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화창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았다.차설아는 더욱 흥미가 생겨 한 마디 더 보냈다.“아니면 처음 뵙는 분?”하지만 이젠 ‘입력 중...’이라는 글도 뜨지 않았다. 대화창에서 아예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답장을 안 해?’차설아는 원래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도전정신이 불타올랐다.‘꽤 개성 있는데? 아마 시크한 훈남 동생이겠지? 평소에 여자들의 대시만 받았으니 차가울 수밖에?’마침 마음이 복잡했던 차설아는 차라리 상대방을 나무로 삼았다.나무의 작용은 바로 ‘경청’만 하고 ‘영원히 입을 열지 않는 것’이다.어두컴컴한 밤, 핸드폰의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차설아는 폭풍 타자를 했다.“동생은 혹시 싫어하는 사람 있어?”“아직 어리니까, 분명히 없겠지. 하지만 이 누나는 있어. 가장 아이러니한 건 누나가 싫어하는 사람은, 한때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거지.”“난 살면서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앞으로 우리 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자.”핸드폰 너머에서 성도윤은 번쩍번쩍한 대표 사무실에 앉아 창밖의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차설아의 폭풍 문자에 성도윤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바보’라는 글자를 본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고, 화가 나서 사람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 여자가 설마 나라는 걸 알고 일부러 욕하는 건 아니겠지?’성도윤은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 아예 잠자코 있었다.차설아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폭풍 하소연을 했다.“이 바보가 얼마나 못 났는 줄 알아? 평소에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도도한 척하면서, 사실은 속물이야. 사람 보는 눈도 형편없고, 상대방이 얼마나 품행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무조건 용서하고 있어.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내가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니, 진짜 부끄러워.”성도윤은 더욱 의심했다. 차설아가 자신인 걸 알면서 일부러 욕하고 있는 건 아닌지.성도윤이 반박의 말을 하려는데 차설아가 또 메시지를 보냈
병원, 산부인과 입원 병동.임채원은 병원 침대에 누워 매우 초조한 모습이었다.그녀의 절도죄는 이미 증인과 증거가 확실하여 현재 보석 대기 단계에 있으며, 문밖에는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차설아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을 경우, 재판 후, 그녀는 최소 3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임신과 수유 기간에는 감옥에 갈 필요가 없지만, 그 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가장 심각한 것은, 일단 그녀가 형사 범죄를 선고받으면 후반생은 완전히 끝장이라는 것이다!차설아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여자인 줄 알았다면, 임채원은 꼬리를 잘 숨기고, 절대 차설아를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임채원은 성도윤에게 많은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니, 그녀의 죄를 씻어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임채원은 이익을 취하려다 도리어 손해만 크게 보게 되었다.이때, 그녀의 주치의가 들어오면서 문을 닫고,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임채원 씨,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상황이 좀 복잡해서 직접 얘기를 드려야 할 것 같아요.”“왜요? 아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문제가 좀 생기긴 했어요. 대표님이 오시면 같이 해결 방안을 상의하는 게 어떨까요?”임채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괜찮아요, 먼저 저한테 말씀해도 똑같아요. 어차피 제 아이이니까, 저 혼자 감당하고, 혼자 결정할 수 있어요.”“알겠습니다.”의사는 한숨을 쉬며 방금 나온 검사 결과를 건넸다.“임채원 씨, 아이의 유전자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태어나면 지적 장애의 가능성이 비교적 높기 때문에, 저희가 건의를 드리자면...”“뭐라고요? 지적 장애?”임채원은 매우 흥분했다.“불가능해요. 아이는 항상 건강했어요. 아이의 아빠, 엄마도 정상인데 왜 갑자기 지적 장애가 생겨요? 분명 검사가 잘못됐어요!”“일단 진정하세요...”의사는 임채원을 달래며 설명했다.“유전자 문제이기 때문에 태아가 작을 때는 발견할 수 없어요. 지금은 임신 중기
의사가 떠난 후, 임채원은 자신의 배를 만지며 분노와 실망감이 몰려왔다.“너 참 못났어. 하늘이 너에게 성가의 핏줄이 될 기회를 줬는데 하필 유전자에 문제가 있다니... 어차피 넌 스스로 발육을 멈출 테니, 이 엄마를 탓하지 마!”의사의 뜻은 분명했다. 이 아이는 스스로 발육을 멈추든, 피동적으로 발육을 멈추든, 어쨌든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임채원은 당연히 이 아이가 피동적으로 발육을 멈추기를 바란다. 그럼 그녀의 문제가 아니니.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를 유산시킬 것인가?임채원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차설아가 날 죽을 만큼 미워하잖아? 그럼 이성을 잃고 내 아이를 유산시키는 것도 어쩌면 가능하지?’그때가 되면 성도윤은 분명, 자기 형의 핏줄을 잃게 만든 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차설아는 분명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임채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배를 만지기 시작했다.“아가야, 엄마를 위해 하는 마지막 일이니, 잘 부탁해.”“임채원 씨, 누가 찾아왔어요.”밖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관이 병실 문을 두드리고, 차갑게 말했다.“누가요?”임채원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성도윤! 분명 성도윤이 그녀를 보러 왔을 것이다!임채원은 감격에 겨워 거울에 빗질을 하고 나서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밖에는 그녀가 처음 보는 중년 여자가 서 있었다.임채원의 얼굴은 바로 싸늘해졌고 차갑게 물었다.“누구시죠? 절 아세요?”“안녕하세요, 임채원 씨, 저는 차씨 가문의 집사예요. 저를 민이 이모라고 부르시면 돼요.”민이 이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차씨 가문의 집사?”임채원의 안색이 더욱 나빠지더니 쌀쌀맞게 말했다.“차설아 가 보냈어요?”“제가 채원 씨를 찾아온 거예요. 설아 아가씨는 모르세요.”민이 이모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가 오늘 채원 씨를 찾아온 이유는, 앞으로 채원 씨 자신을 위해서라도 도련님의 곁을 떠나달라고 말하고 싶어서예요. 도련님과 설아 아가씨는 아직 서로에 대한 감
민이 이모는 의학 집안 출신이라, 아이를 지키는 방법은 물론, 지우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민이 이모는 이런 잔인한 짓을 한 적이 없었다.만약 이것으로 성도윤이 차설아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민이 이모는 죽어서 지옥으로 간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임채원 씨,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진짜 이 아이를 지우고 싶다면, 제가 약을 처방해 드릴 수 있어요. 아무런 고통도 없고, 앞으로 출산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예요.”민이 이모는 재차 임채원에게 확인했다.임채원이 기꺼이 물러나고, 주동적으로 아이를 지워야만 민이 이모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아이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건 영원히 산모이기 때문에 민이 이모는 강요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옆에서 부채질을 하는 정도이다.“결정했어요.”임채원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제 아이가 사랑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아빠가 아이를 사랑할 뿐만아니라, 엄마도 사랑해야 진짜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아이는 지금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모두를 위해서 아이가 떠나는 게 맞아요.”“정말 사리에 밝은 분이네요. 지혜로운 생각이세요.”임채원의 대답에 민이 이모는 마음의 짐을 완전히 내려놓았다.임채원은 차설아가 말한 것처럼 악랄하지 않고, 오히려 사리 분별이 명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역시 도련님은 보는 눈이 있으셔!’“제가 곧 약을 지어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민이 이모는 말을 마치고 근처 한의원에 가서 유산하는 약을 처방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이 이모는 달인 약을 텀블러에 담아 병실에 갇혀 있는 임채원에게 건넸다.“임채원 씨, 약을 달였으니 안심하고 마시세요. 경미한 복통이 있을 테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에요. 화장실 한 번 다녀오시면 해결됩니다.”민이 이모는 임채원의 마음을 달랬다.민이 이모 집안의 의술은 뛰어나서, 약의 안전성은 보장할 수 있었다.임채원은 민이 이모가 건네준 텀블러를 보며 받지 않고 갑자기 목청을 높여서
민이 이모는 고개를 돌려서야, 병실 입구에 서서 냉혹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성도윤을 발견했다.“도련님, 전...”민이 이모는 해명하려 했지만, 손에는 낙태약이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임채원은 성도윤의 뒤에 숨어 다시 억울한 모습을 하고 흐느끼며 말했다.“이모, 제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확실히 잘못했고, 도윤이 곁은 떠나겠지만, 아이는 낳아야 한다고요.”“제 목숨과 같은 아이예요. 그 누구도 해칠 수 없어요. 제발 돌아가서 설아 씨한테 전해주세요.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벌은 제가 받겠다고요.”임채원의 말에 민이 이모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지고 감정이 격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방금까지 아이를 지우겠다고 했잖아요. 왜 이제 와서 피해자인 척하는 거죠? 새빨간 거짓말을 하네요.”“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건 당신이죠! 제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멀쩡한 아이를 왜 지워요? 오히려 저를 협박한 건 당신이죠! 제가 아이를 지우지 않으면 설아가 절 감옥에 보낼 거라고. 제가 약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니, 강제로 마시게 했잖아요. 문밖에서 경찰과 도윤이가 직접 봤어요!”“너...”민이 이모는 임채원만큼 연기를 훌륭하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화가 나서 가슴이 막힐 것 같았다.그제야 차설아의 말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임채원은 정말 뼛속까지 악랄한 사람이고, 하는 짓은 음흉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다.민이 이모는 서둘러 성도윤에게 말했다.“도련님, 믿지 마세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전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그만!”성도윤은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압박하는 눈빛으로 민이 이모를 보며 물었다.“차설아가 시켰어요?”“아닙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에요. 아가씨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오늘 여기 찾아온 줄도 모르고 있어요. 절대 설아 아가씨를 오해하지 마세요.”“당신 혼자만의 생각이라고?”성도윤의 눈빛이 더 차가워지더니, 위
차설아의 집.차설아는 2층 창가에 앉아 한참 동안 밖을 내다보았지만 민이 이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민이 이모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이상하네. 날이 저물어 가는데 이모는 왜 아직도 안 오지? 대체 어디 갔지?”오늘 아침, 차설아는 식탁에 민이 이모가 남긴 쪽지를 보았다. 개인적인 일이 있어 외출을 하니,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하지만 꼬박 하루가 지났지만 민이 이모는 연락 두절이었다. 너무 이상했다.최근 차설아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녀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민이 이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되었다.날이 완전히 저물자, 차설아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외투를 걸치고 나가서 찾아보려 했다.문을 나서자마자 차설아는 눈에 익은 은색 스포츠카가 별장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훤칠한 키의 남자는 무심코 차에 기대고 있었다. 어둑한 가로등 아래서 그의 그림자는 유독 길어 보였다.그의 긴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가 있었고, 연기를 내뿜는 그는 차갑고 거리감 있는 느낌을 주어 온몸에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차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설렜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이 남자는 바로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지 않은 얼굴, 성도윤이었다. ‘여긴 또 왜 왔지?’손에 든 담배꽁초 길이로 보아 온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차설아는 궁금했지만, 성도윤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무표정으로 그의 옆을 지나갔다.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담배꽁초를 눌러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잠자코 여자의 뒤를 따랐다.키가 큰 성도윤의 그림자는 아주 길었고, 곧 차설아와 겹쳐져 두 사람이 포옹을 한 것 같았다. 공기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가 흘렀다.차설아는 성도윤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고 그냥 내버려 두려 했다. 하지만 거의 1킬로미터를 따라온 남자를 보고 이유 없이 화가 났고, 갑자기 걸음을 멈춰 돌아섰다.“당신 변태야? 왜 계속
“그건 중요하지 않아.”성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어떤 비밀들은 그가 평생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 숨겨두어야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당신은 그냥, 내가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것만 알면 돼. 그러니까 질투심 때문에 채원이를 궁지에 몰아넣을 필요 없어!”“하하!”차설아는 웃음을 터뜨렸다.남자의 오만함과 무정함에 웃음이 났다.이 남자는 어떻게 전처를 앞에 두고 이런 뻔뻔한 말을 할 수 있을까?분명 악독한 짓을 한 건 임채원인데,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임채원을 옹호하고, 오히려 차설아를 가해자 취급하고 있다.“성도윤, 당신 참 재밌네. 설마 내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서, 질투에 눈이 멀어 임채원을 감옥에 보내려 한다고 생각해?”“아니야?”성도윤은 싸늘하게 반문했다.그는 비록 연애 경험은 적지만, 겪어본 여자는 적지 않아, 이 정도 잔머리는 보아낼수 있다고 생각했다.“절대 아니야. 당신이랑은 상관없고, 순전히 내 마음이 좁아서 그래.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하니까. 임채원이 날 몇 번이나 모함했는데, 당연히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차설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녀는 성모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다. 괴롭힘을 당했으면 당연히 갚아줘야 한다.차설아를 보는 성도윤의 눈빛은 복잡해지고, 깊어지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당신 변했어.”“전에는 내가 멍청하고 눈이 멀었지. 그리고 예전의 내 모습은 전부 연기야!”마음이 제대로 상해버린 차설아는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사실, 나도 당신 마누라로 사는 거 이미 지쳤어. 단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당신이랑 잉꼬부부 행세하는 것도 싫고, 당신의 그 오만하고 까칠한 엄마도 싫고, 감옥 같은 당신네 집도 싫고, 매일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밤은 더욱 싫어!”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 차가운 날들을 차설아는 추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난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독한 마음을 먹은 이상, 당신 그 내연
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결국, 당신이었어... 당신 민이 이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당신이야말로 이모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성도윤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잔뜩 흥분한 차설아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이모님은 채원이를 유산시키려고 했어. 당신 정말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어?”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우린 한때 부부였잖아. 서로 한 발자국씩 양보하자고. 난감하게 안 할 테니까 너도 이만 채원이를 놔줘.”성도윤은 자신이 차설아를 충분히 너그럽게 대해준다고 생각했다.임채원 뱃속의 아이는 형님의 유일한 핏줄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민이 이모와 같은 짓을 했다면 그는 진작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었을 것이다.“그럴 리가 없어!”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민이 이모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민이 이모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난... 임채원이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보내길 원하는 건 맞아. 하지만 난 임채원 뱃속의 아이를 해칠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 형량이 확정되어도 임산부는 바로 수감되지 않잖아. 아이를 낳고 수유 기간까지 지나서야 수감할 거라고. 그동안 아이에게는 그 어떤 위험한 상황도 생기지 않을 거야.”차설아도 엄마였기에 절대 아이한테 못된 마음을 먹을 리가 없다.그 말을 듣던 성도윤의 싸늘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는 차설아가 분명 자신이 말한 것처럼 독한 사람이 아닐 줄 알았다. 차설아는 그저 자신을 화나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당신을 믿어, 이모님도 믿고. 그러니까 이번 일은 여기까지 하는 거 어때?”성도윤은 다시 한번 제안했다.“당신이 고소를 취하하면 이모님도 다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차설아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남자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성도윤 씨, 참 마음이 너그러우시네요. 왜 당신이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
성도윤은 묵묵히 참다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경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랑 차설아의 관계는 너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지금 행복해. 네가 보기 불편하면 그냥 나가면 되잖아.”“...”배경윤이 성도윤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붙잡히자 이번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려 했다.성도윤은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지만 배경윤의 저돌적인 공격에 살짝 밀리는 기분이 들어 결국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바로 그 순간, 사도현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성도윤과 배경윤도 순간 굳어버렸다.“오해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성도윤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배경윤을 놓아주었고 배경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도윤의 발을 힘껏 밟았다.“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성도윤은 발끝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차설아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차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는데 그녀의 절친인 배경윤까지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슬쩍 사도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너, 보험 많이 들어둬.”“무슨 뜻이야?”사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뜻이긴? 저 호랑이 같은 여자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성도윤이 배경윤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투덜댔다.그러자 사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우리 경윤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애가 아니야. 분명 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겠지.”그는 중요한 순간에 배경윤 편을 들기로 했다.사실 예전에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마다 배경윤과 말다툼이 잦았다.배경윤은 성도윤을 두고 철저히 쓰레기라고 욕했고 사도현은 차설아가 너무 까다롭다고 반박하며 두 사람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곤 했다.하지만 이
“그만 좀 해요, 너무 닭살 돋아요.”차설아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랑 고백을 들으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쑥스럽기보다 오히려 닭살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엔 성도윤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전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입만 열면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성도윤이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뒤 말했다.“물 받아놨어. 들어가서 몸 좀 풀고 와.”“좋긴 한데... 좀 나가주겠어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안 되지. 당신이 미끄러지거나 수건이 필요하거나 옷을 입어야 할 때 누가 도와줘?”“괜찮아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도윤 씨가 여기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어요.”차설아는 아직 성도윤과 그렇게까지 오픈된 관계는 아니었다.게다가 자신만 벗고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알겠어. 그럼 욕조까지만 데려 줄게. 다 끝나면 전화해.”성도윤이 한발 물러나며 휴대폰을 욕조 옆 선반에 올려놨다.“여기 핸드폰 놔뒀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야.”“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요!”차설아가 손을 휘저으며 성도윤을 재촉했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차설아는 그가 정말 나갔다고 확신하고서야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원래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얬다. 실루엣만 봐도 누구든 넋을 놓을 정도였다.그런데, 옷을 벗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씨, 변태예요?!”“들켰네.”성도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차설아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불만 지르고... 알겠어, 나 간다.”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더 있다가는 차설아가 진짜로 그를 때려눕힐지도 몰랐다.성도윤은 자
“와, 대박! 이런 주제에 감히 남자를 뺏으려고 했다고?”그 여자들은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와 배경윤을 마구 찍어댔다.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으...”배경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차설아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그 여자들과 맞서야 해서 허둥지둥했다.“꺼져!”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도윤이 험상꿎은 얼굴로 난동을 부리던 여자 하나를 단숨에 잡아채 거침없이 밀쳐버렸다. “설아야!”그는 온몸에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서 있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저 없이 배경윤을 밀어내고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았다.“도윤 씨?”차설아가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가 순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가까이 오지 마요. 나 더러워요.”“상관없어.”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두 손을 꼭 쥐고는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그 모습을 본 여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퍼졌고 각종 편집과 조롱으로 도배되었다.온라인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세상에 공평한 법은 있구나. 이게 바로 업보지!][아무리 그래도 팬들이 너무 폭력적이야.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리고 바로 이 영상을 통해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한편, 성진의 차 안.성진은 무료한 듯 핸드폰을 스크롤내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최근 권력 싸움에서 그는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선글라스를 낀 채,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서 있는 차설아.그 순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설아의 눈이...”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그가 가지고 있는 이 눈은 바로 차설아가 준 것이었다.여러 감
“당연히 다르지!”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도윤 씨 한 사람만 좋아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선우시원이든, 성진 씨든, 내 선택은 항상 도윤 씨였어. 하지만 넌 다르잖아... 네 마음은 진찬영 씨한테도 가고 도현 씨한테도 끌리고 있잖아. 솔직히 말하면, 너 둘 다 갖고 싶어 하는 거 맞지?”[너 진짜 무섭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집어내냐!]배경윤은 차설아의 날카로운 분석을 듣고 반박도 못 하고 민망하게 웃었다.사실 그녀도 자신이 왜 이렇게 고민하는지 몰랐고 이제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욕심이 많았던 거였다.“그러니까, 이제 솔직해지자. 굳이 도망갈 필요 없어. 양쪽 다 품으면 되잖아? 왼쪽엔 한 명, 오른쪽엔 한 명. 얼마나 좋아? 만약 내가 두 사람을 좋아할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후궁 3천은 거느렸을걸?”차설아가 반은 농담, 반은 진심으로 말했다.[야, 진짜 맞는 말이네! 네 말 듣고 나니까 머리가 확 맑아졌어!]배경윤은 갑자기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신나게 글을 써 내려갔다.[가만 생각해 보니까, 역사적으로 연애에서 이득 본 건 전부 남자들이었어. 우리는 애 낳아야지, 생리해야지, 시댁 챙겨야지, 애 키워야지, 일도 해야지, 불륜까지 걱정해야지... 정작 이득은 다 남자들이 보고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남편을 두 명쯤 두는 것도 합리적인 거 아니야?]“그치? 나는 진찬영 씨랑 도현 씨 둘 다 괜찮다고 보는데? 한 명은 집에서 살림하고 나 챙겨주고 한 명은 데이트하고... 완벽한 조합 아니야?”[하하하, 그러네, 그러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배경윤은 벌써 왼쪽엔 진찬영을, 오른쪽엔 사도현을 끼고 달콤한 나날을 보내는 상상을 하며 싱글벙글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너 아까 네가 오직 성도윤 한 사람만 좋아했다고 했잖아. 설마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거야?]“어... 그러니까..
불과 20분도 채 안 돼서 배경윤은 성도윤은 물론 그의 주변 사람까지 깡그리 욕해버렸다.차설아는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고 이런 분위기에서 성도윤과 다시 화해했다는 사실을 밝힐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됐고, 너 얘기나 해 봐. 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은 잘 끝났어? 최종 선택은 누구야?”“이 타이밍에 왜 하필 이걸 묻냐, 이 친구야!”배경윤은 코를 킁킁대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또 귤을 집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나 몇 회 봤는데 사도현 씨도 그렇고 진찬영 씨도 그렇고, 둘 다 너한테 진심이더라. 지금 많이 고민되겠어, 맞지?”차설아도 친구의 선택이 궁금했다.“하... 너까지 이 얘기를 꺼내다니, 나 진짜 이 주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퇴원 후 팬들을 만나고 오빠를 만나고 그리고 차설아를 만나기까지, 늘 똑같은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그래, 사도현과 진찬영, 둘 다 진심이었어. 그런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더 좋아하는 걸까?’“설아야, 너라면... 내가 누구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말을 가장 신뢰했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너만 말해 봐. 네가 고르라고 하면 난 그냥 그 사람 선택할게.”“장난치지 마. 이런 중요한 인생 결정을 남한테 맡기면 안 돼. 네가 직접 결정해야지.”“내가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잖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찬영 씨가 더 맞는 것 같아. 여러 면에서 봤을 때 우리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거든. 그런데...”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찬영 씨가 나한테 마취 깨고 난 뒤의 영상을 보여줬거든. 그걸 보고서야 알았어. 내 무의식은 사도현한테 더 끌리고 있더라. 거의 그를 한입에 집어삼킬 기세였어. 이유 없이 스킨십하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나 진짜 미쳤나 봐.”“음, 알겠다. 그러니까 네가 진찬영 씨를 좋아하는 감정은 ‘영혼의 동반자’
두 사람은 점점 지루해졌다.[우리 근처 공원 가볼까? 여기 많이 변했더라. 원래 화학 공장을 지으려던 곳인데 결국 보존돼서 주민 지역으로 바뀌었대. 습지 공원도 새로 조성돼서 꽤 예쁘더라고...]배경윤은 문장을 입력하다 문득 차설아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문장을 고쳐 적었다.[우리 근처 습지 공원 가볼래? 공기가 정말 좋더라.]“좋아!”차설아는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녀도 사실 집에만 계속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가 데리고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참이었다.배경윤은 차설아의 손을 잡고 함께 근처 습지 공원으로 향했다.공원 안에는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었고 호숫가엔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차설아와 배경윤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그곳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호수 중앙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신선한 공기와 은은한 물풀 향기가 물씬 느껴졌고 햇살이 호수 위로 내려앉아 반짝이며 일렁였다.[괜찮으면 눈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배경윤은 귤을 까면서도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타자한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 차설아에게 물었다.“빚을 갚았어.”차설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빚이길래 네 눈까지 내줘야 했어?]“마음의 빚.”[마음의 빚이라니, 누구한테?]배경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무슨 빚을 졌다고 그래? 항상 손해 보는 쪽은 너였잖아.]“성진 씨...”차설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예전에,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자신의 눈을 도윤 씨에게 줬어.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었는데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어. 그의 인생을 망쳐버린 게 결국 나였으니까. 이 은혜를 갚지 않으면 평생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어.”[뭐라고? 네 말은, 네 눈을 성진한테 줬다는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귤을 손에 꽉 쥐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