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의 폭주에 성도윤은 시종일관 침착한 표정을 보이더니 느릿느릿 말했다.“아니, 불가능해. 절대 불가능해!”성도윤의 말에 차설아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계속 물러서더니 급기야 남자의 방을 나가버렸다.그녀가 보기에 성도윤의 끈질김은 분명 남모를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남자가 웃는 얼굴일수록 뒤에 숨어 있는 칼날이 더욱 날카로운 법이니 그녀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그 속을 짐작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멀리하고 자신에게 해를 끼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남자가 그녀 때문에 허리를 삐끗하고 지금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이렇게 가버리는 건 너무 인정머리는 없는 행동이었다.그래서 차설아는 소영금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드님이 허리를 다쳤으니 사람을 보내 돌봐주세요.”차설아의 전화를 받은 소영금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그래도 너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내가 지금 어디게?”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건성으로 물었다.“몰라요, 어디신데요?”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아드님이 허리를 삐끗했어요. 꽤 심각해요.”“하하하, 바보야. 나 지금 원이와 달이를 데리고 애들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이다. 두 사람 오늘 반드시 미칠 듯이 기뻐하겠지. 너도 어서 도윤이와 함께 오거라. 그럼 어르신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니.”“네? 원이와 달이를 데리고 가셨다고요?”차설아는 폭발할 지경이었다.“누가 함부로 제 아이를 데려가라고 했어요? 당장 돌려보내세요!”그녀가 아이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성씨 가문이 보통 집안도 아니고, 그들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차설아가 맞서야 하는 것은 성도윤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아가, 그게 무슨 말이냐. 할머니인 내가 애들을 데리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이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냐?”“제 동의를 거치지 않았으면 그제 잘못이죠!”“그럼 지금 정중히
차설아가 소영금이 아이들을 데려가도록 내버려둘지 망설이고 있을 때, 소영금의 목소리가 갑자기 엄숙해졌다.“설아야, 네가 우리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거 잘 안다. 내 아들을 미워하고 나도 미워하겠지. 전에는 우리가 확실히 너에게 상처 주는 일을 많이 했어. 하지만... 아버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진심으로 대하셨고 친손녀처럼 대하셨어. 그건 잘 알고 있지?”“할아버지께서 제게 잘해 주신 것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어요.”“그러니까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이번 한 번만 봐줘, 응?”“...”차설아가 여전히 답이 없자 소영금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넌 모르겠지만 아버님 건강이 요즘 많이 안 좋아지셨어. 의사가 이번 겨울을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고 했어.”“네?”차설아는 여기까지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심장이식 수술을 받으셨잖아요. 게다가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왜...”“설아야, 금세 잊은 거야? 그게 다 4년 전 일이다. 네가 해안을 떠난 지 4년이 지났고, 아버님도 연세가 드셨어. 이식된 심장도 사용 기한이 있어 뒤로 갈수록 위험이 커지고, 게다가 많은 기초 질환이 있어 지금 상태가 아주 안 좋아.”“할아버지는 한 번도 제게 그런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없었어요. 제가 만나러 갈 때마다 기운이 펄펄 나셔서 건강이 잘 회복된 줄 알았어요...”차설아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그녀의 마음속에 성주환은 친할아버지 못지않게 중요한 사람이었다.그렇게 인자한 어르신이 할아버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정말 괴로웠다.“네가 떠난 요 몇 년 동안, 아버님은 늘 네 얘기만 하셨어. 퍽 하면 도윤이를 눈이 멀어 너처럼 좋은 며느리를 놓아주었다고 혼냈어. 아버님의 가장 큰 소원이 바로 너랑 도윤이가 화해해서 작은 증손자를 안겨 주는 거야...”소영금은 원래 꿋꿋한 성격이지만,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슬퍼져 코끝이 시큰거렸다.“도윤이는 이런 일로 너에게 부담을 줄
“하하, 방금까지만 해도 나랑 결혼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또 당신네 가문 일이라고?”차설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조금 목이 메어왔다.“만약 할아버지가 갑자기 떠나시면 내가 어떤 심정일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성도윤은 차갑게 웃었다.“뭐 어떤 심정이겠어? 당신 눈에 우리 가문은 죄악이 깊으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거 아니야?”“성도윤! 이 나쁜 놈!”차설아는 화가 나서 그의 앞에 달려들어 팔을 치켜올리고 그에게 주먹을 날리려고 했지만 아직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날 대체 어떤 사람으로 여기는 거야? 내가 당신과 같은 냉혈동물인 줄 알아? 내가 친할아버지처럼 여긴다는 걸 알면서 왜 날 속였어? 내가 평생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바라?”“당신한테 알려주면 뭐가 달라져?”성도윤의 눈빛은 차갑게 목소리는 시큰둥했다.“지금 당신이 알았다고 해서 뭘 바꿀 수 있는데? 아니면 할아버지가 완쾌하기라도 하셔?”“내가 알았으니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신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게 해드릴 거야...”차설아는 묵묵히 주먹을 쥐더니 단호하고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 성도윤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예를 들면 어떻게?”“뭐겠어? 바보야!”차설아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면서 이 녀석이 일부러 모르는 척한다고 생각했다.“나 진짜 몰라.”성도윤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성도윤은 복잡한 차설아의 생각을 추측할 수 없었다.“할아버지께서는 늘 우리 재결합을 바라셨어. 어쩌다 보니 지금 혼인신고까지 했으니 할아버지 소원을 이뤄준 거나 마찬가지야. 게다가 원이와 달이의 힘까지 보태면 할아버지가 너무 기쁘셔서 병이 나으실지도 모를 것 같은데?”차설아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그녀는 그동안 성주환의 병세가 이 지경이 된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연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보니 이 ‘연기’는 꼭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주환은 평생 한을 풀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것이다.“그러니까 나랑 다시 시작하겠
‘혹시 나랑 미스터 Q가 연기한 걸 성도윤이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때는 두 아이를 속이려고 사랑하는 척 연기한 거니 미스터 Q 본인 외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미스터 Q가 자발적으로 성도윤에게 이 사실을 자백했다면 모를까! 만약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슨 사이일까? 어떤 남모를 비밀을 감추고 있는 걸까?’“당신 무슨 생각해?”“아니, 생각은 무슨.”“진짜 아니야?”“당연하지!”차설아는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말했다.“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그래, 그럼.”성도윤은 웃는 듯 마는 듯 차설아를 보며 그녀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성도윤이 미스터 Q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녀의 불같은 성격으로 성도윤은 제자리에서 두들겨 맞아 죽을 수도 있다.“성도윤, 내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만약 동의한다면 오늘 밤 큰 집에 가서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자고.”차설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성도윤과 진지하게 상의하며 눈 밑에 슬픔을 머금었다.성주환이 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차설아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성주환의 감정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자기 손자를 볼 수 있는 기회까지 박탈시켰으니 실로 잔인했다.아직은 몸이 정정하고 의식이 또렷할 때 그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고 싶었다.“난 좋아.”성도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하지만 우리의 연기가 언젠가는 진실한 감정이 되었으면 좋겠어... 만약 우리가 함께해서 행복할 가능성이 만분의 일이라고 해도 난 용기 내서 시도해 보고 싶어!”이번에는 차설아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그래, 해보자.”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차설아는 문득 깨달았다.사람의 한평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으니 생사 앞에서 놓지 못할 원한이 없었다.만약 그들이 함께해서 진짜 행복할 수 있다면 당연히 시도해 봐야 했다.적
‘81코너’는 전체 해안에서 가장 험하고 굽은 길이 가장 많은 산길이며, 또한 천연적인 레이싱 경주장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굽은 길을 합하면 모두 81굽이이기 때문에 ‘81코너’라고도 불린다.일부 지하 폭주족들은 81코너에 가서 기술을 익히려다가 목숨을 많이 잃기도 했다.오늘날 그곳은 폭주가 금지되어 있지만, 밤이 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찾아가곤 했다. 차설아도 그중 한 명이었다.성도윤은 창밖으로 천천히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속도 내고 싶으면 마음껏 달려도 돼. 나 성도윤은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 앞으로 내 앞에서는 참지 말고 온전한 차설아의 모습으로 편하게 지내면 돼.”예전의 차설아는 항상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억누르고 그의 앞에서 완벽한 아내로 분장했다.하지만 성도윤은 그녀가 완벽할수록 더 거부감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져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오히려 지금은, 그녀가 아랑곳하지 않고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니 점점 더 관심이 갔다.“자신을 가장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이성이 바로 평생의 동반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내가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됐으면 좋겠어. 인간 화보나 조각상 같은 존재로 당신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해.”성도윤은 줄곧 말수가 적었고 낯 뜨거운 말도 잘 못 했지만 이 말은 꽤 감동적이었다.차설아는 이 남자의 갑작스러운 ‘투정’에 어리둥절했다.‘이 남자 혹시... 연기가 아니라 진심인 거야?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해. 온몸에 소름이 돋잖아!’“그럼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있어?”차설아는 평온하게 액셀을 밟으며 날카롭게 말했다.“하나의 큰 빙산이 더 이상 차갑지 않고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게 되면 사람을 기분 좋게 하지 않고 오히려 공포 영화 같다는 건 알아?”“그건 당신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성도윤은 덤덤한 것 같지만 열정적으로 말했다.“당신이 익숙해지면 온순한 토끼도 사람을 긁는 길고양이일 수도 있고,
성씨 저택 안.성주환은 감격에 겨워 늙은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는 소영금이 데려온 원이와 달이를 보고 있었다.“얘들아,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증조할아버지셔. 성씨 가문에서 너희 엄마를 가장 아끼시는 분이고 또 너희 아빠가 가장 무서워하는 분이셔.”소영금은 두 꼬마를 향해 열정적으로 소개했다.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소영금은 이미 아이들의 생각을 확실히 파악했다.차설아에게 잘해주고 성도윤에게 나쁜 사람은 모두 그들의 ‘전우’였다.그래서 소영금은 시간만 나면 자기 아들을 끌어내 비판하면서 아이들의 환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이렇게 소개하면 아이들이 분명 성주환을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다. 역시 늘 신중한 원이가 먼저 성주환에게 다가갔다.원이는 고개를 쳐들고 성주환의 주름진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작은 손으로 노인의 늙고 마른 손가락을 부드럽게 잡고는 어른처럼 진심을 담아 말했다.“증조할아버지는 아주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우리 엄마에게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달이도 덩달아 앞으로 나아가 먼저 원이를 보며 득의양양해서 말했다.“오빠, 드디어 잘생긴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내 생각에 동의한 거야? 우리는 앞으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야 해...”그리고는 다시 돌아서서 부드러운 작은 손으로 성주환의 다른 손을 잡고 달콤하게 웃었다.“증조할아버지, 전 달이라고 해요. 제가 본 중에 가장 자상하게 생긴 어르신이시네요. 젊었을 때 분명히 아주 잘생겼을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해요!”“음, 그건...”두 아이의 모습에 큰 풍랑을 겪은 성주환도 어리둥절해서 한참 후에야 반응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아주 좋아. 너희들은 바로 내 증손자야, 우리 가문의 핏줄이라고. 이런 날이 올 줄 생각지도 못했는데...”성주환은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한편으로는 활짝 웃으며 한편으로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화려한 천장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장군님, 이 두 아이가 바로 도윤이와 설아의 아이입니다
“맞아, 내 말이 바로 그거다.”성주환은 녀석들의 말을 들으며 눈시울을 더욱 촉촉하게 적시고 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역시 우리 설아의 아이들이야. 아주 똑똑해. 네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이해력이 훨씬 뛰어나고, 나무처럼 딱딱한 아버지보다 감정이 풍부해. 성씨 가문은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차씨 가문의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았어.”성명원도 손자 손녀의 이해력에 놀랐지만 그래도 자존심을 세워야 했기에 나지막이 말했다.“아버지, 우리 도윤이 유전자도 나쁘지 않아요. 두 아이가 EQ는 설아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지능은 도윤이에게 물려받은 거죠.”“말도 안 되는 소리!”성주환은 그를 흘겨보더니 말했다.“우리 설아가 얼마나 수재였는지 몰라? 몇 등급이나 뛰어올라 단박에 석사 박사까지 따냈다고. 게다가 가장 어려운 물리학을 전공했어. 얼마나 머리를 많이 쓰는 곳인데 어디 도윤이와 비교해? 그 자식은 내가 보기에 사업만 할 줄 알아!”성주환이 한창 투덜대고 있는데 차설아가 성도윤을 밀며 거실로 들어왔고 난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어머, 설아야. 진짜 도윤이와 함께 올 줄은 몰랐어. 넌 정말 효심이 깊은 착한 아이야.”소영금은 열정적으로 다가가 차설아의 팔짱을 끼며 맞이했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는 친아들 성도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설아야, 오느라 고생 많았지? 이렇게 큰 짐까지 챙겨야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어서 가서 앉으렴. 목은 안 말라? 뭐 좀 마셔.”그녀는 차설아를 잡고 나란히 앉아 하인에게 빨리 최고급 장미 보양차를 준비하라고 분부했다.“저 목 안 마르고 힘들지도 않아요.”차설아는 그녀의 과분한 열정에 대처할 겨를이 없었다. 눈시울을 붉히며 성주환의 방향을 바라보며 울먹였다.“할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늦었어요. 할아버지가 아프신 줄도 모르고...”성주환은 이 말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늦었다니 그게 뭔 말이냐? 나 아직 안 죽었다. 한 끼에 밥도 두 그릇이나 먹으면서 잘 먹고 잘살고 있어. 너희 젊은이들보다 더 건강하고!
“조용히 하세요...”성도윤은 목청을 가다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게 있어요.”모두들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지만 표정은 좀 귀찮아 보였다.특히 성주환은 성도윤을 볼 때마다, 불행한 것을 보는 듯 귀찮은 모습이었다.“흥, 네 놈이 무슨 기쁜 소식을 전하겠어? 흥이나 깨지 않으면 다행이지.”소영금도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아들, 아버님은 널 좋아하지 않으시고, 손자 손녀도 널 싫어해. 무엇보다 설아도 널 싫어해... 우리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얼른 방에 들어가 있어.”성명원은 더욱 눈살을 찌푸리며 재촉했다.“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 간략하게 설명해. 나 지금 원이와 달이에게 호두를 까주고 있단 말이야...”그리고 성명원은 껍질을 벗긴 신선한 호두를 각각 원이와 달이에게 먹이며 두꺼운 목소리를 애써 꼬아서 말했다.“원아, 달아. 호두를 많이 먹으면 머리가 좋아져. 네 아빠처럼 생각 없이 행동하면 안 된다.”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이런, 이 두 녀석이 온 후로 가문에서 내 지위는 그야말로 곤두박질쳤어! 난 그저 성씨 가문의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한 도구였던 거야?’“다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이 소식을 발표하면 모두 미친 듯이 기뻐할걸요?”성도윤은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바득바득 애를 썼다. 예쁜 입꼬리를 씩 올리며 뜸을 들였다.모두 그를 3초 동안 차갑게 쳐다본 후 다시 눈을 흘기더니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저랑 설아 재혼했어요.”성도윤은 턱을 치켜들고 덤덤하게 내뱉었지만 그 위력은 집안 전체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대단했다.“뭐... 뭐라고?”성주환은 비틀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감격에 겨워 성도윤을 바라보았다.“설마 내 귀가 잘못된 거냐? 왜 네가 방금 설아와 재혼했다고 들은 것 같지?”소영금은 놀란 얼굴로 숨을 죽였다.“아버님이 잘못 들으신 게 아니에요. 방금 이놈이 확실히 설아와 재혼했다고 말했어요!”“또 말로만 이 늙은이를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한이 없다는 말까지 하는 차설아에 측은지심이 생겨난 박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차설아 씨 말고는 도련님이랑 맞는 눈이 없어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부담 갖지 마요. 이건 내가 진이한테 빚진 거니까 내가 갚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럼 내일 오전 두 분 만나게 해드릴게요.”그 말에 박서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고 그날 밤을 차설아는 뜬 눈으로 새우게 되었다.하지만 잠을 설친 건 성도윤도 마찬가지였다.차설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사도현의 말에 자신도 연락을 해봤지만 차설아는 줄곧 묵묵부답이었다.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올린 새 스토리를 확인하게 되었다.[내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너뿐이야.]해바라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을 저런 문구와 함께 올렸는데 꽃을 사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의 꽃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진심이 가득한 그 스토리를 본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나 싶었다.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 저런 자신을 올리는 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는 순간 오만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고 싶어 처음으로 그녀의 스토리에 댓글을 달았다.“너 지금 어디야?”하지만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이미 끝난 사이이니 연락을 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성도윤은 새벽 두 시에 비서에게 연락했다.“진무열, 차설아 현재 위치 알아보고 나한테 보내.”보스의 전화에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흐리멍텅했던 진무열은 눈을 비비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보스, 저는 비서지 해커가 아닙니다.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위치를 어떻게 알아냅니까?”“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아침 날 밝기 전까지 무조건 알아내.”말을 마친 성도윤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잠에 들었지만 새벽에 임무를 전달받은 진무열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
“하느님도 도련님의 억울함을 느꼈나 보죠.”“기증자는 어떤 사람인데? 남자야? 여자야? 성씨 가문의 사람이야?”성진은 기쁘긴 했지만, 생각은 꽤 신중했다.세상에 공짜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그는 진실부터 파헤쳐 보기로 했다.“그게...”박서영은 성진이 기증자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손톱을 뜯으면서 아무렇지않게 말했다.“여대생인데 집안에 돈이 부족해서 저희 모집 정보를 보고 건강 검진 결과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만약 눈을 기증한 사람이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차설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수술을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몰랐다.“아, 가난한 여대생이라...”성진은 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몸을 팔고, 누군가는 신장을 팔고, 심지어 누군가는 목숨을 팔기도 했다. 한 쌍의 눈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시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정말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면, 돈을 섭섭지 않게 챙겨드려. 가능하다면 그녀와 가족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성진이 매우 의리 있게 말했다.그는 비록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잘 진행될 거예요. 도련님, 수술을 받으실 거예요?”박서영은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기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내 자신을 사랑해. 그리고 누가 괜히 시각장애인이 되고 싶겠어? 만약 정말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수해서 설아를 내 곁에 단단히 붙잡아 놓을 거야.”“도련님, 시력을 회복하면 첫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설아 씨를 되찾는 거예요?”“그럼!”성진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그동안 난 설아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
박서영은 이렇게 슬프고 비관적인 성진을 보며 마음이 아파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도련님은 그 여자 때문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예전의 도련님은 이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어요...”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그녀를 만나면서 더욱 나 자신으로 변해버린 거고.”성진은 깊고도 막연한 초점 없는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아니잖아요!”박서영은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감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요. 분명 그때 성도윤 씨는 도련님을 상대로 패배했잖아요. 도련님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지금 성대 그룹은 도련님이 지배하고 있었을 텐데, 결국엔... 그 여자를 위해서 어떻게 성도윤 씨한테 골수와 눈을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저희는 구석에서 세월이나 한탄하면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렸잖아요. 너무 억울해요!”박서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성진은 손가락을 움찔하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그렇다. 예전의 그는 사고가 명확하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배부른 나머지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의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 될 줄 몰랐다.“도련님,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박서영은 흔들리는 성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잘 모르겠어.”아주 진솔한 대답이었다.“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사랑에 미친다고 하잖아. 나는 이미 그래봤으니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과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래요. 그러면 이따 올릴 거니까 일단 로그인해 주세요.”’박서영이 핸드폰을 건네면서 차설아더러 자기 SNS 계정에 로그인하라고 했다.핸드폰을 받아쥔 차설아는 매우 협조적으로 SNS 계정에 로그인했다.구조를 요청할 기회는 많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박서영도 차설아가 진심으로 속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차 믿게 되었고, 다소 놀라면서 말했다.“생각보다 자기 눈을 내놓을 만큼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군요. 그래서 저희 도련님이 당신을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거군요. 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저에게 주는 칭찬이에요?”차설아가 박서영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남에게 빚지는 것을 싫어할 뿐이에요.”“저희 도련님께서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도련님이 계속 바보 같이 지내는 것을 두고볼수 없어요. 박서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고통은 결국 도련님만 겪는 거잖아요? 이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는 도련님께서 좀 더 냉정해져서 설아 씨를 곁에 뒀으면 좋겠어요.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연애의 신 같은 건 도련님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박서영은 어릴 적부터 성진 부모의 교육을 받아 성진 한 사람만을 위해 헌신하며, 성진을 위해 무조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성진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중에서 배회하는 사람이었다.이런 사람은 완전히 흑화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착한 모습을 보이면 끝없는 심연에 빠질 뿐이다.이번에는 박서영이 한눈파는 사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박서영은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때 냉혹하고 교활하며 결단력 있는 성진이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다.차설아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박서영에게 물었다.“그동안 성진은 어떻게 지냈나요?”“시각장애인이 뭘 어떻게 지냈겠어요.”박서영은 고개를 저으며
박서영은 그녀를 믿지 못하겠는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말 기꺼이 두 눈을 내놓을 생각이 있으신가요?”그녀는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분명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제가 성진한테 빚진 걸 갚는 거예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어요.”차설아가 말했다.“저를 못 믿겠다면 제가 무사하다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 없어요. 다만 그때 가서 일이 커지면 알아서 처리하세요.”거짓말할 마음도 없는 차설아는 진심으로 이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항상 성진의 헌신 덕분에 남의 인생을 도둑질한 것처럼 느꼈고, 가끔 즐거울 때도 불안한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다.이 기간에 성진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이 남자가 어떤 어둠 속에 처해있을지, 어떤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원수의 손에 잡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마치 비수처럼 심장에 꽂혀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차설아는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빚을 한 번에 갚고 싶어 했고, 그렇게 되면 그나마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럼 어떤 방법으로 무사하다고 전할 건데요?”박서영은 차설아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여전히 경계하는 어조로 물었다.“SNS에 올리면 되죠.”차설아가 웃으면서 말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위험에 처했을 때 SNS를 올릴 마음이 있겠어요? 제가 SNS를 올려버리면 적어도 제가 안전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SNS만 올리게요?”박서영은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SNS면 충분해요.”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차성철도, 배경윤도, 선우 시원도 각자 바빴기 때문에 그녀를 신경쓸 새도 없었다.이럴 때 SNS를 올리면 최소한 무사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좋아요. SNS 올리는 것만은 허락해 줄게요.”박서영이 여러 번 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