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청연은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이 물건은 제가 대신 해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 향낭 안에 있는 것은 절대 예사 물건이 아닐 겁니다.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낙청연은 이렇게 말하면 낙월영이 이 향낭을 포기할 줄 알았다.원래 낙월영의 물건이 아니었으니 그리 중요하지 않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낙청연은 이 물건이 그녀에게 해가 되는 걸 안다면 먼 곳에 버릴 거로 생각했다.그런데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낙월영은 당황한 얼굴로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손을 뻗어 단호히 낙청연의 손에서 그 향낭을 빼앗아 들었다.낙청연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소저?”낙월영은 향낭을 손에 꼭 쥔 채로 두려움과 긴장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믿을 수 없소.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소.”말을 마치고 그녀는 향낭을 꼭 쥔 채로 급히 자리를 떴다.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을 보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그 향낭을 가져가려 한 것일까?낙청연의 마음에 붙었던 불씨가 순식간에 꺼졌다.어쩌면 향낭을 돌려받을 수도 있을지 몰랐는데!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 일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저번에 잡았던 악령을 때마침 쓸 수 있을 것 같았다.낙청연은 낙월영이 그것을 버텨낼 수 없을 거로 생각했고 반드시 그녀에게서 향낭을 되돌려받을 생각이었다.곧장 후원으로 향한 낙청연은 마침 밖으로 나오던 송천초와 마주쳤다.“손님은 벌써 가신 겁니까?”“나 대신 문을 닫아주려무나. 오늘은 이만 장사를 접으련다.”낙청연은 그 말과 함께 급히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방 안에 가뒀다.그녀는 서랍을 열고 물건을 꺼냈다. 구 모양으로 부적에 감싸져 있던 물건을 여니 검은 기운이 뛰쳐나와 방안에서 마구 날뛰었다.낙청연은 부적을 문에 붙여 그것이 도망가는 걸 막았고 고개를 들어 그것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서 평생 갇혀 지내고 싶지는 않겠지. 네가 날
“저 신산, 이건 정말 사악한 물건인 건 같소. 최근 들어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소. 이러다가 정말 큰 화를 입을까 걱정되오.”낙월영은 눈 밑이 검었고 얼굴이 초췌했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깍지를 꼈다.낙청연은 향낭을 받아 들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이 물건은 사악한 기운이 강해 이미 오래전부터 소저의 기운에 영향 주었을 겁니다. 다행히도 소저께서 일찍 저를 찾아오셔서 해결할 수 있을 듯합니다. 만약 이 향낭을 다시 돌려받고 싶으시다면 제가 악령을 처치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찾으러 오시지요.”낙청연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속였다.향낭의 겉천을 사이 두고 일월쇄가 만져지니 낙청연은 괜히 흥분됐다.이제 곧 그녀는 일월쇄를 열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낙청연 어머니의 신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낙월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장군댁 부인께서 저 신산에게 점괘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운이 점점 더 좋아졌다고 들었소. 저 신산도 내게 좋은 운을 불러들일 수 있는 물건을 줄 수 있겠소?”낙월영은 엄평소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그녀는 저 신산이 이렇게 실력 있는 자라면 그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낙청연은 난색을 보이며 말했다.“장군댁 부인께서는 명격이 최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운세를 좋게 만드는 게 간단한 편이었지요. 모든 사람이 장군댁 부인처럼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낙월영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결국은 운명이란 말이오…”낙청연은 당장 향낭을 가지고 돌아가 그것을 연구해 볼 셈이었기에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소저의 명격 또한 좋은 편입니다. 착실하게 나날을 보낸다면 좋은 운이 찾아올 것입니다.”낙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고맙소, 저 신산. 이 향낭은 저 신산께 부탁드리겠소.”그 말을 끝으로 낙월영은 돈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낙청연이 손을 뻗어 그것을 챙기려는데 갑자기 뼈마디가 분명한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 먼저 돈주머니를 챙겼다.낙청연은 잠시
“왕야, 이 물건은…”낙월영은 다소 긴장했다. 전에 그녀는 이 향낭이 어머니의 유품이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물건을 산명 선생에게 맡긴 것을 들켰으니 어떻게 거짓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월영아, 날이 추우니 얼른 돌아가거라. 고뿔에 걸리면 안 되지.”부진환은 걱정하는 듯한 어조로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순간 낙월영은 살짝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부진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녀는 조심스레 부진환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왕야, 화가 풀리신 겁니까?”부진환은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손을 들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당연하지.”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보던 낙청연은 분노가 끓어올랐다.이름도 바꾸고 혼자서 잘살고 있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이제 막 손에 넣을 뻔했던 향낭을 빼앗기고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장면까지 보게 되니 낙청연은 거대한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고 심지어는 서러워서 한바탕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복잡한 감정들이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몰려왔으나 낙청연은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현재 그녀는 저낙의 신분으로 어렵게 지금까지 걸어왔다.완전히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부진환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었다.“왕야와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이분이 왕비 마마란 걸 알았다면 거래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낙청연은 맑은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에 부진환은 살짝 놀랐다.낙월영 또한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말이 못내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이내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부진환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낙월영에게 말했다.“내가 데려다주마.”낙월영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가녀린 몸을 한 낙월영은 부진환의 호송 아래 점포를 떠났고 고요한 길을 걸으며 장락골목에서 사라졌다.“왕비 마마…”지초의 목소리에 낙청연은 그제야 시선과 생각을 거두어
상원절(上元節)이 가까워지니 성안이 북적북적했고 낙청연의 점포 앞에도 붉은색 등롱이 걸려 경사스러워 보였다.노름을 좋아하는 용의천의 운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면서 낙청연 또한 장사가 잘됐다.화려하고 사치스러워 보이는 마차들이 매일같이 장락골목을 들락날락하며 낙청연을 모셔갔다.장락골목에 귀인이 나타났다 하면 모두 낙청연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저 신산의 명성이 수도 전체에 널리 퍼진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장락골목 주위의 거리에는 저 신산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부진환이 향낭을 가져간 뒤로 낙청연은 그를 쌀쌀맞게 대했고 그가 몇 번이나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그를 무시했다. 그 뒤로 부진환은 거의 오지 않았다.그렇게 순리롭게 겨울을 나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 종놈이 그녀를 찾아와 초청장을 건넸다.“저 신산, 저희 아씨께서 일주일 뒤 혼례를 치르시는데 저 신산을 저택으로 모셔 축하주를 대접하고 싶어 하십니다.”그 말에 낙청연은 깜짝 놀랐다.“아씨라고 했소?”초청장을 열어보니 낙랑랑의 혼례였다. 낙청연은 경악했다.그리고 아래를 보니 신랑의 이름은 진소한이 아닌 범산화(范山和)였다.낙랑랑이 몰래 그녀를 찾아 인연을 점쳐 본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한 듯했다.“어찌 이리도 갑작스럽단 말이오?”낙청연은 미간을 구겼다. 낙랑랑이 벌써 누군가와 혼인을 올린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종놈은 웃으며 말했다.“범씨 가문에서 급한가 봅니다. 보름 정도 준비했으니 그리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지요. 저희 아씨께서 저 신산을 꼭 모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으니 꼭 오셔야 합니다.”낙청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 내 꼭 가리다.”낙랑랑은 결국 저항에 실패했거나 낙운희를 위해 타협했을 것이다. 어쩌면 낙용과 낙운희의 모녀 관계를 위해 양보한 걸지도 몰랐다.그러나 적어도 범산화는 그녀가 혼인을 올리고 싶은 상대가 아닐 것이다.이렇게 갑작스럽다니, 낙청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낙용이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준비해 낙랑랑을 출가하게 할
송천초는 곧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이렇게 마르셨는데 이 모습으로 참석한다면 부진환이 단번에 알아볼 게 아닙니까?”낙청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내게 방법이 있다! 얼굴은 면사가 있는 모자를 쓰면 된다.”송천초는 주저하며 물었다.“가능하겠습니까? 들키면 어찌합니까?”낙청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답했다.“들킨다고 해도 내가 들키겠지. 그들은 저낙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 너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들킨다고 해도 저 신산 대신 온 것이라 하면 신경 쓸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러한 자리에서 산명 선생을 신경 쓸 사람은 없었으니 섭정왕비의 신분을 잘 연기해 들키지만 않으면 됐다.“알겠습니다.”그렇게 두 사람은 준비를 시작했다.낙청연은 뚱뚱하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직접 옷을 만들어 그 안에 대량의 솜을 넣었다.그것을 옷 안에 입고 겉에 옷을 두 겹 정도 더 껴입은 뒤 망토까지 두른다면 몸집이 몇 배는 더 커 보일 것이다.그리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그녀는 얼굴 전체를 가릴 가면을 만들었고 그 위에 면사가 드리워진 모자를 썼다.송천초와 지초는 그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낙청연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원래의 목소리를 냈다.송천초는 감탄을 내뱉었다.“진짜 저 신산의 모습은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듯합니다!”“그럼 됐다!”준비를 마친 뒤 낙청연과 지초는 몰래 마차를 타고 성을 떠나 별원으로 향했다.별원에서 단장을 마친 뒤 그녀는 섭정왕부의 사람이 자신을 데리러 오길 기다렸다.이튿날 아침.마차 한 대가 별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고 지초는 대문 뒤쪽에서 마차를 보고는 긴장한 얼굴로 달려와 말했다.“왔습니다, 왔어요!”낙청연은 당부하며 말했다.“내가 가르쳤던 것은 다 기억했느냐?”지초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다 기억했습니다.”이번에는 소유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다.낙청연의 신분으로 섭정왕부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낙청연은 괜히 긴장됐다.“왕비
낙청연이 섭정왕부로 돌아왔다.왕부 전체가 그 소식을 접했고 적지 않은 하인들이 나와서 그녀를 맞이했다. 낙월영 또한 그 소식을 알고 그녀를 보러 왔다.그녀는 낙청연이 살아서 섭정왕부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마차가 멈추어 섰고 소유가 차 문을 열었다.“왕비 마마, 도착했습니다.”대문 쪽에는 계집종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기도 전에 허약한 기침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곧이어 지초가 낙청연을 부축하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왕비 마마!”등 어멈이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맞이했고 낙청연은 육중한 몸을 이끌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낙월영이 그녀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돌아오셨군요, 언니. 별원에서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콜록콜록…”낙청연은 대답하는 대신에 기침하면서 낙월영을 지나쳤다.낙청연이 자기 말에 대꾸하지 않자 낙월영은 언짢은 얼굴로 낙청연의 팔을 덥석 잡았다.그 순간 면사가 휘날리는 바람에 낙월영은 낙청연이 쓴 가면을 보았고 겁을 먹고서는 연신 뒷걸음쳤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신 이유는 낙랑랑 아씨의 혼례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왕비 마마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지초는 불쾌한 듯 말하고는 낙청연을 부축하고 떠났다.완전히 넋을 놓은 낙월영은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 가면은 아주 무서웠다.낙청연은 왜 얼굴을 가린 것일까?낙청연은 다시 자신의 처소였던 곳으로 돌아왔다. 가는 길 내내 많은 사람이 그녀를 보고 수군거렸다. 낙청연의 옷차림이 무척 괴상했기 때문이었다.“문을 닫거라.”낙청연은 방 안으로 들어온 뒤 다급히 지초더러 방문을 닫게 했다.“왕비 마마, 저희는 아직 왕야를 뵙지 않았습니다.”지초가 주저하며 말했다.“왕야를 뵈어서 무엇하냐? 안 볼 것이다.”낙청연은 싸늘한 어조로 말하며 추한 가면을 벗었다.부진환이 그녀를 불러들인 것도 단지 태부부를 위해서였다.낙랑랑이 출가하는데 자신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것
그는 실망한 얼굴로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걱정스레 바라보고는 곧 발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부운주가 낙청연을 찾아갔다는 소식은 숨길 수가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부진환은 곧 그 소식을 접했고 향낭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돌연 굳었다.“벌써 만났다는 말이냐?”부진환의 눈빛에는 한기가 어려있었다.왕부에 돌아오자마자 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운주와 만나다니, 그렇게나 참을성이 없다는 말인가?부진환은 싸늘해진 눈빛으로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낙청연을 이곳으로 부르거라!”소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소유가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낙청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분명 부운주가 그녀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이리 급하게 그녀를 찾아 경고하려는 것일 터였다.가면을 쓴 뒤 낙청연은 소유를 따라 서방에 왔고 문을 닫았다.방 안의 분위기는 아주 괴이했다.의자 위에 앉아있는 부진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았고 낙청연은 그의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낙청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렵다는 티를 내며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한참 뒤에야 부진환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모자와 가면을 벗거라!”소유가 보고를 올렸던지라 부진환은 낙청연이 진짜 다친 건지, 아니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알아낼 셈이었다.낙청연은 그의 말에 경계하듯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부진환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명령조로 말했다.“모자와 가면을 벗으라 했다!”낙청연은 긴장한 얼굴로 연신 뒷걸음질 치면서 팔을 들어 가면을 가렸다.“안 벗을 것이냐?”부진환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낙청연은 그를 피하듯 뒤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숙인 채로 가면을 내리눌렀다.“벙어리가 된 것이냐? 말해 보거라!”부진환은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울컥 화가 났다.“이…이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
“너!”깜짝 놀란 부진환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낙청연은 비수를 자신의 목젖에 갖다 대더니 울면서 빌었다.“왕야,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발, 절 가만히 놔두세요. 꼭 제 얼굴을 보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낙월영 대신 시집을 와서도 안 되었고 왕야와 낙월영을 건드려서도 아니 되었습니다. 제가 이 꼴이 된 것도 전부 자업자득입니다! 제발 제 마지막 존엄을 지켜주세요, 왕야!”낙청연은 거의 무너질 듯이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그녀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었고 그녀가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이 되어 부진환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낙청연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그가 알고 있던 낙청연이 맞는 걸까?부진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두려움 가득한 그녀의 울부짖음에 부진환의 미간이 더욱더 좁혀졌다.밖에 있던 이들은 서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전부 들었고 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예전의 왕비는 고집스럽고 대쪽 같은 성정이었다. 왕야에게 대들면서 그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았고 벌을 받는다고 해도 절대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나 그녀는 지금 왕야에게 얼굴을 보이는 게 무서워 울면서 그에게 사정했고 심지어는 죽겠다면서 협박했다.무엇이 그녀를 무너지게 만든 걸까?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이 망가지게 된 것일까?부진환 역시 그들과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바닥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던 낙청연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가보거라.”부진환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허락이 떨어지자 낙청연은 가면을 힘껏 부여잡고 바닥에서 모자를 주워 든 뒤 황급히 서방에서 뛰쳐나갔다.정원 밖에는 부운주가 있었다.그는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청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얼굴은 제가 치료할 수 있습니다.”고 신의는 의술이 고명했으니 분명 그녀의 얼굴을 고칠 수 있을 것이었다.그러나 낙청연은 당황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