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급히 앞길을 막으며 노하여 말했다. “이건 누구입니까? 얼굴도 없습니다. 대제사장, 어찌 이런 섬뜩한 시신을 서오궁으로 가져온다는 말입니까?”낙요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분이 당신의 상비 마마입니다.”“그녀의 낯가죽은 지금 방 안에 있는 사람 얼굴에 있습니다.”이 말을 들은 류상은 깜짝 놀랐다. “황당하다! 너무 황당하다!”이때, 방안에서 태의가 나왔다. 류상은 다급히 물었다. “어떠하오?”“황자요? 공주요?”류상은 황자임을 알아낼 수 있길 바랐다.그래야 황위까지 안정될 수 있기에 그의 마음은 기대로 가득했다.바로 이때, 안에서 상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대제사장, 제가 언제 당신에게 밉보였습니까?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저를 죽이려고 작정한 겁니까? 저의 침전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가지고 오다니! 제가 황자를 임신했을까 봐 그렇게 두렵습니까?”상비는 통곡했다.이를 본 류상은 몹시 분노해서 낙요를 무시하고 명령했다. “여봐라, 어서 시신을 들어내거라!”시위가 앞으로 다가오려고 하자, 낙요는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위를 쳐다보았다.시위는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류상이 보더니 몹시 분노했다. “대제사장, 상비와 상비 복중의 아이를 죽이려고 작정했습니까?”“문무백관이 전부 서오궁 밖에 있는데 대제사장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습니까? 황위를 뺏고 싶다고 인정하는 겁니까?”낙요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내가 보기에 문무백관은 다 평온한데 급한 사람은 오직 당신뿐인 것 같군요.”“설마 안에 있는 상비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저를 막는 겁니까?”“이 얼굴 없는 여인 시신의 옷차림이 이토록 화려한 걸 보니 후궁 빈첩입니다. 죽으면 그만이지만 하필 얼굴이 없어졌습니다. 수상하지 않았습니까? 류상은 진실에 전혀 관심 없습니까?”“안에 계시는 그분이 상비가 아니고 복중의 아이도 폐하의 아이가 아니라면 류상은 누구를 황위에 올리실 겁니까?”“아니면 황실 혈통을 지지한다는
이 말을 들은 해씨 집안 가장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뭐라고? 내 딸이라고?”그는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한참 멍해 있더니 손을 뻗어 시신을 덮은 하얀 천을 벗겼다.피범벅이 된 얼굴을 본 순간, 더욱 놀라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얼굴! 얼굴이 왜 없소?”낙요가 대답했다. “시신을 발견했을 때부터 얼굴이 없었소. 자세히 들여다보시오. 당신 딸이 맞소?”해씨 집안 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긴장한 표정으로 시신의 손을 보려고 옷소매를 젖혔다.낙요는 이 동작을 주시했다.강상군의 팔에 모반이 있는 모양이다.하지만 이때, 방 안에서 상비의 격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버지! 저 여기 있습니다!”“밖에 시신은 제가 아닙니다.”“저는 이미 폐하의 아이를 뱄습니다. 아버지, 대제사장은 제 아이를 해치려고 합니다.”“아버지, 저를 살려주세요!”이 말을 들은 해씨 집안 가장의 동작은 순간 굳어버렸다.그는 한참 멍해 있더니 고개를 들고 낙요를 쳐다보았다. “대제사장, 내 딸이… 아직 살아있소?”“방 안에, 내 딸 아니오?”“그럼, 이 시신은 누구요?”해씨 가장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일어나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싫은 듯 손을 닦았다.그는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 방 안의 그 상비를 만났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해씨 가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걸어 나왔다.“대제사장 농이 심하시오. 나는 정말 놀랐소!”“내 딸이 저렇게 무탈하게 살아있지 않소?”낙요가 물었다. “방 안의 그분이 당신 딸이라고 확신하오?”해씨 가장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틀림없소!”“내 딸을 설마 못 알아보겠소?”류상은 뒤짐을 짊어지고 득의양양해서 웃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낙요를 힐끔 쳐다보았다.“대제사장, 아직도 할 말이 있습니까?”“상비의 친아버지가 자기 딸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소?”“어서 시신을 들고 내려가지 못하겠느냐?”하지만 낙요는 덤덤히 웃으며 말했다. “급하지 않소.”“보고 싶다는 사람이 또 한 분 있소.”이 말을
해씨 가문 가주는 약간 당황하며 강 부인을 부축했다.“이 아이는 우리 딸이 아니야! 우리 딸은 안에 있다고. 그 아이는 이미 회임 중이었어. 내가 다 확인했다고!”그 말을 들은 강 부인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그게 사실인가요?”그녀는 일말의 기대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상비를 만났다.하지만 얼마 안 가 그녀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밖으로 나오더니 죽은 시체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해 가주는 다가가서 부인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딸 무사한 거 확인했잖아. 그만 울어!”낙요는 해 가주가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딸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숨길 수 있을까?낙요가 물었다.“부인, 이 시체 정말 따님 맞나요?”“얼굴 가죽까지 다 도려내서 신분이 불분명한 시체라면 얼른 화장하는 게 좋겠네요. 여봐라!”그 말을 들은 해 가주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그러나 딸의 시체를 가져간다는 말에 강 부인은 사람들을 밀치고 시체를 부둥켜안았다.“안 돼! 그만해! 이 아이는 내 딸 상군이라고!”해 가주는 버럭 화를 내며 다급히 부인을 붙잡았다.“닥쳐! 시끄럽게 왜 울고 난리야? 우리 딸 안 죽었다니까?”강 부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부군을 밀쳐내며 말했다.“내가 배 아파서 낳은 딸을 어찌 못 알아보겠어요! 이 아이가 제 딸이에요! 저 안에 있는 게 가짜라고요!”낙요은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해 가주는 가주의 자리에 오른 뒤로 적지 않은 첩을 들였다고 했다. 그만큼 강 부인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강 부인에게 부군은 믿을만한 안식처가 아니었기에 그녀에게는 딸 강상군이 전부였을 것이다.그런 딸이 죽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그랬기에 부군을 위해 거짓말을 하며 딸을 죽인 범인을 감쌀 이유가 없었다.류 승상도 그 말을 듣고 당황하며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어찌 이리도 쉽게 말을 바꾸시오? 대체 누가 딸이란 말이오? 당신들 대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소
그 말을 들은 류승상이 눈을 반짝 빛냈다.“뭐라고요? 설마 당신이 운비? 그럼 복 중의 아이는 폐하의 아이가 맞다는 겁니까?”어두웠던 류 승상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고묘묘는 고개를 끄덕였다.낙요는 류승상이 또 그녀를 옹호하고 나서자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참으로 이상하구나. 난 도주에 가봤고 진짜 류운아도 만난 적이 있지. 넌 상비도 아니고 류운아도 아니야. 넌 대체 누구냐!”말을 마친 낙요는 다가가서 그녀의 얼굴을 잡고 가면을 뜯어냈다.진짜 얼굴이 공개되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류승상은 겁에 질려 뒤로 뒷걸음질 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낙요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고묘묘?”고묘묘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안절부절 못했다.그녀는 낙요가 진짜 류운아와 만났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계획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 버리자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나 맞아. 난 복수를 위해 입궁했어. 진익이 죽으면 내가 널 도와 소식을 전한 것을 봐서 한번 봐줄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네.”결국 그녀가 사람을 잘못 선택한 탓이었다.류승상이 이렇게 빨리 임신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낙요를 데리고 자신의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모든 것은 거짓이었고 그녀는 아직 상황을 설명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낙요는 싸늘한 목소리로 사람을 불렀다.“여봐라! 이 여자를 잡아들이거라!”그런데 이때, 고묘묘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방 안으로 달려들어가더니 비수를 꺼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그녀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예전이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지쳤고 더 이상 살아갈 의미도 남아 있지 않았다.의식을 잃기 전, 그녀는 문밖에서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서진한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공주님, 저랑 가시지요.”그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낙요는 고묘묘가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사람을 시켜 시체
중후한 목소리가 서오궁에 울려퍼지자 류승상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뭐라고?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상 장군이 말했다.“황실의 혈맥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여국의 천하를 아무에게나 물려줄 수는 없지요. 오직 대제사장만이 혼란스러운 조정을 안정시킬 능력이 있다고 저희는 믿습니다.”“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의 안위입니다. 대제사장, 즉위하여 주십시오!”병권을 쥔 여덟 장군은 일제히 대제사장의 즉위를 간청하고 있었다.현장에 있던 조정의 대신들은 반대할 이유를 들지 못했다.류 승상은 체념한 듯, 관복과 모자를 벗은 뒤에 넋을 잃은 표정으로 궁을 나갔다.그렇게 당일날 낙요는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가장 먼저 한 일은 도주에 상주 장군을 정하고 즉시 파견한 일이었다.그리고 가장 시급한 일부터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서재로 돌아온 그녀는 상 장군을 따로 만났다. “상 장군, 어쩌다가 다 같이 궁으로 오게 된 것이냐? 사전에 서신으로 연락이라도 주고받았나?”상 장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닙니다. 열흘 전에 침서의 서신을 한통 받았습니다. 저희더러 입궁하여 폐하를 도우라고 하더군요.”“저희는 오는 길에 만났습니다. 다들 침서의 서신을 받고 달려오고 있었지요.”그 말을 들은 낙요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침서는 그녀가 황위에 오르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해놓았던 것이다.그녀는 예전부터 상 장군과 안면을 텄고 그 덕분에 다른 장군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겼다.게다가 그녀가 그들의 딸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9개 주 장군들은 그녀의 즉위에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은 침서의 책략이었다.진익은 9개 주의 병권을 장악하기 위해 장군의 딸을 비로 들여야 했다. 이 방법 역시 침서가 먼저 제기한 것이었다.“알겠다. 알려줘서 고맙구나.”“폐하, 송구하옵니다.”모든 것이 안정된 뒤, 상 장군과 다른 장군들은 도성을 떠났다.3일 뒤, 낙요는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그녀는 화려한 금색의 망토를 두르
“궁에 남아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갈 곳을 안배해 주마.”그 말을 들은 유단청은 그제야 화색을 띠며 말했다.“당연히 남아야지요!”“저희는 대제사장님, 아니 폐하의 사람입니다. 폐하의 취향과 습관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지요. 신변에 사람이 바뀌면 불편하실 겁니다.”낙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그러니까 다 남겠다는 뜻이냐?”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그럼 원수는 어선방으로 가서 일하고 월규는 내 옆에서 시중을 들거라. 단청은… 다른 인원들을 데리고 내전의 호위대로 가거라.”“백소는 월규와 같이 내 옆에 남거라.”백소는 호위 무사이기는 하지만 여인의 몸이었기에 호위대에 들어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사람들은 화색을 띠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황송하옵니다, 폐하!”그들 외에도 낙요는 많은 사람들을 등용했다.궁중의 요직에 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물갈이를 했다.통천탑의 재건은 계속 진행하게 되었고 제사 일족의 질서도 천천히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대충 급한 일을 마무리한 뒤, 낙요는 부진환과 함께 통천탑을 찾았다.“제사 일족의 변화가 참 크네요.”부진환이 감탄하듯 말했다.“그래요. 여국도 많은 변화를 마주하게 되겠지요. 같이 통천탑에 올라가 볼까요?”둘은 30층 높이의 통천탑으로 바로 올라갔다. 찬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자극했다.낙요는 창가로 다가가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난 이곳에서 진익을 죽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일시적인 충동이었어요. 내가 만약 동초의 손에 죽었다면 이 나라는 아무도 지키지 못했겠지요.”부진환은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하지만 폐하는 아직 살아계십니다. 우리 둘 다 멀쩡히 살아 있지요.”낙요는 그대로 부진환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몸이 거의 회복되었네요.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언제 돌아갈 생각입니까?”“가라고 내쫓는 게 아니라 곧 겨울이라 가는 길에 평탄치 않을 것입니다. 왕야의 건강이 우려되네요.”부진환이 답했다.“내일 출발할 겁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두 사람의 거친 호흡이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의 달이 보였다.부진환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폐하께서 후궁을 들인다고 해도 저는 폐하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이미 여국의 황제가 되셨기에 황실을 위해 후손을 육성해야 하는 건 폐하의 책임이기도 하지요.”그 말을 들은 낙요는 정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그렇게 대범하게 나오시겠다고요? 그럼 왕야께서도 후손을 위해 혼인하고 첩도 잔뜩 들이실 겁니까?”낙요는 그가 후궁을 반대하지 않았으니 공평한 관점에서 그 역시도 혼인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화를 낼 수는 없었다.길은 그녀가 선택한 것이니 그의 혼인을 막을 자격이 그녀에게는 없었다.부진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물려줄 황위도 없는데 그런 걸 왜 합니까?”“진심이세요?”“맹세라도 할까요?”부진환이 웃으며 물었다.“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고요.”부진환은 그녀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사실 좀 후회됩니다. 차라리 제가 폐하의 남첩이 되는 건 어떻습니까?”“그건 좀 상상이 안 가는데요.”“황실 후손을 위한 일이라지만 사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쁩니다. 다만 저는 어쨌든 천궐국 사람이고 섭정왕이기도 하니 조정의 늙은이들이 저희의 후손을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폐하께서는 이제 나랏일 때문에 무척 바빠질 텐데 출산의 고통까지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폐하를 대신해서 출산을 하고 싶네요.”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낙요는 웃음을 터뜨렸다.“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남첩을 들일 생각도 없고 아이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요.”부진환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황위는….”“내 아이가 나라를 통치할 인재일 거라 장담할 수도 없고 어쩌면 수많은 아이를 낳아야 그중에서 그 중임을 맡길 인재가 나올 수 있겠죠.”“나랏일도 힘든데 계속 출산만 해야
서신에서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위치와 근처의 아름다운 풍경을 알렸다. 낙요는 마치 그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날은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고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부진환은 천궐국 경내에 들어서고 있었다.점점 거리가 멀어지면서 서신이 도착하는데 점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부진환도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서신의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낙요도 나랏일로 바쁘게 보냈기에 시간은 빨리도 흘렀다.이날 아침, 한풍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자 낙요는 추위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창밖을 바라보니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오늘은 눈이 내리네.”월규가 따뜻한 물을 내오고 옷 시중을 들었다.“그래요, 폐하. 어제 밤부터 눈이 내렸어요. 궁 안팎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였어요.”“길도 미끄러울 테니 오늘 조회는 취소한다고 전하거라.”그녀도 하루 정도는 농땡이를 부리고 싶었다.“예, 폐하.”옷을 갈아입은 뒤, 낙요는 정원을 산책했다. 한 겨울에 핀 매화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꽃잎이 날리며 그녀의 어깨로 떨어졌다.“폐하, 손이 찹니다.”월규가 따뜻한 손난로를 건넸다.낙요는 손난로를 받아들고 하얀색으로 뒤덮인 궁 안을 느긋하게 걸었다. 밤새 내린 눈이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공기마저도 깨끗해진 느낌이었다.월규와 백소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운무산.한풍이 오두막 안으로 불어들어오자 침상에서 거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쿨럭!청희는 탕약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와 침상에 누운 사람을 일으키며 말했다.“장군, 어서 약을 드시지요.”침서는 인상을 쓰며 낯선 환경을 둘러보다가 그녀를 밀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청희는 다급히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장군, 밖에 아직도 눈이 내립니다. 지금 상태로는 바람을 맞지 않는 게 좋아요.”찬 바람이 그의 귀를 자극했다.침서는 그제야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여긴 어디지?”청희가 답했다.“운무산입니다. 예전에 장군께서 이곳에 오두막을 짓고 난희를 산에 묻었지요. 한적한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