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직원이 말했다.“죄송하지만, 성도윤 씨 시체는 이미 인계되었습니다.”“네? 인계되었다고요?”배경수는 신경이 곤두서서 물었다.“누가요?”“고인의 가족분께서 어제저녁에 옮기셨어요.”‘그렇다면, 성가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건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배경수는 생각에 잠겼다.그는 휴대폰을 들고 주식 시장, 언론, 심지어 성대 그룹까지 최신 정보를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혹시, 죽은 사람이 성도윤이 아니란 말인가?’“확인할 것이 있는데요, 그 시신이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가 맞나요?”배경수는 직원에게 물었다.“아마 맞을 거예요. 시신을 받으러 온 분이 아버지셨어요.”직원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럼 더 이상한데요?”배경수는 의심을 가득 품고 차설아의 병실로 돌아갔다.공교롭게도 배경윤은 남자친구 강우혁을 데리고 차설아를 보러 왔다.“언니,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잖아. 하룻밤 사이에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대체 누가 그랬어? 내가 당장 가서 복수할 거야!”배경윤은 차설아을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히며 분을 토했다.“내가 길에 잘못 들어서서 넘어진 거야.”차설아는 몸을 움직이며 자신만만해서 말했다.“걱정 마. 이 정도 상처는 열흘이나 보름 정도면 충분해!”강우혁이 말을 보탰다.“저희 집은 의사 가문이라, 아버지께서 정형외과 의사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 설아 씨가 필요하면 제가 소개해드리죠.”배경윤이 급히 말했다.“뭘 묻고 그래? 당장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지! 반드시 최고의 의사가 언니를 치료해줘야 내가 마음이 놓인단 말이야.”강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당장 전화할게.”차설아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형외과 의사라는 말을 듣고 냉큼 말했다.“그럼 우혁 씨한테 부탁 좀 할게요. 저는 필요하지 않지만 성도윤이 필요할 것 같아요.”“성도윤? 그 인간이랑 뭔 상관인데?”배경윤은 성도윤의 이름을 듣고 급히 물었다.“설마, 두 사람 같이 있다가 사고 난 거야?”“그 인간 나 구하려다가 심하게 다
“당연하지!”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배경수와 마찬가지로, 배경윤도 차설아를 백 프로 신뢰했다.“그럼 언니만 믿을게.”배경윤은 떠나기 전, 차설아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또 강우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당부했다.“우리 언니한테 잘 보여. 언니가 허락하지 않으면 난 결혼 못 한다고.”“걱정하지 마. 설아 씨는 분명 나의 진심을 알아주실 거야.”강우혁은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맞죠, 설아 씨?”“아마도요?”차설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배경수와 배경윤이 병실을 떠나고, 차설아는 입꼬리를 내리더니 차갑게 말했다.“문 좀 닫아주세요.”강우혁은 차설아의 요구대로 문을 닫고 차설아 앞에 다가가 점잖은 얼굴에는 시종 온화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저에 대해 뒷조사를 한 모양인데, 제 과거를 아셨나 봐요?”차설아는 조금 의외였다.“생각보다 똑똑하네요.”“과찬이세요. 경윤이가 늘 저한테 설아 씨는 정과 의리를 중히 여기고 신중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친한 동생이 오래 만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니, 절 조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죠.”“좋네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사리에도 밝네요. 확실히 흠잡을 데가 없어요.”차설아는 강우혁의 태도가 이렇게 겸손할 줄 몰랐다. 자신에 대해 뒷조사를 한 걸 알면서도 전혀 화내지 않고 사리에 밝은 말만 골라 하니, 차설아는 조금 부끄러웠다.“그럼 솔직하게 말해요. 경윤이에게 접근한 목적이 뭐죠?”차설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강우혁은 덤덤하게 웃었다.“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저는 윤이를 사랑해요. 굳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윤이와 부부가 되어 평생 함께 사는 것?”“헛소리!”차설아는 하찮은 듯 말했다.“그런 말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경윤이나 믿지, 난 절대 못 속여요. 당신이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요? 똑똑한 분이, 그 여자가 우리에게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요?”“지금 채원이를 말하는
하지만 차설아는 여전히 마음이 찝찝했다.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정말 떳떳하다면 시간 내서 당신과 임채원이 사랑했던 사이라는 걸 경윤이한테 솔직하게 말해요. 경윤이가 받아들인다면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차설아가 강우혁을 향해 말했다.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건 바로 자기 때문에 배경윤에게까지 누를 끼치는 것이었다.임채원이 어떤 여자인지는 차설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든 임채원과 관계된다면 반드시 재수가 없게 된다.“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설아 씨가 그 말을 안 했어도 저는 경윤이에게 잘 얘기할 거예요.”강우혁이 꽤 진정성 있는 얼굴로 말했다.“좋아요,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는데 혹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제가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거예요.”차설아는 강우혁의 허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에 그에게 다시 한번 경고했다.강우혁이 병실을 떠난 후, 밖에서 기다리던 배경윤이 바로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어때? 언니에게 인정받았어?”“아마도? 80%는?”강우혁이 솔직하게 말했다.“그래도 괜찮네, 계속 화이팅해!”배경윤이 웃으며 말했다.그녀는 누구보다 차설아를 잘 알고 있었다. 강우혁이 차설아로부터 80%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이미 그녀의 기대 이상이었다.강우혁은 배경윤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물었다.“경윤아, 만약 언젠간 나랑 설아 씨 사이에서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누굴 선택할 거야?”“당연한 걸 왜 물어?”배경윤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당연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설아 언니를 선택하지. 설아 언니랑 맞서 싸우는 일이 없는 게 좋을 거야, 난 무조건 설아 언니 편이니까.”배경윤의 말은 농담이 아닌 진심 같았다.차설아는 항상 배경윤을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 여자라고 놀리곤 했지만 배경윤은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생각했다. 남자와 차설아 중에서 고르라면 그녀는 무조건 차설아를 고를 것이다.남자는 배신하고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차설아는
강우혁의 표정은 조금 복잡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물었다.“두 아이를 어떻게 할 건지 내가 알아도 돼?”“그렇게 많은 걸 물어서 뭐 하게?”임채원은 갑자기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네가 잘 알잖아. 나 사랑한다며, 나를 위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며, 지금이 바로 나한테 잘 보일 기회야. 절대 이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돼. 일이 잘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다 줄게!”“나...”강우혁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알겠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치 않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너를 저버린다 해도 나는 너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거야.”임채원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여왕처럼 도도하게 말했다.“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나 임채원은 말만 잘하고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자를 제일 싫어해. 너 그 씨발년 친구랑 그래도 오랫동안 사귀었잖아. 그 씨발년에게 아이 둘 있다는 것 외에 또 뭐 알아낸 것 없어?”“아직은 없어. 배경윤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야. 차설아를 100% 믿는데 간이라도 꺼내 줄 것 같았어. 너무 자주 차설아에 관해 물어보면 나 의심할 거야.”“흥, 여자들 사이에 100% 믿는 관계가 어디 있어. 남자 때문에 감정 틀어진 경우가 수두룩한데. 만약 자기가 가장 믿는 친구가 자기 남자친구에게 꼬리 쳤단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 것 같은데?”임채원이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그게 무슨 말이야?”“무슨 말인지는 네가 잘 알잖아!”임채원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원한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씨발년, 안 나타나면 몰라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내가 복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아무튼...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꾸물거리다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이미 도윤이랑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것 같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4년 동안 그녀는 하루 같이 정신 나간 척을 했다. 손목도 1
“오 아주머니, 올해 정원에 핀 백합꽃 말이에요, 엄청 많고 크게 피지 않았어요?”소영금은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집사 오 아주머니에게 물었다.“네?”사실 백합은 해마다 크고 화사하게 피었기에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소영금의 흥을 깨우지 않기 위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래요, 정말 많이, 그리고 크게 피었네요. 작년과 똑같이요!”소영금은 오 아주머니를 힐끔 보더니 마치 승부욕이 오른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어디가 똑같아요? 분명 올해 더 잘 피었구먼. 백합꽃이 잘 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네? 무슨 뜻이에요?”“백년가약을 의미하죠. 올해 백합꽃이 특별히 잘 피었으니 분명 하느님의 뜻일 거예요. 우리 아들이랑 며늘아기는 곧 다시 화목하게 지낼 것이고 백년가약을 맺겠죠!”소영금이 말하고는 활짝 웃는 얼굴로 백합 한 송이를 따서 손에 들고 다시 보았다.마치 활짝 피어난 백합꽃에서 성도윤과 차설아의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듯이 말이다.“백합꽃이 그런 꽃말도 있었어요?”어안이 벙벙한 오 아주머니는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소영금이 해석한 백합의 꽃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나 소영금이 있다면 있는 거지. 내가 말한 대로 가장 예쁘게 핀 백합 몇 송이를 따서 한 다발로 묶어줘요. 쓸데가 있어서 그래요.”소영금이 눈썹을 들썩이며 오 아주머니에게 분부했다.“알겠어요!”오 아주머니는 가위를 꺼내 소영금의 요구대로 백합꽃을 일일이 잘라 꽃바구니에 담았다.그녀는 꽃을 자르면서도 조심스럽게 소영금에게 물었다.“사모님, 이번에 차설아 씨가 돌아왔는데 어째 사모님께서 도련님보다 더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정말 차설아 씨가 임채원 씨에게 한 일들은 용서하신 거예요?”소영금의 귀까지 걸린 미소는 조금 옅어졌다. 소영금이 덤덤하게 말했다.“왜 갑자기 과거의 기분 나쁜 일을 꺼낸 거예요? 정말 흥이 깨지네.”“사모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차설아 씨에 대한 사모님의 태도가
“알겠어, 들어오라고 해!”소영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녀는 임채원에 대해 싫증이 났다.임채원이 성씨 가문의 아이를 가졌고, 또 비참한 결과를 맞이해서 망정이지, 아니면 소영금은 진작 그녀와 인연을 끊었을 것이다.얼마 후, 하인의 안내하에 소복을 입은 임채원은 연약한 얼굴로 정원에 들어섰다.“어머, 저 재수 없는 꼴을 좀 봐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초상집으로 온 줄 알겠어요. 재수 없어!”소영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오 아주머니에게 투덜거렸다.“어머님!”임채원이 천천히 소영금 앞으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 제가 사고를 친 것 같아요. 이번에 저 좀 도와주세요. 만약 저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마 도윤이가 영원히 저를 용서하지 않고, 저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그래?”소영금은 내심 기뻤다.‘이런 좋은 일이 있을 수가. 부처님 같은 심성을 가진 내 아들이 드디어 널 내버려 두려는 걸까?’하지만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소영금은 도도한 척하고는 능청스럽게 물었다.“울지 마, 뭔 일 있었어? 한 번 똑똑히 말해봐.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지.”임채원이 불쌍한 얼굴로 눈물을 쓱 닦아내며 말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님도 아시겠지만 설아 씨가 해안으로 돌아왔잖아요. 그래서 과거의 원한이 떠올라서 마음이 좋지 못했어요. 그래서 설아 씨가 아이 산소 앞에 가서 진심으로 사과해 아이의 망령을 위로해 주길 바랐어요...”소영금은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무리한 요구는 아니네. 고의가 맞든 아니든 아이는 설아 때문에 죽었으니 한 번 가서 인사하는 것도 맞아!”“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설아 씨는 워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전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국 도윤이가 나서서 겨우 설아 씨를 설득했고요...”“그래서?”소영금의 얼굴색은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는 임채원에게 계속 말하라며 재촉했다.그
그래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성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도윤이한테 물어봐야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설아가 그토록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결과는 뻔했다.그녀는 성도윤과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진무열도 성도윤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이상하네, 왜 연락이 안 되지? 평소 이맘때쯤이면 이 자식 벌써 일을 시작했을 텐데 말이야. 요즘 성대 그룹은 워낙 바쁠 때라 직접 처리해야 할 까다로운 일도 많을 텐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소영금은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고 표정이 점점 더 엄숙해졌다.곧이어 그녀는 또 연락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성도윤의 행방을 알아봤는데 그들도 모두 성도윤을 찾고 있었다.“도윤이 얘는 왜 갑자기 연락되지 않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소영금의 얼굴에는 불안한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요즘 성대 그룹 내부는 한창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신형 스마트폰 ME2350이 곧 대량 생산을 앞두고 있었고, 이달 말에 G6 칩 제조사인 KCL과 성공적으로 계약을 체결한다면 전체 하이 테크 기술 분야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그때면 업계가 크게 재편되고 많은 경쟁자들이 도태될 것이다. 앞으로 10년, 심지어 20년 동안 성대 그룹은 업계 1위를 굳건히 지킬 것이다.‘도윤이는 왜 하필 KCL과 계약을 해야 하는 이때 사라진 거야... 혹시 경쟁 상대가 일부러 보복한 건 아닐까? 성대 그룹과 KCL의 비즈니스를 막기 위해서?’그 생각에 소영금은 흠칫 놀라 식은땀을 흘렸다.비즈니스는 전쟁터 못지않게 치열하다는 잔혹한 사실을 소영금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도현이 그렇게 목숨을 거뒀기 때문이다!“아니야, 당장 경찰에 신고해! 도윤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소영금은 떨리는 손으로 경찰 신고 전화를 했는데 눈시울까지 붉혔다.그녀는 자식이 아들 둘 뿐이었다. 만약 성도윤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 싶었다.“어머님,
소영금과 임채원은 같이 차설아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배경수는 천신 그룹의 일을 처리해야 했기에 병실에는 차설아 혼자만 있었다.지금 차설아는 휴대폰으로 달이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달이야, 오빠가 아직도 뭐 연구하고 있어? 그래서 엄마 얼굴을 보기 싫대?”“네, 엄마. 오빠가 엄청 열심히 연구하고 있어서 한눈팔지 못해요. 아마 당분간은 오빠 얼굴을 보기 힘들 거예요...”“1초라도 안 돼?”차설아는 손가락으로 달이의 귀여운 얼굴을 콕콕 찌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몰래 휴대폰 카메라로 오빠를 비추면 안 돼? 엄마에게 오빠 한 번만 보여줘, 응?”“안 돼요, 안 돼요!”달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확고하게 말했다.“달이는 오빠랑 약속했단 말이에요. 연구를 성공적으로 끝내기 전까지 아무도 보여주면 안 된대요. 달이는 약속을 지키는 착한 어린이예요, 아니면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진다고요!”“휴, 알겠어.”차설아는 또 한 번 실패했다.그녀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두 아이 앞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아이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도 세서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아무리 엄마인 차설아도 그들을 강요할 수 없었다.하지만 민이 이모의 보살핌이 있었고, 세상과 단절된 해바라기 섬에는 정교한 보안 시스템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엄마, 다리는 아직도 아파요? 달이가 호 불어줄까요? 그럼 엄마는 곧 나을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달이가 다정하게 말하고는 딸기 같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귀엽게 휴대폰을 향해 후후 불었다.“아이고, 우리 달이 왜 이렇게 귀여울까? 달이가 호 불어줘서 엄마 지금 다 나은 것 같아!”차설아는 달이의 말과 행동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치료가 끝나면 당장이라도 두 녀석을 해안으로 데려오고 싶었다.“자, 엄마가 뽀뽀해 줄게. 쪽쪽! 쪽쪽!”차설아도 입술을 내밀며 휴대폰을 향해 뽀뽀를 했다.같은 시각, 소영금은 백합꽃을 든 채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리고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