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겁내지 않고 OK 손짓을 했다.“마음대로 하세요.”“너!”허은아는 도리어 어찌할 바를 몰라 성도윤을 끌어당겨 원망했다. "이 여자 좀 봐, 자기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이 세상에 어찌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네 말이 맞아. 이런 뻔뻔한 사람은 절대 용서할 수 없지. 그러니까... 먼저 집에 가, 내가 잘 처벌할게.”"뭐... 뭐라고?”허은아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자신이 차설아를 엄벌하겠다고 소란을 피우다가, 결국 성도윤이 제일 먼저 그녀를 내보내다니... 이는 그녀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처럼 보였다."너도 알다시피 설아는 내 전 부인이고 내 침실에 잠입한 것은 나를 잊지 못해서고, 이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내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는 거야...”성도윤은 차설아 바라보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개인적인 일이니 남들 없이 우리 혼자 해결하는게 더 적합해.”“남?”허은아의 표정은 억제할 수 없이 약간 굳어 있었다.이 한 글자는 마치 그녀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았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빠르게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부러 성도윤의 어깨를 툭툭 치며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정말 사랑꾼이네. 아까까지만 해도 형제라고 하더니 이젠 남이야?“"됐어, 설아 씨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 나도 감동했어. 그냥 설아 씨랑 잘 해봐.”차설아는 이 말을 듣고 있자니 유난히 불편했다.분명히 성도윤을 싫어하고 죽을 만큼 싫어했는데 결국 그들의 입에서 그녀는 그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변태가 되었다.이 분노를 그녀가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성도윤, 그만해. 내가 왜 네 침대 밑에 들어갔는지 정말 몰라?”성도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나 못 잊었으면 솔직하게 말해. 숨길 필요 없어.”“웃기고 있네. 내가 널 왜 못 잊어?”차설아는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그녀는
차설아는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늦었던 터라 떠나려 했다.성도윤도 싱긋 웃으며 물었다."'칠색 유리병'은 이제는 필요 없나 보지?”차설아는 발을 멈췄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헛소리, 당연히 갖고 싶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침대 밑에 들어갔겠어?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새침했다. "그건 이제 필요 없어. 네가 가지고 가서 요강으로 써!”성도윤은 여자의 무뚝뚝하고 야비한 표정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칠색 유리병은 죽어도 차설아한테 요강 취급을 당할 줄 몰랐을 것이다.역시 여자는 못 건드려."원한다면 오늘 헛걸음하지 않도록 줄 수도 있어.”성도윤은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둘러 말했다.차설아는 망설였다.비록, 그녀는 1초 전까지만 해도 “싫어!”라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말이다.30초도 안 되는 투쟁 끝에 차설아는 금세 빙그레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정말 나에게 줄 의향이 있어? 나는 당신이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알았어. 비록 내가 당신을 욕하고 커피를 쏟았지만, 당신은 넓은 아량으로 날 용서할 줄 알았지.”성도윤은 대답했다.“물건 당연히 줄 수 있지...”차설아는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어디 있어, 오늘 밤에 그냥 가져가도 돼?”성도윤은 이마를 짚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말 좀 다 듣고 설레발 칠래?”차설아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린 듯했다."전제조건이 있을 줄 알았어. 또 이상한 말을 하고 싶은 거야?”"이번에 또 이상한 소리를 하면, 이번엔 커피를 뿌리는 거로 끝나지 않아!"성도윤은 웃으며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 나와 함께 힘을 합쳐 한 가지 일만 해줘. 그러면 칠색 유리병은 네 거야.”차설아는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내가 무엇을 하길 원해?”바닥에 놓인 거의 만 개의 블록에 시선을 박은 성도윤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블록 조립 수준은 좀 어때?”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보통이야.”"강박증이 있어서 손에 넣은 블록은 바로 맞춰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양이 너무
성도윤은 차설아가 블록을 좋아하는 줄도 몰랐고, 그녀가 고수라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그녀가 잘하지 못하는 일로 그녀의 기세를 꺾을 목적이었지만... 차설아의 행동은 그야말로 놀라웠다.차설아는 다양한 모양의 블록을 모아 손쉽게 하나의 완전한 모양을 만들어냈다.이 정도의 사고능력과 속도는 보통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전혀 몰랐네. 당신 고수였어?”성도윤은 진심으로 감탄을 자아냈다.보통 사람들이 이 모양을 만드는 데 적어도 한 시간이 걸리지만, 그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그와 대등할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차설아는 도면도 보지 않고 몇 개의 블록을 척척 맞추더니,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여우처럼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당신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없잖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성도윤은 똑똑한 머리를 지녔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는 바보였다.그는 임채원을 ‘부드럽고, 착하고, 순진한’ 여자라 하고, 서은아를 ‘털털한 형제’라고 한다. 차설아를 오히려 가식적이고 꿍꿍이가 많은 여자라고 생각하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성도윤도 자리에 앉아 차설아와 함께 블록을 쌓았다.크리스탈 램프에 비친 그의 손가락은 훤칠하고, 뼈마디가 뚜렷해 잡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차설아는 원래 블록을 쌓는 데 집중했지만, 눈빛은 어느새 그의 예쁜 눈에 떨어졌고,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려졌다.“왜 집중 안 해?”성도윤은 여자의 집중력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하고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무슨 생각해?”남자의 속도도 차설아와 맞먹었고, 말을 하는 사이, 자잘한 블록들이 그의 손에서 모양새를 갖췄다.“아니, 별것 아니야!”차설아는 볼이 살짝 뜨거워졌고, 이내 시선을 돌렸다.그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차설아, 제발 철 좀 들어. 잘생긴 남자에 환장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자기 손까지 통제 못하는 거야? 남자 손을 만져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왜 설레고 난리야!’두 사람은 함께 비행선의 날개를 맞추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왼쪽, 한 사람은 오른쪽,
“아마도?”차설아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와 부부로 지낸 몇 년 동안, 그를 아낌없이 사랑했지만, 확실히 자존심을 버리며 그에게 매달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지만, 그거 떠난다고 하면 쿨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심지어 그보다 더 빨리 도망쳤다.그녀도 만약 그때 성도윤을 만류했다면 지금 어떤 결과일지 궁금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가고, 시곗바늘은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인체가 가장 피곤하고 자고 싶어 하는 시간이다.차설아도 조금 졸렸는지, 손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칠색 유리병을 얻기 위해 절대 잘 수 없었다. 반드시 정신을 바짝 차려서 날이 밝기 전에 이 비행선을 완성해야 했다.“좀 졸려.”성도윤은 기지개를 켜며 5분의 1밖에 완성하지 않은 블록을 보며 말했다.“어차피 완성하지 못할 텐데, 그냥 자.”차설아는 자신의 혀를 깨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졸리면 먼저 가서 자. 나 혼자 완성할 수 있어. 다만, 꼭 약속 지켜. 절대 장난이 아니길 바랄게.”“진짜 혼자 완성한다고?”“이 정도는 최소 보름은 걸려.”차설아는 고집스럽고 오만하게 말했다.“그건 보통 사람이고, 나 차설아는 절대 다르지.”성도윤은 여자의 지친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가서 자면 칠색 유리병을 줄게. 진심이야.”“아니, 됐어!”여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손가락을 더욱 빨리 움직이며 말했다.“약속했으니 꼭 지켜야지. 당신 동정 따윈 필요 없어.”“그래, 난 잘게.”처음으로 여자의 고집을 본 성도윤은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그는 별다른 말 없이 혼자 침실로 가서 샤워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차설아는 블록을 손에 쥐고 고양이처럼 땅바닥에 웅크린 채 쿨쿨 자고 있었다.“하하, 차설아 허세 죽이네!”성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더니 그윽한 눈빛에는 어느새 부드러움이 피어올랐다.그는 맨발로 조심스럽게 여자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가로
이튿날, 차설아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떴다.포근한 침대에 누운 그녀의 이불에서는 편안하고 특별한 냄새가 났다. 바로 성도윤 특유의 향기였다.한 사람을 미치게 사랑하면, 그 사람만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이 향기는 향수나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사람 영혼의 향기라고 한다.아마도 차설아의 무의식 속에 성도윤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여전히 그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젠장!”눈을 뜬 차설아는 자신이 아직 성도윤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더니 토끼처럼 폴짝 뛰었다.큰 방에 그녀 혼자였고, 성도윤은 이미 떠난 것으로 보인다.“참, 왜 잠들었지?”차설아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빈약한 의지력을 탓했다. 블록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쿨쿨 잠을 잤다. 그것도 성도윤의 침대에서.성도윤이 얼마나 자신을 조롱하고 모욕했을지 눈에 선했다.이제 칠색 유리병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도윤이 그녀를 비웃을 기회까지 주었으니, 그녀는 정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차설아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옷을 후딱 챙겨입고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리고, 유리 진열장에 완성된 X3 비행선이 있는 것을 보고 눈알이 빠질 정도로 놀랐다.“헐, 이걸 완성했다고? 그 자식 마법이라도 부린 거야? 너무 대단한데?”분명 그녀는 어제 3분의 1도 못 채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널려 있는 블록 조각들이라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양이었다.그리고, 성도윤은 일찍 잔다고 먼저 샤워를 했었다. 설마 자다가 깨어나서 한밤중에 완성했을까?하지만, 그는 그럴 이유가 없다.밤새도록 블록을 쌓으면 자기 몸이 상할 뿐만 아니라 차설아의 요구도 만족시키는 것이 되니, 성도윤에게는 전혀 이득이 없었다.어쨌든, 블록을 완성했으니 성도윤은 약속대로 칠색 유리병을 그녀에게 주어야 했다. 사내로서 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하니 말이다.이렇게 생각한 차설아는 갑자기 낯가죽이 두꺼워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남자에게 약속대로
차설아는 애써 해명했다.“할아버지, 사실 어젯밤...”“설명할 필요 없어. 부끄러워하지도 마. 젊은 사람들끼리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두 정상이지.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다. 다 이해해.”성주혁은 목청을 가다듬더니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 녀석이 이제야 철이 들었는지, 오늘 아침에 내려와서 특별히 나에게 부탁하더구나. 어젯밤에 네가 많이 피곤했으니 잘 쉬어야 한다고, 절대 널 방해하지 말고 푹 자게 내버려 두라고 했어.”차설아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오해하셨어요. 어제 저랑 도윤 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저...”“젊은 남녀가 한 침대에 누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밤새도록?”“그건... 도윤 씨는 침대에 누워있지 않고 아마 블록을 쌓았을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차설아가 설명하면 할수록 두 사람의 사이가 더 의심스러워보였다.“괜찮아. 난 이해한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니까.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지!”성주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차설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너처럼 똑똑한 애가 내 뜻을 모른다고?”성주혁은 고개를 흔들더니 늙은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설아야, 우리 도윤이가 확실히 잘못했고, 너에게 상처를 줬어. 하지만 도윤이도 너 때문에 괴로웠어. 요 몇 년 동안 그 녀석 아마 충분히 힘들었을 거야. 네 화풀이는 이제 끝났으니 고집 피우지 말고 둘이 잘살아봐.”“어젯밤에 내 손자가 처음으로 아주 괴롭다고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더구나. 최선을 다해 너를 붙잡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이야. 할아버지로서 그런 도윤이를 보고 있는 내 심정도 편치만은 않아. 네가 아직도 우리 도윤이에게 마음이 남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말인데... 이 할아버지 말 한 번만 들어. 이제 그만해. 그렇게 모질게 밀어내다간 앞으로 또 후회하게 될 거야.”그의 말을 들은 차설
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들고 착잡한 심정으로 성씨 저택을 떠났다.그녀는 전화로 조인성과 약속을 잡았다. 최대한 빨리 차씨 저택의 일이 해결하고 싶었다.두 사람은 경치가 수려한 안양 리조트에서 만났다.조인성의 옆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묘령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설아 씨 능력 있네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절세의 보물 칠색 유리병을 이렇게 빨리 손에 넣다니. 역시 나 조인성의 절친답게 능력자예요!”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아름다운 상자에 담아 계속 품에 안은 채 웃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단지 문물일 뿐, 대체품도 널렸고, 사람을 불로장생시킬 수 있는 약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 필요가 있을까요?”조인성은 말없이 웃더니 차설아 품에 안긴 상자를 노려보며 여우처럼 교활한 눈빛을 보냈다.반대로 조인성의 곁에 앉은 묘령의 여자는 경멸하며 차설아를 비웃기 시작했다.“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요. 칠색 유리병의 가치는 불로장생 약보다 얼마나 높은지 몰라요. 이 보물은 모든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악의 기운과 재난도 피할 수 있죠!”“매일 칠색 유리병에 탕약을 담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죠. 당시 성씨 가문이 성심 전당포에서 이 물건을 빼앗아 둘째 도련님의 목숨을 구하려고 가문이 하마터면...”“닥쳐!”차설아가 넋을 잃고 듣던 중, 조인성이 묘령의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여자는 즉시 고개를 숙이고 감히 한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성도윤의 목숨을 구한다고요?”차설아는 중요한 정보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성씨 가문이 이 문물 하나 때문에 그렇게 큰 소동을 일으켰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건 대체 어떤 물건이죠?”조인성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고, 당연히 차설아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리 없었다.“설아 씨는 물건을 내놓고 저는 땅을 내놓으면 되는 일이죠. 그런 건 상관해서 뭐 해요? 이 물건이 성씨 가문의 명맥과 관계된다고 한들, 성도윤과 이미 이
차설아는 칠색 유리병을 갖고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천신 그룹으로 돌아왔다.줄곧 이 물건을 성도윤에게 돌려줄지 고민했다.만약 진짜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앞으로 성도윤을 만나면, 싫은 기색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됐어, 괜히 찜찜하게. 그냥 돌려주자!’천신 그룹의 직원들은 차설아를 보자마자 하나같이 긴장모드로 변했다.“대표님, 왜 오셨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집에서 푹 쉬셔야죠. 절대 돌아다니면 안 돼요!”“회사에는 저희가 있잖아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 안심하고 푹 쉬세요.”“아, 대표님,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여기 아줌마가 방금 청소해서 미끄러워요.”모두 차설아를 걱정하며 안부 인사를 전했다.서윤은 우유를 건네며 친절하게 말했다.“대표님, 목마르세요? 여기 따듯한 우유 좀 드세요. 영양가도 풍부하고 갈증도 해소할 수 있어요.”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다들 왜 이래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상전하라도 납신 줄 알겠네요.”직원들이 그녀를 좋아하고 숭배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식의 애정은 감당하기 어려웠다.“대표님은 주상전하가 아니라 황후마마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세요.”서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눈빛을 보냈고, 차설아는 더욱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칠색 유리병이 든 상자를 보며 물건을 돌려줄까 말까 계속 망설였다.갑자기 맞은편에 바로 성대 그룹 본사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이 각도에서 성도윤의 사무실이 보일지도 모른다.“서윤 씨, 망원경 좀 찾아 주시겠어요?”차설아는 열정이 타올라 비서에게 물었다.“아마 있을 거예요. 제가 사무 직원에게 가져오라고 할게요.”사무 직원은 곧 고배율 망원경을 보내왔다.차설아는 창가에 서서 망원경을 들고 반대편을 탐색했다.성도윤의 사무실은 차설아의 사무실보다 층고가 조금 높았지만 면적이 커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이 녀석, 진짜 일 중독자군. 점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