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차성 커플’ 영화가 실검에 올라 세계의 이목을 끌면 차설아가 분명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하지만 여자의 반응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이 영화는 아직 소규모 개봉일 뿐, 정식 개봉도 하지 않았다. ‘이 여자가 많이 급한가 봐? 쿨하게 떠난 건 아닌가 보네?’사도현은 거들먹거리며 성대 그룹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고, 성도윤의 손에 작은 쪽지를 쥐여 주었다.“형, 잘 챙겨. 내가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 놓치면 그건 형 능력 문제야. 그때 가서 날 탓하지 마.”일에 열중하고 있던 성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에 든 쪽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이게 뭐야?”“차설아 위치!”사도현은 감격스러워 말했다.“내가 방금 누가 배급사의 내부 시스템을 해킹해서 영화를 복사해 갔다고 했잖아. 내가 거금을 들여 해커를 고용해 그 사람의 주소를 확인했지. 이름도 없는 작은 섬이지 뭐야. 어쩌면 차설아가 지금 그 섬에 있을지도...”“쯧쯧, 어쩐지 우리가 오랫동안 찾아도 소식이 없더라니. 그런 곳에 숨어있을 줄이야.”성도윤의 그윽한 눈동자는 순간 흔들리더니 이내 덤덤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어디에 있든 나랑 상관없어. 나 이거 필요 없으니 가져가.”“형, 그게 뭔 말이야? 나한테 설아의 움직임을 지켜보라고 했잖아. 애초에 이 영화를 만들고, 직접 출연한 것도 차설아에게 이런 방식으로 사과하려던 거 아니었어? 드디어 차설아가 미끼를 물었는데, 이제 와서 형이랑 상관없다고?”“내가 지켜보라고 한 건, 진짜 미련 없이 쿨하게 떠난 게 맞는지 확인해 보려던 거였어. 이제 확인했으니,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나랑 상관없어.”성도윤은 말하면서 손에 있는 서류를 처리했다. 마치 차설아가 어디 있는지 관심이 없고, 찾아갈 생각은 더더욱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이에 사도현은 크게 당황했다.사도현은 자신이 차설아의 주소를 알아내면 성도윤이 밤새 헬기라도 타고 날아갈 줄 알았다. 차설아를 찾은 ‘공’으로 앞으로 3
그룹 빌딩 전체에는 직원이 거의 없었다.성도윤은 사무실에 앉아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최근 몇 년 동안 성대 그룹은 빠르게 발전함과 동시에 많은 문제와 적들이 생겼다.특히 전자 기술 분야에서 성대 그룹은 R&D 회사인 KCL과 오랜 협력으로 거의 천하무적이었고 시장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었다.따라서 많은 경쟁자들이 암암리에 행동을 개시했다. 전체적인 판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들여 처리해야 하니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예를 들어, 최근 누군가 끊임없이 루머를 퍼뜨리고 있었다. 성대 그룹이 새로 출시한 스마트 팔찌는 사용자의 사생활을 도청한다고 하여, 성대 그룹은 많은 컴플레인과 고소를 당했다. 이미지가 계속 손상되고 있어 아주 번거로웠다.“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홍보팀에 알리세요.”“당장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내고, 법무팀에 고소장을 준비해 허위사실 유포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으라고 하세요.”“스마트 팔찌를 일단 회수하고 기술팀에 진짜 허점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세요.”“…”성도윤은 얼마나 많은 화상 통화를 하고, 얼마나 많은 서류에 사인하고,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검토했는지 모른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가서 사도현이 찢어서 버린 쪽지를 주었다.쪽지는 크지 않았지만, 눈송이 모양으로 찢어져서 붙이기 쉽지 않았다.성도윤은 머리를 파묻고 한참이나 붙이더니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가 윙윙거렸다.‘망할 사도현, 전생에 분쇄기였나? 쪽지를 이렇게 찢으면 어떡해!”거의 붙이려던 순간, 비서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콜록!”성도윤은 도둑질한 듯 서둘러 종이를 막았지만, 동작이 너무 커서 그대로 날아가 땅바닥에 너부러졌다.비서는 화들짝 놀라 다가가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움직이지 말아요!”성도윤은 큰소리로 외치며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보며 차갑게 명령했다.“밟지 말아요!”비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대표님, 바닥이 너무
성도윤은 자가용 비행기를 출동시켜, 가장 빠른 속도로 밤새 사도현이 알려준 섬으로 날아갔다.도중에 성도윤은 차설아를 만나면 무조건 도도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다짐했다.‘한밤중에 내가 설아를 찾아가는 건 절대 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다시 잘해보려는 것도 아니야. 단지 회사에 최근 법무 문제가 너무 많아서 성윤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를 빌리려고 가는 것뿐이야! 맞아! 바로 그거야!’성도윤은 끝내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음날 새벽이었다.주황색 아침 해가 해수면에 떠오르고 검푸른 바닷물이 붉게 물들어 장관을 연출했다.성도윤은 현지 보트를 타고 파도를 헤치고 섬에 올랐다.섬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소녀가 마중 나왔다.“아저씨, 설아 이모 찾으러 왔어요?”어린 소녀는 햇볕에 그을린 작은 얼굴을 하고는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맞아.”성도윤은 어린 소녀를 보며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차설아,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보네. 사람을 보내 날 접대할 줄도 알고.’“그럼 아저씨 나 따라오세요, 제가 설아 이모한테 데려다줄게요!”어린 소녀는 성도윤을 향해 손짓하며 앞으로 달려갔다.성도윤은 의심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원래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성도윤이 순진했다.태엽을 감는 것처럼 산 밑의 굽이굽이를 돌아 꼬박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 올랐다.건장한 성도윤도 힘이 들어 숨을 헐떡이며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소녀에게 말했다.“아직도 멀었어? 대체 어디 있는 거야?”“설아 이모 집은 멀지만 아주 예뻐요. 무릉도원이라고요. 가면 반드시 좋아하게 될 거예요.”성도윤은 불평을 부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그럼 우리 좀 쉬었다 가자.”“아저씨, 고작 이만큼 걷고 힘든 거예요? 역시 설아 이모 말대로 약골이네요.”“???”‘차설아, 아주 잡히기만 해봐. 내가 약골인지 아닌지 제대로 보여줄 테니.’또 세 시간 남짓 걸은 끝에 산기슭에서 산꼭대기까지 올랐다.성도윤은 멀리 넓은
성당의 문은 닫혀 있었다.성도윤은 바로 문을 열려고 했지만 괜히 체면을 구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 문밖에 서서 목을 가다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서 나와.”“...”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성도윤은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고 계속 도도한 자태로 말을 이어갔다.“밀당도 정도껏 해야지. 인내심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어. 내가 들어가면 당신은 끝장이야.”‘흥, 내가 비행기에 보트를 타고 온 것도 모자라 산도 몇 시간이나 올랐다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왔는데 배웅쯤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하지만...성당 안에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성도윤은 화난 마음에 문을 확 열고 들어갔다.“차설아, 너무한 거 아니야? 당신...”“서프라이즈! 도윤 씨, 제대로 속은 거 축하해!”성당 안에서 차설아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텅 빈 성당 한가운데에 곰 인형이 하나 놓여 있었다.인형 안에는 무전기가 설치돼 있었는데 곰 인형은 마치 영혼이 실린 듯이 성도윤을 비웃고 있었다.“하하하, 성도윤 대표님. 정말 너무 바보스럽군요. 정말 나 찾으러 여기까지 오다니...”“괜한 힘 쓰지 마.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이상, 당신은 영원히 나를 찾지 못할 거야.”“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때가 된다면 내가 알아서 나타날 테니 그때 꼭 마중 나와!”곰 인형은 차설아의 목소리를 내며 비꼬는 투로 말했다.“차설아!”성도윤은 남을 상대하려고 계략을 꾸미던 총명한 자신이 차설아에게 쩔쩔매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곰 인형을 확 잡더니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곰 인형이 또 말하기 시작했다.“나 부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이 섬에서 영영 나가지 못할 거야. 정 믿지 못하겠으면 지갑 한 번 찾아봐!”성도윤은 곧바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보더니 지갑은 역시 사라졌다.아까 그 어린 여자아이가 훔쳐 갔다는 사실을 그는 곧바로 알아챘다.지금 쫓아가봤자 그 여자아이를 찾을 수 없을 것
4년 후, 해안 공항에서.붐비는 인파 속에서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는 블랙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브이넥에 허리를 잡아주는 디자인의 원피스는 그녀의 우아한 자태를 감쌌다.그녀의 얼굴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늘씬한 다리에 하이힐을 신은 채 도도하고 안정하게 걸어갔는데 카리스마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아아, 설아 언니, 나 여기 있어!”공항 밖, 빨간색 페라리 스포츠카에 기대고 있던 배경윤은 지루했는지 하품을 하다가 문득 공항에서 나오는 차설아를 보고는 팔을 흔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차설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여유롭게 배경윤 앞에 멈춰 섰다.우아하게 선글라스를 벗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배경윤을 보고는 말했다.“경윤아, 조용히 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나 따라다니는 변태 사생팬인 줄 알겠어!”“내가 어떻게 조용히 해!”배경윤은 곧바로 차설아에게 덮치더니 그녀는 꽉 끌어안고는 말했다.“4년이야, 4년이나 지났다고! 설아 언니, 왜 이제 온 거야? 내가 얼마나 보고 싶은 줄 알아?”흥분된 배경윤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뭐야? 우리 어젯밤에 방금 영상통화를 했잖아.”“영상통화랑 직접 만나는 게 같냐고? 영상통화만 한다면 언니를 안을 수도 없잖아. 정말 보고 싶었다고!”배경윤은 또 차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내둘렀다.“이야, 이 개미허리를 좀 봐. 그리고 가슴도 조금 더 커진 것 같은데? 엉덩이는... 어머, 더 단단해졌네, 꿀벅지야. 이게 어디 아이를 낳은 엄마의 몸매냐고?”“솔직히 말해봐! 가짜 임신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 대신 아이를 낳아줬지? 아니면... 물고기처럼 알만 낳은 거 아니야? 아니면 몸매가 이렇게 좋을 리가 없는데.”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됐어, 그만해. 얼른 차에 타자고. 나 이번에 오래 있지 않을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돌아온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아.”“알겠어!”배경윤도 눈치가 빠르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손가락을
배경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소리를 마구 지르기 시작했다.“똑바로 앉아!”차설아는 웃으면서 배경윤에게 말했다.그녀 또한 마음이 상쾌했다.최근 몇 년 동안 그녀는 해바라기 섬에서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았다고 하지만 해안이야말로 그녀가 어려서부터 자란 집이었고 그녀의 뿌리였다.해안에는 그녀의 친인과 친구들이 있었고, 돌아갈 수 없는 그녀의 청춘이 있었고, 또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있었기에 해안에 돌아오면 심신이 안정되는 듯한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그래서 때가 되면, 그녀에게 보호하고 싶은 사람들을 충분히 보호할 힘이 생긴다면 당연히 제일 먼저 해안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차설아는 속도를 점점 줄였다.배경윤도 마음껏 소리를 지르더니 설레던 마음이 겨우 가라앉았다. 조수석에 얌전히 앉고는 다시 차설아에게 물었다.“언니, 나한테만 슬쩍 말해주면 안 돼? 이번에 왜 갑자기 돌아오게 된 거야? 무슨 비밀 계획이 있어? 왜 우리 오빠까지 언니가 돌아온 걸 알게 하면 안 되는 건데?”차설아는 이번에 해안으로 돌아온 소식을 배경윤에게만 알렸다. 그리고 배경윤에게도 신신당부했었다, 이번 일은 배경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고 말이다.차설아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턱을 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계획 같은 거 없어. 그냥 집이 그리워서 왔을 뿐이야. 왔던 김에 불에 탔던 차씨 저택도 다시 제대로 돌려놔야지. 그래야 아이들이 돌아와도 묵을 집이 있을 거 아니야?”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다시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두 아이를 데리고 해안으로 돌아올 생각이야? 그럼 다시는 안 가?”차설아는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다면.”“당연히 순조롭게 진행될 거야!”배경윤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언니가 돌아온다면 정말 좋아! 그럼 우리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거잖아. 잘생긴 남자와 데이트도 하고 말이야... 언니는 모르지? 나 언니 없는 동안에 얼마
“내 아이들을 뺏어?”차설아는 갑자기 차가운 얼굴을 보이더니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그럴 능력이 있는지 한번 지켜보자고.”“내가 언니 실력을 믿지 않는 건 아니야. 천신 그룹도 언니가 잘 다스린 덕에 업계 최고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성도윤이라고. 그 사람이 어디 조금 독한 사람이야? 개도 성도윤을 보면 꼬리를 숨기고 도망가겠어. 정말 성도윤이랑 맞서 싸운다면 일이 매우 번거로워질 거야...”배경윤은 걱정이 가득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성도윤은 물론, 성도윤 배후에 있는 성씨 가문은 더 상대하기 어려웠다.차설아의 능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배씨 가문이 뒤 바쳐줄 거라고 해도 그녀의 승산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아니면 돌아오지 않는 게 어때? 원이랑 달이가 얼마나 귀여운데, 만약 그놈한테 빼앗긴다면 나 진짜 울어버릴 거야!”“절대 그럴 리가 없어!”차설아가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차를 운전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 있는 미소가 번졌다.“내가 그동안 섬에서 바다 구경이나 했는 줄 알아? 성도윤이 만약 내 아이들을 빼앗아 가려 한다면 꼬리를 숨기고 도망가야 할 사람은 성도윤이 될 거야!”말을 마친 차설아는 미간을 좁히더니 액셀을 밟고는 더 빠른 속도로 국도를 달렸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갑자기 고장이 났는지 멈춰 섰다.“왜 이래? 내가 금방 산 차가 벌써 고장이 나다니?”배경윤은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차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난 채로 멈춰 선 차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아마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여기 앉아 있어. 내가 내려가서 체크할게.”차설아가 덤덤한 얼굴로 배경윤을 진정시키고는 여유롭게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보닛을 열고 지지대로 받치고는 허리를 굽혀 엔진 상태를 검사했다.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고, 굴곡 있는 몸매까지 더해져 모델 같은 섹시함을 드러냈다.뜨거운 태양 아래의 스포츠카와 미모의 차설아
차설아는 그제야 그를 놓아주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음부터는 말 걸기 전에 먼저 거울을 한 번 봐봐, 알겠어? 이제 꺼져!”“언니 완전 멋있는데!”배경윤이 조수석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는 재밌는 구경을 하는 듯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언니가 너무 쉽게 넘어간 거 아니야? 저런 찌질한 남자들이 매일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괴롭히는지 몰라? 손을 왜 끼워둬? 제대로 혼내줘야지!”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두려움에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아 허겁지겁 도망쳤다.차설아는 다시 차에 올라타고는 덤덤하게 말했다.“대충 겁을 주면 되잖아. 나 이번에 돌아온 거, 너무 많은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돼.”“알겠어! 언니 말이 다 맞아!”스포츠카는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굉음을 낸 채 도로를 질주했다.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카메라에 잡힌 걸 두 사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몇 시간 후, 차는 도심에 있는 배경윤의 개인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이 아파트는 산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배경윤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그리고 배경수도 이 아파트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당분간 여기서 지내. 보안이 엄청 잘 되어 있거든. 10년을 살아도 아무도 언니의 행적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차설아는 웃음을 터뜨렸다.“뭐야? 괜히 무서운 마음이 드는데? 네 말은 내가 여기서 살해를 당한다면 10년이 지나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거 아니야?”“누가 언니를 살해할 수 있어야 말이지. 언니 싸움 실력이 대단한데 누가 감히 언니한테 손을 쓰겠어? 오히려 언니한테 당하겠지!”“뭐야? 왜 네 말이 점점 이상하게 들리지? 솔직하게 말해봐. 너 무슨 꿍꿍이가 있어? 날 암살하려고 그래?”차설아가 말하고는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배경윤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면서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두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지만 함께 있으면 여전히 세 살짜리 아이처럼 유치하게 장난치곤 했다.그러다가 차설아는 문득 뭐가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