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병원을 떠난 후 택시를 잡아 제일 먼저 차씨 별장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손에 USB 하나를 쥐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병원의 CCTV 기록이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기록을 컴퓨터에 전송하고는 사건 당날의 CCTV 화면을 빠르게 한 번 훑어봤다.아니나 다를까, 열몇 시간의 기록은 모두 삭제되어 겨우 몇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남은 몇십 분 동안의 기록은 모두 민이 이모에 대한 불리한 증거들이었다. 오히려 민이 이모가 임채원을 협박하고 강제로 아이를 지우게 하는 사실이 확실히 ‘증명’되었다.“임채원, 정말 치밀하네!”하지만 차설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안경을 고쳐 쓰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을 컴퓨터 키보드에 툭툭 치며 긴 코드를 입력하며 병원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을 해킹하려고 했다.일반적으로 병원이나 학교, 쇼핑몰과 같은 공공장소에는 모두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CCTV와 같은 영상 자료를 저장하곤 했다.그 말인즉, 한 번 존재했던 영상 자료라면 모두 복구와 탈취가 가능했다.다만 병원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암호화된 것 같았다. 최첨단 암호 키를 사용하여 차설아는 무려 30분 동안 공을 들였는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IP가 잠기고 역추적을 당하게 되었다.“젠장!”조용한 공기 속에는 ‘탁탁탁’ 키보드 소리만 남게 되었다.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듯 차설아는 혼자 치열한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차설아는 자기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바로 시스템 화면을 꺼버렸다.이런 암호 기술은 한눈에 봐도 고수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분명 그녀의 해킹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치밀한 정도로 봐선 임채원 같은 초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분명 성도윤의 뜻이 담겼을 것이다.컴컴한 방 안에는 컴퓨터 화면에서만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에 비친 차설아의 얼굴은 유난히 어둡고 실망스러워 보였다.‘흥, 성도윤, 당신 애인 지키려고 정말 별일을 다 하네!’차설아는 지친 기
차설아는 눈알을 굴리더니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을 받게 돼!”“칫, 성의 없어!”바람은 흥미를 잃은 듯 손을 저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풀썩 눕더니 느긋하게 발을 흔들거리며 말했다.“나 바람의 도움을 받으려면 최소 1억 달라는 내놓아야 한다고 말이야. 공짜로 내 도움을 받을 생각하지 마.”차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녀석 맞을 짓만 골라 하네.’하지만 도움을 부탁하는 처지라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그럼 네가 직접 말해봐. 뭘 원하는데?”그 말은 바람의 흥미를 돋았다. 그는 자리에 바로 앉더니 오래간만에 진지한 얼굴을 보였다.“너도 알다시피 내가 1, 2년 뒤면 서른이거든. 집에서 여자 없냐고 맨날 물어봐. 그러니까...”“싫어!”차설아는 바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X’를 그리며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꿈도 꾸지 마. 난 이제 연애는 그만하고 사업만 열심히 할 거라고. 너와 내가 친구 사이인 건 괜찮지만 부부는 절대 할 수 없다고!”바람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너 김칫국 마신 거야. 너한테 호감이 있는 건 맞지만 너랑 결혼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고. 나 비혼주의자야.”“캑캑, 그런 거였어?”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내가 못 살아, 정말 부끄러워. 성도윤한테 자뻑하는 병이 옮았나? 왜 사람들이 다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는 거지? 김칫국 마시고 창피만 당했네.’“그럼... 그럼 뭘 원하는데?”차설아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 바람에게 물었다.“할아버지가 워낙 재촉하셔서. 얼마 뒤면 할아버지 여든 살 생신이거든. 나보고 꼭 여자친구를 데려오라고 하셨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여자가 너밖에 없어서...”“그러니까 여자친구인 척을 해달라고?”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며 고민에 잠기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나한테 맡겨. 신분이 많은데 하나도 안 들키게 된 건 내가 워낙 연
바람이 떠난 뒤.커다란 별장에는 또 차설아 혼자만 남게 되었다.그녀는 여느 밤처럼 창가에 서서 창밖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밤의 달은 정말 밝고 둥글었다. 마치 칠흑 같은 밤하늘에 예쁘고 밝은 구슬이 하나 떠있는 것 같았는데 왠지 마음은 씁쓸하게 느껴졌다.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그날 밤 같이 채팅을 했던 낯선 사람이 생각났다.그의 프로필 사진도 밝은 달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보낸 유일한 메시지도 밝은 달 사진이었다.차설아가 휴대폰을 들고는 그 밝은 달 사진을 찾아 확대했다.찍은 각도를 보아하니 아마 어느 오피스텔의 창가 앞에서 달의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상대도 고된 사람에 치이고 사는, 늦은 밤까지 야근하는 직장인이란 말인가?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더니 무작정 달을 찍어 상대에게 사진을 보냈다.상대와 얘기를 얼마 나누지도 않고, 또 대부분의 시간에 그녀만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차설아는 상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든 반드시 답장이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이상하게 들었다.한마디 위로를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에 차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몇 분 후, 휴대폰에 알림음이 울렸다.“잠이 안 와요?”간단한 말 한마디였지만 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상대가 도도하고 과묵하지만, 동시에 믿음이 가는 듬직한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네, 요즘 고민거리가 많아서요.”“어떤 고민거리요?”“제가 엄청 싫어하는 남자가 있거든요. 계속 그 남자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요. 세상에서 유일한 제 가족을 모함했어요. 그래서 유일한 제 가족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어요. 또 지금 이곳을 무척이나 떠나고 싶지만 당분간은 떠날 수 없을 것 같고요. 모든 게 다 엉망이에요!”차설아가 수심에 찬 얼굴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마치 한에 맺힌 사람처럼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불현듯 상대가 귀찮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차설아는 황급히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하지만 저는
“그게...”어안이 벙벙한 차설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알고 있는 임채원이라면 결코 양심의 가책으로 고소를 취하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럼 성도윤의 명령으로 고소가 취하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을 것이다. 원래 민이 이모로 그녀를 협박하려고 했던 차갑고 무정한 남자가 왜 먼저 한발 물러선 것일까?설마 어젯밤 바람이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에 해킹한 일이 성도윤에게 들킨 건 아닐까?그 생각에 차설아는 바로 바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너머로 바람의 나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늦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벌써 나 보고 싶었어, 누나?”“장난치지 말고. 하나 물어볼 거 있어. 어젯밤 네가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에 해킹한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 거 아니야?”“왜 이래? 갑자기 웬 난리야?”“잔말 말고 내 말에 대답해.”“아니야. 들키지 않았어.”바람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암호 키는 내가 설계한 거야. 내가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거라고.”차설아는 침묵을 지키더니 미간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겼다.“그래, 알겠어.”“왜 그래? 너...”바람이 뭘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차설아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왜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바람은 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 밖에 놓인 팔뚝 각선미는 완벽에 가까웠다. 웬만한 남자 모델보다 근육이 탄탄했고 멋있어 보였다.그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말했다.“고양이같이 앙칼진 구석이 있는 여자네!”다른 한편, 차설아는 손톱을 깨물면서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CCTV 화면을 복원했다는 사실이 들키지 않았다면 성도윤은 민이 이모를 놓아줄 이유가 없겠는데,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나?’“아가씨,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해요. 저는 제가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제 일로 전혀 고민할 필요 없어요...”민이 이모의 위로에 차설아는 갑자기 어젯밤 낯선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고민이 사라지게 될지 누가 알아요.”정
성대 그룹에 도착한 차설아는 평소처럼 모든 직원의 환대를 받았다.예서는 성도윤의 비서로서, 또 성도윤과 차설아의 1호 커플 팬으로서 두 눈을 반짝이며 열정적으로 차설아를 안내했다.“사모님,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시니 먼저 사무실로 가서 기다리시는 건 어때요? 아니면 제가 대표님을 재촉해 드릴까요?”“제가 사무실로 갈게요.”“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예서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 사무실은 아무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모님인 차설아는 달랐다. 그녀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차설아는 성도윤의 사무실에 도착하고는 의자에 풀썩 앉아 좌우로 돌면서 편안함을 느꼈다.그녀는 갑자기 책상 위의 유리 재떨이를 발견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예서 씨, 이 재떨이 설마... 제가 전에 선물했던 그거예요?”예서는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네, 맞습니다, 사모님.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이 재떨이는 사모님께서 1년 전에 대표님에게 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대표님이 아주 잘 쓰고 계세요.”“그리고 이 다육이도 엄청 좋아하신답니다. 매일 정성으로 가꾸시고, 가끔 사진을 찍기도 하십니다...”“이 키보드도 대표님께서 애용하고 계십니다. 키 캡이 하나 부러졌는데도 아까우신지 바꾸지 않으시고 계십니다!”“설마요.”예서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대표님처럼 까다로운 사람이 왜 내가 준 걸 좋아하겠어요. 내가 보기에도 엄청 유치한 것들인데, 막 소름이 돋으려고 그래요!”“대표님도 전엔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 들어 자꾸 저희보고 사모님께서 주신 선물을 꺼내보라고 하셨어요. 특히 커피요... 꼭 사모님께서 선물하신 거로만 내오라고 하셔서 저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사모님이 좋으니까 사모님이 주신 선물도 모두 좋으신가 봐요!”“캑캑!”차설아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 뻔했다.‘예서 씨, 상상력은 대단하네. 나랑 성도윤은 서로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나를
“푸흡!”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다른 사람의 입에서 뱉어낸 말이면 모르겠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성도윤에게서 이 말을 들으니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하하하, 대단한 성 대표님한테서 내가 이런 말을 듣다니. 혹시 누구한테 협박당한 거야? 왜 이런 농담을 하는 거지?”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무표정으로 깔깔 웃는 여자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뭐가 그렇게 웃겨?”“안 웃겨?”차설아는 겨우 웃음을 거두고는 비꼬며 말했다.“내가 고소를 취하할 수 있도록 정말 별짓을 다 하네. 나랑 4년 동안 부부 사이였으면서 그렇게 나를 몰라?”“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해주면 내가 예전처럼 당신한테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어? 순순히 당신 말에 따라줄 것 같았냐고?”성도윤의 우스운 생각에 차설아는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예전에야 당신이 내 남편이었으니까 모든 걸 당신 뜻에 따랐어. 하지만 지금 당신은 나랑 그 어떤 관계도 없는 전 남편뿐이라고. 당신 요구를 들어줄 의무도 없어. 내가 왜 당신 뜻에 따를 거라고 생각해?”차설아의 말은 비수처럼 성도윤의 마음에 박혔다.크게 상처는 받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허무함에 그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그는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다, 아주 좋은 여자를 스스로 보내줬다는 것을...성도윤은 깊은 눈망울을 보이더니 피식 코웃음을 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나 성도윤이 당신 눈에는 그렇게 못난 사람이야?”차설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당연하지.”“흥, 아직도 자기가 똑똑한 줄 아나 봐.”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작정하고 임채원을 구하려고 하면 당신은 임채원에게 전혀 손을 쓸 수도 없을 거야. 당신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끈 것도 당신이 화를 좀 풀었으면 해서야. 하지만 지금은... 더는 인내할 수가 없어. 모든 걸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차설아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모르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되물었
깊은 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개인 비행장엔 흰색 비행기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임채원은 우람한 몸집의 남자들의 호송을 받으며 부들부들 떨면서 비행기에 올랐다.“도윤아, 네가 날 구해줄 줄 알았어!”겁에 질려 있던 임채원은 비행기 안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는 감격에 겨워 그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성도윤의 표정은 싸늘했고 심지어 짜증도 섞여 있었다.“오늘 밤, 저 사람들이 널 성안시로 보낼 거야. 거기서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외부와 연락하지도 말고.”남자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그 말을 들은 임채원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도윤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날 숨기려고 하는 거야? 그럼 감옥에 가는 것과 뭐가 달라?”성도윤은 별 표정 없이 대답했다.“원하면 감옥에 가도 돼!”“싫어!”임채원은 감정이 격해지더니 억울한 척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도윤아, 도대체 왜 그래? 왜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구는 건데?”“내가 억울하다는 걸 너도 알잖아. 나 누명 벗는 걸 도와줘야 하지 않아? 그런데 날 왜 숨기는 거야? 내가 부끄러운 거야? 이러면 나한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불공평하다고?”성도윤이 차갑게 말했다.“차설아 앞에서 공평을 논하는 게 가장 불공평한 거 아니야?”임채원은 남자의 차가운 태도에 잔뜩 놀라 마른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그게 무슨 말이야?”그녀는 이 남자가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넌 우리 형의 아이를 임신했어. 우리 형의 유일한 아이야.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선 것이고.”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더니 일침을 가했다.“넌 그 아이를 방패로 삼아 차설아의 자리를 뺏었어. 넌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해?”“나, 그게...”임채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네가 조용히만 있었다면 난 더 따지지도 않았을 거야. 너도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얻
“뭐? 자살했다고?”차설아는 법원으로 가는 길에 전화로 이 소식을 받고는 충격에 휩싸였다.그녀의 옆에 앉은 성우는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어요?”“법원 쪽에서 소식이 전해졌는데 임채원이 오늘 새벽에 자살했다고 해요. 시신은 이미 화장했다고 하고요.”“그럴 리가 없어요!”성우가 단호하게 말했다.“임채원 씨는 사건 용의자예요. 아직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설령 정말 자살했다고 하더라도 법률상 법정 수사 기간이 지나야만 시신을 처리할 수 있어요. 이렇게 빨리 화장할 수 없다고요. 아니면...”“상대가 일부러 시신을 훼손하려는 것 아닐까요? 혹은 임채원 씨를 따로 빼돌렸을 수도 있고요!”“맞아요!”성우는 워낙 많은 형사사건을 처리하다 보니 각종 기괴한 상황에 부딪혔었다. 재판을 앞두고 용의자가 갑자기 ‘자살’하는 상황도 처음 겪는 게 아니었다.차설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더니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흥, 어쩐지. 어제 성도윤이 왜 갑자기 민이 이모를 놓아줬는지 알 것 같네요. 이런 수작을 부리려고 했으니 말이에요.”“솔직히 정말 치사하지 않나요? 변호사를 찾아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칠 것이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다니, 정말 못났네요!”차설아는 성도윤이 이렇게 못나 보이긴 처음이었다.그가 임채원과 같은 여우 년을 위해 ‘자살’하는 수법을 생각해 내다니,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린 셈이라 차설아는 그런 성도윤이 비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보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성 대표님도 실력이 딱 거기까지겠죠. 경찰부터 판사까지 누가 감히 성 대표님을 건들 수 있겠어요?”성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내밀고는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계속 기소하고 싶다면 보스가 승소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요. 어떻게 할래요?”차설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필요 없어요!”차설아는 임채원을 골탕 먹이려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인 것이었다.임채원은 ‘가짜 죽음’까지 하며 내뺐으니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