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중요하지 않아.”성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어떤 비밀들은 그가 평생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 숨겨두어야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당신은 그냥, 내가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것만 알면 돼. 그러니까 질투심 때문에 채원이를 궁지에 몰아넣을 필요 없어!”“하하!”차설아는 웃음을 터뜨렸다.남자의 오만함과 무정함에 웃음이 났다.이 남자는 어떻게 전처를 앞에 두고 이런 뻔뻔한 말을 할 수 있을까?분명 악독한 짓을 한 건 임채원인데,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임채원을 옹호하고, 오히려 차설아를 가해자 취급하고 있다.“성도윤, 당신 참 재밌네. 설마 내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서, 질투에 눈이 멀어 임채원을 감옥에 보내려 한다고 생각해?”“아니야?”성도윤은 싸늘하게 반문했다.그는 비록 연애 경험은 적지만, 겪어본 여자는 적지 않아, 이 정도 잔머리는 보아낼수 있다고 생각했다.“절대 아니야. 당신이랑은 상관없고, 순전히 내 마음이 좁아서 그래.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하니까. 임채원이 날 몇 번이나 모함했는데, 당연히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차설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녀는 성모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다. 괴롭힘을 당했으면 당연히 갚아줘야 한다.차설아를 보는 성도윤의 눈빛은 복잡해지고, 깊어지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당신 변했어.”“전에는 내가 멍청하고 눈이 멀었지. 그리고 예전의 내 모습은 전부 연기야!”마음이 제대로 상해버린 차설아는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사실, 나도 당신 마누라로 사는 거 이미 지쳤어. 단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당신이랑 잉꼬부부 행세하는 것도 싫고, 당신의 그 오만하고 까칠한 엄마도 싫고, 감옥 같은 당신네 집도 싫고, 매일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밤은 더욱 싫어!”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 차가운 날들을 차설아는 추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난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독한 마음을 먹은 이상, 당신 그 내연
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결국, 당신이었어... 당신 민이 이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당신이야말로 이모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성도윤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잔뜩 흥분한 차설아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이모님은 채원이를 유산시키려고 했어. 당신 정말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어?”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우린 한때 부부였잖아. 서로 한 발자국씩 양보하자고. 난감하게 안 할 테니까 너도 이만 채원이를 놔줘.”성도윤은 자신이 차설아를 충분히 너그럽게 대해준다고 생각했다.임채원 뱃속의 아이는 형님의 유일한 핏줄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민이 이모와 같은 짓을 했다면 그는 진작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었을 것이다.“그럴 리가 없어!”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민이 이모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민이 이모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난... 임채원이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보내길 원하는 건 맞아. 하지만 난 임채원 뱃속의 아이를 해칠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 형량이 확정되어도 임산부는 바로 수감되지 않잖아. 아이를 낳고 수유 기간까지 지나서야 수감할 거라고. 그동안 아이에게는 그 어떤 위험한 상황도 생기지 않을 거야.”차설아도 엄마였기에 절대 아이한테 못된 마음을 먹을 리가 없다.그 말을 듣던 성도윤의 싸늘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는 차설아가 분명 자신이 말한 것처럼 독한 사람이 아닐 줄 알았다. 차설아는 그저 자신을 화나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당신을 믿어, 이모님도 믿고. 그러니까 이번 일은 여기까지 하는 거 어때?”성도윤은 다시 한번 제안했다.“당신이 고소를 취하하면 이모님도 다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차설아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남자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성도윤 씨, 참 마음이 너그러우시네요. 왜 당신이
두 사람이 유치장에서 나오고 차설아는 다급히 성우에게 물었다.“변호사님, 방금 민이 이모를 빼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임채원의 형량을 추가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죠?”“사실 엄청 간단해요.”성우가 말을 이어갔다.“만약 이모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모님이 임채원을 해쳤다는 주관적 동기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럼 당연히 형사범죄가 성립되지 않겠죠. 반대로 임채원을 명예훼손으로 역으로 고소할 수 있고요.”“만약 이때 민이 이모의 몸까지 좋지 않다면 마침 임채원의 명예훼손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주장할 수 있어요. 그럼 임채원은 형사범죄로 형량을 추가할 수 있고요. 형법상 정신적 피해에 대한 형량은 절대 일반 신체적 피해보다 가볍지 않아요.”차설아는 집중해서 성우의 말을 듣고는 다급하게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지금 해야 하는 건 바로 민이 이모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거나 임채원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승소할 수 있다는 거죠?”“정확해요!”성우가 말을 이어갔다.“제가 생각하기론 임채원이 거짓말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명예훼손이 성립되거든요. 비록 그 두 명의 경찰이 인증으로 채택되었지만 법률상 인증은 아주 주관적이라 물증보다는 효력이 약해요. 보스가 물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린 소송에서 100% 이길 수 있을 거예요!”“그거야 쉽죠, 이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차설아가 듣고는 성우에게 엄지를 척 내밀었다.“역시 성 변호사님은 다르네요. 정말 훌륭한 방법인 것 같아요!”그녀는 지금 성도윤과 이혼하고 성운 법률사무소를 얻게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세 명의 변호사가 그녀의 편이었으니 행정 영역이든 민사 영역이든, 아니면 형사 영역이든 그녀는 막힘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다음 날.차설아는 일찍이 임채원이 있는 병원에 찾아왔다.여전히 두 경찰이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임채원은 곧 자유를 되찾을 생각
차설아가 병실 위쪽에 있는 감시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거짓말은 존재하지 않아. 정의가 살아있다면 당신의 추악한 모습이 곧 세상에 알려지겠지.”임채원은 잠깐 멈칫하더니 크게 웃으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난 또 무슨 대단한 증거가 있다고, 겨우 CCTV 화면이었어? 그래. 그럼 그걸 가져가서 판사님한테 말해, 도대체 누가 무죄인지 두고 보자고!”차설아는 임채원이 이렇게 오만하게 굴지 생각지도 못했다. 전혀 두려움 없는 모습을 보이니 아마 CCTV 화면에 진작 손을 봤을 것이다.하지만 각종 해킹에 능한 그녀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임채원이 CCTV 화면을 삭제했든 없앴든 간에 한 번 존재했다면 그녀는 모두 복원시킬 수 있었다.“임채원 씨가 그렇게 당당하다면 사흘 뒤에 있을 재판에서 한 번 두고 보자고!”차설아가 이 말을 남기고는 쿨하게 자리를 떴다.사흘 뒤에 모든 일이 정리될 것이다.임채원은 분명 그녀의 무지와 독한 마음 때문에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리라 생각했다.엘리베이터를 내릴 때.문이 열리자 마침 임채원을 보러 온 성도윤과 전 시어머니인 소영금과 마주치게 되었다.성도윤과 차설아는 서로 눈이 마주치자 모두 흠칫 놀라게 되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일렁이고 있었다...소영금은 매우 흥분했다. 차설아를 보더니 징그러운 벌레를 본 것처럼 험상궂은 얼굴을 보이며 당장이라도 차설아를 발로 밟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재수탱이가 여길 왜 온 거야? 네 악독한 집사가 채원이를 해친 것도 모자라 너도 나쁜 짓을 하려는 거야?”차설아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이 병원은 여사님이 여신 거예요? 제가 병원으로 왜 왔는지 여사님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나요?”“너!”차설아의 말을 들은 소영금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말주변이 좋은 전 며느리를 혼내주려고 손을 쓰려 했다.“넌 우리 도윤이한테 버림받아서 당연히 나한테 무슨 일을 보고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넌 우리 성씨 가문의 핏줄
차설아는 병원을 떠난 후 택시를 잡아 제일 먼저 차씨 별장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손에 USB 하나를 쥐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병원의 CCTV 기록이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기록을 컴퓨터에 전송하고는 사건 당날의 CCTV 화면을 빠르게 한 번 훑어봤다.아니나 다를까, 열몇 시간의 기록은 모두 삭제되어 겨우 몇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남은 몇십 분 동안의 기록은 모두 민이 이모에 대한 불리한 증거들이었다. 오히려 민이 이모가 임채원을 협박하고 강제로 아이를 지우게 하는 사실이 확실히 ‘증명’되었다.“임채원, 정말 치밀하네!”하지만 차설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안경을 고쳐 쓰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을 컴퓨터 키보드에 툭툭 치며 긴 코드를 입력하며 병원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을 해킹하려고 했다.일반적으로 병원이나 학교, 쇼핑몰과 같은 공공장소에는 모두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CCTV와 같은 영상 자료를 저장하곤 했다.그 말인즉, 한 번 존재했던 영상 자료라면 모두 복구와 탈취가 가능했다.다만 병원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암호화된 것 같았다. 최첨단 암호 키를 사용하여 차설아는 무려 30분 동안 공을 들였는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IP가 잠기고 역추적을 당하게 되었다.“젠장!”조용한 공기 속에는 ‘탁탁탁’ 키보드 소리만 남게 되었다.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듯 차설아는 혼자 치열한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차설아는 자기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바로 시스템 화면을 꺼버렸다.이런 암호 기술은 한눈에 봐도 고수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분명 그녀의 해킹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치밀한 정도로 봐선 임채원 같은 초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분명 성도윤의 뜻이 담겼을 것이다.컴컴한 방 안에는 컴퓨터 화면에서만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에 비친 차설아의 얼굴은 유난히 어둡고 실망스러워 보였다.‘흥, 성도윤, 당신 애인 지키려고 정말 별일을 다 하네!’차설아는 지친 기
차설아는 눈알을 굴리더니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을 받게 돼!”“칫, 성의 없어!”바람은 흥미를 잃은 듯 손을 저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풀썩 눕더니 느긋하게 발을 흔들거리며 말했다.“나 바람의 도움을 받으려면 최소 1억 달라는 내놓아야 한다고 말이야. 공짜로 내 도움을 받을 생각하지 마.”차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녀석 맞을 짓만 골라 하네.’하지만 도움을 부탁하는 처지라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그럼 네가 직접 말해봐. 뭘 원하는데?”그 말은 바람의 흥미를 돋았다. 그는 자리에 바로 앉더니 오래간만에 진지한 얼굴을 보였다.“너도 알다시피 내가 1, 2년 뒤면 서른이거든. 집에서 여자 없냐고 맨날 물어봐. 그러니까...”“싫어!”차설아는 바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X’를 그리며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꿈도 꾸지 마. 난 이제 연애는 그만하고 사업만 열심히 할 거라고. 너와 내가 친구 사이인 건 괜찮지만 부부는 절대 할 수 없다고!”바람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너 김칫국 마신 거야. 너한테 호감이 있는 건 맞지만 너랑 결혼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고. 나 비혼주의자야.”“캑캑, 그런 거였어?”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내가 못 살아, 정말 부끄러워. 성도윤한테 자뻑하는 병이 옮았나? 왜 사람들이 다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는 거지? 김칫국 마시고 창피만 당했네.’“그럼... 그럼 뭘 원하는데?”차설아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 바람에게 물었다.“할아버지가 워낙 재촉하셔서. 얼마 뒤면 할아버지 여든 살 생신이거든. 나보고 꼭 여자친구를 데려오라고 하셨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여자가 너밖에 없어서...”“그러니까 여자친구인 척을 해달라고?”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며 고민에 잠기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나한테 맡겨. 신분이 많은데 하나도 안 들키게 된 건 내가 워낙 연
바람이 떠난 뒤.커다란 별장에는 또 차설아 혼자만 남게 되었다.그녀는 여느 밤처럼 창가에 서서 창밖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밤의 달은 정말 밝고 둥글었다. 마치 칠흑 같은 밤하늘에 예쁘고 밝은 구슬이 하나 떠있는 것 같았는데 왠지 마음은 씁쓸하게 느껴졌다.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그날 밤 같이 채팅을 했던 낯선 사람이 생각났다.그의 프로필 사진도 밝은 달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보낸 유일한 메시지도 밝은 달 사진이었다.차설아가 휴대폰을 들고는 그 밝은 달 사진을 찾아 확대했다.찍은 각도를 보아하니 아마 어느 오피스텔의 창가 앞에서 달의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상대도 고된 사람에 치이고 사는, 늦은 밤까지 야근하는 직장인이란 말인가?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더니 무작정 달을 찍어 상대에게 사진을 보냈다.상대와 얘기를 얼마 나누지도 않고, 또 대부분의 시간에 그녀만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차설아는 상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든 반드시 답장이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이상하게 들었다.한마디 위로를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에 차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몇 분 후, 휴대폰에 알림음이 울렸다.“잠이 안 와요?”간단한 말 한마디였지만 차설아는 왠지 모르게 상대가 도도하고 과묵하지만, 동시에 믿음이 가는 듬직한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네, 요즘 고민거리가 많아서요.”“어떤 고민거리요?”“제가 엄청 싫어하는 남자가 있거든요. 계속 그 남자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요. 세상에서 유일한 제 가족을 모함했어요. 그래서 유일한 제 가족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어요. 또 지금 이곳을 무척이나 떠나고 싶지만 당분간은 떠날 수 없을 것 같고요. 모든 게 다 엉망이에요!”차설아가 수심에 찬 얼굴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마치 한에 맺힌 사람처럼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불현듯 상대가 귀찮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차설아는 황급히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하지만 저는
“그게...”어안이 벙벙한 차설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알고 있는 임채원이라면 결코 양심의 가책으로 고소를 취하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럼 성도윤의 명령으로 고소가 취하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을 것이다. 원래 민이 이모로 그녀를 협박하려고 했던 차갑고 무정한 남자가 왜 먼저 한발 물러선 것일까?설마 어젯밤 바람이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에 해킹한 일이 성도윤에게 들킨 건 아닐까?그 생각에 차설아는 바로 바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너머로 바람의 나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늦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벌써 나 보고 싶었어, 누나?”“장난치지 말고. 하나 물어볼 거 있어. 어젯밤 네가 클라우드 스토리지 시스템에 해킹한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 거 아니야?”“왜 이래? 갑자기 웬 난리야?”“잔말 말고 내 말에 대답해.”“아니야. 들키지 않았어.”바람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암호 키는 내가 설계한 거야. 내가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거라고.”차설아는 침묵을 지키더니 미간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겼다.“그래, 알겠어.”“왜 그래? 너...”바람이 뭘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차설아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왜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바람은 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 밖에 놓인 팔뚝 각선미는 완벽에 가까웠다. 웬만한 남자 모델보다 근육이 탄탄했고 멋있어 보였다.그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말했다.“고양이같이 앙칼진 구석이 있는 여자네!”다른 한편, 차설아는 손톱을 깨물면서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CCTV 화면을 복원했다는 사실이 들키지 않았다면 성도윤은 민이 이모를 놓아줄 이유가 없겠는데,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나?’“아가씨,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해요. 저는 제가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제 일로 전혀 고민할 필요 없어요...”민이 이모의 위로에 차설아는 갑자기 어젯밤 낯선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고민이 사라지게 될지 누가 알아요.”정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