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유현진이 놀라서 되물었다.강한서는 그녀의 눈빛을 피해 가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 사람도 있고 하니까 할머니 귀에 무슨 소리라도 들어가 봐야 좋을 거 없잖아. 깊게 생각하지 마.”어쩐지.유현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강한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 남자야말로 배우 출신이 따로 없었다. 장소 불문 연기가 가능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내가 왜 거기에 협조해야 하는 거야?막 거절하려는 찰나 갑자기 송민영이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쳐다보고는 달려와 그들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였다.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 강한서의 어깨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말한 건 지켜.”이어 그녀가 발끝을 세우고 그의 입술에 키스하였다.강한서의 입술은 약간 촉촉하였고 은은한 와인 향도 같이 퍼져 나왔다.강한서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유혹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그녀가 아무리 감추는 거에 능숙하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강한서는 달랐다. 아무리 친밀한 접촉이라도 그의 얼굴에는 담담함 외에는 다른 표정을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예전에 그런 침착하고 여유로운 강한서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좋아하는 여자를 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남자는 없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관심이 없다면 여자가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강한서도 마찬가지이고.마지못해 그녀와의 접촉이 있는 날이면 화장실에서 두 시간이나 있었다. 마치 그녀 몸에 균이라도 있는 것처럼!유현진은 갑자기 모든 게 불만스러워졌다. 분명히 이 결혼 생활에서 줄곧 참아온 것은 그녀 자신이었는데!강한서가 무슨 자격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건지?그녀는 그녀를 한때는 사랑에 빠지게 한 눈앞의 이 얼굴을 노려보며 망설임 없이 혀를 내밀었다.강한서의 몸은 굳어지더니 갑자기 눈썹을 찡그렸다.유현진은 한참 후에야 손을 놓았다.이 결벽증 있는 인간아, 한번
유현진이 막 손을 뻗어 술잔을 받으려 하자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술 못 마시는 거 아니었어?”송민영이 준 술을 마시기 싫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자신이 송민영을 신경 쓴다고 보이기는 싫었으니까. “누가 술 마신대?”그녀는 손을 돌려 방금 마신 주스를 집어 들고 주강운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스로 대신해도 괜찮죠?”주강운이 조금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대답했다. “편할 대로 하세요.”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진 것을 눈치챈 한성우가 얼른 술잔을 들어 강한서에게 쥐어주고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술은 당연히 다 같이 마셔야지. 형수님,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유현진은 이상하다는 듯 한성우를 바라보았다. 평소 한성우와 유현진은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강한서의 친구들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녀가 강한서와 결혼 한 것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강한서와 함께 있을 때는 그를 봐서라도 친한 척 인사를 나누지만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인사는커녕 아예 못 본척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현진도 강한서 주변의 부잣집 도련님들을 싫어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성우를.그녀가 한성우를 싫어하는 제일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송민영이었다. 강한서와 송민영의 일이 알려지지 않고 송민영이 여러 스캔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한성우 덕분이었다. 평소엔 눈꼴사납게 굴더니 이젠 형수님, 형수님하고 부르니 유현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송민영은 마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보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이분은 대표님 친구분이세요?”한성우는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인지한 척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그러자 송민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는 이미 한참 동안 여기 서있었다.송민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매니저가 얘기 안 드렸어요? 오늘 자선 공연 있는 날이거든요.”“그러고 보니, 얘기를 들
“당연히 해드려야죠.”송민영은 말하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 가방을 본 유현진은 순간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강한서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술을 음미할 뿐 가방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다른 사람이 준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 가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리가 없지.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유현진이 하루 동안 집에서 옷을 세 벌이나 갈아입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유현진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 가방을 한참을 뒤적이던 송민영은 펜 하나만 꺼내들고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해요. 사인지를 안 가져왔네요. 다음에 해드릴게요. 아니면 제가 사인해서 한 대표님 통해서 전해드려도 되고요.”“괜찮으시면 제 손목에 사인해 주시겠어요?”주강운이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송민영이 순간 움찔 눈을 떨었다. '설마 주강운이 진짜로 송민영의 팬은 아니겠지?'한성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주강운, 너 이런 취향이었어?”주강운은 가볍게 웃더니 팔을 내밀며 말했다.“송민영 씨 한 번 만나기가 좀 어려워야지.”주강운의 한 마디에 허영심이 한 번에 충족된 송민영은 더 이상 말설이지 않고 펜을 들어 주강운의 손목에 사인을 했다. 주강운의 눈은 글씨 쓰는 송민영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한서와는 달리 주강운은 요염한 눈매를 가졌다. 그의 눈빛은 쓰레기 더미를 보더라도 애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틋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송민영이 사인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끌려가 뺨을 한 대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감히 누구한테 꼬리를 치는 거야?”갑자기 뺨을 얻어맞은 송민영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조금 지나서야 그녀는 자신을 때린 사람이 강한서의 동생 강민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송민영은 휘청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테이블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피라미드 모양의 술잔이 와르르 무너졌다. 송민영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고 치마에는
“춤추실래요?”주강운의 목소리는 꽤나 부드러웠다. 아니, 따뜻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분명 매력 있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주강운은 한 번도 유현진에게 이렇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유현진은 울컥 서러움에 북받쳤고 술 때문이었는지 억울함 때문이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춤 잘 못 춰요."“저도 잘 못 춰요.”주강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는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한 걸음 한 걸음, 멜로디에 맞춰 발을 내디디며 그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갔다. 이는 유현진과 강한서 사이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었던 케미였다. 유현진은 늘 강한서의 발을 밟았고, 강한서는 인내심이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실수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그녀와 춤을 추려 하지 않았다. 유현진이 춤을 못 춰서라기보다는 그저 강한서가 유현진을 맞춰줄 의향이 전혀 없었던 것뿐이었다. 두 번의 춤을 추고 나니, 유현진의 코 끝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유현진은 주강운에게 술잔을 건네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물었다. “정말 송민영 팬이에요?”주강운은 피식 웃더니 종이에 술을 조금 묻혀 손목의 사인펜 흔적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전 사실 TV 잘 안 봐요. 근데 그런 대스타는 처음이라. 궁금했거든요. 어떤 매력이 있는지.”유현진은 주강운의 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이유가 조금 억지스러웠기 때문이다. 유현진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주강운이 말했다. “농담이에요. 사실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되면 다시 알려드릴게요.”“송민영 팬만 아니면 돼요.”그녀의 집요한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주강운은 손을 들어 맹세했다. “전 절대 아닙니다. 맹세해요.”“그럼 마셔요.”주강운은 술잔을 들며 불쑥 말했다.“송민영 씨, 아까 다치셨어요.”유현진은 순간 행동을 멈췄다. “넘어지실 때, 팔이 유리 위로 떨어졌거든요. 아무래도 공인이시라, 이미지가 중요하니까요. 사진이
유현진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저쪽에서 들려오는 것은 신용카드를 갚으라는 내용의 여자 기계음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전화를 뚝 끊고는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려는 듯 손을 높이 들었다. 휴대전화가 떨어지려는 순간, 다시 손을 내려 전원을 끄고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주강운은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었다.“데려다줄게요.”“강한서가 데려다주라고 한 거면 됐어요. 자기 와이프 직접 데리러 오라고 해요.”겉으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은 꽤나 화가 나 있었다. 어디도 가지 않고 계속 여기에 있는 건 아마도 강한서의 소식을 기다리는 거겠지. “너무 늦었어요. 이 시간에 여자 혼자 밖에 있으면 위험해요.”돌려 말하긴 했지만, 유현진은 알고 있었다. 강한서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는걸. 와이프를 파티장에 두고 왔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지난번 주차했던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요?”차에 오른 뒤 유현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모습은 잠든 것 같기도 했다. 차가 멈추고, 주강운이 유현진을 부르려는 찰나 그녀가 눈을 떴다. “도착했어요?”“네.”유현진은 창밖을 내다보고는 걸쳐있던 외투를 돌려주며 말했다.“고마워요.”그러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이때, 주강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고개를 숙여 발신자 표시를 확인하고는 휴대전화를 한 쪽에 내버려 두었다. 유현진의 모습이 아파트 입구에서 사리지고 나서야 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려 떠나게 했다. 강한서는 연결되지 않은 전화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대표님?”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을 때 가정부가 전화를 받았다. 강한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람, 집에 들어갔나요?”“사모님이요? 사모님 대표님과 함께 파티에 가셨잖아요.”강한서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안 싸웠어. 이혼하면 재산 분할도 해주기로 했는데, 내가 왜 싸워? 돈은 받아야지.”“너 그럼 지금 돌아가려고?”“오늘엔 병원에 가려고. 낮에 간병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오늘 엄마가 또 반응을 보였대. 요즘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옆에서 얘기 많이 해드리려고. 혹시 더 일찍 깨어나실지도 모르잖아.”“내가 데려다줄게.”“아냐, 됐어. 차 불렀어.”유현진이 차미주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너도 일찍 쉬어.”하현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차미주에게 얘기한 것처럼 반응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유현진은 그저 그녀 옆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엄마 옆에서라면 어떤 서러운 일이 있어도, 아무런 위로의 말이 없어도 마음만은 편할 수 있었다. 의사는 항상 그녀에게 어머니와 많은 얘기를 나누라고 했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소통이 적었던 탓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현진은 기억을 더듬어 이전의 일들을 얘기해 보고 싶었지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도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가 애쓰는 모습을 보던 간병인은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남편분 이야기를 하셔도 괜찮아요. 결혼생활 얘기도. 엄마는 딸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니까.”“뭐,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서요.”유현진의 입꼬리가 내려갔다.“사고만 나지 않았어도, 아마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일은 없었겠죠.”간병인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현진은 몸을 일으며 하현주가 갖고 있던 골동품인 카세트 라디오를 켰다. 하현주는 국악을 좋아해서 집에 많은 데이프를 모아놓고 있었다. 이 카세트 라디오도 모아 둔 테이프를 듣기 위해 산 것이었다. 의사가 하현주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해서 자극을 줘야 한다고 얘기를 한 후부터 유현진은 집에서 물건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그녀는 아무 테이프나 골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책상 위에 놓였던 잡지를 펼쳐들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혼 후 전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 였다.유현진은 아무
하현주가 보였던 두 번의 반응의 유일한 공통점은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사는 이런 내용을 진료차트에 적으며 말했다. “카세트테이프 때문일 수 있습니다. 계속 같은 방법으로 자극을 줘보세요. 하지만 너무 오래 하지는 마시고요. 틀어놓고 반응을 잘 살피시고 반응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의사가 병실을 나간 후, 유현진은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보았다. 테이프가 워낙 오래되어 위의 글씨가 대부분 흐릿해 “국악의 대가” 라는 글씨만 희미하게 보였다. “언니, 지난번 엄마가 반응을 보였던 테이프, 어떤 건지 기억나세요?”“그건 기억이 잘 안 나요. 하지만 멜로디는 기억나요. 흥얼거려 볼게요.”기억난다는 간병인의 말에 유현진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짧게 흥얼거린 간병인이 다급히 물었다.“어때요? 무슨 노래인지 알겠어요? 이 멜로디는 정확하게 기억해요.”유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간병인이 말한 흥얼거림이란 진짜로 흥얼거림 그 자체였다. 가사 한 줄도 없이, 심지어 음정조차 맞지 않는 듯한 흥얼거림이었다. 하현주를 따라 들은 국악이 얼마인데,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80% 이상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간병인이 흥얼거린 멜로디로는 전혀 어떤 곡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간병인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말했다.“들어본 적 없는 곡인 것 같아요.”간병인이 열정적으로 나섰다.“제가 제대로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한 번 더 해볼게요.”“괜찮아요.”유현진은 테이프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고개를 돌려 간병인에게 말했다.“언니, 앞으로 이 테이프들을 순서대로 틀어줘요. 엄마가 반응을 보이는 것들로만 추려서, 그것만 들려드려요.”“네.”유현진은 간병인이 가져온 보호자용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딱딱한 접이식 침대에 온몸이 아팠다. 이튿날 아침, 날이 완전히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래층에서 간병인에게 줄 아침밥을 가져다주고, 몇 가지를 당부하고 나서야 택
유현진의 태도에 약간 초조해진 강한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친구는 핸드폰도 없어? 전화 한 통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전화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우리 강 대표가 전화받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쁠까 봐 그러지, 너..."유현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떠나기 전에 나랑 인사할 시간도 없었잖아."강한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말했다."민영이가 다쳤어."유현진은 송민영이 다친 게 가슴 아픈 나머지 강한서가 아내인 자신한테 미리 말해줄 시간도 없이 바로 병원으로 뛰쳐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유현진은 시선을 떨군 채로 태연하게 말했다."그래서 송민영은 죽었어?"유현진의 각박한 질문에 강한서는 눈살을 찌푸렸다."현진아, 넌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그냥 해본 말에 왜 이렇게 긴장해? 내가 죽는다고 말했다고 진짜 죽는 것도 아니고."유현진은 이렇게 말하며 강한서를 지나쳐갔다. 강한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다가 성큼성큼 쫓아갔다.유현진은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사과를 먹으면서 iPad를 봤다. 그녀는 휴대폰과 패드에서 같은 계정을 쓰고 있기에 모든 정보를 동기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휴대폰이 고장 난 지금은 iPad를 볼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강한서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메일을 확인했다.강한서는 소파 위에 있는 드레스를 만지작대면서 이렇게 물었다."이 드레스는 누가 선물한 거야?""호텔 매니저."강한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호텔 매니저가 왜 너한테 옷을 선물해?"유현진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강한서가 유현진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더라면 직접 호텔에 가서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어젯밤 화장실에 갇혀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강한서는 알아볼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유현진을 화장실에 가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강한서가 강민서를 아끼는 정
양시은이 쯧 혀를 찼다. “우리 사이에 제가 현진 씨에게서 돈을 왜 받겠어요. 계약금 없이 식장 예약해 드릴 수도 있어요. 현진 씨가 저희 호텔이 마음에 드신다면요. 이젠 배가 제법 나와서 더는 숨기기 어려울 것 같아요.”“전엔 강 대표님이 기억을 잃어서 다들 두 집안의 연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했지만 현진 씨가 임신을 했으니 얘기가 다르잖아요. 결혼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가 있는 한 송씨 가문은 강 대표님의 힘이 되어줄 수 있어요.”“강 대표님은 지금 강단해 대표님과 치열한 권력 다툼 중이잖아요.”양시은이 말하며 한현진의 배를 쳐다보았다.“전 그 인간들이 강 대표님과 송씨 가문의 동맹을 파괴하기 위해 현진 씨 배속의 아이를 노리고 있을까봐, 그게 걱정이에요. 이렇게 숨기기보단 차라리 공개를 해 버리는 게 어때요. 그러면 그 인간들도 대놓고 손을 쓰지는 못할 거예요.”한현진이 떠보듯 물었다.“언니 혹시 뭐 들으신 거 있으세요?”양시은이 대답했다.“요즘 송민희 씨가 저희 쪽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요. 아들에게 좋은 짝을 소개해주려는 것 같던데 명문가의 딸만 고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 댁 아드님이 워낙 소문이 많잖아요.”“강현우 무능력한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위엔 강 대표님처럼 능력 있는 사촌 형이 있으니 강현우와 결혼하면 한성 그룹 후계자는 꿈도 못 꿀 텐데, 누가 그런 집안과 연을 맺고 싶어 하겠어요.”“강단해 대표님도 이 권력 다툼에서 언젠가는 질게 뻔한데 한성을 위해 30여 년을 바치신 분이 그렇게 쉽게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겠어요?”“만약 저라면 힘을 실어줄 뒷배를 찾지 못한 상황에 절대 상대방이 다른 가문과 힘을 합쳐 절 내쫓을 기회는 주지 않을 거예요.”아이는 두 집안을 이어줄 근원이었다. 만약 강한서가 한현진을 지키지 못해 아이를 잃게 된다면 동맹은커녕 그 일로 사이가 틀어져 원수가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현진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송씨 가문의 도움이 없다고 해서 강한서가 강단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젊었을 때 그저 잠깐 알고 지낸 적이 있었어요. 홍혜림 씨는 결혼 전에 일러스트레이터였어요. 홍혜림 씨의 선배가 당시 서화계에서 꽤 인지도가 있었어요. 이름이... 박안수.”“박안수는 서해금의 전남편이예요. 홍혜림 씨와 서해금은 그 반안수라는 분 때문에 서로 알게 된 사이였고요. 홍혜림 씨가 아마 서해금의 과거에 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박안수...”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한현진이 갑자기 말했다. “송가람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겠네요. 전남편 집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거예요?”양시은이 말했다. “사람이 있어야 신경도 쓰죠. 그 전남편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이라고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전부인데 남동생은 지능 장애가 있는 것 같았어요.”“형이 사고로 세상을 뜬 후 집을 뛰쳐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요. 여동생도 결혼했다고 하던데... 저도 전부 전해들은 얘기라 아마 홍혜림 씨에게 직접 물어야할 거예요.”한현진이 말했다. “전남편이 예술 종사자일 줄은 몰랐네요.”양시은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부자가 많잖아요. 돈도 없이 어떻게 예술을 배워줘요. 설마하니 서해금이 박안수 씨 재능에 반했겠어요? 웃기지도 않는 얘기죠.”‘부자? 정말 부자였다면 그때 서해금은 왜 깔린느에 그 정도밖에 투자하지 못했던 거야? 부자였다면 왜 몇 년 동안 최문희의 병수발을 들었던 거야? 설마 아빠 외모와 재능에 반했다는 거야?’서해금은 송가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루고자하는 목적이 있었다. 한아람의 출산 당일 일어난 사건의 모든 단서는 전부 서해금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서해금은 조심성이 많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송가람은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심지어 공범의 신분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서해금과 그런 짓을 꾸밀 수 있
양시은이 말하며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가 이젠 성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니면 그 개자식 대신 양육비까지 지불할 뻔 했다니까요. 면회가 되면 제일 먼저 그 소식부터 알려주려고요.”“너무하시네요.”감탄하듯 말하던 한현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전태평 씨가 만약 최고 형량을 받는다면 아마 70세 전에는 나오지 못할 거예요. 전씨 가문에서는 대가 끊는 걸 지켜보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 전태평 씨 부모님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이 없잖아요.”양시은은 순간 한현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전태평의 부모님과 가족 모두 그 모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양시은을 속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곧 가스라이팅을 해왔었다. 전태평이 구속된 후 조급해진 그들은 양시은의 호텔이나 집에 들이닥치며 그녀가 돈을 써서라도 전태평을 꺼내주길 바랐다. ‘그렇게 손자가 좋으면 손자를 기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양시은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괜찮은 곳으로 지낼 곳 알아봐줘요. 기사님도 한 분 보내주고요. 부족한 게 있으면 뭐든 해줘요.”그 여자는 줄곧 전태평의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계속 전태평의 부모님을 부추겨 양시은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 한현진의 말에 양시은은 전엔 생각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왜 굳이 내 손을 더럽혀? 개들끼리 물어뜯으라고 해. 내 손에 피 묻히지 않는게 상책이지.’전화를 끊은 양시은이 한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송가람이 신미정에게 속아 돈을 빌려준 것도 현진 씨가 유도한 거죠?”한현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돈 때문에 저도 마음이 아파요. 누가 뭐라든 우리 집안 돈이잖아요.”양시은의 눈빛이 한현진을 향한 존경으로 가득 찼다. “송가람이 열 명이 있어도 현진 씨에겐 상대가 안 될 거예요. 하지만 서해금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녜요.”한현진이 시선을 올리며 물었다. “언니는 그분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양시은이 한
양시은은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한현진에게 강한서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 대표님 12살 쯤 되었을 때 일이예요. 신미정은 강 대표님에게 야외 생존에 관련한 학원을 등록해줬었어요. 하지만 승인을 받은 학원이 아니었고 선생님과 스텝들도 전문가가 아니었어요. 그 탓에 산에서 내려와서야 낙오된 학생이 있다는 걸 발견했죠.”“강 대표님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집안은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때의 전 막 신미정과 안면을 튼 사이라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강 대표님을 찾는 일에 뛰어들었죠. 깊은 산은 아니었지만 나무가 무성했고 날도 빨리 어두워져 수색이 어려웠어요.”“하지만 다행이도 산에 오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강 대표님을 발견했어요. 당시의 강 대표님은 발을 다쳐 걸을 수도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 신미정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달려가 안아주지도, 위로하지도 않더니 날 잡더니 그러더라고요.”“부르지 마요. 겪어봐야 잘못한 걸 알죠.”“그렇게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무력함과 공포에 떠는 강 대표님을 한 시간 반 가까이 지켜봤어요. 그러다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에 신미정이 강 대표님 앞에 나타났죠.”“그땐 신미정이 왜 그렇게 아들을 대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나중에 알게 됐죠. 그건 아들을 조련하고 있다는 걸. 강 대표님이 제일 나약한 순간에 나타나 본인을 향한 의지와 순종을 극대화하려고 했던 거예요.”“회장님께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단한 대표님이 돌아가신 후 강 대표님을 바로 곁으로 데리고 오셨어요.”“회장님 덕분이 아니었다면 썩은 사상으로 가득한 신미정이 강 대표님처럼 훌륭한 아들을 뒀을 리가 없어요.”말을 마친 양시은이 한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진 씨 덕분에 강 대표님이 알게 된 거예요. 진심을 자길 위한다는 게 어떤 건지. 그러다보면 언젠가 신미정의 조련에서 벗어나게 되겠죠. 아들이 자기 통제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았을까요?”“신미정 그 여자에게 진심이라는 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쌍둥이라니!]그 글귀를 본 한현진 역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는 이처럼 기분을 밖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행복 가득한 웃음 밑에는 전과는 다른 펜으로 쓴 글이 있었다. 아마 나중에 따로 더 적어둔 글 같았다. [뭘 좋아해! 얼마나 고생인데!]강한서는 산부인과에 다녀올 때마다 아이의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노트 작성을 시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노트엔 한현진의 변화로 가득 했다. 한현진의 입덧이 심해질수록 그의 기분도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한현진은 그동안 부질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임신한 한현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욕실 문이 열리자 한현진이 얼른 노트를 덮어 서랍에 넣었다. 강한서가 머리의 물기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침대 맡에 기대앉은 한현진을 본 그가 침대로 걸어왔다. “안 자?”“자려고.”한현진이 웃었다. “너랑 같이.”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머리만 말리고 바로 올게.”“응.”몇 분 후, 강한서가 돌아오자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던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와 강한서의 품에 기댔다. “강민서 약혼식에 정말 어머님 안 부를 거야?”“오면 다들 불편하기만 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엄마는 민서를 본인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해. 민서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자라면서 말을 잘 듣던 아니었어. 그런 애가 엄마 의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으니 절대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민서는 엄마를 닮아 도도해 보이지만 사실은 겁이 많고 주견도 없는 애야. 엄마가 와서 민서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걔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이라고 할까봐 걱정이야, 난.”“그럼 아까 민서가 어머님을 모시고 싶다고 대답하면 어떡하려고 그랬어.”강한서가 말했다.
시선을 내리고 노트를 작성하던 강한서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는 계속 펜을 끄적이며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넌 참석했으면 좋겠어?”잠시 침묵하던 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 하지만 굳이 오겠다고 하면 우리도 못 말리겠지.”강한서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싫으면 못 오게 하면 돼. 넌 걱정 말고 약혼식 준비나 해. 전화든 뭐든,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게.”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강민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민경하를 보내고 샤워를 마친 한현진이 침대에 누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지루함을 느낀 그녀가 강한서가 자는 곳으로 옮겨가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을 뒤적였다. 한현진이 임신한 후 강한서의 머리맡에 늘 놓여있던 전공 관련 서적들은 어느 샌가 출산과 육아 관련 책으로 바뀌어 있었다. 강한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많은 일에 무관심하지만 한 번 꽂힌 건 끝장을 보는 타입이었다. 그는 책과 관련 자료를 읽어볼 뿐만 아니라 그의 휴대폰 속 알고리즘 역시 전부 출산 육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머리맡에 놓은 책은 이미 절반 정도를 읽은 상태였다. 심지어 어떤 곳엔 표기까지 해두었다. 그는 혼자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물론 틈만 나면 한현진에게도 배워주려고 했다. 물론 한현진 역시 차근차근 알아보며 배우고 있었지만 진심을 담아 열심히 노력하는 강한서의 모습이 좋았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한 가지라도 더 임신과 출산 과정에 참여하기를 자랐다. 아이와 엄마는 자연적으로 이어진 관계였지만 아빠라는 존재는 늘 노력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강한서는 한현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빠가 된다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손을 들어 서랍에서 펜을 꺼낸 한현진은 강한서가 표기해둔 틀린 부분을 수정했다. 서랍 속에는 노트가 하나 있었고 그 가운데 펜이 꼽혀있었다. 펜을 꺼내며 노트 내용을 힐끔 쳐다본 한현진이 멈칫했다. [131일. 어제와 다름없이 토는 하지 않았다. 입덧이 잦아들었지만 눈물이 많아졌
지금의 강한서는 한현진의 산후우울증에 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한현진은 늘 다른 사람을 통해 재미를 찾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쓸데없는 고민은 사절했다. 강민서가 드레스 자락을 들고 두 사람 앞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이건 어때?”길게 늘어진 드레스자락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대답했다. “청소도 되고 좋네.”강민서는 강한서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강한서가 말했다. “드레스로 무대를 쓸어도 되겠어.”강민서: ...“오빠가 뭘 알아.”한현진이 강한서를 쳐내며 칭찬했다. “예뻐. 잘 어울려. 하지만 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는 아닌 것 같아. 약혼식은 주로 친구를 초대해 넌 민 실장님과 인사를 다녀야 할 텐데 드레스가 너무 길면 움직이기 불편할 거야.”강민서는 순간 강한서가 한현진에겐 과분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자신은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하늘의 뜻도 거슬러 강한서를 선택해준 한현진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저렇게 독침만 내뱉는 입으로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야.’“그럼 좀 짧은 거로 입어?”강민서는 아예 강한서를 무시한 채 한현진의 의견을 물었다. “너무 짧은 것도 안 돼. 그래도 무릎은 넘기는 게 좋아. 너무 복잡한 스타일의 드레스도 필요 없어. 단정하고 움직이기 편하고 컬러는 화이트나 아이보리 계열이면 돼.”강민서는 정인월이 보내준 드레스 중 몇 가지를 골라 수도 없는 피팅을 거쳐 한현진과 강한서가 만장일치도 예쁘다고 해준 아이보리 컬러의 드레스로 결정했다. 그 드레스를 본 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입만 안 열면 단아한 부잣집 딸내미 같아.”그 말을 들은 강민서는 더 이상 강한서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후, 민경하가 도착했다. 엔진 소리가 들리자 강한서가 부를 필요도 없이 강민서가 먼저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강한서는 불만 가득한 말투로 한현진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땐 저렇게 반갑게 맞아준 적이 없어.”한현진이 그런 강한서
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아냐, 이건 무효야. 방금 그건 우연이야. 다시 해. 이번엔 나중에 움직이게 한 사람이 강민서 약혼식 비용 전부 내는 거야.”씩 입꼬리를 올린 강한서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좋아. 누가 먼저 할까?”“나!”한현진이 말하며 딸기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가들아, 엄마야. 엄마가 이야기 들려줄까?”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뱃가죽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처럼 격렬한 반응은 아니었다. 마치 의심스럽다는 듯 잔잔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태동은 한현진을 흥분시키기엔 충분했다. “봐봐. 이것 보라고.”자신감이 하락한 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내 목소리 톤으로 말하면 어떡해? 이건 부정행위잖아.”그렇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연 한현진은 강한서의 목소리로 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현진은 단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게 왜 부정행위야. 네가 본인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규정한 건 아니잖아. 이런 건 특기를 발휘했다고 하는 거야.”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걸 꼼수를 부렸다고 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내가 이겼어.”“너 그건 내 노동성과를 표절한 거야.”“내가 이겼어.”“아이들 마음까지 속인 거라고. 태어나지도 않은 애들한테 인간의 사악함을 느끼게 했어.”“내가 이겼어.”강한서는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반항했다. “나 아직 도전 안 했어. 아직 진 거 아냐.”한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강 대표님, 게임 룰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셨나봐요. 전 먼저 움직이게 한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제가 이미 먼저 움직이게 했잖아요. 강 대표님이 도전했든 안 했든, 그건 중요한게 아녜요.”“어차피 네가 1등은 아니라는 거지.”“...”강한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언어유희로 룰에 함정을 파놓은 거야?”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전화를 끊은 전연이 눈을 비볐다. “휴대폰 소리에 깼어요. 미안해요, 오빠. 오래 기다리셨죠? 바로 깨우지 그랬어요.”심원이 말했다. “그리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요. 안 그래도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깼네요.”말하며 시동을 끈 심원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요, 밥 먹어요.”전연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심원의 뒤를 따랐다. 밖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전연이 가방을 머리를 위로 올려 비를 막으려던 그때, 심원이 우산을 들고 나타나 전연에게 씌웠다. 심원은 흔히들 말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직 몇 번 만난 사이는 아니었지만 심원은 당연하다는 듯 전연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고 우산 밖으로 비쭉 튀어나와 비를 맞고 어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제쪽으로 걸어요. 물웅덩이 조심하고요.”전연이 갑자기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모든 여자에게 다 이렇게 다정해요?”멈칫한 심원이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다 자신이 물러선 그 한 걸음 때문에 전연이 비를 맞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또 얼른 전연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심원은 그렇게 온전히 비를 맞으며 말 한 마디를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말을 더듬던 심원이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미안해요...”전연이 우산 손잡이를 잡고 심원에게 다가갔다. 심원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뒤에 주차된 차 때문에 더는 물러설 곳 없이 전연과 차 사이에 갇혀버렸다. 전연이 우산을 높게 들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가렸다. 고개를 들어 심원을 쳐다본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오빠가 우산 들어요. 키가 커서 이렇게 들고 있으면 팔이 너무 아파요.”“아, 네.”번뜩 정신을 차린 심원이 얼른 우산을 건네받았다. 전연이 심원을 향해 웃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오빠. 전 오빠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도울 거예요.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오빠가 자신을 의심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오빠는 사격 실력도 엄청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