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성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마 차현진 씨가 낯이 익어서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나 봐요.”문다은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강운 씨한테 얘기하려는 걸 말려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어색해질 뻔했어.”신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마누라가 현명해요.”문다은이 신진성을 가볍게 툭 치자 그제야 그는 음식을 내려놓고 사람들과 안부를 전하더니 손님 접대를 하러 갔다. 신랑 신부가 가자 누군가 주강운에게 다가와 몇 마디 나누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유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잠깐 가서 도와주고, 곧 올게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난처한 듯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메이크업을 받은 얼굴을 보며 여러 사람이 요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강한서를 놀리는 데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술잔을 채우고 사람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강한서도 하루 종일 바삐 다녔으니 배가 굉장히 고픈 상태였다. 그러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을 때, 그는 말도 별로 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젓가락이 갈비를 집으려 할 때, 또 다른 젓가락이 다가와 그 갈비를 집었다.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현진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죄송해요.”강한서는 말 없이 집었던 갈비를 놓고 다른 음식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유현진은 방금 집은 갈비를 강한서의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드세요.”강한서는 그녀의 젓가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이 사람은 선을 지킬 줄 모르는 건가? 음식을 집을 때는 공용 젓가락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몰라?’강한서는 그 갈비를 건드리지도 않고 다른 음식을 집어 먹었다. 차미주는 유현진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어디서 온 여우야, 이건. 감히 내 친구 남자를 건드려? 죽으려고.’유현진에게 고발하려던 그녀는 가방을 만지고 나서야 휴대폰이 밖에
유현진: ...맞은 편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신우는 볼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고여정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거봐, 내가 못 알아본다고 했지?”고여정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씨, 시력 안 좋잖아. 웨딩홀 조명이 어둡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까지 하니까,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야.”그러더니 그녀는 한 마디 더 보탰다. “유현진 씨가 위장을 잘하기도 했어.”자유자재로 바뀌는 유현진의 음색은, 일반인은 정말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실, 고여정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강한서는 눈이 나빴기에 눈썰미도 나쁜 편이었다. 그는 애초에 유현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준 인상이라고는 짙은 화장에 이목구비가 선명했고, 그리고 얼굴이 굉장히 낯에 익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주강운이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유현진을 자세히 들여볼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유현진은 그런 강한서가 조금 답답해졌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강한서 이 개자식은 아직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전엔 강한서를 놀릴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영원히 못 알아보는 일은 없다며? 역시 순 거짓말쟁이!’유현진은 머리를 숙이고 밥을 먹는 남자를 흘겨보더니 갑자기 발로 강한서의 다리를 쓸었다. 강한서는 정전된 것처럼 “척”하고 몸을 일으켰다.그의 동작이 어찌나 컸던지, 테이블도 흔들릴 지경이었다. 유현진은 순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분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결국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화장실 좀.”그는 의자를 뒤로 밀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유현진은 눈을 반짝이며 굴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실례할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미주도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성우에게 손목이 잡혔다. “나와, 할 얘기가 있어.”차미주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냈
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유현진 앞에 다가와 드디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화장이 짙었고 눈가의 아이라인도 일부러 길게 빼내어 그렸다. 콧등 양쪽의 하이라이터는 광대를 돌출되어 보이게 만들었고 턱의 섀도는 다른 곳보다 선명하게 짙었다. 특히... 귓불에 있는 그 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현진의 점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그녀의 두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고, 어쩐지 그를 어떻게 놀려먹을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태연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주강운과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유현진은 아직 자신의 정체가 들킨 줄 모르고 거짓말을 댔다. “1,2 개월쯤 됐어요.”강한서가 ‘허’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의 반응에 유현진이 흠칫했다. ‘왜 이 자식이 비웃는 것 같지?’강한서는 확실히 냉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도 아직 연애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는 기분이 더러웠다!하지만 유현진의 시선에 강한서에게 향하자 그는 표정 관리를 하고 언제나 그렇듯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한두달... 주강운한테 마음이 크지는 않은가 봐요. 아니면 왜 계속 저를 꼬시겠어요?”유현진은 계속 죽음의 문턱에서 강한서를 시험했다. “전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강한서 씨처럼 조건 좋고 잘생긴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 당연하죠.”그녀는 말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리고 친구 몰래 이러는 거, 더 자극적이지 않으세요?”강한서: ...그는 위험한 눈빛으로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을 바꾸더니, 성격까지 바꿔버렸네. 가벼운 말도 아무렇게나 내뱉고.’강한서는 그윽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뭐 하자는 거죠?”유현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강한서 씨, 아실만 한 분이, 왜 모른 척하세요?”유현진은 그에게 다가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강한서 씨랑 자고 싶다고요.”말을 마친 유현진은 강한서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를
유현진은 그의 손등을 툭 치고 흘겨보며 말했다. “너한테 카톡 했잖아. 못 봤어?”“나더러 잘 쉬라며?”유현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문자 여러 개 보냈는데? 강운 씨 상황 모면하는 거 도와줘야 한다고, 너 푹 쉬고 나중에 만나자고.”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잘 쉬라는 것만 봤어.”아마 휴대폰 전원을 끄면서 메시지가 제대로 보내지지 않거나 지연된 것 같았다. 유현진은 또 전후 사정을 강한서에게 얘기했다. “어떤 분이 강운 씨에게 사람을 소개시켜주겠다고 여러 번 말해서,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대. 신진성 씨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했고.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부탁했어. 네가 오해할까 봐 전화했었는데, 휴대폰이 꺼져있더라고.”‘도와줄 사람이 없어?’강한서가 코웃음을 쳤다. “넌 너무 원칙이 없는 거 아냐? 넌 남편이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걸 도와줘?”“인턴제 남자친구야.”유현진이 강한서의 말을 정정했다. 그녀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장례식도 강운 씨가 도와줬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해?”유현진의 말에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널 속인 것도 아니잖아. 전화도 하고 문자도 했는걸.”강한서는 당연히 유현진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주강운이 유현진에게 기분 나쁜 화장을 해준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유현진이 주강운에게 진 그 신세 때문이었다. 그는 이혼 전 자신의 했던 그 일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만약 조금 더 소통하고 성질을 조금 덜 부렸다면, 주강운에게 그런 기회를 내주어 유현진이 신세를 지게 만들고 또 그 일로 매번 유현진이 마음 약해지게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강한서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유현진의 귓불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물었다. “누가 너한테 이런 메이크업 해줬어?”유현진이 말했다.
강한서는 못 들은 척 몸을 돌렸다. “갈게.”유현진이 그를 따라나서며 말했다.“다시 말해 봐.”강한서는 여전히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유현진이 그의 팔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한 번만 다시 불러줘, 한 번만.”강한서는 이렇게 닭살 돋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커플 사이에 하는 닭살스러운 호칭은 더더욱.예를 들어 그는 절대 유현진을 “여보”라고 부르지 않았다. 제일 다정한 호칭이라고 해봐야 “현진이”거나 “현진아”정도였다. “자기”,“애기” 이런 호칭은 단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유현진이 생전 들은 적 없던 호칭을 들으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예전에 유튜브에서 한 남자 인플루언서가 카메라를 향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자기”라고 했을 때 소름이 쫙 돋았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방용 세제를 보내 기름기 좀 제거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호칭을 강한서에게서 들으니 전혀 느끼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특히 무심코 그 호칭을 들으니 그녀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느끼한지 아닌지는, 역시나 사람에 따라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하든, 강한서의 입은 봉인된 것처럼 다시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말 안 해?”유현진이 화난 척 연기했다. “너 안 하면 인턴 기간 지금 바로 끝이야, 해고할 거야!”강한서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나 그날 많이 말했어.”유현진이 의아해했다. “어느 날?”‘강한서가 말했었다고?’‘왜 아무 기억이 없지?’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속이는 거지?”강한서가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텔에서, 우리 여러 번 했던 그날. 내가 너한테 많이 불러줬어. 기억 안 나?”유현진: ...그는 강한서를 밀어내고 귀를 붉힌 채 그를 째려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닥쳐!”그러더니 그녀는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강한서는 작게 웃더니 성큼
강한서도 그녀를 따라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한성우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사람을 누른 채 오랫동안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차미주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 유현진이 알고 있는 차미주라면, 그녀는 이 따귀에 전부의 힘을 쏟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차미주의 힘이라면 한성우가 피가 나지는 않더라도 아파서 소리라도 질렀어야 했다. 옆으로 고개가 돌아간 한성우는 혀로 방금 맞은 뺨 안쪽을 훑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차미주를 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네 입술도 건드렸으니, 그것도 잘라 버릴 거야?”차미주가 팔뚝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녀는 눈을 붉히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개자식아! 난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넌 날 장난감 취급을 해? 그래서 네 멋대로 갖고 놀고 싶으면 갖고 놀고 그런 거야?”“친구?”한성우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 역신 보듯 피해 다녔으면서, 그게 날 친구로 대한 거야? 내 도움은 받고 싶고, 날 미워도 하면서. 너야말로 앞뒤가 너무 다른 거 아니야?”차미주가 몸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언제 널 미워했어?”“네 팔만 잡아도 멀리 떨어져 나가려고 했잖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벽에만 붙어있고. 넌 내가 눈이라도 멀었는 줄 알아?”한성우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특히 그녀가 조준과 함께 자기 앞에 나타났던 것만 떠올리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극에 달했다. “네가 필요할 때만 난 성우 오빠고, 너한테 필요 없어지면 화장실에 있는 돌보다도 못한 취급 하잖아. 왜, 조준을 꼬셨으니까 이젠 너한테 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야? 조준이 정말 너한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알려줄게. 조준이 너한테 조금의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냥 너랑 자고 싶—”“짝—”차미주는 이번에야말로 온 힘을 손에 온 힘을 실었다. 한성우의 얼굴은 바로 저릿해졌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왔다. 성인이 된 후, 아무도 감히 그의 뺨을 때린
차미주가 코를 훌쩍이며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사정?”한성우가 머뭇거렸다. 아마 얘기하기 어려운 일인 듯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전에 사귀던 모델 여자친구가 있었어. 걔가 날 따라다녔고, 예쁘장하게 생겨서 잠깐 만났었지.”차미주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잠깐 자기만 했겠지.”한성우: ...“안 잤어!”한성우가 그녀를 째려보았다. “난 연애할 때는 연애하는 과정을 즐긴다고. 누가 너한테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잔다고 그래? 그리고 걔가 먼저 따라다닌 거야. 예쁘게 생겼고, 성격도 잘 맞아서 사귄 거였어. 누가 알았겠어—”그의 말투가 확 변하더니 이를 갈았다. “그게 신하리 전여친인 줄 누가 알았겠어! 신하리 이게 내가 지 여친을 뺏은 줄 알고 먼저 와서 날 꼬셨어. 내가 자기 전여친을 차면 나한테 복수도 하고 피해도 입힐 수 있으니까.”차미주: ???!!!차미주는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신하리 전 여친? 신하리 여자잖아? 신하리 여자친구... 신하리, 신하리가...”차미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한성우가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미주: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이미 충분히 막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보다 더 한 막장이었다.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 몇 없어. 난 널 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말한 거니까, 넌 다른 데 가서 얘기하면 안 돼. 국내도 아직 그렇게 개방적이지 않으니까.”“알아.”차미주도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그러더니 그녀가 또 물었다. “그럼 네가 꽃을 들고 가서 고백한 건 어떻게 된 거야?”한성우가 말했다. “걔가 날 쫓아다녔잖아. 그때 난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리고 걔한테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어서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계속 포켓볼 클럽에 찾아오잖아. 꺼지라고 해도 꿈쩍도 안 하고 굳이 게임을 해서 내가 이기면 다시는 내 앞에 나
차미주는 생각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신경 쓰이긴 하지.”한성우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실망이 다시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한성우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이 진심으로 좋아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해.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과의 현재와 미래니까. 과거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전여친과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않다면 괜찮아. 사람이 별로라면, 연애 경험이 없어도 쓰레기일 뿐이야!”한성우가 호기심에 물었다. “모쏠한테 당했어?”“친구가 당했어!”강한서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고개를 숙여 진지하게 구경하고 있는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설마 얘가 입이 가볍게 내 흉을 본 건 아니겠지?’사실상 그건 강한서의 착각이었다. 차미주가 말한 친구는 유현진이 아니었다. “내 친구 남편이 모쏠이었거든. 걔랑은 첫사랑이었고. 학교에서 만나서 결혼까지 했지만 결국 결혼 2년 만에 회사 여상사랑 바람이 났어. 내 친구는 임신 6개월이었고. 그 쓰레기 같은 새끼가 이혼하려고 한 덕에 유산했어.”“그 자식, 내 친구랑 만나기 전엔 연애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바람이든 쓰레기 같은 짓이든 하나도 빠짐없이 다 했잖아. 걔 일을 겪고 나서 난 남자가 믿을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는 연애 경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한성우가 그녀의 말에 무조건 찬성했다. “역시 우린 생각이 비슷해.”차미주는 한성우의 리액션이 마음에 들자 쉬지 않고 계속 떠들어댔다. “어떤 모쏠은 정말 별 볼 일 없다니까. 내 친구 남편만 봐도 그래. 잠자리 경험이 없으니까, 빨리 끝나는 건 물론이고, 아프게만 한대. 관건은 그럼에도 좋은 척 연기를 하면서 그 남자를 맞춰줘야 한다는 거야. 그 인간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이런 인간한테 뭘 바라겠어? 정말 쓸모라고는 없다니까.”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신나서 수다를 떠는 누군가를 보며 그는 마른기침을 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남자가 경험이 있어야 둘 다 좋
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하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속상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돌을 막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에 아니라면, 그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너무 상처 되는 말을 하긴 했어.’여전히 고민하는 한열의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열이 멍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신하리가 배를 끌어안은 채 폭소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녀는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똥강아지, 너 솔직하게 얘기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지?”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신하리의 얼굴엔 슬픔이라곤 전혀 없이 온통 장난기뿐이었다. 그제야 또라이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명훈도 운전석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사촌 누나 앞에서만 순한 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열을 길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낌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하리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했다.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신하리 씨가 손가락 다 사용해도 부족할 거예요!”“소꿉놀이 같은 연애 말하는 거야?”신하리가 야유 섞인 말투로 한열을 놀렸다. “설마 첫 키스 상대가 나였던 거 아냐?”순간 뜨끔한 한열의 몸이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저 한열을 놀리려던 신하리는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나야?!”한열이 창피함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하지만 한열은 거짓말엔 너무 소질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하리에게 이렇게 빨리 모태 솔로라는 사실을 들켰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한 한열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제가 신하리 씨와 전에 했던 건 첫키스 아녜요. 제가 일부러 신하리 씨 기분 더럽게 하려고 한
한열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신하리 씨와 공개 연애를 선택한 건 신하리 씨가 저에게 감독님을 소개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해주기로 계약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제가 신하리 씨를 도와준 거라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신하리 씨는 이번에 저 때문에 진짜로 다쳤어요. 이건 제가 신하리 씨에게 빚 진 거예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멈칫한 신하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탑 아이돌을 쳐다보았다. ‘이 바닥에 아직도 이렇게 단순한 자식이 있었어?’아무리 신하리가 한열에게 유리한 계약 조건을 달았다고 하더라도 계약 연애는 한열에겐 이득보단 손해가 더 많았다. 게다가 유명한 감독과 작품을 하고 싶다면 사촌 형인 송민준에게 부탁해도 충분했다. 굳이 신하리와 엮일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 한열의 SNS 댓글은 눈에 띌 정도로 악플이 늘었다. 여자친구인 신하리도 공개 연애 후 수많은 악플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팬들은 그녀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죽은 쥐과 칼날과 함께 넣어 택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한열 쪽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신하리가 한열 대신 돌을 맞은 건 그가 얼굴을 다쳐 연예계 생활에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죄책감 때문에 한열에게 이렇게라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자식, 정말 멍천한 거였잖아?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신세를 졌다며 은혜를 갚겠다고 하다니. 이런 멍청해서야 대체 어떻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었던 거야?’‘고담시 한씨 가문은 모두가 알아주는 명문가잖아. 그런 집안에서 대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눈치 빠르고 꿍꿍이가 많은 사촌 누나와 형에, 심지어 12살짜리 막내 동생도 쟤보다는 똑똑하겠어.’잡혀가서도 인질범 편을 들어줄 것 같은 한열의 모습에 신하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다. 한
윤명훈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인터넷에 떠도는 스캔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이 미친 인간들은 경찰서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한열의 반항적인 성격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윤명훈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젠 한 명이 더 늘었잖아. 젠장. 그 놈의 돈 벌기가 점점 더 힘드네!’비록 화가 치밀긴 했지만 의식을 잃은 신하리와 한열 몸에 묻은 피를 보자 윤명훈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하리 씨는 어때?”“안 죽어요.”한열이 신하리가 꼬집던 허리를 어루만지며 쓰러진 척 연기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연기할래요?”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신하리는 한열의 눈빛과 반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누나 연기가 좀 실감났어?”흥, 콧방귀를 뀐 한열이 시선이 저도 모르게 신하리의 뒤통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머리숱이 많아 얼마나 많이 다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날아온 돌멩이는 힘이 꽤 실려있었다. 옆에 있던 한열의 귀에도 돌멩이가 무겁게 머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심지어 티슈를 뽑아 뒤통수의 피를 닦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티슈로 상처 닦으면 안 돼요. 더럽잖아요.”“더러우면 걸레라고 하겠지, 왜 티슈라고 부르겠어?”신하리가 억지스러운 논리를 늘어놓았다. “티슈로 엉덩이를 닦을 땐 왜 더럽다고 하지 않는 거야?”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티슈로 엉덩이를 닦지, 치질을 닦는 건 아니잖아요.”멈칫하던 신하리가 순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너 아이돌 이미지는 버린 거야? 아이돌 입에서 어떻게 엉덩이니, 치질이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한열이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머리 상처에 출혈이 꽤 있었어요. 티슈로 닦으면 상처에 먼지가 붙어서 염증이 날 거예요. 나중에 흉터
한열의 마음에 남아있던 감동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경찰서 밖은 이미 수많은 기자와 팬들로 둘러싸였다. 경찰서 앞이었던 만큼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 현장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한열이 신하리를 감싸며 차에 오르던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열!”한열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란 크기의 돌멩이가 한열을 향해 날아왔다. 한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나 온 몸으로 돌멩이를 막았다. 신하리였다. 그 돌은 신하리의 뒤통수에 부딪혔다. 극심한 통증에 신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한열이 무의식적으로 신하리를 부축했다. 미간을 찌푸린 신하리가 손을 뻗어 돌멩이에 맞은 곳을 만졌다. 뜨뜻하고 축축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펼치자 빨간색의 피로 흥건했다. 신하리의 부축하고 있던 한열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돌을 던진 사람이 큰소리로 질타했다. “개 같은 자식!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투표해서 널 데뷔시켰는데. 연애도 부족해서 이젠 뭐, 성추행?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지어 옆에서 질서를 유지하던 결찰들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돌을 던진 그 사람이 달려들려고 하자 경찰이 얼른 앞으로 나서 제압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바닥에 제압당한 채 여전히 욕설을 내뱉으며 난동을 부렸다. “네가 이런 인간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차라리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투표를 했을 거야! 넌 정말 네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 팬들이 네 재능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 반반한 얼굴 아니었으면 너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긴 했을 것 같아? 팬들 덕에 넌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거야. 팬들이 아니면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구경 중이던 사람들과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열은 신하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신하리는 말하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저 정신병 있는 거 다들 아시죠?”그 말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 신하리가 한 드라마 촬영 중 현장에서 갑자기 귀신에 쓰인 사람처럼 아무런 안정장비도 하지 않은 채 6미터가 넘는 곳에서 뛰어내려 뼈가 부러진 사건이 있었다. 다들 신하리에게 왜 뛰어내렸냐고 묻자 그녀는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그러나 당시 상황을 증명해 줄 동영상은 없었고 그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듣고 지나보냈었지만 지금 신하리의 입으로 직접 그녀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말하니 그때의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은 순산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마치 난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 너에게 정말 염산을 뿌려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내 말을 장난으로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신하리의 등장으로 [아기 고양이]의 라이브 방송의 인기는 더 뜨거워졌다. 댓글에도 다양한 의견이 더 많아졌다. [사랑에 눈이 먼 연예인 1위! 보상은 산에서 산나물 캐기 18년!][신하리 미친 거 아녜요? 이렇게 대놓고 협박이라니.][면전에 협박하는데 아직도 신고하지 않는다고? 증거가 없는 거야, 아님 애초부터 한열을 모함하고 있었던 거야?][성추행을 한 사람도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당한 사람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신고하지 않는 거야.][지난번에 스스로 신고한 인간은 아직도 감옥에서 사회봉사 중이예요.][만약 지금 당장 신고한다면 전 아기 고구마 말을 믿을 거예요. 계속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건 오히려 한열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작당 모의에 더 가까워 보여요.][지금 루머를 퍼뜨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됐어요. 스크린샷 몇 장이면 바로 스토리를 짤 수 있으니까요.]여론이 점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멀어지자 [아기 고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아
신하리의 라이브 방송 연결 요청에 [아기 고구마]가 잠시 멍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옆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미세한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한현진에겐 들키고 말았다. [아기 고구마]는 혼자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녀의 옆에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진실 규명을 바라는 팬들이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겁쟁이! 네가 그러고도 무슨 남자야! 사건이 터지면 뒤로 물러나 여자친구가 나서서 모든 걸 감당하게 하다니. 네 팬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돼!][끼리끼리는 과학이라잖아요. 한열이 이런 쓰레기라면 신하리도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니지 않겠어요? 연결해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언니! 얼른 입도 벙긋 못하게 증거를 뿌려버려요. 저런 인간은 아이돌을 할 자격이 없어요.][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난 영원히 한열을 믿을 거야!][덕질에 도덕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나보네.]...[아기 고구마]는 사람들의 부추김에 신하리와 라이브 방송을 연결했다.신하리의 모습이 라이브 방송 화면에 나타나자 카메라는 신하리의 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후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신하리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쪽 대신 경찰에 신고했어요. 얼른 오세요.”카메라가 홱 회전하며 한주 용하구의 경찰서 대문을 비췄다. 그에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순간 멍해졌다. ‘신하리, 미친 거야? 어제 저녁에도 한열 대신 해명해주더니.’[아기 고구마]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전 신고한다고 안 했어요.”신하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한열이 그쪽을 성추행했다면서 신고를 안 해요? 성모 마리아세요? 방송으로 울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신고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경찰은 그쪽을 도와줄 수 있는데도 싫다고요?”네티즌들도 신하리의 말을 따라 댓글을 남겼다. [맞아요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