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모님 얘기가 궁금한 거예요?”민이 이모는 차설아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그럼 미안하게 되었네요, 저도 큰사모님에 대해선 잘 몰라요. 한 번밖에 보지 못했거든요...”“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요?”“네!”민이 이모는 회상에 잠기더니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저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모씨 가문은 평생 성씨 가문을 모시며 살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큰사모님께서 저를 찾아오시고 저에게 차씨 가문의 집사일 외에 그당시 임신한 사모님과 곧 태어날 아가씨를 돌볼 것을 제의하셨죠. 저는 무조건 큰사모님의 지시를 따랐습니다.”“큰사모님은 워낙 신비로운 분이셨어요. 그 어떤 공식 석상에서도 얼굴을 비추시지 않으셨고 저를 만날 때도 베일을 쓰고 계셨어요. 큰사모님을 뵌 건 딱 그 한 번뿐이었어요.”“큰 사모님께선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셨죠. 단지 ‘아름답다’는 말로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가지셨어요.”“제가 처음 차씨 가문으로 왔을 때 큰사모님께서는 이미 떠나셨어요. 어디로 떠나셨는지는 어르신,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 모두 함구하셨어요. 그 이후로 아무도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죠...”차설아가 의기소침하게 말했다.“그래요, 할아버지도 할머니에 대해 전혀 얘기하지 않으셨잖아요. 집에는 할머니 사진도 없고요. 하지만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모두 할머니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동안 할머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부득이하게 떠나야 했는지 알고 싶어요.”민이 이모한테서 유용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는데 어쩌면 민이 이모가 알고 있는 것이 그녀보다도 많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여러 가지 경로로 겨우 짜깁기하여 조금의 정보를 알아냈었다.할머니 성이란은 머나먼 해주시의 가장 오래되고 신비로운 가문인 성씨 가문 출신이었다.이 가문은 한때 무한의 영광을 누렸지만 어떤 특별한 이유로 지금은 세월의 연륜 속으로 사라져 아무도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존재로 되었다.“아
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배를 보더니 선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뱃속의 아이를 안정시키고 건강하게 아이를 낳는 거예요.”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차설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민이 이모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차설아는 민이 이모를 굳게 믿고 있었다, 민이 이모도 워낙 입이 무겁기에 차설아의 허락을 받지 않은 한 이 비밀을 영원히 지킬 것이다.그 후 며칠간, 차설아는 모든 활동을 미루고 아이의 안정을 위해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민이 이모도 그녀를 정성껏 보살폈다.민이 이모는 역시 의학 가문 출신이었다. 탕약을 몇 첩 마시더니 차설아의 사소한 병들은 다 나았다. 더는 걸핏하면 피곤해지는 일이 없었고 전보다 활력이 넘쳤다. 심지어 입맛도 살아 하루에 식사를 여러 끼나 먹었다.이날, 민이 이모는 아침 일찍이 장을 보러 나갔다. 차설아는 아직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따스한 햇빛이 몸에 내리쬐어 편안함을 안겨줬다.그렇게 차설아는 다짐했다, 이제 비즈니스가 안정기에 들어서면 그녀는 아이와 민이 이모를 데리고 외국에 가서 생활할 계획이었다.그때면 차설아는 전혀 금전적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온종일 느릿느릿 여유롭게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쾌적한 기분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집 밑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겁내지 말고 다 부숴!”“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나? 오늘 여기 제대로 부수지 않으면 너희들 다 나한테 죽도록 맞을 각오해!”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더니 불만의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래서 차설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누군가가 집에 쳐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있다.그녀는 묵묵히 침대에서 일어나 아무 가디건을 밖에 걸치고는 슬리퍼를 신은 채 상황을 살피러 나갔다.아래층에는 흰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쇠 파이프를 든 건달 네, 다섯 명을 지휘하며
“내가 몸조리를 다 하고 당신들을 찾아가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찾아오다니... 눈치는 있네.”차설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계단을 내리면서 말했다. 손가락에서는 ‘뚝뚝’ 소리까지 났다.그녀는 4년 전에 민이 이모를 생매장한 사람이 바로 소씨 그룹 사장인 소건우의 심복, 한진규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었다.그녀는 한진규가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 다짐했다.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있는 흰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바로 한진규였다.한진규와 건달들은 소리를 듣고 시선을 차설아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하하, 누군가 했는데 겨우 살아남은 천한 차씨 집안 핏줄 아니야?”“우리 사장님은 일찍이 차씨 집안의 뿌리를 뽑고 싶어 하셨는데 4년 전에 성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한 번 봐줬을 뿐이야. 하지만 지금 넌 이미 성도윤과 이혼한 사이지. 그 누구도 네 뒤를 봐줄 수 없을 것이라고. 마침 네년의 목숨을 끊어 사장님한테서 상을 받아야지!”차설아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개도 간식을 얻고 싶으면 주인한테 재롱을 떨어. 당신한테는 그런 재주라도 있어? 입을 함부로 놀리기 전에 먼저 옷을 처리하는 게 좋을 텐데...”“아까 오줌을 싼 멋진 모습은 이미 동영상으로 녹화했어. 소건우는 심복인 당신이 관건적인 시각에 이렇게 겁에 질려하는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더군다나 당신은 방금 소건우를 배신하기까지 했어.”차설아가 말하고는 휴대폰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음량으로 방금 한진규가 민이 이모을 보고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린 동영상을 반복 재생했다.“푸하하하!”건달들은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겁쟁이가 따로 없네!”민이 이모도 배를 끌어안으며 깔깔 웃었다.아마 고생만 4년 동안 하다가 처음으로 이렇게 마음 놓고 웃었을 것이다.한진규의 안색은 한껏 어두워졌다. 그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차설아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X발, 감히 나한테 장난을 쳐? 내가 오늘 반드시 널 다리 하나 못 쓰게 만든다!
그 누구보다도 단순하고 난폭한 수법은 누가 봐도 해안시 절대적인 일인자인, 얼음장처럼 차가운 성도윤이었다.하지만 그런 귀하신 분이 도대체 왜 ‘누추한 흉가’로 온 것인가? 차설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한진규는 차설아에게 당해 엉덩이가 깨졌고, 또 다른 사람에게 걷어차여 뼈가 부서질 고통이 전해왔으니 화가 치밀어 올라 그 누구보다 흉악한 표정으로 상대에게 따지려고 했다.하지만 얼음장처럼 싸늘한 성도윤와 눈을 마주치자 그는 얼굴이 바로 새하얗게 질리더니 하마터면 또 오줌을 지릴 뻔했다.“성... 성 대표님. 여, 여긴 어쩐 일이세요?”성도윤은 개처럼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한진규를 내려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은 어조로 물었다.“당신, 소건우 쪽 사람 아니야?”전에 소건우와 비즈니스를 할 때부터 한진규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한진규는 소건우의 경호원들 중에서 서열 1위였는데 소건우는 어디든 그를 데리고 다녔다.“맞습니다. 저는 한진규라고 하고 저희 사장님 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습니다. 전에 소씨 그룹과 장기 계약을 하실 때도 제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함께했죠. 대표님은 워낙 배울 점이 많으신 분이라 항상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한진규는 한껏 낮은 자세로 말하더니 성도윤에게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성도윤의 신분이나 지위가 모두 소건우보다 높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 그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차가운 얼굴의 성도윤은 한진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거실을 쭉 한 번 훑어보더니 난장판이 된 집안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그게...”한진규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희 사장님께서 차씨 집안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어요. 이 때문에 많은 이웃들이 불안한 마음을 느꼈고요. 그중에는 사장님 친구분들도 적지 않게 계셨습니다...”“사장님은 워낙 의리
성도윤은 차설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는 혼자 별장을 둘러봤다.“이 별장 구조가 별로네. 거실도 너무 작고, 층고가 높지 않아. 그리고 계단도 좁아서 다시 공사해야겠는걸?”“그리고 인테리어도 너무 낡아빠졌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선시대 때 남겨진 집인 줄 알겠어.”“그리고 집안의 기둥 꽃무늬도 정교하지 않아. 부수고 다시 짓는 게 좋을 거야.”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성도윤은 거만한 자세로 별장 안팎 모두 한 번씩 흠을 찾았으니 말이다.‘이 녀석 제정신인 거야? 왜 남의 집에 훈수를 둬?’“도윤 씨, 많이 한가해? 언제부터 디자이너로 전향했어? 우리 집이 어떤지는 당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거 없어.”성도윤은 허리를 곧게 편 채 거실 중앙에 서 있었다. 그는 차설아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벽에 걸린 산수화를 전념해서 감상하고 있었다.“이 그림 좋네. 아마도 오도자의 ‘목동만가도’겠지? 만약 진품이라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할 거야.”성도윤의 날카로운 안목에 차설아는 흠칫 놀랐다.그녀는 돈밖에 모르는 성도윤이 그림이나 서예에도 조예가 깊은 줄은 몰랐다.이 그림은 별장에서 가장 고가의 물건이 맞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 그림의 가치를 몰라봤다. 그래서 이 그림은 차씨 집안의 여러 차례 변고 끝에도 보존될 수 있었다.이 그림은 차설아의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그림이라 항상 벽에 걸려 있었다. 차설아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곤 했다.신기하게도 그녀는 성도윤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더니 그에게서 아버지와도 같은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마치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산처럼 말이다. 그가 있는 한 그녀의 세상은 안전할 것이고, 하늘이 무너져도 그는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차설아, 너 미쳤지. 그래, 단단히 미친 거야!’옆에 있던 민이 이모는 차설아를 보다가 다시 성도윤을 보더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그녀는 성도윤을 처음으로 보는 거지만 차설아가 말한 ‘냉혈하고 무정한 놈’의 이미지는 아니었다.적어도 방금 망설임 없이 차설아
하지만 생각해 보니 불편한 사람은 차설아 자신이었다.성도윤은 자기 집에 있는 듯, 심지어 차설아보다 더 편해 보였다.얼굴이 충분히 두꺼우면 부끄러운 건 타인의 몫이었다.거실 전체는 한진규 패거리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었고, 소파 구역만 그나마 온전한 편이었다.성도윤은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포개고 덤덤하게 물었다.“여기서 지내는 건 괜찮아?”“괜찮지 않으면? 여긴 내 집이야. 당연히 편하지.”차설아는 주위를 둘러보고 웃으며 말했다.“4년 동안 방랑하다가 이제 겨우 집에 돌아왔어. 역시 자기 집이 최고야!”성도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말한 것처럼, 별장의 절반은 당신 거야.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들어가도 돼. 어차피 당신 집이니까!”성도윤의 말에 차설아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온화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이없는 표정이 어렸다.“성도윤, 그런 말은 너무 위선적이라는 생각 안 해? 내연녀 때문에 한밤중에 날 집에서 내보낼 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대?”뒤늦은 후회는 약이 없다지만, 이 남자는 후회가 아니라 목적을 가진 방문이었다.차설아는 성도윤이 자신을 찾으러 온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남자를 답답하게 만들고 싶었다.“전에는 내가 확실히 잘못했어. 임채원이 그런 억지스러운 여자인 줄은 몰랐으니까.”성도윤의 눈에 증오가 스쳤다.임채원을 처음 본 순간을 생각하면, 확실히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보기에는 한없이 연약하고 착하게 생겼지만, 그 두 눈에는 꿍꿍이들로 가득 차 결코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반대로 차설아는 맑고 깨끗한 눈을 지녔다. 평온한 계곡의 맑은 샘처럼 끝까지 바라보아도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순수했다.그런 차설아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성도윤도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만약 임채원이 우리 집안을 이렇게 만들 줄 알았다면, 절대 집에 안 들였어.”성도윤은 성가네 별장에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정원에 만발한
성도윤의 180도 변한 태도에 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오만한 성도윤이 내연녀 때문에 이렇게 오래 온화하고 겸손한 척을 했으니, 지칠만하지!차설아는 턱을 치켜들며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내가 전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임채원이 모든 언론 앞에서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면 된다고.”“적당히 해!”성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눈앞의 여자가 낯설게 느껴졌다.차설아는 이렇게 공격적인 사람이 아니었다.“태아가 불안정해서 병원에 누워있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무릎 꿇고 사과해?”“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차설아는 묵묵히 주먹을 쥐었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지만 쿨한 표정을 지으며 비웃었다.“임채원이 무릎 꿇기 불편하다면, 당신이라도 꿇으면 되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성 대표님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인다면, 과연 얼마나 감동적일까?”성도윤이 자신을 얼마나 각박하고 냉혈한 여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다.차설아는 4년 동안 온순하고 착하게 살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었다. 차라리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더 통쾌했다.성도윤의 얼굴에는 폭풍우가 몰아칠 듯한 분노가 서려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차설아의 냉철함에 화가 났고, 더 화가 난 것은… 더 이상 차설아를 장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무력감은 성도윤을 화나게 했다.“채원이가 잘못을 했지만, 그래도 벌은 이미 받았어.”성도윤은 애써 화를 억누르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차갑게 말했다.“너는 임산부가 아니잖아. 채원이가 당한 고통을 너는 이해할 수 없어. 만약 경제적 배상을 원한다면 원하는 액수를 말해. 그런데 감히 채원이를 건드리면, 부부의 옛정이고 뭐고, 난 상관 안 해.”“하하.”성도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고,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부부의 정?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있었어?”성도윤은 차설아가 본 가장 가식적이고 무정한 남자이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마 탄 왕자님 행세를 하더니 지금은 내연녀를 위해 협박까지 서슴지 않
“제가 그 인간한테 마음이 있어요?”차설아는 젓가락을 멈추고, 예쁜 얼굴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이모, 사람 보는 눈이 늘 정확하시더니, 오늘은 유감이네요. 성도윤이 왜 갑자기 방문을 해서, 심지어 아부까지 하는 줄 알아요?”“혹시… 아가씨를 잊지 못해서 화해하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저었다.“자기 내연녀를 위해 저한테 사정하러 왔어요. 그 교만한 사람이 그딴 여자 때문에 와서 사정을 하다니. 이것만으로도 전 성도윤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이런…”민이 이모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존귀하고 정직해 보이던 성도윤이 이렇게 원칙이 없는 사람일 줄이야! 정말 실망이었다.“사리 분별이 명확한 분이신 것 같던데. 만약 그 내연녀의 인품이 정말 형편없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아요. 혹시 여기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요?”“무슨 오해가 있겠어요?”차설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모는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이 얼마나 원칙이 없이 행동하는지 몰라요. 편애받는 사람은 늘 멋대로 하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죠. 4년이란 시간 동안 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제 문제죠. 제가 매력이 부족한가 봐요.”차설아는 늘 자신만만했지만, 유독 성도윤의 앞에서만, 기형적인 결혼 생활에서는 열등감이 극에 달했다.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차설아는 왜 하필 가식적인 여우에게 지고 말았을까?그래서,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고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기로 했다.민이 이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설아가 이 결혼 생활에서 매우 상처받았고, 여전히 놓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민이 이모는 속으로 뭔가를 결심했다.차설아의 집을 떠난 성도윤은 기분이 아주 나빴다. 완벽한 얼굴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감히 다가갈 수 없는 한기가 배어 있었다.성대 그룹 빌딩 전체에 어두운 분위기가 깔렸고, 직원들도 하나같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바로 이때, 성도윤의 의형제 사도현이 눈치도 없이 소란스럽게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형, 도윤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