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우연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그녀는 분명 강한서의 화를 돋우려고 일부러 도발한 것인데 커플룩으로 입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강한서가 그녀를 흘기더니 되물었다.“너라면 믿을래?” 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어떻게 해명해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유현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바꿔 입을게.” 그러자 강한서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우연이라며 왜 그렇게 신경 써?” 유현진의 입꼬리가 떨렸다.“내가 뭘 신경 쓴다고 그래? 네가 자꾸 오해하니까 그러지.” “내가 뭘 오해했는데?” “너는...” ‘내가 아직 널 좋아해서 일부러 커플룩을 입었다고 생각하잖아.’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그를 보지 않았다. 찰랑이는 귀걸이는 그녀의 길고 흰 목에 그림자를 남겼다.그녀의 귀는 아주 빨갰는데 방금 강한서와 싸웠기 때문이었다.그녀 스스로도 매번 다른 사람과 화를 내며 싸울 때면 귀가 빨갛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강한서는 그녀의 빨개진 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순간 유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강한서, 마지막으로 강민서를 용서할 거야. 예전에는 어려서 그런 짓들을 했다지만 앞으로 다시 나한테 함부로 말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네가 강민서를 감싸줘도 상관은 없지만 나도 이젠 잃을 것 없는 몸이야. 절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아.”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유현진에게 강민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물으려고 했지만 그의 등 뒤로 강민서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나 준비 다 됐어.” 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강한서의 앞에서 돌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어때, 예뻐?” 아주 성숙해 보이는 드레스였기 때문에 헤어 디자이너는 그녀의 코디에 맞는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었다.그녀의 유치한 모습을 감춰 주고 몹시 아름답기까지 했지만 유현진의 앞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한껏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신분으로 인해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었
강한서가 전화를 받았고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그는 미간을 세게 찌푸리다가 전화를 끊고 기사님에게 말했다.“세기 빌딩에 세워요.” 강민서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차는 왜 세워? 오빠, 무슨 일이야?” 유현진 역시 그를 바라보았는데 걱정하는 강민서와는 달리 그녀의 눈빛에는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강한서가 담담하게 답했다.“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 너희들 먼저 가.” 유현진이 시선을 돌렸다.‘급한 일이라고? 송민영이 불렀겠지.’ 송민영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에게는 몹시도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유현진은 손목이 잡혔고 그녀는 벗어나려고 했지만 강한서가 얼른 결혼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웠다.유현진은 반지를 보자 화가 치밀어 비아냥거렸다.“이렇게 귀한 물건을 내가 할 수는 없지. 찾지 못하면 또 신고하려고?” 뒤끝이 심한 여자라고 생각한 강한서는 피식 웃더니 유현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걱정 마. 신고 안 해. 만약 잃어버리면 다른 걸로 갚아.” 유현진이 흠칫하며 물었다.“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강한서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녀를 훑어보며 말했다.“유현진, 다음번 건강 검진에서는 머리도 한 번 검사해 봐.”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강민서가 물었다.“오빠,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거야? 뭘 신고해?” 강한서가 손을 거두며 덤덤하게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너한테 초대장 있지? 이따가 도착하면 현진이 데리고 먼저 들어가. 난 기다릴 필요 없어. 일 마치고 갈 테니까.” 강민서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답했다.차는 아주 빨리 세기 빌딩에 도착했고 민경하는 이미 차 안에서 강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강한서는 원래 유현진에게 당부할 말이 있었지만 유현진이 고개를 돌리고 이어폰을 낀 채 대화를 거부했다. 그녀의 모습에 강한서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쾅 닫고 떠났다.차에 탄 강한서를 본 민경하는 단번에 그의 기분이 언짢
"고속도로에서 충돌 사고가 있던 날 사모님도 현장에 계셨습니다. 사모님의 포르쉐 역시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강한서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민경하는 조수석에 있는 파일을 그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이건 사모님의 진료 기록입니다. 송민영 씨와 같은 병원에 있었어요.”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파일을 살폈다.우측 11번째 갈비뼈 골절, 조직 부상으로 오른쪽 손목 인대 부상, 이마의 찰과상을 동반한 두통, 메스꺼움 등이 있으므로 입원을 권장함.그날 밤에 발생한 모든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며 강한서는 목이 타들어갔다.그녀는 자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눈을 감았다.‘이게 바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이유인가?’ ...한편, 파티로 향하는 길에서 강민서는 메이크업을 고쳤다.그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가장 밝은 파운데이션을 쓰라고 했는데 메이크업 효과는 좋았지만 화장이 번지는 게 걱정이 되었다. 만약 화장이 번지면 그녀의 원래 피부색이 여실히 드러났기에 볼품이 없어진다.그녀는 부단히 파우더를 발라 화장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강민서는 거울을 통해 뒷좌석에 앉은 유현진을 보며 예쁜 그녀의 얼굴에 질투심을 느꼈다.유현진의 피부는 백옥같이 희고 섬세했는데 슈트를 입고 얇은 화장을 했다고 해도 충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아름다웠다.그런 유현진과 함께 입장하면 분명 스포트라이트를 모두 빼앗기고 말거라는 생각이 든 강민서는 점점 유현진이 고까웠다.차는 빨리 이번 자선회 파티가 진행되는 곳에 도착했다. 예신호텔이었다.예신의 사장은 이번 자선회 파티를 개최한 사람들 중 하나로서 한주시의 비즈니스 업계에서 인맥이 아주 넓었는데 초대한 사람들은 모두 정계와 상업계 엘리트와 대형 그룹의 고위 임원들이었다.자선회 파티라고는 하나 사실 각 계의 엘리트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파티였다.강민서는 한주시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는 별로 유명한 인사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엄마는 예전에 한주
유현진과 강한서의 결혼 소식이 전해진 그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떤 명문가의 여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한성우에게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의 진위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강한서가 명문가 자제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었다.유현진은 강한서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우편함에서 익명의 러브레터를 발견하곤 했다. 아주 달콤한 말과 함께 자신의 외설적인 사진을 보내면서 말이다.그건 어느 날 그녀가 강한서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성우 파일을 수정할 때 발견한 것인데 그때 두 사람은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기로서 아직 잠자리를 하지 않은 때였다. 사진을 보자마자 그녀는 머릿속이 하얘지며 혹시 강한서가 외도를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그땐 나이도 어렸고 순진했던 그녀는 혹시 자신과 잠자리를 하지 않는 이유가 강한서가 사진과 같은 섹시한 타입이 취향이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나기도, 속상하기도 했다. 해서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데 성인용품점에서 사진 속의 여자가 입은 것과 같은 속옷을 사서 그날 밤 보드카를 마시고 대담하게 강한서의 품에 안겼다.그 뒤에 발생한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이튿날 깨어보니 강한서는 일찍 떠났고 홀로 남은 그녀는 몸이 구석구석 아팠지만 속으로는 흐뭇했다.그날 오후 강한서는 그녀에게 전화로 어제 입은 옷은 어디에서 산 것인지 물었다.유현진은 어젯밤이 마음에 들었던 강한서가 대낮부터 그녀를 유혹한다고 생각하고 쭈뼛댔지만 강한서가 이어서 말했다.“디자인 부서에서 며칠 전 나한테 디자인 시안을 보냈는데 우리 상품이 아직 출시되기도 전에 모조품이 시장에 나왔어. 지금 유포자를 찾는 중이야.” 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네가 말한 시안이 메일에 있던 그 사진이야?” 강한서가 멈칫하며 되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유현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그 뒤에 유현진은 강한서에게 사적인 사진을 보내는 여자가 꽤 많았지만 그날 그녀가 봤던 사진은 회사에서 새 제품의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화장실 문에 노크했다.“강민서?” 안에서는 대답 대신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유현진이 다시 소리를 높여 말했다.“강민서, 장난치지 마. 들었으면 대답해.” 하지만 여전히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화장실에는 칸막이가 3개뿐이었는데 3개의 문이 모두 굳게 닫혀있었다. 그중 하나의 칸막이 너머로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다른 소리도 섞였다. 유현진은 이거구나 생각했다.“민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안쪽으로 밀었다.무방비 상태였던 유현진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고 손에 있던 폰도 놓쳤다.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유현진은 불안한 예감이 들어 얼른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역시나 밖에서 문이 잠겼다.‘강민서 유치한 자식!’ 유현진은 이를 악물고 힘껏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강민서! 너 미쳤어?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얼른 문 열어!”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설마 이미 나갔어?’ 강민서가 그녀에게 했던 못된 행위들을 생각하니 이런 일을 벌이고도 남겠다는 확신이 들었다.호텔은 방음 시설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그녀를 발견하는 사람은 없었다.호텔 로비에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액정이 깨지는 바람에 그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그저 누군가 화장실에 와서 그녀를 구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유현진은 몰랐다. 강민서가 화장실을 떠날 때 문 앞에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놓았기 때문에 호텔 직원이 아닌 이상 화장실을 지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호텔의 화장실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악취 대신 디퓨저 향이 났지만 갇혀 있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액정이 깨진 핸드폰을 만지며 기억을 더듬어 주소록에서 아무나 찾아서 전화를 하여 호텔 데스크에 연락을 해달라고 할 참이었다.하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화장실 옆 칸에서 “헉헉” 거리는 소리가
유현진은 심호흡을 하고 겉옷을 벗고는 손으로 약을 건져내 흐르는 물에 씻고 버튼을 눌렀다.밀봉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에 물이 들어간 것 같지 않았다. 유현진은 얼른 여자의 입에 대고 약을 분사했다.약을 복용한 여자의 호흡이 많이 나아졌다.유현진은 허리를 숙여 여자를 부축하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증상은 나아졌지만 여자의 의식은 여전히 흐릿했다.안색 또한 다시 나빠지자 유현진은 힘껏 여자의 인중을 누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을 살리기 위해 맨손으로 변기에 손을 넣었어요. 내 정성을 봐서라도 제발 정신 차려요.” 유현진은 아마 디퓨저가 여자의 알레르기를 유발했다고 생각하고 얼른 화장실의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켰다.몇 분 뒤, 여자의 증상은 점점 완화되었고 안색도 좋아졌으며 의식 역시 돌아왔지만 아직도 말은 하지 못하였다.“휴대폰 있어요?” 유현진이 물었고 여자는 힘들게 고개를 저었다.유현진은 창문을 통해 주위 환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향해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얼른 창문을 통해 나가서 사람 불러올게요.” 여자는 눈을 깜박였다.유현진은 하이힐을 벗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창문 밖에는 30cm 정도의 폭을 밟을 수 있는 받침대가 있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해서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유현진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미대생이 체대생으로 될 수도 있구나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10분이 넘게 좁은 창틀을 따라 드디어 다른 창문에 도착했다.다행인 사실은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었고 불행인 사실은 그곳이 남자 화장실이라는 점이었다.변태처럼 창문에 매달린 그녀를 본 한 남자는 볼일을 보다가 깜짝 놀라서 얼른 바지 지퍼를 채우고 황급히 달아났는데 마침 화장실에 들어오던 남자와 부딪쳤다.더욱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가 부딪친 사람이 바로 그녀가 아침에 방금 보았던 주 변호사라는 점이었다.남자 화장실에서 아침에 이야기를 나누던 고객을 발견한 주강운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자신
유현진 역시 망설이지 않고 한쪽 다리를 창틀에 올리고 상대의 어깨에 힘을 실어 안으로 넘어왔다.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다리가 풀린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주강운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고 유현진은 초췌한 모습으로 상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를 살려보고자 했지만 상대는 이미 그녀가 남자 화장실의 창문을 통해 넘어온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미지를 세탁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될 대로 되라지.’ 또 다른 누군가가 화장실로 들어왔고 그들의 모습에 헛기침을 하더니 “실례합니다.” 한 마디만 남기고 떠나버렸다.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해명할 수 없는 오해였다.두 사람은 화장실에서 나와서 119에 신고하며 사람을 찾아 여자 화장실 문을 열었다.호텔 직원의 빠른 행동력으로 얼른 여자를 화장실에서 구출했다.유현진이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탓인지 여자의 안색은 많이 좋아졌고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의사 역시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하여 간단한 검사를 마치더니 감탄했다.“조치가 빨라서 상태가 심각하진 않네요.”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시름을 놓았다. 특히 호텔 매니저는 안도감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오늘 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신분이 고귀한 분들이라 만약 호텔에서 인명피해가 생겼다면 그가 책임질 수 있는 사태가 아니었다.매니저는 얼른 여자를 객실로 안내하여 의사의 치료를 받게 조치했다.그러면서 유현진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분은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혹시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유현진이 손사래를 쳤지만 곁에 있던 주강운이 그녀를 대신하여 답했다.“차현진 씨라고 합니다.” 유현진은 가명을 듣더니 속으로 움찔했다.“현진 씨였군요. 혹시 어느 방에 머무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희 호텔의 구세주와 다름이 없으니 감사의 인사로 한별 씨의 모든 소비 금액을 저희 호텔이 부담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유현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멋지긴 하지만 파티에서는 더 아름답게 입을 수 있죠.” ‘센스 있네.’ 체면을 지켜주는 동시에 칭찬까지 동반한 말을 마다할 이는 없었다.유현진은 만약 강한서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했다.강한서는 분명 치가 떨린다는 얼굴로 “거지냐?” 라고 대꾸하고는 수건을 그녀의 얼굴에 덮으면서 쪽팔린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하겠지.생각하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다를 수 있지?” 매니저는 흔쾌히 방 하나를 내주었다.“우선 준비하고 있어요. 이따가 다시 올게요.” 주강운은 그녀를 방에 들여보내고 자리를 떠났다.유현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주강운 역시 그녀를 따라서 방에 들어가면 얼마나 어색할지 걱정했던 것이다. 주강운은 아주 신사적이었다. 그는 유현진이 다른 사람에게 이상한 오해를 살까 같은 방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주강운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한성우가 단톡방에서 그에게 물었다.“강운아, 똥통에 빠졌어?” 주강운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한성우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방혁 그 자식이 네가 화장실에서 여자랑 이상한 짓 한다던데, 사실이야?”“여자한테는 관심도 없던 네가 웬일이야? 어떤 여자야? 예뻐? 어느 집 자제분이셔?”주강운이 이를 으득 갈더니 답장을 보냈다.“머릿속에 음란마귀만 가득 찬 너랑 내가 같아?” “허. 여자를 좋아하는 게 어때서? 그치, 한서야?” 강한서가 답장했다.“네가 말하면 음탕해 보여.” 한성우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답장을 보냈다.“너희 대체 언제 와? 늙은이들이 자꾸 나한테 여자 소개해 주겠대. 심심해 죽겠다고. 빨리 와서 나 대타 좀 서줘.” 강한서가 무뚝뚝하게 답장을 보냈다.“이미 결혼한 몸이라 그건 힘들어.” 한성우는 어이가 없었다.그는 속으로 와이프가 창문을 넘고 다니는데 결혼이라는 말을 잘도 한다고 생각했다.주강운이 회신했다.“이따가 누구 좀 데려갈게.”‘데리고 오면 오는 거지. 왜 예고는 한담?’ 한성우가 멈칫하더니 뭔가를 떠올리고 물었다.“여자야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