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기쁜 마음에 다급하게 물었다.“어디 있어요? 얼른 갖다주세요.”젊은 하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사모님, 상자가 언제 지하실로 옮겨졌는진 모르겠지만... 한 번 직접 가보세요!”“지하실에 있다고요?”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힘들게 여러 군데를 찾아봤는데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을 간과했다니, 역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하지만 여자의 얼굴을 보니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향했다.성도윤도 눈살을 찌푸리더니 긴 다리로 묵묵히 차설아의 뒤를 따랐다.성씨 가문 본가의 지하실은 지하 2층에 있었는데 굽이굽이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어떤 재난이 일어났을 때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에 지하실은 캄캄하고 공기가 탁해 평소에는 사람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지하실 앞에 도착하자 차설아는 문이 약간 열려있는 걸 발견했다. 그 안에는 어두운 붉은색 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으쓱한 기운이 풍겼다.“바, 바로 이 안이에요!”젊은 하인이 문밖에 서서 한사코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차설아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여기는 결국 그녀가 4년 동안 묵은 집이라 두려울 것도 없어 그냥 문을 밀고 들어갔다.“아악!”눈앞의 장면이 너무 기괴해서 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몸을 휘청거리며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는데.“소리는 왜 지르는 거야!”성도윤이 긴 팔로 차설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잡았다. 넓은 가슴팍은 그녀에게 무한한 안정감을 가져다줬다.차설아가 뒤돌아봤다. 잔뜩 겁에 질린 그녀는 차가운 남자와 눈을 맞췄다.‘이 녀석은 언제 따라온 거야! 귀신인 줄 알았네, 소리도 없이 따라와서!’그녀는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지하실에 널려있는 기괴한 물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이 물건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놓은 거야? 무섭지 않아?”성도윤은 차가운 시선으로 지하실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무섭긴 하네.”백여 평의 지하실에는 어
아마 오늘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무리한 듯했다.차설아는 복부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을 겨우 참으며 저주가 가득 적힌 포대기를 손에 꼭 쥐었다.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일렁였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성도윤을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당신 애인은 어떻게 이런 악독하고도 역겨운 일을 저지를 수가 있어? 당신 이번 일을 어떻게 할 셈이야?”임채원은 계속해서 차설아를 도발해왔다. 전에야 따지기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다지만 차설아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절대 이번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아니면 다음, 또 다음이 있을 것이고 그녀는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성도윤은 허리를 곧게 펴고는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어떻게 했으면 하는데?”“하하!”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대표님 참 재밌는 분이시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거야? 상대가 임채원이어도?”차설아의 분노를 직접 확인했는데도 성도윤은 한결같이 높은 자세로 덤덤하게 말했다.“이번 일은 채원이가 너무 심했어. 당신 요구가 타당하다면 될수록 그렇게 해줄게.”“단지 너무 심했을 뿐이야? 당신 눈에는 그렇게 보여?”성도윤의 무심함과 임채원에 대한 관용은 차설아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정말 모르겠어, 임채원한테 정말 단단히 홀렸나? 왜 이렇게 원칙 없이 감싸고 있는 거지? 내가 4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남자가 이런 저속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니. 정말 한때 사랑했던 것마저 후회하게 만드네! 정말 역겨워!’“타당한 요구라고 했지?”차설아는 빨갛게 물든 입술을 치켜올렸다.“그럼 글로벌 매체 앞에서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해. 진심이 느껴진다면 내가 마지못해 용서해 줄게.”성도윤은 미간을 구기면서 차가운 얼굴로 위압감 있게 말했다.“너무 심한 거 아니야?”“너무 심하다고?”차설아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이렇게 역겨운 방식으로 나를 저주하는 건
그녀는 차를 한 대 부르고는 별장 길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극심한 고통에 몸을 휘청거렸다. 성도윤이 언제 따라왔는지 큰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확 잡고는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안색이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거야?”“당신 애인 때문에 화가 나서!”차설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녀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허약하고 힘이 없어 전혀 뿌리칠 수가 없었다.“괜찮아? 병원으로 데려다줄게.”성도윤은 혼자 떠나려는 차설아가 걱정되어 운전할 차를 가지러 가려고 했다.“선심 쓰는 척할 필요 없어!”차설아는 성도윤의 모든 행동들이 가식으로 느껴져 그에게 눈길 한 번 주고 싶지 않아 피식 웃으며 말했다.“만약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당신 애인 잘 설득해서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해. 안 그러면 더 비참해지게 만들 거니까... 아무튼 이 일은 내가 반드시 끝까지 추궁할 테니 임채원은 이 일을 쉽게 넘기지 못할 거야!”차설아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몸이 워낙 허약했기 때문에 생각만큼 큰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그래, 당신 좋을 대로 해, 그럴 자격 있으니까. 지금은 먼저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어.”성도윤은 아이를 달래는 말투로 차설아를 설득하고 있었다.그는 긴 팔로 휘청거리는 차설아의 몸을 부축하고는 슈퍼카가 멈춰 선 곳으로 걸어갔다.“내가 말했었잖아,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이거 놔!”차설아는 고집을 부리며 발버둥 쳤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녀는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다. 분명 상처를 입은 건 자신인데 이 녀석은 원칙 없이 차설아를 보호하질 않나, 괜히 그녀만 악독한 여자 신세가 되고 말이다.그래서 성도윤이 갑작스레 베푼 관심에 차설아는 그 억울함이 분출되었다...‘그래, 이 녀석 그래도 양심은 있네. 아직 구제불능의 지경에 이른 건 아니라고.’두 사람이 마침 슈퍼카 앞에 다다랐을 때, 성도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바로 임채원을 데려간 두 경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성도윤 씨, 얼... 얼른
차설아는 민이 이모를 보자 마치 엄마를 본 듯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민이 이모, 배가 너무 아파요!”그녀는 아이처럼 민이 이모의 품에 와락 안기고는 거침없이 울기 시작했다.4년 동안 차설아는 집안에 변고가 생겨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심지어 성도윤과 이혼을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도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녀도 겨우 스무 살 넘은 여자애일 뿐이었고, 더는 강인한 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아가씨...”민이 이모는 어리둥절했다.어쩌다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차설아를 보며 가슴이 아파 그녀도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차설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괜찮아요, 아가씨. 힘든 일은 다 지나갈 거예요. 민이 이모가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영원히 아가씨 곁에 있을 거니까요!”차설아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민이 이모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이런 편안함을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했기에 차설아의 몸도 덩달아 긴장이 풀리면서 고통이 덜해졌다.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유모였다. 출산 육아 경험이 풍부한 그녀는 차설아의 배를 보고 또 차설아의 안색을 보더니 대충 짐작이 갔다.“아가씨, 혹시 임신하셨어요?”민이 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게...”차설아는 민이 이모에게 알려줄지 고민하고는 부인하려고 했다.하지만 민이 이모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맥박을 살피더니 말했다.“제 짐작이 맞는다면 이제 곧 임신 3개월 되죠?”“민이 이모는 속일 수 없을 줄 알았어요.”차설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민이 이모는 의학 가문 출신이라 뛰어난 의술을 익히 알고 있었다.엄마한테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민이 이모는 할머니께서 직접 차씨 가문으로 모신 분이시라고 한다. 차씨 가문의 여러 가지 사무를 관리하고 임신한 엄마와 나중에 태어난 차설아를 보살펴 출산과 육아 방면으로는 많은 의사들보다도 더 경험이 풍부했다.민이 이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차설아의 맥박을
“큰사모님 얘기가 궁금한 거예요?”민이 이모는 차설아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그럼 미안하게 되었네요, 저도 큰사모님에 대해선 잘 몰라요. 한 번밖에 보지 못했거든요...”“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요?”“네!”민이 이모는 회상에 잠기더니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저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모씨 가문은 평생 성씨 가문을 모시며 살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큰사모님께서 저를 찾아오시고 저에게 차씨 가문의 집사일 외에 그당시 임신한 사모님과 곧 태어날 아가씨를 돌볼 것을 제의하셨죠. 저는 무조건 큰사모님의 지시를 따랐습니다.”“큰사모님은 워낙 신비로운 분이셨어요. 그 어떤 공식 석상에서도 얼굴을 비추시지 않으셨고 저를 만날 때도 베일을 쓰고 계셨어요. 큰사모님을 뵌 건 딱 그 한 번뿐이었어요.”“큰 사모님께선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셨죠. 단지 ‘아름답다’는 말로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가지셨어요.”“제가 처음 차씨 가문으로 왔을 때 큰사모님께서는 이미 떠나셨어요. 어디로 떠나셨는지는 어르신,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 모두 함구하셨어요. 그 이후로 아무도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죠...”차설아가 의기소침하게 말했다.“그래요, 할아버지도 할머니에 대해 전혀 얘기하지 않으셨잖아요. 집에는 할머니 사진도 없고요. 하지만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모두 할머니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동안 할머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부득이하게 떠나야 했는지 알고 싶어요.”민이 이모한테서 유용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는데 어쩌면 민이 이모가 알고 있는 것이 그녀보다도 많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여러 가지 경로로 겨우 짜깁기하여 조금의 정보를 알아냈었다.할머니 성이란은 머나먼 해주시의 가장 오래되고 신비로운 가문인 성씨 가문 출신이었다.이 가문은 한때 무한의 영광을 누렸지만 어떤 특별한 이유로 지금은 세월의 연륜 속으로 사라져 아무도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존재로 되었다.“아
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배를 보더니 선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뱃속의 아이를 안정시키고 건강하게 아이를 낳는 거예요.”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차설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민이 이모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차설아는 민이 이모를 굳게 믿고 있었다, 민이 이모도 워낙 입이 무겁기에 차설아의 허락을 받지 않은 한 이 비밀을 영원히 지킬 것이다.그 후 며칠간, 차설아는 모든 활동을 미루고 아이의 안정을 위해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민이 이모도 그녀를 정성껏 보살폈다.민이 이모는 역시 의학 가문 출신이었다. 탕약을 몇 첩 마시더니 차설아의 사소한 병들은 다 나았다. 더는 걸핏하면 피곤해지는 일이 없었고 전보다 활력이 넘쳤다. 심지어 입맛도 살아 하루에 식사를 여러 끼나 먹었다.이날, 민이 이모는 아침 일찍이 장을 보러 나갔다. 차설아는 아직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따스한 햇빛이 몸에 내리쬐어 편안함을 안겨줬다.그렇게 차설아는 다짐했다, 이제 비즈니스가 안정기에 들어서면 그녀는 아이와 민이 이모를 데리고 외국에 가서 생활할 계획이었다.그때면 차설아는 전혀 금전적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온종일 느릿느릿 여유롭게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쾌적한 기분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집 밑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겁내지 말고 다 부숴!”“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나? 오늘 여기 제대로 부수지 않으면 너희들 다 나한테 죽도록 맞을 각오해!”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더니 불만의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래서 차설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누군가가 집에 쳐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있다.그녀는 묵묵히 침대에서 일어나 아무 가디건을 밖에 걸치고는 슬리퍼를 신은 채 상황을 살피러 나갔다.아래층에는 흰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쇠 파이프를 든 건달 네, 다섯 명을 지휘하며
“내가 몸조리를 다 하고 당신들을 찾아가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찾아오다니... 눈치는 있네.”차설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계단을 내리면서 말했다. 손가락에서는 ‘뚝뚝’ 소리까지 났다.그녀는 4년 전에 민이 이모를 생매장한 사람이 바로 소씨 그룹 사장인 소건우의 심복, 한진규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었다.그녀는 한진규가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 다짐했다.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있는 흰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바로 한진규였다.한진규와 건달들은 소리를 듣고 시선을 차설아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하하, 누군가 했는데 겨우 살아남은 천한 차씨 집안 핏줄 아니야?”“우리 사장님은 일찍이 차씨 집안의 뿌리를 뽑고 싶어 하셨는데 4년 전에 성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한 번 봐줬을 뿐이야. 하지만 지금 넌 이미 성도윤과 이혼한 사이지. 그 누구도 네 뒤를 봐줄 수 없을 것이라고. 마침 네년의 목숨을 끊어 사장님한테서 상을 받아야지!”차설아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개도 간식을 얻고 싶으면 주인한테 재롱을 떨어. 당신한테는 그런 재주라도 있어? 입을 함부로 놀리기 전에 먼저 옷을 처리하는 게 좋을 텐데...”“아까 오줌을 싼 멋진 모습은 이미 동영상으로 녹화했어. 소건우는 심복인 당신이 관건적인 시각에 이렇게 겁에 질려하는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더군다나 당신은 방금 소건우를 배신하기까지 했어.”차설아가 말하고는 휴대폰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음량으로 방금 한진규가 민이 이모을 보고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린 동영상을 반복 재생했다.“푸하하하!”건달들은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겁쟁이가 따로 없네!”민이 이모도 배를 끌어안으며 깔깔 웃었다.아마 고생만 4년 동안 하다가 처음으로 이렇게 마음 놓고 웃었을 것이다.한진규의 안색은 한껏 어두워졌다. 그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차설아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X발, 감히 나한테 장난을 쳐? 내가 오늘 반드시 널 다리 하나 못 쓰게 만든다!
그 누구보다도 단순하고 난폭한 수법은 누가 봐도 해안시 절대적인 일인자인, 얼음장처럼 차가운 성도윤이었다.하지만 그런 귀하신 분이 도대체 왜 ‘누추한 흉가’로 온 것인가? 차설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한진규는 차설아에게 당해 엉덩이가 깨졌고, 또 다른 사람에게 걷어차여 뼈가 부서질 고통이 전해왔으니 화가 치밀어 올라 그 누구보다 흉악한 표정으로 상대에게 따지려고 했다.하지만 얼음장처럼 싸늘한 성도윤와 눈을 마주치자 그는 얼굴이 바로 새하얗게 질리더니 하마터면 또 오줌을 지릴 뻔했다.“성... 성 대표님. 여, 여긴 어쩐 일이세요?”성도윤은 개처럼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한진규를 내려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은 어조로 물었다.“당신, 소건우 쪽 사람 아니야?”전에 소건우와 비즈니스를 할 때부터 한진규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한진규는 소건우의 경호원들 중에서 서열 1위였는데 소건우는 어디든 그를 데리고 다녔다.“맞습니다. 저는 한진규라고 하고 저희 사장님 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습니다. 전에 소씨 그룹과 장기 계약을 하실 때도 제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함께했죠. 대표님은 워낙 배울 점이 많으신 분이라 항상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한진규는 한껏 낮은 자세로 말하더니 성도윤에게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성도윤의 신분이나 지위가 모두 소건우보다 높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 그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차가운 얼굴의 성도윤은 한진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거실을 쭉 한 번 훑어보더니 난장판이 된 집안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그게...”한진규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희 사장님께서 차씨 집안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어요. 이 때문에 많은 이웃들이 불안한 마음을 느꼈고요. 그중에는 사장님 친구분들도 적지 않게 계셨습니다...”“사장님은 워낙 의리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
성도윤은 묵묵히 참다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경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랑 차설아의 관계는 너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지금 행복해. 네가 보기 불편하면 그냥 나가면 되잖아.”“...”배경윤이 성도윤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붙잡히자 이번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려 했다.성도윤은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지만 배경윤의 저돌적인 공격에 살짝 밀리는 기분이 들어 결국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바로 그 순간, 사도현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성도윤과 배경윤도 순간 굳어버렸다.“오해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성도윤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배경윤을 놓아주었고 배경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도윤의 발을 힘껏 밟았다.“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성도윤은 발끝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차설아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차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는데 그녀의 절친인 배경윤까지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슬쩍 사도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너, 보험 많이 들어둬.”“무슨 뜻이야?”사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뜻이긴? 저 호랑이 같은 여자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성도윤이 배경윤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투덜댔다.그러자 사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우리 경윤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애가 아니야. 분명 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겠지.”그는 중요한 순간에 배경윤 편을 들기로 했다.사실 예전에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마다 배경윤과 말다툼이 잦았다.배경윤은 성도윤을 두고 철저히 쓰레기라고 욕했고 사도현은 차설아가 너무 까다롭다고 반박하며 두 사람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곤 했다.하지만 이
“그만 좀 해요, 너무 닭살 돋아요.”차설아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랑 고백을 들으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쑥스럽기보다 오히려 닭살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엔 성도윤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전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입만 열면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성도윤이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뒤 말했다.“물 받아놨어. 들어가서 몸 좀 풀고 와.”“좋긴 한데... 좀 나가주겠어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안 되지. 당신이 미끄러지거나 수건이 필요하거나 옷을 입어야 할 때 누가 도와줘?”“괜찮아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도윤 씨가 여기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어요.”차설아는 아직 성도윤과 그렇게까지 오픈된 관계는 아니었다.게다가 자신만 벗고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알겠어. 그럼 욕조까지만 데려 줄게. 다 끝나면 전화해.”성도윤이 한발 물러나며 휴대폰을 욕조 옆 선반에 올려놨다.“여기 핸드폰 놔뒀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야.”“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요!”차설아가 손을 휘저으며 성도윤을 재촉했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차설아는 그가 정말 나갔다고 확신하고서야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원래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얬다. 실루엣만 봐도 누구든 넋을 놓을 정도였다.그런데, 옷을 벗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씨, 변태예요?!”“들켰네.”성도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차설아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불만 지르고... 알겠어, 나 간다.”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더 있다가는 차설아가 진짜로 그를 때려눕힐지도 몰랐다.성도윤은 자
“와, 대박! 이런 주제에 감히 남자를 뺏으려고 했다고?”그 여자들은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와 배경윤을 마구 찍어댔다.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으...”배경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차설아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그 여자들과 맞서야 해서 허둥지둥했다.“꺼져!”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도윤이 험상꿎은 얼굴로 난동을 부리던 여자 하나를 단숨에 잡아채 거침없이 밀쳐버렸다. “설아야!”그는 온몸에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서 있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저 없이 배경윤을 밀어내고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았다.“도윤 씨?”차설아가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가 순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가까이 오지 마요. 나 더러워요.”“상관없어.”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두 손을 꼭 쥐고는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그 모습을 본 여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퍼졌고 각종 편집과 조롱으로 도배되었다.온라인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세상에 공평한 법은 있구나. 이게 바로 업보지!][아무리 그래도 팬들이 너무 폭력적이야.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리고 바로 이 영상을 통해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한편, 성진의 차 안.성진은 무료한 듯 핸드폰을 스크롤내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최근 권력 싸움에서 그는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선글라스를 낀 채,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서 있는 차설아.그 순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설아의 눈이...”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그가 가지고 있는 이 눈은 바로 차설아가 준 것이었다.여러 감
“당연히 다르지!”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도윤 씨 한 사람만 좋아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선우시원이든, 성진 씨든, 내 선택은 항상 도윤 씨였어. 하지만 넌 다르잖아... 네 마음은 진찬영 씨한테도 가고 도현 씨한테도 끌리고 있잖아. 솔직히 말하면, 너 둘 다 갖고 싶어 하는 거 맞지?”[너 진짜 무섭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집어내냐!]배경윤은 차설아의 날카로운 분석을 듣고 반박도 못 하고 민망하게 웃었다.사실 그녀도 자신이 왜 이렇게 고민하는지 몰랐고 이제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욕심이 많았던 거였다.“그러니까, 이제 솔직해지자. 굳이 도망갈 필요 없어. 양쪽 다 품으면 되잖아? 왼쪽엔 한 명, 오른쪽엔 한 명. 얼마나 좋아? 만약 내가 두 사람을 좋아할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후궁 3천은 거느렸을걸?”차설아가 반은 농담, 반은 진심으로 말했다.[야, 진짜 맞는 말이네! 네 말 듣고 나니까 머리가 확 맑아졌어!]배경윤은 갑자기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신나게 글을 써 내려갔다.[가만 생각해 보니까, 역사적으로 연애에서 이득 본 건 전부 남자들이었어. 우리는 애 낳아야지, 생리해야지, 시댁 챙겨야지, 애 키워야지, 일도 해야지, 불륜까지 걱정해야지... 정작 이득은 다 남자들이 보고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남편을 두 명쯤 두는 것도 합리적인 거 아니야?]“그치? 나는 진찬영 씨랑 도현 씨 둘 다 괜찮다고 보는데? 한 명은 집에서 살림하고 나 챙겨주고 한 명은 데이트하고... 완벽한 조합 아니야?”[하하하, 그러네, 그러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배경윤은 벌써 왼쪽엔 진찬영을, 오른쪽엔 사도현을 끼고 달콤한 나날을 보내는 상상을 하며 싱글벙글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너 아까 네가 오직 성도윤 한 사람만 좋아했다고 했잖아. 설마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거야?]“어... 그러니까..
불과 20분도 채 안 돼서 배경윤은 성도윤은 물론 그의 주변 사람까지 깡그리 욕해버렸다.차설아는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고 이런 분위기에서 성도윤과 다시 화해했다는 사실을 밝힐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됐고, 너 얘기나 해 봐. 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은 잘 끝났어? 최종 선택은 누구야?”“이 타이밍에 왜 하필 이걸 묻냐, 이 친구야!”배경윤은 코를 킁킁대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또 귤을 집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나 몇 회 봤는데 사도현 씨도 그렇고 진찬영 씨도 그렇고, 둘 다 너한테 진심이더라. 지금 많이 고민되겠어, 맞지?”차설아도 친구의 선택이 궁금했다.“하... 너까지 이 얘기를 꺼내다니, 나 진짜 이 주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퇴원 후 팬들을 만나고 오빠를 만나고 그리고 차설아를 만나기까지, 늘 똑같은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그래, 사도현과 진찬영, 둘 다 진심이었어. 그런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더 좋아하는 걸까?’“설아야, 너라면... 내가 누구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말을 가장 신뢰했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너만 말해 봐. 네가 고르라고 하면 난 그냥 그 사람 선택할게.”“장난치지 마. 이런 중요한 인생 결정을 남한테 맡기면 안 돼. 네가 직접 결정해야지.”“내가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잖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찬영 씨가 더 맞는 것 같아. 여러 면에서 봤을 때 우리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거든. 그런데...”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찬영 씨가 나한테 마취 깨고 난 뒤의 영상을 보여줬거든. 그걸 보고서야 알았어. 내 무의식은 사도현한테 더 끌리고 있더라. 거의 그를 한입에 집어삼킬 기세였어. 이유 없이 스킨십하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나 진짜 미쳤나 봐.”“음, 알겠다. 그러니까 네가 진찬영 씨를 좋아하는 감정은 ‘영혼의 동반자’
두 사람은 점점 지루해졌다.[우리 근처 공원 가볼까? 여기 많이 변했더라. 원래 화학 공장을 지으려던 곳인데 결국 보존돼서 주민 지역으로 바뀌었대. 습지 공원도 새로 조성돼서 꽤 예쁘더라고...]배경윤은 문장을 입력하다 문득 차설아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문장을 고쳐 적었다.[우리 근처 습지 공원 가볼래? 공기가 정말 좋더라.]“좋아!”차설아는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녀도 사실 집에만 계속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가 데리고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참이었다.배경윤은 차설아의 손을 잡고 함께 근처 습지 공원으로 향했다.공원 안에는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었고 호숫가엔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차설아와 배경윤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그곳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호수 중앙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신선한 공기와 은은한 물풀 향기가 물씬 느껴졌고 햇살이 호수 위로 내려앉아 반짝이며 일렁였다.[괜찮으면 눈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배경윤은 귤을 까면서도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타자한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 차설아에게 물었다.“빚을 갚았어.”차설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빚이길래 네 눈까지 내줘야 했어?]“마음의 빚.”[마음의 빚이라니, 누구한테?]배경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무슨 빚을 졌다고 그래? 항상 손해 보는 쪽은 너였잖아.]“성진 씨...”차설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예전에,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자신의 눈을 도윤 씨에게 줬어.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었는데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어. 그의 인생을 망쳐버린 게 결국 나였으니까. 이 은혜를 갚지 않으면 평생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어.”[뭐라고? 네 말은, 네 눈을 성진한테 줬다는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귤을 손에 꽉 쥐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