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병원을 떠난 후 택시를 잡아 제일 먼저 차씨 별장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손에 USB 하나를 쥐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병원의 CCTV 기록이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기록을 컴퓨터에 전송하고는 사건 당날의 CCTV 화면을 빠르게 한 번 훑어봤다.아니나 다를까, 열몇 시간의 기록은 모두 삭제되어 겨우 몇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남은 몇십 분 동안의 기록은 모두 민이 이모에 대한 불리한 증거들이었다. 오히려 민이 이모가 임채원을 협박하고 강제로 아이를 지우게 하는 사실이 확실히 ‘증명’되었다.“임채원, 정말 치밀하네!”하지만 차설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안경을 고쳐 쓰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을 컴퓨터 키보드에 툭툭 치며 긴 코드를 입력하며 병원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을 해킹하려고 했다.일반적으로 병원이나 학교, 쇼핑몰과 같은 공공장소에는 모두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CCTV와 같은 영상 자료를 저장하곤 했다.그 말인즉, 한 번 존재했던 영상 자료라면 모두 복구와 탈취가 가능했다.다만 병원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암호화된 것 같았다. 최첨단 암호 키를 사용하여 차설아는 무려 30분 동안 공을 들였는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IP가 잠기고 역추적을 당하게 되었다.“젠장!”조용한 공기 속에는 ‘탁탁탁’ 키보드 소리만 남게 되었다.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듯 차설아는 혼자 치열한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차설아는 자기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바로 시스템 화면을 꺼버렸다.이런 암호 기술은 한눈에 봐도 고수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분명 그녀의 해킹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치밀한 정도로 봐선 임채원 같은 초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분명 성도윤의 뜻이 담겼을 것이다.컴컴한 방 안에는 컴퓨터 화면에서만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에 비친 차설아의 얼굴은 유난히 어둡고 실망스러워 보였다.‘흥, 성도윤, 당신 애인 지키려고 정말 별일을 다 하네!’차설아는 지친 기
차설아는 눈알을 굴리더니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을 받게 돼!”“칫, 성의 없어!”바람은 흥미를 잃은 듯 손을 저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풀썩 눕더니 느긋하게 발을 흔들거리며 말했다.“나 바람의 도움을 받으려면 최소 1억 달라는 내놓아야 한다고 말이야. 공짜로 내 도움을 받을 생각하지 마.”차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녀석 맞을 짓만 골라 하네.’하지만 도움을 부탁하는 처지라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그럼 네가 직접 말해봐. 뭘 원하는데?”그 말은 바람의 흥미를 돋았다. 그는 자리에 바로 앉더니 오래간만에 진지한 얼굴을 보였다.“너도 알다시피 내가 1, 2년 뒤면 서른이거든. 집에서 여자 없냐고 맨날 물어봐. 그러니까...”“싫어!”차설아는 바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X’를 그리며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꿈도 꾸지 마. 난 이제 연애는 그만하고 사업만 열심히 할 거라고. 너와 내가 친구 사이인 건 괜찮지만 부부는 절대 할 수 없다고!”바람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너 김칫국 마신 거야. 너한테 호감이 있는 건 맞지만 너랑 결혼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고. 나 비혼주의자야.”“캑캑, 그런 거였어?”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내가 못 살아, 정말 부끄러워. 성도윤한테 자뻑하는 병이 옮았나? 왜 사람들이 다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는 거지? 김칫국 마시고 창피만 당했네.’“그럼... 그럼 뭘 원하는데?”차설아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 바람에게 물었다.“할아버지가 워낙 재촉하셔서. 얼마 뒤면 할아버지 여든 살 생신이거든. 나보고 꼭 여자친구를 데려오라고 하셨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여자가 너밖에 없어서...”“그러니까 여자친구인 척을 해달라고?”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며 고민에 잠기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나한테 맡겨. 신분이 많은데 하나도 안 들키게 된 건 내가 워낙 연
바람이 떠난 뒤.커다란 별장에는 또 차설아 혼자만 남게 되었다.그녀는 여느 밤처럼 창가에 서서 창밖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밤의 달은 정말 밝고 둥글었다. 마치 칠흑 같은 밤하늘에 예쁘고 밝은 구슬이 하나 떠있는 것 같았는데 왠지 마음은 씁쓸하게 느껴졌다.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그날 밤 같이 채팅을 했던 낯선 사람이 생각났다.그의 프로필 사진도 밝은 달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보낸 유일한 메시지도 밝은 달 사진이었다.차설아가 휴대폰을 들고는 그 밝은 달 사진을 찾아 확대했다.찍은 각도를 보아하니 아마 어느 오피스텔의 창가 앞에서 달의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상대도 고된 사람에 치이고 사는, 늦은 밤까지 야근하는 직장인이란 말인가?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더니 무작정 달을 찍어 상대에게 사진을 보냈다.상대와 얘기를 얼마 나누지도 않고, 또 대부분의 시간에 그녀만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차설아는 상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든 반드시 답장이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이상하게 들었다.한마디 위로를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에 차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몇 분 후, 휴대폰에 알림음이 울렸다.“잠이 안 와요?”간단한 말 한마디였지만 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상대가 도도하고 과묵하지만, 동시에 믿음이 가는 듬직한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네, 요즘 고민거리가 많아서요.”“어떤 고민거리요?”“제가 엄청 싫어하는 남자가 있거든요. 계속 그 남자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요. 세상에서 유일한 제 가족을 모함했어요. 그래서 유일한 제 가족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어요. 또 지금 이곳을 무척이나 떠나고 싶지만 당분간은 떠날 수 없을 것 같고요. 모든 게 다 엉망이에요!”차설아가 수심에 찬 얼굴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마치 한에 맺힌 사람처럼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불현듯 상대가 귀찮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차설아는 황급히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하지만 저는
“그게...”어안이 벙벙한 차설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알고 있는 임채원이라면 결코 양심의 가책으로 고소를 취하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럼 성도윤의 명령으로 고소가 취하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을 것이다. 원래 민이 이모로 그녀를 협박하려고 했던 차갑고 무정한 남자가 왜 먼저 한발 물러선 것일까?설마 어젯밤 바람이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에 해킹한 일이 성도윤에게 들킨 건 아닐까?그 생각에 차설아는 바로 바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너머로 바람의 나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늦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벌써 나 보고 싶었어, 누나?”“장난치지 말고. 하나 물어볼 거 있어. 어젯밤 네가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에 해킹한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 거 아니야?”“왜 이래? 갑자기 웬 난리야?”“잔말 말고 내 말에 대답해.”“아니야. 들키지 않았어.”바람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암호 키는 내가 설계한 거야. 내가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거라고.”차설아는 침묵을 지키더니 미간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겼다.“그래, 알겠어.”“왜 그래? 너...”바람이 뭘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차설아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왜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바람은 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 밖에 놓인 팔뚝 각선미는 완벽에 가까웠다. 웬만한 남자 모델보다 근육이 탄탄했고 멋있어 보였다.그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말했다.“고양이같이 앙칼진 구석이 있는 여자네!”다른 한편, 차설아는 손톱을 깨물면서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CCTV 화면을 복원했다는 사실이 들키지 않았다면 성도윤은 민이 이모를 놓아줄 이유가 없겠는데,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나?’“아가씨,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해요. 저는 제가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제 일로 전혀 고민할 필요 없어요...”민이 이모의 위로에 차설아는 갑자기 어젯밤 낯선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고민이 사라지게 될지 누가 알아요.”정
성대 그룹에 도착한 차설아는 평소처럼 모든 직원의 환대를 받았다.예서는 성도윤의 비서로서, 또 성도윤과 차설아의 1호 커플 팬으로서 두 눈을 반짝이며 열정적으로 차설아를 안내했다.“사모님,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시니 먼저 사무실로 가서 기다리시는 건 어때요? 아니면 제가 대표님을 재촉해 드릴까요?”“제가 사무실로 갈게요.”“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예서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 사무실은 아무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모님인 차설아는 달랐다. 그녀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차설아는 성도윤의 사무실에 도착하고는 의자에 풀썩 앉아 좌우로 돌면서 편안함을 느꼈다.그녀는 갑자기 책상 위의 유리 재떨이를 발견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예서 씨, 이 재떨이 설마... 제가 전에 선물했던 그거예요?”예서는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네, 맞습니다, 사모님.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이 재떨이는 사모님께서 1년 전에 대표님에게 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대표님이 아주 잘 쓰고 계세요.”“그리고 이 다육이도 엄청 좋아하신답니다. 매일 정성으로 가꾸시고, 가끔 사진을 찍기도 하십니다...”“이 키보드도 대표님께서 애용하고 계십니다. 키 캡이 하나 부러졌는데도 아까우신지 바꾸지 않으시고 계십니다!”“설마요.”예서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대표님처럼 까다로운 사람이 왜 내가 준 걸 좋아하겠어요. 내가 보기에도 엄청 유치한 것들인데, 막 소름이 돋으려고 그래요!”“대표님도 전엔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 들어 자꾸 저희보고 사모님께서 주신 선물을 꺼내보라고 하셨어요. 특히 커피요... 꼭 사모님께서 선물하신 거로만 내오라고 하셔서 저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사모님이 좋으니까 사모님이 주신 선물도 모두 좋으신가 봐요!”“캑캑!”차설아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 뻔했다.‘예서 씨, 상상력은 대단하네. 나랑 성도윤은 서로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나를
“푸흡!”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다른 사람의 입에서 뱉어낸 말이면 모르겠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성도윤에게서 이 말을 들으니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하하하, 대단한 성 대표님한테서 내가 이런 말을 듣다니. 혹시 누구한테 협박당한 거야? 왜 이런 농담을 하는 거지?”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무표정으로 깔깔 웃는 여자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뭐가 그렇게 웃겨?”“안 웃겨?”차설아는 겨우 웃음을 거두고는 비꼬며 말했다.“내가 고소를 취하할 수 있도록 정말 별짓을 다 하네. 나랑 4년 동안 부부 사이였으면서 그렇게 나를 몰라?”“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해주면 내가 예전처럼 당신한테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어? 순순히 당신 말에 따라줄 것 같았냐고?”성도윤의 우스운 생각에 차설아는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예전에야 당신이 내 남편이었으니까 모든 걸 당신 뜻에 따랐어. 하지만 지금 당신은 나랑 그 어떤 관계도 없는 전 남편뿐이라고. 당신 요구를 들어줄 의무도 없어. 내가 왜 당신 뜻에 따를 거라고 생각해?”차설아의 말은 비수처럼 성도윤의 마음에 박혔다.크게 상처는 받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허무함에 그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그는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다, 아주 좋은 여자를 스스로 보내줬다는 것을...성도윤은 깊은 눈망울을 보이더니 피식 코웃음을 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나 성도윤이 당신 눈에는 그렇게 못난 사람이야?”차설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당연하지.”“흥, 아직도 자기가 똑똑한 줄 아나 봐.”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작정하고 임채원을 구하려고 하면 당신은 임채원에게 전혀 손을 쓸 수도 없을 거야. 당신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끈 것도 당신이 화를 좀 풀었으면 해서야. 하지만 지금은... 더는 인내할 수가 없어. 모든 걸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차설아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모르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되물었
깊은 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개인 비행장엔 흰색 비행기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임채원은 우람한 몸집의 남자들의 호송을 받으며 부들부들 떨면서 비행기에 올랐다.“도윤아, 네가 날 구해줄 줄 알았어!”겁에 질려 있던 임채원은 비행기 안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는 감격에 겨워 그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성도윤의 표정은 싸늘했고 심지어 짜증도 섞여 있었다.“오늘 밤, 저 사람들이 널 성안시로 보낼 거야. 거기서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외부와 연락하지도 말고.”남자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그 말을 들은 임채원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도윤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날 숨기려고 하는 거야? 그럼 감옥에 가는 것과 뭐가 달라?”성도윤은 별 표정 없이 대답했다.“원하면 감옥에 가도 돼!”“싫어!”임채원은 감정이 격해지더니 억울한 척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도윤아, 도대체 왜 그래? 왜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구는 건데?”“내가 억울하다는 걸 너도 알잖아. 나 누명 벗는 걸 도와줘야 하지 않아? 그런데 날 왜 숨기는 거야? 내가 부끄러운 거야? 이러면 나한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불공평하다고?”성도윤이 차갑게 말했다.“차설아 앞에서 공평을 논하는 게 가장 불공평한 거 아니야?”임채원은 남자의 차가운 태도에 잔뜩 놀라 마른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그게 무슨 말이야?”그녀는 이 남자가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넌 우리 형의 아이를 임신했어. 우리 형의 유일한 아이야.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선 것이고.”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더니 일침을 가했다.“넌 그 아이를 방패로 삼아 차설아의 자리를 뺏었어. 넌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해?”“나, 그게...”임채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네가 조용히만 있었다면 난 더 따지지도 않았을 거야. 너도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얻
“뭐? 자살했다고?”차설아는 법원으로 가는 길에 전화로 이 소식을 받고는 충격에 휩싸였다.그녀의 옆에 앉은 성우는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어요?”“법원 쪽에서 소식이 전해졌는데 임채원이 오늘 새벽에 자살했다고 해요. 시신은 이미 화장했다고 하고요.”“그럴 리가 없어요!”성우가 단호하게 말했다.“임채원 씨는 사건 용의자예요. 아직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설령 정말 자살했다고 하더라도 법률상 법정 수사 기간이 지나야만 시신을 처리할 수 있어요. 이렇게 빨리 화장할 수 없다고요. 아니면...”“상대가 일부러 시신을 훼손하려는 것 아닐까요? 혹은 임채원 씨를 따로 빼돌렸을 수도 있고요!”“맞아요!”성우는 워낙 많은 형사사건을 처리하다 보니 각종 기괴한 상황에 부딪혔었다. 재판을 앞두고 용의자가 갑자기 ‘자살’하는 상황도 처음 겪는 게 아니었다.차설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더니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흥, 어쩐지. 어제 성도윤이 왜 갑자기 민이 이모를 놓아줬는지 알 것 같네요. 이런 수작을 부리려고 했으니 말이에요.”“솔직히 정말 치사하지 않나요? 변호사를 찾아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칠 것이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다니, 정말 못났네요!”차설아는 성도윤이 이렇게 못나 보이긴 처음이었다.그가 임채원과 같은 여우 년을 위해 ‘자살’하는 수법을 생각해 내다니,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린 셈이라 차설아는 그런 성도윤이 비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보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성 대표님도 실력이 딱 거기까지겠죠. 경찰부터 판사까지 누가 감히 성 대표님을 건들 수 있겠어요?”성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내밀고는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계속 기소하고 싶다면 보스가 승소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요. 어떻게 할래요?”차설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필요 없어요!”차설아는 임채원을 골탕 먹이려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인 것이었다.임채원은 ‘가짜 죽음’까지 하며 내뺐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