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제보랑 다르잖아?’기자들은 크게 실망했지만 어떤 사람은 여전히 강한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들어온 이후로 침대 위는 여자는 계속 이불속에 숨어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고 누워만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사모님이라는 것은 그저 강한서의 말뿐이었으니, 그 말이 진짜인지 누가 알겠는가?“정말 사모님이 맞다면,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누군가가 강한서의 말에 빠르게 대처했다. 꼭 강한서의 불륜 현장을 찍어야만 특종인 것은 아니었다. 침대에 있는 것이 정말 강한서의 아내라면, 그것 또한 빅뉴스였다. 4년 전, 강한서는 페이스북에 당당하게 결혼한 사실을 공개했다. 하지만 아내의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강한서는 아내의 개인 정보를 매우 잘 지켜줬다. 누군가 염탐을 하려고 하면 바로 한성 그룹의 업계 경고를 받았다. 내부에서는 강한서와 송민영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보고 그의 아내가 송민영이라는 찌라시가 돌았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명령하에 강제로 삭제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한성에 직접 전화해 진실을 알아보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터무니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강한서 아내의 정체에 대해 더 궁금해했다. 만약 이번에 그의 아내의 정체를 밝혀낸다면, 이곳까지 온 보람은 있을 터였다. 기자의 말을 들은 유현진은 소름이 돋았다.‘이 파파라치들, 미친 거야?’‘강한서가 누구랑 호텔에 오든 말든, 지들이 무슨 상관이야!’ ‘당장 거절하고 쫓아내!’하지만 다음 순간, 이불 너머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이프 의견을 먼저 구해야 해서요.”유현진: ...강한서는 몸을 숙여 이불의 한 귀퉁이를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현진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당장 내보내!”이미 옷을 입고 있는 유현진을 발견한 강한서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초조한 얼굴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내쫓으면 점수 줄
‘이게 무슨 스타일이지?’‘페이스키니?’유현진은 깜짝 놀라면서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다행히 강한서의 대처가 빨라 가방을 그녀에게 집어넣어 줬고, 가방 안에는 위장할 수 있는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얼굴은 기자들의 카메라에 노출되어 배우의 커리어가 완전히 끝장날 뻔했다. 사람들은 유현진의 페이스키니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이불을 잡아끈 사람의 손을 잡고 뒤로 비틀었다. 상대방은 비명을 지르더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한서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냉랭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제가 너무 매너 있게 대해드렸죠?”그의 분노가 더욱 끓어올랐고, 검은 아우라가 그를 감쌌다. 평온한 모습으로 기자들의 말에 대답하던 그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자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강한서는 강현우와 달랐다. 강현우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기사를 써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는 파파라치계의 1순위였던 바나 미디어를 파산할 정도로 고소했던 당사자였다. 업계를 휩쓸었던 바나 미디어의 편집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도 전부, 강한서의 작품이었다.그들 언론사는 어느 곳 하나도 바나 미디어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곳들이었다. 그런데 감히, 주제도 모르고 강한서의 역린을 건드리다니.그깟 포상금이, 그들이 이런 리시크를 감수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들이 강한서에게 애원하던 그때, 꽁꽁 싸맨 여자가 입을 열었다. “당장 내보내, 안 그럼 점수 깎을 거야!”사람들은 불같이 화를 내던 강한서가 여자의 말에 카리스마를 거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언짢은 듯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게 왜 내 탓이야?”“자꾸 쓸데없는 소리할래?”강한서는 입을 닫고 잔뜩 불쌍한 태도로 말했다. “알았어.”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은 또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잡고 있던 사
유현진은 가볍게 대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갑자기 비틀거리자 강한서가 깜짝 놀라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유현진은 어쩐지 조금 말문이 막힌 듯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 돼지 타고 걷는 것 같아?”강한서: ...그는 어젯밤 절제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괜히 어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얼굴을 가리면 다른 사람들이 너인 줄 모를 거야.”유현진이 침묵했다. 그녀는 자신이 던진 질문의 답을 찾았다. 비슷한 것이 분명했다. 화장실에 찬물이 나오지 않아 강한서는 옆방을 예약하라고 했다. 두 사람이 샤워를 마치자, 민경하가 준비해 둔 차도 마침 도착했다. 차가 출발하자, 유현진은 그제야 이젠 두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과 강한서의 사이가 이런 식의 진전을 가져올 줄 몰랐기에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계획은, 최소한 일이 안정되어야만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의 사업은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강한서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실패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강한서의 첫 번째 결혼이 실패한 원인은 서로에 대한 의심은 둘째치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경제적 지위의 차이도 한몫했다. 그런 커다란 갭은 자꾸만 시시콜콜 따지게 했고, 자신이 강한서의 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 반문하게 했다. 하지만 늘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 침대에서 자고 관계까지 가진 이 시점에, 강한서에게 단순히 약 때문에 그와 잔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말라고 얘기를 해야 하는 걸까?그 말은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주둥이를 때리고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말이었다!그녀는 어젯밤 왜 자신이 참지 못한 것인지 후회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강한서에게 병원에 가자고 했어야 했다. 창피한 건 창피한 거고, 이렇게 난처하기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어젯밤… 그건 사고야.”유현진이 아직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
강한서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유현진도 꾸물거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강한서가 요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는 노력들을 그녀는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도 언제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강한서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무리 좋은 감정이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차라리 더 당기는 것이 나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요즘은 동거해 보고 결혼하는 게 유행이잖아. 우리도 정식 연애 전에 테스트를 해보는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 남자친구 인턴 기간을 줄게. 만약 네가 잘하면, 정식 남자친구가 되는 거고, 그게 아니면…“강한서는 얼른 유현진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그게 아닌 건 없어. 난 분명히 만점짜리 답안지를 낼 거니까.”유현진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찾았다. “너무 앞서가지 마. 나 아직 요구도 얘기 안 했어.”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귀담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내 요구는 단 하나야. 인턴 기간엔, 우리 둘 사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의심받지 않게 행동해. 알겠어?”유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랑 연애하는 게 창피해?”유현진이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차버렸다. “재혼이 안 부끄러워?"강한서: …비록 마음에 무척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혼”이라는 두 글자가 그의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강한서가 물었다. “그럼 정식 남자친구가 되고 나면?”유현진이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앞서 가지 마. 인턴 기간이나 끝내고 말해.”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그럼 인턴 기간 내에는 커플이 하는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는 거야?”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가 가까이 다가오며 목소리를 잔뜩 깔더니 물었다. “어젯밤 일
정비사는 수도꼭지를 틀었고 이어서 샤워기와 욕조의 수도꼭지도 틀어보았지만 전부 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망가졌어도 한 번에 전부 다 망가졌을 리가 없잖아. 설마 밖에 있는 메인 배관이 망가진 건가?’‘하지만 다른 방에서 찬물이 안 나온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장비사는 점검구를 열고 밸브를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밸브를 돌리자 욕실의 모든 수도꼭지에서 물이 “쏴아아”하고 흘러내렸다. ...‘대체 누가 밸브를 잠근 거야!’신씨 가문.신미정은 어젯밤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또 일이 잘못되어 강한서에게 들킬까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온밤을 기다린 그녀는 이른 아침, 전 여사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고 밤새 방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했다.그 소식에 신미정은 일이 성사되었다고 생각해 얼른 언론사에 연락을 돌렸다. 그녀는 이제 언론사에서 소식을 터뜨려 강한서와 송가람의 관계를 인증해 주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하지만 눈이 빠지게 기다려 점심 11시가 다 되어서도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신미정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거실을 서성거렸다. 막 아이들을 학원에서 데려온 신표의 아내는 거실을 배회하는 신미정과 아직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있는 어젯밤 먹다 남은 간식과 야식 봉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순간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층으로 올려보내고 내려와 신미정 앞에 섰다. 그녀는 성질을 죽이고 말했다. “형님, 저 나갈 때, 여기 좀 치워달라고 부탁했잖아요. 왜 아직도 그대로예요?”신미정은 이 올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씨 가문이 만약 가세가 기울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절대 자신의 동생이 이런 평민과 결혼하도록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시콜콜 따지는 것은 둘째 치고, 요즘 신표를 꼬드겨 자신을 내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 집안의 사정으로는, 자신의 도움 없이 그들이 이렇게 편안한 삶을 누릴
이윤하는 신미정을 때리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잘난 척하지 마요! 형님이 준 거라고요? 형님이 뭘 주셨는데요? 신표 씨에게 일을 좀 가져다주시고는 가운데서 리베이트 받으시잖아요. 회사의 1년 수입 중 절반은 형님이 가져가시잖아요. 저희가 밤낮없이 일을 하고 있을 때, 형님은 사모님들이랑 차나 마시고 계셨으면서! 신표 씨가 형님 며느리한테 얻어맞아도, 형님은 찍소리도 못하잖아요! 일이 생길 때면 동생을 찾으시고, 일이 없을 땐, 저희를 가족 취급이나 하셨어요? 그런 얘기, 부끄럽지도 않으세요?”신미정은 분노로 몸을 덜덜 떨었다. “이윤하, 너 미쳤어? 또 건드리기만 해봐!”이윤하는 얼른 신미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녀는 손을 들어 신미정의 뺨을 내려쳤다. 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신미정을 참아주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확실히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 도박을 즐기고 줏대도 없었다. 하지만 누나인 신미정은 또 무슨 본보기가 되었을까?신미정의 친구들이 신표를 데리고 놀지만 않았다면, 신표가 어떻게 도박 중독에 빠졌겠는가?작은 은혜를 베풀고는 그들이 자신을 모시기를 바라니, 정말 자신을 상전으로 여기는듯했다. 집으로 돌아온 신표는 자신의 아내가 신미정을 깔고 사정없이 때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얼른 달려가 두 사람을 떼어냈다. 신미정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더러워졌다. 그녀는 얼굴이 조금 부어올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입을 나불거렸다. 신표에게 이윤하를 쫓아내라고 말이다. 이윤하는 먼지를 툭툭 털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신표 씨, 만약 계속 형님을 여기 둘 생각이면, 신표 씨도 같이 나가요!”그녀는 곧장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표는 아내를 무서워했다. 이윤하가 기가 센 편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들 부부는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미정이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면 확실히 그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했다. 신미정의 높은 소비 수준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윤하의 말에 신표는 바로
강한서: ...“그렇게 자기를 저주할 필요는 없어.”유현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의료진은 그들을 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입이 험한 부부는 의외로 사이는 좋았다. 검사를 마치고 두 사람이 30분 정도 기다린 후 의사가 그들을 안으로 불렀다. 유현진은 혼자 들어가도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강한서가 이미 그녀의 손을 잡고 진료실로 향했다. 그녀는 별말 없이 그저 가만히 강한서를 따라 들어갔다. 의사는 오, 육십 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보통의 몸매에 안경을 끼고 부드러운 인상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검사 결과를 확인하더니 유현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예를 들면 생리는 정상적으로 하는지, 생리 지속 일수, 생리량, 색상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유현진도 하나하나 의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의사는 유현진의 대답을 기록하며 물었다. “성관계 빈도는 어때요?”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몇 달에 한 번이요.”의사가 말했다. “성욕이 별로 없고, 성관계도 하고 싶지 않나요?”유현진: ...그녀가 대답했다. “최근에 이혼했어요.”“이혼 전에는요? 성관계 주기가 어느 정도였어요?”유현진은 몇 초간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그때도 같았어요.”“이혼 전에도 성불감증 증세가 있었나요?”유현진: ...강한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전엔 제 문제였어요.”의사가 멈칫했다. “두 분 다 문제가 있었다는 말인가요?”강한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전에 교통사고로 자궁 쪽이 다쳤었어요. 의사가 유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셔서, 임신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관계를 적게 가졌었어요.”의사가 말했다. “그러니까 성생활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거죠?”유현진이 난감해하며 대답했다.“...네.”의사가 또 물었다. “관계를 가질 때 아프거나 뻑뻑하지 않나요?”유현진: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묻는 거야?’유현진은 대답하기가 쑥스러워 아예 질문을 강한
그 말에 유현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곧 의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병세를 억제할 수는 있어요. 그리고 아직 심각한 정도도 아니에요. 현진 씨 자궁내막은 아직 정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고 정상적으로 여포를 분비할 수 있어요. 다만 수량이 좀 적을 뿐이에요.”유현진은 의사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그러니까. 치료만 제때 하면, 조기 폐경의 진행 속도를 억제할 수 있어요. 자연 임신할 확률도 아직 있고요. 자연 임신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난자를 얼렸다가 나중에 시험관을 해도 돼요.”의사는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해 주며 유현진을 절망의 끝자락에서 끌어당겼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당연히 가능하죠.”의사가 웃어 보였다. “비록 조기 폐경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현재 시험관 시술이 많이 발전했어요. 환자가 난자를 생산할 수만 있으면 아이를 갖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유현진은 코끝이 찡해졌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건 그녀가 이혼 후 들은 제일 좋은 소식이었다. 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의사에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나요?”“먼저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약 드시고 다시 검사하러 오세요. 그리고 평소 생활도 주의하셔야 해요. 일은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충분히 휴식도 취하시고요, 평소 운동도 좀 하시고요. 그리고 음식, 음식도 중요해요. 정상적인 성관계 주기도 유지하시고요.”강한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어느 정도가 정상적인 주기라고 할 수 있나요?”유현진: ...매우 진지한 물음이었지만, 강한서가 물으니 이상하게 경박스러운 질문이 되어버렸다. 의사가 말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 적당해요. 너무 자주는 하지 마세요. 그리고 상대방의 생리적, 심리적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세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꼭 선생님 말씀에 따를게요.”유현진: .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
서해금 사무실.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지켜보고 있는데 고작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보너스를 삭감해?”밖에선 꾹 참고 있던 서해금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더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송가람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엄마. 은서하는 재무팀 직원이야. 감히 내 앞에서 한현진의 선물을 받았어. 그건 엄마에게 창피를 주는 것과 다를 거 없잖아.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직원들도 은서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난 그저 엄마 대신 주의를 준 것뿐이야.”“주의?”서해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옷 한 벌로 주의?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야?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을 때, 왜 그 이유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어? 은서하는 가족 병원비 때문에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어. 만약 이런 타이밍에 네가 은서하를 도와줬다면 걔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네가 얼마나 아량이 넓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하지만 네가 한 짓을 봐! 보너스를 삭감으로 은서하 상황만 더 안 좋게 했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네 곁에 있던 멍청이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어. 그런 식으로 은서하를 조롱하면 네가 뭐라도 돼 보일 것 같아? 멍청한 것! 네가 그럴수록 사람들은 네가 속이 좁다고 생각할 뿐이야. 고작 그런 일로 복수나 하는 아량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누가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을 것 같아?”멍해졌던 송가람은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그땐... 그땐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어. 그렇게 멍청하게 한 번도 인사팀에 묻지 않을 줄은 몰랐지. 그리고 내가 걔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아...”변명을 늘어놓던 송가람은 조금 전 한현진이 대신 나서줬음에도 끝내 한현진 편에 서지 않던 은서하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조금 전 한현진이 도와주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 봤잖아. 엄마는 어떻게 은서하가 배은망덕한 머리 검은 짐승이 아닐 거라 확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부업으로 회사 청소를 하시면서 실수가 있으셨고 그걸 바로 저에게 보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덜미를 잡혔어요. 만약 오늘 세은이가 오일 제조에 실패했다면 기사님이 얼마나 큰 책임을 떠안아야 했는지 알고는 계세요?”“마지막 이유는, 제 사무실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어야 하셨어요. 무릎을 꿇는 이유가 사과든 반성이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그건 제가 싫어하는 방식이거든요.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자존심도 전부 내려놓는 행위이니까요. 부모님과 은인 앞이 아닌 이상,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는 고용관계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기사님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바라는 행동을 전 용서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주혁은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도 조금씩 하얗게 질려갔다. 한현진의 논리정연한 말에 주혁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죄송하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말이 없던 한현진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해요. 월급은 제가 최대한 인사팀과 협의해 볼게요.”한참을 잠자코 있던 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다시 대표님 운전기사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한현진은 이번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은 진심으로 주혁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가 부업을 하려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에게는 다른 사람을 동정할 여유가 없었다. 면접을 봤던 그날 주혁이 구해준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한현진은 그런 이유로 더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