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줄곧 경계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서은아가 가끔 그의 얼굴이나 머리카락에 닿으면 적응이 좀 안 되었는데 하물며 모르는 여자 간병인들이 그를 돌보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았다.“그래요? 난 왜 당신이 내가 만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죠?”차설아는 입술을 오므리고 웃으며 장난스럽게 남자의 머리를 비비고 뺨을 주물렀다.그녀는 참다못해 폭발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상하네, 당신은 예외인 것 같아요.”“...”“따라서 누군가가 나를 꼭 챙겨줘야 한다면 그건 당신이어야 해요.”“???”“왜, 싫어요?”“아니,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혹시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차설아는 성도윤이 그녀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고 그가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다시 돌아왔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왜 그녀가 특별하단 말인가?“나에 대한 기억이 돌아온 거예요?”성도윤은 대꾸하지 않았다.차설아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차라리 생각이 안 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거든요.”성도윤은 자신이 아무리 알고 싶어도 차설아가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하고 좋고 나쁨도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나 면도 좀 해줘요.”성도윤이 불쑥 요구했다.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은 사람으로 항상 깨끗하고 산뜻한 모습을 유지했는데 자신의 수염이 덥수룩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었다.그런데 요 며칠 그는 유난히 퇴폐적이었는데 얼굴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아 마치 삶에 흥미를 잃은 아티스트 같았다.차설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이 세상이 여전히 흥미롭고 계속 발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도, 면도요?”차설아가 머리를 긁적거리니 어색하게 되물었다.차설아는 비록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거의 남자처럼 생활해왔지만 유독 면도를 해본 적이 없었고 누군가를 도와 면도를 해준 적도
성도윤의 얼굴 윤곽은 매우 우수하고 이목구비는 더욱 완벽했는데 깊은 눈에 오뚝한 콧날까지 모든 것이 다 적절했다. 속눈썹이 짙고 빽빽하며 약간 휘었는데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모공 한 점 없는 그의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아래로는 벚꽃처럼 얇고 차가운 입술이 시크하면서도 유혹의 극치를 풍기고 있었고 목덜미는 늘씬하고 고귀했으며 목젖은 여자의 접근으로 긴장했는지 위아래로 굴렀는데 섹시함이 극에 달했다.차설아는 면도칼을 쥐고 남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마치 개가 뼈다귀를 보는 것처럼 침을 삼켰다.“왜 그래요?”성도윤은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여인을 향해 물었다.그는 청각이 예민하여 그녀의 가쁜 호흡을 일찍이 느꼈고 그녀가 한참 동안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예를 들면 옷을 입지 않았거나... 혹은 바지를 안 입었거나?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정말로 큰 손바닥으로 몸을 더듬었다.‘옷은 입었고... 바지도 입었는데?’그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긴장하고 있단 말인가?남자는 이리저리 만져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러다 실수로 여자의 몸을 만졌다.‘음... 촉감이 좀 다른데 부드럽네?’그는 어느 부위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그냥 그렇게 한참을 만졌다.“당신... 뭐 하는 거예요?”차설아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사과처럼 붉어졌다.이 녀석은 큰 손바닥으로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 사이를 이리저리 만지고 있었던 거다. 분명히 성희롱이라 할 수 있었지만 정의롭고 늠름한 표정과 함께이니 또 너무 야한 건 아닌 거 같고...한참을 더듬던 성도윤은 자신이 더듬던 부위가 어디인지를 발견하고는 순간 불에 데인 듯 얼른 손을 떼며 말했다.“미안해요!”그는 본래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보고 싶었는데 그 말랑말랑하고 갸름한 부위가 그녀의 그렇게 사적인 부위일 줄은 전혀 몰랐고 순간 그는 자신이 변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그래서 그는 내내 손을 높이 들고 다시는 여자한테 손도 못 댔다.“괜찮아요, 당
그러자 가슴근육이 드러났는데 보기만 해도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하고 힘이 넘쳤다.“쓰읍...”차설아는 코를 훌쩍이며 단숨에 단추를 풀었는데 남자의 복근도 한눈에 들어왔다.갑자기 그녀의 작은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확 잡혔다.성도윤은 수줍고 분노한 표정으로 물었다.“당신 또 뭐 하는 거예요?”왜 그녀가 지금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데 본인은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거지?차설아는 깜짝 놀라 멍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아... 당신이 시작하라고 했잖아요. 부끄러워요?”잘생긴 남자일수록 부끄러움을 더 많이 탄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들한테 달려드는 여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내 뜻은 내 옷을 벗기라는 게 아니라 면도를 시작하라는 거에요...”성도윤은 이렇게 말하며 여자의 손을 꼭 잡았고 서서히 다가가며 물었다.“단추를 다 풀면 뭐 하려고요?”“아, 그 뜻이었어요?”여자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난처하여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속으로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여전히 성도윤 얼굴만 보면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욕까지 했다.“미안해요. 당신이 체모도 깎으려고 하는 줄 알았죠.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 내가 직접 수염을 깎아줄게요.”차설아는 다시 뻔뻔스럽게 변명을 해댔다.성도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의 여인이 얼마나 궁핍하고 우스운지 상상하면서 웃음을 참으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고맙습니다.”차설아는 다시 면도칼을 집어 들고 성도윤의 면도를 시작했다.그의 턱 주위에 면도 크림을 바르고 입 주위를 따라 턱 주변의 수염을 꼼꼼히 긁어냈는데 그 분위기가 참으로 화기애애했다.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다가갔고 차설아는 집중하여 남자의 수염을 깨끗이 깎으려 애썼고 향기로운 향기와 그녀의 체온이 남자의 콧김을 휘감아 남자의 마음을 어지럽혔다.“좀만 기다려요. 다 됐어요.”차설아는 짓궂은 꼬마처럼 남자의 얼굴을 장난감으로 여기고 한바탕 면도를 해준 후 입을 가리고 씩 웃었다.
“...” 차설아는 몸이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성도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연인 사이였던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랑을 나눴던 사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차설아는 그가 그녀를 잊을까 봐 두려웠는데 그가 그녀를 떠올릴까 봐 더 두려웠다. 그때 문이 열리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여자가 성가의 사람과 연인 사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이 말을 한 건 당연히 그녀의 주변에서 줄곧 서성이는 성진이었다.차설아는 어색해 허리춤에 있던 성도윤의 손을 재빨리 떼며 거리를 뒀다.그러나 이런 행동은 성도윤이 보기에는 두 남녀가 몰래 정을 나누다가 들킨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정도 성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그 뜻은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건가? ”남자의 눈빛은 냉엄했고 나지막한 어조로 물었다. “역시 우리 도윤이는 똑똑하네...”성진은 당황하지 않고 차설아 곁으로 가서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나와 내 여자 친구는 지금 좀 사이가 안 좋아. 그래서 일부러 날 질투 나게 하려고 네 품에 안긴 거니까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성진 그만해,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차설아는 이 치근덕거리는 놈에게 질려 죽겠다는 표정으로 흉악하게 그를 노려보고는 팔꿈치로 그를 세게 찍었다.성진은 비록 아팠지만 마음만은 매우 행복했다.여자가 그를 거칠게 대할수록 그는 더욱 중시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본인도 자신이 너무 변태적이라고 느꼈다.“자기야, 나한테 화내지 마. 내가 잘못한 거 알아. 그래도 도윤이를 갖고 장난치지는 마, 이미 너무 힘든 애 감정까지 갖고 놀면 애가 얼마나 속상하겠어. ”성진은 얄밉게 말했다.이렇게 큰 모욕이 항상 자부심이 있던 성도윤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그 누구도 그보다 더 잘 알지는 않을 거다.“성진,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차설아는 성도윤 앞에서 말을 너무 명확하게 할 수도 없고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
발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안정적이고 긍정적이기까지, 마치 성진의 그런 말들은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했다.말도 안 돼!“그래요, 내가 당장 가서 옷을 찾아서 갖다 줄게요. ”여자는 감격스러워 울먹이며 말했다.역시 성도윤, 눈 사납게 노는 사람들을 대응하는 방법이 정말 대단하다.이번에는 성진의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그는 냉정하게 성도윤을 주시했다.성진은 마치 성도윤을 연구하는 듯했는데 남자의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했다.말도 안 돼, 천하의 성도윤이 이렇게까지 모욕당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 있는 걸까?성도윤이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그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친 셈이 되었다.아니, 그는 분명 그의 진실한 감정을 숨겼을 거야. 성진은 그가 폭발할 때까지 계속 모욕해야겠다고 생각했다.“양말은 빨지 않고 왜 여기 박혀 있어?”차설아는 옷장에서 깨끗한 옷 한 벌을 꺼내 성도윤에게 갈아 입히려다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성진를 보고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성진은 차설아와 성도윤의 사이를 가로막고 냉랭하게 말했다.“도윤아, 내가 말했잖아, 내 여자친구라고, 너 제수씨한테 옷을 갈아입혀 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않아?”“그만하라고 했지?”차설아는 참다못해 소매를 걷어 올리고 성진의 입을 찢으려 했다.“너도 말했잖아, 난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으니 욕구도 갈망하는 것도 없어, 당연한 거 아니야?”“너!”성진은 한동안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비켜, 돌보겠다며 입방아만 찧고 뭐 하는 거야? 양말 빨러 빨리 안 가!”차설아는 성도윤이 갈아 신은 양말을 주워들고는 성진의 얼굴에 던졌다.“!!!”성진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하지만 그는 차설아와 함께 남으려고 뻔뻔스럽게 양말을 주워 담으며 말했다.“빨아, 어. 빨 거야. 나 빨래도 잘해.”푸!차설아는 순식간에 성진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성진은 중요한 순간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주 일품이었다.“아, 너 이 수염 정말 안 어울려. 그냥
“어, 아니요!”차설아는 웃음은 금세 거두고 얌전하게 서 있었다.성도윤이 병약하긴 하지만 타고난 아우라는 여전히 강했는데 그가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그녀도 적당한 선에서 놀림을 멈추었다.“그... 내가 일부러 수염을 남겨 두려고 한 건 아녜요... 아, 아직 다 못 깎았어요.”차설아은 긴장이 흐르는 공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으면 내가 지금 다시 깎아줄까요?”뭐 어차피 사진은 찍어뒀으니까 나중에 꺼내서 되새길 수 있으니 이 정도로도 족하다.“그럴 필요 없을 것 같네요.”성도윤은 면도칼을 더듬어 턱을 빙빙 돌며 깨끗이 깎지 않은 수염뿌리까지 긁어내었는데 전반 과정에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차설아는 얼떨떨해져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혼자서도 면도 잘하네요? 나보다 훨씬 부드럽잖아요, 왜 나보고 해달라고 했어요?”그녀가 보기에 여자가 남자의 면도를 도와주는 것은 매우 애매한 일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말려주는 것과 같이 오직 연인 혹은 부부 사이에서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그는 분명히 직접 할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녀에게 부탁했을까? 이것은 그녀와 썸을 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설마 그가 무슨 생각이 난 걸까 아니면...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마음이 끌린 걸까? “당신이 깎아주는 걸 경험해보고 싶어서요.”성도윤은 잘생긴 얼굴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차설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설렘을 거두고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말했다.“당신도 방금 들었겠지만 나는 성진의 여자친구예요. 면도 같은 친밀한 일은 앞으로 나를 찾지 말아요, 남자친구가 오해할까 봐요.”“그래요?”성도윤은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쉽게 차설아를 꿰뚫어 보았다.“왜 거짓말을 해요?”“거짓말 안 했어요. 성진은 정말 내 남자친구예요, 만약 남자친구가 아니었다면 내가 저렇게 때릴 때 이미 반격했을 거예요.”차설아는 진지하게 허튼소리를 계속했다.그녀도 사실 성도윤을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을 느끼지
“당신과 성진이 커플인지 아닌지는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예요. 난 심지어 당신들이 조금 더 금실이 좋아지길 바래요. 이렇게 하면 성진도 매일 나를 귀찮게 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거고 그러면 나도 더 좋죠.”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면서 깨끗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성도윤은 담담했다.“가요, 나랑 나가서 햇볕 좀 쬐죠.”그는 이미 오랫동안 밖에 나가서 햇빛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 차설아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다시 낙관적이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성도윤을 부축해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뒤뜰로 향했다.봄날의 향기가 은은히 풍겼고 온 정원을 가득 메운 작약이 유난히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공기는 비 온 뒤의 흙과 풀의 맑은 향기를 머금었으며 아침 햇살이 그들의 머릿결과 뺨에 내리쬐었는데 삼라만상이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그러나 차설아는 유난히 말이 없었고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없었다.성도윤의 축복을 들은 그녀는 어쩐지 마음 한쪽이 먹먹했다.분명히 그녀가 원하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정말 이 상태라면 그녀는 온몸이 불편할 것이다.성도윤은 정자 난간을 잡고 눈을 감은 채 깊이 숨을 들이쉬며 봄날을 만끽했는데 완벽한 이목구비에 햇빛이 드리운 것이 마치 그에게 필터를 씌운 듯했다.“쯧쯧, 정말 잘 생겼네.”차설아는 비록 찝찝했지만 마침내 남자의 절묘한 얼굴을 보고는 다시 신이 나서 속으로 감탄했다.왜 남자를 찾을 때 반드시 멋진 사람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아무리 당신을 화나게 해도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화가 싹 사그라지니 말이다.여인이 남자의 미모에 도취한 사이 성도윤은 차설아를 곁눈질하며 물었다.“성진이랑은 얼마나 사귀었어요?”그 물음에 차설아는 순간 굳어졌다.“?”차설아는 이 녀석이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려는 건 아닌지 순간 의심했다.갑자기 그 재수 없는 자식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성도윤은 소탈하게 말했는데 아무 상관없는 듯했다.차설아는 이를
“두 사람... 아이도 있어요?”성도윤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들었고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이상한 것이 차설아는 이미 남편, 아이가 있는 사람이니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어쩐지 마음속 한쪽이 찌릿해 왔다.성도윤, 제발 정신 좀 차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여자를 이렇게 신경 써서 뭐 하려고? 이건 은아에게 미안한 일이잖아.“네, 그 사람은 나쁠지 몰라도 두 아이는 엄청 귀여워요. 그래서 그 사람과 사랑을 했던 게 후회되지는 않아요.”장난은 장난이고 이 말은 진심이었다.그녀는 성도윤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진 것을 느꼈는데 성도윤은 그런 감정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언제 한번 보면 좋겠네요.”“...그럼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애들 삼촌 되네요?”차설아는 웃음을 참으며 계속 남자의 한계에 도전했다.그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화가 나 죽을 것 같으면서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녀는 퍽 재미있었다.“삼촌...”성도윤은 두 글자를 계속 되새기었는데 왜인지 기분이 안 좋았다.성진 같은 미친놈이 어떻게 아이가 있을 수 있지?“너무 부러워하지는 말고요. 이제 다 나으면 은아 씨랑 노력해봐요, 1년도 안 돼서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차설아는 비록 마음은 아팠지만 이성적으로 성도윤을 달랬다.다 나으면 그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올라가 그 당당하고 눈부신 성도윤이 될 거고 서가는 그에게 가장 좋은 뒷받침이 될 거다.그는 서은아와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사업과 인생의 정상을 향해 나아갈 거고 그녀는 영영 그의 세상에서 사라져 새로운 삶을 살아갈 거다. 두 사람은 엉키고 엉켜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사이였지만 앞으로는 사귈 수 없는 두 평행선이 될 거다. 이런 결말이야말로 두 사람한테 다 좋은 결말이 아니겠는가.“그래요, 나랑 은아의 아이는 분명 제일 완벽할 거예요.”성도윤도 차설아의 축복에 맞장구를 쳤다.“...”차설아는 그 말에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속상할 것 없잖아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