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이 이모는 말을 마치고, 서둘러 지하실에서 4년 동안 간직해 온 유서가 담긴 낡은 상자를 가져왔다.“아가씨, 이 유서는 사모님께서 임종 직전 저에게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약 아가씨의 결혼생활이 행복하다면 절대 이걸 보여서는 안 되고, 이혼하면 이 유서를 전하라고 하셨어요.”민이 이모는 정중하게 봉투에 담긴 유서를 차설아에게 건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사모님이 투신하기 전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사모님의 유일한 걱정은 차설아였다. 차설아가 성도윤과 결혼해서 행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하지만 이 결혼이 4년 만에 깨질 줄은 누가 알았을까?차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봉투를 바라보니 ‘설아 아가에게’라고 적혀 있었다.그 누구도 모사할 수 없는 어머니의 글씨였다.눈물이 핑 돌며 시야가 흐려졌다.4년 전, 부모님이 투신했을 때 차설아는 실험실에 웅크리고 앉아 다양한 행성에서 전자파의 작동 속도를 연구하고 있었다.과학 천재로서 그녀는 데이터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한 달 이상 실험실 문을 나서지 않았으며 외부와 연락하지 않았다.가족들은 줄곧 그녀의 연구를 지지해 왔으며, 실험을 할 때 방해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마침내 실험에 성공하여 이 기쁨을 부모님에게 나누려고 했을 때, 들려온 건 집안의 파산과 부모님의 비보였다.그때, 차설아는 가문의 사람이 미웠다. 자신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 부모님이 더욱 미웠다.그녀는 복수를 원했고,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하더니, 성도윤과 결혼시켰다.4년 동안, 그녀는 말없이 갑자기 떠나 버린 부모님 때문에 고통에 빠졌다. 심지어 일부러 그들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가문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엄마 아빠는 말없이 절 떠난 게 아니었네요. 내가 너무 어리석고, 고집스러워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차설아는 울면서 봉투를 뜯었다.유서는 몇십 자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자 한 자 차설
민이 이모의 추측에 차설아는 생각에 잠겼다.차설아는 눈썹을 가늘게 찡그리고, 부모님이 남긴 유서를 되새기며 입을 열지 않았다.민이 이모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바로 자기 뺨을 때리며 말했다.“늙은이 입방정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성씨 가문이 어떻게 차씨 가문을 해칠 수 있겠어요? 만약 사실이라면 선생님과 사모님도 아가씨를 그 집으로 시집보내진 않았을 거예요.”“그렇긴 하지만, 이혼하면 이 유서를 주라고 하셨고, 저한테 성씨 집안 사람들을 탓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셨어요. 분명 그 집안과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거예요.”차설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미 사건의 대략적인 맥락을 분석했다.“성씨 가문이 우리 집안을 해친 게 아니더라도, 뭔가를 알고 있는 건 틀림없어요. 게다가 우리 집안을 해친 가문은 세력이 아주 클 거예요. 그러니 다들 나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으면서 성씨 가문에 시집을 보냈죠.”차씨 가문은 결코 겁쟁이가 아니다.부모님을 자살하게 하고, 할아버지가 임종 전에 손녀를 맡길 정도라면 분명 차씨 가문보다 세력이 크고, 성가와 필적하는 가문일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차설아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해안 전체에서 성가와 필적하는 가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가씨,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복수하실 생각이에요?”“당연하죠!”차설아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고, 눈 밑에 살기가 어렸다.“우리 부모님을 죽게 한 사람들, 절대 가만두지 않아요!”성도윤의 아내로 살 때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세상의 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복수를 잊은 채 폐인으로 살아왔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도윤과 이혼을 했고, 성가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절대 차씨 가문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고, 부모님의 원한도 꼭 갚아야 한다.이제부터 그녀는 모든 정력을 복수에 쏟아부을 예정이다.이튿날, 차설아는 듣기 좋은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잘 잤어? 아가들.”차설아는 몸을 편안
차설아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달려갔다.이모가 파놓은 깊은 구덩이 안에 청록색의 옥패가 보였다.차설아는 서둘러 옥패를 주워 위의 흙을 깨끗이 닦고 자세히 살폈다.옥패는 불순물 한 점 없이 순수한 색상으로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윤택하고 약간 차가웠다. 위에는 정교하고 기발한 도안이 새겨져 있어 보기에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민이 이모는 옥패를 쳐다보며 이해가 되지 않아 말했다.“이상하네요, 우리집 마당에 언제 이렇게 귀한 옥패가 묻혔을까요? 전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나요?”“혹시 가문이 파산당하고, 누군가 몰래 들어와 묻은 건 아닐까요?”차설아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옥패의 도안에 시선이 쏠렸다.이 도안을 왠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그건 불가능해요.”민이 이모는 곰곰이 회억했다.“가문이 파산당하고 나서 전 한 발자국도 이 집을 떠난 적이 없어요.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틈을 타서 누군가 집에 들어와 이 물건을 정원에 묻었다면 제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고요.”“그리고, 누가 이런 귀한 옥패를 남의 집 정원에 묻을까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이 아주머니는 꼼꼼한 분이셨다. 만약 누군가 정원의 흙을 건드렸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그러니 이 옥패는 오래전 정원에 묻혔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이모, 이 옥패의 도안을 전 어디서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나요. 이모는 본 적이 없나요?”“봐봐요.”민이 이모는 자세히 보기 위해 돋보기 안경을 썼다.한참 동안 자세히 본 후, 민이 이모는 갑자기 생각난 듯했다.“아, 본적이 있어요. 아가씨가 태어났을 때, 아가씨를 감싼 포대기 안에 수놓은 것이 바로 이 도안이었어요. 보아하니 봉황과 피안화의 결합이네요.”“그러고보니 저도 생각이 나는 것 같아요.”차설아는 기억력이 뛰어나서 한 번 본 것을 절대 까먹지 않는다.엄마 유품을 챙길 때 그 포대기를 본 적이 있었다. 부모님의 다른 유품과 함께 상
성도윤은 여전히 키가 크고 꼿꼿하며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마치 차설아를 보지 못한 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차설아는 턱을 치켜들고 무시하려 했다.하지만 술에 취해 남자들과 KTV에서 울부짖고, 가지 말라고 자신을 붙들고 억지를 부리던 모습이 떠올라 ‘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성도윤은 멈칫하더니 빙산처럼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물었다.“왜 웃어?”차설아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차갑게 말했다.“그냥 기분이 좋아서.”성도윤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흥, 너한테 뭔 기분 좋은 일이 있다고. 생각보다 긍정적이네.”“이혼했잖아. 불구덩이에서 드디어 탈출을 했으니 기분이 좋지!”차설아는 희고 예쁜 얼굴을 들고 활기찬 얼굴로 말했다.“누구처럼 밤늦게 술 마시고 통곡하고, 또 남자들을 불러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거나, 또 뻔뻔스럽게 전 부인에게 매달리지 않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그 비굴한 모습을 다 봤어. 부끄럽지 않아?”성도윤의 차갑고 도도하던 모습은 무너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반박할 길이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빌어먹을, 술에 취한 동영상이 성도윤 인생의 오점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차설아 앞에서 얼마나 차갑고 도도하게 굴든 간에, 전보다 위협감이 떨어질 건 사실이다.성도윤은 이미 거금을 들여 그 창피한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완전히 내렸고, 기회를 틈타 이슈몰이하던 플랫폼도 여러 개 차단했다.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셈이다. 어쨌든 네티즌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지금 전 세계 사람들이 성도윤이 무릎을 꿇고 차설아에게 매달리는 동영상을 보았으니, 제대로 망신을 당했다.차설아는 웃음을 참고 계속 남자를 놀렸다.“날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네, 성도윤 씨? 왜 진작에 말을 안 했어?”“역시 나 차설아는 매력이 있다니까. 까다로운 성 대표님이 이성을 잃고 내 앞에서 통곡하고 말이야...”차설아는 자존심을 버리며 이 남자만 4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드디어 역할이 바뀌었으니
성도윤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내딛고 창문 앞으로 가서, 창밖의 푸르고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넋을 잃었다.이런 뷰는 이 아파트에서 꼭대기 층에 사는 성도윤과 차설아의 집에서만 볼 수 있었다.이런 우연의 일치는 마치 두 사람을 암암리에 엮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그들은 얼마나 많은 밤을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지냈을까. 서로의 고민을 전혀 알지 못한 채...“왜 이사 가는 거야?”한참 뒤 성도윤은 몸을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포대기를 찾느라 거실 서랍을 열어보던 차설아는 성도윤의 갑작스런 물음에 어리둥절했다.“이사 가고 싶어서.”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한마디 덧붙였다.“성 대표님이 날 싫어하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말이야. 맞은 편에 살고 있으니 오다가다 마주치면서 성 대표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떡해.”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똑똑한 척하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몰라!”“그래, 성 대표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임채원이랑 성가 저택에서 알콩달콩할 시간도 모자란데 언제 여기에 오겠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햇빛 속에 서 있는 차갑던 성도윤의 얼굴에는 갑자기 흥미로움이 번졌다. 그는 차설아를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질투하는 거야?”차설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즉각 부인했다.“김칫국 마시지 마!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질투해?”“질투하는 거 맞네.”성도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확신에 차서 말했다.그를 좋아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 쯤은 당연히 느낄 수 있었다.갑자기 성도윤은 그 영상이 폭로된 후, 마침내 자존감을 회복한 느낌이 들었다.영상에서는 성도윤이 차설아에게 끈질기게 매달렸어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설아가 자기에게 마음이 남아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햇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성도윤은 빛을 받으며 마치 아이돌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차설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뭐 하는 거야?”남자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자 차설아는 무의식적으로 방어 자세를
차설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부자연스러운 손길로 배를 가리며 애써 덤덤한 척 말했다.“나도 임신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자연히 배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이혼해서 너무 신이 났나 봐. 맨날 맛있는 거 먹었더니 살이 찐 거더라고.”“그래도 그런 말 해줘서 고마워, 내가 다이어트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줬네. 경수가 워낙 젊어서 활력도 넘치고, 내가 몸매를 잘 가꾸지 않으면 걔가 다른 여자한테 마음을 뺏길지 누가 알아?”성도윤의 얼굴빛은 한껏 어두워졌다.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차설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그래? 그럼 행운을 빌게.”남자가 코웃음을 치고는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차설아는 그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으면서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아봤다.‘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반응 보니까 엄청 화난 것 같은데? 그런데 화가 났다고 해도 왜 때문이지? 경수가 싫어서 그러나? 어휴, 나도 모르겠어!’차설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역시 남자 마음은 알 수가 없다니까!’그녀는 생각을 거두고 집 안에서 포대기를 샅샅이 뒤져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봐도 포대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그렇다면 단 한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바로 그녀가 포대기를 성씨 가문 본가에 두고 온 것이다.지난번에 임채원이 갑자기 들이닥친 바람에 차설아는 너무 급하게 떠났다. 그래서 주로 옷을 담는 상자 하나를 두고 왔었다. 포대기는 분명 그 상자 안에 있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성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지금 마침 한낮이라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임채원은 유럽의 귀부인처럼 파라솔 밑에 있는 의자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하인들에게 말했다.“다들 밥 안 먹었어요? 당장 움직이란 말이에요. 차설아가 이 화원에 심은 모든 화초와 나무를 모조리 뽑아버려요!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를 심어놓으란 말이에요. 열두
임채원은 원수를 만난 것처럼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살벌한 표정으로 차설아에게 말했다.“여긴 왜 온 거야? 개인 구역에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야? 내가 확 경찰에 신고할까 봐!”“경찰에 신고하려고?”차설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휴대폰에 번호 112를 찍어 눌렀다. 그리고 휴대폰을 임채원에게 건네고는 말했다.“얼른 신고해, 경찰들에게 채원 씨가 어떻게 사람들을 학대했는지 보여줘야지.”“내가 언제 학대했다고 그래? 잘못을 했으니까 벌 받는 건 당연한 거야. 난 이 별장의 여주인으로서 이 사람들을 다룰 권리가 있다고! 욕하든 때리든 네가 상관할 건 아니야.”임채원은 턱을 치켜들더니 일부러 ‘여주인’을 말할 때 힘을 더 주고는 어깨를 우쭐 흔들었다.죽을 지경으로 탈진한 하인들은 주눅이 들어 한쪽에 가만히 서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별장 여주인?”차설아는 코웃음을 치더니 되물었다.“당신이 별장 여주인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 이 별장이 당신 이름으로 된 거야?”“그걸 증명할 수 없다면 당신이 이 사람들과의 고용 관계도 증명되지 않아. 그럼 당신이 한 짓은 형사 범죄에 해당된다고. 이 사람들이 당신을 고소하겠다고 하면 충분히 3년이나 5년의 유기징역을 선고받게 될 거야.”차설아의 무심한 말에 임채원은 기세가 반쯤 꺾였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더니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나는 지금 도윤이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 이 별장은 조만간 내 명의로 바뀔 거라고. 미래 성씨 가문의 모든 것도 내 아들의 것으로 될 거야. 겨우 하인 몇 명을 부려먹었다고 네가 감히 이런 말을 해?”“참, 채원 씨가 이렇게 순진하게 구네...”차설아는 임채원을 바보를 보듯 한참 보더니 진실을 가차 없이 폭로했다.“첫째. 이 별장은 내 허락 없이 영원히 당신 명의로 되지 않을 거야. 지금 내 공동 명의로 되어있거든. 둘째, 당신이 성도윤이랑 결혼하지 않은 이상 당신 아들은 영원히 사생아 신세야. 성씨 가문의 합법적인 상속인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라
이 아주머니의 반응으로 봤을 때 차설아의 기억은 틀림없었다. 포대기가 담긴 상자를 확실히 성씨 가문 본가에 두고 온 것이 분명하다.“왜 말을 더듬어요? 상자는 어디에 있냐고요?”차설아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이 아주머니는 난감한 기색을 보이더니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럽게 말했다.“사모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사모님 물건은 모두 그분께서 치우셨어요. 정확히 어디에 뒀는진 저희도 잘 몰라요.”“저분이 얼마나 유난을 떠는데요. 요 며칠 사모님 방에 있는 물건을 모두 치우고 다시 인테리어를 하겠다고 하질 않나, 또 화원에 사모님이 심어놓으신 화초를 모두 뽑아버리겠다고 하질 않나... 아무튼 이 별장에 사모님의 그 어떤 물건도 허락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까다로운지!”이때 임채원이 큰 배를 내밀면서 들어오더니 이 아주머니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감히 내 험담을 해요? 입 안 다물어요?”이 아주머니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에 이 아주머니가 차설아를 괴롭혔을 땐 그렇게 기고만장하더니 지금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는 건 그렇게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역시 하나님은 공평해.’차설아는 더는 말을 하기도 귀찮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채원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놔.”“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셋 셀 때까지 내 물건 내놔.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겨도 나 탓하지 마.”“어디서 협박질이야?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임채원은 양팔을 감싸 안은 채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내가 설아 씨 물건을 가져갔다는 증거 있어? 그리고 내가 가져갔다고 해도 돌려주지 않는다고 하면 뭐 어쩔 건데?”‘흥, 나는 지금 성씨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 내 최강의 호신 부적이라고. 아무리 차설아라고 한들 날 어쩌지는 못할 거야!’“하나...”“둘...”차설아는 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숫자를 세고 있으면서 임채원을 압박했다.그녀는 단지 자기 물건을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