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주머니의 반응으로 봤을 때 차설아의 기억은 틀림없었다. 포대기가 담긴 상자를 확실히 성씨 가문 본가에 두고 온 것이 분명하다.“왜 말을 더듬어요? 상자는 어디에 있냐고요?”차설아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이 아주머니는 난감한 기색을 보이더니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럽게 말했다.“사모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사모님 물건은 모두 그분께서 치우셨어요. 정확히 어디에 뒀는진 저희도 잘 몰라요.”“저분이 얼마나 유난을 떠는데요. 요 며칠 사모님 방에 있는 물건을 모두 치우고 다시 인테리어를 하겠다고 하질 않나, 또 화원에 사모님이 심어놓으신 화초를 모두 뽑아버리겠다고 하질 않나... 아무튼 이 별장에 사모님의 그 어떤 물건도 허락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까다로운지!”이때 임채원이 큰 배를 내밀면서 들어오더니 이 아주머니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감히 내 험담을 해요? 입 안 다물어요?”이 아주머니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에 이 아주머니가 차설아를 괴롭혔을 땐 그렇게 기고만장하더니 지금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는 건 그렇게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역시 하나님은 공평해.’차설아는 더는 말을 하기도 귀찮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채원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놔.”“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셋 셀 때까지 내 물건 내놔.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겨도 나 탓하지 마.”“어디서 협박질이야?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임채원은 양팔을 감싸 안은 채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내가 설아 씨 물건을 가져갔다는 증거 있어? 그리고 내가 가져갔다고 해도 돌려주지 않는다고 하면 뭐 어쩔 건데?”‘흥, 나는 지금 성씨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 내 최강의 호신 부적이라고. 아무리 차설아라고 한들 날 어쩌지는 못할 거야!’“하나...”“둘...”차설아는 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숫자를 세고 있으면서 임채원을 압박했다.그녀는 단지 자기 물건을
성도윤은 임채원의 목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하지만 차설아가 있다는 말에 그는 바로 핸들을 돌려 성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임채원은 퉁퉁 부은 얼굴을 감싼 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딱 기다려. 도윤이가 곧 온대. 방금 나 때린 걸 증명할 사람도 있고, 내 뺨도 빨갛게 부어올랐으니 절대 빠져나갈 생각 마.”차설아도 휴대폰을 내려놓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도 딱 기다려. 경찰이 곧 도착할 거야. 날씨가 더우니까 시원한 경찰서에 가 있어.”그렇다, 차설아는 방금 휴대폰으로 번호 ‘112’를 누른 것이었다.말로 생떼를 부리는 임채원을 설득할 수 없었으니 경찰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성도윤은 곧 현장에 도착했다. 그레이 슈퍼카는 ‘부릉부릉’ 엔진 소리를 내었는데 뜨거운 태양 아래서 유난히 멋있어 보였다.남자는 드리프트로 주행하더니 멋지게 별장 앞에 주차했다. 그리고 훤칠한 그가 차에서 내렸다.“도윤아, 너 드디어 왔구나. 너 안 왔으면 나랑 아기가 설아 씨한테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몰라!”임채원은 배를 내밀며 빠르게 성도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빨갛게 부어오른 두 볼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렸다.“오늘 설아 씨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별장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주머니 보고 내 물건 모두 길바닥에 던지라고 했어. 나보고 이 별장에서 당장 나가라고 했다고. 내가 싫다니까 바로 내 뺨을 때렸어...”“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기도 겁먹었는지 뱃속에서 꾸물꾸물해. 난 그렇다고 해도 우리 아기를 괴롭히는데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 대신 설아 씨 좀 혼내줘!”차설아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온갖 유난을 떨며 불쌍한 척하며 성도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다.하지만 성도윤은 그런 임채원이 시끄러운지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차설아를 힐끔 보더니 다시 임채원을 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럴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차설아가 아무 이유 없이 너를 때리진 않았을 거 아니야?
두 경찰은 차설아의 말을 듣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임채원을 보며 물었다.“사실이에요?”임채원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두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저 사람이 나를 모함한 거예요. 저 사람은 제 물건을 모두 길바닥에 내던졌어요, 저 사람이야말로 범죄자니까 잡아가세요!”“내가 당신을 모함했는지 아닌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차설아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차가움이 서려있었다. 그녀는 논리정연하게 경찰들에게 말했다.“이 별장의 소유자로서 나는 집안의 모든 물건을 처분할 권리가 있어. 당신이 방금 한 말이 바로 당신이 허락 없이 우리 집에 눌러산 증거이지.”“그리고... 당신에게 악의적으로 도둑맞은 내 상자 안에는 귀중한 물품들이 엄청 많이 있어. 이것만으로도 당신을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어!”“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임채원은 다급한 마음에 높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상자 안에는 누더기 옷 몇 벌밖에 없었어. 명품도 아니라 2000만도 안 할 거라고. 뭐가 귀중하다는 거야?”말을 마친 임채원은 바로 후회가 몰려왔다.차설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경찰을 향해 말했다.“경찰 아저씨, 방금 들으셨죠? 저 사람은 모든 걸 자백했어요. 잔말 말고 바로 데려가시면 돼요.”경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임채원에게 수갑을 채우며 말했다.“협조 부탁드립니다. 경찰서로 가서 진술서를 작성하시겠습니다.”임채원은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려 연신 뒷걸음질을 치며 성도윤의 몸 뒤로 숨었다.“가까이 오지 마세요. 저는 억울하다고요. 도윤아, 나 좀 살려줘!”이때, 임채원에게 원래도 불만이 가득했고, 또 눈치를 잘 살피던 이 아주머니는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임채원 씨가 차설아 씨의 물건을 모두 가져간 게 맞습니다!”“뿐만 아니라 임채원 씨는 우리 아랫사람들을 전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별장에 있는 동안 저희한테 한 모든 일들은 정말 너무합니다...”이 아주머니는 임채원의
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성도윤이 정말 임채원을 경찰서에 보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내 기억이 맞는다면 임채원을 엄청 감싸주지 않았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기세더니 벌써 질렸나 보지? 쯧쯧, 역시 남자들이란 한결같네. 내가 역시 이혼을 하길 잘했어!’성도윤이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두 경찰도 더는 임채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녀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이것 놔, 나 다치지 말라고!”임채원은 감정이 북받쳐올라 울면서 성도윤을 향해 애원했다.“도윤아, 나 정말 억울해. 나 믿어달라고!”“얼른 저 사람들 보고 나 한 번 봐주라고 해. 아기가 두려워할 거라고. 나는 몰라도 우리 아기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있어?”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덤덤하게 말했다.“데려가세요!”“성도윤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그냥 진술서를 작성할 겁니다, 임채원 씨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거고요.”두 경찰이 말하고는 임채원을 경찰차에 태웠다.차가 멀어져 갔는데도 임채원의 애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설아는 점점 시선으로 사라져가는 경찰차를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일이 이렇게 흘러갈지 그녀조차 생각 못 했다.그녀는 단지 돌아와서 포대기를 돌려받으려고 했을 뿐, 임채원을 경찰서에 보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아이까지 임신한 임채원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었다.“도윤 씨,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난 그냥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정말 경찰분들이 채원 씨를 데려가게 하면 어떻게 해?”차설아는 이마를 짚으면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색했다.“정말 나 짝사랑한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할 필요 없어. 채원 씨는 당신 아이를 임신하고 있잖아.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내 탓하지 마!”성도윤은 말문이 막혔다.‘이 여자가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왜 전엔 몰랐을까?’기억 속의 차설아는 수줍음이 많은 여자였다. 그와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빨개지고 한껏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서 주눅 들고 연약한 모습을
차설아는 기쁜 마음에 다급하게 물었다.“어디 있어요? 얼른 갖다주세요.”젊은 하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사모님, 상자가 언제 지하실로 옮겨졌는진 모르겠지만... 한 번 직접 가보세요!”“지하실에 있다고요?”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힘들게 여러 군데를 찾아봤는데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을 간과했다니, 역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하지만 여자의 얼굴을 보니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향했다.성도윤도 눈살을 찌푸리더니 긴 다리로 묵묵히 차설아의 뒤를 따랐다.성씨 가문 본가의 지하실은 지하 2층에 있었는데 굽이굽이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어떤 재난이 일어났을 때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에 지하실은 캄캄하고 공기가 탁해 평소에는 사람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지하실 앞에 도착하자 차설아는 문이 약간 열려있는 걸 발견했다. 그 안에는 어두운 붉은색 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으쓱한 기운이 풍겼다.“바, 바로 이 안이에요!”젊은 하인이 문밖에 서서 한사코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차설아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여기는 결국 그녀가 4년 동안 묵은 집이라 두려울 것도 없어 그냥 문을 밀고 들어갔다.“아악!”눈앞의 장면이 너무 기괴해서 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몸을 휘청거리며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는데.“소리는 왜 지르는 거야!”성도윤이 긴 팔로 차설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잡았다. 넓은 가슴팍은 그녀에게 무한한 안정감을 가져다줬다.차설아가 뒤돌아봤다. 잔뜩 겁에 질린 그녀는 차가운 남자와 눈을 맞췄다.‘이 녀석은 언제 따라온 거야! 귀신인 줄 알았네, 소리도 없이 따라와서!’그녀는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지하실에 널려있는 기괴한 물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이 물건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놓은 거야? 무섭지 않아?”성도윤은 차가운 시선으로 지하실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무섭긴 하네.”백여 평의 지하실에는 어
아마 오늘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무리한 듯했다.차설아는 복부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을 겨우 참으며 저주가 가득 적힌 포대기를 손에 꼭 쥐었다.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일렁였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성도윤을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당신 애인은 어떻게 이런 악독하고도 역겨운 일을 저지를 수가 있어? 당신 이번 일을 어떻게 할 셈이야?”임채원은 계속해서 차설아를 도발해왔다. 전에야 따지기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다지만 차설아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절대 이번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아니면 다음, 또 다음이 있을 것이고 그녀는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은 허리를 곧게 펴고는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어떻게 했으면 하는데?”“하하!”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대표님 참 재밌는 분이시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거야? 상대가 임채원이어도?”차설아의 분노를 직접 확인했는데도 성도윤은 한결같이 높은 자세로 덤덤하게 말했다.“이번 일은 채원이가 너무 심했어. 당신 요구가 타당하다면 될수록 그렇게 해줄게.”“단지 너무 심했을 뿐이야? 당신 눈에는 그렇게 보여?”성도윤의 무심함과 임채원에 대한 관용은 차설아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정말 모르겠어, 임채원한테 정말 단단히 홀렸나? 왜 이렇게 원칙 없이 감싸고 있는 거지? 내가 4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남자가 이런 저속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니. 정말 한때 사랑했던 것마저 후회하게 만드네! 정말 역겨워!’“타당한 요구라고 했지?”차설아는 빨갛게 물든 입술을 치켜올렸다.“그럼 글로벌 매체 앞에서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해. 진심이 느껴진다면 내가 마지못해 용서해 줄게.”성도윤은 미간을 구기면서 차가운 얼굴로 위압감 있게 말했다.“너무 심한 거 아니야?”“너무 심하다고?”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이렇게 역겨운 방식으로 나를 저주하는 건
그녀는 차를 한 대 부르고는 별장 길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극심한 고통에 몸을 휘청거렸다. 성도윤이 언제 따라왔는지 큰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확 잡고는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안색이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거야?”“당신 애인 때문에 화가 나서!”차설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녀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허약하고 힘이 없어 전혀 뿌리칠 수가 없었다.“괜찮아? 병원으로 데려다줄게.”성도윤은 혼자 떠나려는 차설아가 걱정되어 운전할 차를 가지러 가려고 했다.“선심 쓰는 척할 필요 없어!”차설아는 성도윤의 모든 행동들이 가식으로 느껴져 그에게 눈길 한 번 주고 싶지 않아 피식 웃으며 말했다.“만약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당신 애인 잘 설득해서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해. 안 그러면 더 비참해지게 만들 거니까... 아무튼 이 일은 내가 반드시 끝까지 추궁할 테니 임채원은 이 일을 쉽게 넘기지 못할 거야!”차설아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몸이 워낙 허약했기 때문에 생각만큼 큰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그래, 당신 좋을 대로 해, 그럴 자격 있으니까. 지금은 먼저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어.”성도윤은 아이를 달래는 말투로 차설아를 설득하고 있었다.그는 긴 팔로 휘청거리는 차설아의 몸을 부축하고는 슈퍼카가 멈춰 선 곳으로 걸어갔다.“내가 말했었잖아,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이거 놔!”차설아는 고집을 부리며 발버둥 쳤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녀는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다. 분명 상처를 입은 건 자신인데 이 녀석은 원칙 없이 차설아를 보호하질 않나, 괜히 그녀만 악독한 여자 신세가 되고 말이다.그래서 성도윤이 갑작스레 베푼 관심에 차설아는 그 억울함이 분출되었다...‘그래, 이 녀석 그래도 양심은 있네. 아직 구제불능의 지경에 이른 건 아니라고.’두 사람이 마침 슈퍼카 앞에 다다랐을 때, 성도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바로 임채원을 데려간 두 경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성도윤 씨, 얼... 얼른
차설아는 민이 이모를 보자 마치 엄마를 본 듯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민이 이모, 배가 너무 아파요!”그녀는 아이처럼 민이 이모의 품에 와락 안기고는 거침없이 울기 시작했다.4년 동안 차설아는 집안에 변고가 생겨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심지어 성도윤과 이혼을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도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녀도 겨우 스무 살 넘은 여자애일 뿐이었고, 더는 강인한 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아가씨...”민이 이모는 어리둥절했다.어쩌다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차설아를 보며 가슴이 아파 그녀도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차설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괜찮아요, 아가씨. 힘든 일은 다 지나갈 거예요. 민이 이모가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영원히 아가씨 곁에 있을 거니까요!”차설아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민이 이모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이런 편안함을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했기에 차설아의 몸도 덩달아 긴장이 풀리면서 고통이 덜해졌다.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유모였다. 출산 육아 경험이 풍부한 그녀는 차설아의 배를 보고 또 차설아의 안색을 보더니 대충 짐작이 갔다.“아가씨, 혹시 임신하셨어요?”민이 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게...”차설아는 민이 이모에게 알려줄지 고민하고는 부인하려고 했다.하지만 민이 이모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맥박을 살피더니 말했다.“제 짐작이 맞는다면 이제 곧 임신 3개월 되죠?”“민이 이모는 속일 수 없을 줄 알았어요.”차설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민이 이모는 의학 가문 출신이라 뛰어난 의술을 익히 알고 있었다.엄마한테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민이 이모는 할머니께서 직접 차씨 가문으로 모신 분이시라고 한다. 차씨 가문의 여러 가지 사무를 관리하고 임신한 엄마와 나중에 태어난 차설아를 보살펴 출산과 육아 방면으로는 많은 의사들보다도 더 경험이 풍부했다.민이 이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차설아의 맥박을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
성도윤은 묵묵히 참다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경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랑 차설아의 관계는 너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지금 행복해. 네가 보기 불편하면 그냥 나가면 되잖아.”“...”배경윤이 성도윤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붙잡히자 이번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려 했다.성도윤은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지만 배경윤의 저돌적인 공격에 살짝 밀리는 기분이 들어 결국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바로 그 순간, 사도현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성도윤과 배경윤도 순간 굳어버렸다.“오해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성도윤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배경윤을 놓아주었고 배경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도윤의 발을 힘껏 밟았다.“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성도윤은 발끝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차설아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차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는데 그녀의 절친인 배경윤까지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슬쩍 사도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너, 보험 많이 들어둬.”“무슨 뜻이야?”사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뜻이긴? 저 호랑이 같은 여자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성도윤이 배경윤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투덜댔다.그러자 사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우리 경윤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애가 아니야. 분명 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겠지.”그는 중요한 순간에 배경윤 편을 들기로 했다.사실 예전에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마다 배경윤과 말다툼이 잦았다.배경윤은 성도윤을 두고 철저히 쓰레기라고 욕했고 사도현은 차설아가 너무 까다롭다고 반박하며 두 사람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곤 했다.하지만 이
“그만 좀 해요, 너무 닭살 돋아요.”차설아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랑 고백을 들으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쑥스럽기보다 오히려 닭살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엔 성도윤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전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입만 열면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성도윤이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뒤 말했다.“물 받아놨어. 들어가서 몸 좀 풀고 와.”“좋긴 한데... 좀 나가주겠어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안 되지. 당신이 미끄러지거나 수건이 필요하거나 옷을 입어야 할 때 누가 도와줘?”“괜찮아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도윤 씨가 여기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어요.”차설아는 아직 성도윤과 그렇게까지 오픈된 관계는 아니었다.게다가 자신만 벗고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알겠어. 그럼 욕조까지만 데려 줄게. 다 끝나면 전화해.”성도윤이 한발 물러나며 휴대폰을 욕조 옆 선반에 올려놨다.“여기 핸드폰 놔뒀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야.”“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요!”차설아가 손을 휘저으며 성도윤을 재촉했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차설아는 그가 정말 나갔다고 확신하고서야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원래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얬다. 실루엣만 봐도 누구든 넋을 놓을 정도였다.그런데, 옷을 벗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씨, 변태예요?!”“들켰네.”성도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차설아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불만 지르고... 알겠어, 나 간다.”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더 있다가는 차설아가 진짜로 그를 때려눕힐지도 몰랐다.성도윤은 자
“와, 대박! 이런 주제에 감히 남자를 뺏으려고 했다고?”그 여자들은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와 배경윤을 마구 찍어댔다.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으...”배경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차설아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그 여자들과 맞서야 해서 허둥지둥했다.“꺼져!”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도윤이 험상꿎은 얼굴로 난동을 부리던 여자 하나를 단숨에 잡아채 거침없이 밀쳐버렸다. “설아야!”그는 온몸에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서 있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저 없이 배경윤을 밀어내고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았다.“도윤 씨?”차설아가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가 순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가까이 오지 마요. 나 더러워요.”“상관없어.”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두 손을 꼭 쥐고는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그 모습을 본 여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퍼졌고 각종 편집과 조롱으로 도배되었다.온라인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세상에 공평한 법은 있구나. 이게 바로 업보지!][아무리 그래도 팬들이 너무 폭력적이야.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리고 바로 이 영상을 통해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한편, 성진의 차 안.성진은 무료한 듯 핸드폰을 스크롤내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최근 권력 싸움에서 그는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선글라스를 낀 채,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서 있는 차설아.그 순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설아의 눈이...”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그가 가지고 있는 이 눈은 바로 차설아가 준 것이었다.여러 감
“당연히 다르지!”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도윤 씨 한 사람만 좋아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선우시원이든, 성진 씨든, 내 선택은 항상 도윤 씨였어. 하지만 넌 다르잖아... 네 마음은 진찬영 씨한테도 가고 도현 씨한테도 끌리고 있잖아. 솔직히 말하면, 너 둘 다 갖고 싶어 하는 거 맞지?”[너 진짜 무섭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집어내냐!]배경윤은 차설아의 날카로운 분석을 듣고 반박도 못 하고 민망하게 웃었다.사실 그녀도 자신이 왜 이렇게 고민하는지 몰랐고 이제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욕심이 많았던 거였다.“그러니까, 이제 솔직해지자. 굳이 도망갈 필요 없어. 양쪽 다 품으면 되잖아? 왼쪽엔 한 명, 오른쪽엔 한 명. 얼마나 좋아? 만약 내가 두 사람을 좋아할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후궁 3천은 거느렸을걸?”차설아가 반은 농담, 반은 진심으로 말했다.[야, 진짜 맞는 말이네! 네 말 듣고 나니까 머리가 확 맑아졌어!]배경윤은 갑자기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신나게 글을 써 내려갔다.[가만 생각해 보니까, 역사적으로 연애에서 이득 본 건 전부 남자들이었어. 우리는 애 낳아야지, 생리해야지, 시댁 챙겨야지, 애 키워야지, 일도 해야지, 불륜까지 걱정해야지... 정작 이득은 다 남자들이 보고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남편을 두 명쯤 두는 것도 합리적인 거 아니야?]“그치? 나는 진찬영 씨랑 도현 씨 둘 다 괜찮다고 보는데? 한 명은 집에서 살림하고 나 챙겨주고 한 명은 데이트하고... 완벽한 조합 아니야?”[하하하, 그러네, 그러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배경윤은 벌써 왼쪽엔 진찬영을, 오른쪽엔 사도현을 끼고 달콤한 나날을 보내는 상상을 하며 싱글벙글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너 아까 네가 오직 성도윤 한 사람만 좋아했다고 했잖아. 설마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거야?]“어... 그러니까..
불과 20분도 채 안 돼서 배경윤은 성도윤은 물론 그의 주변 사람까지 깡그리 욕해버렸다.차설아는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고 이런 분위기에서 성도윤과 다시 화해했다는 사실을 밝힐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됐고, 너 얘기나 해 봐. 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은 잘 끝났어? 최종 선택은 누구야?”“이 타이밍에 왜 하필 이걸 묻냐, 이 친구야!”배경윤은 코를 킁킁대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또 귤을 집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나 몇 회 봤는데 사도현 씨도 그렇고 진찬영 씨도 그렇고, 둘 다 너한테 진심이더라. 지금 많이 고민되겠어, 맞지?”차설아도 친구의 선택이 궁금했다.“하... 너까지 이 얘기를 꺼내다니, 나 진짜 이 주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퇴원 후 팬들을 만나고 오빠를 만나고 그리고 차설아를 만나기까지, 늘 똑같은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그래, 사도현과 진찬영, 둘 다 진심이었어. 그런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더 좋아하는 걸까?’“설아야, 너라면... 내가 누구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말을 가장 신뢰했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너만 말해 봐. 네가 고르라고 하면 난 그냥 그 사람 선택할게.”“장난치지 마. 이런 중요한 인생 결정을 남한테 맡기면 안 돼. 네가 직접 결정해야지.”“내가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잖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찬영 씨가 더 맞는 것 같아. 여러 면에서 봤을 때 우리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거든. 그런데...”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찬영 씨가 나한테 마취 깨고 난 뒤의 영상을 보여줬거든. 그걸 보고서야 알았어. 내 무의식은 사도현한테 더 끌리고 있더라. 거의 그를 한입에 집어삼킬 기세였어. 이유 없이 스킨십하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나 진짜 미쳤나 봐.”“음, 알겠다. 그러니까 네가 진찬영 씨를 좋아하는 감정은 ‘영혼의 동반자’
두 사람은 점점 지루해졌다.[우리 근처 공원 가볼까? 여기 많이 변했더라. 원래 화학 공장을 지으려던 곳인데 결국 보존돼서 주민 지역으로 바뀌었대. 습지 공원도 새로 조성돼서 꽤 예쁘더라고...]배경윤은 문장을 입력하다 문득 차설아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문장을 고쳐 적었다.[우리 근처 습지 공원 가볼래? 공기가 정말 좋더라.]“좋아!”차설아는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녀도 사실 집에만 계속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가 데리고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참이었다.배경윤은 차설아의 손을 잡고 함께 근처 습지 공원으로 향했다.공원 안에는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었고 호숫가엔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차설아와 배경윤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그곳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호수 중앙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신선한 공기와 은은한 물풀 향기가 물씬 느껴졌고 햇살이 호수 위로 내려앉아 반짝이며 일렁였다.[괜찮으면 눈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배경윤은 귤을 까면서도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타자한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 차설아에게 물었다.“빚을 갚았어.”차설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빚이길래 네 눈까지 내줘야 했어?]“마음의 빚.”[마음의 빚이라니, 누구한테?]배경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무슨 빚을 졌다고 그래? 항상 손해 보는 쪽은 너였잖아.]“성진 씨...”차설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예전에,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자신의 눈을 도윤 씨에게 줬어.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었는데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어. 그의 인생을 망쳐버린 게 결국 나였으니까. 이 은혜를 갚지 않으면 평생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어.”[뭐라고? 네 말은, 네 눈을 성진한테 줬다는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귤을 손에 꽉 쥐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