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강한서가 현진 씨에게 꽃다발을 선물했다는 거 오늘 처음 알았어요. 한서도 저한테 물어본 적이 없었거든요.”주강운은 시선을 내리깔고 말라버린 꽃을 보았다.“아마 안목이 비슷해진 거겠죠. 이 꽃다발은 확실히 제가 현진 씨 촬영이 시작하던 날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현진 씨에게 전해주라고 한 꽃다발과 아주 흡사하거든요.”유현진은 순간 멈칫했다.“촬영 시작 날에 저한테 꽃다발을 보내셨어요?”주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유현진은 눈썹 사이를 구겼다.“혹시 촬영장으로 보내셨어요?”“아니요. 혹시라도 현진 씨한테 전해지지 않을까 봐 일부러 집으러 보냈어요. 그 속에 카드도 써놨거든요.”주강운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떠보듯 물었다.“혹시 못 받으셨어요?”“...”그녀는 밸런타인데이에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녀와 강한서는 사거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강한서가 굳이 차 한잔 마시고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었다. 그녀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강한서는 꽃다발을 들고 들어와 그녀를 위해 주문한 거라고 했었다.그때 당시 그녀는 강한서의 안목이 많이 좋아졌다며 칭찬까지 해줬었다. 그러나 강한서는 기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간까지 찌푸리고 있었다.칭찬만 해주면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던 강한서가 칭찬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는 모습에 그녀는 아주 의아하게 생각했었다.이 꽃다발이 애초에 강한서가 산 것이 아니라면 모든 상황이 들어맞았다.강한서가 주강운이 쓴 카드를 버리고 자신이 산 것처럼 꾸며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현진 씨?”그녀가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주강운이 그녀를 불렀다.퍼뜩 정신을 차린 유현진은 주강운의 걱정 가득한 시선과 눈을 맞추면서 다소 미안한 듯 웃었다.비록 강한서가 벌인 일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그녀는 마른기침을 하면서 강한서 대신 핑계를 대주려고 했다.“아, 기억났어요. 경비실에서 저한테 연락했었던 것 같네요. 제 앞으로 택배가 왔
“아니요. 괜찮아요.”주강운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는 장미를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아마 새로 바꾼 약에 부작용이 있었나 봐요. 가끔 이렇게 머리가 살짝 어지럽더라고요.”유현진을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려던 순간 주강운의 관자놀이에서 피가 나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게 되었다.“머리에서 피가 나고 있어요.”“네?”주강운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손을 뻗어 확인해 보려 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들자마자 유현진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손에도 피가 있어요.”주강운은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오른손 손바닥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의 손바닥엔 작은 상처들이 여러 개 나 있었고 벌어진 상처 틈으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그가 아까 내려놓았던 장미 줄기에도 피가 묻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로 장미 가시에 찔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나, 둘, 셋...”유현진은 옆에 앉아 그의 상처 부위를 치료해 주면서 벌어진 상처 개수를 세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여섯 개! 상처가 여섯 개예요! 안 아팠어요?”주강운은 고개를 저었다.“전 고통이란 감각에 어릴 때부터 무뎌서 못 느끼고 있었어요.”유현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지난번 정인월의 생신에 그녀는 이미 한번 물었던 적이 있었다. 주강운은 그때 당시에도 자신이 화상을 입은 줄 모르고 있었고 고통에 무디다고 말했었기에 그녀는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다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깨의 피부조직이 심각하게 망가져 감각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는 있었지만, 손바닥엔 화상을 입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여섯 곳이나 장미 가시에 찔렸는데 어떻게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거지?만약 강한서가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면 그녀는 분명 그가 허세를 부릴 것으로 생각할 것이었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일부러 그의 상처를 꾸욱 눌렀을 것이다.다만 강한서는 자신이 고통에 무디다고 말
“네, 알아요.”유현진은 미간을 구겼다.“제 작은 아버지예요. 유상수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 사람들이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던가요?”주강운은 바로 핵심을 캐치했다.“아직도라니요? 전에도 그 저택에서 살았던가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오래전에 작은아버지는 자신의 아이를 해성시에 있는 학교로 보낼 거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마땅히 거처가 없었죠. 그래서 저희 엄마는 그 저택의 키를 작은아버지에게 주면서 어차피 비어있는 집이니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으면 집도 빠르게 망가질 거라며 들어가서 살라고 했었어요. 게다가 친척이기도 하니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며 저희 엄마가 그 저택을 내주셨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으니까 아마 12년 정도 되겠네요. 작은아버지께선 이미 해성시에서 자리를 잡으셨거든요. 몇 년 전에는 번화가 근처에 집까지 계약했다고 했었어요. 그래서 전 그때 작은아버지가 연 파티에도 참석했는데, 저랑 저희 엄마는 작은아버지 가족들이 바로 이사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주강운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들 아직 이사 안 갔어요. 그리고 그거 알아요? 그 저택 뒤에 있던 정원 말이에요. 그곳에 유치원을 세웠더라고요. 알고 있었어요?”유현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뒤에 있던 정원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거긴 황무지였었어요.”외할아버지의 소유였던 그 땅은 아주 컸고 대략 1300평 정도의 크기였다. 저택이 차지하는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저택 뒤에 있던 정원의 크기는 엄청나게 컸다.하현주가 말하길 그 땅은 원래 외할아버지 삼 형제의 땅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의 두 동생이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그 땅은 외할아버지의 소유로 변했고 그냥 내버려 두면 누군가가 그 땅에 마음대로 건물을 지을까 봐 외할아버지는 담장을 세웠다고 했다.그리고 그 땅에 방이 두 개인 자그마한 집을 지어 평소에 꽃을 심을 때 쓰는 도구나 비료 등을 넣는 창고로 썼다. 그런데 그런 집을 유치원으로 만들었다고?“황무지는 아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차미주는 눈썹을 꿈틀거렸다.‘이, 이, 이건... 고백이잖아?'‘거봐!'‘내가 벤틀리 훈남이 현진이한테 관심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누가 거액의 사건을 안 맡고 이런 사소한 사건을 맡아?'‘현진이도 참, 눈치가 없네. 나더러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더니.'‘어디가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거야. 설마 강한서 외엔 다른 남자들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 건가?'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강한서의 잘생긴 얼굴을 빼고 어디가 좋은지. 강한서는 눈치가 없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꿍꿍이까지 많았다.그녀를 경찰에 신고한 일로 이미 마음속 트라우마로 남아있었고 그녀는 강한서가 혹여라도 현진이가 싫어졌다면 바로 현진이를 감방에 보낼까 봐 걱정되었다.강한서는 생긴 것부터 마음이 쉽게 변할 것처럼 생겼다.그러나 주강운은 달랐다.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매너도 있고, 목소리도 다정하고, 법을 잘 아는 변호사이기도 했다. 심지어 늦은 밤에 현진이가 걱정되어 집에 잘 도착했나 전화까지 쳐서 확인하기도 했다. 이런 남자친구라면 엄청 든든할 것 같지 않은가? 입만 나불대는 강한서보다 낫지 않나?그녀는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유현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혹시 눈치 못 챈 건 아니겠지?'차미주는 귀를 쫑긋거리며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성우 씨가 전에 강운 씨한테 여자친구가 없는 건 너무 무뚝뚝해서, 여자들과 대화할 줄 모른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잘못 알고 있었나 봐요. 강운 씨 너무 설레게 잘 말씀하시는데요?”만약 강한서 그 바보였다면 평생 이런 말을 할 줄 몰랐을 것이다.그녀가 만약 강한서에게 ‘너 너무 비싼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면 강한서는 분명 ‘네가 너무 가난하다고는 생각 안 해 봤어?'라고 대답했을 것이었다.“...”차미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의 기분이 순간 확 가라앉았다. ‘역시 현진이네.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아.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잖아!'주강운은 고
유현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차미주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다원에서 파는 다른 디저트도 시켜주세요. 다른 것도 아주 맛있거든요.”“...”유현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먹을 것만 보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차미주와 한성우가 똑같게 느껴졌다.전할 말을 다 전한 주강운은 문자를 받자마자 바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버렸다.유현진은 주강운을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왔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땐 차미주가 이미 송편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송편은 두 개씩 들어있었고 포장지도 엄청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안에는 심지어 토끼 모양의 키링이 들어있었다.차미주는 아주 기쁜 듯 소리를 질렀다.“이 키링은 다원에서 한정으로 만든 기념품이야. 40만 원 이상 소비해야 주는 거라고! 우리 회사 직원에게도 있었는데 아주 부러웠거든! 주 변호사님은 정말 너무 좋은 사람 같아. 송편뿐만 아니라 한정판 키링까지 챙겨주셨잖아!”유현진이 빈정대며 말했다.“강운 씨가 네가 짝사랑하고 있는 조 선생님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내가 강운 씨랑 잘되게 이어줄까? 강운 씨 아직도 솔로시잖아.”“...”차미주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바로 키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세상에, 현진아. 아무 사람이나 이어줄 생각하지 마. 네가 강한서를 선택한 걸 보면 네 안목이 어떤지 알 수 있어. 그러니 난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와 차미주는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잘 알고 있었다. 진정한 친구는 서로가 선택한 남자친구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차미주는 웃으면서 옆에 있던 다른 송편 상자를 들었다.“여기도 있나 확인해 줄까? 내가 대신 포장지 뜯어줄게.”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다른 상자에도 똑같은 토끼 키링이 있었다.차미주는 아주 기뻤다. 그녀는 원래 하나만 있으면 바로 유현진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재 키링이 두 개나 있으니 마침 그녀와 유현진이 하나씩 나눠 가지면 되었다.그녀는 본인의 키와 유현
유현진이 살짝 웃었다.「강 대표님, 너무 예민하네요.」강한서는 살짝 즐거운 얼굴로 답장을 보냈다.「추석엔 휴식이야? 휴식이면 같이 추석 보낼까?」유현진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추석은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보내는 명절이었지만 그녀의 가족은 더는 모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유현진은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 넌 할머니 곁에 있어 줘야지.」강한서는 원래 그녀에게 정인월과 함께 보내자고 말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연애를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비밀 연애를 하고 있었기에 유현진이 동의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게다가 강씨 가문이 그녀에게 남겼던 기억들은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이었고 유현진도 추석에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강한서는 작성해 놓은 문자를 지워버리고 다시 키링에 대해 언급했다.「나도 커플링 하고 싶어.」유현진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살짝 웃어버렸다. ‘뭐야, 아직도 그 소리야? 유치하긴.'그녀가 말했다.「전에 집에 커플 아이템을 엄청 사뒀었는데, 그때 보니까 별로 안 하고 다니지 않았나?」강한서가 이내 또 답장을 보내왔다.「아니, 나한테 핑크 잠옷을 사줘 놓고 그런 말이 나와?」유현진이 크게 웃었다.커플 아이템들은 대부분 파란색과 핑크색이 한 세트로 되어있었고 그녀는 핑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핑크색을 강한서에게 남겨준 것이었다.강한서는 무뚝뚝한 남자였기에 당연히 핑크색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유현진이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핑크색이 뭐 어때서? 여자만 핑크색을 입을 거란 생각하지 마. 지금은 남자들도 핑크색 입는 사람 많다고. 게다가 넌 쿨톤이니까 핑크색을 입으면 더 잘 어울리고 섹시해 보여.」이때, 강한서가 빠르게 답장을 작성했다.「정말이야?」「내가 뭐 하러 널 속여? 그때도 핑크색만 너에게 남겨준 건, 당연히 네가 입으면 더 예쁠 것 같아서 남겨준 거야. 근데 넌 한번을 안 입더라.」강한서는 이미 그녀의 말에 넘어갔다.「그럼.
유현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뭐야, 하나는 조 선생님께 전해주고 다른 하나는 성우 씨에게 전해주는 거야? 양측을 다 공략하기로 한 거야?”차미주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나랑 그 개자식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거든? 그냥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 부탁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아, 그래?”유현진이 말을 이었다.“냉장고에 애플망고가 있는데. 차라리 그걸 드려. 송편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다원의 송편이잖아. 조 선생님께 드리는 것도 아니고 한성우 씨에게 그걸 나눠준다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이젠 제일 좋아하는 음식까지 나눠줄 정도로 친해진 거야?”차미주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건 어차피 내가 이미 하나 먹고 남은 거잖아. 새것도 아닌데 뭘. 걔한테는 애플망고도 아까워.”그녀는 더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였다. 말을 마친 차미주는 바로 문을 열었다.“나 먼저 나가볼게.”그리고 그녀는 바로 유현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주강운이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우연히 익숙한 차 번호가 달린 마세라티 차 한 대를 목격하게 되었다.마세라티는 바로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주강운은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송민준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주강운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시동을 걸었다.차미주는 바로 옆집 902호 문 앞에 서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어떻게 하면 말발로 한성우를 홀려 들게 만들어 자신을 도울 수 있게 만들까 한참을 생각했다.대충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바로 초인종을 눌렀다.한참이 지나도 응답이 없자 그녀는 눈썹 사이를 찌푸렸다. 그녀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집에 있을 한성우가 오늘따라 왜 보이지 않는지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마침 한성우에게 연락하려던 찰나에 902호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는 여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누구세요?”차미주
차미주는 다소 어색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든 송편을 전해주기도 민망했고, 도로 주머니에 넣기도 살짝 민망했다.한성우가 성큼 다가와 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네가 산 거야?”차미주가 말했다.“아니, 누가 준 거야. 두 개씩 들어있었는데 내가 하나 먹었거든. 남은 하나는 너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야.”한성우의 두 눈이 순간 반짝거렸다.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꾹꾹 내리더니 이내 주먹을 움켜쥐고 헛기침을 했다.“큼, 그래서 이거 나한테 주려고 직접 찾아온 거야?”“부탁할 것도 있고.”차미주가 뜸을 들였다.“근데, 지금은 네가 바빠 보이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 다시 올게.”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한성우가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안 바빠. 나 아주 한가해. 그러니까 들어와서 얘기해.”그는 그녀를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차미주는 신하리가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바로 거절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팔을 뿌리치기도 전에 한성우는 이미 그녀를 끌고 집 안 거실로 들어왔다. 당황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다시 팔을 빼냈다.한성우는 송편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이내 주방으로 갔다.차미주는 집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소파 위엔 여성의 핸드백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바닥엔 하이힐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고 테이블 위엔 심지어 먹다 만 컵라면도 있었다.아마도 신하리가 먹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성우는 입맛이 까다로워 인스턴트 음식을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뭐 마실래?”한성우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정신을 차린 차미주가 말했다.“그냥 물이면 돼.”냉장고를 열던 한성우는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냉장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는 컵을 들고 뜨거운 물을 받았다.차미주는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등을 기댔고 순간 손에 뭔가가 잡혔다. 고개를 떨군 그녀는 당황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브래지어였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에 잡힌 물건을 멍하니
주강운에 관해선 강한서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줬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를 도와 치료를 받게 한 일이든, 간민혜의 일을 숨겨준 것이든. 심지어 그 뒤로 있었던 간민혜의 장례식을 치러준 것까지. 강한서는 이미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이유를 알 수도 없게 주강운의 원망만 샀다. 주강운은 지금까지도 간민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은 더 이상 전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강운 스스로 조사를 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철저히 조사해 진실을 밝혀야만 그의 마음속에 얽힌 응어리를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이 물었다. “네가 대체 누구의 죄를 뒤집어써서 강운 씨의 원망을 받게 된 건지 알고 싶지 않아?”강한서가 시선을 내렸다. “강운이 날 원망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을 땐 알고 싶었어. 하지만 나중엔 그 마음이 사라졌어. 어떤 이유가 있었든, 우린 이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20여 년의 우정이 결국은 지금 이 지경에 이렀다.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그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기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지금의 강한서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 사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 그에게 제일 간단한 방법은 바로 두 사람 사이는 뒤로 미뤄둔 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말했다. “민 실장님, 서류를 주 변호사님께 보내시고 간민혜 씨가 당시 왜 나이정 씨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웠는지 조사도 계속 해주세요. 간민혜 씨가 교양도 있고 애증이 분명한 분이라면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모독하진 않았을 거예요. 조사는... 나이정 씨가 사망하기 1년 전 진찰했던 환자부터 시작하세요. 간민혜나 간민혜 씨와 관련된 사람이 환자 리스트에 있는지 알아봐요. 조사를 마치면 직접 저에게 알려주시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대표님, 그리고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강한서가 시선을 올렸다. “뭔데요?”민경하가 서류뭉치를 뒤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장례식장을 찍은 사진이었고 사진 옆쪽에 놓인 화환에는 나이정과 관련된 애도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영상 사진 속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강한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간민혜?”멈칫한 한현진이 사진 속 여자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간민혜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그 얼굴은 주강운이 그의 여자친구인 척 연기를 해달라며 부탁했던 당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해줬던 메이크업의 주인공이었다. 그날 강한서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불 같이 화를 낸 건 단순히 그녀가 주강운을 도와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주강운이 한현진을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로 메이크업을 받게 하고 심지어 본인은 모른 척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강운, 이 사람은 다정한 겉모습을 하고 뒤에선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일그러진 얼굴의 한현진을 본 강한서는 그녀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현진의 손을 꼭 잡았다. 강한서가 줄곧 한현진에게 간민혜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주강운이 어떤 목적이었든, 산 사람 얼굴에 죽은 사람의 메이크업을 한 건 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다. 한현진은 끓어오르는 불쾌함을 누르며 시선을 올려 민경하에게 물었다. “간민혜 씨와 나이정 씨는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간민혜 씨가 왜 장례식장에 있었던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 추측과는 오히려 반대예요.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예요. 이 사진은 나이정 씨 동료 분께서 주신 거예요. 장례식 당시 현장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했어요. 누군가 장례식장에서 난리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사람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이정도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심지어 세상을 뜬지 이미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민경하가 말했다. “나이정이라는 분은 당시 조예단 씨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어요. 두 사람은 대학시절 동기였고 직장도 같이 다녔어요.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분들 말에 따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요. 병원에서도 서로 도우며 지냈대요. 나중에 조예단 씨는 병원을 그만 뒀고 나이정 씨는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그 병원에 다니셨어요.”“사망 원인은 심근경색이었어요. 갑작스럽게 집에서 발병하셨고 따님이 병원에 오셨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잠시 멈칫하던 민경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나이정이라는 분, 구암동 고아원의 후원자세요.”한현진과 강한서가 눈을 마주치더니 강한서가 물었다. “확실한 거예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정 씨는 한주 사람이 아녜요. 여기엔 친척도 없고요. 따님이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경제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따님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나이정 씨와 이혼하셨어요. 나이정 씨는 혼자 딸을 키우셨고 돌아가실 땐 따님은 심장 이식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앞두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나이정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친구 분께서 따님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나서야 사망하신 걸 알게 됐어요.”“고향도 한주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가족도 없어서 장례식은 친구 분들과 동료들이 나서주셨어요. 후원했다는 사실도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게 된 거고요. 1999년부터 후원을 시작하셨고 총 3번의 기부를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후원하신 시간이 18년 전, 총 금액은 6000만 원이었어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딸이 아파서 돈에 쪼들렸을 텐데, 무슨 돈으로 고아원에 기부한 거야?”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원금은 나이정의 돈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사람 대신 기부한 것이고 나이정에게 그걸 부탁
진희연은 하늘을 안고 병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도일준이 몸을 뒤척이자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진희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물 드릴까요?”도일준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술을 짓이겼다. “들어가요.”진희연이 말했다. “날이 밝으면 돌아갈게요. 저녁엔 링거를 맞으셔서 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링거 다 맞은 줄도 모르면 어떡해요.”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던 도일준이 말했다. “그럼 아이라도 침대에 눕혀요. 희연 씨는 안 자도 아이는 자야죠.”도일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라 침대 넓이가 1.2 m이었다. 어린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같이 자기엔 충분했다. 진희연은 주저 없이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는 몸을 일으켜 도일준에게 물 한 잔을 떠줬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도일준에게 약을 건네며 잊지 말고 복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하게 듣고 있던 도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간호사가 멈칫했다. “네?”도일준이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약 잘못 가져왔어요.”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여 약을 확인하던 간호사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실수로 두 병실의 약이 바뀌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약을 바꿔 가져온 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도일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일준이 담담히 말했다. “의료업계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늘 경외심을 갖고 모든 생명에 책임을 다해야 해요. 매번 이렇게 행운이 따르진 않을 테니까요.”간호사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약을 내려놓고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진희연이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도일준 씨, 약이 바뀐 건 어떻게 아셨어요?”도일준은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찰나, 도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의사였어요. 그래서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난번 하늘이 상처를 치료해주시는 손길이 능숙하셨던 거네요.”진희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 훌륭하신 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아니야 난—”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자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말 안 해도 난 느낄 수 있어.”“느끼긴 뭘 느껴!”한현진은 어이없다는 듯 강한서를 찰싹 때렸다. “나라고 너한테 부탁 안하고 싶은 줄 알아? 둘째 삼촌과 경영권 다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너를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랬어. 신제품 발표회 파티가 있던 그 날을 제외하면, 네가 6시간 이상 잔 적이 있기는 해? 지금 네 다크써클 좀 봐봐. 지난번 같이 밥을 먹었을 때 오빠도 나한테 몰래 물어 봤었어. 혹시 네가 어디 아픈건 아니냐고. 네가 꼭 정기를 다 뺏긴 사람 같대. 너 지금 임산부인 나보다도 더 피곤해보여. 강한서, 넌 안 느껴져?”강한서: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아파?”기가 찬 한 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안 아파! 난 그저 네가 하루 24 시간 내내 일에만 매달려서 우리 셋 먹여 살릴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어!”강한서는 기쁘면서도 조금은 막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돈 좋아하잖아. 내가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널 주면 네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지.”한현진이 찰싹, 강한서를 밀어냈다. “네가 과로로 몸에 무리라도 오면 내가 그렇게 많은 돈 해서 뭐하라고. 아이의 양육을 전부 나에게 맡길 생각은 하지마! 일 때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 남편, 아이 다 버리고 네 재산만 들고 재가할 거야.”강한서가 멍하니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고생 끝에 드디어 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듯 한 믿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손을 뻗어 한현진을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몸 챙기면서 하고 있어. 임신 때문에 겪는 네 고통을 내가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다른 건 나에게 다 맡겨도 돼.”한현진이 강한서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팔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부탁할게.”바로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놓아주며
“아파?”강한서가 또 다시 물었다. 고개를 가로졌던 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허리가 조금 아파. 조금 전에 눌렸거든.”강한서가 한현진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애들 이름도 못 지어줬는데.”한현진: ...“나도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생각 안 해봤는데.”강한서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이름 짓자. 만약...”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그런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이때 검사를 마친 의사가 진단서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변연전치태반이예요. 심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될수록 누워서 하루 쉬셔야 해요.”강한서가 눈을 깜빡이며 한현진의 손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그가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물었다. “선생님, 제 아내와 아이 모두 괜찮은 건가요?”의사가 말했다. “괜찮아요.”강한서가 말했다. “하지만 하혈을 했잖아요.”“하혈은 변연전치태반의 증상 중 하나예요. 출혈량이 많지만 않다면 활동을 줄이고 누워서 휴식만 잘 취하시면 돼요.”“하지만 조금 전 밀쳐져서 허리를 부딪쳤어요.”“네.”의사가 말했다. “그럼 일단은 돌아가셔서 먼저 얼음찜질을 하다가 온찜질하세요. 이틀 정도면 붓기가 빠질 거예요.”강한서: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괜찮다고요?”의사가 반문했다.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왜요?”그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한서를 보며 의사가 말을 이었다. “허리를 부딪친 것 때문에 하혈한 건 분명 아녜요. 변연전치태반이 있은지는 조금 됐을 텐데 아마 모르시고 계시다가 마침 허리를 부딪치고 하혈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걸 거예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아이는 무사해요. 아내 분도 괜찮으시고요. 이름은 집에 가서 마음 좀 진정 시키고 천천히 지으시죠. 울면서 이름을 짓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잖아요.”강한서: ...창피해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급히 병실로 들어서던 그때, 도일준은 주사바늘을 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희연이 얼른 다가가 도일준을 제지했다. “뽑으시면 안 돼요. 아직 링거 다 못 맞았잖아요.”진희연을 힐끔 쳐다보던 도일준은 진희연 옆에 서 있는 한현진을 보고는 멈칫 몸을 굳혔다. 그리곤 곧바로 진희연의 손을 떨쳐내며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한현진을 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진희연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집에서 쓰러지셨어요. 의사가 보호자에게 연락하라고 하는데 누구한테 연락을 드려야 할지 몰라 도일준 씨 휴대폰으로 아무 번호에나 연락을 했어요. 무슨 고아원이라고 하던데 이 분이 바로 그 고아원에서 보내주셔서 함께 도일준 씨를 병원으로 모신 분이세요. 이분 도움이 없었으면 전 당황해서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도일준 눈빛에 가득하던 경계가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말했다. “원장님께서 연락을 받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가보라고 전화하셨어요.”“전 괜찮아요. 원장님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전 그저 고아원에 후원을 조금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살면서 당신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원치 않아요. 오늘 전화는 사고 같은 거였어요. 이만 돌아가세요.”도일준은 차가운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한현진은 도일준의 손에서 옷을 빼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도일준 씨가 본인이 후원하신 고아원의 사람들과 연락을 하던 안 하든 전 관심 없어요. 전 그저 원장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것 뿐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도일준 씨는 꽤 안 좋은 상황이라 입원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원장님께 부탁을 받았으니 그냥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퇴원하고 싶으시면 의사 선생님이 퇴원하셔도 된다고 할 때 다시 얘기하죠.”말하며 한현진은 침대 맡에 있던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68번 베드 바
한현진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침대에 누운 조예단의 모습이 보이자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두 사람을 힐끔 쳐다본 의사가 물었다. “어느 쪽이 환자 분 보호자시죠?”진희연이 말했다. “제가 이 분 이웃이에요. 이 분은 교포라 가족은 몰라요.”한현진이 말했다. “저는 이 분이 기부한 고아원의 대표예요.”의사가 말했다.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서 길어야 3개월 밖에 남지 않으셨어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드리세요. 비록 지금 수술은 의미 없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오셔서 약은 처방 받으셔야 해요. 안 그러면 통증이 심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고통스러울 거예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하세요.”말하며 의사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일단 이것부터 사인하세요.”서류를 받아 훑어보던 한현진은 성별란에 적힌 남이라는 글자에 그만 멍해졌다. “선생님, 이 분이 남자라고요?”의사가 기이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편견 어린 시선으로 트렌스젠더를 보지 마시죠.”한현진: !!!의사의 재촉에 진희연이 서류를 건네받아 사인한 후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한현진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조예단이 도일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전환이라니? 왜 성전환 수술을 한 거야?’이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한현진이 강한서 앞으로 걸어갔을 때, 그는 진희연의 아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다가오자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한현진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강한서에게 알려주었지만 그는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안 놀라워?”강한서가 물었다. “남장여자가 어떻게 티가 안 나? 여권, 비자 심지어 M국의 모든 신상정보도 전부 진짜였어. 만약 여자라면 그 모든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병 때문에 병원도 자주 가야 했을 텐데, 병원은 가기만 하
강한서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가면 들통 나잖아.”한현진이 말했다. “희연 언니 똑똑한 사람이야. 언니가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원장님께 연락드렸대. 난 원장님 부탁으로 조예단 씨 병문안 간 척 하면 돼.”“그럼 같이 가.”“넌 오늘 생일이잖아. 넌 가지 말고 여기서 재밌게 놀아. 나 혼자 가면 돼.”강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놓고 놀 수 있겠어. 가자. 내가 운전할게.”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조예단은 이미 응급실로 실려간 후였다. 아들을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희연은 두 사람을 보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희연 언니, 어떻게 됐어요?”한현진이 앞으로 다가가서야 입을 열었다. 진희연이 말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어요. 의사 말로는 아파서 쓰러진 것 같대요. 쓰러질 때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있어서 가스 중독이 온 것 같아요. 저도 쓰러진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늘이가 오늘 학교에서 상을 받았는데 잠자리에 들어서야 갑자기 떠올리고는 굳이 상장을 할아버지께 보여주겠다고 해서 문을 두드렸더니 인기척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경비를 불러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조예단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바로 119에 신고하고 현진 씨에게 연락한 거예요.”한현진이 진희연의 손등을 토닥였다. “고생하셨어요.”“고생은요.”진희연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예단 씨도 참 안 됐어요. 몸도 성치 않은데 곁에 가족이나 친구도 하나 없고.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려고 보니까 연락처에서 일부러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더라고요. 저장된 번호가 하나도 없었어요. 통화목록에서 원장님 번호를 찾아서 전화 드린 거예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예단은 당시 아이가 뒤바뀐 그 사건에게 혐의가 제일 큰 사람이었다. 오늘 그녀가 이런 처지에 이르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업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조예단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