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한성우는 유현진을 힐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면 볼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른 듯했다.“아, 혹시...”말을 마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 앉아도 될까요?”고개를 돌린 한성우의 시야엔 조준과 차미주의 모습이 들어왔다.차미주는 평소에도 잘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예쁜 드레스까지 입고 왔다. 큰 눈에 활기찬 그녀의 모습은 마치 발랄한 소녀 같았고 평소의 보이시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한성우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차미주가 조준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에 순식간에 표정이 차갑게 굳어져 버렸다.그는 조준을 흘겨보다가 이내 차미주에 시선을 옮겼다.“네가 여긴 웬일이냐? 너도 진성 형이랑 아는 사이였어?”차미주는 당연히 신진성과 친분이 없었다. 그녀가 친분이 있는 쪽은 바로 신부 쪽이었다. 예전에 그녀는 신부와 함께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고 사이도 나쁘지 않은 친구기도 했다. 신부가 그녀에게 청첩장을 보낸 것이었기에 그녀가 결혼식에 온 것이었고 조준과는 정말로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만난 것이었다.차미주는 그를 훑어보았다.“너도 오는 곳을 내가 왜 오면 안 되는데?”최근엔 왠지 모르게 한성우만 보면 그녀는 짜증이 밀려왔다.한성우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만 보면 짜증이 확 났다.그녀는 원래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조준을 만나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그러나 한성우를 보게 되자마자 바로 기분이 더러워지게 되었다.한성우는 눈썹 사이를 구겼다.“알지도 못하는 사람 결혼식에 지금 하객 행세하며 저녁 먹으러 온 거냐?”차미주는 순간 아주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누가 하객 행세를 하고 저녁 먹으러 와? 나도 축의금을 냈거든? 그리고 누가 모르는 사람 결혼식에 왔다고 너한테 말했어? 내가 누구를 알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정말 어이가 없어!”말을 마친 그녀는 조준의 팔을 끌어당겼다.“
‘비행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낙하산이라도 타고 왔나?'‘설마 내가 남긴 문자를 못 본 건가? 나인 줄도 모르는 거 아니야?'유현진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한성우가 입을 열었다.“너 왜 혼자 왔냐? 형수님은?”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고쳤다.“난 싱글이야.”아마도 자신이 주강운처럼 누군가에게 끌려가 여자를 소개받을 것이 두려웠던 그는 바로 한마디 보태었다.“지금도 마음을 되돌리는 중이고.”“...”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한서는 그녀와 한 약속대로 둘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은 것이었다.하지만 그가 한 말은 밝히나 마나 딱히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한성우는 원래 그를 놀릴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유현진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때 강한서는 항상 그에게 사소한 다툼이라며 ‘부부 사이의 소소한 취미'와 같은 말로 그가 아직 유현진과 헤어지지 않았음을 알렸다.그런데 현재 강한서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싱글이라고 말했다. 그럼 단 한 가지의 가능성밖에 없었다. 바로 강한서가 이미 유현진의 마음을 되돌렸다는 것이다.‘제기랄!'‘조금 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한성우는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특히 주강운마저 여자친구를 사귄 모습을 보니 더 짜증이 났다.그는 차미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차미주는 현재 조준과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다시 입을 가리며 웃는 모습을 보니 그는 순간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시선을 옮겨 유현진을 보았다.“차현진 씨, 혹시 학교에 여교사가 많아요? 괜찮은 여교사가 있으면 저한테도 좀 소개해 주세요.”차미주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를 훑어보았다.“여자친구가 있는 거 아니었어?”“뭐? 누가 그래?”한성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난 솔로야.”“아니, 분명...”말을 하던 차미주는 순간 주위에 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바로 뒷
“강운아, 이젠 좀 말해주라.”한성우는 턱을 괴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두 사람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한성우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오랫동안 연애를 안 한 사람이 바로 주강운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여자친구를 결혼식에 데려왔으니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주강운은 멈칫하곤 유현진을 보았다.이 문제에 대해 입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유현진은 오히려 덤덤한 표정으로 주스를 홀짝이더니 말했다.“주변 친구 찾기로요.”“푸흡--”차미주는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뿜어낼 뻔했다.그녀는 맞은 편에 앉은 여자를 쳐다보았다.‘이 말투, 그리고 헛소리까지. 왜 전부 현진이랑 닮아 보이는 거지?'예전에 동창회에서도 누군가 유현진에게 남편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유현진은 아주 덤덤한 얼굴로 말했었다.“소개팅 앱에서 추천해 줬어.”한성우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하늘중학교에서 근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거긴 강운이의 변호사 사무실과는 거리가 꽤 있을 텐데요? 이삼십 킬로미터 떨어진 거로 알고 있는데요?”유현진은 아주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전에 강운 씨 사무실 근처에서 다른 변호사님께 이혼 소송을 맡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근처에서 좀 오래 살았었어요.”사람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주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강운은 혹시라도 유현진이 아는 사람들 앞이라 행여라도 들킬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유현진은 마치 이곳이 자신의 무대인 것 마냥 뻔뻔하게 연기를 했다.“이... 이혼 소송이요?”한성우는 믿기지 않았다. 주씨 가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주강운이 감히 이혼녀와 사귀고 있을 줄은 몰랐다.유현진이 침착하게 말했다.“저 말고 제 다른 가족이요.”“...”한성우는 어이가 없었다.‘무슨 말을 이렇게 오해하게 해?'강한서는 자리에 앉은 후부터 별다른 말을 하지
신진성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마 차현진 씨가 낯이 익어서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나 봐요.”문다은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강운 씨한테 얘기하려는 걸 말려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어색해질 뻔했어.”신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마누라가 현명해요.”문다은이 신진성을 가볍게 툭 치자 그제야 그는 음식을 내려놓고 사람들과 안부를 전하더니 손님 접대를 하러 갔다. 신랑 신부가 가자 누군가 주강운에게 다가와 몇 마디 나누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유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잠깐 가서 도와주고, 곧 올게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난처한 듯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메이크업을 받은 얼굴을 보며 여러 사람이 요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강한서를 놀리는 데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술잔을 채우고 사람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강한서도 하루 종일 바삐 다녔으니 배가 굉장히 고픈 상태였다. 그러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을 때, 그는 말도 별로 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젓가락이 갈비를 집으려 할 때, 또 다른 젓가락이 다가와 그 갈비를 집었다.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현진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죄송해요.”강한서는 말 없이 집었던 갈비를 놓고 다른 음식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유현진은 방금 집은 갈비를 강한서의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드세요.”강한서는 그녀의 젓가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이 사람은 선을 지킬 줄 모르는 건가? 음식을 집을 때는 공용 젓가락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몰라?’강한서는 그 갈비를 건드리지도 않고 다른 음식을 집어 먹었다. 차미주는 유현진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어디서 온 여우야, 이건. 감히 내 친구 남자를 건드려? 죽으려고.’유현진에게 고발하려던 그녀는 가방을 만지고 나서야 휴대폰이 밖에
유현진: ...맞은 편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신우는 볼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고여정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거봐, 내가 못 알아본다고 했지?”고여정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씨, 시력 안 좋잖아. 웨딩홀 조명이 어둡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까지 하니까,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야.”그러더니 그녀는 한 마디 더 보탰다. “유현진 씨가 위장을 잘하기도 했어.”자유자재로 바뀌는 유현진의 음색은, 일반인은 정말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실, 고여정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강한서는 눈이 나빴기에 눈썰미도 나쁜 편이었다. 그는 애초에 유현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준 인상이라고는 짙은 화장에 이목구비가 선명했고, 그리고 얼굴이 굉장히 낯에 익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주강운이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유현진을 자세히 들여볼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유현진은 그런 강한서가 조금 답답해졌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강한서 이 개자식은 아직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전엔 강한서를 놀릴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영원히 못 알아보는 일은 없다며? 역시 순 거짓말쟁이!’유현진은 머리를 숙이고 밥을 먹는 남자를 흘겨보더니 갑자기 발로 강한서의 다리를 쓸었다. 강한서는 정전된 것처럼 “척”하고 몸을 일으켰다.그의 동작이 어찌나 컸던지, 테이블도 흔들릴 지경이었다. 유현진은 순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분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결국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화장실 좀.”그는 의자를 뒤로 밀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유현진은 눈을 반짝이며 굴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실례할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미주도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성우에게 손목이 잡혔다. “나와, 할 얘기가 있어.”차미주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냈
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유현진 앞에 다가와 드디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화장이 짙었고 눈가의 아이라인도 일부러 길게 빼내어 그렸다. 콧등 양쪽의 하이라이터는 광대를 돌출되어 보이게 만들었고 턱의 섀도는 다른 곳보다 선명하게 짙었다. 특히... 귓불에 있는 그 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현진의 점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그녀의 두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고, 어쩐지 그를 어떻게 놀려먹을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태연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주강운과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유현진은 아직 자신의 정체가 들킨 줄 모르고 거짓말을 댔다. “1,2 개월쯤 됐어요.”강한서가 ‘허’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의 반응에 유현진이 흠칫했다. ‘왜 이 자식이 비웃는 것 같지?’강한서는 확실히 냉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도 아직 연애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는 기분이 더러웠다!하지만 유현진의 시선에 강한서에게 향하자 그는 표정 관리를 하고 언제나 그렇듯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한두달... 주강운한테 마음이 크지는 않은가 봐요. 아니면 왜 계속 저를 꼬시겠어요?”유현진은 계속 죽음의 문턱에서 강한서를 시험했다. “전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강한서 씨처럼 조건 좋고 잘생긴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 당연하죠.”그녀는 말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리고 친구 몰래 이러는 거, 더 자극적이지 않으세요?”강한서: ...그는 위험한 눈빛으로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을 바꾸더니, 성격까지 바꿔버렸네. 가벼운 말도 아무렇게나 내뱉고.’강한서는 그윽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뭐 하자는 거죠?”유현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강한서 씨, 아실만 한 분이, 왜 모른 척하세요?”유현진은 그에게 다가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강한서 씨랑 자고 싶다고요.”말을 마친 유현진은 강한서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를
유현진은 그의 손등을 툭 치고 흘겨보며 말했다. “너한테 카톡 했잖아. 못 봤어?”“나더러 잘 쉬라며?”유현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문자 여러 개 보냈는데? 강운 씨 상황 모면하는 거 도와줘야 한다고, 너 푹 쉬고 나중에 만나자고.”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잘 쉬라는 것만 봤어.”아마 휴대폰 전원을 끄면서 메시지가 제대로 보내지지 않거나 지연된 것 같았다. 유현진은 또 전후 사정을 강한서에게 얘기했다. “어떤 분이 강운 씨에게 사람을 소개시켜주겠다고 여러 번 말해서,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대. 신진성 씨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했고.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부탁했어. 네가 오해할까 봐 전화했었는데, 휴대폰이 꺼져있더라고.”‘도와줄 사람이 없어?’강한서가 코웃음을 쳤다. “넌 너무 원칙이 없는 거 아냐? 넌 남편이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걸 도와줘?”“인턴제 남자친구야.”유현진이 강한서의 말을 정정했다. 그녀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장례식도 강운 씨가 도와줬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해?”유현진의 말에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널 속인 것도 아니잖아. 전화도 하고 문자도 했는걸.”강한서는 당연히 유현진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주강운이 유현진에게 기분 나쁜 화장을 해준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유현진이 주강운에게 진 그 신세 때문이었다. 그는 이혼 전 자신의 했던 그 일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만약 조금 더 소통하고 성질을 조금 덜 부렸다면, 주강운에게 그런 기회를 내주어 유현진이 신세를 지게 만들고 또 그 일로 매번 유현진이 마음 약해지게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강한서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유현진의 귓불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물었다. “누가 너한테 이런 메이크업 해줬어?”유현진이 말했다.
강한서는 못 들은 척 몸을 돌렸다. “갈게.”유현진이 그를 따라나서며 말했다.“다시 말해 봐.”강한서는 여전히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유현진이 그의 팔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한 번만 다시 불러줘, 한 번만.”강한서는 이렇게 닭살 돋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커플 사이에 하는 닭살스러운 호칭은 더더욱.예를 들어 그는 절대 유현진을 “여보”라고 부르지 않았다. 제일 다정한 호칭이라고 해봐야 “현진이”거나 “현진아”정도였다. “자기”,“애기” 이런 호칭은 단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유현진이 생전 들은 적 없던 호칭을 들으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예전에 유튜브에서 한 남자 인플루언서가 카메라를 향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자기”라고 했을 때 소름이 쫙 돋았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방용 세제를 보내 기름기 좀 제거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호칭을 강한서에게서 들으니 전혀 느끼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특히 무심코 그 호칭을 들으니 그녀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느끼한지 아닌지는, 역시나 사람에 따라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하든, 강한서의 입은 봉인된 것처럼 다시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말 안 해?”유현진이 화난 척 연기했다. “너 안 하면 인턴 기간 지금 바로 끝이야, 해고할 거야!”강한서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나 그날 많이 말했어.”유현진이 의아해했다. “어느 날?”‘강한서가 말했었다고?’‘왜 아무 기억이 없지?’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속이는 거지?”강한서가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텔에서, 우리 여러 번 했던 그날. 내가 너한테 많이 불러줬어. 기억 안 나?”유현진: ...그는 강한서를 밀어내고 귀를 붉힌 채 그를 째려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닥쳐!”그러더니 그녀는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강한서는 작게 웃더니 성큼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