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곧 틱톡에서 미니미니의 계정을 찾았다.차설아의 아름답고 정교한 얼굴이 조그마한 휴대폰 화면 속에 나타났다.하지만 그녀의 위력은 핵폭탄급이었다.성도윤은 흠칫 놀랐다. 마치 외로운 늑대 한 마리가 깊은 눈동자로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안녕하세요, 여러분, 미니미니의 라이브 방송에 들어오신 걸 환영해요. 요즘 핫한 연애 예능프로그램 ‘설레임’에서 일반인 게스트를 모집한다고 해서 저도 신청했어요. 주최 측에서는 오늘 가장 많은 선물을 받는 사람이 프로그램 참가 자격을 얻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성원이 필요해요. 저 프로그램 나가게 해주실 거죠?”허민희는 핑크색 원피스에 고양이 귀 머리띠를 두르고 카메라를 향해 깜찍한 몸짓을 하며 선물을 기다리고 있었다.최근 연애 예능프로그램 ‘설레임’은 인기가 아주 많아, 얼굴만 내밀어도 바로 연예계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허민희는 원래 연예계에 진출하고 싶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기회를 소중히 여겼고, 차설아를 불러 자신의 인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오늘 밤의 엄청난 게스트를 소개할게요. 바로 오늘 실검을 뜨겁게 달군 관능미가 감도는 여신, 저의 사촌 언니 차설아 씨입니다.”허민희는 손을 흔들며 열정적으로 차설아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차설아예요. 제 사촌 여동생 많이 사랑해 주세요. 사랑해요~”차설아는 어색함을 참으며 허민희와 상의했던 대로 단정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손으로 하트 모양을 했다.손 하트를 하고 나니 차설아는 자신의 느끼함에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가식적인 순간이었다!하지만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휴대폰 화면은 순간 댓글과 선물로 가득 채워졌다.“와, 여신, 사랑해요!”“여신은 역시 여신이야. 귀엽고 멋있고. 미치겠네!”“여신님. 저 그냥 죽이세요!”“여신님이랑 결혼하고 싶어요!”“...”허민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하얀 그녀의 얼굴에 알록달록한 빛이 가득했으
“여신은 어떤 모습이든 아름다워요. 여신 빨리 돌아와요!”“하늘에 있어야 하는 선녀가 내려왔어! 대박!”열렬한 찬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갑자기 이상한 댓글이 달렸다.“가식!”이 댓글은 순간 파장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그 댓글에 반응했다.“이게 가식이라고? 자신 있으면 카메라 켜지 그래? 넌 얼마나 진실된 사람인지 한 번 보여줘 봐!”“당신 눈 멀었어? 여신한테 가식이라니. 티끌 하나 없는 맑은 샘물 같은 여신한테 뭔 막말이야?”“닉네임도 없어. 분명 여신을 탐내는 변태남이야. 당장 나가!”“변태 놈, 당장 나가! 당장 나가!”허민희는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얼른 나서서 말렸다.“다들 일단 싸우지 마세요. 아이디 12538분, 악의적인 발언은 삼가세요. 설아 언니가 얼마나 진실된 사람인데요. 워낙 멋있는 매력과 귀여운 매력을 다 가진 분인데, 가식이라니요?”아이디 12538 시청자는 비록 떼 공격을 당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또 댓글을 달았다.“원래 가식적이야!”옆에 있던 차설아는 독보적인 12538에게 눈길이 쏠렸다.랭킹이 마지막 30분에 접어들자 허민희는 조금 초조해졌다.방금 차설아의 덕으로 많은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워낙 팬이 적었던지라, 백만 급 팬을 보유한 인플루언서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지금 그녀는 3위였고, 1위와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그래서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차설아를 카메라 안으로 당겼다.“여러분들, 제 사촌 언니를 이렇게 좋아하시니 제가 서프라이즈 하나 준비했어요. 저를 1위로 만들어주신 분께 설아 언니와 저녁 식사를 할 기회를 드리죠. 다시는 없을 소중한 기회예요, 여러분, 분발해요!”말이 끝나자 네티즌들은 또 미친 듯이 선물을 보내기 시작했다.차설아는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또 이해가 되었다.젊은이들은 승부욕이 있기 마련이다.만약 밥 한 끼로 민희가 연애 프로그램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면, 기꺼이 도울 수 있었다.“저랑 저녁 먹고 싶으세요? 만약 먹고 싶다
라이브 방의 다른 팬들도 12358에 놀라 댓글을 달았다.“대박, 형님을 못 알아뵙고 까불었네요! 존경합니다!”“여자를 꼬시려고 밑천을 다 까네.”“혹시 어느 재벌가 도련님이 자기 여자 기분 풀어주려고 쇼하는 거 아니야?”“...”차설아는 12358의 프로필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의 신분이 더욱 궁금해졌다.사건은 여기까지 일단락된 줄 알았다.허민희는 설레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라이브 방송 마감 5분 전입니다! 제게 연애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주신 12358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약속대로 우리 설아 언니와 로맨틱한 촛불 만찬을 즐길 수...”하지만 갑자기 또 신비로운 팬이 선물을 미친 듯이 보냈다. 1만 1000대의 페라리를 보냈고 12358을 단박에 밀어내고 1위에 올랐다.순간 라이브 방은 들끓기 시작했고 시청자 수도 500만 명에 다다랐다.“이거... 환... 환영합니다, 그림자 분께서 주신 페라리 선물들 감사합니다. 설아 언니와 촛불 만찬을 함께 할 사람이 바뀌었네요...”허민희는 말을 더듬었고, 겨우 정상으로 돌아온 다리는 또 놀라서 녹초가 되었다.‘요즘 부자들이 이렇게 많아? 몇억짜리 선물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준다고? 정말 대박이야!’물론, 12358도 지지 않고 또 1000대를 추가해 그림자와 맞붙었다.이렇게 5분 동안 1위 자리는 두 사람에 의해 계속 바뀌었다.모두 숨도 쉬지 못하고 댓글에 카운트다운을 했다. 5, 4, 3, 2, 1...결국 1위 자리는 12358이 차지했고 모두 50억에 달하는 페라리를 내줬다.“12358님, 정말 감사드려요. 저희 설아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나 봐요. 내일 저녁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허민희는 두 손을 모으고 화면을 향해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차설아는 조금 감동했고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당신이 누구든, 내일 저녁 제가 기다리죠. 쪽!”여자는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화면을 향해 손 키스를 날리며
“형, 설아 쨩 라이브 방송 봤어?”사도현은 흥분한 얼굴로 성도윤에게 달려갔다.“솔직하게 말해, 라이브 방 1위, 그거 형이지?”사도현은 도도한 얼굴로 손에 든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무슨 방송?”“시치미 떼지 마. 그렇게 큰 사건을 전혀 모른다고? 게다가... 설아 쨩의 라이브 방송인데 어떻게 놓칠 수 있어?”성도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나 바빠’라고 말했다.즉, 입을 다물라는 소리였다.사도현은 성도윤이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성도윤은 언제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이었으니.그래서 사도현은 기회를 타 성도윤의 옆에 있는 휴대폰을 낚아챘다.“휴대폰은 왜 꺼놓은 거야? 분명 뭔가 있어. 바로 확인해볼 거야!”사도현은 말하면서 휴대폰을 켜려고 했다.“이리 줘!”성도윤은 고개를 들고 살인적인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사도현은 침을 삼키고 순간 겁을 먹어서 순순히 휴대폰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형, 그냥 봤다고 인정해. 이게 뭐 창피한 일인가?”“형이 그때 설아 쨩을 찾으려고 온 지구를 뒤집을 뻔했잖아. 결국 사람은 못 찾고 오히려 호되게 당했지만. 하하하하... 그러고 보니 좀 창피하긴 하네...”사도현은 진지하게 충고하려고 했지만, 4년 전, 성도윤이 차설아를 찾으려고 부리나케 어떤 섬으로 달려갔지만, 결국 사람은 못 찾고 차설아에게 호되게 당해, 섬 주민 백 명에게 빌붙어 비참하게 섬에서 탈출했던 일이 생각나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가장 웃긴 건, 성도윤이 섬에서 만난 사람에게 ‘차설아는 천하제일 미인이지만, 제가 눈이 멀어서 그녀를 오해했어요. 저는 바보예요.’라고 하는 동영상이 성대 그룹 공식 블로그에 5분 동안 게시되어 망신을 당했었다.그때부터, 성도윤의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이 일을 거론하며 비웃곤 했었다.4년이 지났고, 이 일은 더 이상 웃음 포인트가 없었다.하지만, 차설아가 갑자기 나타나니, 또 웃음 포인트가 생겼다.사도현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무려 5분 동안
“내가... 어떻게 알아?”사도현은 재빨리 핵심 정보를 포착하고 물었다.“형, 왜 1위가 아닌 2위만 궁금한 걸까? 지금 들통난 거 알아?”정상적인 논리라면 사람은 1위를 궁금해하지 2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성도윤은 발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오므리고 말을 하지 않았고, 차가운 얼굴에는 ‘나 건드리지 마’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사도현은 하필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간이라 계속 놀렸다.“형, 진짜 네티즌 말대로 여자를 위해 밑천을 내놓았네. 50억짜리 만찬이라니. 이건 기네스 기록에 남을 만한 사건이야. 내일 밤... 나갈 거지?”성도윤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사도현을 비웃었다.“여자를 위해 밑천을 까는 건 사도현을 따라갈 사람이 없지! 요 몇 년 동안... 그분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쏟아부은 돈이 아마 500억은 훨씬 넘을 텐데?”사도현의 얼굴빛은 금세 변했고, 눈빛이 흔들리더니 부인했다.“무슨 소리야. 나랑 설이는 단순한 사장과 소속 연예인 사이라고. 설이를 띄우는 건,재능이 있고, 우리 회사에 그만한 가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투자하는 거지.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진짜?”성도윤은 웃음을 지으며 독설을 퍼부었다.“그렇게 재능이 있는 분이 왜 4년 동안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지? 회사에 손해를 입히는 것이 그분의 가치인가?”사도현은 단번에 무참히 무너져 버렸고, 어색해서 자신의 오똑한 콧등을 만지작거리며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그... 다 때가 있는 법이잖아. 회사에서도 영화 몇 편을 제작해 줬고, 설이도 열심히 할 거야. 그러면 언젠가 히트를 치겠지!”“히트를 치는 건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운명이야!”성도윤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완벽한 이목구비에는 왠지 뿌듯함이 그려졌다.“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4년 동안 사라졌다가 복귀하자마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지. 이런 효과는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사도현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희번덕였다.“설아 쨩 대단한 거 알아.
두 남자는 한참이나 유치한 싸움을 한 후, 성도윤이 말했다.“앞으로 나랑 설아 일에 끼어들지 않으면, 이 녹음은 절대 공개하지 않아.”“좋아, 내가 졌어. 앞으로 다시는 관여하지 않고 입 꾹 다물고 있을게.”사도현은 성도윤에게 완전히 정복당했다.“착하네!”성도윤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관건적인 순간에 윤설이라는 필살기를 써야만 매를 자처하는 사도현을 잠재울 수 있었다.사도현은 공격을 받고 줄행랑을 치더니, 떠나기 전 또 한마디 했다.“내일 나갈 거지? 형?”성도윤이 휴대폰을 들고 녹음을 보내려는 시늉을 하자 사도현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아니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그리고 속으로 묵묵히 다짐했다.‘도윤 형, 이러다 앞으로 이불 속에 숨어서 울지나 마!’한편, 허민희는 라이브 방송을 끈 후에도 여전히 불가사의한 표정을 지었다.방송의 수익을 보고 입을 크게 벌리고는 다물지 못했다.“대박, 어마어마한 돈이야. 플랫폼에서 수수료를 떼가도 몇십억을 벌었다니! 역시 트렌드만 잘 따라가면 바보도 부자가 되는 세상이야!”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뭐? 누구보고 바보라는 거야?”“내가 바보예요, 내가 바보. 언니는 제가 돈을 벌 수 있는 트렌드고요. 앞으로 언니 옆에 찰싹 붙어 있어야겠어요. 죽음만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 거예요!”허민희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차설아를 덥석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됐어, 내 얼굴 닳겠어!”차설아는 겨우 빠져나오고는 감개무량해서 말했다.“사실 나도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어. 얼굴로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줄도 모르고, 몇 년 동안 연구개발에만 힘썼으니!”“뭐요? 언니? 그러니까 몇 년 동안 연구개발을 했다고요? 뭘 연구하셨어요? 너무 대단해요!”“별 것 아니야. 그냥 보통 사람들보다 지능이 조금 더 높을 뿐이야.”차설아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보이더니 신비롭게 말했다.“구체적으로 무엇을 개발했는지는 곧 알게 될 거야!”허민희가 또 물었다.“오늘은 언니 덕
12358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기분 봐서.”비록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이 말에 거만하고 당당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허민희는 12358의 개인정보를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텅 비어있었다.“이 사람 새로 만든 계정인가 봐요. 프로필 사진도 랜덤이고, 개인정보에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50억을 척 내놓다니... 분명 설아 언니 때문에 찾아온 거네요.”그녀는 대담하게 추측했다.“혹시, 성도윤 씨 아닐까요?”차설아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프로필 사진을 보며 붉은 입술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어쩌면? 내일 알게 되겠지.”만약 차설아가 진짜 알고 싶다면 당장 그의 IP주소를 찾을 수 있지만, 그녀는 확인하지 않았다. 내일 밤 12358이 약속대로 나올지 매우 기대되었다.밤이 깊어졌을 때, 차설아는 배경윤의 아파트로 돌아갔다.그런데 배경수도 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보스, 드디어 왔어? 조금만 늦었으면 나 경찰에 신고할 뻔했어!”밤새도록 걱정했던 배경수는 차설아가 무사한 것을 본 순간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내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했지? 우리 언니가 어디 괴롭힘 당할 사람이야? 오늘 라이브 방송 봐봐, 선녀같이 아름다운 언니의 미모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마음을 빼앗겼는데? 대체 비결이 뭐야, 언니? 책을 내도 되겠어!”“그만해, 두 사람 다 한밤중에 자지 않고 뭐해. 안 피곤해?”차설아는 기지개를 켜며 피곤한 기색이었다.“언니가 안 돌아왔는데 우리가 어떻게 편히 자겠어? 지금 자지 말고 나랑 수다 좀 떨어...”배경윤은 밝고 큰 눈을 반짝이며 차설아의 팔을 잡더니 대놓고 물었다.“오늘 1위 한 사람, 혹시 그 인간일까?”“내가 어떻게 알아?”“언니 진짜 몰라?”“나 몰라.”“조사하고 싶지 않아?”배경윤은 꼬치꼬치 캐물었다.차설아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궁금하지 않아. 돈만 내 손에 들어오면 그만이야.”그리고 배경수를 쳐다보니, 그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우리 경수 도련님 왜 이렇게 조용하
차설아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 진심이었다.지난 4년 동안, 배경수가 보답을 바라지 않고, 끊임없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렇게 빨리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당당하게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지금의 그녀는 그 누구도 저버릴 수 있어도, 절대 배경수의 마음은 저버릴 수 없었다.“그럼!”투정을 부리는 어린 소녀처럼 밤새도록 질투했던 배경수의 잘생긴 얼굴은 그제서야 활기를 되찾았다.배경수는 전에 얼마나 화려한 인생을 살았던가. 머리가 좋고 교활해서 사람들에게 ‘해안의 악동’이라 불렸고, 아무리 건방진 사람도 배경수는 피해갔다. 설사 그에게 해를 입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지금은 차설아에게 완전히 잡혀서 사는 꼴이 되었다.매일 성실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고도 치지 않고, 약자를 괴롭히지 않으며, 심지어 한가할 때 할머니를 도와 길을 건너곤 했다. 마치 초등학생처럼 말을 잘 들으니 그야말로 올바른 남성의 본보기였다. 차설아는 갑자기 궁금해졌다.“1위가 네가 아니면, 2위는 그래도 너겠지? 이런 교활한 수법을 사용하는 건 네 전문 분야잖아?”자선 경매에서 차설아와 배경수는 이런 수법으로 성도윤을 곤경에 빠뜨렸었다.배경수는 고개를 저었다.“나 진짜 거지야. 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그럼 이상하네? 대체 누구지?”차설아는 한숨을 내쉬고 더 생각하기 귀찮았다. 자신의 무한한 매력으로 재벌 팬을 얻은 것으로 생각했다.그녀는 씻은 후 방으로 돌아왔다.지금 해바라기 섬은 오후였다. 차설아는 곧바로 민이 이모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아가씨, 잘 계세요? 보니까 실검에 올랐던데, 혹시 그 나쁜 인간이 또 찾아오진 않았어요?”민이 이모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인터넷을 자주 해 차설아가 실검에 오른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다른 것보다 성도윤이 또 차설아를 찾아와 귀찮게 할까 봐 제일 걱정이었다.“전 잘 있어요.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데요? 아마 진작에 절 잊었겠죠.”“그럼 다행이고요.”민이 이모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도윤이가 이미 결정을 내린 거지. 어차피 쟤 인생인데 나도 쟤 뜻 존중해주기로 했어.”소영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사실 예전의 소영금은 사사건건 아들을 속박하려 들며 성도윤의 결혼까지 간섭했었다.그래서 차설아와 함께 살 때도 둘 사이에 자꾸 끼어들며 둘의 감정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쳤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제 아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인데 그냥 내버려 뒀으면 임채원 같은 여자가 꼬일 일도 없을 것 같아 소영금은 그 일이 늘 후회스러웠다.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주기로 한 것이다.“그럼 제 생각은 안 하시는 거예요? 도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기억을 회복하든 저는 어차피 다 상처받는 거잖아요.”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들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 서은아는 허무한 마음에 소영금을 보며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주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도윤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도윤이 때문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다 아시면서 어떻게 이래요? 쟤가 실명해서 성대 그룹 이사들한테 공격받을 때도 모든 자원, 인맥 동원해서 도윤이 일으켜 세운 것도 저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더러 모든 걸 포기하라고요?”“은아야, 일단 흥분하지 말고 진정 좀 해.”소영금은 그런 서은아를 달래며 말했다.“그냥 뇌수술하는 것뿐이지 죽는 것도 아니고 너랑 있었던 일을 다 잊는 것도 아니야. 네가 한 희생 도윤이도 알고 나도 알아, 쟤가 배은망덕한 사람도 아니잖니.”“저는 안 잊겠지만 바로 차설아를 찾아가겠죠. 그러면 저는 바로 버려지는 거잖아요, 아니에요?”“그럴 리가 없잖아. 도윤이랑 설아는 이미 지나간 인연이야.”“누가 그래요! 도윤이는 그냥 차설아를 잠시 잊어서 저를 그 여자로 생각하고 곁에 두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다정했던 만큼 기억만 돌아오면 바로 매정해질 거라고요! 그리고 모든 사랑은 또 차설아한테 퍼주겠죠.”“그럴 수도 있지만...”엉엉 우는 서은아를 보며 측은지심이 생겨난 소영금은 그녀를 다독이
“유감일 것도 없어요. 내어준 게 아니라 갚은 거니까.”차설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나 위해서 말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내가 손해 볼 건 없는 거래에요.”“알겠어요... 설아 씨가 비밀로 해주길 원하신다면 저희도 당연히 말은 안 하죠. 떠나고 싶으실 때 저한테 알려주시면 제가 서영 언니한테 물어볼게요. 하지만 언니도 별말 없이 보내줄 거에요.”“아직은 급하지 않아요.”차설아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진이 아직 안 깨어났다면서요, 일어나서 눈은 제대로 보이는지 확인한 뒤에 기회 봐서 나갈게요. 만약 수술이 성공적이지 않아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잖아요.”“설아 씨는 어쩜 이렇게 착해요? 우리 도련님을 이렇게 다 생각해주시고, 설아 씨는 우리 도련님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차설아의 말에 제대로 감동받은 현이는 순진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도련님도 설아 씨한테만큼은 진심이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회복 마치고 나면 성대 그룹 주권도 성도윤 손에서 빼앗아 오실 거에요. 그때는 도련님이 성도윤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을 테니 설아 씨한테도 꼭 제대로 보상해주실 거예요.”“그런 생각까진 안 해봤는데...”차설아도 자신의 행동이 성대 그룹의 내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눈이 보이지 않아 잠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긴 했지만 성진은 그리 쉽게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동안 필시 성도윤에 대응할 방도를 마련했을 것이다.그런 성진과 맞서려면 성도윤도 한동안 바빠질 것 같았다.하지만 차설아는 그래도 멀어버린 눈 덕분에 그 꼴사나운 모습들을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렇게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사고회로를 돌리는 게 바로 차설아였다.---그 시각, 성도윤의 뇌수술도 한창 준비 중이었다.이미 수술복으로 환복을 마친 성도윤은 수술실에 들어가 있었고 문밖에는 소영금, 서은아, 진무열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주머니, 아직 시간
“아, 아니야!”똑똑한 원이가 눈치라도 채면 집요하게 캐물을 걸 알기에 차설아는 당황하며 다급히 부인했다.“엄마 아무 일도 없이 잘 있어. 엄마한테 언제 무슨 일 생기는 거 봤어? 걱정 말고 동생 잘 챙기고 민이 이모 말씀 잘 듣고 있어.”말을 마친 차설아는 바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원이는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엄마한테 생긴 일이 적진 않죠.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데요,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니까 영상통화 못 하는 거잖아요. 1초만 켜요, 아무 일 없다는 거 내 눈으로 확인하면 믿어줄게요.”“그게...”원이를 속이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차설아는 핸드폰을 멀리 놓고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원아, 뭐라는지 잘 안 들리네? 엄마 지금 친구랑 등산 하고 있어서 신호가 안 좋아. 나중에 통화하자!”말을 마친 차설아가 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보고 있던 현이가 감탄하며 말했다.“설아 씨는 정말 행복하겠어요. 아들딸 다 저렇게 귀엽고 똑똑한데 엄마도 엄청 사랑하는 게 눈에 보여요!”“나는 행복한데 애들은 행복하지 않아요...”“나 따라다니면서 겁도 많아졌고 힘든 일도 많이 겪었어요. 나는 좋은 엄마는 아니에요.”“그런 말씀 마세요. 애들한테 설아 씨처럼 착하고 대단한 엄마가 있어서 행복할 거예요. 설아 씨는 애들이 설아 씨랑 살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생각해도 애들은 엄마랑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을 거예요.”아직 어리지만 아이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현이는 아들딸을 모두 둔 차설아가 부러웠다.그렇게 아름다운 가정인데 엄마가 시각장애인이 돼버렸으니 아이들이 얼마나 가슴 아플지 눈에 선해 현이는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집에... 모셔다드릴까요?”동정심이 차오른 현이는 차설아에게 앞으로의 생각을 물었다.“나 나갈 수 있어요?”그에 차설아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하죠, 설아 씨는 도련님한테 빛을 보게 해준 은인인데 하늘의 별을 따달라 해도 다 드려야죠. 자유를 원하시면 두말없이 보내드릴
상대방이 악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한숨 돌린 차설아가 말했다.“수술은 다 끝난 거죠? 잘 됐어요? 진이는 어때요? 이제 보인대요?”“언니가 그러는데 수술은 잘 끝났고 일주일 뒤에 실 빼면 도련님은 볼 수 있대요. 그런데 설아 씨는...”현이는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은 창백한 얼굴의 차설아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설아 씨는 앞으로 어떡해요...”“난 괜찮아요. 눈만 잃었지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살아지겠죠. 세상에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사람들도 잘살고 있잖아요.”자신의 상황이 더 고통스러울 텐데 차설아는 이 와중에도 현이를 위로해주고 있었다.그래서 현이는 그런 차설아를 보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요 며칠은 제가 잘 보살펴드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릴게요.”착하고 긍정적인 차설아를 보며 현이는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넘게 감탄하고 있었다.이런 좋은 사람에게 가혹한 일이 생긴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그럼 나 부탁하나 있는데 좀 도와줄래요?”현이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보아낸 차설아는 사양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내 핸드폰으로 민이 이모한테 전화 좀 해줄래요? 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해서 아마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알겠어요.”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찾아낸 현이는 차설아의 말대로 핸드폰 잠금을 풀고 ‘민이 이모’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자 상대방은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왜 이제야 전화하세요! 어디 가셨던 거에요 그동안? 갈 만한 데는 다 찾아봐도 없어서 원이랑 달이가 얼마나 놀랐는데요.”민이 이모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어제는 경찰서에 신고까지 했다고 말했다.“저 친구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원이랑 달이는 잘 있어요? 통화라도 하고 싶은데.”“방금 일어난 것 같아요. 진짜 하루종일 아가씨 얘기만
이틀 뒤, 차설아는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성진과 함께 별장의 무균 수술실로 들어갔다.“두 분은 수술대에 누워주세요.”안과 교수는 둘을 데리고 간단한 검사를 진행한 뒤 마취 테스트를 마치고는 간호사더러 그들을 수술대에 눕히게 했다.차설아는 검사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모자만 푹 눌러쓰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수술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엄청 큰 수술대 위에는 환한 전등이 아주 많이 달려있었는데 그것들이 하도 눈부셔서 차설아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광환이 감긴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차설아는 그제야 자신이 지옥문 앞에 와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후회돼요?”그때 옆에서 성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후회되면 지금이라도 가요.”“후회 안 해요.”하지만 차설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눈 하나로 그렇게 많은 돈을 얻는데 제가 왜 후회하겠어요.”“그래요. 절대 손해 본다고 느끼지 않게 내가 달라는 거 다 줄게요.”성진이 확신에 찬 약속을 하자 마취제 배합을 마친 의사가 차설아와 성진을 향해 말했다.“이제 마취 시작할 건데 전신 마취라서 두 분 다 의식을 잃으실 거예요. 깨어나는 시간은 체질에 따라 다른데 일반적으로 3시간에서 6시간 사이로 의식 차리실 겁니다.”“네.”“시작해주세요.”“시작하시죠.”의사의 말에 차설아와 성진 모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자신의 등을 통해 약물이 주입되는 걸 느끼던 차설아는 빠르게 의식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차설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자신의 세상이 비로소 어두워졌다는 것이다.“거... 거기 누구 있어요?”처음 겪어보는 암흑에 심연에 빠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떨던 차설아는 허공에 대고 손을 저어보았다.“깨어났어요? 어때요, 눈은 안 아파요? 의사 선생님이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상처가 다 낫는다고 하셨어요. 엄청 아프죠...”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박서영이 아님을 알아챈 차설아는 잔
대단한 집안 아가씨가 평생 숨겨야 할 남자들에게 강간당한 일을 이렇게 수면 위로 꺼낸 건 다 진무열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였다.성도윤의 최측근이 진무열이 자신을 믿고 도와준다면 성도윤과의 관계발전도 아주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아가씨가 대표님을 그 정도로 사랑할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모든 얘기를 들은 진무열의 마음에는 거센 파동이 일었다.성도윤을 향한 차설아의 사랑은 달빛처럼 부드럽고 깨끗하기만 하다면 서은아의 사랑은 뜨거운 태양처럼, 영원히 빛을 낼 것처럼 정열적이었다.둘 중에 어떤 사랑이 성도윤한테 더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뜨거운 편이 나은 것 같았다.“서은아 씨랑 대표님 감정은 아직도 전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걱정은 마세요. 대표님이 요즘 바빠서 그렇지 서은아 씨 생각은 항상 하고 계세요. 바쁜 일만 다 처리하면 예전처럼 더 좋아질 거예요.”상태가 안 좋은 저를 위로하기 위한 말임을 눈치챈 서은아는 진무열을 노려보며 말했다.“지금 어린 애 달래요?”“도윤이가 누굴 생각하는지는 진 비서님이 더 잘 알잖아요. 그냥 잠깐 나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고 나중에 기억 돌아오면 또 차설아한테 가버릴 건데... 그럼 나는 비서님 말대로 그저 해프닝, 변수가 되어버리겠죠!”“수술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만약 대표님이 기억해낸 게 서은아 씨와 보냈던 행복한 일상이면 서은아 씨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그럴 리가요. 도윤이랑 그 여자가 얼마나 깊이 얽혔는데 기억만 돌아온다면 내 자리는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그럼 서은아 씨는 뭘 원하는 거예요?”진무열은 울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서은아를 슬쩍 떠보듯 물었다.“도윤이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니고 뇌가 다친 적도 있으니까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일단은 그냥 놔두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냥... 이 수술 하지 말고 계속 기억 안 나는 채로 살아도 되는 거잖아요. 내가 진짜 잘할게요!”한시가 급했던 서은아는 이 수술을 원하지 않
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표정을 굳히며 오만한 태도로 진무열을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 지금 도윤이에 대한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예요?”“아니요,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대표님을 위해서 어떤 희생까지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한 거죠.”이기적이고 강압적인 보스라 할지라도 감정에서는 많은 시련을 겪었었기에 진무열은 서은아가 성도윤에게 정말 어울리는 짝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차설아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만약 서은아도 이상한 마음을 품는다면 성도윤이 또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진무열이 걱정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나는. 목숨까지도 내어줄 거에요.”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입술을 깨문 채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때 그 여자 오빠가 미친 사람처럼 도윤이 납치해갔을 때 내가 도윤이 구하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지 진 비서님은 모르죠?”이 얘기는 처음 듣는 진무열은 호기심에 차 물었다.“무... 무슨 일을 겪었는데요?”“차설아 씨 오빠가 도윤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비서님도 알죠?”“대표님과 자정 살인마가 오랫동안 싸우기는 했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잘 지내는 걸로 알고 있어요.”두 사람의 원한에는 깊은 관여를 하지 않고 가끔 조언을 해준 게 전부였기에 진무열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둘 다 원한을 내려놓고 화해하는 게 서로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성대 그룹의 고위 간부들은 이 기회에 자정 살인마를 제대로 눌러놔야 한다며 성도윤을 부추겼지만 성도윤은 결국 박성훈을 보내 차성철을 구해주며 그와의 화해를 선택했다.타인에게 장미를 건네면 내 손엔 그 잔향이 남는다고 그 인연으로 성도윤도 이번에 박성훈에게 수술받아 기억을 되찾을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이렇게 보니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은 하늘도 굽어살펴 주는 것 같았다.“둘은 화해했지만 나는... 내가 받은 상처는
그 모습을 보던 성도윤은 눈썹은 꿈틀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됐어, 성훈이 형 실력이면 너희들이 아무리 숨겨도 어차피 다 알게 될 텐데 뭐.”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와 들고 있던 보온 용기까지 떨어트려 버렸다.“아! 아파...”뜨거운 국물에 덴 손이 아픈지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성도윤도 빠르게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로 향했다.“괜찮아?”“응, 그냥 살짝 데인 것뿐이야.”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서은아의 표정은 서러움 그 자체였다.“봐봐.”여자의 앞에 쭈그려 앉은 성도윤은 빨개진 손등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진무열을 향해 말했다.“진무열, 은아 보건실로 데려가.”“괜찮아,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하지만 서은아는 계속 괜찮다고 하며 바닥에 엎질러진 국물을 보며 말했다.“너 주려고 온 오후 끓인 건데 다 쏟아버려서 어떡해... 그리고 네 러그도 더러워졌네.”“그거야 다시 끓이면 되고 러그도 사람 불러서 청소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네가 여기서 다치면 내가 미안하잖아 괜히. 그러니까 말 들어.”“알, 알겠어.”성도윤의 다정한 모습을 다시 본 서은아는 밀려오는 행복감에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하지만 만약 수요일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성도윤은 다시는 자신에게 이토록 다정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기억을 되찾은 그라면 전에 자신이 의사를 매수해 뇌에 이상이 생기게 만든 걸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그래서 서은아는 지금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마냥 불안했다.“아가씨, 저 따라오세요.”서은아를 데리고 성대 그룹 보건실로 향한 진무열은 의료진이 처치를 해주는 걸 보며 팔짱을 끼더니 서은아를 향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우리 대표님 마음 사로잡기가 쉽지 않죠?”“진 비서님도 내가 너무 달라붙으니까 꼴사나워 보여요?”“아가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전혀 꼴사납지 않죠.”진무열은 또 옛날의 차설아를 떠올리며 말했다.“예전 사모님도 서은아 씨처럼 우리 대표님한테 지
보온 용기를 들고 들어온 서은아는 활짝 웃으며 성도윤에게로 다가섰다.“보신탕 끓여왔는데 이게 위에 좋대, 너 안 그래도 위 안 좋은데 얼른 마셔봐.”그녀가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로운 보신탕의 냄새가 확 풍겨오자 진무열은 감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와, 냄새 너무 좋은데요. 서씨 집안 아가씨로 살면서 요리는 언제 배우셨어요?”책상을 마주 앉아 계약서를 넘기던 성도윤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가져가서 마시던가.”“...”성도윤에게 보신탕을 덜어주려던 서은아는 매정한 남자의 말에 행동을 멈추었는데 진무열도 바보는 아닌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가씨가 대표님 위해서 직접 만들어 오신 건데 제가 뭐라고 감히 그걸 마셔요, 저는 그냥 뜨거운 물 마실게요.”그 말에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은 서은아가 진무열을 보며 웃었다.“많이 해와서 괜찮아요. 드실 거면 덜어드릴게요.”“말씀은 너무 감사하지만 그냥 장난이었어요. 대표님 요새 마침 속 안 좋으신데 대표님 다 드리세요. 앞으로 종종 해주시면 좋고요...”말을 하던 진무열은 갑자기 제 아내를 떠올리며 말했다.“대표님 이혼 전에는 사모님도 이런 보신탕 자주 해왔었는데 대표님만 드리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다 나눠줬었어요. 회사 복지라면서 곳곳에 놔두고 왔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아서 우렁각시라는 별명도 얻었죠.”“그... 그래요?”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꾸했다.이렇게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사람이 성도윤 옆에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일을 방해할 게 분명했기에 서은아는 하루빨리 진무열부터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일에 열중하며 진무열과 서은아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성도윤은 갑자기 들리는 ‘이혼’과 ‘사모님’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들며 물었다.“진 비서, 아까 이혼이라고 했어?”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캐묻기 시작했다.“내가 전에 결혼을 했었어?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