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체면이 제대로 구겨진 소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내가 못할 것 같아?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랑 아들이 밖에서 이런 대우를 받은 걸 알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렇게 사랑받고 있다면, 어디 한번 오라고 해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네가 미쳐 날뛰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어.”“흥, 후회하지 마. 기다려!”일이 이렇게 된 이상, 소이서는 어쩔 수 없이 남편 장시혁에게 전화를 걸어 애교를 떨며 말했다.“여보, 누가 나랑 준혁이를 괴롭히고 있어요. 빨리 와줘요!”바람둥이 남편 장시혁은 늘 소이서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오늘 마침 근처에서 미팅이 있었고,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소리에 죽일 듯이 달려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벤츠 한 대가 학교에 들어섰고, 덩치가 큰 남자가 내렸다. 이 사람이 바로 해주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상인 장시혁이었다.“누가 내 아들을 괴롭혀! 죽으려고 환장했지! 어느 놈이야, 당장 나와!”장시혁은 사납게 소리쳤다.구경하던 학부모와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연신 뒷걸음질 쳤다.장시혁의 가문은 확실히 재력이 탄탄하고, 사업을 하는 방식도 거칠어서 누구도 감히 밉보일 용기가 없었다.장시혁의 아들 장준혁은 자신의 든든한 백이 오자 금세 턱을 쳐들고 뛰어가 교활하게 말했다.“아빠, 드디어 오셨어요? 나랑 엄마가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어요. 반드시 우리 대신 저 두 사람을 혼내줘요. 때려죽이라고요!”소이서도 훌쩍이며 말했다.“여보, 방금 저 꼬마가 우리 준혁이 위에 올라타서 준혁이를 때렸어요. 얼마나 불쌍했다고요... 오늘 저 두 사람을 단단히 혼내지 않으면 장씨 가문의 체면이 서겠어요?”“저 꼬맹이가?”장시혁은 원이를 가리키며 거만하게 말했다.“너 어느 댁 아들이야? 아버지가 누구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감히 장시혁의 아들을 건드려!”담력이 뛰어난 원이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맞아요
모두들 멍해졌다. 특히 소이서는 눈치 없이 장시혁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여보,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저랑 준혁이를 위해 복수를 해야지 무릎을 꿇고 있으면 어떡해요? 차설아는 그저 몰락한 가문의 딸이고 도윤이 오빠를 배신해서 집에서 쫓겨났어요. 이렇게 부도덕한 인간에게 무릎을 꿇다니! 사람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요?”“창피라니!”장시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소이서의 뺨을 후려쳤다.“당신이 뭘 알아? 애초에 성이란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가문은 진작에 멸망했을 거야... 당신이랑 준혁이가 먹고 입는 것, 당신 손에 들려있는 그 명품 가방, 준혁이가 신고 있는 신발들 모두 성씨 가문 덕분에 누릴 수 있는 거야. 감히 우리 가문의 은인에게 무례하게 굴면, 절대 용서하지 않아!”소이서는 맞아서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억울해하며 반박했다.“말도 안 돼요. 해주시의 성씨 가문은 진작 몰락했어요. 가문 전체가 몰살당해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장씨 가문을 도와요? 장씨 가문이 지금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건 전부 가문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지 성씨 가문이랑 뭔 상관이에요? 그리고 그분의 손녀딸이면 또 뭐요? 무릎까지 꿇을 필요 있어요?”소이서는 장시혁과 결혼한 이후로 성격을 많이 굽히고 살았었다. 부유한 장씨 가문에서 재벌가 사모님 생활을 하며 남편의 말을 곧잘 들었고 반항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차설아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장시혁을 보자 그녀는 체면이 구겨졌고, 처음으로 남편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미련한 년! 감히 내 은인에게 무례하게 굴어? 당장 무릎 꿇어!”장시혁은 소이서에게 명령했다.“싫어요!”소이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차설아에게 무릎을 꿇으라니, 차라리 날 죽여요!”“그래? 그럼 당장 이혼해!”장시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눈을 붉히며 소리쳤다.“당신...”소이서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그녀는 당연히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혼하지 않으려면 차설아에게 무릎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모두들 할머니를 기이한 여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자 혼자 몸으로 성씨 가문을 해주의 제일 가문으로 이끌었으니 말이다. S시의 선우 가문도 성씨 가문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하지만 이런 전설적인 가문은 불과 한 달 만에 정체불명의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그렇게 성씨 가문은 해주시에서 몰락했고, 영원히 전설로 남았다.이상하게도 성씨 가문은 몰락했지만, 차씨 가문은 일어섰다. 누군가는 차씨 가문의 궐기가 성이란이 배후에서 조종한 덕분이라고 했다.하지만 몇십 년 후, 차씨 가문도 처절한 방식으로 몰락했다.차설아는 할머니 성이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저 아주 대단하시고 신기한 여자라는 것밖에 몰랐다. 차설아는 전에 성씨 가문과 할머니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 했지만 할아버지의 금지 명령이 떨어졌었다.할아버지는 임종 전에 차설아에게 성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지 말라고, 그리고 차씨 가문도 일으키지 말고 성도윤에게 시집가 행복하게 살라고 신신당부했었다.차설아는 할아버지의 말대로 성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 역할에 충실했지만, 결과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행복을 얻기는커녕 실망과 상처만 받았다.지금 성도윤도 이 세상을 떠났으니, 할아버지의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여자의 행복은 언제나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앞으로 차설아는 차씨 가문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원한을 갚을 것이다!“만약 저를 진짜 장씨 가문의 은인으로 생각하시고, 은혜를 갚고 싶다면,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시겠어요?”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장시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말씀만 하세요.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장시혁은 고개를 들고 진정성 있는 눈으로 말했다.소이서를 포함한 현장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차설아가 어떤 요구를 할지 궁금했다.차설아는 덤덤하게 웃더니 말했다.“아내분과 이혼하지 말아 주세요. 두 분 사이에 자식도 있으니 좀 더 고려해보세요. 이 어린아이가 부부의 체면
“그건...”소이서의 말에 원장은 난처해 났다.몬테리 유치원 설립 초기, 가족 위원회는 입학 문턱을 높이고, 학생들의 소질을 보장하기 위해 공동으로 이러한 학칙을 제안했다.몬테리는 지금까지 이 학칙을 엄격히 시행하고,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절대 수용하지 않았다.원장은 비록 바르고 선량한 차설아와 총명하고 귀여운 원이가 아주 맘에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학부모 앞에서 관례를 어길 수 없었다.“왜 말을 못 해? 원장이란 사람이 앞장서서 학교의 규칙을 어길 수는 없잖아?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이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성격이 괴팍해서 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분명 안 좋은 영향을 줄 거야! 절대 학칙을 어겨서는 안 돼!”소이서는 울분을 터뜨렸고, 주변 학부모들도 선동당해서 절대 학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원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여러분들 일단 진정하세요. 이 일은 제가 방법을 생각해볼게요.”“방법을 생각한다고요?”태도가 악랄한 한 학부모는 차설아 모자를 질겁하면서 말했다.“가장 좋은 방법은 이 두 모자를 당장 쫓아내는 거예요. 불건전한 가정의 아이를 들이는 건 몬테리의 조화롭고 따뜻한 교풍을 오염시킬 뿐이에요!”차설아의 얼굴은 순간 극도로 어두워지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학부모를 쏘아보았다.“그 더러운 입, 당장 닥치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당신 아이도 부모 한쪽을 잃을지도 모르거든!”차설아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서 학부모는 순간 겁을 먹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차설아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그 학부모뿐만 아니라, 불평에 가득 찬 다른 학부모들도 모두 겁에 질려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간이 부은 소이서만 여전히 차설아 모자를 욕하고 있었다.하지만 결국 장시혁의 따귀에 제압당하고 말했다.차설아는 마음이 아팠다. 원이와 달이가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을 것을 예상했지만, 지금 사회가 그들의 정상적인 등교까지 제한할 줄 몰랐다.차설아는 원
하지만 오늘 원이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걱정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추측했고, 차설아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원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어? 엄마한테 말해줄래?”차설아는 부드럽게 물었다.그녀는 두 아이에게 항상 자유로운 교육 태도로 일관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며 간섭하거나 설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유일한 요구는 바로 두 아이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제일 먼저 그녀와 소통해야 하며,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그래서 원이는 도도한 아이였지만 차설아와 속마음을 나누려 했다.원이는 고개를 떨구고, 작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다.“엄마, 원이가 똑똑하지 않아서, 착하지 않아서 아까 아저씨 아줌마들이 절 싫어하는 거예요? 절 유치원에도 못 다니게 쫓아낸 거예요?”차설아는 그의 말을 듣고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나 원이는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시무룩해 있었다.차설아는 가슴이 찢기는 것 같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니야. 우리 원이가 얼마나 똑똑하고 착한 아이인데? 그분들이 안목이 없는 거야... 괜찮아, 우리를 환영하는 유치원으로 바꾸면 돼.”“엄마, 저 달랠 필요 없어요. 제가 아버지가 없어서 환영받지 못하는 거죠? 맞죠?”“음... 그게...”“그래서 계속 생각했어요. 아버지라는 사람은 별로 쓸모는 없지만, 그래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같은 날 만약 아버지가 있었다면, 설사 식물인간이라고 해도, 우리는 온전한 가정이니 몬테리 유치원에 입학할 자격을 가질 수 있잖아요. 맞죠?”“그렇긴 하지...”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음이 더욱 괴로웠다.그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아이들에게 빚진 어떤 부분은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역부족이었다.가끔 아무 남자나 만나 결혼해 볼까도 생각했었다. 적어도 원이와 달이에게 대외적으로 아버지가 있으니 오늘과 같은 차별 대우는 받지
깊은 밤, 짙은 어둠이 깔렸다.원이는 차설아가 이미 잠든 것을 확인하고 몰래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그는 화장실에 숨어 무전기를 들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긴급 상황, 긴급 상황. 미스터 Q는 답하라. 미스터 Q는 답하라.”잠시 후, 무전기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미스터 Q 대기 완료. 원이는 말하라. 원이는 말하라.”“지금 바로 XX아파트로 와서 나와 집합한다. 지금 바로!”“알았다!”교류가 끝난 후 원이는 무전기를 접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아파트 정자에 가면과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훤칠한 키의 미스터 Q가 약속대로 도착해 있었다.원이도 자신의 작은 서류 가방을 들고 달빛을 받으며 서둘러 합류했다.“미스터 Q, 시간 약속을 아주 잘 지키네요. 역시 내가 점 찍은 남자다워요. 이 점에 10점을 더 드리죠.”원이는 산처럼 우람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원하는 건 갖고 왔어?”미스터 Q는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당연하죠. 이번 물건이 얼마나 확실한데요. 분명 미스터 Q의 마음에 드실 거예요.”원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역시나 엄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그럼 제가 원하는 건 챙겨오셨나요?”“너의 요구대로 준비했어.”“좋아요, 그럼 교환하죠!”두 사람은 망망한 어둠 속에서 각자의 물건을 꺼내 서로에게 건넸다. 엄숙한 분위기는 마치 깡패 보스들의 접선을 방불케 했다.원이는 미스터 Q에게 사진과 짧은 동영상을 건넸다. 사진과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그의 어머니인 차설아였다.“이번엔 완벽한 엄마의 모습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잠자며 침 흘리는 모습까지 찍었어요. 그리고 브이로그까지 첨부했어요. 어때요? 제가 의리 하나는 있죠? 완벽한 물건이죠?”원이는 마치 어른처럼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미스터 Q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훑어보다가 차갑던 미간이 저절로 부드러워졌다.사진 속 여인은 때로는 귀엽고, 때로는 청순하고, 때로는 여성스러우며 게
그러다 보니 미스터 Q는 많은 경쟁자를 누르고 원이 마음속의 가장 적합한 ‘아버지’ 후보가 되었다.차설아의 적합한 ‘남편’이 맞는지는 원이는 좀 더 지켜봐야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미스터 Q, 할 말이 있어요...”원이는 열정적으로 게임 한 판을 하고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오늘 엄마랑 유치원에 갔다가 괴롭힘을 당했어요. 아버지가 없어서 그 유치원에 갈 수 없대요. 하지만 전 그 유치원이 좋거든요. 아주 속상해요. 아버지가 없으면 다른 아이들보다 레벨이 낮은가요?”미스터 Q는 갑자기 눈썹을 찡그리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왜 아버지가 없어? 전에 배씨 가문의 배경수가 네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어?’“휴, 이제 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솔직히 말할게요. 경수 아빠는 제 아버지가 맞긴 하지만 친아버지는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은 엄마와도 헤어졌어요. 엄마도 제가 더 이상 경수 아빠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앞으로 찾아갈 수도 없어요...”“헤어졌다고?”미스터 Q는 흥미가 생긴 듯 계속 캐물었다.“그럼 네 친아버지가 누군지 혹시 알아?”“당연히 알죠!”원이는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굽히더니 신비로운 표정을 지었다.“이리 가까이 와 봐요.”남자는 허리를 굽히고 귀를 가까이 댔다. 커다란 그의 몸집은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원이는 큰 눈을 껌벅이여 말했다.“전 사실 아버지가 없어요. 엄마가 몇 달 동안 저를 영석에서 키워서 ‘펑’하고 튀어 나왔어요!”미스터 Q는 할 말을 잃었다.‘멍청하기 짝이 없군, 어린아이에게 놀림을 당하다니!’“미스터 Q, 안 믿어요?”“허허, 그럼 믿을까?”원이의 동그란 눈에는 순진함이 가득 차서 급히 설명했다.“사실이에요. 저희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요. 못 믿겠으면 나중에 엄마한테 물어보세요.”비록 차설아가 원이에게 이렇게 설명했을 때, 원이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바보 같은 표현은 확실히 차설아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차설아의 말을 그대로 옮겼으니, 이건 거짓말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미스터 Q는 두 손을 내밀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아쉽게도 얼굴에는 긴 흉터가 있어. 그래서 내가 가면을 벗으면 네 엄마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을 거야!”원이는 남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작은 얼굴을 찡그리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작은 손을 내흔들며 말했다.“괜찮아요. 저희 엄마가 얼굴을 많이 보긴 하지만 제 의견도 존중해줄 거예요. 만약 다른 방면에서 충분히 훌륭하면 제가 엄마한테 잘 말해줄게요. 그리고... 미스터 Q는 가면 이외의 이목구비는 아주 완벽해요. 가면을 쓰고 있어도 멋있으니 저희 엄마도 맘에 들어 할 거예요.”미스터 Q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흥미진진해서 말했다.“네 엄마가 그렇게 외모를 많이 봐?”“당연하죠!”원이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니면 왜 성도윤 그 나쁜 놈과 결혼했겠어요? 결국 나쁜 놈에게 괴롭힘만 당하고. 얼굴만 보다가 큰코 다친 거죠.”“얼굴이 아니라, 성도윤의 성격, 재능이나 능력을 좋아한 건 아닐까?”“말도 안 돼요!”원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구토하는 시늉을 했다.“성도윤을 몰라요? 해안에서 냉혈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인간이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재능이나 능력 같은 건 없어요. 아니면 왜 저희 엄마처럼 좋은 아내를 내버려 두고 다른 여자와 어울리겠어요? 사람 보는 눈이 없어도 유분수지.”“네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그건 아니에요. 전에 경윤이 이모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도 인터넷에 찾아봤더니, 성도윤은 제 엄마를 저버린 아주 나쁜 놈이더라고요. 만약 만나게 된다면 엄마 대신 혼 내주겠어요.”원이는 주먹을 꽉 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의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언젠가 쓰레기 성도윤을 제대로 혼내주기로 마음먹었다.아쉽게도 해안에 온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그는 성도윤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미스터 Q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능력이 강한 것도 일종의 매력이지. 그 사람에 대해 알아봤다면 성도윤의 업무능력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