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생각해 보니 불편한 사람은 차설아 자신이었다.성도윤은 자기 집에 있는 듯, 심지어 차설아보다 더 편해 보였다.얼굴이 충분히 두꺼우면 부끄러운 건 타인의 몫이었다.거실 전체는 한진규 패거리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었고, 소파 구역만 그나마 온전한 편이었다.성도윤은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포개고 덤덤하게 물었다.“여기서 지내는 건 괜찮아?”“괜찮지 않으면? 여긴 내 집이야. 당연히 편하지.”차설아는 주위를 둘러보고 웃으며 말했다.“4년 동안 방랑하다가 이제 겨우 집에 돌아왔어. 역시 자기 집이 최고야!”성도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말한 것처럼, 별장의 절반은 당신 거야.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들어가도 돼. 어차피 당신 집이니까!”성도윤의 말에 차설아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온화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이없는 표정이 어렸다.“성도윤, 그런 말은 너무 위선적이라는 생각 안 해? 내연녀 때문에 한밤중에 날 집에서 내보낼 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대?”뒤늦은 후회는 약이 없다지만, 이 남자는 후회가 아니라 목적을 가진 방문이었다.차설아는 성도윤이 자신을 찾으러 온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남자를 답답하게 만들고 싶었다.“전에는 내가 확실히 잘못했어. 임채원이 그런 억지스러운 여자인 줄은 몰랐으니까.”성도윤의 눈에 증오가 스쳤다.임채원을 처음 본 순간을 생각하면, 확실히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보기에는 한없이 연약하고 착하게 생겼지만, 그 두 눈에는 꿍꿍이들로 가득 차 결코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반대로 차설아는 맑고 깨끗한 눈을 지녔다. 평온한 계곡의 맑은 샘처럼 끝까지 바라보아도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순수했다.그런 차설아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성도윤도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만약 임채원이 우리 집안을 이렇게 만들 줄 알았다면, 절대 집에 안 들였어.”성도윤은 성가네 별장에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정원에 만발한
성도윤의 180도 변한 태도에 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오만한 성도윤이 내연녀 때문에 이렇게 오래 온화하고 겸손한 척을 했으니, 지칠만하지!차설아는 턱을 치켜들며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내가 전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임채원이 모든 언론 앞에서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면 된다고.”“적당히 해!”성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눈앞의 여자가 낯설게 느껴졌다.차설아는 이렇게 공격적인 사람이 아니었다.“태아가 불안정해서 병원에 누워있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무릎 꿇고 사과해?”“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차설아는 묵묵히 주먹을 쥐었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지만 쿨한 표정을 지으며 비웃었다.“임채원이 무릎 꿇기 불편하다면, 당신이라도 꿇으면 되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성 대표님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인다면, 과연 얼마나 감동적일까?”성도윤이 자신을 얼마나 각박하고 냉혈한 여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다.차설아는 4년 동안 온순하고 착하게 살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었다. 차라리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더 통쾌했다.성도윤의 얼굴에는 폭풍우가 몰아칠 듯한 분노가 서려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차설아의 냉철함에 화가 났고, 더 화가 난 것은… 더 이상 차설아를 장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무력감은 성도윤을 화나게 했다.“채원이가 잘못을 했지만, 그래도 벌은 이미 받았어.”성도윤은 애써 화를 억누르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차갑게 말했다.“너는 임산부가 아니잖아. 채원이가 당한 고통을 너는 이해할 수 없어. 만약 경제적 배상을 원한다면 원하는 액수를 말해. 그런데 감히 채원이를 건드리면, 부부의 옛정이고 뭐고, 난 상관 안 해.”“하하.”성도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고,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부부의 정?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있었어?”성도윤은 차설아가 본 가장 가식적이고 무정한 남자이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마 탄 왕자님 행세를 하더니 지금은 내연녀를 위해 협박까지 서슴지 않
“제가 그 인간한테 마음이 있어요?”차설아는 젓가락을 멈추고, 예쁜 얼굴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이모, 사람 보는 눈이 늘 정확하시더니, 오늘은 유감이네요. 성도윤이 왜 갑자기 방문을 해서, 심지어 아부까지 하는 줄 알아요?”“혹시… 아가씨를 잊지 못해서 화해하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저었다.“자기 내연녀를 위해 저한테 사정하러 왔어요. 그 교만한 사람이 그딴 여자 때문에 와서 사정을 하다니. 이것만으로도 전 성도윤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이런…”민이 이모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존귀하고 정직해 보이던 성도윤이 이렇게 원칙이 없는 사람일 줄이야! 정말 실망이었다.“사리 분별이 명확한 분이신 것 같던데. 만약 그 내연녀의 인품이 정말 형편없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아요. 혹시 여기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요?”“무슨 오해가 있겠어요?”차설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모는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이 얼마나 원칙이 없이 행동하는지 몰라요. 편애받는 사람은 늘 멋대로 하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죠. 4년이란 시간 동안 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제 문제죠. 제가 매력이 부족한가 봐요.”차설아는 늘 자신만만했지만, 유독 성도윤의 앞에서만, 기형적인 결혼 생활에서는 열등감이 극에 달했다.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차설아는 왜 하필 가식적인 여우에게 지고 말았을까?그래서,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고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기로 했다.민이 이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설아가 이 결혼 생활에서 매우 상처받았고, 여전히 놓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민이 이모는 속으로 뭔가를 결심했다.차설아의 집을 떠난 성도윤은 기분이 아주 나빴다. 완벽한 얼굴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감히 다가갈 수 없는 한기가 배어 있었다.성대 그룹 빌딩 전체에 어두운 분위기가 깔렸고, 직원들도 하나같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바로 이때, 성도윤의 의형제 사도현이 눈치도 없이 소란스럽게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형, 도윤
중요한 일이 있으니 찾아왔다고?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당한 굴욕이 생각나 더욱 화가 났다.“너한테 뭔 중요한 일이 있어? 계속 재잘대면 다신 못 오게 한다.”성도윤은 계속 두꺼운 서류 속에 파묻혀, 끊임없이 한기를 품어내는 빙산처럼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모습이었다.‘쯧쯧, 도윤이 형, 제대로 뚜껑 열렸네.’사도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제야 다음에 다시 오라던 예서의 경고를 알아챘다.예서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예서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대표님과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그리고... 나가 버렸다.“예서 씨...”예서는 밖으로 나갔을 뿐만 아니라, 문까지 잠갔다. 사도현은 왠지 호랑이 굴에 벼려진 절망감이 들었다. 지옥의 문에 들어선 기분이었다.“콜록!”사도현은 꾸물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줄곧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도윤에게 말했다.“형, 여기 아무도 없어. 진짜 힘들면 울어도 돼. 일로 자신을 마비시키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돼. 괜찮아. 울어, 남자가 우는 건 죄가 아니야.”“???”성도윤은 고개를 들고 바보를 쳐다보듯 사도현을 보았고,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 앞에서 센 척할 필요 없어. 무릎 꿇고 전처한테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영상 다 봤단 말이야. 그렇게 전처를 좋아하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비록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형만 좋다면 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니야.”사도현은 차설아와의 몇 번의 만남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형은 왜 그런 밋밋한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지? 게다가 완전히 빠졌잖아.”“하지만 형, 아무리 연애 경험이 별로 없다지만 전처 같은 스타일은 다루기 쉬운 거 아니야? 왜 오히려 꽉 잡혀 있어? 이상하잖아...”사도현은 의리있게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사업은 형이 나보다 낫지만, 연애는 내가 더 잘하지! 여자를 공략하는 기술을 가르쳐줘야겠어. 체면은 살려야 될 거 아니야?”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성도윤은 크라프트지 표지의 노트를 열고, 펜으로 힘차게 몇 글자를 썼다. ‘여심공략 비법 정리’사도현은 힐긋 쳐다본 후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형, 다들 형을 빙산처럼 차갑다고 하는데, 난 왜 바보처럼 느껴지지? 여심 공략 비법 같은 건 글이 아닌 마음으로 터득하는 거야. 어떻게 필기까지 할 생각을 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모든 일에는 규칙이 있으니 여심 공략도 마찬가지야. 필기뿐만 아니라 선형 분석, 수평 및 수직 다방면으로 비교하고, 샘플 데이터도 확대해서 너의 비법의 합리성과 타당성 여부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거야.”“대박... 이렇게 진지할 필요까지 있어?”모르는 사람이 보면 성도윤이 몇십조 프로젝트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연구하는 줄 알것이다. 사도현은 순간 어깨가 무거워졌다.“난 모든 일에 진지해.”성도윤은 고개를 들고 경고의 뜻으로 말했다.“그러니까 제대로 가르쳐. 만약 효과가 없다면, 넌 끝장이야.”사도현은 순간 마음이 조여왔다.성도윤의 말은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현은 잘 알고 있었다.‘형이 제대로 급했나 보네. 단아해 보이던 차설아가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이야. 우리 형을 손에 꽉 쥐고 있네.”“콜록!”사도현은 목청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정 그렇다면 내 반평생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해주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백프로 효과 있어.”성도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기대에 찬 얼굴로 재촉했다.“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시작해!”“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알려둘 게 있어. 내는 여러 종류의 여자를 많이 만나봤으니까 데이터는 충분히 많아. 그러니 내 전문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사도현은 비록 자신의 연애경험이 아주 풍부한 건 아니지만, 유일한 연애에서도 차인 성도윤을 가르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여자를 공략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돈이고, 하나는 진실된 마음이지. 나랑 형의 신분으로 볼 때 99%의 여자는 우리가 다가갈 필요 없이 바로 우리한테 달려들지. 하지만 1%
사도현은 계속 강의를 했다.“차단당했으면 다른 번호를 만들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못살게 구면 되지! 그러다 마음이 좀 움직이면 두 번째 단계인 낭만으로 넘어가!”“낭만! 여자들은 낭만에 약하지. 특히 형 전처처럼 꿈속에 사는 여자들은 낭만적인 거에 환장해. 충분히 낭만적이라면 형한테 죽고 못 살게 만드는 건 어렵지도 않아.”성도윤은 안경을 밀고, 노트에 열심히 필기하더니 손을 들어 질문까지 했다.“낭만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지?”“그건 다른 과제야. 오늘 낭만까지 강의하면 시간이 모자라. 멜로 드라마 같은 거 많이 보면서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하는지 배워. 내가 이제 PPT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강의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거야.”“그래.”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더의 포스를 풍겼다.“계속해.”“세 번째는 밀어내기, 열정적인 구애를 펼친 다음에는 적당히 멈춰야 한다는 뜻이지. 이걸 밀당이라고 하는데, 이 단계가 아주 중요해. 밀당을 적당히 잘하면 주도권을 빼앗아 올 수 있지만, 잘 못하면 상대방이 도망갈 수도 있어.”“네 번째는 쏟아붓기. 형의 감정을 마음껏 쏟아붓는 거야. 어떤 기술도 ‘진정성’을 이길 수는 없어. 상대방이 형의 진심을 보게 되는 순간, 게임 오버야. 다섯 번째는 마무리. 만약 성공 단계까지 도달한다면, 노력의 성과를 맛보게 되는 거지.”사도현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대충 이런 내용이야. 혼자 잘 복습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가장 중요한 건, 실전이야. 이론만 배워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성도윤은 노트에 적힌 메모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는 천성적으로 차갑고 극도로 이성적이어서 여자에게 거절한 경험만 풍부하지 먼저다가간 적은 없었다.‘이 자식 강의가 꽤 쓸모가 있을 것 같군. 아주 신선해.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사도현은 성도윤의 기분이 조금 좋아진 것을 보고 기회를 잡고 말했다.“형, 방금 한 약속 까먹은 건 아니지? 내가 여심 공략 비법을 가르쳐주면
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내가 왜 안 가?”강진우, 사도현 그리고 성도윤은 오래전부터 의형제를 맺어 친형제보다 더 친하게 지냈다.지금 큰형이 약혼했으니 둘째 동생인 성도윤은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사도현은 성도윤이 무리하는 것 같아 마음 아파했다.“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 형. 진우 형이 특별히 나보고 전하라고 했어. 만약 형이 참석하지 않아도 이해한다고. 청하 누나랑 셋 관계가 좀 복잡하잖아...”“복잡할 것 없어.”성도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친한 형이랑 옛 친구가 약혼을 한다는데 당연히 참석해야지.”“아... 그래?”사도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더욱 동정하는 눈으로 성도윤을 보았다.그의 눈에 성도윤은 일부러 쿨한 척하는 게 확실했다.임청하는 성도윤의 첫사랑이고, 그 첫사랑이 친한 형이랑 약혼을 하니, 성도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짐작할 수 있었다.‘휴, 도윤이 형도 참. 집안이며, 능력이며, 외모까지 거의 완벽한데, 유독 여자 문제는 엉성하다니까. 첫사랑을 놓치고, 이제 부인까지 도망갔으니, 불쌍해서 어떡해!’오늘 성도윤에게 전수해 준 비법이 효과가 있어 다시는 사랑의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사도현이 떠나고, 성도윤은 방금 필기한 내용을 뒤적거리더니, 짙은 눈썹을 약간 비틀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매달리고...”저녁 무렵, 차설아와 민이 이모는 근처 냇가를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멀리 별장 입구에 대형 화물차가 줄지어 서 있고, 작업복을 입은 남자 몇 명이 문서를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누구 찾으세요?”차설아가 몇몇 남자들을 향해 물었다.남자들은 차설아를 보고 열정적으로 말했다.“혹시 차설아 씨세요?”“맞는데, 어쩐 일이시죠?”차설아는 그들 뒤에 있는 대형 화물차를 보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성씨 성을 가진 손님께서 차설아 씨 집으로 대량의 가전제품이며 장식품이며 귀중한 상품들을 주문하셨어요. 확인하시고 여
성도윤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습관적으로 차설아의 번호를 누르다가 문득 그녀에게 차단당한 일이 생각나 더욱 화가 났다.“예서 씨!”그는 화가 잔뜩 난 채로 비서를 불렀다.예서는 전전긍긍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대표님, 무슨 일이시죠?”“핸드폰 좀 빌려줘.”“네? 제 핸드폰이요?”예서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가득했지만, 공손히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차설아의 번호를 눌렀다.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차설아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차설의 나른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기분이 좋은 목소리였다.“기분이 좋은가 봐?”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비꼬았다.차설아는 바로 성도윤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조금?”“당신 사업을 제대로 배웠더라고. 바로 몇억 원의 수익을 당기다니. 내가 당신을 얕잡아 봤어.”“별말씀을요. 대표님이 통이 크신 덕에 우리 집도 다시 리모델링할 수 있게 됐어. 다시 호의를 베푼다고 해도 사양하지 않을게.”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얌전하고 착하던 차설아가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만약 어느 날 성도윤이 죽게 된다면, 그건 틀림없이 이 빌어먹을 여자에게 화가 나서 죽어서일 것이다.“내가 수억 원을 공짜로 줬으니 차단은 풀어주는 게 어때?”성도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침착하게 자신의 권익을 쟁취했다.자그마치 20억은 날렸으니 아무런 성과도 없어서는 안 된다.만약 차설아가 차단을 푼다면, 20억을 날리는 것도 가치가 있었다.“싫어.”차설아는 단박에 거절했다.“그건 당신이 자발적으로 증여한 돈이잖아? 만약 회수 받고 싶다면 법원에 신청해. 그러려면 소송에서 날 이겨야겠지?”“당신...”성도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에서는 ‘뚜뚜뚜’하는 소리가 들렸다.빌어먹을, 차설아가 먼저 끊어버렸다이때 성도윤이 다시 전화를 건다면 체면이 깍일 뿐더러, 상대방도 받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민을 하던 성도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