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유치장에서 나오고 차설아는 다급히 성우에게 물었다.“변호사님, 방금 민이 이모를 빼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임채원의 형량을 추가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죠?”“사실 엄청 간단해요.”성우가 말을 이어갔다.“만약 이모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모님이 임채원을 해쳤다는 주관적 동기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럼 당연히 형사범죄가 성립되지 않겠죠. 반대로 임채원을 명예훼손으로 역으로 고소할 수 있고요.”“만약 이때 민이 이모의 몸까지 좋지 않다면 마침 임채원의 명예훼손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주장할 수 있어요. 그럼 임채원은 형사범죄로 형량을 추가할 수 있고요. 형법상 정신적 피해에 대한 형량은 절대 일반 신체적 피해보다 가볍지 않아요.”차설아는 집중해서 성우의 말을 듣고는 다급하게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지금 해야 하는 건 바로 민이 이모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거나 임채원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승소할 수 있다는 거죠?”“정확해요!”성우가 말을 이어갔다.“제가 생각하기론 임채원이 거짓말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명예훼손이 성립되거든요. 비록 그 두 명의 경찰이 인증으로 채택되었지만 법률상 인증은 아주 주관적이라 물증보다는 효력이 약해요. 보스가 물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린 소송에서 100% 이길 수 있을 거예요!”“그거야 쉽죠, 이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차설아가 듣고는 성우에게 엄지를 척 내밀었다.“역시 성 변호사님은 다르네요. 정말 훌륭한 방법인 것 같아요!”그녀는 지금 성도윤과 이혼하고 성운 법률사무소를 얻게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세 명의 변호사가 그녀의 편이었으니 행정 영역이든 민사 영역이든, 아니면 형사 영역이든 그녀는 막힘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다음 날.차설아는 일찍이 임채원이 있는 병원에 찾아왔다.여전히 두 경찰이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임채원은 곧 자유를 되찾을 생각
차설아가 병실 위쪽에 있는 감시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거짓말은 존재하지 않아. 정의가 살아있다면 당신의 추악한 모습이 곧 세상에 알려지겠지.”임채원은 잠깐 멈칫하더니 크게 웃으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난 또 무슨 대단한 증거가 있다고, 겨우 CCTV 화면이었어? 그래. 그럼 그걸 가져가서 판사님한테 말해, 도대체 누가 무죄인지 두고 보자고!”차설아는 임채원이 이렇게 오만하게 굴지 생각지도 못했다. 전혀 두려움 없는 모습을 보이니 아마 CCTV 화면에 진작 손을 봤을 것이다.하지만 각종 해킹에 능한 그녀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임채원이 CCTV 화면을 삭제했든 없앴든 간에 한 번 존재했다면 그녀는 모두 복원시킬 수 있었다.“임채원 씨가 그렇게 당당하다면 사흘 뒤에 있을 재판에서 한 번 두고 보자고!”차설아가 이 말을 남기고는 쿨하게 자리를 떴다.사흘 뒤에 모든 일이 정리될 것이다.임채원은 분명 그녀의 무지와 독한 마음 때문에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리라 생각했다.엘리베이터를 내릴 때.문이 열리자 마침 임채원을 보러 온 성도윤과 전 시어머니인 소영금과 마주치게 되었다.성도윤과 차설아는 서로 눈이 마주치자 모두 흠칫 놀라게 되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일렁이고 있었다...소영금은 매우 흥분했다. 차설아를 보더니 징그러운 벌레를 본 것처럼 험상궂은 얼굴을 보이며 당장이라도 차설아를 발로 밟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재수탱이가 여길 왜 온 거야? 네 악독한 집사가 채원이를 해친 것도 모자라 너도 나쁜 짓을 하려는 거야?”차설아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이 병원은 여사님이 여신 거예요? 제가 병원으로 왜 왔는지 여사님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나요?”“너!”차설아의 말을 들은 소영금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말주변이 좋은 전 며느리를 혼내주려고 손을 쓰려 했다.“넌 우리 도윤이한테 버림받아서 당연히 나한테 무슨 일을 보고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넌 우리 성씨 가문의 핏줄
차설아는 병원을 떠난 후 택시를 잡아 제일 먼저 차씨 별장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손에 USB 하나를 쥐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병원의 CCTV 기록이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기록을 컴퓨터에 전송하고는 사건 당날의 CCTV 화면을 빠르게 한 번 훑어봤다.아니나 다를까, 열몇 시간의 기록은 모두 삭제되어 겨우 몇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남은 몇십 분 동안의 기록은 모두 민이 이모에 대한 불리한 증거들이었다. 오히려 민이 이모가 임채원을 협박하고 강제로 아이를 지우게 하는 사실이 확실히 ‘증명’되었다.“임채원, 정말 치밀하네!”하지만 차설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안경을 고쳐 쓰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을 컴퓨터 키보드에 툭툭 치며 긴 코드를 입력하며 병원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을 해킹하려고 했다.일반적으로 병원이나 학교, 쇼핑몰과 같은 공공장소에는 모두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CCTV와 같은 영상 자료를 저장하곤 했다.그 말인즉, 한 번 존재했던 영상 자료라면 모두 복구와 탈취가 가능했다.다만 병원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암호화된 것 같았다. 최첨단 암호 키를 사용하여 차설아는 무려 30분 동안 공을 들였는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IP가 잠기고 역추적을 당하게 되었다.“젠장!”조용한 공기 속에는 ‘탁탁탁’ 키보드 소리만 남게 되었다.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듯 차설아는 혼자 치열한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차설아는 자기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바로 시스템 화면을 꺼버렸다.이런 암호 기술은 한눈에 봐도 고수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분명 그녀의 해킹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치밀한 정도로 봐선 임채원 같은 초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분명 성도윤의 뜻이 담겼을 것이다.컴컴한 방 안에는 컴퓨터 화면에서만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에 비친 차설아의 얼굴은 유난히 어둡고 실망스러워 보였다.‘흥, 성도윤, 당신 애인 지키려고 정말 별일을 다 하네!’차설아는 지친 기
차설아는 눈알을 굴리더니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을 받게 돼!”“칫, 성의 없어!”바람은 흥미를 잃은 듯 손을 저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풀썩 눕더니 느긋하게 발을 흔들거리며 말했다.“나 바람의 도움을 받으려면 최소 1억 달라는 내놓아야 한다고 말이야. 공짜로 내 도움을 받을 생각하지 마.”차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녀석 맞을 짓만 골라 하네.’하지만 도움을 부탁하는 처지라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그럼 네가 직접 말해봐. 뭘 원하는데?”그 말은 바람의 흥미를 돋았다. 그는 자리에 바로 앉더니 오래간만에 진지한 얼굴을 보였다.“너도 알다시피 내가 1, 2년 뒤면 서른이거든. 집에서 여자 없냐고 맨날 물어봐. 그러니까...”“싫어!”차설아는 바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X’를 그리며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꿈도 꾸지 마. 난 이제 연애는 그만하고 사업만 열심히 할 거라고. 너와 내가 친구 사이인 건 괜찮지만 부부는 절대 할 수 없다고!”바람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너 김칫국 마신 거야. 너한테 호감이 있는 건 맞지만 너랑 결혼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고. 나 비혼주의자야.”“캑캑, 그런 거였어?”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내가 못 살아, 정말 부끄러워. 성도윤한테 자뻑하는 병이 옮았나? 왜 사람들이 다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는 거지? 김칫국 마시고 창피만 당했네.’“그럼... 그럼 뭘 원하는데?”차설아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 바람에게 물었다.“할아버지가 워낙 재촉하셔서. 얼마 뒤면 할아버지 여든 살 생신이거든. 나보고 꼭 여자친구를 데려오라고 하셨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여자가 너밖에 없어서...”“그러니까 여자친구인 척을 해달라고?”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며 고민에 잠기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나한테 맡겨. 신분이 많은데 하나도 안 들키게 된 건 내가 워낙 연
바람이 떠난 뒤.커다란 별장에는 또 차설아 혼자만 남게 되었다.그녀는 여느 밤처럼 창가에 서서 창밖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밤의 달은 정말 밝고 둥글었다. 마치 칠흑 같은 밤하늘에 예쁘고 밝은 구슬이 하나 떠있는 것 같았는데 왠지 마음은 씁쓸하게 느껴졌다.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그날 밤 같이 채팅을 했던 낯선 사람이 생각났다.그의 프로필 사진도 밝은 달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보낸 유일한 메시지도 밝은 달 사진이었다.차설아가 휴대폰을 들고는 그 밝은 달 사진을 찾아 확대했다.찍은 각도를 보아하니 아마 어느 오피스텔의 창가 앞에서 달의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상대도 고된 사람에 치이고 사는, 늦은 밤까지 야근하는 직장인이란 말인가?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더니 무작정 달을 찍어 상대에게 사진을 보냈다.상대와 얘기를 얼마 나누지도 않고, 또 대부분의 시간에 그녀만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차설아는 상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든 반드시 답장이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이상하게 들었다.한마디 위로를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에 차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몇 분 후, 휴대폰에 알림음이 울렸다.“잠이 안 와요?”간단한 말 한마디였지만 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상대가 도도하고 과묵하지만, 동시에 믿음이 가는 듬직한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네, 요즘 고민거리가 많아서요.”“어떤 고민거리요?”“제가 엄청 싫어하는 남자가 있거든요. 계속 그 남자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요. 세상에서 유일한 제 가족을 모함했어요. 그래서 유일한 제 가족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어요. 또 지금 이곳을 무척이나 떠나고 싶지만 당분간은 떠날 수 없을 것 같고요. 모든 게 다 엉망이에요!”차설아가 수심에 찬 얼굴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마치 한에 맺힌 사람처럼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불현듯 상대가 귀찮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차설아는 황급히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하지만 저는
“그게...”어안이 벙벙한 차설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알고 있는 임채원이라면 결코 양심의 가책으로 고소를 취하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럼 성도윤의 명령으로 고소가 취하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을 것이다. 원래 민이 이모로 그녀를 협박하려고 했던 차갑고 무정한 남자가 왜 먼저 한발 물러선 것일까?설마 어젯밤 바람이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에 해킹한 일이 성도윤에게 들킨 건 아닐까?그 생각에 차설아는 바로 바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너머로 바람의 나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늦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벌써 나 보고 싶었어, 누나?”“장난치지 말고. 하나 물어볼 거 있어. 어젯밤 네가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에 해킹한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 거 아니야?”“왜 이래? 갑자기 웬 난리야?”“잔말 말고 내 말에 대답해.”“아니야. 들키지 않았어.”바람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암호 키는 내가 설계한 거야. 내가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거라고.”차설아는 침묵을 지키더니 미간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겼다.“그래, 알겠어.”“왜 그래? 너...”바람이 뭘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차설아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왜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바람은 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 밖에 놓인 팔뚝 각선미는 완벽에 가까웠다. 웬만한 남자 모델보다 근육이 탄탄했고 멋있어 보였다.그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말했다.“고양이같이 앙칼진 구석이 있는 여자네!”다른 한편, 차설아는 손톱을 깨물면서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CCTV 화면을 복원했다는 사실이 들키지 않았다면 성도윤은 민이 이모를 놓아줄 이유가 없겠는데,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나?’“아가씨,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해요. 저는 제가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제 일로 전혀 고민할 필요 없어요...”민이 이모의 위로에 차설아는 갑자기 어젯밤 낯선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고민이 사라지게 될지 누가 알아요.”정
성대 그룹에 도착한 차설아는 평소처럼 모든 직원의 환대를 받았다.예서는 성도윤의 비서로서, 또 성도윤과 차설아의 1호 커플 팬으로서 두 눈을 반짝이며 열정적으로 차설아를 안내했다.“사모님,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시니 먼저 사무실로 가서 기다리시는 건 어때요? 아니면 제가 대표님을 재촉해 드릴까요?”“제가 사무실로 갈게요.”“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예서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 사무실은 아무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모님인 차설아는 달랐다. 그녀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차설아는 성도윤의 사무실에 도착하고는 의자에 풀썩 앉아 좌우로 돌면서 편안함을 느꼈다.그녀는 갑자기 책상 위의 유리 재떨이를 발견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예서 씨, 이 재떨이 설마... 제가 전에 선물했던 그거예요?”예서는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네, 맞습니다, 사모님.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이 재떨이는 사모님께서 1년 전에 대표님에게 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대표님이 아주 잘 쓰고 계세요.”“그리고 이 다육이도 엄청 좋아하신답니다. 매일 정성으로 가꾸시고, 가끔 사진을 찍기도 하십니다...”“이 키보드도 대표님께서 애용하고 계십니다. 키 캡이 하나 부러졌는데도 아까우신지 바꾸지 않으시고 계십니다!”“설마요.”예서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대표님처럼 까다로운 사람이 왜 내가 준 걸 좋아하겠어요. 내가 보기에도 엄청 유치한 것들인데, 막 소름이 돋으려고 그래요!”“대표님도 전엔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 들어 자꾸 저희보고 사모님께서 주신 선물을 꺼내보라고 하셨어요. 특히 커피요... 꼭 사모님께서 선물하신 거로만 내오라고 하셔서 저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사모님이 좋으니까 사모님이 주신 선물도 모두 좋으신가 봐요!”“캑캑!”차설아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 뻔했다.‘예서 씨, 상상력은 대단하네. 나랑 성도윤은 서로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나를
“푸흡!”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다른 사람의 입에서 뱉어낸 말이면 모르겠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성도윤에게서 이 말을 들으니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하하하, 대단한 성 대표님한테서 내가 이런 말을 듣다니. 혹시 누구한테 협박당한 거야? 왜 이런 농담을 하는 거지?”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무표정으로 깔깔 웃는 여자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뭐가 그렇게 웃겨?”“안 웃겨?”차설아는 겨우 웃음을 거두고는 비꼬며 말했다.“내가 고소를 취하할 수 있도록 정말 별짓을 다 하네. 나랑 4년 동안 부부 사이였으면서 그렇게 나를 몰라?”“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해주면 내가 예전처럼 당신한테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어? 순순히 당신 말에 따라줄 것 같았냐고?”성도윤의 우스운 생각에 차설아는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예전에야 당신이 내 남편이었으니까 모든 걸 당신 뜻에 따랐어. 하지만 지금 당신은 나랑 그 어떤 관계도 없는 전 남편뿐이라고. 당신 요구를 들어줄 의무도 없어. 내가 왜 당신 뜻에 따를 거라고 생각해?”차설아의 말은 비수처럼 성도윤의 마음에 박혔다.크게 상처는 받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허무함에 그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그는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다, 아주 좋은 여자를 스스로 보내줬다는 것을...성도윤은 깊은 눈망울을 보이더니 피식 코웃음을 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나 성도윤이 당신 눈에는 그렇게 못난 사람이야?”차설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당연하지.”“흥, 아직도 자기가 똑똑한 줄 아나 봐.”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작정하고 임채원을 구하려고 하면 당신은 임채원에게 전혀 손을 쓸 수도 없을 거야. 당신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끈 것도 당신이 화를 좀 풀었으면 해서야. 하지만 지금은... 더는 인내할 수가 없어. 모든 걸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차설아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모르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되물었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