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자, 차설아는 차를 몰고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약속대로 영흥 부둣가의 성심 전당포로 향했다.지난번 ‘짜릿한’ 경험과는 달리 이번에는 황제가 순례하는 것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막힘없이 달려나갔다.행인들은 모두 그녀에게 정중하게 대했고, 어떤 사람은 그녀에게 꽃다발을 바치기도 했다.“뭐야, 이상하네? 극악무도하던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온화하고 선량하게 변했지?”차설아는 자신의 목에 걸린 화환을 내려다보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원이는 뒷좌석에 앉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표정을 지으며 일침을 가했다.“모두 엄마를 황후로 여기기 때문이죠. 그러니 당연히 황후에 걸맞은 격식 높은 대우를 하는 거고!”“황후는 무슨. 나 저 사람들 잘 알지도 못해. 무슨 영화 찍어?”“저 사람들 알 필요 없어요. 엄마는 그저 미스터 Q만 알면 돼요...”원이는 진지하게 설명했다.“미스터 Q가 저 사람들의 왕이고, 엄마는 왕의 미래 아내이니 당연히 저들의 왕후죠!”“제가 이미 미스터 Q한테 엄마에 대해 잘 홍보하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 사람들 지금은 엄마를 엄청 존경해요...”“뭐라고?”차설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더니 핸들을 움켜쥐고는 노기등등해서 말했다.“차진원, 너무 한 거 아니야! 엄마를 그렇게 팔아먹어? 내가 언제 그 자식 아내가 된다고 했어!”“당장은 아니지만 천천히 알아가 보세요. 인품이 좋은 사람이니 엄마도 분명 좋아할 테고, 언젠가 아내가 되겠죠.”원이는 자신만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는 자신과 동생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고 자부했다.달이도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랑 오빠는 이미 아저씨의 자식이 되었어요. 엄마만 아저씨의 아내가 되면 우리 네 사람은 한 가족이 될 수 있어요!”‘세상에, 내가 4년 넘게 키운 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홀랑 넘어갔다니!’‘이건 내 잘못이야? 아니면 그 녀석이 너무 교활해서 연기를 잘하는 거야?’‘됐어, 오늘 밤 방법을 강구해서 아이들이 그 거짓된 가면을 볼 수
“Q 아빠, 저희 엄마랑 같이 왔어요!”달이는 천사처럼 환하게 웃으며 남자에게 달려갔다.미스터 Q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가 눈을 치켜뜨는 순간, 고혹적인 시선이 차설아와 딱 마주쳤다.두 사람 모두 흠칫 놀랐고, 마치 알 수 없는 전류가 공기 중에 뒤엉키는 것 같았다.“두 녀석이 그러는데, 설아 씨가 물고기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특히 우럭찜을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당신을 위해 만들었어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미스터 Q는 자연스럽게 말했다.마치 결혼한 지 여러 해 된 남편이 아내를 위해 만든 것처럼 말이다.두 녀석은 모두 차설아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큰 눈을 껌벅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봐요, 엄마. 우리가 Q 아빠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죠?”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이 남자 대체 뭐야? 친하지도 않은데 말끝마다 날 위해 만들었다고? 이건 두 아이를 매수하려고 쇼하는 거잖아!’“아, 하하하. 감사하네요. 귀하신 분께서 제가 좋아하는 우럭찜을 만들려고 특별히 시간을 내주셨다니 부끄럽네요. 제가 무슨 낯짝으로 먹겠어요!”차설아는 남자의 앞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당신, 대체 무슨 속셈이에요? 이렇게까지 연기할 필요 없잖아요?”미스터 Q는 계속 우럭을 손질하며 다정하게 차설아의 귓가에 말했다.“오해하지 말아요. 그저 애들 기쁘게 해주려는 거예요.”“정도껏 하세요. 애들 즐겁게 해주는데 저는 왜 끌어들여요?”“두 녀석이 굳이 저를 설아 씨 남편으로 만들겠다는데 어떡해요? 우리가 함께하면 두 녀석이 행복하다니, 아빠가 되기로 한 이상, 그 소원을 이뤄줘야죠.”“대체 목적이 뭐예요? 애들 건드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세요.”차설아는 좀 급해졌다.미스터 Q 같은 악인이 왜 혈연관계도 없는 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어쩌면...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미스터 Q는 차설아에게 귓속말을 하는 대신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아이를 보
차설아는 부엌을 떠나 성심 전당포를 둘러보았다.장재혁은 그녀에게 열정적으로 전시관 하나하나를 소개했다.“설아 씨, 여기는 동방문완관입니다. 안에는 모두 국제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보물들이 있죠. 예를 들면 십이지지 동물 머리, 금옥새, 상고청옥...”“여기는 서방보물관입니다. 안에는 순금 파라오 권장, 오색 다이아몬드 왕관, 비너스 조각...”“이곳은 진귀관으로, 전 세계에 남아 있는 칠색 영롱새 표본과 수천 년 된 영지, 만 년 된 펜던트 등...”차설아는 입을 살짝 벌리고 보는 내내 탄성도 지르지 못했다. 성심 전당포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전당포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 이 정도 보물은 아무거나 내다 팔아도 중견 회사 1년 이윤에 필적할 텐데.’경제력만 본다면 미스터 Q는 확실히 괜찮은 돈줄이었다. 잘만 잡으면 평생 옆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그녀는 돈이라면 충분히 자기 힘으로 벌 수 있었으니, 돈이라는 요소는 그녀에게 아무런 우세도 없어 절대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재혁 씨 일 보세요. 저 혼자 천천히 볼게요.”차설아는 성심 전당포의 어두운 면을 더 쉽게 파헤치려고 일부러 장재혁을 떼놓으려 했다.장재혁도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참관하세요.”그는 몇 발자국 걷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는 신비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설아 씨, 우리 성심 전당포에는 금지구역이 있습니다. 만약 전시관 앞에 진입 금지 표시를 본다면, 부디 호기심을 억누르고 함부로 침입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아주 엄중하니까요!”이 말을 들은 차설아는 속으로 한껏 기뻐했다.‘좋아, 바로 이거야!’“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 머리는 저도 있어요.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 사람은 절대 들어가지 않겠죠!”“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장재혁이 떠나고 차설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나 차설아는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기어코 들어가야겠어! 당신네 사장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방안엔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마치 조금 전의 울음소리와 살려달라는 소리가 환각인 것 같았다.“그래요, 당신이 두렵다는 거 알아요. 그러니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당장 이 문을 열어 당신을 구할 테니, 그냥 내 아이 앞에서 그 자식 추악한 얼굴을 까발리기만 하면 돼요.”차설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힘을 쓰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내리치려고 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꽉 쥐었다.“성심 전당포 금지구역에서 뭘 하려는 겁니까?”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서늘한 한기를 지니며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미스터 Q가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서 있었다.칠흑 같은 어둠과 그의 검은 색 가면을 보니 정말 “자정 살인마”가 자신을 훑어보는 것만 같았다.설아는 비록 겁이 많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긴 다른 사람의 공간이었고, 심지어 그 사람이 널리 악명을 떨친 악당이었다. 그러니 설아는 상황을 파악한 후 적당히 자세를 낮추며 머쓱한 웃음을 지어냈다.“아하하, 미스터 Q, 생선 만들고 계시지 않았어요? 왜 갑자기 여기에 온 건가요? 아휴, 깜짝 놀랐잖아요.”“이미 다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겸사겸사 그쪽 보러...”미스터Q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심지어 아주 강한 압박감도 들 정도였다.그는 천천히 설아에게 다가갔다.“켕기는 게 있나 봅니다?”“그럴 리가 있어요. 농담도 참. 전 단지 이 전시관을 참관하러 왔을 뿐이에요. 겸사겸사 당신의 엄청난 재력에 감탄도 하면서요. 그런 제가 켕기는 게 뭐가 있어요...”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설아.“장재혁이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함부로 성심 전당포에 들어오는 대가가 뭔지 말이에요.”미스터 Q는 설아의 손목을 잡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악마의 속삭임 같은 공포가 배어있었다.“무... 무슨 대가요?”설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함부로 금지구역에 들어온 사람은 평생 여기에
설아는 순간 오한이 났다. 그녀는 앞의 남자를 힘껏 밀치고는 차갑게 말했다.“돌았어요? 이런 농담도 막 하고 말이에요. 내가 확 베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요.”재력은 그를 초과한다고 말하지 못하겠으나 무력으로 그를 제압하기엔 너무 쉬운 일이었다. 만약 정말 지나치게 몰아붙인다면 그녀는 사정없이 대처할 것이다.미스터 Q는 다시 설아에게 다가갔다. 가면 밖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고 엄숙했다.“난 농담 같은 거 안 해요. 차설아 씨가 그 귀여운 아이들을 낳은 걸 보면 유전자가 나쁘지 않다는 걸 설명하죠. 그러면 저랑 꽤 어울릴 겁니다. 만약 우리가 협조한다면 아마 저 아이들보다 더 완벽한 아이를 낳을 수도 있어요. 정말 나랑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우웩!”설아는 그의 말에 구토하는 몸짓을 하면서 차갑게 쏘아붙였다.“제발 상황 파악 좀 해요. 아이는 한 사람만의 산물이 아니에요. 그리고 내 아이들이 그렇게 귀여운 건 내 유전자가 완벽한 외 아이 아버지 유전자도 대단할 수 있어요. 당신은 아이 아버지보다 거리가 되게 먼 거 알아요? 그러니까 제발 헛된 자신감을 가지지 마요!”“하하.”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차설아 씨도 아네요. 아이는 한 사람만의 산물이 아닌 거.”“그럼요? 당신 혼자, 아니면 나 혼자 어떻게 아이를 낳아요?”설아는 이 남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계속 쓸데없는 소리만 하니까 말이다.“그렇다면 왜 아이 아버지와 만나지 못하게 해요? 아이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그들의 부성애를 앗아가는 건 이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미스터 Q의 말투엔 조금의 분노와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인데요?”설아는 경계하는 얼굴로 그를 보며 빈틈없이 말했다.“말했잖아요. 아이 아버지는 쓰레기라고요. 그리고 이미 죽었어요. 그래서 알려줄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아이에겐 나처럼 완벽한 엄마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아이들의 아버지는 누구예요? 그 사람 유전자 좀 저랑 비교해 보게요. 누가
그때 성도윤에게 첫눈에 반한 건 다 그 잘생긴 얼굴 때문이었다.만약 그 얼굴만 아니었다면 어떻게 사 년 동안 멍청하게 그의 곁에서 버텨왔을까. 아마 결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얼굴만 보다간 정말 평생 망할 수도 있었다. 근데 그녀는 하필 잘생긴 얼굴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그래요...”미스터 Q는 한숨을 내쉬더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그것 때문이라면 난 확실히 그와 비교할 수 없죠. 예전엔 그래도 꽤 볼만 했는데 안타깝게도 얼굴이 망가지는 바람에 그 흉터를 볼 때마다 남들은 말해서 뭐 해, 나 자신도 구역질 날 지경이에요.”설아는 늘 교만하던 이 남자가 갑자기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을 보자 살짝 안쓰러웠다. 아까 너무했나 싶기도 했다.그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아유 그게 무슨 큰 영향이 있겠어요. 남자는 얼굴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 돈 되게 많잖아요. 당신이 수장해 놓은 보물중 하나만이라도 예쁜 아내 한 열 명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아이도 마음껏 낳고 말이에요.”“안 돼요!”미스터 Q는 진지하게 말했다.“난 당신이 엄청 흥미로워요. 그래서 당신과 결혼해 귀여운 아이들을 낳고 싶어요. 다른 여자는 모두 당신을 대신할 수 없어요. 만약 차설아 씨가 나랑 결혼만 해준다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섬도 줄게요. 그리고 성심 전당포 안의 모든 보물도 당신 소유로 해줄게요. 어때요?”“아니, 왜 이렇게 똥고집에요? 말했잖아요. 난 얼굴 본다고. 그러니까 얼굴 신경 쓰지 않는 여자 만나면 안 돼요?”설아는 진짜 못 말린다는 말투로 다시 거절했다.사실 이 남자가 건넨 조건은 아주 성의 있고 유혹적이었다. 아이들도 친 아버지처럼 좋아했다.만약 그와의 결혼에 동의한다면 정말 좋은 선택일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엔 아직도 경계선이 존재했다. 남편이란 자리에 성도윤 외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는 아직 어려웠다. 자신을 설득하지 못했다.“얼굴을 본다...”미스터 Q는 갑
원이와 달이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순진하고 무고한 모습으로 미스터 Q의 편을 들어주었다.“엄마, 분명 저희 아저씨를 오해했어요. 아저씨는 경수 아빠 외 달이가 본 제일 다정하고 착한 남자예요! 그런데 어떻게 나쁜 사람일 수 있어요?”“달이 말이 맞아요!”원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 턱을 만지며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Q아저씨는 제가 여러 번 시험한 후에야 엄마에게 소개해 드렸는걸요. 남편감으로 말이에요. 달이 안목을 믿기 어려우시면 제 IQ를 믿어주세요.”“어...그게...”설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다른 건 몰라도 원이 IQ는 확실히 높았다. 그 아이가 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IQ가 더 높지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일 것이다.이렇게 봤을 때 이 남자는 전혀 좋은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러니 매우 뛰어난 지능으로 두 아이의 환심을 샀을 가능성이 컸다.“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여기 이 문만 열면 엄마가 왜 이러는지 알게 될 거야.”쓸데없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싶지 않은 설아는 사실로 설명하려 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는 다리를 쭉 뻗었다. 온몸의 힘을 다해 문을 찼다.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다.“원아, 달아. 저기 일 미터 뒤로 물러서. 이 나쁜 놈이 어느 정도로 변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 뒤에 아마 끔찍한 게 있을 수도 있어. 너희들에게 트라우마라도 남겨주면 안 되니까 얼른 뒤로 물러서.”두 아이는 설아의 말에 조금 두려워졌다. 그들은 얼른 미스터 Q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문을 보고 있었다.하지만 어색한 것은 한참을 찼음에도 문은 꿈쩍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설아만 지친 숨을 헐떡거렸다.이런 작은 나무문을 그녀의 힘으로 밀치지 못한다는 게 이상했다.“힘들어요? 쉬었다가 할래요?”미스터 Q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마치 자신과는 연관이 없는 듯 설아의 안부를 물었다.“허위적인 관심 필요 없어요. 내가 이 문 반드시 열어버릴 거예요!”설아는 땀을 쓱쓱 닦고는 계속 힘을 주었다.이때 미스
설아는 재혁의 말을 들은 후,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여겼다.그녀는 재빨리 두 아이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고는 그들의 눈을 손으로 막아주면서 경고했다.“먼저 눈 감고 있어. 엄마가 안에 상황이 어떤지 확인한 다음에 다시 눈 떠.”동시에 미스터 Q에게 말했다.“문 열지 않아도 돼요. 난 당신이 한 변태 짓에 관심 없어요. 그냥 내 아이 앞에서 나쁜 놈이라고 인정만 해주면 돼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애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설아는 깊이 생각했다. 이 변태가 자신의 범죄를 들킨 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게 두려워 아이를 먼저 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때를 노려 이 안에 갇힌 사람도 구할 것이다.미스터 Q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고 다시 재혁에게 명령했다.“문 열라고 했다. 못 들었나?”“그게...”재혁은 비록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미스터 Q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평소 갖고 다니던 열쇠로 문을 열었다.“조심해!”설아는 두 아이를 꼭 끌어안고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방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이때 재혁이 입을 열었다.“숨지 말고 얼른 나와요. 계속 나오겠다고 소리 질렀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나와 차설아 씨에게 똑똑히 보여줘요. 저희 보스가 어느 정도로 ‘나쁜’ 지 말이에요.”방안이 꽤 어두운지라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저 아무 기척도 없었다.미스터 Q가 차가운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했다.“나와요!”이때 어떤 여자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녀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얼굴은 수척하게 야위었는데 눈언저리는 해골처럼 깊게 들어갔다.하지만 이 모습은 설아가 상상한 것보다 괜찮았다.“당... 당신은?”설아는 이 여자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가고 싶다면 지금 가도 돼요. 하지만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 때 울면서 우리더러 살려달라고 하지만 마요!”재혁은 그 여자를 노려보았는데 마치 딱하게 여기기는 하지만 또 이 모습에 화를 내는 것 같았다.“어어! 생각났어요.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