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실래요?”주강운의 목소리는 꽤나 부드러웠다. 아니, 따뜻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분명 매력 있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주강운은 한 번도 유현진에게 이렇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유현진은 울컥 서러움에 북받쳤고 술 때문이었는지 억울함 때문이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춤 잘 못 춰요."“저도 잘 못 춰요.”주강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는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한 걸음 한 걸음, 멜로디에 맞춰 발을 내디디며 그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갔다. 이는 유현진과 강한서 사이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었던 케미였다. 유현진은 늘 강한서의 발을 밟았고, 강한서는 인내심이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실수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그녀와 춤을 추려 하지 않았다. 유현진이 춤을 못 춰서라기보다는 그저 강한서가 유현진을 맞춰줄 의향이 전혀 없었던 것뿐이었다. 두 번의 춤을 추고 나니, 유현진의 코 끝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유현진은 주강운에게 술잔을 건네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물었다. “정말 송민영 팬이에요?”주강운은 피식 웃더니 종이에 술을 조금 묻혀 손목의 사인펜 흔적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전 사실 TV 잘 안 봐요. 근데 그런 대스타는 처음이라. 궁금했거든요. 어떤 매력이 있는지.”유현진은 주강운의 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이유가 조금 억지스러웠기 때문이다. 유현진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주강운이 말했다. “농담이에요. 사실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되면 다시 알려드릴게요.”“송민영 팬만 아니면 돼요.”그녀의 집요한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주강운은 손을 들어 맹세했다. “전 절대 아닙니다. 맹세해요.”“그럼 마셔요.”주강운은 술잔을 들며 불쑥 말했다.“송민영 씨, 아까 다치셨어요.”유현진은 순간 행동을 멈췄다. “넘어지실 때, 팔이 유리 위로 떨어졌거든요. 아무래도 공인이시라, 이미지가 중요하니까요. 사진이
유현진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저쪽에서 들려오는 것은 신용카드를 갚으라는 내용의 여자 기계음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전화를 뚝 끊고는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려는 듯 손을 높이 들었다. 휴대전화가 떨어지려는 순간, 다시 손을 내려 전원을 끄고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주강운은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었다.“데려다줄게요.”“강한서가 데려다주라고 한 거면 됐어요. 자기 와이프 직접 데리러 오라고 해요.”겉으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은 꽤나 화가 나 있었다. 어디도 가지 않고 계속 여기에 있는 건 아마도 강한서의 소식을 기다리는 거겠지. “너무 늦었어요. 이 시간에 여자 혼자 밖에 있으면 위험해요.”돌려 말하긴 했지만, 유현진은 알고 있었다. 강한서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는걸. 와이프를 파티장에 두고 왔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지난번 주차했던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요?”차에 오른 뒤 유현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모습은 잠든 것 같기도 했다. 차가 멈추고, 주강운이 유현진을 부르려는 찰나 그녀가 눈을 떴다. “도착했어요?”“네.”유현진은 창밖을 내다보고는 걸쳐있던 외투를 돌려주며 말했다.“고마워요.”그러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이때, 주강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고개를 숙여 발신자 표시를 확인하고는 휴대전화를 한 쪽에 내버려 두었다. 유현진의 모습이 아파트 입구에서 사리지고 나서야 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려 떠나게 했다. 강한서는 연결되지 않은 전화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대표님?”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을 때 가정부가 전화를 받았다. 강한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람, 집에 들어갔나요?”“사모님이요? 사모님 대표님과 함께 파티에 가셨잖아요.”강한서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안 싸웠어. 이혼하면 재산 분할도 해주기로 했는데, 내가 왜 싸워? 돈은 받아야지.”“너 그럼 지금 돌아가려고?”“오늘엔 병원에 가려고. 낮에 간병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오늘 엄마가 또 반응을 보였대. 요즘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옆에서 얘기 많이 해드리려고. 혹시 더 일찍 깨어나실지도 모르잖아.”“내가 데려다줄게.”“아냐, 됐어. 차 불렀어.”유현진이 차미주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너도 일찍 쉬어.”하현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차미주에게 얘기한 것처럼 반응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유현진은 그저 그녀 옆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엄마 옆에서라면 어떤 서러운 일이 있어도, 아무런 위로의 말이 없어도 마음만은 편할 수 있었다. 의사는 항상 그녀에게 어머니와 많은 얘기를 나누라고 했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소통이 적었던 탓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현진은 기억을 더듬어 이전의 일들을 얘기해 보고 싶었지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도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가 애쓰는 모습을 보던 간병인은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남편분 이야기를 하셔도 괜찮아요. 결혼생활 얘기도. 엄마는 딸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니까.”“뭐,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서요.”유현진의 입꼬리가 내려갔다.“사고만 나지 않았어도, 아마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일은 없었겠죠.”간병인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현진은 몸을 일으며 하현주가 갖고 있던 골동품인 카세트 라디오를 켰다. 하현주는 국악을 좋아해서 집에 많은 데이프를 모아놓고 있었다. 이 카세트 라디오도 모아 둔 테이프를 듣기 위해 산 것이었다. 의사가 하현주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해서 자극을 줘야 한다고 얘기를 한 후부터 유현진은 집에서 물건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그녀는 아무 테이프나 골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책상 위에 놓였던 잡지를 펼쳐들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혼 후 전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 였다.유현진은 아무
하현주가 보였던 두 번의 반응의 유일한 공통점은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사는 이런 내용을 진료차트에 적으며 말했다. “카세트테이프 때문일 수 있습니다. 계속 같은 방법으로 자극을 줘보세요. 하지만 너무 오래 하지는 마시고요. 틀어놓고 반응을 잘 살피시고 반응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의사가 병실을 나간 후, 유현진은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보았다. 테이프가 워낙 오래되어 위의 글씨가 대부분 흐릿해 “국악의 대가” 라는 글씨만 희미하게 보였다. “언니, 지난번 엄마가 반응을 보였던 테이프, 어떤 건지 기억나세요?”“그건 기억이 잘 안 나요. 하지만 멜로디는 기억나요. 흥얼거려 볼게요.”기억난다는 간병인의 말에 유현진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짧게 흥얼거린 간병인이 다급히 물었다.“어때요? 무슨 노래인지 알겠어요? 이 멜로디는 정확하게 기억해요.”유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간병인이 말한 흥얼거림이란 진짜로 흥얼거림 그 자체였다. 가사 한 줄도 없이, 심지어 음정조차 맞지 않는 듯한 흥얼거림이었다. 하현주를 따라 들은 국악이 얼마인데,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80% 이상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간병인이 흥얼거린 멜로디로는 전혀 어떤 곡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간병인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말했다.“들어본 적 없는 곡인 것 같아요.”간병인이 열정적으로 나섰다.“제가 제대로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한 번 더 해볼게요.”“괜찮아요.”유현진은 테이프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고개를 돌려 간병인에게 말했다.“언니, 앞으로 이 테이프들을 순서대로 틀어줘요. 엄마가 반응을 보이는 것들로만 추려서, 그것만 들려드려요.”“네.”유현진은 간병인이 가져온 보호자용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딱딱한 접이식 침대에 온몸이 아팠다. 이튿날 아침, 날이 완전히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래층에서 간병인에게 줄 아침밥을 가져다주고, 몇 가지를 당부하고 나서야 택
유현진의 태도에 약간 초조해진 강한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친구는 핸드폰도 없어? 전화 한 통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전화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우리 강 대표가 전화받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쁠까 봐 그러지, 너..."유현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떠나기 전에 나랑 인사할 시간도 없었잖아."강한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말했다."민영이가 다쳤어."유현진은 송민영이 다친 게 가슴 아픈 나머지 강한서가 아내인 자신한테 미리 말해줄 시간도 없이 바로 병원으로 뛰쳐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유현진은 시선을 떨군 채로 태연하게 말했다."그래서 송민영은 죽었어?"유현진의 각박한 질문에 강한서는 눈살을 찌푸렸다."현진아, 넌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그냥 해본 말에 왜 이렇게 긴장해? 내가 죽는다고 말했다고 진짜 죽는 것도 아니고."유현진은 이렇게 말하며 강한서를 지나쳐갔다. 강한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다가 성큼성큼 쫓아갔다.유현진은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사과를 먹으면서 iPad를 봤다. 그녀는 휴대폰과 패드에서 같은 계정을 쓰고 있기에 모든 정보를 동기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휴대폰이 고장 난 지금은 iPad를 볼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강한서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메일을 확인했다.강한서는 소파 위에 있는 드레스를 만지작대면서 이렇게 물었다."이 드레스는 누가 선물한 거야?""호텔 매니저."강한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호텔 매니저가 왜 너한테 옷을 선물해?"유현진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강한서가 유현진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더라면 직접 호텔에 가서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어젯밤 화장실에 갇혀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강한서는 알아볼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유현진을 화장실에 가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강한서가 강민서를 아끼는 정
준이는 우승마의 후손이었다. 우승마로서의 혈통에 새겨진 도도함으로 그는 이러한 서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채찍을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난폭해져갔다.농장주는 녀석이 미쳤는 줄 알고 안락사를 시키려고 했다. 겨우 속박에서 벗어나 도망친 준이는 길가로 나와서 마구 뛰어다녔다.그때 정인월은 마침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녀석과 부딪칠까 봐 걱정되었던 정인월은 운전기사한테 차를 세우라고 했다.경찰은 재빨리 현장에 도착해서 마취총을 쏘았다. 몸이 통제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녀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의 고집스러운 눈은 호시탐탐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정인월은 녀석의 눈빛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160만 원을 주고 농장주한테서 녀석을 사 왔다.사람들은 전문이도 길들이지 못한 녀석을 웬 할머니가 길들일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인월이 녀석을 데리고 간 날, 녀석은 정인월을 한참 쳐다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얼굴을 비비적댔다.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랐지만 정인월은 그다지 놀란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인월은 신이 나서 녀석과 함께 귀국을 했다.어린 시절에 줄곧 채찍을 맞아서인지 준이는 낯선 사람들을 아주 경계했다. 온 집안에서 준이를 가까이할 수 있는 사람은 정인월을 제외하고 강한서 밖에 없었다. 정인월은 둘의 성격이 똑같이 괴팍하기 때문에 끼리끼리 놀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유현진은 그 말이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할머니, 저를 놀리지 마세요. 준이가 언제 저를 거들떠 본 적이나 있어요? 그 녀석은 제가 없어야 입맛이 더 좋을 거예요."정인월은 웃으면서 말했다."준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네가 주는 음식을 먹겠어? 그 녀석은 민서가 주는 음식을 먹은 적이 없어. 그대로 다 토해내면 모를까."강민서가 준이의 토사물을 뒤집어쓴 장면을 상상하며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오늘 잠깐 왔다 가면 안 될까? 와서 점심도 먹고 준이랑 같이 뛰어놀기도 하면 얼마나 좋아.
넥타이를 매고 난 유현진은 손을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자, 이 정도면 2000억의 가치를 발휘했겠지?"정신을 차린 강한서는 거울을 힐끗 보며 말했다."괜찮네."유현진은 입을 삐죽거리며 신발을 갈아 신고 작은 가방을 멘 채로 밖으로 나왔다.유현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문 앞에 세워져 있는 벤츠를 발견했다. 정인월의 전속 기사인 진씨는 차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유현진을 발견한 진씨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저는 부인께서 사모님을 모셔오라고 해서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50대 아저씨한테 극존칭을 듣는 게 불편했던 유현진은 재빨리 대답했다."그럼 잘 부탁드려요, 아저씨."진씨는 유현진이 차에 오른 후에도 차를 돌리기만 했을 뿐 출발하지는 않았다. 유현진이 마침 그에게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할 때, 강한서가 걸어와서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러자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네 차는 어쩌고 이쪽으로 왔어? 할머니 집이랑 회사는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르잖아.""내가 언제 회사로 간댔어?"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끗 쳐다보고는 진씨한테 이렇게 말했다."아저씨, 출발하죠."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 강한서도 함께 갈 줄 알았더라면 그녀는 가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다.'재수 없어!'유현진은 창문 쪽으로 옮겨 앉으며 강한서와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하지만 강한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휴대폰 들고 타자를 했다. 휴대폰을 높게 든 탓에 유현진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나쁜 놈! 네가 누구랑 문자를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주강운이 서재에서 자료를 찾고 있을 때 휴대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영상통화를 건 것을 보고 그는 일단 수락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어머니, 무슨 일 있어요?""강운아, 이 치마 어때?"휴대폰을 힐끗 쳐다본 주강운은 영혼 없이 대답했다."예뻐요. 어머니랑 잘 어울려요."주강운의 어머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
주강운은 침묵을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감탄을 했다."나는 왜 딸을 낳지 않았을까? 만약 딸이 있었더라면 한서를 사위로 삼았을 텐데."주강운은 참다못해 이렇게 말했다."한서는 이미 결혼했어요.""나도 알지. 근데 부인은 왜 한서같이 착한 애한테 그런 처를 찾아줬을까? 둘의 집안은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려.""고모랑 고모부는 집안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데 왜 이혼을 했대요? 고모는 지금 어린 남자친구를 만나서 아주 즐겁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던데요.""네 고모는 할아버지의 응석받이로 자랐어. 누가 그 성질을 감당하겠니?"주강운이 고모 얘기를 꺼내자 주강운의 어머니는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이어서 말했다."너도 언제 시간을 내서 인월 할머니를 만나러 가. 네가 외국에 있는 동안 부인은 줄곧 너를 걱정해 왔어. 돌아온 후에라도 자주 만나러 가야지."주강운은 머리를 끄덕였다."민서랑은 가끔 연락하고 있어?"어머니의 속셈을 알고 있는 주강운은 아예 대답을 피해버리고 말았다."제가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주강운은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영상통화를 끊어버렸다.주강운은 인터넷에서 어머니가 입고 있던 치마의 가격을 알아봤다. 그 가격은 마침 주강운이 유현진한테 선물한 치마와 비슷했다.'유치한 놈.'...유현진과 강한서는 차로 이동하는 내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남대로까지 가고 나서야 강한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아저씨, 저 앞에 있는 백화점에서 잠깐 세워줘요."진씨가 차를 세운 후, 강한서는 이렇게 말했다."내려""왜?""설마 빈손으로 찾아가게?""선물이라면 너 혼자서 사러 가도 되잖아."유현진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왔다.정인월의 손에서 자란 강한서는 정인월과 사이가 아주 좋았다. 그는 정인월의 말이라면 거의 다 따랐다, 정인월 때문에 송민영과 헤어질 정도로 말이다.정인월은 한주 강씨 가문에서 가장 대단한
“넘버 S 오일이 저장되어 있던 곳은 잠겨 있었어요. 잠금장치가 있었으니 기사님은 오일을 건드릴 수 없었어야 해요. 하지만 기사님이 오일을 꺼낼 수 있었다는 건 그 당시엔 잠겨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장실의 규정에 관해선 전혀 모르고 계세요. 책임자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상황에 업무 중 실수로 오일을 깨뜨린 건 고의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일에 관한 책임을 논한다면 두 사람이 똑같이 감당해야 해요.”“하지만 주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의 제조에 성공했고 이 일은 사실상 저희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진 않았어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퇴사 처리는 너무 심한 처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오늘 내린 이 징계를 전례로 따른다면 업무 중 실수를 저질렀을 때 해고 당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숨겨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상황을 피면할 수 있을 거예요. 처벌이라는 건 실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수단이잖아요.”서해금이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송가람이 냉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예쁘게 포장하건 기사님을 감싸주려고 그러는 거죠?”한현진이 쿨하게 인정했다. “내 사람은 당연히 내가 감싸야죠. 송 팀장님도 홍혜림 씨에게 실수를 하셨지만 그저 감봉을 조금 당한게 전부였잖아요.”그 말은 송가람뿐만 아니라 서해금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혁이 해고를 당할 땐 당하더라도 한현진은 부하 직원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줄곧 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3개월 감봉, 보너스 삭감. 이 정도면 되겠니?”조금 더 말다툼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한현진의 예상과는 달리 서해금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서해금을 힐끗 훑어보던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죠.”송가람이 불퉁하게 말했다. “이 처벌은 너무 가볍잖아요.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고작 이정도 처벌로 넘어간다면 앞으로 다른 직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한현진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회
멈칫하던 한현진이 홱 고개를 돌렸다. 입을 연 사람은 다름이 아닌 한현진의 운전기사인 주혁이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현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주혁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깡마르고 잔뜩 움츠러든 그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여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표님, 오일은 제가 깨뜨린 거예요. 오늘 안에서 청소를 하다 그만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이곳엔 값비싼 물건들만 저장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서워... 무서워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말하며 그는 한현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죄송해요.”미간을 찌푸린 한현진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회사엔 청소 도우미를 따로 고용하고 있는데 왜 기사님이 청소하신 거예요?”주혁이 고개를 숙이고 차마 한현진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제가 신청했어요. 시급으로 15000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이라도 해주려고...”주혁이 청소를 하게 된 이유를 들은 한현진은 화조차도 낼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송가람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한 대표님이 고르고 고른 사람이 고작 이 정도였어요? 넘버 S 오일을 얼마나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실수로 깨뜨려요? 오일을 깨뜨리고 무서워서 감히 인정을 못 한 게 아니라 어쩌면 애초부터 손버릇이 나쁜 사람인 걸지도 몰라요. 청소를 핑계로 훔치려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깨뜨린 거죠.”당황하던 주혁이 창백해진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눈빛엔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소매에 감춰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 그저 먼지를 닦으려고 오일병을 꺼낸 거였어요. 하지
송민준은 매주 서너 번씩 주승관을 찾아왔다. 말도 많고 멍청한 데다 시끄럽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매번 재미없는 얘기만 늘어놓다 마지막은 꼭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내 동생도 이렇게 컸으면 세은이만큼 귀여웠을 거예요.”그 후 여동생이 아파서 송민준은 두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주승관은 주세은과 함께 송민준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그의 여동생인 송가람을 만났다. 송민준의 말과 달리 주세은은 그의 여동생이 귀엽기는커녕 오히려 멍청하다고 느꼈다. 송민준과 비슷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주세은과 주승관을 배웅하며 송민준은 주세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 “양심도 없는 꼬맹아. 의사에겐 오빠라고 하면서 우리 알고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오빠라고 안 불러?”주세은이 대답했다. “멍청하니까요.”그 말에 송민주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마치 못 들을 충격적인 말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세은은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한 거 맞잖아. 6개월 동안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하나 따지 못하다니. 대체 뭘 배운 거야.’주세은의 말에 자극을 받은 송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면 날 오빠라고 부를 거야?”주세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나보다 똑똑하겠어? 아빠가 가르쳐준 건 이젠 나도 거꾸로 외울 수 있는 수준인데도 아직 기억하지 못하잖아.’송민준이 말했다. “그럼 내가 문제 낼게. 네가 정답을 맞힐 수 있으면 난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인정할게. 하지만 만약 네가 틀리면 앞으론 날 볼 때마다 얌전히 오빠라고 불러.”주세은이 송민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송민준이 말했다.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을까?”“...”“모르겠어?”빨갛게 얼굴을 붉히던 주세은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있는데요?”송민준이 씩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머리에 붙어 있는 만큼.”“...”자신에게 농락당해 얼굴이
송가람은 약 올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나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진 씨는 뭔데 뿌듯해하는 거예요. 현진 씨가 제조한 것도 아니잖아요.”한현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세은이는 제가 특례로 입사시킨 천재잖아요. 제가 왜 뿌듯하면 안 되는 거예요?”말하며 한현진은 서해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 대표님,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했으니 이젠 억울하게 오일을 깨뜨렸다는 누명을 쓴 일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그리고 서하 씨의 보너스 삭감이 정말 규정에 따란 이행된 건지, 아니면 누군가 그걸 빌미로 사적인 화풀이를 하려고 한 건지 회사 감사위원회에 조사를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한현진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향이 비슷하긴 하지만 사용 여부에 대해선 테스트를 진행해 봐야 해.”한현진이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일단 오일을 깨뜨린 일부터 조사하시죠.”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해금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경찰이 도착했어요. 누군가 회사의 재물손괴가 있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고 신고를 해 조사하러 왔다고 하네요.”서해금이 휙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아무래도 경찰에게 맡기는 편이 효율적인 것 같아서요. 값비싼 물건인 만큼 만에 하나 범인을 색출하지 못한다면 저희가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잖아요. 제가 소유하고 있는 지분이 제일 많으니 손실을 제일 많이 보는 것도 저예요. 그러니 저도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린 거예요. 이해하시죠?”서해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현진은 지금의 서해금은 어쩌면 옆에 놓은 물을 자신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현진은 성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해금이 손을 움직이는 순간 성월의 등 뒤로 숨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서해금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신고까지 한 거냐며 난리를 피우는 송가람과 달리 서해금은 몸을 일으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곧 아무
[한 대표님이요...]채팅방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물었다. [한 대표님, 돈을 이렇게 많이 거셨다가 지면 어쩌시려고요.]한현진이 대답했다. [한 번 걸어보는 거죠. 돈방석에 앉게 될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채팅방은 곧 [대표님, 쿨하시네요.]라는 문자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몇십 명의 사람들이 실패에 베팅했다. 심지어 돈을 더 거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딜러가 또 말했다. [송 팀장님께 실패에 2000만 원을 거셨어요.]멈칫한 한현진은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은 마치 한현진이 자신을 쳐다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은 송가람이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말했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미소를 짓던 한현진이 입 모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물었다. “사기당한 40억은 돌려받았어요?”송가람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버럭 화를 내려던 송가람은 자신을 쳐다보는 서해금의 시선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세은은 매번 제조해 낸 오일의 향에 따라 원료의 비율을 조절했다. 1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10가지가 넘는 샘플을 만들어냈지만 넘버 S 오일에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직 없었다. 서해금은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주세은이 시도한 비율은 서해금의 제조 방안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던 샘플과 비슷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오일의 비율을 조절했다. 그러니 주세은이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리가 없었다. 현장에서 제조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전교 일 등인 척하는 전교 꼴찌를 지켜보는 기분이네요. 대체 제가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죠?”넘버 S의 성분 분석에 참여했던 사람이 말했다. “세은 씨가 정확한 오일을 고르긴 했어요. 정말 천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저 우연일 뿐이었네요.”“한 대표님께서 성공에 2000만 원이나 거셨던데 그 돈이
주세은이 제조에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 송가람은 벌써 냉소적인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꽤 전문가답네요. 현진 씨는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하려면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한현진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늦어서 2시간이요. 세은이가 그랬잖아요. 청력에 문제 있어요?”송가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2시간 안에 성공한다면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회사는 불필요한 사람을 키워줄 이유가 없거든요.”한현진이 냉담한 태도로 받아쳤다. “줄곧 필요 없는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었잖아요.”멈칫하던 송가람은 그제야 한현진이 말 한 필요 없는 사람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송가람이 한현진을 반박하려는데 서해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보려거든 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 사람은 나가.”‘얘는 철이 안 들어! 하필 지금 여기서 한현진과 설전을 벌여야겠어?’송가람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녀는 주세은이 창피를 당하기만을 기다렸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주세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제조에 성공해도 걱정, 실패해도 걱정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제조에 성공해 너무 일찍 실력을 드러낸다면 서해금의 경계 대상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대부분은 주세은이 우스운 꼴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낙하산으로 들어온 어린 꼬맹이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것이라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못을 인정하는 게 나을 텐데요.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서 제조에 실패하면 얼마나 창피해요.”“오일을 제조하겠다는 건 핑계고 그저 나대고 싶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전 회사에 저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지금 어린 친구들은 너무 허황한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니까요.”...그나마 눈치를 보며 말을 내뱉는 현장의 사람들과 다르게 단체 채
물론 서해금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꼬맹이에게 그 오일을 제조할 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넘버 S 오일은 한아람이 세상을 뜨기 전 제조해 낸 것이었다. 당시엔 오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해금도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회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해금은 그 오일을 제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향사들과 수천 가지가 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녀는 심지어 화학성분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한아람이 만든 오일을 재현할 수 없었다. 서해금이 재현해 낸 오일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을 때도 딱 2%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2%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향수의 향기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서해금은 넘버 S 오일을 장기 보관할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오일의 휘발을 감소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노력으로도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오일을 주세은이 향만 맡고 제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기회를 줘야 했다. 어차피 서해금은 애초부터 주세은의 입사를 반대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그 눈은 보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 기회에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던 서해금이 말했다. “그럼 너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게.”“아뇨.”주세은이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대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에 주세은을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풍을 떠는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닌 바보를 보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주세운이 두 시간 사이 오일을 제조해 낸다면 그건 회사의 모든 조향사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한현진은 스르륵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세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건 어때?”‘만약 제조에 실패해 서해금이 이 기회를 빌려 회사에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오빠에겐 뭐라고
주세은의 말 한마디에 현장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물론 한현진도 멍해졌다. ‘어린애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도 하네.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서해금도 지금까지 한 병밖에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던데.’만약 오일의 제조는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해 서해금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 이상 오일의 제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의 많은 조향사들은 넘버 S 오일을 본 적이 있었다. 만약 정말 마케팅에 불과하다면 진작 들켰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경쟁자로 가득한 이 업계에 이런 비밀로 캐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말 제조가 어려운 오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껏해야 배상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세은은 말을 내뱉었고 만약 서해금이 정말 주세은에게 제조를 맡긴 후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한현진은 정말 주세은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MZ는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지금 주세은에 대한 한현진의 평가는 그나마 무난한 편이었다. 주위에 몰려 구경 중이던 직원들은 한현진보다 훨씬 직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음식 양념장이라도 만드는 건 줄 아나 봐.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깔린느가 지금껏 향수 업계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어? 진작 라이벌 회사에 뺏겼을 거야.”“서 대표님도 본인이 제조하셨지만 다시 똑같은 오일을 만들지는 못하셨어요. 이제 갓 졸업한 어린 꼬맹이가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예요?”“하룻밤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잖아요.”“만약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제 손에 지지겠어요.”송가람의 얼굴에 은은한 멸시가 감돌았다. 아마도 주세은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본인이 직접 불구덩이에 뛰어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현진은 마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온 학부모 같았다.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사
한현진은 말하며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전 주주의 신분으로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니도 세은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임원인 누군가의 연줄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저와 세은이를 제약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언니와 서 대표님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송가람은 논리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현진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한 방이 되었다. 낄린느의 창시자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입사한 직원이 알고 있는 회사의 대표는 서해금이 전부였다. 깔린느의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서해금을 깔린느의 창시자인 듯 추앙하고 있었다. 예전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경력 2, 30년 이상의 고참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깔린느가 모든 위기를 헤치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부 서해금의 공로로 알고 있었다. 설사 한현진이 회사의 대표로 취임했어도 다들 서해금이 옛정을 생각해 파트너였던 사람의 딸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월이든 송가람이든 한현진의 얘기만 나오면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조차 않던 창시자인 한아람은 애초부터 깔린느의 최대 주주였고 심지어 그녀는 90%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깔린느의 창업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밖에 되지 않는 서해금의 투자금이 부족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해금은 그저 적은 투자금을 들여 깔린느와 파트너쉽을 맺고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는 얘기였다. 자수성가, 커리어우먼, 비즈니스 천재, 조향 천재라는 타이틀은 그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아람 덕에 누린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과 더불어 “주세은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현진이 모든 책임을 진다”던 송가람의 말을 곱씹어 본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은 의미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