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는 신미정을 때리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잘난 척하지 마요! 형님이 준 거라고요? 형님이 뭘 주셨는데요? 신표 씨에게 일을 좀 가져다주시고는 가운데서 리베이트 받으시잖아요. 회사의 1년 수입 중 절반은 형님이 가져가시잖아요. 저희가 밤낮없이 일을 하고 있을 때, 형님은 사모님들이랑 차나 마시고 계셨으면서! 신표 씨가 형님 며느리한테 얻어맞아도, 형님은 찍소리도 못하잖아요! 일이 생길 때면 동생을 찾으시고, 일이 없을 땐, 저희를 가족 취급이나 하셨어요? 그런 얘기, 부끄럽지도 않으세요?”신미정은 분노로 몸을 덜덜 떨었다. “이윤하, 너 미쳤어? 또 건드리기만 해봐!”이윤하는 얼른 신미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녀는 손을 들어 신미정의 뺨을 내려쳤다. 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신미정을 참아주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확실히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 도박을 즐기고 줏대도 없었다. 하지만 누나인 신미정은 또 무슨 본보기가 되었을까?신미정의 친구들이 신표를 데리고 놀지만 않았다면, 신표가 어떻게 도박 중독에 빠졌겠는가?작은 은혜를 베풀고는 그들이 자신을 모시기를 바라니, 정말 자신을 상전으로 여기는듯했다. 집으로 돌아온 신표는 자신의 아내가 신미정을 깔고 사정없이 때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얼른 달려가 두 사람을 떼어냈다. 신미정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더러워졌다. 그녀는 얼굴이 조금 부어올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입을 나불거렸다. 신표에게 이윤하를 쫓아내라고 말이다. 이윤하는 먼지를 툭툭 털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신표 씨, 만약 계속 형님을 여기 둘 생각이면, 신표 씨도 같이 나가요!”그녀는 곧장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표는 아내를 무서워했다. 이윤하가 기가 센 편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들 부부는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미정이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면 확실히 그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했다. 신미정의 높은 소비 수준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윤하의 말에 신표는 바로
강한서: ...“그렇게 자기를 저주할 필요는 없어.”유현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의료진은 그들을 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입이 험한 부부는 의외로 사이는 좋았다. 검사를 마치고 두 사람이 30분 정도 기다린 후 의사가 그들을 안으로 불렀다. 유현진은 혼자 들어가도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강한서가 이미 그녀의 손을 잡고 진료실로 향했다. 그녀는 별말 없이 그저 가만히 강한서를 따라 들어갔다. 의사는 오, 육십 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보통의 몸매에 안경을 끼고 부드러운 인상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검사 결과를 확인하더니 유현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예를 들면 생리는 정상적으로 하는지, 생리 지속 일수, 생리량, 색상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유현진도 하나하나 의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의사는 유현진의 대답을 기록하며 물었다. “성관계 빈도는 어때요?”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몇 달에 한 번이요.”의사가 말했다. “성욕이 별로 없고, 성관계도 하고 싶지 않나요?”유현진: ...그녀가 대답했다. “최근에 이혼했어요.”“이혼 전에는요? 성관계 주기가 어느 정도였어요?”유현진은 몇 초간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그때도 같았어요.”“이혼 전에도 성불감증 증세가 있었나요?”유현진: ...강한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전엔 제 문제였어요.”의사가 멈칫했다. “두 분 다 문제가 있었다는 말인가요?”강한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전에 교통사고로 자궁 쪽이 다쳤었어요. 의사가 유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셔서, 임신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관계를 적게 가졌었어요.”의사가 말했다. “그러니까 성생활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거죠?”유현진이 난감해하며 대답했다.“...네.”의사가 또 물었다. “관계를 가질 때 아프거나 뻑뻑하지 않나요?”유현진: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묻는 거야?’유현진은 대답하기가 쑥스러워 아예 질문을 강한
그 말에 유현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곧 의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병세를 억제할 수는 있어요. 그리고 아직 심각한 정도도 아니에요. 현진 씨 자궁내막은 아직 정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고 정상적으로 여포를 분비할 수 있어요. 다만 수량이 좀 적을 뿐이에요.”유현진은 의사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그러니까. 치료만 제때 하면, 조기 폐경의 진행 속도를 억제할 수 있어요. 자연 임신할 확률도 아직 있고요. 자연 임신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난자를 얼렸다가 나중에 시험관을 해도 돼요.”의사는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해 주며 유현진을 절망의 끝자락에서 끌어당겼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당연히 가능하죠.”의사가 웃어 보였다. “비록 조기 폐경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현재 시험관 시술이 많이 발전했어요. 환자가 난자를 생산할 수만 있으면 아이를 갖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유현진은 코끝이 찡해졌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건 그녀가 이혼 후 들은 제일 좋은 소식이었다. 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의사에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나요?”“먼저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약 드시고 다시 검사하러 오세요. 그리고 평소 생활도 주의하셔야 해요. 일은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충분히 휴식도 취하시고요, 평소 운동도 좀 하시고요. 그리고 음식, 음식도 중요해요. 정상적인 성관계 주기도 유지하시고요.”강한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어느 정도가 정상적인 주기라고 할 수 있나요?”유현진: ...매우 진지한 물음이었지만, 강한서가 물으니 이상하게 경박스러운 질문이 되어버렸다. 의사가 말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 적당해요. 너무 자주는 하지 마세요. 그리고 상대방의 생리적, 심리적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세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꼭 선생님 말씀에 따를게요.”유현진: .
14억이라는 큰돈을 기부했으니, 자선 총회에서는 재빨리 페이스북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티즌들은 자선 총회에서 업로드한 기부 사진이 두 장인 것을 확인하고는 왜 14억을 두번으로 나눠서 기부했는지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중 13만 원이라는 수자도 이상했다. 그러니 네티즌들은 유현진을 태그하여 두 번으로 나눠 기부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었다. 유현진은 자신을 태그한 페이스북을 리트윗하여 대답했다.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단지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희도 마침 13일에 크랭크인이잖아요.」그리고 그녀는 어젯밤 자리에 있었던 모든 배우를 태그했다. 물론 당사자인 송민영도 포함이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어젯밤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특히 당사자인 송민영은 13만 원을 확인하고는 유현진이 냉소를 지으며 어젯밤 그녀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병신같았는지 비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건 분명 그녀를 대놓고 놀리는 것이었다! 화를 못 이긴 송민영은 테이블 위의 물건을 전부 던져버렸다! 송씨 가문, 전화를 끊은 송민준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뒤에 서서 음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송병천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송민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인기척도 없으세요?”송병천은 송민준을 흘겨보았다. “통화한 것뿐이면서 뭘 그렇게 눈치를 봐?”“제가 뭘요?”송민준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송병천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비록 널 결혼하라고 다그치긴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결혼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뺏고 그러면 안 돼. 그건 도덕적이지 못한 거야, 알겠어?”송민준: ???“누구한테 대체 무슨 헛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제가 뭘 뺏어요?”“그걸 말해야 알아?”송병천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너 하루 종일 틈만 나면 한서 와이프한테 전화하잖아. 나 아직 두 눈 부릅뜨고 있어! 어쩐지 요즘 한서가 날 보면 할 말이 있어보인다
“아버지.”송민준이 머뭇거렸다. “만약 현진이가 어머니를 많이 닮지 않았다면, 만약 제가 호기심에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쩌면 평생 그 아이가 살아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현진이 등에 있는 모반, 제가 기억하던 거랑 똑같았어요. 그건 그때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현진이 그때 분명 건강했어요. 하지만 의료진은 저희에게 사산이라고 했죠. 아이가 바뀌었다고 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헷갈릴 수 있을까요?”송병천도 잃어버린 딸을 찾은 기쁨에서 벗어나 마음을 진정시켰다. “네 말은 누가 일부러 현진이를 바꿨다는 거니?”송민준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 당시 어머니의 분만을 담당했던 의료진들은 이미 모두 죽거나 이민을 갔고, 그것도 아니면 퇴사 후 전향해서 소식을 알 길이 없어요. 모든 것이 너무 깔끔하게 처리되었어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송병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이가 유씨 집안에 있었으니, 유씨 집안 사람들이 한 짓일까?”송민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여사님도 현진이를 기른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아셨어요. 그때 저희가 안치했던 그 아이가 바로 하 여사님 친딸이었을 거예요.”유현진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하현주는 병원에 연락을 했었다. 하지만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현주도 이미 사망했으니,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젠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수집한 정보들을 조합해 보면 최소한 아이를 바꾼 사람이 하현주는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유씨 가문이 아니면, 그럼 누구지?”송병천도 일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송민준은 입을 앙다문 채 말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 일부러 아이를 바꾼 것이라면, 보통은 두 아이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이다. 일반 가정의 아이를 부잣집으로 보낸다면, 만약 나중에 아이가 바뀐 것을 알게 되더라도 이미 오랜 시간을 길러 당연히 감정이 있을 테니 다시 원래의 인생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송병천: ...송가람은 점심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서해금이 소리를 듣고 내려왔다. 그녀는 내려오자마자 소파에 영혼 없이 멍하니 앉아있는 송가람을 발견했다. 루나가 그녀의 곁에서 물을 따라주었다. “가람아.”서해금이 송가람을 부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송가람은 입술을 짓이기며 참담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후에야 고개를 저었다.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널 안지 않은 거야?”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누군가에 의해 정신을 잃었어. 일어나보니까 다른 호텔이었고.”서해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강한서에게 들킨 거야?”송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CCTV도 지워졌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엄마, 만약 한서 오빠의 사람이 한 일이라면,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송가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위층에서 송병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나 아가, 할아버지 혈압강하제 좀 찾아줘.”루나 머리 위에 달린 센서가 반짝이더니 이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그러더니 짧은 다리로 또박또박 송병천의 약을 찾으러 걸어갔다. 서해금은 송가람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송민준은 송병천의 강력한 요구로 옷을 갈아입고 송병천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와 유현진을 보러 갈 준비를 했다.송병천의 말을 들은 그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아버지 약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그것도 저 쇳덩이를 부려 먹으시는 거예요?”송병천이 그를 흘겨보았다. “네가 뭔 상관이야?”송민준: ...루나가 변신해 송민준을 바닥에 누르는 장면을 본 이후로 송병천은 이 로봇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루나의 고지능을 확인한 뒤로는 루나에게 푹 빠져있었다. 게다가 루나는 말도 예쁘게 했다. 매번 송병천을 보면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면서 불렀고 이는 아직 손주를 보지 못한 송병천에게 예상치 못했던 기쁨을 안겨주었다
송병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예쁜 손녀를 어디에 보내려고?”“이 쇳덩이는 강한서가 현진이에게 준거예요. 현진이가 저한테 며칠 빌려줬고요. 요즘 언제 쇳덩이를 돌려줄 수 있는지 묻더라고요. 강한서가 만든 이 고철, 비록 생긴 건 못났지만, 집은 잘 지키니까, 얘가 있으면 아버지 딸이 괴롭힘을 당할 걱정은 없어요.”송민준은 말을 멈추더니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그리고, 이걸 돌려주면 아버지도 이 쇳덩이를 핑계 삼아 현진이랑 연락할 구실이 생기잖아요. 그 기회에 만나셔서 알아가셔도 되고요.”그 말을 듣는 순간, 송병천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면 얼른 현진이에게 얘기해. 전엔 우리가 몰랐다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절대 더 이상 현진이를 힘들게 만들어서는 안 돼. 최대한 빨리 데려와야지. 그리고 시간 나면 나랑 하 여사님한테 인사드리러 가자. 하씨 집안 일도 신경 좀 쓰고, 많이 도와줘.”송민준은 더 할 얘기가 있었지만 서해금이 이미 이쪽으로 걸어오자 입가에 맴돌던 말을 다시 삼키고는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서해금은 미소를 띠고 천천히 걸어왔다. “부자끼리 수군수군, 무슨 얘기 해요?”송민준은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루나를 보내려고 얘기 중이었어요.”서해금은 잘 차려입은 송민준을 보더니 물었다. “지금? 밥 먹고 가.”“아뇨, 루나를 보내고 점심엔 고객이랑 약속이 있어서요.”송가람의 옆을 지나치던 송민준은 그녀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가람아, 어디 아파?”송가람이 고개를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 친구들이랑 너무 늦게까지 놀아서 그런가 봐.”송민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더 쉬어. 다음엔 그렇게 늦게까지 놀지 말고.”송가람이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에 대답했다.송민준도 다른 말 없이 사람을 찾아 루나를 차에 싣고 자리를 벗어났다. 서해금은 혈압강하제를 송병천에게 건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민준이랑 서재에서
“강한서는 그 사람을 꽤 좋은 인재라고 생각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프로젝트의 협상에 함께 참여시켰고, 프로젝트도 순리롭게 성사되었어. 강한서가 전에 참여했었던 프로젝트가 뭐였냐고 물었는데, 뭐라고 대답했다는 줄 알아?”“뭐랬는데?”차미주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어떻게 그렇게 큰 프로젝트에 참여했는지 너무도 의문이었다. 유현진이 말했다. “수천억의 프로젝트는 페이코의 복지 행사였고, 수조에 달한다던 상업 투자는 공구 마켓 이벤트였어.”차미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강한서는 해고하지 않고 뭐 했대?”“당연히 안 했지.”유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승진도 한 것 같더라고.”“속았다고 화낸 게 아니라?”“강한서한테 물어봤는데, 이력서는 그저 참고할 뿐이고 업무능력을 더 중요하게 본다고 하더라고. 그날 협상하러 갔을 때, 신입생이 굉장히 잘했었고. 그래서 이력서가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일을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능력이 이력서보다 훨씬 더 중요해. 회사가 바보도 아니고. 그리고 넌 강한서가 뒤를 봐줄 텐데, 누가 감히 네 이력서를 가짜라고 할 거야?”유현진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래서, 추가해, 말어?”“해!”차미주는 바로 유현진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강한서가 자신의 뒤를 봐준다면, 개자식도 뒤를 봐줄 수 있을 테니까.한성우의 회사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했는데, 그중에는 아직 방영되지 않은 것도 있을 터였다. 그때 자신의 이름을 적기만 하면, 그건 그대로 자신의 “이력”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그렇게 생각한 차미주는 바로 배달 앱을 켜고 과일과 야채를 잔뜩 주문했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한성우를 구워삶을 예정이었다. 막 주문을 완료하자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차미주는 몇 마디 듣더니 바로 유현진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너 찾아.”“나?”유현진은 의아했
주강운에 관해선 강한서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줬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를 도와 치료를 받게 한 일이든, 간민혜의 일을 숨겨준 것이든. 심지어 그 뒤로 있었던 간민혜의 장례식을 치러준 것까지. 강한서는 이미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이유를 알 수도 없게 주강운의 원망만 샀다. 주강운은 지금까지도 간민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은 더 이상 전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강운 스스로 조사를 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철저히 조사해 진실을 밝혀야만 그의 마음속에 얽힌 응어리를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이 물었다. “네가 대체 누구의 죄를 뒤집어써서 강운 씨의 원망을 받게 된 건지 알고 싶지 않아?”강한서가 시선을 내렸다. “강운이 날 원망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을 땐 알고 싶었어. 하지만 나중엔 그 마음이 사라졌어. 어떤 이유가 있었든, 우린 이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20여 년의 우정이 결국은 지금 이 지경에 이렀다.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그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기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지금의 강한서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 사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 그에게 제일 간단한 방법은 바로 두 사람 사이는 뒤로 미뤄둔 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말했다. “민 실장님, 서류를 주 변호사님께 보내시고 간민혜 씨가 당시 왜 나이정 씨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웠는지 조사도 계속 해주세요. 간민혜 씨가 교양도 있고 애증이 분명한 분이라면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모독하진 않았을 거예요. 조사는... 나이정 씨가 사망하기 1년 전 진찰했던 환자부터 시작하세요. 간민혜나 간민혜 씨와 관련된 사람이 환자 리스트에 있는지 알아봐요. 조사를 마치면 직접 저에게 알려주시
민경하가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대표님, 그리고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강한서가 시선을 올렸다. “뭔데요?”민경하가 서류뭉치를 뒤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장례식장을 찍은 사진이었고 사진 옆쪽에 놓인 화환에는 나이정과 관련된 애도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영상 사진 속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강한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간민혜?”멈칫한 한현진이 사진 속 여자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간민혜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그 얼굴은 주강운이 그의 여자친구인 척 연기를 해달라며 부탁했던 당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해줬던 메이크업의 주인공이었다. 그날 강한서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불 같이 화를 낸 건 단순히 그녀가 주강운을 도와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주강운이 한현진을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로 메이크업을 받게 하고 심지어 본인은 모른 척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강운, 이 사람은 다정한 겉모습을 하고 뒤에선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일그러진 얼굴의 한현진을 본 강한서는 그녀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현진의 손을 꼭 잡았다. 강한서가 줄곧 한현진에게 간민혜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주강운이 어떤 목적이었든, 산 사람 얼굴에 죽은 사람의 메이크업을 한 건 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다. 한현진은 끓어오르는 불쾌함을 누르며 시선을 올려 민경하에게 물었다. “간민혜 씨와 나이정 씨는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간민혜 씨가 왜 장례식장에 있었던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 추측과는 오히려 반대예요.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예요. 이 사진은 나이정 씨 동료 분께서 주신 거예요. 장례식 당시 현장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했어요. 누군가 장례식장에서 난리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사람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이정도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심지어 세상을 뜬지 이미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민경하가 말했다. “나이정이라는 분은 당시 조예단 씨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했어요. 두 사람은 대학시절 동기였고 직장도 같이 다녔어요.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분들 말에 따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요. 병원에서도 서로 도우며 지냈대요. 나중에 조예단 씨는 병원을 그만 뒀고 나이정 씨는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그 병원에 다니셨어요.”“사망 원인은 심근경색이었어요. 갑작스럽게 집에서 발병하셨고 따님이 병원에 오셨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잠시 멈칫하던 민경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나이정이라는 분, 구암동 고아원의 후원자세요.”한현진과 강한서가 눈을 마주치더니 강한서가 물었다. “확실한 거예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정 씨는 한주 사람이 아녜요. 여기엔 친척도 없고요. 따님이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경제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따님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나이정 씨와 이혼하셨어요. 나이정 씨는 혼자 딸을 키우셨고 돌아가실 땐 따님은 심장 이식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앞두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나이정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친구 분께서 따님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나서야 사망하신 걸 알게 됐어요.”“고향도 한주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가족도 없어서 장례식은 친구 분들과 동료들이 나서주셨어요. 후원했다는 사실도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게 된 거고요. 1999년부터 후원을 시작하셨고 총 3번의 기부를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후원하신 시간이 18년 전, 총 금액은 6000만 원이었어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딸이 아파서 돈에 쪼들렸을 텐데, 무슨 돈으로 고아원에 기부한 거야?”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원금은 나이정의 돈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사람 대신 기부한 것이고 나이정에게 그걸 부탁
진희연은 하늘을 안고 병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도일준이 몸을 뒤척이자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진희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물 드릴까요?”도일준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술을 짓이겼다. “들어가요.”진희연이 말했다. “날이 밝으면 돌아갈게요. 저녁엔 링거를 맞으셔서 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링거 다 맞은 줄도 모르면 어떡해요.”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던 도일준이 말했다. “그럼 아이라도 침대에 눕혀요. 희연 씨는 안 자도 아이는 자야죠.”도일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라 침대 넓이가 1.2 m이었다. 어린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같이 자기엔 충분했다. 진희연은 주저 없이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는 몸을 일으켜 도일준에게 물 한 잔을 떠줬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도일준에게 약을 건네며 잊지 말고 복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하게 듣고 있던 도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간호사가 멈칫했다. “네?”도일준이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약 잘못 가져왔어요.”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여 약을 확인하던 간호사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실수로 두 병실의 약이 바뀌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약을 바꿔 가져온 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도일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일준이 담담히 말했다. “의료업계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늘 경외심을 갖고 모든 생명에 책임을 다해야 해요. 매번 이렇게 행운이 따르진 않을 테니까요.”간호사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약을 내려놓고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진희연이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도일준 씨, 약이 바뀐 건 어떻게 아셨어요?”도일준은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찰나, 도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의사였어요. 그래서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난번 하늘이 상처를 치료해주시는 손길이 능숙하셨던 거네요.”진희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 훌륭하신 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아니야 난—”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자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말 안 해도 난 느낄 수 있어.”“느끼긴 뭘 느껴!”한현진은 어이없다는 듯 강한서를 찰싹 때렸다. “나라고 너한테 부탁 안하고 싶은 줄 알아? 둘째 삼촌과 경영권 다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너를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랬어. 신제품 발표회 파티가 있던 그 날을 제외하면, 네가 6시간 이상 잔 적이 있기는 해? 지금 네 다크써클 좀 봐봐. 지난번 같이 밥을 먹었을 때 오빠도 나한테 몰래 물어 봤었어. 혹시 네가 어디 아픈건 아니냐고. 네가 꼭 정기를 다 뺏긴 사람 같대. 너 지금 임산부인 나보다도 더 피곤해보여. 강한서, 넌 안 느껴져?”강한서: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아파?”기가 찬 한 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안 아파! 난 그저 네가 하루 24 시간 내내 일에만 매달려서 우리 셋 먹여 살릴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어!”강한서는 기쁘면서도 조금은 막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돈 좋아하잖아. 내가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널 주면 네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지.”한현진이 찰싹, 강한서를 밀어냈다. “네가 과로로 몸에 무리라도 오면 내가 그렇게 많은 돈 해서 뭐하라고. 아이의 양육을 전부 나에게 맡길 생각은 하지마! 일 때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 남편, 아이 다 버리고 네 재산만 들고 재가할 거야.”강한서가 멍하니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고생 끝에 드디어 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듯 한 믿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손을 뻗어 한현진을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몸 챙기면서 하고 있어. 임신 때문에 겪는 네 고통을 내가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다른 건 나에게 다 맡겨도 돼.”한현진이 강한서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팔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부탁할게.”바로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놓아주며
“아파?”강한서가 또 다시 물었다. 고개를 가로졌던 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허리가 조금 아파. 조금 전에 눌렸거든.”강한서가 한현진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애들 이름도 못 지어줬는데.”한현진: ...“나도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생각 안 해봤는데.”강한서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이름 짓자. 만약...”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그런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이때 검사를 마친 의사가 진단서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변연전치태반이예요. 심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될수록 누워서 하루 쉬셔야 해요.”강한서가 눈을 깜빡이며 한현진의 손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그가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물었다. “선생님, 제 아내와 아이 모두 괜찮은 건가요?”의사가 말했다. “괜찮아요.”강한서가 말했다. “하지만 하혈을 했잖아요.”“하혈은 변연전치태반의 증상 중 하나예요. 출혈량이 많지만 않다면 활동을 줄이고 누워서 휴식만 잘 취하시면 돼요.”“하지만 조금 전 밀쳐져서 허리를 부딪쳤어요.”“네.”의사가 말했다. “그럼 일단은 돌아가셔서 먼저 얼음찜질을 하다가 온찜질하세요. 이틀 정도면 붓기가 빠질 거예요.”강한서: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괜찮다고요?”의사가 반문했다.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왜요?”그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한서를 보며 의사가 말을 이었다. “허리를 부딪친 것 때문에 하혈한 건 분명 아녜요. 변연전치태반이 있은지는 조금 됐을 텐데 아마 모르시고 계시다가 마침 허리를 부딪치고 하혈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걸 거예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아이는 무사해요. 아내 분도 괜찮으시고요. 이름은 집에 가서 마음 좀 진정 시키고 천천히 지으시죠. 울면서 이름을 짓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잖아요.”강한서: ...창피해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급히 병실로 들어서던 그때, 도일준은 주사바늘을 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희연이 얼른 다가가 도일준을 제지했다. “뽑으시면 안 돼요. 아직 링거 다 못 맞았잖아요.”진희연을 힐끔 쳐다보던 도일준은 진희연 옆에 서 있는 한현진을 보고는 멈칫 몸을 굳혔다. 그리곤 곧바로 진희연의 손을 떨쳐내며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한현진을 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진희연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집에서 쓰러지셨어요. 의사가 보호자에게 연락하라고 하는데 누구한테 연락을 드려야 할지 몰라 도일준 씨 휴대폰으로 아무 번호에나 연락을 했어요. 무슨 고아원이라고 하던데 이 분이 바로 그 고아원에서 보내주셔서 함께 도일준 씨를 병원으로 모신 분이세요. 이분 도움이 없었으면 전 당황해서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도일준 눈빛에 가득하던 경계가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말했다. “원장님께서 연락을 받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가보라고 전화하셨어요.”“전 괜찮아요. 원장님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전 그저 고아원에 후원을 조금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살면서 당신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원치 않아요. 오늘 전화는 사고 같은 거였어요. 이만 돌아가세요.”도일준은 차가운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한현진은 도일준의 손에서 옷을 빼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도일준 씨가 본인이 후원하신 고아원의 사람들과 연락을 하던 안 하든 전 관심 없어요. 전 그저 원장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것 뿐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도일준 씨는 꽤 안 좋은 상황이라 입원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원장님께 부탁을 받았으니 그냥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퇴원하고 싶으시면 의사 선생님이 퇴원하셔도 된다고 할 때 다시 얘기하죠.”말하며 한현진은 침대 맡에 있던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68번 베드 바
한현진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침대에 누운 조예단의 모습이 보이자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두 사람을 힐끔 쳐다본 의사가 물었다. “어느 쪽이 환자 분 보호자시죠?”진희연이 말했다. “제가 이 분 이웃이에요. 이 분은 교포라 가족은 몰라요.”한현진이 말했다. “저는 이 분이 기부한 고아원의 대표예요.”의사가 말했다.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서 길어야 3개월 밖에 남지 않으셨어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드리세요. 비록 지금 수술은 의미 없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오셔서 약은 처방 받으셔야 해요. 안 그러면 통증이 심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고통스러울 거예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하세요.”말하며 의사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일단 이것부터 사인하세요.”서류를 받아 훑어보던 한현진은 성별란에 적힌 남이라는 글자에 그만 멍해졌다. “선생님, 이 분이 남자라고요?”의사가 기이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편견 어린 시선으로 트렌스젠더를 보지 마시죠.”한현진: !!!의사의 재촉에 진희연이 서류를 건네받아 사인한 후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한현진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조예단이 도일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전환이라니? 왜 성전환 수술을 한 거야?’이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한현진이 강한서 앞으로 걸어갔을 때, 그는 진희연의 아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다가오자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한현진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강한서에게 알려주었지만 그는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안 놀라워?”강한서가 물었다. “남장여자가 어떻게 티가 안 나? 여권, 비자 심지어 M국의 모든 신상정보도 전부 진짜였어. 만약 여자라면 그 모든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병 때문에 병원도 자주 가야 했을 텐데, 병원은 가기만 하
강한서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가면 들통 나잖아.”한현진이 말했다. “희연 언니 똑똑한 사람이야. 언니가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원장님께 연락드렸대. 난 원장님 부탁으로 조예단 씨 병문안 간 척 하면 돼.”“그럼 같이 가.”“넌 오늘 생일이잖아. 넌 가지 말고 여기서 재밌게 놀아. 나 혼자 가면 돼.”강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놓고 놀 수 있겠어. 가자. 내가 운전할게.”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조예단은 이미 응급실로 실려간 후였다. 아들을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희연은 두 사람을 보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희연 언니, 어떻게 됐어요?”한현진이 앞으로 다가가서야 입을 열었다. 진희연이 말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어요. 의사 말로는 아파서 쓰러진 것 같대요. 쓰러질 때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있어서 가스 중독이 온 것 같아요. 저도 쓰러진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늘이가 오늘 학교에서 상을 받았는데 잠자리에 들어서야 갑자기 떠올리고는 굳이 상장을 할아버지께 보여주겠다고 해서 문을 두드렸더니 인기척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경비를 불러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조예단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바로 119에 신고하고 현진 씨에게 연락한 거예요.”한현진이 진희연의 손등을 토닥였다. “고생하셨어요.”“고생은요.”진희연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예단 씨도 참 안 됐어요. 몸도 성치 않은데 곁에 가족이나 친구도 하나 없고.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려고 보니까 연락처에서 일부러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더라고요. 저장된 번호가 하나도 없었어요. 통화목록에서 원장님 번호를 찾아서 전화 드린 거예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예단은 당시 아이가 뒤바뀐 그 사건에게 혐의가 제일 큰 사람이었다. 오늘 그녀가 이런 처지에 이르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업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조예단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