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성도윤이 블록을 조립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것에 주의를 기울였고, 특히 귀한 것을 보면 즉시 사서 그에게 선물했다.물론 '좋은 형제'라는 명의로.성도윤이 사내아이처럼 선물을 뜯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매우 특별한 성취감을 느꼈다!유리 진열장에 놓인 우주선 X2호도 그녀가 사준 것이었다.성도윤의 침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자신이 그의 마음속에 분명 어떤 자리가 있으리라 생각했고 이로 인해 그녀의 사랑은 점점 더 깊어졌다.무려 수만 개가 넘는 블록을 꺼내 바닥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은 성도윤은 이미 조립하고 싶어 기대만발이었다.허은아도 따라 앉더니 성도윤을 뒤에서 껴안고 남자의 어깨에 턱을 대고 애교스러운 말투로 장난을 치며 말했다."선물을 이렇게 좋아하니 나한테 뭔가 상을 줘야 하는 것 아니야?”성도윤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줄게.”"나는 너를 원하는데?”허은아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얼굴을 찡그렸던 성도윤은 여자를 돌아보며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너 어디 아파?”"하하하, 걱정 마, 넌 나한테 그냥 동생이야. 집에서 하도 닦달을 하니까 너한테 도움 좀 받으려고 했지.”허은아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까발리지 못하고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구체적으로는?”그러자 성도윤은 별생각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봐봐, 난 아직 시집도 안 갔고, 너도 장가를 안 갔고. 그리고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고 서로 집안 형편도 알고... 뭐 그러니까 우리 둘이라도 같이...”허은아는, 마치 웅장하고 원대한 상업 프로젝트를 말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말했다.침대 쪽을 향해 길고 날씬한 손가락이 콩알만 한 블록을 닥치는 대로 조립하는 성도윤이였다. 침대 밑의 차설아가 이 제안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성도윤은 허은아를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말했다.
결혼에 대해 허은아는 성도윤의 마음을 떠보려 했을 뿐이었다.그런데 성도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줄이야...이것은 허은아에게 있어서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만약 네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면, 앞으로 허씨 집안도 너에게 맡길게. 어쨌든 나도 사업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까. 너한테 맡기면 나도 안심이야!"허은아는 이미 그녀와 성도윤의 아름다운 결혼 후 생활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을 잡고는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수정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구에 단독주택을 사고 장식은 모두 우리의 뜻에 따라 하자. 너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블록을 좋아하니까 특별히 방을 남겨두자. 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희귀하고 조립하기 어려운 블록들을 다 사줄게.”"어쨌든 안심해. 나랑 결혼하면 분명 전처와는 느낌이 다를 거야. 난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 거야, 전처처럼 차갑고 딱딱한 사람이 아니니까, 지루하고 고지식해서 너를 결혼에 싫증 나게 하지 않을 거야.”예전에도 성도윤이 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을 때, 그들 무리는 그의 무미건조한 결혼을 놀리곤 했다.허은아는 당시 성도윤이 정말 결혼에, 그의 단아하고 정숙한 아내에게 싫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성도윤이 다시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서는 결혼의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확실히, 내 전 아내는 조금 차가웠지. 그때 결혼생활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성도윤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멈칫했다."뭔데?"허은아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이와 동시에 차설아도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남자의 입에서 그들의 끔찍한 결혼생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어 했다.성도윤은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허은아는 조금 실망하여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표시했다."뭐야. 그럼 말해 봐, 너는 너의 전처와의 결혼생활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거야? 만약 너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그녀와 또 결혼할 거야?”차설아가 성도윤의 마음에 얼마나 큰 자리를
그녀는 온몸이 굳어 있었다. 땀이 이마를 따라 땅에 떨어지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이번에는 진짜 망했네.그녀는 오히려 성도윤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창피한 것이 더 두려웠다.맨날 그를 변태라고 욕하다가 침대 밑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자기가 더 변태 아니냐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에잇, 블록이 떨어졌잖아.”허은아는 성도윤의 블록이 침대 밑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고 일어나서 블록을 주워 오려고 했다. "조심해, 이 장난감은 하나도 모자라면 안 된다고 내가 정말 큰 노력을 들여서, 갖고 온건데. 난... 으악!”그녀는 머리를 땅에 대고 블록이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려고 하다가 침대 밑의 처설아를 한눈에 보고 혼이 다 빠져나가 목청을 돋우어 '와와' 소리를 질렀다."너 침대 밑에...”허은아는 창백한 얼굴로 성도윤을 바라보며 차설아를 가리키면서 더듬더듬 말을 잇지 못했다.성도윤은 우뚝 서서 말했다."이제 나와, 그렇게 오래 있었으니 힘들지 않아?”차설아는 놀랍고 굴욕감도 밀려왔다.성도윤 그녀가 침대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었던 것이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완전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뭐야, 침대 밑에 누가 있는지 알아?”허은아는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너희 두 사람, 뭐 하고 노는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 밑을 조금씩 기어 나왔다.존엄 따위는 이미 짓밟혔다."실례합니다.”차설아는 머리를 다듬고 어색한 듯 방을 나가려고 했다."그냥 나가려고?”성도윤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내가 알기로 주거침입죄는 형사범죄이고 형량이 작지 않을 건데.“허은아는 마침내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채고는 큰소리로 차설아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은 도윤이의 방에 몰래 침입한 것이군요, 변태예요? 내가 도윤이에게 말한 것 모두 엿 들은 거 아녜요? 도대체 무슨 목적이죠?“차설아는 입술을 깨물고 참
차설아는 겁내지 않고 OK 손짓을 했다.“마음대로 하세요.”“너!”허은아는 도리어 어찌할 바를 몰라 성도윤을 끌어당겨 원망했다. "이 여자 좀 봐, 자기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이 세상에 어찌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네 말이 맞아. 이런 뻔뻔한 사람은 절대 용서할 수 없지. 그러니까... 먼저 집에 가, 내가 잘 처벌할게.”"뭐... 뭐라고?”허은아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자신이 차설아를 엄벌하겠다고 소란을 피우다가, 결국 성도윤이 제일 먼저 그녀를 내보내다니... 이는 그녀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처럼 보였다."너도 알다시피 설아는 내 전 부인이고 내 침실에 잠입한 것은 나를 잊지 못해서고, 이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내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는 거야...”성도윤은 차설아 바라보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개인적인 일이니 남들 없이 우리 혼자 해결하는게 더 적합해.”“남?”허은아의 표정은 억제할 수 없이 약간 굳어 있었다.이 한 글자는 마치 그녀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았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빠르게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부러 성도윤의 어깨를 툭툭 치며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정말 사랑꾼이네. 아까까지만 해도 형제라고 하더니 이젠 남이야?“"됐어, 설아 씨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 나도 감동했어. 그냥 설아 씨랑 잘 해봐.”차설아는 이 말을 듣고 있자니 유난히 불편했다.분명히 성도윤을 싫어하고 죽을 만큼 싫어했는데 결국 그들의 입에서 그녀는 그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변태가 되었다.이 분노를 그녀가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성도윤, 그만해. 내가 왜 네 침대 밑에 들어갔는지 정말 몰라?”성도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나 못 잊었으면 솔직하게 말해. 숨길 필요 없어.”“웃기고 있네. 내가 널 왜 못 잊어?”차설아는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그녀는
차설아는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늦었던 터라 떠나려 했다.성도윤도 싱긋 웃으며 물었다."'칠색 유리병'은 이제는 필요 없나 보지?”차설아는 발을 멈췄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헛소리, 당연히 갖고 싶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침대 밑에 들어갔겠어?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새침했다. "그건 이제 필요 없어. 네가 가지고 가서 요강으로 써!”성도윤은 여자의 무뚝뚝하고 야비한 표정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칠색 유리병은 죽어도 차설아한테 요강 취급을 당할 줄 몰랐을 것이다.역시 여자는 못 건드려."원한다면 오늘 헛걸음하지 않도록 줄 수도 있어.”성도윤은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둘러 말했다.차설아는 망설였다.비록, 그녀는 1초 전까지만 해도 “싫어!”라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말이다.30초도 안 되는 투쟁 끝에 차설아는 금세 빙그레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정말 나에게 줄 의향이 있어? 나는 당신이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알았어. 비록 내가 당신을 욕하고 커피를 쏟았지만, 당신은 넓은 아량으로 날 용서할 줄 알았지.”성도윤은 대답했다.“물건 당연히 줄 수 있지...”차설아는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어디 있어, 오늘 밤에 그냥 가져가도 돼?”성도윤은 이마를 짚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말 좀 다 듣고 설레발 칠래?”차설아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린 듯했다."전제조건이 있을 줄 알았어. 또 이상한 말을 하고 싶은 거야?”"이번에 또 이상한 소리를 하면, 이번엔 커피를 뿌리는 거로 끝나지 않아!"성도윤은 웃으며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 나와 함께 힘을 합쳐 한 가지 일만 해줘. 그러면 칠색 유리병은 네 거야.”차설아는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내가 무엇을 하길 원해?”바닥에 놓인 거의 만 개의 블록에 시선을 박은 성도윤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블록 조립 수준은 좀 어때?”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보통이야.”"강박증이 있어서 손에 넣은 블록은 바로 맞춰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양이 너무
성도윤은 차설아가 블록을 좋아하는 줄도 몰랐고, 그녀가 고수라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그녀가 잘하지 못하는 일로 그녀의 기세를 꺾을 목적이었지만... 차설아의 행동은 그야말로 놀라웠다.차설아는 다양한 모양의 블록을 모아 손쉽게 하나의 완전한 모양을 만들어냈다.이 정도의 사고능력과 속도는 보통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전혀 몰랐네. 당신 고수였어?”성도윤은 진심으로 감탄을 자아냈다.보통 사람들이 이 모양을 만드는 데 적어도 한 시간이 걸리지만, 그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그와 대등할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차설아는 도면도 보지 않고 몇 개의 블록을 척척 맞추더니,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여우처럼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당신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없잖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성도윤은 똑똑한 머리를 지녔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는 바보였다.그는 임채원을 ‘부드럽고, 착하고, 순진한’ 여자라 하고, 서은아를 ‘털털한 형제’라고 한다. 차설아를 오히려 가식적이고 꿍꿍이가 많은 여자라고 생각하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성도윤도 자리에 앉아 차설아와 함께 블록을 쌓았다.크리스탈 램프에 비친 그의 손가락은 훤칠하고, 뼈마디가 뚜렷해 잡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차설아는 원래 블록을 쌓는 데 집중했지만, 눈빛은 어느새 그의 예쁜 눈에 떨어졌고,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려졌다.“왜 집중 안 해?”성도윤은 여자의 집중력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하고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무슨 생각해?”남자의 속도도 차설아와 맞먹었고, 말을 하는 사이, 자잘한 블록들이 그의 손에서 모양새를 갖췄다.“아니, 별것 아니야!”차설아는 볼이 살짝 뜨거워졌고, 이내 시선을 돌렸다.그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차설아, 제발 철 좀 들어. 잘생긴 남자에 환장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자기 손까지 통제 못하는 거야? 남자 손을 만져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왜 설레고 난리야!’두 사람은 함께 비행선의 날개를 맞추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왼쪽, 한 사람은 오른쪽,
“아마도?”차설아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와 부부로 지낸 몇 년 동안, 그를 아낌없이 사랑했지만, 확실히 자존심을 버리며 그에게 매달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지만, 그거 떠난다고 하면 쿨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심지어 그보다 더 빨리 도망쳤다.그녀도 만약 그때 성도윤을 만류했다면 지금 어떤 결과일지 궁금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가고, 시곗바늘은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인체가 가장 피곤하고 자고 싶어 하는 시간이다.차설아도 조금 졸렸는지, 손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칠색 유리병을 얻기 위해 절대 잘 수 없었다. 반드시 정신을 바짝 차려서 날이 밝기 전에 이 비행선을 완성해야 했다.“좀 졸려.”성도윤은 기지개를 켜며 5분의 1밖에 완성하지 않은 블록을 보며 말했다.“어차피 완성하지 못할 텐데, 그냥 자.”차설아는 자신의 혀를 깨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졸리면 먼저 가서 자. 나 혼자 완성할 수 있어. 다만, 꼭 약속 지켜. 절대 장난이 아니길 바랄게.”“진짜 혼자 완성한다고?”“이 정도는 최소 보름은 걸려.”차설아는 고집스럽고 오만하게 말했다.“그건 보통 사람이고, 나 차설아는 절대 다르지.”성도윤은 여자의 지친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가서 자면 칠색 유리병을 줄게. 진심이야.”“아니, 됐어!”여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손가락을 더욱 빨리 움직이며 말했다.“약속했으니 꼭 지켜야지. 당신 동정 따윈 필요 없어.”“그래, 난 잘게.”처음으로 여자의 고집을 본 성도윤은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그는 별다른 말 없이 혼자 침실로 가서 샤워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차설아는 블록을 손에 쥐고 고양이처럼 땅바닥에 웅크린 채 쿨쿨 자고 있었다.“하하, 차설아 허세 죽이네!”성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더니 그윽한 눈빛에는 어느새 부드러움이 피어올랐다.그는 맨발로 조심스럽게 여자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가로
이튿날, 차설아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떴다.포근한 침대에 누운 그녀의 이불에서는 편안하고 특별한 냄새가 났다. 바로 성도윤 특유의 향기였다.한 사람을 미치게 사랑하면, 그 사람만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이 향기는 향수나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사람 영혼의 향기라고 한다.아마도 차설아의 무의식 속에 성도윤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여전히 그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젠장!”눈을 뜬 차설아는 자신이 아직 성도윤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더니 토끼처럼 폴짝 뛰었다.큰 방에 그녀 혼자였고, 성도윤은 이미 떠난 것으로 보인다.“참, 왜 잠들었지?”차설아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빈약한 의지력을 탓했다. 블록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쿨쿨 잠을 잤다. 그것도 성도윤의 침대에서.성도윤이 얼마나 자신을 조롱하고 모욕했을지 눈에 선했다.이제 칠색 유리병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도윤이 그녀를 비웃을 기회까지 주었으니, 그녀는 정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차설아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옷을 후딱 챙겨입고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리고, 유리 진열장에 완성된 X3 비행선이 있는 것을 보고 눈알이 빠질 정도로 놀랐다.“헐, 이걸 완성했다고? 그 자식 마법이라도 부린 거야? 너무 대단한데?”분명 그녀는 어제 3분의 1도 못 채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널려 있는 블록 조각들이라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양이었다.그리고, 성도윤은 일찍 잔다고 먼저 샤워를 했었다. 설마 자다가 깨어나서 한밤중에 완성했을까?하지만, 그는 그럴 이유가 없다.밤새도록 블록을 쌓으면 자기 몸이 상할 뿐만 아니라 차설아의 요구도 만족시키는 것이 되니, 성도윤에게는 전혀 이득이 없었다.어쨌든, 블록을 완성했으니 성도윤은 약속대로 칠색 유리병을 그녀에게 주어야 했다. 사내로서 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하니 말이다.이렇게 생각한 차설아는 갑자기 낯가죽이 두꺼워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남자에게 약속대로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두고 봐!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우리 아빠가 널 완전히 부숴버릴 거라고!”서은아는 분을 못 이겨 울먹이더니 퉁퉁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차설아가 이미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엄마, 엄청 멋졌어요! 나쁜 사람을 한 방에 쫓아내다니... 완전 슈퍼우먼이었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달이도 커서 엄마처럼 슈퍼우먼으로 될 거예요!”차설아는 달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슈퍼 우먼은 무슨... 우리 달이는 그냥 예쁜 공주님이면 돼. 괜히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걸진 말되 누군가를 두려워하진 마.”원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아줌마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려 한 거라고요! 뺨 몇 대만 맞고 도망가게 내버려두다니... 너무 쉽게 놔준 거 아니에요?”“원이야, 오늘 충분히 화풀이했잖아. 적당한 선에서 그만둬야 해.”차설아는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아줌마 아무리 꿍꿍이를 가지고 왔다 해도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단지 좀 삐뚤어진 것뿐이지.”“사실 저 아줌마도 피해자이긴 해. 불쌍한 사람이거든. 오늘 받은 교훈이면 충분할 거야.”차설아는 원이를 다독였다.솔직히 말해서 서은아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수단이 좀 극단적일 뿐이지 말이다.그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솔직했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진심으로 성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서은아같이 대놓고 싸움을 거는 유형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뒤에서 몰래 함정을 파고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임
겨우 눈을 뜬 서은아는 원이가 했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지난 일까지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 망할 꼬맹이가... 또 너야? 지난번엔 날 강에 빠뜨릴 뻔하더니 이번엔 물총까지 쏘면서 날 도발한다고? 죽고 싶어?”서은아는 이를 악물고 원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녀는 물을 또 한 번 맞았다.원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자기가 어른인 것처럼 경고했다.“아줌마는 우리 집 손님이 아니에요. 여긴 아줌마를 환영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나가세요!”“어린놈이 감히!”서은아는 자기가 어린아이에게 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지만 원이의 민첩함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수였다.아무리 쫓아다녀도 그녀는 원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풀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흙이 입안 가득 들어가고 온몸이 엉망이 되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설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원아, 너무 심하게 하진 마. 그래도 여자잖아.”“엄마,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 아줌마가 먼저 덤벼든 거라니까요? 그리고 이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냥 나쁜 놈이죠! 완전 악당이에요! 지난번에 저를 호수에 빠뜨리려고 했어요! 나쁜 사람도 봐줘야 하나요?”원이의 입이 뿌루퉁해졌다.차설아만 옆에 없었더라면 원이는 벌써 ‘필살기’까지 써버렸을 것이다.“뭐라고? 널 호수에 빠뜨렸다고?”차설아는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서은아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원이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요? 정말 어린 애한테까지 손을 댔다고요?”서은아가 어릴 때부터 삐뚤어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이에게까지 손을 댈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어른들끼리의 다툼에 아이를 끌어들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서은아는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입 안은 흙과 풀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눈물을 글썽하
“내가 말했었잖아! 도윤이만 가질 수만 있다면 망가뜨려도 상관없다고. 모든 걸 잃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을 때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을 거야. 그러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도 시간문제지.”서은아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하, 웃기지도 않네!”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윤 씨는 사람이에요, 물건이 아니라. 그쪽이 부순다고 해서 부서질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리고 도윤 씨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도윤 씨가 대기업 대표님이든, 그저 평범한 사람이든 나랑 아이들은 절대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차설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야. 만약 도윤이가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존재로 된다면? 도윤이와 엮이면 너까지 불행해지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떠나지 않을 자신 있어?”“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네까짓 게 어떻게 장담해? 사람이 발밑으로 내쳐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러면 도윤이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거야. 결국 모든 사람이 도윤이를 외면할 거고 도윤이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첫째, 그럴 리 없어요. 둘째, 그렇게 될 때까지 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요? 무너지면 제가 다시 일어서면 돼요. 비록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저한테도 나름대로 운영하는 작은 회사는 있거든요. 그 정도면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 데 부족할 게 없을걸요?”차설아가 말하는 ‘작은 회사’는 신흥 IT 강자인 천신 그룹과 거대한 자본을 가진 KCL 그룹이었다.하지만 두 그룹 모두 차설아의 소유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서은아도 그녀 앞에서 저렇게 우쭐거릴 수 있었다. 만약 서은아가 알게 된다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었다.“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겨우 작은 회사라고 말이야. 그걸로 성대 그룹 같은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꿈도 크네. 만약 진짜 도윤이를 위한다면 헤어지
“차설아 씨,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차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그건 아니에요.”차설아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은아 씨가 저를 반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이 억울한 것처럼 절 비난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은아 씨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닌 듯싶어서요.”차설아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은아에게 약속했었다. 성도윤의 세상에서 물러나 두 사람을 이어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서은아가 성도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한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이었다.그녀의 사랑이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방식일 줄 모르고 말이다. 성도윤의 건강까지 해칠 정도라면 차설아는 더 이상 그를 서은아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만약 언젠가 도윤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전 도윤 씨에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이 세상에서 성도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차설아였다.그의 곁을 떠났던 건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떠나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졌다.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진정한 행복은 서로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서은아는 눈을 붉히며 집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도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럴 일은 없어! 난 평생 도윤이만 사랑할 거고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도윤이를 위해서라면 그를 망가뜨리는 일도 할 수 있다고!”“서은아 씨, 진짜 미쳤어요? 그쪽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서은아 씨가 사랑하는 건 서은아 씨 자신 뿐이에요!”차설아는 서은아의 광기 어린 발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사랑이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
서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서은아 씨?”차설아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절 보셨군요?”서은아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차설아의 감정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에 방금까지 확신했던 그녀의 생각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당연하죠.”차설아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리키며 덤덤히 말했다.“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늦게 올 줄은 몰랐네요. 생각보다 멘탈이 좋은가 봐요?”서은아는 차설아의 반응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겉모습은 눈이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서은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설아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설아 씨도 멘탈이 대단하시네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수지간인데도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셔서 참 고맙네요?”서은아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달이야, 착하지? 엄마가 이 아줌마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너는 민이 이모랑 잠깐 놀고 올래?”“싫어요! 이 아줌마 나쁜 사람 같아요. 아줌마가 엄마를 괴롭히면 어떡해요?”달이는 차설아를 꼭 껴안으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아를 노려보았다.“게다가 이 아줌마 분명 아빠를 뺏으러 온 거예요. 전 절대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 달아. 아빠는 영원히 네 아빠야. 그 누구도 달이 아빠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엄마가 이 아줌마랑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빠에 대한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가서 민이 이모랑 놀고 있어, 알겠지?”“알겠어요.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요! 제가 바로 달려와서 엄마 지켜줄 거예요.”차설아가 여러
성도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서은아는 차설아의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차설아가 달이와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낮인데도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움직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설마...’“엄마, 한번 맞혀봐요! 달이가 뭘 그렸게요?”달이는 차설아 앞에 앉아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음... 강아지?”“틀렸어요! 달이가 그린 건 나비예요! 틀렸으니까 엄마 간지럼 태울 거예요!”달이는 해맑게 웃으며 차설아 품에 파고들어 그녀를 간질였고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서 장난을 치며 한바탕 웃었다.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 장면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해 보였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차설아, 넌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 성도윤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주는 데다가 너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오빠도 있고, 또 배경수, 배경윤 같은 친구도 곁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까지 있다니...’‘근데 나는?’서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키우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에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까운 친구나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게다가 최근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며 사생아까지 낳았다. 앞으로 그녀가 받을 사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내가 성도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도.’서은아에게 성도윤은 어둠 속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춰주던 것이었는데 차설아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고!’서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로챈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엄마, 한 번 더 할래요! 그림을 그릴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