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그 말은, 당신 마음속에 그 사람이 성도윤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거야?”남자의 눈빛은 차가웠고, 거의 이를 악물고 분개한 듯 따져 물었다.“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한 거 아니야?”차설아는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성도윤의 뺨을 한 대 때리더니 또 고양이처럼 그를 더 꽉 껴안았다.“미스터 Q, 내 마음속에는 당신이 가장 중요해. 그러니까 당신이랑 결혼했지. 성도윤은 4년 전에 이미 마음에서 깨끗이 비워냈어...”“그 자식은 아마 당신이 인품도 좋고, 얼굴도 잘생긴 걸 질투해서 당신 얼굴을 망가뜨렸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언젠가 꼭 당신을 도와 복수할 거야!”“그래?”성도윤은 코웃음을 쳤다.“어떻게 복수할 생각인데?”“그거야 간단하지. 그 자식이 당신 얼굴을 망가뜨렸으니, 나도 그 자식 얼굴을 망가뜨려야지...”차설아는 술 트림을 하고, 손을 크게 흔들어 껄껄 웃었다.“그 자식 얼굴에 ‘나는 추남’이라고 글자를 크게 새겨야지. 하하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풉!”앞에서 운전하고 있던 진무열은 계속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복수 계획을 듣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말했다.“하하, 대표님. 저 못 들었어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닥치고 운전해.”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성도윤의 말투는 싸늘했다. 품에 안긴 여자가 술에 취해 비몽사몽 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여자에게 폭력을 가했을 것이다.진무열은 백미러를 통해 차설아를 향한 성도윤의 눈빛을 살폈다. 그야말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제야 대표님 마음속에 누가 가장 중요한지 아신 거예요?”“난 늘 내 마음을 알고 있었어. 다만 전에는 다른 것들을 신경 쓰느라 정말 나에게 중요한 걸 포기했었지. 지금은 하느님이 기회를 다시 한번 주셨으니,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여기까지 말하고 차설아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남은 생의 행복을 움켜쥔 듯
“죄송해요, 대표님. 제가 주제넘었어요. 저는 그저 대표님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쨌든 사모님은 모르고...”“이미 알고 있어. 그러니 나 믿어줄 거야.”성도윤은 당연히 지금 상황에서 임채원이 죽었다고 해도 언급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형이 가장 사랑한 여자이기 때문에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사모님 이미 진실을 아셨어요?”진무열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표정은 더욱 의혹스러웠다.“그럼 당시 대표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사모님이 지금 대표님을 이렇게까지 배척하는 거예요? 설마... 진짜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닐까요?”“아마도!”성도윤의 덤덤한 표정에 진무열은 더욱 당혹스러웠다.“이상하네요, 대표님 성격에 사모님이 다른 남자를 사랑한 걸 아셨다면 진작 뚜껑이 열리셨을 텐데 왜 이렇게 담담한 거죠? 그렇게 속이 넓은 분 아니시잖아요!”자존심이 강한 남자일수록 소유욕이 강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일편단심이기를 바란다.보통 남자도 자기 여자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평생 유아독존으로 살아오던 성도윤이 이렇게 마음이 넓다니! 너무 비정상이었다.“이 여자가 누구를 사랑하든, 마음이 움직인 남자는 결국 나 성도윤 한 명이니, 쓸데없는 질투는 하지 않아도 돼.”성도윤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그의 말에 진무열은 머리가 빙빙 돌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저 아이큐 테스트해요? 쓸데없는 질투는 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이 얘기는 그만하지.”진무열이 계속 꼬치꼬치 캐묻자 성도윤은 화제를 중단했다.워낙 감정표현에 서툰 성도윤은 차설아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당연히 드러낼 리 없었다.하지만 진무열 이 녀석이 눈치 없이 계속 캐물으니 그는 짜증이 났다.“네, 그럼 다시 임채원 씨 얘기로 돌아가죠.”진무열은 사실대로 보고했다.“사실, 임채원 씨가
“그럴 일 없어.”성도윤은 냉랭한 태도로 말했다.“진짜 만약에 그런 상황이 온다면요?”진무열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었다.“그래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사람 인생이잖아요. 만약 사모님과 임채원 씨가 물과 불처럼 서로 공존할 수 없어 한 명만 살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시겠어요?”성도윤은 대답 대신 차설아를 보는 눈빛이 더욱 부드럽고 확고해졌다.답은 이미 정해졌다!4년 전,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와 차설아는 4년이나 떨어져 있었다.4년 후, 그는 절대 같은 구덩이에 다시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그와 차설아, 그리고 아이들은 더 이상의 4년을 낭비할 수 없었다.차가 성씨 가문 큰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2시가 넘었다.“대표님, 도착했어요.”진무열이 나지막이 말했다.“그래.”성도윤도 간단히 대답하며 두 사람 모두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마치 잠든 아기를 지키는 것처럼 차설아가 깰까 봐 살금살금 움직였다.“저기...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진무열은 백미러를 통해 성도윤의 처지를 발견한 것이다.지금의 차설아는 더욱 깊이 취해서 마치 주꾸미처럼 머리를 성도윤의 품에 파묻고 손발로 남자를 휘감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괜찮아.”성도윤은 차갑게 말했다.“진 비서가 할 일은 없으니까 돌아가.”“그래요, 그럼 몸조심하세요.”진무열은 자신이 방해꾼이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약간 숙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을 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특히 허리 조심하세요.”성도윤은 사람을 죽일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빨리 가!”진무열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진짜 허를 삐끗할까 봐 걱정돼서 한 말이에요.”진무열의 말은 확실히 애매하고 오해의 여지가 다분했다.사실 그는 정말 성도윤의 허리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지금처럼 몸에 ‘주꾸미’를 지닌 상태를 유지한다면, 내일 아침 분명 허리를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성도윤은 진무열이 떠난 뒤에야 그가 말
성도윤은 분노했지만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그 사람이랑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심지어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으면서 감정이 그렇게 깊다고?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아?”“좋은 데가 어디 한두 군데인 줄 알아?”“예를 들면?”“예를 들어, 그 사람은 나에게 밥을 해줘. 매일 퇴근해서 집에 가면, 아무리 몸과 마음이 피곤해도 식탁에 따뜻한 밥이 차려져 있는 걸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거든...”“밥은 누가 못해? 요리 학원에 등록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어.”“맞아, 이 세상에 요리 잘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지만, 미스터 Q는 오직 한 사람뿐이야. 쓰레기 전남편은 절대 대체할 수 없다고.”“그럼 대체할 필요 없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란 생각은 안 해봤어?”성도윤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바로 후회했다.그는 확실히 미스터 Q가 맞았다. 정확히 말하면 미스터 Q를 대신한 사람이었다.진짜 미스터 Q는 그해 싸움에서 패배하여 생사를 알 수 없었다.오랜 세월 동안 성도윤은 가면 하나와 특수 개량된 목소리로 성심 전당포를 인수하여 영흥 부둣가의 새로운 질서를 잡았다.하지만 차설아와 아이들이 엮일 줄은 전혀 몰랐다. 운명이란 장난 앞에서 그들은 또 한 번 엮이게 된 것이다.거짓말 하나를 지키려면 천 개의 거짓말이 필요한 법이다.그가 가면을 쓰고 미스터 Q의 신분으로 그녀를 마주하고, 그녀의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만약 지금 모든 것을 고백한다면,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성도윤이 분명 고의로 자신을 놀리고 모욕했다고 여길 것이다. 가뜩이나 균열이 생긴 그들 사이는 만회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를 것이다...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은 또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아이러니한 것이, 성도윤의 연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니. 이것 또한 일종의 업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미스터 Q, 이렇게 자기 자신을 모욕하면 안 되죠...”차설아는 남자의 따듯한 품에 안겨 횡설수설했다.
성도윤은 어리둥절하더니 곧 차설아가 자기 말을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 꼭 그 ‘하룻밤’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성도윤은 설명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더니 비꼬듯 말했다.“나랑 자고 싶으면 자고,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장난감으로 여긴다. 왜?”차설아는 얼굴이 붉어져서 남자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리저리 뒤척이더니 오만 원짜리 지폐 여섯 장을 꺼내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던지고는 말했다.“이건 하룻밤 비용이야. 충분한지 확인해 봐.”성도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잘생긴 얼굴에는 어이없는 웃음꽃이 피었다.“여섯 장? 충분하지.”“충분하면 됐어. 안녕!”차설아는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문을 열고 자리를 뜨려 했다.사람이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바로 ‘뻔뻔함’이었다.얼굴이 아주 두껍다면 아무리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도 심리적 압박도 없고 대가도 치르지 않을 것이다.예를 들어, 그녀가 성도윤과 하룻밤을 보낸 건, 절대 차설아의 ‘짐승 본능’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이다. 타고난 여우 기질이 너무 강해서 범죄를 부르는 건 성도윤이었으니 말이다.성도윤도 차에서 내려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인간 요람’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한 자세를 계속 유지하다 보니 뼈가 뻣뻣해졌고, 특히 허리가 시큰거렸다.그가 몸을 일으켜 앉자마자 허리춤에서 ‘뿌드득’하는 소리가 나더니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젠장!”진무열의 말대로 허리가... 삐끗한 것이다.“차설아!”그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해 차갑게 소리를 질렀다.“또 왜?”“와서 좀 도와줘.”성도윤은 늘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창피한 순간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도와달라고?”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로봇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별로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지 않은데?”“허리를 삐끗해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성도윤은 전형적인 거짓 미소를 지으며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난 운동 좀 해야 해. 다 나으면 나랑 같이 운동해 줘.”“콜록!”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비뚤어진 생각을 했고 민망해서 더 이상 깝죽거리지 못하고 이내 화제를 돌렸다.“병원까지 부축해 줄게.”“병원 안 가도 돼.”“허리를 다쳤을 때 병원에 가도 누워 있기만 해. 일단 부축해서 방으로 가 줘. 그리고 가정의 부르면 돼.”“그래.”차설아는 이 방법도 괜찮을 것 같았다.성씨 가문의 가정의는 해안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병원의 전문의로 실력이 좋았다.“부축해 줄 테니까 내 목부터 잡아.”차설아는 허리를 약간 숙여 성도윤의 긴 팔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고는 남자를 부축해 차에서 내리려 했다.성도윤은 그녀의 모습에 당연히 마음이 아파 거절했다.“됐어. 그 야윈 몸으로 어떻게 감당하겠어...”“어허, 이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난 당장 당신을 메고 2층까지 갈 수 있어!”“잘난 척하지 마. 여자가, 아...”성도윤의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이 허공에 붕 떠지더니 차설아의 등에 꼿꼿하게 업혔다.차설아의 발걸음은 아주 가벼웠다. 마치 가벼운 깃털을 짊어진 듯 실력으로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꼬마야, 이 누나는 체력 단련할 때 한 번에 모래주머니 세 개는 거뜬히 업었단다. 족히 300근을 짊어진 거라고!”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차설아의 등에 엎드린 채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역시 차무진 장군의 손녀야. 이게 어디를 봐서 약골 아가씨야. 완전 핵무기나 다름없잖아!’그는 자신과 결혼한 4년 동안 차설아가 어떻게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차설아는 손쉽게 성도윤을 메고 침실에 도착했다.“바로 오 닥터 부를 테니까 누워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당신도 좀 쉬어.”성도윤은 그녀가 걱정되어 말했다.아무리 ‘핵무기’라고 해도 여자로서 체력에 한계가 있을 것이니, 만약 힘들어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오히려 큰일이다.“힘들지도 않은
이렇게 생각한 차설아는 남아서 성도윤과 이혼에 대해 잘 상의하기로 했다.오 닥터는 곧장 성씨 저택에 도착했다. 수년간의 의료 경험을 토대로, 성도윤은 요추 소관절 장애로 정상적인 배열을 잃어 허리 근육이 손상되고 힘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걷기와 눕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지었다.“도윤 씨 허리는 과부하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근거로 가장 적합한 처방을 해드릴 예정입니다.”“물어보세요.”“저기...”오 닥터는 성도윤을 보고 또 차설아를 보더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선생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허리 부상이 심해서 반신불수가 된다거나 평생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건 아니겠죠?”차설아가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보통 환자에게 희망이 없을 때 의사들이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니, 차설아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음, 그건 아니지만 저는 그냥... 도윤 씨 허리가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손상되었는지 묻고 싶지만, 두 분의 사생활이 관련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묻기가 거북해서요.”오 닥터는 손을 비비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아... 그러시군요!”차설아의 작은 얼굴이 순간 목덜미까지 빨개지더니 너무 민망한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이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 부끄러워 죽겠네!’성도윤은 덤덤하게 대답했다.“격렬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자세를 오래 유지하다 보니 허리 근육에 무리가 간 것 같아요.”오 닥터는 듣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자세가 굳어져 생긴 손상이라면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파스를 붙이고 3-5일 동안 휴식을 취하면 됩니다.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주의사항 같은 게 있나요?”“그럼 솔직히 말씀드리죠...”오 닥터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한 자세가 너무 오래되면 허리가 손상되기 쉬우므로 앞으로 자세를 자주 바꿔서 신체의 모든 부분에 힘을 고르게 가할 것을 권장합니다.”“좋은 자세는 부부의 감정을 증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여자를 앞에 두고 그런 낯 뜨거운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어? 이건 변태 같은 짓이라고!”“다른 여자에게 했다면 변태 짓이겠지만, 당신에게 했다면 기껏해야 부부간의 즐거움이겠지.”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눈빛에는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확고함이 가득했다.“지금 우리는 합법적인 부부라는 걸 잊지 마. 부부가 올바른 자세에 대해 논의하는 게 뭐 어때서 그래?”“흥, 합법적인 부부?”차설아는 더욱 분노가 차올라 차갑게 말했다.“비열한 수단으로 내 민증을 가로채고, 직원을 매수해 놓고는 지금 ‘합법적’이라고 말할 염치가 있는 거야?”“당연히 합법적이지. 이의가 있다면 혼인 철회 신청해 봐. 판사가 당신을 지지해 줄까?”“성도윤! 당신 정말 비열해. 이 사기꾼!”차설아는 무력감에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그녀는 당연히 판사가 그녀의 결혼 철회를 판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자식은 매사에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피해 갔기 때문이다.지금 상황에서 그와 이혼할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 그가 자발적으로 이혼에 동의하는 것,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했다.“성도윤, 대표님, 나으리,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나 놀리지 말고 그만 놔주면 안 될까요?”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딱딱한 갑옷을 걷어치우고 남자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부탁했다.“지금 나랑 이혼해 주면 앞으로 언제든 두 아이를 만나게 해줄게. 절대 막지 않을게.”차설아는 성도윤이 원하는 것이 그녀가 아니라 단지 합법적으로 그녀의 손에서 두 아이를 빼앗으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이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양보였다.성도윤은 빙긋 웃었다. 비록 누워 있었지만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듯한 오만함이 느껴졌다.“차설아, 내가 바보야? 이혼하지 않으면 당신과 아이를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는데 내가 왜 이혼하겠어?”그의 물음에 여자는 거의 멘탈이 무너질 뻔했다.“나쁜 자식, 대체 무슨 속셈이야. 나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어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한이 없다는 말까지 하는 차설아에 측은지심이 생겨난 박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차설아 씨 말고는 도련님이랑 맞는 눈이 없어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부담 갖지 마요. 이건 내가 진이한테 빚진 거니까 내가 갚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럼 내일 오전 두 분 만나게 해드릴게요.”그 말에 박서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고 그날 밤을 차설아는 뜬 눈으로 새우게 되었다.하지만 잠을 설친 건 성도윤도 마찬가지였다.차설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사도현의 말에 자신도 연락을 해봤지만 차설아는 줄곧 묵묵부답이었다.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올린 새 스토리를 확인하게 되었다.[내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너뿐이야.]해바라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을 저런 문구와 함께 올렸는데 꽃을 사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의 꽃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진심이 가득한 그 스토리를 본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나 싶었다.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 저런 자신을 올리는 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는 순간 오만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고 싶어 처음으로 그녀의 스토리에 댓글을 달았다.“너 지금 어디야?”하지만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이미 끝난 사이이니 연락을 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성도윤은 새벽 두 시에 비서에게 연락했다.“진무열, 차설아 현재 위치 알아보고 나한테 보내.”보스의 전화에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흐리멍텅했던 진무열은 눈을 비비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보스, 저는 비서지 해커가 아닙니다.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위치를 어떻게 알아냅니까?”“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아침 날 밝기 전까지 무조건 알아내.”말을 마친 성도윤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잠에 들었지만 새벽에 임무를 전달받은 진무열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래요. 그러면 이따 올릴 거니까 일단 로그인해 주세요.”’박서영이 핸드폰을 건네면서 차설아더러 자기 SNS 계정에 로그인하라고 했다.핸드폰을 받아쥔 차설아는 매우 협조적으로 SNS 계정에 로그인했다.구조를 요청할 기회는 많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박서영도 차설아가 진심으로 속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차 믿게 되었고, 다소 놀라면서 말했다.“생각보다 자기 눈을 내놓을 만큼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군요. 그래서 저희 도련님이 당신을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거군요.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저에게 주는 칭찬이에요?”차설아가 박서영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남에게 빚지는 것을 싫어할 뿐이에요.”“저희 도련님께서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도련님이 계속 바보 같이 지내는 것을 두고볼수 없어요. 박서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고통은 결국 도련님만 겪는 거잖아요? 이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는 도련님께서 좀 더 냉정해져서 설아 씨를 곁에 뒀으면 좋겠어요.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연애의 신 같은 건 도련님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박서영은 어릴 적부터 성진 부모의 교육을 받아 성진 한 사람만을 위해 헌신하며, 성진을 위해 무조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성진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중에서 배회하는 사람이었다.이런 사람은 완전히 흑화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착한 모습을 보이면 끝없는 심연에 빠질 뿐이다.이번에는 박서영이 한눈파는 사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박서영은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때 냉혹하고 교활하며 결단력 있는 성진이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다.차설아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박서영에게 물었다.“그동안 성진은 어떻게 지냈나요?”“시각장애인이 뭘 어떻게 지냈겠어요.”박서영은 고개를 저으며
박서영은 그녀를 믿지 못하겠는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말 기꺼이 두 눈을 내놓을 생각이 있으신가요?”그녀는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분명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제가 성진한테 빚진 걸 갚는 거예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어요.”차설아가 말했다.“저를 못 믿겠다면 제가 무사하다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 없어요. 다만 그때 가서 일이 커지면 알아서 처리하세요.”거짓말할 마음도 없는 차설아는 진심으로 이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항상 성진의 헌신 덕분에 남의 인생을 도둑질한 것처럼 느꼈고, 가끔 즐거울 때도 불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다.이 기간에 성진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이 남자가 어떤 어둠 속에 처해있을지, 어떤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원수의 손에 잡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마치 비수처럼 심장에 꽂혀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차설아는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빚을 한 번에 갚고 싶어 했고, 그렇게 되면 그나마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럼 어떤 방법으로 무사하다고 전할 건데요?”박서영은 차설아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여전히 경계하는 어조로 물었다.“SNS에 올리면 되죠.”차설아가 웃으면서 말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위험에 처했을 때 SNS를 올릴 마음이 있겠어요? 제가 SNS를 올려버리면 적어도 제가 안전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SNS만 올리게요?”박서영은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SNS면 충분해요.”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차성철도, 배경윤도, 선우 시원도 각자 바빴기 때문에 그녀를 신경쓸 새도 없었다.이럴 때 SNS를 올리면 최소한 무사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좋아요. SNS 올리는 것만은 허락해 줄게요.”박서영이 여러 번 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