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웅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어르신들 앞에 있는 휴대폰 거치대에 올려두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유현진은 소파에 앉아 자신의 응원 피켓을 들고 있는 노부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송민준이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 누군지 아시겠어요?”입술을 달싹이던 유현진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고 송민준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민준 오빠, 호칭은 어떻게 부르면 돼요?”“우린 같은 또래니까, 제가 부르는 대로 부르면 돼요.”그러자 유현진은 바로 눈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현진이에요.”할아버지, 할머니라는 호칭에 두 사람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힐 뻔했다. 닮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반짝이는 큰 눈과 오똑한 코, 전부 람이랑 똑 닮았어.’한태진의 흐릿하던 눈동자가 유현진을 보는 순간 촉촉해졌다. 공영선이 그의 등을 꽉 잡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공영선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하지만 공연선은 감정을 잘 억누르고 있었다. 나이 든 그녀의 목소리는 지나온 세월이 묻어있어 자애롭고 부드러웠다. “예뻐요. 화면보다 더 예뻐.”직설적인 칭찬에 유현진의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도 우아하세요.”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공영선은 머리가 이미 희끗희끗하고 얼굴에는 주름도 많았지만 그녀는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공영선은 한 손엔 응원피켓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단정하게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굉장히 품위 있고 우아해 보였다. 공영선을 보면 미인은 세월도 비껴간다는 것이 무슨 말이 이해되었다. 그와 반대로 한태진은 다부지게 생겼다. 짙은 눈썹과 큰 눈에 근엄해 보이는 그는 남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현진 씨는 말도 예쁘게 하네요.”공영선은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 화면 속 사람을 빤히 쳐다보며 이것저것 물었다. 그녀의 집안에 대해 물었다가,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
“일 봐요. 일을 그르치면 안 되니까.”가볍게 대꾸한 유현진은 한태진과 공영선에게 인사를 하고나서야 휴대폰을 송민준에게 돌려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전 먼저 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을 가져왔다. 안방으로 돌아온 유현진은 문을 닫고 갑자기 털썩 자리에 앉았다. 한태진과 공영선 두 어르신은 자상했고 유현진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 느낌은 그녀의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유현진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송민준은 이미 전화를 끊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차를 타 주는 루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유현진이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티셔츠와 긴바지에 얇은 외투를 입은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머리는 높게 포니테일을 묶었다. 진희연이 얼른 몸을 일으켜 유현진의 옷을 정리했다. “송 대표님, 이준 오빠. 우리 언제 출발해요?”이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에 출발해.”아직 10여 분 남아있었다. 송민준이 갑자기 물었다. “이 꼬마 쇳덩이는 어디서 구해 온 거예요?”‘꼬마 쇳덩이?’유현진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루나가 먼저 발끈했다. “전 꼬마 쇳덩이가 아니라 AI 집사예요. 저 이름 있어요. 제 이름은 루나에요. 루-나!”루나의 말에 침묵이 흘렀다. 송민준은 노크하듯 루나의 겉면을 툭툭 두드렸다. “꼬마 쇳덩이.”루나: ...“오빠, 이러는 건 매너가 아니에요.”송민준이 루나를 놀리며 말했다. “매너는 사람한테나 하는 거지. 넌 로봇이잖아. 쉽게 말해면 도구. 밥 먹을 쓰는 밥그릇, 물 마시는 컵처럼 그냥 쓰는 거잖아. 밥그릇이랑 컵에 예의 차리는 거 본 적 있어?”루나는 송민준의 논리에 낚이지 않았다. “루나는 도구가 아니에요. 저는 인간의 생활 파트너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인간도 예의있게 절 대해야 해요.”송민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예전에 그가 갖고 놀던 것들보다 똑똑했다. 그가 전에 샀던 로봇들은 내리는 지시는 거의 정확히 수행했지만 논리적인 사고나 이
유현진이 조금 망설였다. 빌려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루나는 아직 테스트 단계라, 어떤 기능은 송민준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녀가 말이 없자 송민준이 물었다. “제가 이걸 뜯어서 복제라도 할까 봐 그래요?”“당연히 아니죠.”루나가 비싼 것은 탑재된 포로세서와 프로그램의 설정 때문인데, 이런 것들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유현진이 말했다. “루나가 아직 출시 테스트를 통과한 게 아니라서요.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걱정이거든요.”송민준이 전혀 개의치 않고 웃었다. “로봇일 뿐이잖아요. 해결이 안 되면 전원을 꺼버리면 그만이죠.”송민준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유현진도 더 이상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 그래요. 그럼 일주일 뒤에 돌려주세요.”“알겠어요.”그 시각, 강한서와 한성우가 지하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0시가 조금 지나자, 7동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민경하가 얼른 강한서를 불렀다. “대표님, 왔습니다.”강한서가 고개를 들자 유현진과 그녀의 일행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막 올라가던 그의 입꼬리가 곧 축 처졌다. ‘송민준이 왜 여깄어?’송민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네 사람 뒤에는 루나도 함께였다. 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그를 감쌌다. 한성우는 어젯밤 배탈에 시달렸다. 항문에 새빨간 인두를 끼고 있는 것처럼 하루 종일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오늘에야 겨우 살만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루나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쇳덩이 데리고 어딜 가는 거야?”하지만 곧, 그 의문이 풀렸다. 네 사람이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박해서가 BMW를 몰고 왔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스티로폼 박스를 꺼내 루나를 안에 넣었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루나를 자동차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박해서가 운전을 하고 휙 가버렸다. 강한서: ...“세상에, 송민준이 쇳덩이를 납치해 간 거야?”강한서
진희연이 본 배우 중, 이렇게 팬들의 마음을 신경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가 전에 제작진과 함께 일할 때, 배우의 팬들을 많이 봤었다. 그들은 멀리서 자기 배우를 보기 위해 왔고 엄동설한에 패딩을 입고 밖에서 길게 줄을 섰다. 추위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어도 그들은 자기 배우가 춥지는 않은지, 촬영장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닌지, 촬영이 언제 끝나서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걱정했다. 사실, 그들의 배우는 따뜻한 대기실에서 에어컨을 켜고 편히 쉬고 있었다. 심지어 춥다는 이유로 사진을 찍어 달라는 간단한 요구도 들어주기 싫어했다. 많은 연예인들에게 팬이라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였다. 그들은 한낱 데이터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진희연이 말했다. “그거 알아요? 팬들이 오래 기다릴수록 인기가 많고 골수팬의 능력이 좋다는 뜻이에요.”유현진이 깜짝 놀랐다. “이렇게 더운 날에, 저도 서 있기 힘든데, 그건 너무 사람을 괴롭히는 것 아니에요? 일찍 돌아가라고 해요. 우리는 그런 거 안 해요.”진희연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요.”11시가 되자 배우와 스태프들이 하나둘 모였고 11시 20분에 크랭크인이 시작되었다. 제를 지내고, 폭죽을 터뜨렸다. 피어오르는 연기의 냄새와 함께 유현진의 첫 블록버스터가 정식 촬영 시작을 알렸다. 크랭크인 행사가 끝난 후,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송민영과 한열의 팬들은 익숙하게 꽃바구니와 꽃다발을 하나씩 무대 위로 올렸다. 송민영의 팬들은 특별히 파란 장미로 곰돌이 푸를 만들었다. 굉장히 예뻤다. 그녀의 공식 색은 하늘색이었고 곰돌이 푸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였다. 유현진은 별로 부럽지는 않았다. 다만 자기 아이돌의 웃는 모습을 위해 돈과 정력을 쏟아 덕질하는 팬들에게 감탄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러데이션이 들어간 파스텔 장미로 만든 2M가 넘는 거대한 망고가 휘청이며 무대 위로 올려졌다. 장미로 만들어진 망고는 마치 진짜 같았다. 위에는 잎과 과일
파란 장미로 만든 곰돌이 푸는 한열의 팬들이 보낸 커다란 꽃바구니보다 훨씬 더 호화로웠다. 크랭크인 행사는 그녀의 체면을 한껏 살려주었다. 하지만 “거대한 망고”가 오면서, 그녀는 스포트라이트를 전부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망고”는 하필이면 곰돌이 푸 옆에 놓여 있었다. 곰돌이 푸는 1M 30cm는 넘었고, “망고”는 적어도 2M 30cm은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비기니 마치 난쟁이가 NBA 선수 옆에 서 있는 것처럼 초라해, 그녀의 체면을 구겨버렸다. 언론사들은 “망고” 사진을 찍으면서 유현진을 인터뷰했다. “유현진 선생님, 처음으로 블록버스터 크랭크인 행사에 참석하셨는데, 기분이 어떠세요?”유현진 선생님...유현진은 어쩐지 자신을 “유현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강한서의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그의 질문은 일반적인 사람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현진은 목청을 가다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편하게 이름 불러주세요. 선생님이라고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전 갓 영화계에 발을 딛은 신인이에요. 아직 선생님이라고 불릴 만한 수준이 아니에요. 그리고, 안 감독님 같은 유능하신 감독님과 훌륭한 배우분들, 제작진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요. 너무 큰 영광이죠. 촬영 중 그 분들과의 ‘케미’가 굉장히 기대돼요.”언제부터인지 연예계에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생겼다. 유현진에게 선생님이란 교육에 종사해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국악 대가에게만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그녀는 그 호칭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사람이라,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언론사도 얼른 호칭을 바꿨다. “현진 님,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라왔던 사진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유현진은 진작 이 질문을 던질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다.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앉아서 생각했어요.”갑자기 훅 들어온 아재 개그에 현장은 침묵이 흘렀다가 이내 곧 웃음소리가 터졌다. 유현진은 그제야 웃
기자들은 한열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열이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별로 본 적이 없는 것도 같았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린 그 사람이 단연 한열이 저격한 첫 사람이었다. 머리 회전이 빠른 기자는 얼른 마이크를 송민영 앞으로 가져갔다. “민영 님, 네티즌들은 한열이 말한 대사를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을 민영 님이라고 추측하고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유현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기자의 마이크에 붙은 로고를 확인했다. 피싱 미디어. 이 질문은 확실히 송민영을 낚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용기가 대단한 기자였다. 송민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마터면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주고 감정을 조절하고는 살짝 미소를 띠었다. “너무 뻔한 질문이네요. 이런 재미없는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요.”연예부 기자들은 이쪽 일을 하면서 일찍 강철 멘탈을 단련했다. 그는 송민영이 대답을 회피하자 화도 내지 않고 연이어 다음 질문을 했다. “전에 떠돌던 소문에 의하면 민영 님께서 극 중 커플 케미로 작품 홍보를 하시려다 한열의 스태프들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두 분 투톱 주연이신데, 화해하신 건가요?”송민영은 이를 악물고 표정 관리를 했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끝내 참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첫째, 기자님도 소문이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소문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가지가 만들어져요. 제가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요? 둘째, 여긴 ‘살의’의 크랭크인 행사에요, 기자님들께서 작품에 관련된 질문을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전혀 관련 없는 질문들 말고요.”기자가 계속 질문했다. “민영 님 전 작품들은 전부 후시 녹음을 하셨잖아요. 이번 ‘살의’ 작품은 동시 녹음으로 진행하신다면서요? 혹시 민영 님 전속 성우가 배우로 전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신 선택인가요? 전에 공개된 현장 녹음본은 더빙과 차이가 컸는데, 본인 전속 성우와 합을 맞춰
강한서는 한성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너랑 현진이랑 같아?”한성우: ...‘이 개자식 좀 보게. 현진 씨가 여지를 좀 주니까 바로 날 쌩까네.’그는 차미주에게 고자질하고 나서도 마음 편히 한성우를 부려 먹었다. “네 와이프 심보가 얼마나 나쁜지, 네가 몰라?”강한서가 말했다. “여기서 루머 퍼뜨리지 마. 현진이가 얼마나 착한데.”한성우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콩깍지가 씐 거야? 네 와이프가 착하다는 단어랑 어울려? 너한테 속을 잔뜩 넣은 막창해줬던 거, 다 잊었어?”강한서: ...이미 다 잊은 일이었지만, 한성우의 말에 다시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다만... 한성우가 어떻게 알았지?강한서는 순간적으로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민경하를 쳐다보았다. 민경하는 그의 시선에 멈칫하더니 마른기침을 했다. “그날 하루 종일 속이 울렁거린다고 하셨잖아요. 한 대표님이 여쭤보시길래, 조금 얘기했어요.”강한서는 민경하에게 “팔이 밖으로 굽냐?”는 눈빛을 보내더니 고개를 돌려 한성우에게 말했다. “나 화 돋우려고 말만 그렇게 한 거야. 현진이가 날 어떻게 그렇게 대하겠어?”한성우가 “허허”하며 실소를 터뜨렸다. “넌 네 상상만으로 현진 씨를 꼬시는 거야? 현진 씨가 정말 널 신경 쓴다면, 왜 너랑 화해 하지 않는 건데?”말을 하던 한성우의 눈에 송민준이 들어오자 그는 바로 새로운 ‘공격’ 방법을 찾았다. “너랑 스캔들이 날까 봐 두려워서 다가오지 말라고 했다면서 왜 송민준은 가까이하고 송민준이 데려다주게 하는 거야? 송민준이랑 스캔들이 나는 건 두렵지 않대? 네가 로봇을 주자마자 바로 송민준에게 줘버렸잖아.”“그리고 한열. 네 전 부인이 아직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페이스북에 현진 씨 실드를 쳐줬잖아. 두 사람, 극 중에서는 심지어 연인이고. 매일 붙어있다 보면 정도 들고 그럴 텐데. 네 전 부인이 뭐 자제력이 그렇게 강한 사람도 아니고. 안 그래도 잘생긴 남자 좋아하잖아.”“지금 널 거절하지 않
“망고하다”는 그가 유현진에게 알려준 말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망고”의 의미도 정확하게 맞추었다. ‘이 정도면 텔레파시가 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아?’무대 위의 사람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의 시야를 가렸다. 송민준이 그의 앞에 똑바로 서 마침 유현진을 보는 그의 시야를 가렸다. 강한서의 입꼬리가 내려왔다. 송민준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 대표, 한 대표. 한가한가 봐. 크랭크인 행사 보러 다 오고?”강한서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송 대표도 한가한 것 같은데? 회사 실적이 별로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야?”멈칫한 송민준은 더 크게 웃었다. “실적은 꽤 괜찮은데. 우리 회사 배우가 처음으로 블록버스터급 영화에 출연하는 거라, 마음이 안 놓여서 보러 왔어. 강 대표는 뭘 보고 있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여자친구.”“풉—”한성우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송민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며칠 못 본 사이, 이 개자식의 낯가죽은 더 두꺼워졌다. “오.”송민준이 말했다. “강 대표, 송민영 씨랑 공개 연애하시려고?”그의 말에 강한서는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송민준 이 자식, 뺏지 못하니까 루머라도 퍼뜨리려는 거야?’“내가 누굴 말하는지, 송 대표가 제일 잘 알 텐데. 송 대표, 내가 무상으로 투자해 준거 아니잖아. 큰돈 들여가며 밀어주길 기대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현진이를 힘들게 만든다면, 용서하지 않아.”유현진이 송민준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강한서는 그를 매너 있게 대할 수가 없었다. 송민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개자식, 감히 날 협박해?! 현진이와 다시 잘 되고 싶으면 먼저 내 허락부터 거쳐야 할 거야!’“그럼 나도 하나만 알려줄게. 유현진 씨는 우리 회사 연예인이야. 현진 씨가 5년 이내에 연애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체결했으니 네가 정말 남자친구라면 현진 씨에게 위약금 청구를 해야 할 것 같네.”강한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