 걸릴 테고 행여나 고모가 정말 성형외과로 와서 행패라도 부린다면…….상상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다.‘그냥 조용히 일하고 싶어…… 갑질 하려고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백…… 내가 원한 것도 아니잖아…… 김신걸 쪽이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고모와 연락하는 걸 모르는 눈치도 아니고, 그 동안 별말 없었으니 밥 한끼 먹었다고 뭐라고 하겠어…….’다음
표원식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원유희도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지금 내가 나가버리면 선생님은 혼자 식사하셔야 하잖아…… 그건 예의가 아니겠지?’표원식이 먼저 메뉴판을 건네자 원유희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아, 선생님께서 알아서 주문하세요. 전 다 잘 먹어요…….”“뭐 못 드시는 건 있어요?”“그게…… 해산물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다른 건 다 괜찮아요. 마음껏 시키세요.”이 자리가 불편한 원유희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피식 웃던 표원식이 알아서 주문을 시작하고 잠시 후 테이블에 세팅된 음식을 본 원유희가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정말 해산물 요리는 하나도 안 시키셨네…….’“아, 저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해산물. 먹기에 좀 귀찮기도 하고…….”사실인지 인사치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동작 하나하나 그녀를 배려해 주는 그의 모습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우아한 손짓만 봐도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임이 느껴졌다.그럼에도 원유희는 왠지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맞선 상대가 아니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학교 그만둔지 꽤 됐는데 선생님만 보면 아직도 기가 죽는단 말이야…… 선생님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긴 하지만…….’“아이들 때문에 학업을 그만두신 겁니까?”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란 원유희가 자세를 고쳐잡았다.“아…… 네. 그런데 제 고모는 저한테 애가 있다는 걸 모르세요. 그러니까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거겠죠…….”“아…… 그럼 앞으로 원유희 씨를 방패막으로 이용해도 될까요?”표원식이 난색을 표했다.“사실 이런 맞선…… 저도 질색이거든요.”“그래도…… 그건 좀…….”“아, 공짜로 이런 부탁을 드릴 순 없죠. 앞으로 삼둥이 학비는 특별히 디스카운트해 드리겠습니다.”‘정말? 내 이름만 팔면 학비를 줄일 수 있다고? 좋은데?’“그럼 저도 뭐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말씀하세요.”물수건으로 긴 손가락을 닦아내던 표원식이 말했다.“그게…… 저한테 아
원유희는 차마 김신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지만 공기중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이미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다급하게 해명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그런 거? 어떤 거?”손예인이 다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나던 김신걸이 표원식의 얼굴을 훑어보았지만 표원식은 딱히 무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음침한 분위기의 남자네……’곧이어 김신걸 일행이 레스토랑을 나서고 여전히 넋이 반쯤 나간 듯한 원유희를 돌아보던 표원식이 물었다.“괜찮아요?”그제야 정신을 차린 원유희의 입술이 살짝 떨려왔다.“네, 괜찮아요. 저희도 가요…….”차에 탄 원유희는 멍하니 스쳐지나는 길가의 풍경들을 바라보았다.맑은 그녀의 눈동자에는 불안과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왜…… 하필 여기서 김신걸과 마주치게 된 거야? 혹시 이상한 오해 같은 건 하지 않겠지? 손예인도 옆에 있다는 건 비즈니스적인 식사는 아니라는 거고…… 뒤에 있는 사람들도 손예인 가족처럼 보였어. 두 사람 정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하긴…… 손예인 정도면 김신걸에게 어울리는 신부감이긴 하지. 만약 손예인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김신걸도 날 놓아줄까?”“방금 전 그 남자…… 혹시 삼둥이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까?”갑작스러운 질문에 원유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아이들과 너무 닮았더군요.”“이것도……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원유희가 애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 사생활에 딱히 관심없습니다.”“감사합니다…….”그녀를 성형외과 앞까지 데려다준 표원식의 차량이 떠났지만 원유희는 한참동안 도로변에서 멍하니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그 뒤에도 오후내내 원유희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아니지. 내가 괜히 불안해 하고 있는 건가? 내가 누구랑 만나서 밥을 먹든 김신걸은 관심없을 수도 있어. 김씨 일가 사람들과 만나지 말라고 했지 다른 사람이랑 만나지 말라고는 안했잖아…….’원유희가 자기 합리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영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이 정도 큰 규모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 김풍그룹에게 이 정도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김신걸뿐일 것이다.아버지인 김영을 바라보는 눈빛이며 내뱉는 말이며 분명 날서린 증오가 담겨있었지만 그저 말뿐일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정말 김풍그룹을, 자신의 본가를 파산까지 몰고 가려는 것일까?답답하고 이해가 안 됐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중요하니 김영은 체면을 접어두고 드래곤 그룹으로 향했다.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김영은 드래곤 그룹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그 앞을 지키는 경호원에게 쫓겨나오고 말았다.조금 더 강경하게 나가면 정말 때릴 기세인 경호원들의 모습에 김영은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평소 뉴스에 딱히 관심이 없는 원유희도 직원들의 입에서 김풍그룹이 곧 파산할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김풍그룹은 제성의 굴지의 그룹, 국가적인 경제 위기도 없는 상황에서 멀쩡한 기업이 갑자기 파산하다니.다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냐며 혀를 끌끌 찼다.이게 무슨 일인가 싶던 그때, 바로 원수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무조건 김신걸 그 자식 짓이야! 그 자식 말고 누가 이런 짓을 하겠어. 내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아버지한테 칼을 뽑아!”울먹이는 고모의 목소리에 원유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요?”원유희는 이번 일에 김신걸이 연루되지 않았으면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신걸이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 중 그녀가 없었으면 했다.“네 고모부도 몰래 알아봤는데 누가 그러더란다. 드래곤 그룹이랑 무슨 일 있었냐고. 그런데도 오해라고? 너희 고모부가 드래곤 본사까지 찾아갔는데 문전박대도 모자라서 하마터면 맞을 뻔했대!”“네? 설마 다치셨어요?”원유희이 눈이 커다래졌다.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친아버지를 때리나 싶을 테지만 워낙 예측불가의 폭력성을 보이는 김신걸이라면……. 차마 확신할 수 없었다.
원유희의 심장이 살짝 조여들었다.‘김신걸 경호원이네…….’혼자 뒷좌석에 앉은 그녀는 전쟁터에 나가는 결사대의 마음이 이런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차까지 보낸 거면 희망이 있는 걸까? 뭐가 어떻게 되든 고모한테 도움만 될 수 있다면 뭐든 좋아…….’하지만 김신걸이 정말 그녀의 부탁을 또 들어줄까?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끝없이 밀려들고 회사 앞에서 내리는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권력의 상징인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빌딩이 그녀의 영혼을 짓누르는 듯했다.원유희는 보디가드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의 최고층으로 향했다.그리고 비서실 고건 비서가 그녀를 다시 사무실 앞으로 향했다.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 원유희가 사무실로 들어가고 고건이 문을 잠가바렸다.마지막 퇴로까지 막힌 느낌에 원유희의 심장이 거세게 콩닥거리기 시작했다.훤한 낮임에도 불 하나 켜지 않은 사무실은 밤처럼 어두웠고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한발자국 옮길 때마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는 마치 어둠속에서 맹수를 피하는 초식동물과도 같았다.분명 어딘가 맹수가 있다는 걸 알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 그 언제든지 몸을 숨긴 맹수가 나타나 그녀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다는 생각에 끝없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무슨 일이야?”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원유희는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홱 고개를 돌린 원유희의 시야에 사무실 의자에 앉은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흐릿한 그림자였음에도 그 남자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원유희는 알고 있었다.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원유희가 대답했다.“전……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고…… 고모부 회사에 왜 그런 거야?”“대신 사정이라도 하려고 온 건가?”김신걸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끔찍했다.“아니.”원유희가 다급하게 부정했다.고모의 편을 든다는 걸 알면 괘씸해서라도 도와주지 않을 게 분명할 터.“그…… 그냥 나 때문인가 싶어서…….”“그래? 왜 그렇게 생
고개를 돌린 원유희는 기세등등한 손예인의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하필 이때…… 손예인과는 더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그녀를 향해 다가온 손예인이 혐오 섞인 눈빛으로 원유희를 바라보았다.“원유희, 정말 살다살다 너 같은 애는 처음 본다.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너 안 만나겠다잖아. 도대체 무슨 염치로 여기서 버티고 있는 거야? 남자가 그렇게 고파?”“신걸이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래.”‘제발 가라…… 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제발 좀 가라고…….’“무슨 일? 아~ 너희 그 천박한 고모네 집안일? 그거라면 포기해. 오빠가 네 부탁 한 마디에 포기할 것 같아? 울면서 바지가랑이를 붙잡아도 눈 하나 깜박 안 할 걸? 그리고 오빠는 오늘 내가 만나기로 했으니까 이만 돌아가.”경비원이 손예인 대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노려봐준 손예인이 엘리베이터와 함께 사라졌다.혼자 남겨진 원유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오늘만 안 만나주는 거면 다행이게. 상황을 보아하니 내일도 딱히 마음이 바뀔 것 같지 않아.’“네가 아무리 엉겨붙어도 내 계획은 바뀌지 않아.”김신걸의 말이 다시 머리속에서 메아리쳤다.그녀의 몸뚱아리 따위 별 가치가 없다는 말처럼 들려 수치심이 밀려왔다.그렇게 원유희는 빨개진 눈으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건물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무거운 마음으로 회사 돌아가려던 그때, 고모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쉴새 없이 몰아치는 원수정이 원망스러웠지만 전화를 받는 것 말고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유희야, 어떻게 됐어? 김신걸 그 자식 만났어? 뭐래?”“만났는데…… 안 된대요.”“아니 왜? 여채아 그 여자도 풀어줬잖아? 그런데 왜 이건 안 된대? 유희야, 좀 더 매달려봐. 응?”“고모, 죄송해요…… 전 이미 최선을 다했어요.”말을 마친 원유희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내가 무슨 자격으로 김신걸에게 부탁을 해? 무슨 자격으로…….’한편, 사무실로 들어온 손예인이 온갖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