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늦었던 터라 떠나려 했다.성도윤도 싱긋 웃으며 물었다."'칠색 유리병'은 이제는 필요 없나 보지?”차설아는 발을 멈췄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헛소리, 당연히 갖고 싶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침대 밑에 들어갔겠어?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새침했다. "그건 이제 필요 없어. 네가 가지고 가서 요강으로 써!”성도윤은 여자의 무뚝뚝하고 야비한 표정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칠색 유리병은 죽어도 차설아한테 요강 취급을 당할 줄 몰랐을 것이다.역시 여자는 못 건드려."원한다면 오늘 헛걸음하지 않도록 줄 수도 있어.”성도윤은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둘러 말했다.차설아는 망설였다.비록, 그녀는 1초 전까지만 해도 “싫어!”라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말이다.30초도 안 되는 투쟁 끝에 차설아는 금세 빙그레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정말 나에게 줄 의향이 있어? 나는 당신이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알았어. 비록 내가 당신을 욕하고 커피를 쏟았지만, 당신은 넓은 아량으로 날 용서할 줄 알았지.”성도윤은 대답했다.“물건 당연히 줄 수 있지...”차설아는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어디 있어, 오늘 밤에 그냥 가져가도 돼?”성도윤은 이마를 짚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말 좀 다 듣고 설레발 칠래?”차설아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린 듯했다."전제조건이 있을 줄 알았어. 또 이상한 말을 하고 싶은 거야?”"이번에 또 이상한 소리를 하면, 이번엔 커피를 뿌리는 거로 끝나지 않아!"성도윤은 웃으며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 나와 함께 힘을 합쳐 한 가지 일만 해줘. 그러면 칠색 유리병은 네 거야.”차설아는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내가 무엇을 하길 원해?”바닥에 놓인 거의 만 개의 블록에 시선을 박은 성도윤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블록 조립 수준은 좀 어때?”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보통이야.”"강박증이 있어서 손에 넣은 블록은 바로 맞춰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양이 너무
성도윤은 차설아가 블록을 좋아하는 줄도 몰랐고, 그녀가 고수라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그녀가 잘하지 못하는 일로 그녀의 기세를 꺾을 목적이었지만... 차설아의 행동은 그야말로 놀라웠다.차설아는 다양한 모양의 블록을 모아 손쉽게 하나의 완전한 모양을 만들어냈다.이 정도의 사고능력과 속도는 보통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전혀 몰랐네. 당신 고수였어?”성도윤은 진심으로 감탄을 자아냈다.보통 사람들이 이 모양을 만드는 데 적어도 한 시간이 걸리지만, 그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그와 대등할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차설아는 도면도 보지 않고 몇 개의 블록을 척척 맞추더니,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여우처럼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당신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없잖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성도윤은 똑똑한 머리를 지녔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는 바보였다.그는 임채원을 ‘부드럽고, 착하고, 순진한’ 여자라 하고, 서은아를 ‘털털한 형제’라고 한다. 차설아를 오히려 가식적이고 꿍꿍이가 많은 여자라고 생각하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성도윤도 자리에 앉아 차설아와 함께 블록을 쌓았다.크리스탈 램프에 비친 그의 손가락은 훤칠하고, 뼈마디가 뚜렷해 잡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차설아는 원래 블록을 쌓는 데 집중했지만, 눈빛은 어느새 그의 예쁜 눈에 떨어졌고,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려졌다.“왜 집중 안 해?”성도윤은 여자의 집중력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하고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무슨 생각해?”남자의 속도도 차설아와 맞먹었고, 말을 하는 사이, 자잘한 블록들이 그의 손에서 모양새를 갖췄다.“아니, 별것 아니야!”차설아는 볼이 살짝 뜨거워졌고, 이내 시선을 돌렸다.그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차설아, 제발 철 좀 들어. 잘생긴 남자에 환장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자기 손까지 통제 못하는 거야? 남자 손을 만져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왜 설레고 난리야!’두 사람은 함께 비행선의 날개를 맞추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왼쪽, 한 사람은 오른쪽,
“아마도?”차설아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와 부부로 지낸 몇 년 동안, 그를 아낌없이 사랑했지만, 확실히 자존심을 버리며 그에게 매달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지만, 그거 떠난다고 하면 쿨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심지어 그보다 더 빨리 도망쳤다.그녀도 만약 그때 성도윤을 만류했다면 지금 어떤 결과일지 궁금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가고, 시곗바늘은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인체가 가장 피곤하고 자고 싶어 하는 시간이다.차설아도 조금 졸렸는지, 손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칠색 유리병을 얻기 위해 절대 잘 수 없었다. 반드시 정신을 바짝 차려서 날이 밝기 전에 이 비행선을 완성해야 했다.“좀 졸려.”성도윤은 기지개를 켜며 5분의 1밖에 완성하지 않은 블록을 보며 말했다.“어차피 완성하지 못할 텐데, 그냥 자.”차설아는 자신의 혀를 깨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졸리면 먼저 가서 자. 나 혼자 완성할 수 있어. 다만, 꼭 약속 지켜. 절대 장난이 아니길 바랄게.”“진짜 혼자 완성한다고?”“이 정도는 최소 보름은 걸려.”차설아는 고집스럽고 오만하게 말했다.“그건 보통 사람이고, 나 차설아는 절대 다르지.”성도윤은 여자의 지친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가서 자면 칠색 유리병을 줄게. 진심이야.”“아니, 됐어!”여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손가락을 더욱 빨리 움직이며 말했다.“약속했으니 꼭 지켜야지. 당신 동정 따윈 필요 없어.”“그래, 난 잘게.”처음으로 여자의 고집을 본 성도윤은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그는 별다른 말 없이 혼자 침실로 가서 샤워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차설아는 블록을 손에 쥐고 고양이처럼 땅바닥에 웅크린 채 쿨쿨 자고 있었다.“하하, 차설아 허세 죽이네!”성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더니 그윽한 눈빛에는 어느새 부드러움이 피어올랐다.그는 맨발로 조심스럽게 여자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가로
이튿날, 차설아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떴다.포근한 침대에 누운 그녀의 이불에서는 편안하고 특별한 냄새가 났다. 바로 성도윤 특유의 향기였다.한 사람을 미치게 사랑하면, 그 사람만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이 향기는 향수나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사람 영혼의 향기라고 한다.아마도 차설아의 무의식 속에 성도윤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여전히 그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젠장!”눈을 뜬 차설아는 자신이 아직 성도윤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더니 토끼처럼 폴짝 뛰었다.큰 방에 그녀 혼자였고, 성도윤은 이미 떠난 것으로 보인다.“참, 왜 잠들었지?”차설아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빈약한 의지력을 탓했다. 블록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쿨쿨 잠을 잤다. 그것도 성도윤의 침대에서.성도윤이 얼마나 자신을 조롱하고 모욕했을지 눈에 선했다.이제 칠색 유리병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도윤이 그녀를 비웃을 기회까지 주었으니, 그녀는 정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차설아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옷을 후딱 챙겨입고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리고, 유리 진열장에 완성된 X3 비행선이 있는 것을 보고 눈알이 빠질 정도로 놀랐다.“헐, 이걸 완성했다고? 그 자식 마법이라도 부린 거야? 너무 대단한데?”분명 그녀는 어제 3분의 1도 못 채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널려 있는 블록 조각들이라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양이었다.그리고, 성도윤은 일찍 잔다고 먼저 샤워를 했었다. 설마 자다가 깨어나서 한밤중에 완성했을까?하지만, 그는 그럴 이유가 없다.밤새도록 블록을 쌓으면 자기 몸이 상할 뿐만 아니라 차설아의 요구도 만족시키는 것이 되니, 성도윤에게는 전혀 이득이 없었다.어쨌든, 블록을 완성했으니 성도윤은 약속대로 칠색 유리병을 그녀에게 주어야 했다. 사내로서 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하니 말이다.이렇게 생각한 차설아는 갑자기 낯가죽이 두꺼워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남자에게 약속대로
차설아는 애써 해명했다.“할아버지, 사실 어젯밤...”“설명할 필요 없어. 부끄러워하지도 마. 젊은 사람들끼리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두 정상이지.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다. 다 이해해.”성주혁은 목청을 가다듬더니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 녀석이 이제야 철이 들었는지, 오늘 아침에 내려와서 특별히 나에게 부탁하더구나. 어젯밤에 네가 많이 피곤했으니 잘 쉬어야 한다고, 절대 널 방해하지 말고 푹 자게 내버려 두라고 했어.”차설아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오해하셨어요. 어제 저랑 도윤 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저...”“젊은 남녀가 한 침대에 누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밤새도록?”“그건... 도윤 씨는 침대에 누워있지 않고 아마 블록을 쌓았을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차설아가 설명하면 할수록 두 사람의 사이가 더 의심스러워보였다.“괜찮아. 난 이해한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니까.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지!”성주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차설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너처럼 똑똑한 애가 내 뜻을 모른다고?”성주혁은 고개를 흔들더니 늙은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설아야, 우리 도윤이가 확실히 잘못했고, 너에게 상처를 줬어. 하지만 도윤이도 너 때문에 괴로웠어. 요 몇 년 동안 그 녀석 아마 충분히 힘들었을 거야. 네 화풀이는 이제 끝났으니 고집 피우지 말고 둘이 잘살아봐.”“어젯밤에 내 손자가 처음으로 아주 괴롭다고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더구나. 최선을 다해 너를 붙잡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이야. 할아버지로서 그런 도윤이를 보고 있는 내 심정도 편치만은 않아. 네가 아직도 우리 도윤이에게 마음이 남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말인데... 이 할아버지 말 한 번만 들어. 이제 그만해. 그렇게 모질게 밀어내다간 앞으로 또 후회하게 될 거야.”그의 말을 들은 차설
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들고 착잡한 심정으로 성씨 저택을 떠났다.그녀는 전화로 조인성과 약속을 잡았다. 최대한 빨리 차씨 저택의 일이 해결하고 싶었다.두 사람은 경치가 수려한 안양 리조트에서 만났다.조인성의 옆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묘령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설아 씨 능력 있네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절세의 보물 칠색 유리병을 이렇게 빨리 손에 넣다니. 역시 나 조인성의 절친답게 능력자예요!”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아름다운 상자에 담아 계속 품에 안은 채 웃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단지 문물일 뿐, 대체품도 널렸고, 사람을 불로장생시킬 수 있는 약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 필요가 있을까요?”조인성은 말없이 웃더니 차설아 품에 안긴 상자를 노려보며 여우처럼 교활한 눈빛을 보냈다.반대로 조인성의 곁에 앉은 묘령의 여자는 경멸하며 차설아를 비웃기 시작했다.“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요. 칠색 유리병의 가치는 불로장생 약보다 얼마나 높은지 몰라요. 이 보물은 모든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악의 기운과 재난도 피할 수 있죠!”“매일 칠색 유리병에 탕약을 담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죠. 당시 성씨 가문이 성심 전당포에서 이 물건을 빼앗아 둘째 도련님의 목숨을 구하려고 가문이 하마터면...”“닥쳐!”차설아가 넋을 잃고 듣던 중, 조인성이 묘령의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여자는 즉시 고개를 숙이고 감히 한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성도윤의 목숨을 구한다고요?”차설아는 중요한 정보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성씨 가문이 이 문물 하나 때문에 그렇게 큰 소동을 일으켰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건 대체 어떤 물건이죠?”조인성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고, 당연히 차설아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리 없었다.“설아 씨는 물건을 내놓고 저는 땅을 내놓으면 되는 일이죠. 그런 건 상관해서 뭐 해요? 이 물건이 성씨 가문의 명맥과 관계된다고 한들, 성도윤과 이미 이
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갖고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천신 그룹으로 돌아왔다.줄곧 이 물건을 성도윤에게 돌려줄지 고민했다.만약 진짜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앞으로 성도윤을 만나면, 싫은 기색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됐어, 괜히 찜찜하게. 그냥 돌려주자!’천신 그룹의 직원들은 차설아를 보자마자 하나같이 긴장모드로 변했다.“대표님, 왜 오셨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집에서 푹 쉬셔야죠. 절대 돌아다니면 안 돼요!”“회사에는 저희가 있잖아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 안심하고 푹 쉬세요.”“아, 대표님,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여기 아줌마가 방금 청소해서 미끄러워요.”모두 차설아를 걱정하며 안부 인사를 전했다.서윤은 우유를 건네며 친절하게 말했다.“대표님, 목마르세요? 여기 따듯한 우유 좀 드세요. 영양가도 풍부하고 갈증도 해소할 수 있어요.”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다들 왜 이래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상전하라도 납신 줄 알겠네요.”직원들이 그녀를 좋아하고 숭배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식의 애정은 감당하기 어려웠다.“대표님은 주상전하가 아니라 황후마마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세요.”서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눈빛을 보냈고, 차설아는 더욱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칠색 유리병이 든 상자를 보며 물건을 돌려줄까 말까 계속 망설였다.갑자기 맞은편에 바로 성대 그룹 본사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이 각도에서 성도윤의 사무실이 보일지도 모른다.“서윤 씨, 망원경 좀 찾아 주시겠어요?”차설아는 열정이 타올라 비서에게 물었다.“아마 있을 거예요. 제가 사무 직원에게 가져오라고 할게요.”사무 직원은 곧 고배율 망원경을 보내왔다.차설아는 창가에 서서 망원경을 들고 반대편을 탐색했다.성도윤의 사무실은 차설아의 사무실보다 층고가 조금 높았지만 면적이 커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이 녀석, 진짜 일 중독자군. 점
차설아는 마루 창가 앞에 서서 각도를 조절해가며 마치 비밀요원처럼 열심히 남자를 관찰했다.사람마다 정탐하는 취미가 있는데, 그 상대가 성도윤이라면?렌즈 속 성도윤은 꼿꼿이 책상에 앉아 계약서 검토에 여념이 없었다. 입체적인 옆모습은 지나치게 우월하고 완벽해 마치 화보 모델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쳇, 계속 진지한 척한다고? 너도 사람인데 설마 하품도 안 하고 콧구멍도 안 파겠어?”여자는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마루 창가 앞에 서서 성도윤의 망가진 모습을 포착하려고 기다렸다.잠시 후, 성도윤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천천히 일어나더니,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젠장!”차설아는 도둑질이라도 한 듯 마음이 켕겼다.워낙 자기애가 강한 사람인데, 만약 차설아가 망원경으로 자신을 훔쳐본 것을 알게 된다면 백 마디 말로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남자가 이미 걸음을 옮겼을 거라고 짐작한 차설아는 다시 고개를 내밀고 조심스럽게 남자의 모습을 찾았다.“응? 어디 갔지? 왜 갑자기 사라졌어?”차설아는 망원경을 집어 들고는 까치발을 했다가, 허리를 굽혔다가 하며 남자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다.“뭐 보는 거야?”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당연히 성변태 보는 거지!”차설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계속 망원경을 들고 까치발을 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맞은편 성도윤의 사무실을 보며 유치하게 말했다.“혼자 있을 때 코를 파는지 확인해야겠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흐트러지는 모습도 있어야 하잖아? 아니면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해?”“그렇게 궁금하면 내 앞에서, 가까이 보도록 허락하지.”남자의 나지막하고 탄식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는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고 홱 돌아섰다.성도윤이 긴 다리를 포개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녀의 의자에 기대어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망원경이 탁하고 땅에 떨어졌고, 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어디 쥐구멍 없나?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
“나도 너 이해하니까 이 일은 그냥 묻어두고 싶어. 그러니까 너도 나랑 도윤이 좀 이해해줘.”소영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은아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눈물을 떨어트리며 말했다.“대체 뭘 원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이해하길 바라시는 거냐고요.”“흥분하지 말고...”서은아를 위로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소영금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내 아들 옆에서 떠나라는 말은 안 할게. 걔가 널 선택하든 다른 사람을 선택하든 나는 걔 선택을 존중할 거야. 하지만 내가 너한테 딱 하나 바라는 게 있어. 도윤이가 회복을 마칠 동안에만 그 앞에 나타나지 말아줘.”“네?”소영금이 이토록 단번에 저를 내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서은아가 두 주먹을 말아쥔 채 원망 어린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아주머니는 제가 도윤이를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이제 쓸모없어졌으니 떨어져라 이거에요? 진짜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저한테는 도윤이를 볼 자격조차 없는 거예요?”서씨 집안의 유일한 적통인 서은아는 아빠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들을 집에 들이기 전까지는 무남독녀였기에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해왔었다.그랬던 그녀에게 이런 홀대는 너무나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다.“너의 극단적인 선택이 내 믿음을 깬 거야. 나도 내 아들을 지켜야 하는데 걔한테 위험한 너를 가까이할 수는 없지 않겠니?”수술을 막기 위해 사고까지 낸 서은아가 제 아들 옆에 계속 붙어 있는다면 성도윤의 기억이 돌아오는 걸 막으려고 또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 같아 소영금은 그녀의 원망 섞인 말을 들으면서도 매정해질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서은아를 떼어놓는 게 가장 급선무였기에 소영금은 그녀를 진무열에게 맡겨버렸다.“진 비서가 은아 좀 봐줘.”그 뒤로 며칠의 시간이 더 흐르자 차설아는 이미 빛이 없는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었다.어차피 눈이 보이지 않으니 지하실에 있든 다른 곳에 있든 그녀에게는 다 똑같은 장소처럼 느껴졌다.앞이 캄캄한 그 날들을 보
박성훈을 본 그들은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교수님, 제 아들은 괜찮은 거죠?”“수술은 잘 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며칠 푹 쉬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장시간의 수술을 진행한 탓에 피곤했던 박성훈은 흥분한 채로 달려오는 소영금을 진정시키기 위해 짤막하게 환자의 상태에 대해 알려주고는 바로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성도윤의 뇌 수술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아주 많았기에 박성훈은 그것도 성도윤의 깨어난 뒤에 다시 차근차근 물어볼 생각이었다.“무사하다니 다행이네.”아들이 무사한 게 가장 중요했던 소영금은 마침내 한 시름 놓으며 주저앉았다.“...”하지만 한쪽에 서 있던 서은아는 한껏 어두워진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성도윤의 수술이 잘 끝났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성도윤이 일어나면 자신부터 내칠까 봐 걱정돼서 근심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아가씨, 괜찮으세요?”“아, 네. 괜찮아요.”그때 진무열이 평소답지 않은 서은아의 상태를 눈치채고 다가가자 당황한 서은아는 그의 눈을 피하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아가씨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요? 혹시 대표님 수술이 잘 끝난 게 싫으신 거예요?”“그럴 리가요. 그냥...”“도윤이가 눈만 뜨면 나랑은 이제 끝이니까 그게 서운해서 그러죠.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진 비서님도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죠.”“진짜 그 이유뿐이에요?”미간을 찌푸린 진무열은 서은아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물었다.손을 가만히 못 두고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은 실망이라기보다는 초조함에 가까웠다.꼭 무언가를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같아서 진무열은 그녀가 성도윤에게 말 못 할 큰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하지만 우선은 성도윤의 회복이 먼저였기에 그가 깨어날 때까지 자신의 의심은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한편 흥분을 가라앉힌 소영금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서은아를 보며 물었다.“은아야,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말해. 박 교수
“됐어, 사람 안 다쳤다니까 수술은 제대로 할 수 있겠네. 교수는 지금 어딨는 거야?”“아, 교수님이요?”소영금의 질문에 진무열은 수술실 쪽을 보며 답했다.“아까 직원 통로로 들어가셨으니까 지금쯤 수술하고 계실 거에요.”“뭐? 이미 시작했다고?”진무열의 대답에 소영금의 심장은 갑자기 뛰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그녀는 다급히 두 손을 모아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하느님, 제가 이렇게 빌 테니 제 아들 무사하게만 해주세요... 그리고 제 아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설아랑은 못 만나게 할게요.”그녀의 기도를 듣던 진무열은 이상한 문구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수술도 다 동의하셨으면서 왜 차설아 씨랑은 자꾸 갈라놓으려고 하세요? 아까는 더 이상 대표님 선택에 관여 안 하신다면서요?”“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가 우리 도윤이 사주를 봤는데 도윤이랑 설아는 서로 상극이래. 같이 있으면 둘 중 하나는 다치기 마련이라는데 그런 애들을 어떻게 붙여놔? 둘을 위해서라도 내가 악역 자처해야지.”자신이 아무리 훼방을 놓는다 해도 둘의 마음이 간절하기만 하다면 어떤 곤란도 함께 이겨낼 것이었기에 소영금은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보기로 했다.“사모님, 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신다면서요? 언제부터 그런 미신을 다 믿기 시작하셨어요?”소영금의 대답을 들은 진무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젊었을 때의 소영금이 유명했던 건 그녀가 남긴 대단한 업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을 뛰어넘는 역경을 이겨낸 사랑 스토리도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데 한몫했었다.그때 소영금의 좌우명은 ‘사람의 의지는 하늘도 이긴다.’였는데 그랬던 사람이 나이가 들고나니 하느님에게 저렇게 기도를 하며 사주를 철석같이 믿는 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만약 소영금이 저 이유를 내세우며 차설아와 성도윤의 사이를 계속 방해한다면 어떤 대책을 내세워 여야 할지도 벌써부터 막막했다.하지만 서은아는 이때다 싶어 성도윤과 차설아가 잘되는
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소영금을 안은 채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건넸다.“아주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거 어차피 위험한 수술이었잖아요, 안 하게 된 게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니에요? 하늘도 우릴 도우신 거예요.”“나는 괜찮은데 수술 시작 전에 갑자기 사고가 난 게 우연이 아닌 것 같아서 좀 찝찝하네.”한숨을 쉬던 소영금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도윤이가 알면 화낼 텐데, 쟤 성격에 꼭 끝까지 알아내려 들 거야.”“아...”그 말에 서은아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켜내고 있었는데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살펴보던 진무열이 입을 열었다.“서은아 씨는 아까까지만 해도 수술 못 시킨다면서 큰소리치더니 왜 지금은 또 이렇게 아쉬워하는 거예요? 대표님이 수술받길 원하시는 건 맞아요?”“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서은아는 이를 악문 채 진무열을 노려보며 말했다.“수술에 관해서는 별생각 없었어요. 저는 도윤이만 좋아질 수 있다면 무조건 그 사람 선택 존중하니까요.”“그래요? 본인이 뱉은 말이니까 갑자기 말을 바꾸거나 하진 않겠죠?”서은아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진무열은 이상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당연하죠, 제가 직접 한 말인데.”모든 조치가 끝난 뒤라 믿는 구석이 있었던 그녀는 이제 와서 배려심 깊은 모습을 연출하며 진무열과 소영금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그런데 아까부터 입꼬리를 씰룩이던 진무열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대표님도 아가씨 말 들으면 마음이 한결 놓이시겠어요. 역시 서씨 집안 아가씨는 인품도 남다르네요.”진무열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수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말했다.“교수님, 여기 준비 끝났으니까 바로 수술 진행해주세요.”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여 물었다.“진 비서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수술을 진행한다니요?”“박 교수님이죠 당연히, 그분이 오늘 뇌수술 집도의이신데 그분한테 연락해야겠죠?”“박 교수님은
“그런데 박 교수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수술 삼십 분 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전화 한 통이 없어.”소영금은 시계를 보며 아직도 오지 않는 박성훈에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성대 그룹 후계자라는 지위와 신분은 국가 간부급인데 그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수술 시작 30분 전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으니 자연스레 교수의 실력에 대한 의심도 생기기 시작했다.“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성격이 워낙 그런 분이시라 항상 시간 딱 맞춰오세요. 그리고 원래 이런 수술도 잘 안 맡는데 대표님이랑 친분이 있으셔서 특별히 해주시는 거예요.”“뭐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얼굴이나 봐야겠네. 수술 잘하면 다행이지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진무열의 말에 소영금은 성격을 죽이며 복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한편, 수술실 밖으로 나온 서은아는 눈물을 닦아내고 눈을 번뜩이며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내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다면 나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예정대로 일 진행해,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그 뒤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수술 시작 시간이 되자 소영금은 초조해하며 물었다.“약속한 시간 다 됐는데 이 의사는 왜 안 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야?”“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진무열은 바로 박성훈의 비서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무슨 말을 전해 들었는지 벙찐 상태로 돌아왔다.소영금은 그런 진무열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다급히 묻기 시작했다.“왜 그래 진 비서? 어디까지 왔대?”진무열은 낯빛이 창백해진 채로 소영금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박 교수님 비서랑 연락이 됐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교수님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크게 다치셨대요.”“뭐라고?!”“어떻게 수술 앞두고 마침 그런 사고가 나? 오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그건 아닌 것 같아요.”반신반의하는 소영금에 진무열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도윤이가 이미 결정을 내린 거지. 어차피 쟤 인생인데 나도 쟤 뜻 존중해주기로 했어.”소영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사실 예전의 소영금은 사사건건 아들을 속박하려 들며 성도윤의 결혼까지 간섭했었다.그래서 차설아와 함께 살 때도 둘 사이에 자꾸 끼어들며 둘의 감정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쳤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제 아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인데 그냥 내버려 뒀으면 임채원 같은 여자가 꼬일 일도 없을 것 같아 소영금은 그 일이 늘 후회스러웠다.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주기로 한 것이다.“그럼 제 생각은 안 하시는 거예요? 도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기억을 회복하든 저는 어차피 다 상처받는 거잖아요.”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들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 서은아는 허무한 마음에 소영금을 보며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주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도윤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도윤이 때문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다 아시면서 어떻게 이래요? 쟤가 실명해서 성대 그룹 이사들한테 공격받을 때도 모든 자원, 인맥 동원해서 도윤이 일으켜 세운 것도 저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더러 모든 걸 포기하라고요?”“은아야, 일단 흥분하지 말고 진정 좀 해.”소영금은 그런 서은아를 달래며 말했다.“그냥 뇌수술하는 것뿐이지 죽는 것도 아니고 너랑 있었던 일을 다 잊는 것도 아니야. 네가 한 희생 도윤이도 알고 나도 알아, 쟤가 배은망덕한 사람도 아니잖니.”“저는 안 잊겠지만 바로 차설아를 찾아가겠죠. 그러면 저는 바로 버려지는 거잖아요, 아니에요?”“그럴 리가 없잖아. 도윤이랑 설아는 이미 지나간 인연이야.”“누가 그래요! 도윤이는 그냥 차설아를 잠시 잊어서 저를 그 여자로 생각하고 곁에 두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다정했던 만큼 기억만 돌아오면 바로 매정해질 거라고요! 그리고 모든 사랑은 또 차설아한테 퍼주겠죠.”“그럴 수도 있지만...”엉엉 우는 서은아를 보며 측은지심이 생겨난 소영금은 그녀를 다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