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 그러니까 울지마. 내가 도와줄게.”바람은 차설아를 부축해서 복도 의자에 앉힌 뒤, 수술실 문을 발로 걷어찼고 문이 열렸다.“동작 그만, 지금부터 손가락 까딱했다가는 여기서 나가지 못할 줄 알아.”“살려주세요, 절대 움직이지 않을게요!”성형외과 의사와 보조 의사는 메스를 내려놓았고 두 손을 든 채 수술실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사실 흉터 회복 수술은 끝났지만 수술 부위를 봉합할 때, 수면마취 했던 차성철이 갑자기 혼수 상태에 빠질 줄 몰랐다. 수술이 중단되고 나서 몇 분 후, 바람이 연락한 의사 장태호가 허겁지겁 뛰어왔다.“도련님, 저 늦지 않았죠? 도련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기겁했어요.”바람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장태호를 향해 말했다.“장 선생님, 이 수술은 전적으로 선생님께 맡길게요. 이 환자를 살린다면 선우 가문의 은인이나 마찬가지기에 사례금은 섭섭지 않게 드릴 테니 이렇게 부탁할게요.”“걱정하지 마세요, 무조건 살릴 수 있어요.”장태호는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뒤 수술실로 들어갔다. 차설아는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바람아, 네가 연락한 의사한테 맡겨도 되는 걸까? 오빠가 잘못되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죽어도 이 실수를 돌이킬 수 없어...”“장 선생님이 살리겠다고 했으니 믿어보자.”얼마 후, 수술실에서 나온 장태호의 표정이 굳어있었다.“장 선생님, 우리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 오빠 괜찮아요?”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고 겨우 용기 내어 물었다.“그게... 괜찮다고 할 수가 없네요.”장태호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만 내쉬었다.“아, 잘못된 거구나... 오빠가 나 때문에 잘못된 거라고!”차설아는 비틀거리더니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의사가 이런 표정을 하고 수술실을 나왔다는 건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차설아는 차성철이 죽은 줄 알았다.“장 선생님, 뜸 들이지 말고 알려주세요. 성철 형은 살아있어요?”바람은 장태호한테
“5년, 10년 걸릴 수 있다고요?”장태호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큰 충격으로 인해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스파크!”바람은 차설아를 부축했고 다리를 들어 올려 품에 꼭 안았다.“설, 설아야! 괜찮아?”깜짝 놀란 배경윤은 떨리는 손으로 차설아의 손을 붙잡았다.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던 배경윤이 울먹이면서 말했다.“다 내 탓이야, 내가 괜히 수술 제안을 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성철 오빠는 혼수 상태에 빠지지도 않았을 거야. 만약 오빠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난 내 목을 직접 긋겠어! 정말 미안해...”“리스크 없는 수술은 없고 아무도 이렇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 너도 스파크랑 마찬가지로 진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 자책하지 말고 진정해, 일단 같이 병원으로 가자.”바람은 배경윤을 위로해 주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품에 안긴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스파크, 어떤 일이 있어도 성철 형을 구해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바람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차성철을 해안시에서 가장 좋은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러고는 장태호와 그 병원의 최고 의료진을 응급팀으로 임명했고 빠른 시간 안에 차성철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차설아가 천천히 눈을 떴고 하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고 흐릿한 시야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설아야,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설아야, 내 말 들려?”침대맡에서 간호하던 배경윤은 눈이 퉁퉁 부은 채 말했다.“난 네가 어떻게 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배경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다 큰 어른이 겁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한잠 자고 일어났을 뿐이니까 걱정하지 마.”응급팀과 회의를 마친 바람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깨어난 차설아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로 반겼다.“다행이다,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응급팀을 하나 더 만들 생각이었어.”바람은 침대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링거 다 맞고 같이 가자.”“아니, 나 혼자 가도 돼.”“그럴 순 없지, 이번에는 내 말 들어야 해. 링거를 다 맞지 않으면 성철 형이 어느 중환자실에 있는지 알려주지 않을 거야.”“바람아, 너...”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고 간호사가 들어와서 링거 주삿바늘을 꽂아주었다. 배경윤은 멀쩡한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한시름을 놓았고 이를 악물면서 큰 결심을 한 것 같았다.“설아야, 성철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푹 쉬고 있어. 성철 오빠 곧 깨어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차설아는 배경윤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평소에는 쾌활하고 밝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우중충한 분위기였기에 차설아는 그런 배경윤이 걱정되었다.“경윤아, 너 혹시 무슨 일 있어? 만약 오빠 때문에 그런 거라면 자책하지 마. 너도 오빠를 위해서 그런 제안을 한 거고 선택은 나랑 오빠가 한 거니까 그 결과도 우리가 감당해. 절대 자책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먹어.”“그, 그런 거 아니야!”배경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사적인 일로 가봐야 해서 그래. 내가 올 때까지 푹 쉬고 있어.”차설아가 더 묻기 전에 배경윤은 병실 문을 열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배경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차설아는 한숨만 내쉬었다.“경윤이는 내가 잘 아는데, 분명 자책했을 거야. 엉뚱한 짓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네가 다른 사람 걱정만 하니까 이런 거잖아. 걱정은 좀 집어치우고 너부터 돌보면 안 돼? 네 몸부터 돌보고 네 마음을 위로해 주라니까...”바람은 차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마음 아파했다. 바람이 알고 있는 여자들은 넝쿨처럼 큰 나무에 올라타면서 의지했다.하지만 차설아는 넝쿨이 기대는 큰 나무처럼 아무한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그 자리에 우뚝 솟았다. 그래서 바람은 차설아가 연약한 면을 드러내길 바랐고 남자로서 차설아를 보호해 주고 돌보고 싶었다.반 시간 뒤, 링거를 다 맞은 차
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그저 오빠가 의식을 되찾으면 돼.”차설아는 이번 일을 통해 겉모습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예쁘든 못생기든 상관없이 건강이 최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네가 기운을 차려야 형도 깨어날 거 아니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돼. 의사가 곧 깨어난다고 했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리면 되잖아.”바람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 바람의 신분과 지위로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아부에 익숙해졌지만 바람이 누군가를 위로해 주기는 처음이었다.그래서 위로에 관한 단어와 말도 점점 소진되었고 차설아가 계속 속상해하면서 운다면 바람은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이때 차설아가 심호흡하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라 위로해 주지 않아도 돼. 네가 애쓰는 모습이 자꾸 보여서 괜히 미안해지잖아. 나 힘낼게, 너도 고생했어.”“아, 그걸 언제 눈치챈 거지? 결국 들켰네.”바람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다른 사람을 위로해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더라고... 계속 위로하다가는 괜히 너한테 장난쳐서 화나게 할까 봐 사실 좀 겁났어.”“괜찮아, 네 말이 큰 위로가 되었어. 네 덕분에 오빠가 이렇게 치료받을 수 있는 거잖아. 의사 선생님도 의학계에서 유명한 것 같던데, 그분 실력이라면 우리 오빠를 살려낼 수 있을 거야.”“그럼 내가 오늘 한 일들을 따져보면 네 마음을 얼마나 얻은 건지 알려줄 수 있어? 난 네 마음을 전부 얻고 싶거든.”바람은 침을 꿀꺽 삼켰고 잔뜩 긴장한 채 차설아의 대답을 기다렸다.“너 진짜 웃기는 놈이구나? 위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장난질이지? 너도 참 너답다니까.”차설아는 바람의 말에 깜짝 놀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바람을 비난했다.“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하지 말고 단순히 네 대답이 듣고 싶어. 나도 네 생각보다 더 강
바람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차설아가 물었다.“상을 달라고? 어떤 걸 말하는 거지?”“그, 그냥 너를 안아보고 싶어. 네가 나무처럼 혼자서 버티고 있지만 나한테 기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거든.”바람은 솔직하게 말했다. 예전에 이런 말을 꺼냈다면 바람은 차설아한테 진작에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차설아의 마음을 3퍼센트나 얻었으니 차설아를 안고 싶다고 하면 허락할 수도 있었다. “그래.”차설아를 고개를 끄덕였고 두 팔을 벌렸다.“이리와, 안아줄게.”차설아는 바람이 기특해서 이런 요구쯤은 들어줄 수 있다고 여겼다. 예전에 바람을 마구 때린 것이 마음에 걸렸고 이 포옹은 사과의 뜻도 있었다. “이게 아닌데...”바람은 차설아가 아들을 안으려는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투덜거렸다.“나는 네가 나한테 기대길 바라서 안으려는 건데, 이 박력 넘치는 자세는 뭔데? 누가 보면 내가 위로받는 줄 알겠어. 그러니까 자세 바꿔줘.”“포옹이 원래 이렇지, 뭔 자세를 바꿔? 우리 원이는 내가 팔을 벌리면 좋아서 뛰어오던걸?”바람은 어이가 없었다.“아니, 난 네 아들이 아니잖아!”“잔말 말고 이리와, 아니면 포옹하지 않을 생각이야? 나 팔이 슬슬 아프거든, 쭈뼛거리면 또 예전처럼 때릴 거야.”“그래, 아들이든 뭐든 너한테 안기면 된 거지.”바람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차설아의 품에 안겼고 여두목이 먹여 살리는 남자 친구 같았다. 오늘따라 바람의 뒷모습이 가냘파 보였다.“바람이 착하지, 앞으로 사고 치지 않으면 누나가 사탕 사줄게.”차설아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바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일부러 바람을 놀렸다.큰 나무처럼 아무한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돈을 많이 벌면 잘생긴 남자 친구를 열 명 정도 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두 사람 사이에 분홍색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에서 정장 차림을 한 성도윤이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고 인상
뭐 눈에는 뭐가 보인다더니, 성도윤이 딱 그러했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에 심기가 불편했고 발로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도윤 씨는 재벌가 도련님인데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네요. 내가 무슨 짜릿함을 맛보았다는 거죠?”차설아는 성도윤 앞으로 다가가면서 차갑게 웃었고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리고 내가 다른 남자랑 무슨 짓을 하든, 도윤 씨랑 아무 상관 없는 일 아닌가요? 무슨 자격으로 말하는지 모르겠네요.”“자격이라...”성도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어떻게 보면 내가 당신 시아주버님인데, 내 사촌 동생의 여자가 다른 남자랑 안고 있는 장면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어.”“시아주버님이라고요?”차설아는 어이가 없었고 분위기는 극도로 어색해졌다. 차설아는 성도윤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뭐 문제 있어?”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거만하게 물었고 판사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쳐다보면서 심판하는 것 같았다.“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는 내 사촌 동생이랑 뜨겁게 사랑한다고 들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다른 남자랑 애정 행각을 벌이는지 이유라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도윤 씨, 웃기지 마세요. 나를 제수씨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나한테 한 짓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촌 동생의 여자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 안 나세요?”차설아는 성도윤의 태도에 지쳤다.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되고 본인은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남녀에 대한 소문이 돌면 두 사람의 진도에 대해 궁금해하기 마련인데 차설아와 성도윤은 이미 갈 데까지 간 사이였다.“설명이 필요하단 말이지?”성도윤은 차설아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나랑 가자, 내가 다 설명할게.”성도윤이 차설아를 끌고 반대편으로 가자 차설아가 발버둥 쳤다. “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차설아는 갑자기 설명하겠다면서 순순히 협조하는 성도윤이 평소랑 너무 달라서 당황했다. 성도윤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바람이 피식 웃더니 성도윤을 도발했다.“성도윤 씨가 잊은 것 같은데 최근 2년 동안 성대 그룹이 손해를 많이 입었어요. 그래서 서씨 가문과 정략결혼을 통해 위기를 넘겼으면서 성씨 가문이 해안시를 주름잡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그렇다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보면 알죠. 성씨 가문은 여러 가문을 상대로 싸웠기에 선우 가문과 적이 된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거든요.”두 남자는 기세가 어마어마했고 누구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주위를 맴도는 팽팽한 긴장감에 차설아는 눈치를 보다가 결국 나서서 말렸다.“두 사람 유치하게 뭐 하는 거예요? 각자 한 걸음씩 물러나서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데 굳이 싸워야 직성이 풀려요? 케이크를 누구나 먹을 수 있게 나눈다면 평화롭게 지낼 텐데, 왜 자꾸 죽고 살기로 달려들어서 아무도 케이크를 먹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몇십 년간, 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원수 사이였지만 차씨 가문이 중간에서 두 가문을 잘 인도했기에 그동안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차설아는 이제 와서 두 가문이 서로 물고 뜯길 바라지 않았다.“성씨 가문과 선우 가문은 사업 범위부터 완전히 다르고 서로 엮일 일이 아예 없어요.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니까 각자 할 일만 잘하면 돼요. 싸우지 말고 협력해서 두 가문이 함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아니겠어요?”차설아는 두 사람을 뜯어말렸고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바람이 차설아를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아니, 네가 틀렸어. 선우 가문은 돈을 벌 만큼 벌었고 성씨 가문과 싸운 건 절대 돈 때문이 아니야.”바람이 성도윤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만약 성도윤 씨가 선우 가문에서 원하는 걸 내어준다면 선우 가문은 손해를 얼마 보든지 상관없어요.”성도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바람을 노려보았고 거만하게 말했다.“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갖고 싶다면 뺏든지, 그럴 능력이 없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차설아는 두 사람이 주먹싸움할
성도윤은 차설아를 잡았던 손을 내려놓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당신 말대로 내가 당신한테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어. 당신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고 당신이 날 쳐다보는 눈빛, 행동 그리고 하는 말까지 전부 날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어. 내가 자제력이 없어서 당신한테 반한 건 내 잘못이니까 이렇게 사과할게, 미안해.”“지,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차설아는 성도윤이 낯부끄러운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성격인 줄 몰랐다. 성도윤은 차설아한테 반했다는 말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고 오만하게 굴던 평소와 달리 차설아가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성도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 같아. 당신은 매력적인 여자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의 시선은 항상 당신을 향하게 돼. 내가 당신한테 그런 짓을 저지른 건 당신 탓도 어느 정도 있다는 뜻이야.”성도윤은 다시 한번 차설아에 대한 마음을 늘어놓았다. 부끄러워서 볼이 빨개진 차설아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매력적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나도 이렇게 멋진 여자가 될 줄 몰랐는데, 다음에는 최대한 바보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해 볼게요. 괜히 예쁜 나를 보고 당신이 또...”“1절만 해.”성도윤은 차설아의 손목을 잡더니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고 진지하게 물었다.“이번에는 당신 차례야, 아까 상황 설명해 봐.”성도윤의 옅은 체향이 맡아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차설아는 싱긋한 풀 냄새에 미소를 지었고 또다시 성도윤에게 반하게 되었다.“뭘 설명하라는 거죠?”차설아는 성도윤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은 당장 이곳에서 입을 맞출 것 같았기 때문이다.“당신과 선우 시원이 무슨 사이이고 왜 안고 있는지 설명해.”성도윤은 베테랑 사냥꾼처럼 이미 덫에 걸린 차설아를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차설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당장 이 여자를 품에 가두고 싶었다.하지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