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의 180도 변한 태도에 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오만한 성도윤이 내연녀 때문에 이렇게 오래 온화하고 겸손한 척을 했으니, 지칠만하지!차설아는 턱을 치켜들며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내가 전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임채원이 모든 언론 앞에서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면 된다고.”“적당히 해!”성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눈앞의 여자가 낯설게 느껴졌다.차설아는 이렇게 공격적인 사람이 아니었다.“태아가 불안정해서 병원에 누워있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무릎 꿇고 사과해?”“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차설아는 묵묵히 주먹을 쥐었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지만 쿨한 표정을 지으며 비웃었다.“임채원이 무릎 꿇기 불편하다면, 당신이라도 꿇으면 되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성 대표님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인다면, 과연 얼마나 감동적일까?”성도윤이 자신을 얼마나 각박하고 냉혈한 여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다.차설아는 4년 동안 온순하고 착하게 살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었다. 차라리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더 통쾌했다.성도윤의 얼굴에는 폭풍우가 몰아칠 듯한 분노가 서려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차설아의 냉철함에 화가 났고, 더 화가 난 것은… 더 이상 차설아를 장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무력감은 성도윤을 화나게 했다.“채원이가 잘못을 했지만, 그래도 벌은 이미 받았어.”성도윤은 애써 화를 억누르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차갑게 말했다.“너는 임산부가 아니잖아. 채원이가 당한 고통을 너는 이해할 수 없어. 만약 경제적 배상을 원한다면 원하는 액수를 말해. 그런데 감히 채원이를 건드리면, 부부의 옛정이고 뭐고, 난 상관 안 해.”“하하.”성도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고,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부부의 정?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있었어?”성도윤은 차설아가 본 가장 가식적이고 무정한 남자이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마 탄 왕자님 행세를 하더니 지금은 내연녀를 위해 협박까지 서슴지 않
“제가 그 인간한테 마음이 있어요?”차설아는 젓가락을 멈추고, 예쁜 얼굴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이모, 사람 보는 눈이 늘 정확하시더니, 오늘은 유감이네요. 성도윤이 왜 갑자기 방문을 해서, 심지어 아부까지 하는 줄 알아요?”“혹시… 아가씨를 잊지 못해서 화해하려고요?”차설아는 고개를 저었다.“자기 내연녀를 위해 저한테 사정하러 왔어요. 그 교만한 사람이 그딴 여자 때문에 와서 사정을 하다니. 이것만으로도 전 성도윤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이런…”민이 이모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존귀하고 정직해 보이던 성도윤이 이렇게 원칙이 없는 사람일 줄이야! 정말 실망이었다.“사리 분별이 명확한 분이신 것 같던데. 만약 그 내연녀의 인품이 정말 형편없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아요. 혹시 여기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요?”“무슨 오해가 있겠어요?”차설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모는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이 얼마나 원칙이 없이 행동하는지 몰라요. 편애받는 사람은 늘 멋대로 하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죠. 4년이란 시간 동안 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제 문제죠. 제가 매력이 부족한가 봐요.”차설아는 늘 자신만만했지만, 유독 성도윤의 앞에서만, 기형적인 결혼 생활에서는 열등감이 극에 달했다.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차설아는 왜 하필 가식적인 여우에게 지고 말았을까?그래서,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고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기로 했다.민이 이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설아가 이 결혼 생활에서 매우 상처받았고, 여전히 놓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민이 이모는 속으로 뭔가를 결심했다.차설아의 집을 떠난 성도윤은 기분이 아주 나빴다. 완벽한 얼굴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감히 다가갈 수 없는 한기가 배어 있었다.성대 그룹 빌딩 전체에 어두운 분위기가 깔렸고, 직원들도 하나같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바로 이때, 성도윤의 의형제 사도현이 눈치도 없이 소란스럽게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형, 도윤
중요한 일이 있으니 찾아왔다고?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당한 굴욕이 생각나 더욱 화가 났다.“너한테 뭔 중요한 일이 있어? 계속 재잘대면 다신 못 오게 한다.”성도윤은 계속 두꺼운 서류 속에 파묻혀, 끊임없이 한기를 품어내는 빙산처럼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모습이었다.‘쯧쯧, 도윤이 형, 제대로 뚜껑 열렸네.’사도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제야 다음에 다시 오라던 예서의 경고를 알아챘다.예서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예서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대표님과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그리고... 나가 버렸다.“예서 씨...”예서는 밖으로 나갔을 뿐만 아니라, 문까지 잠갔다. 사도현은 왠지 호랑이 굴에 벼려진 절망감이 들었다. 지옥의 문에 들어선 기분이었다.“콜록!”사도현은 꾸물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줄곧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도윤에게 말했다.“형, 여기 아무도 없어. 진짜 힘들면 울어도 돼. 일로 자신을 마비시키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돼. 괜찮아. 울어, 남자가 우는 건 죄가 아니야.”“???”성도윤은 고개를 들고 바보를 쳐다보듯 사도현을 보았고,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 앞에서 센 척할 필요 없어. 무릎 꿇고 전처한테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영상 다 봤단 말이야. 그렇게 전처를 좋아하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비록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형만 좋다면 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니야.”사도현은 차설아와의 몇 번의 만남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형은 왜 그런 밋밋한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지? 게다가 완전히 빠졌잖아.”“하지만 형, 아무리 연애 경험이 별로 없다지만 전처 같은 스타일은 다루기 쉬운 거 아니야? 왜 오히려 꽉 잡혀 있어? 이상하잖아...”사도현은 의리있게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사업은 형이 나보다 낫지만, 연애는 내가 더 잘하지! 여자를 공략하는 기술을 가르쳐줘야겠어. 체면은 살려야 될 거 아니야?”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성도윤은 크라프트지 표지의 노트를 열고, 펜으로 힘차게 몇 글자를 썼다. ‘여심공략 비법 정리’사도현은 힐긋 쳐다본 후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형, 다들 형을 빙산처럼 차갑다고 하는데, 난 왜 바보처럼 느껴지지? 여심 공략 비법 같은 건 글이 아닌 마음으로 터득하는 거야. 어떻게 필기까지 할 생각을 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모든 일에는 규칙이 있으니 여심 공략도 마찬가지야. 필기뿐만 아니라 선형 분석, 수평 및 수직 다방면으로 비교하고, 샘플 데이터도 확대해서 너의 비법의 합리성과 타당성 여부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거야.”“대박... 이렇게 진지할 필요까지 있어?”모르는 사람이 보면 성도윤이 몇십조 프로젝트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연구하는 줄 알것이다. 사도현은 순간 어깨가 무거워졌다.“난 모든 일에 진지해.”성도윤은 고개를 들고 경고의 뜻으로 말했다.“그러니까 제대로 가르쳐. 만약 효과가 없다면, 넌 끝장이야.”사도현은 순간 마음이 조여왔다.성도윤의 말은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현은 잘 알고 있었다.‘형이 제대로 급했나 보네. 단아해 보이던 차설아가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이야. 우리 형을 손에 꽉 쥐고 있네.”“콜록!”사도현은 목청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정 그렇다면 내 반평생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해주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백프로 효과 있어.”성도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기대에 찬 얼굴로 재촉했다.“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시작해!”“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알려둘 게 있어. 내는 여러 종류의 여자를 많이 만나봤으니까 데이터는 충분히 많아. 그러니 내 전문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사도현은 비록 자신의 연애경험이 아주 풍부한 건 아니지만, 유일한 연애에서도 차인 성도윤을 가르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여자를 공략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돈이고, 하나는 진실된 마음이지. 나랑 형의 신분으로 볼 때 99%의 여자는 우리가 다가갈 필요 없이 바로 우리한테 달려들지. 하지만 1%
사도현은 계속 강의를 했다.“차단당했으면 다른 번호를 만들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못살게 구면 되지! 그러다 마음이 좀 움직이면 두 번째 단계인 낭만으로 넘어가!”“낭만! 여자들은 낭만에 약하지. 특히 형 전처처럼 꿈속에 사는 여자들은 낭만적인 거에 환장해. 충분히 낭만적이라면 형한테 죽고 못 살게 만드는 건 어렵지도 않아.”성도윤은 안경을 밀고, 노트에 열심히 필기하더니 손을 들어 질문까지 했다.“낭만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지?”“그건 다른 과제야. 오늘 낭만까지 강의하면 시간이 모자라. 멜로 드라마 같은 거 많이 보면서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하는지 배워. 내가 이제 PPT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강의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거야.”“그래.”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더의 포스를 풍겼다.“계속해.”“세 번째는 밀어내기, 열정적인 구애를 펼친 다음에는 적당히 멈춰야 한다는 뜻이지. 이걸 밀당이라고 하는데, 이 단계가 아주 중요해. 밀당을 적당히 잘하면 주도권을 빼앗아 올 수 있지만, 잘 못하면 상대방이 도망갈 수도 있어.”“네 번째는 쏟아붓기. 형의 감정을 마음껏 쏟아붓는 거야. 어떤 기술도 ‘진정성’을 이길 수는 없어. 상대방이 형의 진심을 보게 되는 순간, 게임 오버야. 다섯 번째는 마무리. 만약 성공 단계까지 도달한다면, 노력의 성과를 맛보게 되는 거지.”사도현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대충 이런 내용이야. 혼자 잘 복습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가장 중요한 건, 실전이야. 이론만 배워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성도윤은 노트에 적힌 메모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는 천성적으로 차갑고 극도로 이성적이어서 여자에게 거절한 경험만 풍부하지 먼저다가간 적은 없었다.‘이 자식 강의가 꽤 쓸모가 있을 것 같군. 아주 신선해.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사도현은 성도윤의 기분이 조금 좋아진 것을 보고 기회를 잡고 말했다.“형, 방금 한 약속 까먹은 건 아니지? 내가 여심 공략 비법을 가르쳐주면
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내가 왜 안 가?”강진우, 사도현 그리고 성도윤은 오래전부터 의형제를 맺어 친형제보다 더 친하게 지냈다.지금 큰형이 약혼했으니 둘째 동생인 성도윤은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사도현은 성도윤이 무리하는 것 같아 마음 아파했다.“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 형. 진우 형이 특별히 나보고 전하라고 했어. 만약 형이 참석하지 않아도 이해한다고. 청하 누나랑 셋 관계가 좀 복잡하잖아...”“복잡할 것 없어.”성도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친한 형이랑 옛 친구가 약혼을 한다는데 당연히 참석해야지.”“아... 그래?”사도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더욱 동정하는 눈으로 성도윤을 보았다.그의 눈에 성도윤은 일부러 쿨한 척하는 게 확실했다.임청하는 성도윤의 첫사랑이고, 그 첫사랑이 친한 형이랑 약혼을 하니, 성도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짐작할 수 있었다.‘휴, 도윤이 형도 참. 집안이며, 능력이며, 외모까지 거의 완벽한데, 유독 여자 문제는 엉성하다니까. 첫사랑을 놓치고, 이제 부인까지 도망갔으니, 불쌍해서 어떡해!’오늘 성도윤에게 전수해 준 비법이 효과가 있어 다시는 사랑의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사도현이 떠나고, 성도윤은 방금 필기한 내용을 뒤적거리더니, 짙은 눈썹을 약간 비틀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매달리고...”저녁 무렵, 차설아와 민이 이모는 근처 냇가를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멀리 별장 입구에 대형 화물차가 줄지어 서 있고, 작업복을 입은 남자 몇 명이 문서를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누구 찾으세요?”차설아가 몇몇 남자들을 향해 물었다.남자들은 차설아를 보고 열정적으로 말했다.“혹시 차설아 씨세요?”“맞는데, 어쩐 일이시죠?”차설아는 그들 뒤에 있는 대형 화물차를 보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성씨 성을 가진 손님께서 차설아 씨 집으로 대량의 가전제품이며 장식품이며 귀중한 상품들을 주문하셨어요. 확인하시고 여
성도윤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습관적으로 차설아의 번호를 누르다가 문득 그녀에게 차단당한 일이 생각나 더욱 화가 났다.“예서 씨!”그는 화가 잔뜩 난 채로 비서를 불렀다.예서는 전전긍긍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대표님, 무슨 일이시죠?”“핸드폰 좀 빌려줘.”“네? 제 핸드폰이요?”예서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가득했지만, 공손히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성도윤은 아무 말 없이 차설아의 번호를 눌렀다.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차설아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차설의 나른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기분이 좋은 목소리였다.“기분이 좋은가 봐?”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비꼬았다.차설아는 바로 성도윤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조금?”“당신 사업을 제대로 배웠더라고. 바로 몇억 원의 수익을 당기다니. 내가 당신을 얕잡아 봤어.”“별말씀을요. 대표님이 통이 크신 덕에 우리 집도 다시 리모델링할 수 있게 됐어. 다시 호의를 베푼다고 해도 사양하지 않을게.”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얌전하고 착하던 차설아가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만약 어느 날 성도윤이 죽게 된다면, 그건 틀림없이 이 빌어먹을 여자에게 화가 나서 죽어서일 것이다.“내가 수억 원을 공짜로 줬으니 차단은 풀어주는 게 어때?”성도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침착하게 자신의 권익을 쟁취했다.자그마치 20억은 날렸으니 아무런 성과도 없어서는 안 된다.만약 차설아가 차단을 푼다면, 20억을 날리는 것도 가치가 있었다.“싫어.”차설아는 단박에 거절했다.“그건 당신이 자발적으로 증여한 돈이잖아? 만약 회수 받고 싶다면 법원에 신청해. 그러려면 소송에서 날 이겨야겠지?”“당신...”성도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에서는 ‘뚜뚜뚜’하는 소리가 들렸다.빌어먹을, 차설아가 먼저 끊어버렸다이때 성도윤이 다시 전화를 건다면 체면이 깍일 뿐더러, 상대방도 받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민을 하던 성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화창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았다.차설아는 더욱 흥미가 생겨 한 마디 더 보냈다.“아니면 처음 뵙는 분?”하지만 이젠 ‘입력 중...’이라는 글도 뜨지 않았다. 대화창에서 아예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답장을 안 해?’차설아는 원래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도전정신이 불타올랐다.‘꽤 개성 있는데? 아마 시크한 훈남 동생이겠지? 평소에 여자들의 대시만 받았으니 차가울 수밖에?’마침 마음이 복잡했던 차설아는 차라리 상대방을 나무로 삼았다.나무의 작용은 바로 ‘경청’만 하고 ‘영원히 입을 열지 않는 것’이다.어두컴컴한 밤, 핸드폰의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차설아는 폭풍 타자를 했다.“동생은 혹시 싫어하는 사람 있어?”“아직 어리니까, 분명히 없겠지. 하지만 이 누나는 있어. 가장 아이러니한 건 누나가 싫어하는 사람은, 한때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거지.”“난 살면서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앞으로 우리 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자.”핸드폰 너머에서 성도윤은 번쩍번쩍한 대표 사무실에 앉아 창밖의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차설아의 폭풍 문자에 성도윤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바보’라는 글자를 본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고, 화가 나서 사람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 여자가 설마 나라는 걸 알고 일부러 욕하는 건 아니겠지?’성도윤은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 아예 잠자코 있었다.차설아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폭풍 하소연을 했다.“이 바보가 얼마나 못 났는 줄 알아? 평소에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도도한 척하면서, 사실은 속물이야. 사람 보는 눈도 형편없고, 상대방이 얼마나 품행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무조건 용서하고 있어.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내가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니, 진짜 부끄러워.”성도윤은 더욱 의심했다. 차설아가 자신인 걸 알면서 일부러 욕하고 있는 건 아닌지.성도윤이 반박의 말을 하려는데 차설아가 또 메시지를 보냈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