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어리둥절하더니 곧 차설아가 자기 말을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 꼭 그 ‘하룻밤’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성도윤은 설명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더니 비꼬듯 말했다.“나랑 자고 싶으면 자고,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장난감으로 여긴다. 왜?”차설아는 얼굴이 붉어져서 남자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리저리 뒤척이더니 오만 원짜리 지폐 여섯 장을 꺼내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던지고는 말했다.“이건 하룻밤 비용이야. 충분한지 확인해 봐.”성도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잘생긴 얼굴에는 어이없는 웃음꽃이 피었다.“여섯 장? 충분하지.”“충분하면 됐어. 안녕!”차설아는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문을 열고 자리를 뜨려 했다.사람이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바로 ‘뻔뻔함’이었다.얼굴이 아주 두껍다면 아무리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도 심리적 압박도 없고 대가도 치르지 않을 것이다.예를 들어, 그녀가 성도윤과 하룻밤을 보낸 건, 절대 차설아의 ‘짐승 본능’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이다. 타고난 여우 기질이 너무 강해서 범죄를 부르는 건 성도윤이었으니 말이다.성도윤도 차에서 내려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인간 요람’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한 자세를 계속 유지하다 보니 뼈가 뻣뻣해졌고, 특히 허리가 시큰거렸다.그가 몸을 일으켜 앉자마자 허리춤에서 ‘뿌드득’하는 소리가 나더니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젠장!”진무열의 말대로 허리가... 삐끗한 것이다.“차설아!”그는 여자의 뒷모습을 향해 차갑게 소리를 질렀다.“또 왜?”“와서 좀 도와줘.”성도윤은 늘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창피한 순간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도와달라고?”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로봇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별로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지 않은데?”“허리를 삐끗해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성도윤은 전형적인 거짓 미소를 지으며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난 운동 좀 해야 해. 다 나으면 나랑 같이 운동해 줘.”“콜록!”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비뚤어진 생각을 했고 민망해서 더 이상 깝죽거리지 못하고 이내 화제를 돌렸다.“병원까지 부축해 줄게.”“병원 안 가도 돼.”“허리를 다쳤을 때 병원에 가도 누워 있기만 해. 일단 부축해서 방으로 가 줘. 그리고 가정의 부르면 돼.”“그래.”차설아는 이 방법도 괜찮을 것 같았다.성씨 가문의 가정의는 해안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병원의 전문의로 실력이 좋았다.“부축해 줄 테니까 내 목부터 잡아.”차설아는 허리를 약간 숙여 성도윤의 긴 팔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고는 남자를 부축해 차에서 내리려 했다.성도윤은 그녀의 모습에 당연히 마음이 아파 거절했다.“됐어. 그 야윈 몸으로 어떻게 감당하겠어...”“어허, 이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난 당장 당신을 메고 2층까지 갈 수 있어!”“잘난 척하지 마. 여자가, 아...”성도윤의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이 허공에 붕 떠지더니 차설아의 등에 꼿꼿하게 업혔다.차설아의 발걸음은 아주 가벼웠다. 마치 가벼운 깃털을 짊어진 듯 실력으로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꼬마야, 이 누나는 체력 단련할 때 한 번에 모래주머니 세 개는 거뜬히 업었단다. 족히 300근을 짊어진 거라고!”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차설아의 등에 엎드린 채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역시 차무진 장군의 손녀야. 이게 어디를 봐서 약골 아가씨야. 완전 핵무기나 다름없잖아!’그는 자신과 결혼한 4년 동안 차설아가 어떻게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차설아는 손쉽게 성도윤을 메고 침실에 도착했다.“바로 오 닥터 부를 테니까 누워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당신도 좀 쉬어.”성도윤은 그녀가 걱정되어 말했다.아무리 ‘핵무기’라고 해도 여자로서 체력에 한계가 있을 것이니, 만약 힘들어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오히려 큰일이다.“힘들지도 않은
이렇게 생각한 차설아는 남아서 성도윤과 이혼에 대해 잘 상의하기로 했다.오 닥터는 곧장 성씨 저택에 도착했다. 수년간의 의료 경험을 토대로, 성도윤은 요추 소관절 장애로 정상적인 배열을 잃어 허리 근육이 손상되고 힘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걷기와 눕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지었다.“도윤 씨 허리는 과부하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근거로 가장 적합한 처방을 해드릴 예정입니다.”“물어보세요.”“저기...”오 닥터는 성도윤을 보고 또 차설아를 보더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선생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허리 부상이 심해서 반신불수가 된다거나 평생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건 아니겠죠?”차설아가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보통 환자에게 희망이 없을 때 의사들이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니, 차설아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음, 그건 아니지만 저는 그냥... 도윤 씨 허리가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손상되었는지 묻고 싶지만, 두 분의 사생활이 관련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묻기가 거북해서요.”오 닥터는 손을 비비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아... 그러시군요!”차설아의 작은 얼굴이 순간 목덜미까지 빨개지더니 너무 민망한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이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 부끄러워 죽겠네!’성도윤은 덤덤하게 대답했다.“격렬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자세를 오래 유지하다 보니 허리 근육에 무리가 간 것 같아요.”오 닥터는 듣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자세가 굳어져 생긴 손상이라면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파스를 붙이고 3-5일 동안 휴식을 취하면 됩니다.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주의사항 같은 게 있나요?”“그럼 솔직히 말씀드리죠...”오 닥터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한 자세가 너무 오래되면 허리가 손상되기 쉬우므로 앞으로 자세를 자주 바꿔서 신체의 모든 부분에 힘을 고르게 가할 것을 권장합니다.”“좋은 자세는 부부의 감정을 증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여자를 앞에 두고 그런 낯 뜨거운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어? 이건 변태 같은 짓이라고!”“다른 여자에게 했다면 변태 짓이겠지만, 당신에게 했다면 기껏해야 부부간의 즐거움이겠지.”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눈빛에는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확고함이 가득했다.“지금 우리는 합법적인 부부라는 걸 잊지 마. 부부가 올바른 자세에 대해 논의하는 게 뭐 어때서 그래?”“흥, 합법적인 부부?”차설아는 더욱 분노가 차올라 차갑게 말했다.“비열한 수단으로 내 민증을 가로채고, 직원을 매수해 놓고는 지금 ‘합법적’이라고 말할 염치가 있는 거야?”“당연히 합법적이지. 이의가 있다면 혼인 철회 신청해 봐. 판사가 당신을 지지해 줄까?”“성도윤! 당신 정말 비열해. 이 사기꾼!”차설아는 무력감에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그녀는 당연히 판사가 그녀의 결혼 철회를 판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자식은 매사에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피해 갔기 때문이다.지금 상황에서 그와 이혼할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 그가 자발적으로 이혼에 동의하는 것,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했다.“성도윤, 대표님, 나으리,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나 놀리지 말고 그만 놔주면 안 될까요?”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딱딱한 갑옷을 걷어치우고 남자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부탁했다.“지금 나랑 이혼해 주면 앞으로 언제든 두 아이를 만나게 해줄게. 절대 막지 않을게.”차설아는 성도윤이 원하는 것이 그녀가 아니라 단지 합법적으로 그녀의 손에서 두 아이를 빼앗으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이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양보였다.성도윤은 빙긋 웃었다. 비록 누워 있었지만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듯한 오만함이 느껴졌다.“차설아, 내가 바보야? 이혼하지 않으면 당신과 아이를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는데 내가 왜 이혼하겠어?”그의 물음에 여자는 거의 멘탈이 무너질 뻔했다.“나쁜 자식, 대체 무슨 속셈이야. 나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어
성도윤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조금 충격받은 표정이었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당신 솜씨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전혀 놀랍지 않아.”성도윤은 사실 차설아에게 숨겨진 모습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짐작했다.본분을 지키는 차씨 가문의 아가씨는 그저 외부인에게 보이는 가면에 불과했고, 가면 뒤에 숨겨진 신분은 모든 사람의 인식을 깨뜨렸다.다만, 성도윤은 그녀의 가면을 찢을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만약 그녀가 오늘 대범하게 고백하려 한다면 그는 오히려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다.“그래?”차설아는 손가락을 맞잡고 꾸드득 소리를 내더니 조금씩 침대로 다가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다음 목표가 당신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지금의 당신은 내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어. 그러면 우리 결혼은 자동으로 해지되겠지. 당신과 계속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시간 낭비 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마치 몇 개의 날카로운 칼처럼, 번개 같은 속도로 남자의 목을 겨누더니 계속 말했다.“사실 마지막으로 내 손에 죽은 남자는 당신보다 더 건장한 백인이었어. 그저 엄지와 식지만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그 사람 목이 비틀어지고 혀가 무려 몇 센티미터나 떨어져 나갔어. 영화 속의 목매달아 죽은 귀신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고.”차설아는 이 실제 사례를 통해 남자가 자신이 얼마나 지독하고 냉혈한 여자인지 알고 결혼을 취소하기를 바랐다.하지만 남자의 반응은 오히려 정반대였다.성도윤은 전혀 겁먹은 기색도 없이 놀라움까지 띤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손가락 두 개만으로 목을 비틀었다고?”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이 자식,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그게 중점이 아니잖아!’“내가 알기로 세상에 그런 손가락 힘이 있는 사람은 다섯 명을 넘지 않아. 그 다섯 명 모두 만만한 사람이 아닌데, 설마 당신이 그중 한 명이야?”성도윤은 한가로이 떠들어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주 예리하게 시탐하고 있었다.
차설아의 폭주에 성도윤은 시종일관 침착한 표정을 보이더니 느릿느릿 말했다.“아니, 불가능해. 절대 불가능해!”성도윤의 말에 차설아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계속 물러서더니 급기야 남자의 방을 나가버렸다.그녀가 보기에 성도윤의 끈질김은 분명 남모를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남자가 웃는 얼굴일수록 뒤에 숨어 있는 칼날이 더욱 날카로운 법이니 그녀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그 속을 짐작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멀리하고 자신에게 해를 끼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남자가 그녀 때문에 허리를 삐끗하고 지금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이렇게 가버리는 건 너무 인정머리는 없는 행동이었다.그래서 차설아는 소영금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드님이 허리를 다쳤으니 사람을 보내 돌봐주세요.”차설아의 전화를 받은 소영금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그래도 너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내가 지금 어디게?”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건성으로 물었다.“몰라요, 어디신데요?”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아드님이 허리를 삐끗했어요. 꽤 심각해요.”“하하하, 바보야. 나 지금 원이와 달이를 데리고 애들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이다. 두 사람 오늘 반드시 미칠 듯이 기뻐하겠지. 너도 어서 도윤이와 함께 오거라. 그럼 어르신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니.”“네? 원이와 달이를 데리고 가셨다고요?”차설아는 폭발할 지경이었다.“누가 함부로 제 아이를 데려가라고 했어요? 당장 돌려보내세요!”그녀가 아이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성씨 가문이 보통 집안도 아니고, 그들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차설아가 맞서야 하는 것은 성도윤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아가, 그게 무슨 말이냐. 할머니인 내가 애들을 데리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이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냐?”“제 동의를 거치지 않았으면 그제 잘못이죠!”“그럼 지금 정중히
차설아가 소영금이 아이들을 데려가도록 내버려둘지 망설이고 있을 때, 소영금의 목소리가 갑자기 엄숙해졌다.“설아야, 네가 우리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거 잘 안다. 내 아들을 미워하고 나도 미워하겠지. 전에는 우리가 확실히 너에게 상처 주는 일을 많이 했어. 하지만... 아버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진심으로 대하셨고 친손녀처럼 대하셨어. 그건 잘 알고 있지?”“할아버지께서 제게 잘해 주신 것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어요.”“그러니까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이번 한 번만 봐줘, 응?”“...”차설아가 여전히 답이 없자 소영금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넌 모르겠지만 아버님 건강이 요즘 많이 안 좋아지셨어. 의사가 이번 겨울을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고 했어.”“네?”차설아는 여기까지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심장이식 수술을 받으셨잖아요. 게다가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왜...”“설아야, 금세 잊은 거야? 그게 다 4년 전 일이다. 네가 해안을 떠난 지 4년이 지났고, 아버님도 연세가 드셨어. 이식된 심장도 사용 기한이 있어 뒤로 갈수록 위험이 커지고, 게다가 많은 기초 질환이 있어 지금 상태가 아주 안 좋아.”“할아버지는 한 번도 제게 그런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없었어요. 제가 만나러 갈 때마다 기운이 펄펄 나셔서 건강이 잘 회복된 줄 알았어요...”차설아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그녀의 마음속에 성주환은 친할아버지 못지않게 중요한 사람이었다.그렇게 인자한 어르신이 할아버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정말 괴로웠다.“네가 떠난 요 몇 년 동안, 아버님은 늘 네 얘기만 하셨어. 퍽 하면 도윤이를 눈이 멀어 너처럼 좋은 며느리를 놓아주었다고 혼냈어. 아버님의 가장 큰 소원이 바로 너랑 도윤이가 화해해서 작은 증손자를 안겨 주는 거야...”소영금은 원래 꿋꿋한 성격이지만,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슬퍼져 코끝이 시큰거렸다.“도윤이는 이런 일로 너에게 부담을 줄
“하하, 방금까지만 해도 나랑 결혼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또 당신네 가문 일이라고?”차설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금 목이 메어왔다.“만약 할아버지가 갑자기 떠나시면 내가 어떤 심정일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성도윤은 차갑게 웃었다.“뭐 어떤 심정이겠어? 당신 눈에 우리 가문은 죄악이 깊으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거 아니야?”“성도윤! 이 나쁜 놈!”차설아는 화가 나서 그의 앞에 달려들어 팔을 치켜올리고 그에게 주먹을 날리려고 했지만 아직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날 대체 어떤 사람으로 여기는 거야? 내가 당신과 같은 냉혈동물인 줄 알아? 내가 친할아버지처럼 여긴다는 걸 알면서 왜 날 속였어? 내가 평생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바라?”“당신한테 알려주면 뭐가 달라져?”성도윤의 눈빛은 차갑게 목소리는 시큰둥했다.“지금 당신이 알았다고 해서 뭘 바꿀 수 있는데? 아니면 할아버지가 완쾌하기라도 하셔?”“내가 알았으니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신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게 해드릴 거야...”차설아는 묵묵히 주먹을 쥐더니 단호하고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 성도윤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예를 들면 어떻게?”“뭐겠어? 바보야!”차설아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면서 이 녀석이 일부러 모르는 척한다고 생각했다.“나 진짜 몰라.”성도윤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성도윤은 복잡한 차설아의 생각을 추측할 수 없었다.“할아버지께서는 늘 우리 재결합을 바라셨어. 어쩌다 보니 지금 혼인신고까지 했으니 할아버지 소원을 이뤄준 거나 마찬가지야. 게다가 원이와 달이의 힘까지 보태면 할아버지가 너무 기쁘셔서 병이 나으실지도 모를 것 같은데?”차설아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그녀는 그동안 성주환의 병세가 이 지경이 된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연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보니 이 ‘연기’는 꼭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주환은 평생 한을 풀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것이다.“그러니까 나랑 다시 시작하겠
성도윤의 반응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미안해요. 저는 그냥 도윤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차설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아는 성도윤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먹이 사슬의 최고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 무너져 버리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무엇보다도 성도윤이 가장 후회할 거라는 것을 아는 차설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후회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 나는 이제 어른이고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아.”성도윤은 불만을 억누르려 애쓰며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덮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의 관계는 진짜 유리 조각인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맑고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지켜나가야 해. 나는 우리가 힘들게 찾은 이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주면 안 돼?”“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함께 맞서면 되니까요.”차설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성도윤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사실 가장 힘든 건 성도윤이 아니라 차설아였다. 만약 예전처럼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도윤이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기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성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를 도와줄 힘도 없으면서 부담만 늘려 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꾸 포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네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날이 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성도윤은 차설아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그러다가 성도윤은 깊은숨을 내쉬고 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
차설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이거 장미예요? 향이 정말 좋아요. 분명 아주 생생하고 예쁠 거예요.”“지나가다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 장미가 보여서 샀어. 예쁘잖아.”성도윤은 아낌없이 달콤한 말을 건넸다.“도윤 씨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니에요? 열 마디 중 아홉 마디가 사랑 고백인데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은 일 년에 한 번도 안 했을걸요?”차설아는 부끄러운 듯 장난을 치면서 그를 놀렸다.성도윤은 전형적인 철벽남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달달한 말은커녕 대화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참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차설아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그녀가 스테이크 자르는 걸 불편해하자 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그에게 물었다.“오늘 회의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어요?”성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대표 자리에 있으면 편한 날이 없지. 익숙해.”“사람들이 도윤 씨를 곤란하게 했죠? 뉴스에도 나왔던데...”성대 그룹이 뭘 하든 기자들은 항상 과장해서 말했고 모두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은 차설아도 알게 될 정도였다.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큰 문제에 부딪혔다는 걸 말이다. 깊이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성도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면서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차설아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내가 누군데? 성대 그룹의 대표야. 그래서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요즘 회사 실적이 좋지 않으니 견제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너무 걱정하지는 마. 최악이라고 해도 내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만이야. 어차피 돈은 넘쳐나니까. 너랑 아이들한테 쓸 돈은 충분해. 게다가 우리 아내도 한 재력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도윤은 마치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차설아네 집으로 돌아갔다.예전에는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하던 워커홀릭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1분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의 이런 태도는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를 따라 항상 야근을 하던 회사 직원들도 야근을 줄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한층 더 좋아졌다.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꽃 한 다발 스테이크를 샀다. 오늘 저녁은 차설아와 함께 촛불을 켜고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비록 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성도윤에게는 몇 주일 같이 느껴졌다.게다가 달이와 원이도 이틀 동안 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집에는 차설아와 그녀를 돌봐주는 가정부 현이만이 남아 있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현이는 시급을 받는 가정부였기에 성도윤이 집에 돌아오자 짐을 챙겨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는 거실과 집 안을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성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설아는 어디 있어?”“설아 씨는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 지금 침실에서 쉬고 계세요. 깨워드릴까요?”“아니, 그냥 퇴근해. 오늘 수고했어.”성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현이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넓은 저택에는 성도윤과 차설아,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차설아를 깨우지 않았고 꽃을 내려놓은 후 바로 주방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팬 위에서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가 적당하게 익자 성도윤은 그 위에 후추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최상급 레드와인을 꺼냈다.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왜 이렇게 로맨틱하게 구는 거죠?”그가 뒤를 돌아보자 차설아가 잠옷 차림으로 주방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왜 내려왔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성진은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분명 이 싸움에서 이긴 건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철저하게 패배한 기분이었다.성도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상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설아야, 오늘 어땠어?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퇴근하고 가서 만들어 줄게.”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달달한 그 분위기는 옆에서 듣는 사람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성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성도윤이 사무실을 떠나려 하자 성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형, 설아랑 다시 잘 지낸다며? 다 잊어버린 거 아니었어? 근데 이렇게 빨리 화해했다고? 설마 또 한 번 상처 주려고 그러는 거야?”성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으로 끝난 사이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완전히 남남이 되어 다시는 엮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한두 달 만에 원래 사이로 돌아간 데다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눈동자까지 희생해 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에 성진은 절망스러웠다. 성도윤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그 모든 걸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성도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 없었다.“내가 설아랑 어떻게 지내는지 너한테 보고해야 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성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부러우면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찾아서 결혼하면 되잖아. 따뜻한 가정을 꾸려서 행복을 누리면 되잖아. 다만...”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회의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지금 너한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을까?”성도윤의 말투는 누가
성진의 말에 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나중에야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성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에게 놓고 말하면 성진이 생명의 은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그렇다면 일단 부대표님 뜻대로 진행하죠. 일단 한 분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시도해 보세요. 지켜보겠습니다.”성도윤의 냉정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고 이는 곧 성대 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주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역시 형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 나서 성대 그룹의 이익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 어떡할 건데?”“넌 내가 어떤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성도윤을 지지하는 세력과 성진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말이다.그때, 오준현이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은 항상 회사를 위해서 생각해 주시는 분입니다. 만약 부대표님께서 정말 그룹에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성 대표님도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그러자 박지훈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오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오준현 씨, 회사의 대표 자리는 인간성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회사에 수천 명의 직원이 있어도 성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인간성이요? 그게 수익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주인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이익뿐이라고요. 누가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우리가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두 파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두고 대립해서 싸우기 시작했다.보다 못한 성도윤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
“제 비서 뜻이 곧 제 뜻입니다. 지금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확장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성도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성 대표님,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너무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이 작은 규모만 지키려다가 무너지고 싶으세요?”장기준이 가감 없이 성도윤에게 의문을 제기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는 형이 왜 이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지난 반년 동안 큰 충격을 겪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죠. 그로 인해서 성격까지 바뀐 겁니다. 좀 더 신중해진 거죠.”“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 형은 뇌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거든요.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세요? 석현아, 주주님들께 보여 드려.”“네, 부대표님.”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성도윤의 건강 검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그러자 진무열이 분노하며 성진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성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는 개인 정보예요! 함부로 유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진 비서님, 진정하세요. 형을 생각해서라면 건강 검진 결과는 당연히 비밀로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형은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이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에요. 형의 건강 상태도 곧 성대 그룹의 미래와 이어진다는 겁니다. 다들 성대 그룹의 수익이 감소한 원인을 찾고 있지 않나요? 전 이 검진 결과가 그 원인을 충분히 설명해 줄 거라 생각해요.”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주주들은 검진 결과를 확인한 후,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이럴 수가! 성 대표님의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을 줄은...”“뇌를 다친 데다가 기억 상실증까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경영 방식이 전과 너무 다르더라니... 그 원인이 여기 있었군요.”“성대 그룹이 갑자기 변한 건 대표님
모든 주주들이 일제히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충격이 서려 있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대표님께서 실명했다고 하지 않았어?”“전에는 몸 상태도 많이 약해서 부대표님 자리까지 내려놓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생기가 넘치잖아?”“돌아왔다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제 성대 그룹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겠어!”주주들은 성진의 복귀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성진이 성도윤을 대신해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하며 중얼거렸다.성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곧장 성도윤의 곁으로 다가갔다.“형, 미안해. 그동안 형 혼자 성대 그룹을 관리하느라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젠 나도 회복했으니 형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성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성진을 응시했다.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성도윤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성도윤은 그 생각을 깊이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회복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 잘해보자. 우린 같은 배를 탄 사람이니까. 정말로 성대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만 있다면 나도 네가 돌아온 걸 환영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성도윤은 마음속의 불안을 접어두고 형식적인 말로 대응했다.“역시 형은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야. 걱정 마,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내가 형의 자리를 대신해 성대 그룹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속에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순간, 주주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좋아, 그럴 실력이 있다면 말이지.”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성진은 의자를 당겨서 자리에 앉았고 그의 비서인 석현이 나서서 주주들에게 새로운 전략과 방안을 설명했다.주주들은 숨죽이며 그의 말을 들었고 그들의 표정은 점점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해외 지사를 맡아왔던 만큼 확실히 사고방식이 개방적이네. 만약 이 계
“성 대표님, 지금 하셔야 할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지금 주주총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인 겁니다. 저희에게는 지금 수많은 경쟁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능력 있는 인재들조차 불안함을 느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이죠.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장기준이 말했다. 직접적으로 성도윤에게 대표직에서 물러나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의도는 뻔히 보였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어떤 해결책이 가장 좋다고 보십니까?”“그건 저도 모르죠. 제가 뭘 알겠습니까...”성도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장기준은 순간적으로 주춤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오준현이 나섰다.“간단합니다.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거죠. 그리고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해요.”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에 있던 수십 명의 주주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각자의 속셈을 감추듯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도윤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기준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아뇨,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성대 그룹을 위해서, 또 성 대표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장기준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해명했다.“그럼 그 깊은 배려에 감사드려야겠군요.”성도윤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섬뜩할 정도로 서늘했다.그때, 한 주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장기준 씨의 의견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 대표님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죠. 괜히 대표 자리를 바꿨다가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요?”그러자 오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여러분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한편, 성대 그룹에서.성도윤의 지각은 이미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주요 주주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비서가 연간 그룹의 매출과 주요 프로젝트 성과를 보고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회의실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성 대표님, 보시다시피 올해 성대 그룹의 전체 이익이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관련 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고 있어요. 지금의 성대 그룹은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책임자로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있습니까?”7대 주주 중 한 명인 오준현이 말했다.그는 평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매년 주주총회에서만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날카롭게 비판을 던졌는데 항상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도윤을 깎아내렸다.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성씨 가문 사람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러자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박지훈이 나섰다.“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이익을 볼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성 대표님께서 성대 그룹을 맡은 후로 회사는 점점 성장해 왔습니다. 주가가 조금 하락했다고 이러시는 건가요?”“다들 아시다시피, 최근 몇 년간 특수 상황 때문에 대다수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성대 그룹은 그나마 하락폭이 적은 편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성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미 파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요?”박지훈은 성도윤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지분은 많지 않았지만 성도윤과의 친분 덕분에 회사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그러나 오준현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성대 그룹이 몇 달째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성 대표님 덕분이란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 대표님께 상을 하나 드려야겠네요?”그의 냉소적인 말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오준현만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는 단순히 배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