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막 손을 뻗어 술잔을 받으려 하자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술 못 마시는 거 아니었어?”송민영이 준 술을 마시기 싫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자신이 송민영을 신경 쓴다고 보이기는 싫었으니까. “누가 술 마신대?”그녀는 손을 돌려 방금 마신 주스를 집어 들고 주강운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스로 대신해도 괜찮죠?”주강운이 조금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대답했다. “편할 대로 하세요.”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진 것을 눈치챈 한성우가 얼른 술잔을 들어 강한서에게 쥐어주고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술은 당연히 다 같이 마셔야지. 형수님,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유현진은 이상하다는 듯 한성우를 바라보았다. 평소 한성우와 유현진은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강한서의 친구들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녀가 강한서와 결혼 한 것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강한서와 함께 있을 때는 그를 봐서라도 친한 척 인사를 나누지만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인사는커녕 아예 못 본척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현진도 강한서 주변의 부잣집 도련님들을 싫어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성우를.그녀가 한성우를 싫어하는 제일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송민영이었다. 강한서와 송민영의 일이 알려지지 않고 송민영이 여러 스캔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한성우 덕분이었다. 평소엔 눈꼴사납게 굴더니 이젠 형수님, 형수님하고 부르니 유현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송민영은 마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보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이분은 대표님 친구분이세요?”한성우는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인지한 척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그러자 송민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는 이미 한참 동안 여기 서있었다.송민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매니저가 얘기 안 드렸어요? 오늘 자선 공연 있는 날이거든요.”“그러고 보니, 얘기를 들
“당연히 해드려야죠.”송민영은 말하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 가방을 본 유현진은 순간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강한서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술을 음미할 뿐 가방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다른 사람이 준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 가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리가 없지.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유현진이 하루 동안 집에서 옷을 세 벌이나 갈아입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유현진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 가방을 한참을 뒤적이던 송민영은 펜 하나만 꺼내들고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해요. 사인지를 안 가져왔네요. 다음에 해드릴게요. 아니면 제가 사인해서 한 대표님 통해서 전해드려도 되고요.”“괜찮으시면 제 손목에 사인해 주시겠어요?”주강운이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송민영이 순간 움찔 눈을 떨었다. '설마 주강운이 진짜로 송민영의 팬은 아니겠지?'한성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주강운, 너 이런 취향이었어?”주강운은 가볍게 웃더니 팔을 내밀며 말했다.“송민영 씨 한 번 만나기가 좀 어려워야지.”주강운의 한 마디에 허영심이 한 번에 충족된 송민영은 더 이상 말설이지 않고 펜을 들어 주강운의 손목에 사인을 했다. 주강운의 눈은 글씨 쓰는 송민영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한서와는 달리 주강운은 요염한 눈매를 가졌다. 그의 눈빛은 쓰레기 더미를 보더라도 애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틋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송민영이 사인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끌려가 뺨을 한 대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감히 누구한테 꼬리를 치는 거야?”갑자기 뺨을 얻어맞은 송민영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조금 지나서야 그녀는 자신을 때린 사람이 강한서의 동생 강민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송민영은 휘청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테이블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피라미드 모양의 술잔이 와르르 무너졌다. 송민영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고 치마에는
“춤추실래요?”주강운의 목소리는 꽤나 부드러웠다. 아니, 따뜻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분명 매력 있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주강운은 한 번도 유현진에게 이렇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유현진은 울컥 서러움에 북받쳤고 술 때문이었는지 억울함 때문이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춤 잘 못 춰요."“저도 잘 못 춰요.”주강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는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한 걸음 한 걸음, 멜로디에 맞춰 발을 내디디며 그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갔다. 이는 유현진과 강한서 사이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었던 케미였다. 유현진은 늘 강한서의 발을 밟았고, 강한서는 인내심이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실수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그녀와 춤을 추려 하지 않았다. 유현진이 춤을 못 춰서라기보다는 그저 강한서가 유현진을 맞춰줄 의향이 전혀 없었던 것뿐이었다. 두 번의 춤을 추고 나니, 유현진의 코 끝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유현진은 주강운에게 술잔을 건네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물었다. “정말 송민영 팬이에요?”주강운은 피식 웃더니 종이에 술을 조금 묻혀 손목의 사인펜 흔적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전 사실 TV 잘 안 봐요. 근데 그런 대스타는 처음이라. 궁금했거든요. 어떤 매력이 있는지.”유현진은 주강운의 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이유가 조금 억지스러웠기 때문이다. 유현진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주강운이 말했다. “농담이에요. 사실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되면 다시 알려드릴게요.”“송민영 팬만 아니면 돼요.”그녀의 집요한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주강운은 손을 들어 맹세했다. “전 절대 아닙니다. 맹세해요.”“그럼 마셔요.”주강운은 술잔을 들며 불쑥 말했다.“송민영 씨, 아까 다치셨어요.”유현진은 순간 행동을 멈췄다. “넘어지실 때, 팔이 유리 위로 떨어졌거든요. 아무래도 공인이시라, 이미지가 중요하니까요. 사진이
유현진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저쪽에서 들려오는 것은 신용카드를 갚으라는 내용의 여자 기계음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전화를 뚝 끊고는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려는 듯 손을 높이 들었다. 휴대전화가 떨어지려는 순간, 다시 손을 내려 전원을 끄고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주강운은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었다.“데려다줄게요.”“강한서가 데려다주라고 한 거면 됐어요. 자기 와이프 직접 데리러 오라고 해요.”겉으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은 꽤나 화가 나 있었다. 어디도 가지 않고 계속 여기에 있는 건 아마도 강한서의 소식을 기다리는 거겠지. “너무 늦었어요. 이 시간에 여자 혼자 밖에 있으면 위험해요.”돌려 말하긴 했지만, 유현진은 알고 있었다. 강한서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는걸. 와이프를 파티장에 두고 왔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지난번 주차했던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요?”차에 오른 뒤 유현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모습은 잠든 것 같기도 했다. 차가 멈추고, 주강운이 유현진을 부르려는 찰나 그녀가 눈을 떴다. “도착했어요?”“네.”유현진은 창밖을 내다보고는 걸쳐있던 외투를 돌려주며 말했다.“고마워요.”그러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이때, 주강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고개를 숙여 발신자 표시를 확인하고는 휴대전화를 한 쪽에 내버려 두었다. 유현진의 모습이 아파트 입구에서 사리지고 나서야 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려 떠나게 했다. 강한서는 연결되지 않은 전화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대표님?”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을 때 가정부가 전화를 받았다. 강한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람, 집에 들어갔나요?”“사모님이요? 사모님 대표님과 함께 파티에 가셨잖아요.”강한서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안 싸웠어. 이혼하면 재산 분할도 해주기로 했는데, 내가 왜 싸워? 돈은 받아야지.”“너 그럼 지금 돌아가려고?”“오늘엔 병원에 가려고. 낮에 간병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오늘 엄마가 또 반응을 보였대. 요즘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옆에서 얘기 많이 해드리려고. 혹시 더 일찍 깨어나실지도 모르잖아.”“내가 데려다줄게.”“아냐, 됐어. 차 불렀어.”유현진이 차미주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너도 일찍 쉬어.”하현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차미주에게 얘기한 것처럼 반응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유현진은 그저 그녀 옆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엄마 옆에서라면 어떤 서러운 일이 있어도, 아무런 위로의 말이 없어도 마음만은 편할 수 있었다. 의사는 항상 그녀에게 어머니와 많은 얘기를 나누라고 했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소통이 적었던 탓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현진은 기억을 더듬어 이전의 일들을 얘기해 보고 싶었지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도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가 애쓰는 모습을 보던 간병인은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남편분 이야기를 하셔도 괜찮아요. 결혼생활 얘기도. 엄마는 딸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니까.”“뭐,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서요.”유현진의 입꼬리가 내려갔다.“사고만 나지 않았어도, 아마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일은 없었겠죠.”간병인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현진은 몸을 일으며 하현주가 갖고 있던 골동품인 카세트 라디오를 켰다. 하현주는 국악을 좋아해서 집에 많은 데이프를 모아놓고 있었다. 이 카세트 라디오도 모아 둔 테이프를 듣기 위해 산 것이었다. 의사가 하현주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해서 자극을 줘야 한다고 얘기를 한 후부터 유현진은 집에서 물건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그녀는 아무 테이프나 골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책상 위에 놓였던 잡지를 펼쳐들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혼 후 전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 였다.유현진은 아무
하현주가 보였던 두 번의 반응의 유일한 공통점은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사는 이런 내용을 진료차트에 적으며 말했다. “카세트테이프 때문일 수 있습니다. 계속 같은 방법으로 자극을 줘보세요. 하지만 너무 오래 하지는 마시고요. 틀어놓고 반응을 잘 살피시고 반응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의사가 병실을 나간 후, 유현진은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보았다. 테이프가 워낙 오래되어 위의 글씨가 대부분 흐릿해 “국악의 대가” 라는 글씨만 희미하게 보였다. “언니, 지난번 엄마가 반응을 보였던 테이프, 어떤 건지 기억나세요?”“그건 기억이 잘 안 나요. 하지만 멜로디는 기억나요. 흥얼거려 볼게요.”기억난다는 간병인의 말에 유현진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짧게 흥얼거린 간병인이 다급히 물었다.“어때요? 무슨 노래인지 알겠어요? 이 멜로디는 정확하게 기억해요.”유현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간병인이 말한 흥얼거림이란 진짜로 흥얼거림 그 자체였다. 가사 한 줄도 없이, 심지어 음정조차 맞지 않는 듯한 흥얼거림이었다. 하현주를 따라 들은 국악이 얼마인데,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80% 이상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간병인이 흥얼거린 멜로디로는 전혀 어떤 곡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간병인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말했다.“들어본 적 없는 곡인 것 같아요.”간병인이 열정적으로 나섰다.“제가 제대로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한 번 더 해볼게요.”“괜찮아요.”유현진은 테이프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고개를 돌려 간병인에게 말했다.“언니, 앞으로 이 테이프들을 순서대로 틀어줘요. 엄마가 반응을 보이는 것들로만 추려서, 그것만 들려드려요.”“네.”유현진은 간병인이 가져온 보호자용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딱딱한 접이식 침대에 온몸이 아팠다. 이튿날 아침, 날이 완전히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래층에서 간병인에게 줄 아침밥을 가져다주고, 몇 가지를 당부하고 나서야 택
유현진의 태도에 약간 초조해진 강한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친구는 핸드폰도 없어? 전화 한 통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전화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우리 강 대표가 전화받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쁠까 봐 그러지, 너..."유현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떠나기 전에 나랑 인사할 시간도 없었잖아."강한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말했다."민영이가 다쳤어."유현진은 송민영이 다친 게 가슴 아픈 나머지 강한서가 아내인 자신한테 미리 말해줄 시간도 없이 바로 병원으로 뛰쳐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유현진은 시선을 떨군 채로 태연하게 말했다."그래서 송민영은 죽었어?"유현진의 각박한 질문에 강한서는 눈살을 찌푸렸다."현진아, 넌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그냥 해본 말에 왜 이렇게 긴장해? 내가 죽는다고 말했다고 진짜 죽는 것도 아니고."유현진은 이렇게 말하며 강한서를 지나쳐갔다. 강한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다가 성큼성큼 쫓아갔다.유현진은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사과를 먹으면서 iPad를 봤다. 그녀는 휴대폰과 패드에서 같은 계정을 쓰고 있기에 모든 정보를 동기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휴대폰이 고장 난 지금은 iPad를 볼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강한서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메일을 확인했다.강한서는 소파 위에 있는 드레스를 만지작대면서 이렇게 물었다."이 드레스는 누가 선물한 거야?""호텔 매니저."강한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호텔 매니저가 왜 너한테 옷을 선물해?"유현진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강한서가 유현진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더라면 직접 호텔에 가서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어젯밤 화장실에 갇혀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강한서는 알아볼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유현진을 화장실에 가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강한서가 강민서를 아끼는 정
준이는 우승마의 후손이었다. 우승마로서의 혈통에 새겨진 도도함으로 그는 이러한 서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채찍을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난폭해져갔다.농장주는 녀석이 미쳤는 줄 알고 안락사를 시키려고 했다. 겨우 속박에서 벗어나 도망친 준이는 길가로 나와서 마구 뛰어다녔다.그때 정인월은 마침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녀석과 부딪칠까 봐 걱정되었던 정인월은 운전기사한테 차를 세우라고 했다.경찰은 재빨리 현장에 도착해서 마취총을 쏘았다. 몸이 통제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녀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의 고집스러운 눈은 호시탐탐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정인월은 녀석의 눈빛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160만 원을 주고 농장주한테서 녀석을 사 왔다.사람들은 전문이도 길들이지 못한 녀석을 웬 할머니가 길들일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인월이 녀석을 데리고 간 날, 녀석은 정인월을 한참 쳐다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얼굴을 비비적댔다.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랐지만 정인월은 그다지 놀란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인월은 신이 나서 녀석과 함께 귀국을 했다.어린 시절에 줄곧 채찍을 맞아서인지 준이는 낯선 사람들을 아주 경계했다. 온 집안에서 준이를 가까이할 수 있는 사람은 정인월을 제외하고 강한서 밖에 없었다. 정인월은 둘의 성격이 똑같이 괴팍하기 때문에 끼리끼리 놀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유현진은 그 말이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할머니, 저를 놀리지 마세요. 준이가 언제 저를 거들떠 본 적이나 있어요? 그 녀석은 제가 없어야 입맛이 더 좋을 거예요."정인월은 웃으면서 말했다."준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네가 주는 음식을 먹겠어? 그 녀석은 민서가 주는 음식을 먹은 적이 없어. 그대로 다 토해내면 모를까."강민서가 준이의 토사물을 뒤집어쓴 장면을 상상하며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오늘 잠깐 왔다 가면 안 될까? 와서 점심도 먹고 준이랑 같이 뛰어놀기도 하면 얼마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