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검 사건은 차설아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그녀는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옅은 화장을 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신 산소로 가서 인사를 하려고 했다.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차설아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 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내가 같이 갈까?”배경윤이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차설아는 해안을 떠난 지 4년 만에 돌아왔고, 부모님께 드리는 첫인사이니 따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그녀는 어제 그 빨간색 페라리를 운전하고 산소가 있는 곳까지 질주했다.8월의 한여름이었지만 울창한 산소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아주 조용했다.차설아가 주차하고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데이지꽃을 손에 든 채 부모님이 계신 산소 앞으로 다가왔다.그녀가 충분히 일찍 왔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산소 앞에는 이미 꽃다발이 놓여 있어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누가 봐도 값비싼 꽃다발이었다. 몇 년 전에 그녀가 보았던 꽃다발과 똑같았다.‘그동안 누가 몰래 엄마 아빠를 찾아왔던 거야? 누가 이렇게 정성이지?’차설아가 생각했다.몇 년 전에도 누군가는 산소 앞에 정교한 엠버 펜던트 하나를 남겨두고 갔었다.공교롭게도 성도윤은 똑같은 엠버 펜던트가 있었다.그래서 차설아는 그동안 부모님을 찾아온 사람이 성도윤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또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했다.성도윤처럼 차가운 사람이 자기한테도 차갑게 굴었는데 왜 정성을 다해 그와 아무 상관 없는 부모님을 찾아뵈러 오겠는가?게다가 그녀는 성도윤과 이혼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고,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아 그야말로 서로 남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 성도윤은 더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올 리가 없었다...“됐어!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자고!”차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 생각들을 떨쳐버리기로 했다.‘엄마 아빠가 좋은 분들이셨으니까 계속 그들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친구가 있었던 걸로 생각하자고. 그래서 매해 엄마 아빠에게 찾아와 꽃을 선
“설아야, 역시 너구나. 드디어 만나게 되었네!”이 사람은 바로 차설아의 날라리 삼촌인 허광희였다.“또 당신이에요?”차설아가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왜 계속 이 주변을 맴도는 거예요? 엄마, 아빠에게 인사하러 찾아올 때마다 재수 없는 당신을 만나게 되는군요.”“휴, 설아야, 내가 욕을 먹을 만해. 나 허광희는 재수 없는 사람 맞아. 하지만 하느님도 내 정성에 감동하셨나 봐. 해마다 여기서 널 기다렸는데 오늘 드디어 널 만나게 되었네...”허광희가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넌 모르겠지? 그동안 삼촌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삼촌이 너를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그래?”차설아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내가 보고 싶었어요? 내 돈이 보고 싶은 거겠죠.”“그게...”허광희는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왜요? 4년 전에 성도윤이 준 100억을 벌써 다 썼어요?”“그게, 진작 다 썼지!”허광희가 손을 휙 젓더니 쭈볏쭈볏 말을 이어갔다.“그 100억으로 주식이나 투자하려고 했는데 운이 안 좋았지 뭐야... 1, 2년 사이에 빈털터리가 됐어. 본전도 다 떨어졌다고!”“그래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차설아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고는 말했다.“설마 내가 돈을 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건 아니죠?”그녀는 절대 허광희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그때 허광희는 차씨 가문을 도와주기는커녕 돌까지 던졌었던 일을 차설아는 똑똑히 기억해 뒀다.나중에 이 일을 다시 따지지 않은 것도 허광희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그건 아니고. 하지만 나 지금 개과천선해서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있어. 해마다 여기서 널 기다린 건 피를 나눈 우리의 정을 생각해서야. 과거의 원한은 제쳐두고 다시 서로 생각하고 챙기는 가족으로 되길 바라.”허광희는 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4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었다.적어도 지금의 허광희는 예전처럼 날라리 같아 보이진 않았다.차설아는 변화된 모습의 허광희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성도윤 전화번호도 있어요?”차설아가 의외인 얼굴로 물었다.기억 속의 성도윤은 워낙 차갑고 인정사정없는 사람이라 함부로 남에게 전화번호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전처의 삼촌에게는 왜 ‘특별히’ 챙기는 거지?전화가 연결되자 허광희는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내가 그래도 웃어른인데. 우린 모두 한집안 식구잖아. 전화번호쯤은 주지!”하지만 허광희는 곧바로 난감한 얼굴을 보였다.“뚜뚜뚜”한참 동안의 연결음이 이어졌지만 성도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허광희는 다시 한번 그에게 전화를 했는데 바로 끊기게 되었다.차설아가 팔짱을 끼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제대로 체면을 살려주네요.”“캑캑!”허광희는 어색한 마음에 헛기침을 하고는 애써 괜찮은 척했다.“조카사위가 워낙 바쁜 사람이라 일이 많은가 보지. 점심때 다시 전화해 볼게. 평소에는 전화를 받는데 말이야. 나는 그렇다 쳐도, 너의 체면을 봐서라도 전화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제가 다시 한번 말할게요. 저는 성도윤과 이혼한 지 오래되었어요. 자꾸 조카사위라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성도윤이 좋으면 혼자 잘 보이려고 노력하세요, 괜히 저까지 끌어들이지 말고요!”차설아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알겠어, 내가 주제넘게 함부로 지껄였네...”허광희는 자기 뺨을 때리더니 비굴한 자세로 말했다.“하지만 난 꼭 너와 성도윤 대표님에게 음식을 대접해야겠어. 오랫동안 너희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살았거든. 지금은 개과천선했고 착실하게 살아가려고 해. 좋은 아빠, 좋은 남편, 또 좋은 삼촌으로. 내가 오늘 두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못한다면 평생 이 짐을 떠안고 살아가야 할 거야. 엄마를 봐서라도 오늘 와주면 안 되겠어?”“...”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허광희를 위아래로 살펴봤다.그녀는 적어도 철없던 삼촌이 정말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적어도 전처럼 가난하면서도 명품만 고집하던 그가 아니었다.지금의 그는
허민희는 허광희의 유일한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차설아의 껌딱지였고, 차설아의 열성 팬이었다.만약 그때 허광희가 허민희에게 차설아를 연락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면 지금 두 사람의 사이는 더 좋을지도 모른다.허광희의 집은 시내의 평범한 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이 세 개 있는데 20여 평의 평범한 집이었지만 매우 아늑했다.차설아가 집에 들어설 때, 숙모 장희진은 주방에서 채소를 씻고 있었고, 사촌 동생 허민희는 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다들 나와봐, 누가 왔는지 한번 보라고!”허광희가 미소를 지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장희진과 허민희는 거실로 나와 차설아를 보더니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렸다.“어머, 설아 언니. 정말 설아 언니 맞아요? 드디어 설아 언니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네요!”허민희는 차설아를 꽉 끌어안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 언니, 우리 7, 8년 정도 얼굴 못 본 거 아니에요? 그동안 어디 갔어요? 아빠가 해마다 산소로 가서 언니를 기다렸단 말이에요. 언니가 어디로 가든 언젠간 꼭 고모랑 고모부를 찾아갈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그 일이 이루어졌네요!”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민희가 많이 컸네, 지난번에 봤을 땐 어린애였는데!”허민희는 올해 열여덟 살이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그녀는 생기발랄했고 활력이 넘쳤다.“숙모, 오랜만이네요.”차설아가 예의를 갖추며 장희진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래!”장희진은 현모양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녀는 황급히 앞치마에 손을 닦고는 말했다.“다행이야, 이렇게 돌아왔으니!”“됐어, 다들 인사치레 말은 그만해.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얼른 좋은 술과 음식을 준비해, 오늘 설아뿐만 아니라 성도윤 대표님도 오기로 했거든!”허광희가 장희진을 재촉하며 말했다.“뭐요? 성도윤 대표님도 온다고요? 그게...”장희진은 긴장된 마음에 말까지 더듬었다.그들에게 있어서 성도윤은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높은 사람이 이런 누추한 곳에 오게 된다니!“뭘 말까지 더듬
4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대로 차가웠고 도도했다.차설아는 덤덤한 얼굴로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게요, 대, 대표님, 갑자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허광희는 성도윤이 이렇게 빨리 전화를 받을 줄 몰라 갑자기 긴장된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그게요... 제 조카 설아가 오늘 해안으로 돌아왔거든요, 오랫동안 사라졌는데 제가 오늘 정말 어렵게 찾아냈거든요. 대표님도 그동안 우리 가족을 잘 챙겨주셨으니 이 기회에 대표님을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어서요, 설아랑 함께...”“그럴 필요 없어요.”전화기 너머의 성도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그리고 그의 말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그리고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그게, 대표님, 대표님...”허광희는 휴대폰에 대고 한참 동안 말을 건넸는데 들려오는 건 ‘뚜뚜뚜’ 소리뿐이었다.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성도윤은 이미 그를 차단했다.“설아야, 그게... 화내지 마. 아마 대표님은 지금 바쁘신가 봐. 한 회사의 대표니까 말이야. 이따가 민희 휴대폰으로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볼게.”허광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차설아를 힐끔 보며 말했다.그는 차설아가 혹시라도 상처받았을까 봐 두려웠다.그동안 그들 가족을 잘 보살펴 줬던 성도윤이 갑자기 이렇게 인정사정없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너무 티 나게 차설아를 피하고 있었으니 그녀에게 마음이 남아있는 것이 분명했다!“괜찮아요!”차설아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안 온다면 제가 조금 더 많이 먹죠, 문제 될 건 없어요.”그녀는 쿨한 척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성도윤은 그녀에게 익숙한 남남일 뿐, 그녀의 감정을 전혀 휘두를 수 없었다.허민희는 미간을 구기더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쯧쯧, 역시 제가 사람 잘못 봤어요. 대표님 정말 남자답지 않네요. 밥 한 끼 먹을 배짱도 없다니, 설아 언니보다도 우유부단하다고요!”허광희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마치 온갖 고난을 겪고 지옥에서 돌아온 그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는 예전처럼 아무 걱정 없고 순수했던 나날로 돌아갈 수 없었다...“그때의 언니와 고모는 정말 빛이 날 정도로 예쁘네요.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났나, 왜 저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죠?”허민희는 언제 들어왔는지 가족사진을 보고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야, 너도 엄청 예쁜데? 생기발랄하잖아. 역시 우리 허씨 집안의 아이야...”차설아가 돌아서고는 허민희의 통통한 볼을 어루만지며 진심 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허민희의 이목구비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연예인을 하기에 아주 좋은 얼굴이었다.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천상 연예인 상이었다!“헤헤, 그건 그래요, 저도 예쁘게 생겼죠. 언니한테만 말하는데요, 저 지금 20만 팔로워가 있는 인플루언서예요. 아이디가 미니미니에요, 한 번 봐봐요!”허민희가 말하고는 휴대폰을 꺼내 뿌듯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자랑했다.차설아가 확인했는데 정말 그녀의 말대로 허민희는 22만이 넘는 팔로워가 있는 인플루언서였다!“좋네!”그녀는 차민희를 향해 엄지척을 내밀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해. 해안대학교의 연극학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거야. 이제 입학하면 공부 열심히 해. 알겠어?”“알겠어요. 해안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성도윤 대표님 덕분이에요. 절대 언니랑 대표님 얼굴에 먹칠하지 않게 열심히 할게요!”허민희가 진지한 얼굴로 다짐하고는 또 조심스럽게 물었다.“설아 언니, 지금 많이 서운하고 실망스럽죠?”차설아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내가 왜 서운해? 뭐가 실망스러워?”“전에 대표님을 엄청 사랑하셨잖아요. 4년 동안 자리를 비우시고 간만에 돌아왔는데 밥 한 끼 같이 먹으려고 하지 않다니,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 수 있죠? 저라도 속상하겠어요!”“너도 말했다시피 그건 옛날 일이야. 난 지금 그 사람 어
“봤어.”사무실 안에서 성도윤은 고개도 쳐들지 않은 채 서류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의 완벽한 얼굴에는 4년의 흔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봤다고요?”진무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용기 내어 말했다.“봤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세요? 이게 가능한가요?”그 실검은 차설아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인간 세상에서 4년 동안 사라졌고, 성도윤이 4년 동안 그리던 차설아인데, 어떻게 덤덤할 수 있을까?성도윤은 드디어 고개를 들더니 천천히 사인펜을 닫고 긴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그럼 내가 어떤 반응을 해야 맞는 거지?”“만약 실검을 보셨다면 진작에 설아 씨랑 만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직 만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흥분에 겨워 춤이라도 추면서 약속을 잡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쨌든... 이 정도로 침착할 수는 없죠.”진무열은 흥분에 겨워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왜 설아가 해안에 오면 내가 꼭 만나야 하지?”성도윤의 말에 진무열은 할 말을 잃었다.“그건...”성도윤은 하찮은 듯 말했다.“네가 보기에 내가 아직도 차설아를 못 잊은 것 같아?”“음... 네.”진무열은 맞을 각오를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저녁에만 되면 몰래 설아 씨 사진을 보시잖아요. 그리고 술만 먹으면 저를 잡고 펑펑 우시고... 기억 안 나세요? 저번 달에는...”“됐어!”성도윤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차가운 말투로 진무열의 말을 끊었다.“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그저 한번 스쳤던 인연이니 어디에 있든 나랑 상관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차설아 언급하지 마.”“하지만...”“한가해? 일을 더 줄까? 그게 아니라면 당장 나가!”성도윤은 갑자기 화를 냈고, 진무열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을 급히 나갔다.문밖에는 한 무리의 임원들이 돌아다니며 두 사람의 최신 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어때요? 대표님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면, 강진우는 성도윤이 통곡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계속 전화가 걸려왔지만, 성도윤은 받지 않고 아예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성도윤은 안경을 벗고 고급 사무용 의자에 기대어 하얀 창문을 보며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그는 긴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오똑한 콧날은 그의 얼굴을 더 입체적이고 잘 생겨 보이게 하는 한편, 복잡한 심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4년 동안, 그는 자신을 차가운 기계로 무장하고 매일 일에 파묻혀 살며, 감정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사람들은 성도윤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이런 느낌을 즐겼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빌어먹을 차설아,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4년 만에 왜 또 갑자기 나타났어?’‘네가 오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널 만나러 갈 거라고 생각하지?’‘천만에, 나는 절대 널 만나러 가지 않아.’성도윤은 심호흡을 하며 애써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다잡았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를 켜고 계속 일에 집중했다.최근 성대 그룹은 차세대 스마트폰 ME2350을 곧 출시할 예정이다.이 모델은 처음으로 KCL 그룹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G6 고속칩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전체 전자 기술 분야에서 시대를 초월한 혁신이다.아직 테스트 단계이며, 테스트가 성공하면 대량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다.성도윤과 그룹의 많은 주주는 ME2350이 성공적으로 출시되는 순간, 향후 최소 10년 동안 스마트폰 분야는 모두 성대 그룹의 천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 프로젝트를 위해 성대 그룹은 이미 4년 동안 준비했고, 엄청난 인력과 재력을 투입해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똑똑똑!”성도윤이 기획서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들어와요!”성도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들어온 사람은 바로 진무열이었다.“하하하, 대표님, 또 저예요.”진무열은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