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절대 불가능해!”배경수는 너무 놀라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곧이어 간호사가 수술대를 밀고 수술실에서 나왔고, 커다란 남성의 몸이 흰 천으로 덮인 채 누워 있었다.“가족분 와서 보시겠어요?”의사는 얼굴이 창백한 배경수에게 말했다.“보지 않으시면 곧바로 영안실로 보내겠어요. 빠른 시일 내로 장례를 치르세요.”“저는...”배경수는 침을 삼키고, 일어서서 한번 보려고 했지만,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안 보겠습니다.”그는 손을 내저으며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였다.간호사는 수술대를 밀고 그의 앞을 지나 영안실로 향했다.성도윤이 죽었다!성도윤이 죽었다!성도윤이 죽었다!이 소식은 마치 저주처럼 배경수의 머릿속에서 반복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그 대단하고 잘난 인간이 이렇게 갔다고? 앙숙인 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보스는 어떻게 받아들이겠어...’배경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안돼, 절대 보스가 이 일을 알게 해서는 안돼. 몸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 절대 모르게 해야 해!”다음날.배경수는 정성껏 만든 아침 식사를 들고 제일 먼저 차설아의 병실에 도착했다.“왔어?”차설아는 진작에 깨어나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다.“어때? 아직도 아파?”배경수는 작은 상판을 올려놓고, 각양각색의 아침 식사를 하나씩 꺼내며 정성스레 물었다.“전혀 안 아파. 간호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진작 내려가 걸었을 거야!”차설아는 씩씩하게 말했다.그녀는 작은 탁자 위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침 식사를 보며 침을 삼켰다.차설아는 아침 식사를 하며 성도윤의 안부를 물었다.“그 사람은 수술 끝났어? 방금 간호사한테 물었는데 안 알려주더라고.”“그 자식은...”배경수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진작 괜찮아졌지. 전문가가 직접 나서서 수술했잖아. 누가 감히 부잣집 도련님의 몸을 함부로 대하겠어!”“맞는 말이네. 그럼 나도 안심
하지만 직원이 말했다.“죄송하지만, 성도윤 씨 시체는 이미 인계되었습니다.”“네? 인계되었다고요?”배경수는 신경이 곤두서서 물었다.“누가요?”“고인의 가족분께서 어제저녁에 옮기셨어요.”‘그렇다면, 성가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건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배경수는 생각에 잠겼다.그는 휴대폰을 들고 주식 시장, 언론, 심지어 성대 그룹까지 최신 정보를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혹시, 죽은 사람이 성도윤이 아니란 말인가?’“확인할 것이 있는데요, 그 시신이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가 맞나요?”배경수는 직원에게 물었다.“아마 맞을 거예요. 시신을 받으러 온 분이 아버지셨어요.”직원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럼 더 이상한데요?”배경수는 의심을 가득 품고 차설아의 병실로 돌아갔다.공교롭게도 배경윤은 남자친구 강우혁을 데리고 차설아를 보러 왔다.“언니,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잖아. 하룻밤 사이에 이게 대체 뭔 일이야? 대체 누가 그랬어? 내가 당장 가서 복수할 거야!”배경윤은 차설아을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히며 분을 토했다.“내가 길에 잘못 들어서서 넘어진 거야.”차설아는 몸을 움직이며 자신만만해서 말했다.“걱정 마. 이 정도 상처는 열흘이나 보름 정도면 충분해!”강우혁이 말을 보탰다.“저희 집은 의사 가문이라, 아버지께서 정형외과 의사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 설아 씨가 필요하면 제가 소개해드리죠.”배경윤이 급히 말했다.“뭘 묻고 그래? 당장 전화해서 오라고 해야지! 반드시 최고의 의사가 언니를 치료해줘야 내가 마음이 놓인단 말이야.”강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당장 전화할게.”차설아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형외과 의사라는 말을 듣고 냉큼 말했다.“그럼 우혁 씨한테 부탁 좀 할게요. 저는 필요하지 않지만 성도윤이 필요할 것 같아요.”“성도윤? 그 인간이랑 뭔 상관인데?”배경윤은 성도윤의 이름을 듣고 급히 물었다.“설마, 두 사람 같이 있다가 사고 난 거야?”“그 인간 나 구하려다가 심하게 다
“당연하지!”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배경수와 마찬가지로, 배경윤도 차설아를 백 프로 신뢰했다.“그럼 언니만 믿을게.”배경윤은 떠나기 전, 차설아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또 강우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당부했다.“우리 언니한테 잘 보여. 언니가 허락하지 않으면 난 결혼 못 한다고.”“걱정하지 마. 설아 씨는 분명 나의 진심을 알아주실 거야.”강우혁은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맞죠, 설아 씨?”“아마도요?”차설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배경수와 배경윤이 병실을 떠나고, 차설아는 입꼬리를 내리더니 차갑게 말했다.“문 좀 닫아주세요.”강우혁은 차설아의 요구대로 문을 닫고 차설아 앞에 다가가 점잖은 얼굴에는 시종 온화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저에 대해 뒷조사를 한 모양인데, 제 과거를 아셨나 봐요?”차설아는 조금 의외였다.“생각보다 똑똑하네요.”“과찬이세요. 경윤이가 늘 저한테 설아 씨는 정과 의리를 중히 여기고 신중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친한 동생이 오래 만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니, 절 조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죠.”“좋네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사리에도 밝네요. 확실히 흠잡을 데가 없어요.”차설아는 강우혁의 태도가 이렇게 겸손할 줄 몰랐다. 자신에 대해 뒷조사를 한 걸 알면서도 전혀 화내지 않고 사리에 밝은 말만 골라 하니, 차설아는 조금 부끄러웠다.“그럼 솔직하게 말해요. 경윤이에게 접근한 목적이 뭐죠?”차설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강우혁은 덤덤하게 웃었다.“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저는 윤이를 사랑해요. 굳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윤이와 부부가 되어 평생 함께 사는 것?”“헛소리!”차설아는 하찮은 듯 말했다.“그런 말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경윤이나 믿지, 난 절대 못 속여요. 당신이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요? 똑똑한 분이, 그 여자가 우리에게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요?”“지금 채원이를 말하는
하지만 차설아는 여전히 마음이 찝찝했다.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정말 떳떳하다면 시간 내서 당신과 임채원이 사랑했던 사이라는 걸 경윤이한테 솔직하게 말해요. 경윤이가 받아들인다면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차설아가 강우혁을 향해 말했다.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건 바로 자기 때문에 배경윤에게까지 누를 끼치는 것이었다.임채원이 어떤 여자인지는 차설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든 임채원과 관계된다면 반드시 재수가 없게 된다.“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설아 씨가 그 말을 안 했어도 저는 경윤이에게 잘 얘기할 거예요.”강우혁이 꽤 진정성 있는 얼굴로 말했다.“좋아요,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는데 혹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제가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거예요.”차설아는 강우혁의 허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에 그에게 다시 한번 경고했다.강우혁이 병실을 떠난 후, 밖에서 기다리던 배경윤이 바로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어때? 언니에게 인정받았어?”“아마도? 80%는?”강우혁이 솔직하게 말했다.“그래도 괜찮네, 계속 화이팅해!”배경윤이 웃으며 말했다.그녀는 누구보다 차설아를 잘 알고 있었다. 강우혁이 차설아로부터 80%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이미 그녀의 기대 이상이었다.강우혁은 배경윤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물었다.“경윤아, 만약 언젠간 나랑 설아 씨 사이에서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누굴 선택할 거야?”“당연한 걸 왜 물어?”배경윤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당연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설아 언니를 선택하지. 설아 언니랑 맞서 싸우는 일이 없는 게 좋을 거야, 난 무조건 설아 언니 편이니까.”배경윤의 말은 농담이 아닌 진심 같았다.차설아는 항상 배경윤을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 여자라고 놀리곤 했지만 배경윤은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생각했다. 남자와 차설아 중에서 고르라면 그녀는 무조건 차설아를 고를 것이다.남자는 배신하고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차설아는
강우혁의 표정은 조금 복잡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물었다.“두 아이를 어떻게 할 건지 내가 알아도 돼?”“그렇게 많은 걸 물어서 뭐 하게?”임채원은 갑자기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네가 잘 알잖아. 나 사랑한다며, 나를 위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며, 지금이 바로 나한테 잘 보일 기회야. 절대 이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돼. 일이 잘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다 줄게!”“나...”강우혁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알겠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치 않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너를 저버린다 해도 나는 너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거야.”임채원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여왕처럼 도도하게 말했다.“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나 임채원은 말만 잘하고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자를 제일 싫어해. 너 그 씨발년 친구랑 그래도 오랫동안 사귀었잖아. 그 씨발년에게 아이 둘 있다는 것 외에 또 뭐 알아낸 것 없어?”“아직은 없어. 배경윤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야. 차설아를 100% 믿는데 간이라도 꺼내 줄 것 같았어. 너무 자주 차설아에 관해 물어보면 나 의심할 거야.”“흥, 여자들 사이에 100% 믿는 관계가 어디 있어. 남자 때문에 감정 틀어진 경우가 수두룩한데. 만약 자기가 가장 믿는 친구가 자기 남자친구에게 꼬리 쳤단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 것 같은데?”임채원이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그게 무슨 말이야?”“무슨 말인지는 네가 잘 알잖아!”임채원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원한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씨발년, 안 나타나면 몰라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내가 복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아무튼...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꾸물거리다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이미 도윤이랑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것 같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4년 동안 그녀는 하루 같이 정신 나간 척을 했다. 손목도 1
“오 아주머니, 올해 정원에 핀 백합꽃 말이에요, 엄청 많고 크게 피지 않았어요?”소영금은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집사 오 아주머니에게 물었다.“네?”사실 백합은 해마다 크고 화사하게 피었기에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소영금의 흥을 깨우지 않기 위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래요, 정말 많이, 그리고 크게 피었네요. 작년과 똑같이요!”소영금은 오 아주머니를 힐끔 보더니 마치 승부욕이 오른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어디가 똑같아요? 분명 올해 더 잘 피었구먼. 백합꽃이 잘 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네? 무슨 뜻이에요?”“백년가약을 의미하죠. 올해 백합꽃이 특별히 잘 피었으니 분명 하느님의 뜻일 거예요. 우리 아들이랑 며늘아기는 곧 다시 화목하게 지낼 것이고 백년가약을 맺겠죠!”소영금이 말하고는 활짝 웃는 얼굴로 백합 한 송이를 따서 손에 들고 다시 보았다.마치 활짝 피어난 백합꽃에서 성도윤과 차설아의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듯이 말이다.“백합꽃이 그런 꽃말도 있었어요?”어안이 벙벙한 오 아주머니는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소영금이 해석한 백합의 꽃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나 소영금이 있다면 있는 거지. 내가 말한 대로 가장 예쁘게 핀 백합 몇 송이를 따서 한 다발로 묶어줘요. 쓸데가 있어서 그래요.”소영금이 눈썹을 들썩이며 오 아주머니에게 분부했다.“알겠어요!”오 아주머니는 가위를 꺼내 소영금의 요구대로 백합꽃을 일일이 잘라 꽃바구니에 담았다.그녀는 꽃을 자르면서도 조심스럽게 소영금에게 물었다.“사모님, 이번에 차설아 씨가 돌아왔는데 어째 사모님께서 도련님보다 더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정말 차설아 씨가 임채원 씨에게 한 일들은 용서하신 거예요?”소영금의 귀까지 걸린 미소는 조금 옅어졌다. 소영금이 덤덤하게 말했다.“왜 갑자기 과거의 기분 나쁜 일을 꺼낸 거예요? 정말 흥이 깨지네.”“사모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차설아 씨에 대한 사모님의 태도가
“알겠어, 들어오라고 해!”소영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녀는 임채원에 대해 싫증이 났다.임채원이 성씨 가문의 아이를 가졌고, 또 비참한 결과를 맞이해서 망정이지, 아니면 소영금은 진작 그녀와 인연을 끊었을 것이다.얼마 후, 하인의 안내하에 소복을 입은 임채원은 연약한 얼굴로 정원에 들어섰다.“어머, 저 재수 없는 꼴을 좀 봐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초상집으로 온 줄 알겠어요. 재수 없어!”소영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오 아주머니에게 투덜거렸다.“어머님!”임채원이 천천히 소영금 앞으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 제가 사고를 친 것 같아요. 이번에 저 좀 도와주세요. 만약 저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마 도윤이가 영원히 저를 용서하지 않고, 저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그래?”소영금은 내심 기뻤다.‘이런 좋은 일이 있을 수가. 부처님 같은 심성을 가진 내 아들이 드디어 널 내버려 두려는 걸까?’하지만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소영금은 도도한 척하고는 능청스럽게 물었다.“울지 마, 뭔 일 있었어? 한 번 똑똑히 말해봐.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지.”임채원이 불쌍한 얼굴로 눈물을 쓱 닦아내며 말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님도 아시겠지만 설아 씨가 해안으로 돌아왔잖아요. 그래서 과거의 원한이 떠올라서 마음이 좋지 못했어요. 그래서 설아 씨가 아이 산소 앞에 가서 진심으로 사과해 아이의 망령을 위로해 주길 바랐어요...”소영금은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무리한 요구는 아니네. 고의가 맞든 아니든 아이는 설아 때문에 죽었으니 한 번 가서 인사하는 것도 맞아!”“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설아 씨는 워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전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국 도윤이가 나서서 겨우 설아 씨를 설득했고요...”“그래서?”소영금의 얼굴색은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는 임채원에게 계속 말하라며 재촉했다.그
그래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성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도윤이한테 물어봐야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설아가 그토록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결과는 뻔했다.그녀는 성도윤과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진무열도 성도윤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이상하네, 왜 연락이 안 되지? 평소 이맘때쯤이면 이 자식 벌써 일을 시작했을 텐데 말이야. 요즘 성대 그룹은 워낙 바쁠 때라 직접 처리해야 할 까다로운 일도 많을 텐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소영금은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고 표정이 점점 더 엄숙해졌다.곧이어 그녀는 또 연락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성도윤의 행방을 알아봤는데 그들도 모두 성도윤을 찾고 있었다.“도윤이 얘는 왜 갑자기 연락되지 않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소영금의 얼굴에는 불안한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요즘 성대 그룹 내부는 한창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신형 스마트폰 ME2350이 곧 대량 생산을 앞두고 있었고, 이달 말에 G6 칩 제조사인 KCL과 성공적으로 계약을 체결한다면 전체 하이 테크 기술 분야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그때면 업계가 크게 재편되고 많은 경쟁자들이 도태될 것이다. 앞으로 10년, 심지어 20년 동안 성대 그룹은 업계 1위를 굳건히 지킬 것이다.‘도윤이는 왜 하필 KCL과 계약을 해야 하는 이때 사라진 거야... 혹시 경쟁 상대가 일부러 보복한 건 아닐까? 성대 그룹과 KCL의 비즈니스를 막기 위해서?’그 생각에 소영금은 흠칫 놀라 식은땀을 흘렸다.비즈니스는 전쟁터 못지않게 치열하다는 잔혹한 사실을 소영금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도현이 그렇게 목숨을 거뒀기 때문이다!“아니야, 당장 경찰에 신고해! 도윤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소영금은 떨리는 손으로 경찰 신고 전화를 했는데 눈시울까지 붉혔다.그녀는 자식이 아들 둘 뿐이었다. 만약 성도윤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 싶었다.“어머님,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
원이와 달이는 식탁 앞에 앉아 성도윤과 차설아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이는 인쌍을 찌푸리고는 원이를 향해 말했다.“오빠, 아빠랑 엄마는 뭐 하고 있기에 아직도 내려오지 않는 거야? 음식이 식으면 맛없단 말이야. 아직 뜨거울 때 같이 먹었으면 좋겠어.”어른들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원이는 턱을 괴고 생각해 보았다.“나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나오는 거지?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야?”“흥! 아빠를 용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엄마를 괴롭히는 거지? 우리가 가서 아빠를 혼내주자.”두 아이는 주먹을 꽉 쥐고는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때 민이 이모가 맛있게 끓인 국을 들고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흥분한 달이와 원이를 말렸다.“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 먼저 식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윤 도련님과 설아 아가씨는 피곤해서 쉬고 있을 거예요. 간만에 휴식하는 거라 방해하면 안 돼요.”“쉬고 있을 거라고요?”원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을 이었다.“엄마는 오후 내내 쉬고 있었잖아요. 저녁도 안 드시고 또 잔다는 뜻인가요?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죠?”“그, 그건... 예전에 설아 아가씨는 실면해서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곁에 도윤 도련님이 계시니까 마음이 편해서 푹 주무실 수 있는 거고요.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아요.”민이 이모는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서 식은땀을 흘렸다.“자,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조금 더 기다리면 두 분이 식사하러 내려올 수도 있잖아요.”민이 이모는 위층에 있는 차설아의 방을 힐끗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도련님은 식사 시간이 끝나기 전에 설아 아가씨를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 어쩌면 좋지?’민이 이모의 예상과는 달리 성도윤과 차설아는 이불만 덮고 자고 있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복근이 손에 닿자 깜짝 놀랐다.‘이건 꿈이 아니야! 이런 복근을 나의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니, 꿈에 절대 나올 리 없는 초콜릿 복근이
성도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마치 청심환이라도 먹은 듯 마음이 안정되었다.생각이 많았던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눈앞의 행복을 놓쳤다.어쩌면 득보다 실이 많았었다.현재의 삶을 잘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보기로 결심했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위로하고 밥하러 주방으로 갔다.오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관문이었다. 처음으로 주방에 선 성도윤은 모든 요리 실력을 발휘하여 세 명의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켜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했다.화원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은은하게 전해지는 음식 향이 더해져 삶이 더없이 행복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다.오늘 불쾌한 일을 겪은 차설아는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졸음기가 없었던 그녀였지만 방금 겪은 일로 힘들었던 그녀는 잠이 들었다.“설아야,설아야.”비몽사몽인 그녀의 귓가에는 낮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입으로 중얼거리며 이불을 감싼 그녀는 계속 쿨쿨 잤다.“아직도 잠에서 덜 깬 거야? 밥이 다 되었는데 가져다줘?”성도윤은 희미한 조명 아래에 서서 차설아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저녁 내내 바쁘게 움직여 한 상 가득 음식 준비를 마친 성도윤은 마치 선생님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차설아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방에 들어온 성도윤은 깊게 잠든 차설아를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혼잣말을 했다.“당신이에요?”꿈꾸듯 비몽사몽인 차설아는 애교를 부리며 손을 내밀어 성도윤의 목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뽀뽀.”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뽀뽀라고... 진심이야?”성도윤의 기억 속에서 차설아가 이렇게 열정적이고 부드러운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갑작스러운 차설아의 적극적인 사랑에 놀란 성도윤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당신의 입술... 어디에 있어? 왜 닿지 않는 거야? 뽀뽀하게 얼른 가까이 들이대 봐.”자신이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차설아는 혀를 꼬며 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