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우연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그녀는 분명 강한서의 화를 돋우려고 일부러 도발한 것인데 커플룩으로 입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강한서가 그녀를 흘기더니 되물었다.“너라면 믿을래?” 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어떻게 해명해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유현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바꿔 입을게.” 그러자 강한서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우연이라며 왜 그렇게 신경 써?” 유현진의 입꼬리가 떨렸다.“내가 뭘 신경 쓴다고 그래? 네가 자꾸 오해하니까 그러지.” “내가 뭘 오해했는데?” “너는...” ‘내가 아직 널 좋아해서 일부러 커플룩을 입었다고 생각하잖아.’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그를 보지 않았다. 찰랑이는 귀걸이는 그녀의 길고 흰 목에 그림자를 남겼다.그녀의 귀는 아주 빨갰는데 방금 강한서와 싸웠기 때문이었다.그녀 스스로도 매번 다른 사람과 화를 내며 싸울 때면 귀가 빨갛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강한서는 그녀의 빨개진 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순간 유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강한서, 마지막으로 강민서를 용서할 거야. 예전에는 어려서 그런 짓들을 했다지만 앞으로 다시 나한테 함부로 말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네가 강민서를 감싸줘도 상관은 없지만 나도 이젠 잃을 것 없는 몸이야. 절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아.”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유현진에게 강민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물으려고 했지만 그의 등 뒤로 강민서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나 준비 다 됐어.” 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강한서의 앞에서 돌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어때, 예뻐?” 아주 성숙해 보이는 드레스였기 때문에 헤어 디자이너는 그녀의 코디에 맞는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었다.그녀의 유치한 모습을 감춰 주고 몹시 아름답기까지 했지만 유현진의 앞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한껏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신분으로 인해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었
강한서가 전화를 받았고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그는 미간을 세게 찌푸리다가 전화를 끊고 기사님에게 말했다.“세기 빌딩에 세워요.” 강민서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차는 왜 세워? 오빠, 무슨 일이야?” 유현진 역시 그를 바라보았는데 걱정하는 강민서와는 달리 그녀의 눈빛에는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강한서가 담담하게 답했다.“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 너희들 먼저 가.” 유현진이 시선을 돌렸다.‘급한 일이라고? 송민영이 불렀겠지.’ 송민영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에게는 몹시도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유현진은 손목이 잡혔고 그녀는 벗어나려고 했지만 강한서가 얼른 결혼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웠다.유현진은 반지를 보자 화가 치밀어 비아냥거렸다.“이렇게 귀한 물건을 내가 할 수는 없지. 찾지 못하면 또 신고하려고?” 뒤끝이 심한 여자라고 생각한 강한서는 피식 웃더니 유현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걱정 마. 신고 안 해. 만약 잃어버리면 다른 걸로 갚아.” 유현진이 흠칫하며 물었다.“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강한서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녀를 훑어보며 말했다.“유현진, 다음번 건강 검진에서는 머리도 한 번 검사해 봐.”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강민서가 물었다.“오빠, 둘이 무슨 얘기 하는 거야? 뭘 신고해?” 강한서가 손을 거두며 덤덤하게 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너한테 초대장 있지? 이따가 도착하면 현진이 데리고 먼저 들어가. 난 기다릴 필요 없어. 일 마치고 갈 테니까.” 강민서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답했다.차는 아주 빨리 세기 빌딩에 도착했고 민경하는 이미 차 안에서 강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강한서는 원래 유현진에게 당부할 말이 있었지만 유현진이 고개를 돌리고 이어폰을 낀 채 대화를 거부했다. 그녀의 모습에 강한서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쾅 닫고 떠났다.차에 탄 강한서를 본 민경하는 단번에 그의 기분이 언짢
"고속도로에서 충돌 사고가 있던 날 사모님도 현장에 계셨습니다. 사모님의 포르쉐 역시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강한서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민경하는 조수석에 있는 파일을 그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이건 사모님의 진료 기록입니다. 송민영 씨와 같은 병원에 있었어요.”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파일을 살폈다.우측 11번째 갈비뼈 골절, 조직 부상으로 오른쪽 손목 인대 부상, 이마의 찰과상을 동반한 두통, 메스꺼움 등이 있으므로 입원을 권장함.그날 밤에 발생한 모든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며 강한서는 목이 타들어갔다.그녀는 자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눈을 감았다.‘이게 바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이유인가?’ ...한편, 파티로 향하는 길에서 강민서는 메이크업을 고쳤다.그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가장 밝은 파운데이션을 쓰라고 했는데 메이크업 효과는 좋았지만 화장이 번지는 게 걱정이 되었다. 만약 화장이 번지면 그녀의 원래 피부색이 여실히 드러났기에 볼품이 없어진다.그녀는 부단히 파우더를 발라 화장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강민서는 거울을 통해 뒷좌석에 앉은 유현진을 보며 예쁜 그녀의 얼굴에 질투심을 느꼈다.유현진의 피부는 백옥같이 희고 섬세했는데 슈트를 입고 얇은 화장을 했다고 해도 충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아름다웠다.그런 유현진과 함께 입장하면 분명 스포트라이트를 모두 빼앗기고 말거라는 생각이 든 강민서는 점점 유현진이 고까웠다.차는 빨리 이번 자선회 파티가 진행되는 곳에 도착했다. 예신호텔이었다.예신의 사장은 이번 자선회 파티를 개최한 사람들 중 하나로서 한주시의 비즈니스 업계에서 인맥이 아주 넓었는데 초대한 사람들은 모두 정계와 상업계 엘리트와 대형 그룹의 고위 임원들이었다.자선회 파티라고는 하나 사실 각 계의 엘리트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파티였다.강민서는 한주시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는 별로 유명한 인사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엄마는 예전에 한주
유현진과 강한서의 결혼 소식이 전해진 그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떤 명문가의 여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한성우에게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의 진위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강한서가 명문가 자제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었다.유현진은 강한서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우편함에서 익명의 러브레터를 발견하곤 했다. 아주 달콤한 말과 함께 자신의 외설적인 사진을 보내면서 말이다.그건 어느 날 그녀가 강한서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성우 파일을 수정할 때 발견한 것인데 그때 두 사람은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기로서 아직 잠자리를 하지 않은 때였다. 사진을 보자마자 그녀는 머릿속이 하얘지며 혹시 강한서가 외도를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그땐 나이도 어렸고 순진했던 그녀는 혹시 자신과 잠자리를 하지 않는 이유가 강한서가 사진과 같은 섹시한 타입이 취향이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나기도, 속상하기도 했다. 해서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데 성인용품점에서 사진 속의 여자가 입은 것과 같은 속옷을 사서 그날 밤 보드카를 마시고 대담하게 강한서의 품에 안겼다.그 뒤에 발생한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이튿날 깨어보니 강한서는 일찍 떠났고 홀로 남은 그녀는 몸이 구석구석 아팠지만 속으로는 흐뭇했다.그날 오후 강한서는 그녀에게 전화로 어제 입은 옷은 어디에서 산 것인지 물었다.유현진은 어젯밤이 마음에 들었던 강한서가 대낮부터 그녀를 유혹한다고 생각하고 쭈뼛댔지만 강한서가 이어서 말했다.“디자인 부서에서 며칠 전 나한테 디자인 시안을 보냈는데 우리 상품이 아직 출시되기도 전에 모조품이 시장에 나왔어. 지금 유포자를 찾는 중이야.” 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네가 말한 시안이 메일에 있던 그 사진이야?” 강한서가 멈칫하며 되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유현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그 뒤에 유현진은 강한서에게 사적인 사진을 보내는 여자가 꽤 많았지만 그날 그녀가 봤던 사진은 회사에서 새 제품의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화장실 문에 노크했다.“강민서?” 안에서는 대답 대신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유현진이 다시 소리를 높여 말했다.“강민서, 장난치지 마. 들었으면 대답해.” 하지만 여전히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화장실에는 칸막이가 3개뿐이었는데 3개의 문이 모두 굳게 닫혀있었다. 그중 하나의 칸막이 너머로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다른 소리도 섞였다. 유현진은 이거구나 생각했다.“민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안쪽으로 밀었다.무방비 상태였던 유현진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고 손에 있던 폰도 놓쳤다.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유현진은 불안한 예감이 들어 얼른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역시나 밖에서 문이 잠겼다.‘강민서 유치한 자식!’ 유현진은 이를 악물고 힘껏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강민서! 너 미쳤어?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얼른 문 열어!”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설마 이미 나갔어?’ 강민서가 그녀에게 했던 못된 행위들을 생각하니 이런 일을 벌이고도 남겠다는 확신이 들었다.호텔은 방음 시설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그녀를 발견하는 사람은 없었다.호텔 로비에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며 액정이 깨지는 바람에 그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그저 누군가 화장실에 와서 그녀를 구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유현진은 몰랐다. 강민서가 화장실을 떠날 때 문 앞에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놓았기 때문에 호텔 직원이 아닌 이상 화장실을 지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호텔의 화장실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악취 대신 디퓨저 향이 났지만 갇혀 있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액정이 깨진 핸드폰을 만지며 기억을 더듬어 주소록에서 아무나 찾아서 전화를 하여 호텔 데스크에 연락을 해달라고 할 참이었다.하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화장실 옆 칸에서 “헉헉” 거리는 소리가
유현진은 심호흡을 하고 겉옷을 벗고는 손으로 약을 건져내 흐르는 물에 씻고 버튼을 눌렀다.밀봉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에 물이 들어간 것 같지 않았다. 유현진은 얼른 여자의 입에 대고 약을 분사했다.약을 복용한 여자의 호흡이 많이 나아졌다.유현진은 허리를 숙여 여자를 부축하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증상은 나아졌지만 여자의 의식은 여전히 흐릿했다.안색 또한 다시 나빠지자 유현진은 힘껏 여자의 인중을 누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을 살리기 위해 맨손으로 변기에 손을 넣었어요. 내 정성을 봐서라도 제발 정신 차려요.” 유현진은 아마 디퓨저가 여자의 알레르기를 유발했다고 생각하고 얼른 화장실의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켰다.몇 분 뒤, 여자의 증상은 점점 완화되었고 안색도 좋아졌으며 의식 역시 돌아왔지만 아직도 말은 하지 못하였다.“휴대폰 있어요?” 유현진이 물었고 여자는 힘들게 고개를 저었다.유현진은 창문을 통해 주위 환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향해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얼른 창문을 통해 나가서 사람 불러올게요.” 여자는 눈을 깜박였다.유현진은 하이힐을 벗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창문 밖에는 30cm 정도의 폭을 밟을 수 있는 받침대가 있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해서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유현진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미대생이 체대생으로 될 수도 있구나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10분이 넘게 좁은 창틀을 따라 드디어 다른 창문에 도착했다.다행인 사실은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었고 불행인 사실은 그곳이 남자 화장실이라는 점이었다.변태처럼 창문에 매달린 그녀를 본 한 남자는 볼일을 보다가 깜짝 놀라서 얼른 바지 지퍼를 채우고 황급히 달아났는데 마침 화장실에 들어오던 남자와 부딪쳤다.더욱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가 부딪친 사람이 바로 그녀가 아침에 방금 보았던 주 변호사라는 점이었다.남자 화장실에서 아침에 이야기를 나누던 고객을 발견한 주강운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자신
유현진 역시 망설이지 않고 한쪽 다리를 창틀에 올리고 상대의 어깨에 힘을 실어 안으로 넘어왔다.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다리가 풀린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주강운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고 유현진은 초췌한 모습으로 상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를 살려보고자 했지만 상대는 이미 그녀가 남자 화장실의 창문을 통해 넘어온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미지를 세탁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될 대로 되라지.’ 또 다른 누군가가 화장실로 들어왔고 그들의 모습에 헛기침을 하더니 “실례합니다.” 한 마디만 남기고 떠나버렸다.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해명할 수 없는 오해였다.두 사람은 화장실에서 나와서 119에 신고하며 사람을 찾아 여자 화장실 문을 열었다.호텔 직원의 빠른 행동력으로 얼른 여자를 화장실에서 구출했다.유현진이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탓인지 여자의 안색은 많이 좋아졌고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의사 역시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하여 간단한 검사를 마치더니 감탄했다.“조치가 빨라서 상태가 심각하진 않네요.”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시름을 놓았다. 특히 호텔 매니저는 안도감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오늘 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신분이 고귀한 분들이라 만약 호텔에서 인명피해가 생겼다면 그가 책임질 수 있는 사태가 아니었다.매니저는 얼른 여자를 객실로 안내하여 의사의 치료를 받게 조치했다.그러면서 유현진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분은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혹시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유현진이 손사래를 쳤지만 곁에 있던 주강운이 그녀를 대신하여 답했다.“차현진 씨라고 합니다.” 유현진은 가명을 듣더니 속으로 움찔했다.“현진 씨였군요. 혹시 어느 방에 머무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희 호텔의 구세주와 다름이 없으니 감사의 인사로 한별 씨의 모든 소비 금액을 저희 호텔이 부담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유현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멋지긴 하지만 파티에서는 더 아름답게 입을 수 있죠.” ‘센스 있네.’ 체면을 지켜주는 동시에 칭찬까지 동반한 말을 마다할 이는 없었다.유현진은 만약 강한서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했다.강한서는 분명 치가 떨린다는 얼굴로 “거지냐?” 라고 대꾸하고는 수건을 그녀의 얼굴에 덮으면서 쪽팔린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하겠지.생각하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다를 수 있지?” 매니저는 흔쾌히 방 하나를 내주었다.“우선 준비하고 있어요. 이따가 다시 올게요.” 주강운은 그녀를 방에 들여보내고 자리를 떠났다.유현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주강운 역시 그녀를 따라서 방에 들어가면 얼마나 어색할지 걱정했던 것이다. 주강운은 아주 신사적이었다. 그는 유현진이 다른 사람에게 이상한 오해를 살까 같은 방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주강운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한성우가 단톡방에서 그에게 물었다.“강운아, 똥통에 빠졌어?” 주강운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한성우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방혁 그 자식이 네가 화장실에서 여자랑 이상한 짓 한다던데, 사실이야?”“여자한테는 관심도 없던 네가 웬일이야? 어떤 여자야? 예뻐? 어느 집 자제분이셔?”주강운이 이를 으득 갈더니 답장을 보냈다.“머릿속에 음란마귀만 가득 찬 너랑 내가 같아?” “허. 여자를 좋아하는 게 어때서? 그치, 한서야?” 강한서가 답장했다.“네가 말하면 음탕해 보여.” 한성우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답장을 보냈다.“너희 대체 언제 와? 늙은이들이 자꾸 나한테 여자 소개해 주겠대. 심심해 죽겠다고. 빨리 와서 나 대타 좀 서줘.” 강한서가 무뚝뚝하게 답장을 보냈다.“이미 결혼한 몸이라 그건 힘들어.” 한성우는 어이가 없었다.그는 속으로 와이프가 창문을 넘고 다니는데 결혼이라는 말을 잘도 한다고 생각했다.주강운이 회신했다.“이따가 누구 좀 데려갈게.”‘데리고 오면 오는 거지. 왜 예고는 한담?’ 한성우가 멈칫하더니 뭔가를 떠올리고 물었다.“여자야
심원과 강한서 모두 매혹적인 봉황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강한서의 눈은 일자로 뻗어나간 형태였고 심원의 눈은 위로 살짝 치켜올라간 모양이었다. 웃으면 살짝 올라가는 눈꼬리는 귀티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멈칫한 전연이 심원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가요.”전연을 태운 심원의 차가 이모네 국수를 향해 출발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린 탓인지 심원은 전연과 조잘조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심원은 자신과 비슷한 입맛과 취향을 가진 전연이 신기하기만 했다.그 탓인지 어떤 주제든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단순히 맞장구를 치기 위한 기계적인 리액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야 전연을 만나게 되어 아쉽다는 생각이 든 심원이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만약 우리가 더 일찍 만났다면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예요.”전연이 미소 지었다. “저는 지금도 늦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그 말에 대답하려던 심원은 연신 하품을 하는 전연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잠깐 눈 좀 붙여요. 아직 조금 더 가야 해요. 도착하면 깨울게요.”“네.”대답한 전연이 졸음이 가득한 눈을 감았다. 이모네 국수 앞에 도착했지만 전연은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전연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심원은 전연을 깨우지 않았다. 차의 시동도 끄지 않고 에어컨도 그대로 틀어놓은 채 안전벨트를 푼 심원이 조용히 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가 미리 주문을 했다. 심원이 차에서 내리자 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맑게 빛나는 눈빛은 졸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연이 휴대폰을 꺼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순조롭게 진행 중.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아.]곧 한성우가 답장했다. [이렇게 빨리?]전연: [상대하기 힘든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내 사진을 보고는 바로 발끈하던데?]한성우가 역시 대단하다는 의미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지금 어디야?]전연: [미래의 남편과 밥 먹으러 왔어. 우리도 서로 알아가야지.]한성우: [얼
전연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만약 제가 심원 씨가 좋아하시는 분과 사귈 수 있게 도와드린다면요?”심원은 그저 전연이 농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연의 표정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녀는 심원을 도와줄 테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다. 심원은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친화력이 좋은 전연은 사람의 이야기를 잘 끌어내는 매력이 있었다. 심원은 저도 모르는 사이 전연에게 송가람과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전연은 매일 같이 심원과 약속을 잡았다. 가끔은 공원에서 또 가끔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매번 송가람이었다. 신원은 자신과 송가람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전연에게 들려주었다. 전연은 심원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와 송가람을 이어줄 방법을 고민했다. 심원의 여자친구인 척 하게 된 것도 전연이 송가람을 자극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송가람은 전연이 예측했던 것처럼 먼저 심원에게 연락했다. 전연의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제가 다시 연락을 해야 해요? 아니면 또 인스타그램에 우리 사진을 올려서 질투를 유발할까요?”전연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금 전 송가람 씨 연락은 안 받으면서 바로 우리 사진을 올려버리면 그분도 자기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올린 사진이구나, 하고 눈치 챌 텐데 그럼 오빠가 저랑 사귀고 있다는 것도 안 믿을 거예요.”“콜백도 안 되고 사진도 안 되면 전 뭘 어떡해요?”전연이 웃으며 말했다. “콜백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빨리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생각해봐요. 전에 오빠가 먼저 연락했을 땐 매번 시간이 잔뜩 지나서야 다시 연락이 왔잖아요. 그럼 오빠는 답장을 기다리느라 속이 바짝 탔었죠?”심원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당연히 알죠. 그건 우리 여...”큼, 헛기침한 전연이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우리 여자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내 말 듣고 있어?”대답이 없는 송가람을 본 서해금이 언성을 높였다. 송가람이 재빨리 대답했다. “듣고 있어. 알았어.”창백해진 얼굴의 서해금을 본 송가람은 순간 한 가지 추측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고민도 없이 툭 던지듯 물었다. “엄마, 한현진이 바뀐 거 우연한 사고 맞아?”멈칫한 서해금이 송가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정말 그렇게 많은 우연이 있다고 생각해?”송가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얼굴로 서해금을 바라보던 송가람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서해금이 정리를 마친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송가람 앞으로 걸어간 서해금이 시선을 내려 송가람의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어떤 사람의 운명은 타고나는 거지만 또 어떤 사람은 본인이 직접 개척해 나가야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애를 쓴 건 넌 나처럼 피땀 흘리며 살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에 안주하면 안 돼. 내 말 알아들어?”송가람은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시선을 내린 그녀는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송가람은 줄곧 한현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동안 누린 관심과 행복은 전부 한현진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만약 한현진이 바뀌지 않았다면 서해금이 송병천과 결혼하고 송가람이 송병천의 딸로 살 기회가 있었을까?그 질문의 정답을 송가람은 마주할 자신도, 인정할 자신도 없었다. 한편, 전연이 전화를 끊자 더는 참을 수 없던 심원이 말했다. “휴대폰 이리 줘요. 가람이에게 전화해야겠어요.”전연이 심원의 손을 피하며 휴대폰을 뺏기려 하지 않았다. “안 돼요. 아직은 전화하면 안 돼요.”심원이 다급하게 얘기했다. “조금 이따 다시 전화하라면서요. 왜 지금은 또 안 된다는 거예요?”“콜백을 하긴 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금방 전화를 끊었는데 바로 다시 전화하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심원이 모르겠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생각하는데요?”전연이 말했
서해금은 첫 번째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한현진이라면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강한서의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에게 아이는 강한서를 잡는 패가 될 수는 있어도 자신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양시은 딸의 결혼식장에서 신미정의 계략으로 넘어진 한현진을 바짝 긴장한 채 안고 가는 강한서의 모습은 한현진의 임신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모두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유독 송가람과 서해금에게만 쉬쉬거렸다. 숨기는 이유가 어쩌면 한아람 죽음에 관한 의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해금은 불안해졌다. 당시 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더는 증인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서해금의 불안을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한현진이 돌아온 그 순간부터 서해금은 단 하루도 깊은 잠에 빠질 수가 없었다. 창백한 얼굴의 송가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한서 오빠가 기억 잃은 척 연기할 리가 없어. 한현진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해.”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한서가 정말 기억 상실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확신해?”“만약 기억을 잃은게 아니라면 오빠가 어떻게 날...”순간 멈칫한 송가람이 입술을 꾹 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무튼 오빠는 기억을 잃은게 확실해.”이상함을 감지한 서해금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강한서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아냐. 난 아무것도 안 했어.”송가람이 서해금의 눈빛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오빠 기억 회복을 도와주려고 제일 유명한 신경외과 교수님을 모셨었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날 속일 수는 있어도 의사를 속일 수는 없을 거잖아.”한참동안 서해금은 송가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자신은 서해금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짙게 난 손톱자국의 통증을 용기 삼아 송가
서해금이 개의치 않다는 듯 말했다. “어쩌다 한 번, 행운이 따랐던 것뿐이야. 한현진은 아직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야. 너야말로 계속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말거 문채영 씨 옆에서 제대로 배워. 두 번 다신 실망시키지 마.”서해금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송가람의 머릿속은 여전히 심원의 일로 가득 했다. “그, 새로 오신 기사님은 어때?”서해금이 슬그머니 물었다. “마음에 잘 맞아?”잔소리가 많던 중년의 남자를 떠올린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그래. 말이 좀 많은 것 같아. 계속 이것저것 물어서 귀찮아 죽겠어. 하지만 운전 실력은 좋은 것 같아.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해. 강아지처럼 말을 잘 들어.”그 말에 멈칫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송가람,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말 기억해?”움찔한 송가람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기억해.”서해금이 서류를 정리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말해봐.”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신분이 낮을 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고 내가 높은 자리에 있을 땐 상대방을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서해금이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넌 그 말을 지키고 있어?”아랫입술을 깨문 송가람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잘못했어.”“다신 잘못했다는 말 듣게 하지마.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게 그 말이야. 잘못했다고 말만하면 뭐 해! 달라지질 않는데! 송가람. 엄마 이젠 젊지 않아. 평생 네 곁을 지킬 수 없어. 어떤 일은 너도 이젠 혼자 해내야지.”고개를 숙인 송가람은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불쌍한 송가람의 모습에 서해금은 안쓰러우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없어 안쓰러웠고 자신의 좋은 유전자 대신 멍청힌 아빠를 닮은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송가람은 심지어 그녀의 아빠만큼 성실하지도 않았다. 만약 송병천과 아들딸이라도 낳을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상황에 끌
전연은 비꼬는 송가람의 말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저와 원이 오빠가 사귀기로 한지 며칠밖에 되지 않아서요. 오빠가 쑥스러움이 많고 내향적이라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아직 얘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원이 오빠와 많이 친하신 것 같은데 오빠에게서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오빠 동창이세요?”송가람은 더 이상 웃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맞다는 대답도, 아니라는 대답도 할 수 없어 그녀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나랑 심원이 무슨 사이인지는 심원에게 직접 물어요!”전연이 말했다.“오빠랑 가까운 사이 같으신데 제가 언니 카톡 추가해도 될까요? 친한 사이면 원이 오빠 취향을 잘 아실 거잖아요. 곧 오빠 생일이라 선물을 준비하고 싶은데 제가 아는 오빠 친구가 없어서요. 오빠에게 직접 물어보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요.”“언니가 알려주실래요?”송가람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까짓 게 뭔데.’하지만 자신이 고생해 길들은 강아지가 자신 몰래 여자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송가람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대답했다. “그래요. 연락처 저장해서 추가해요.”전연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언니.”해맑게 불린 언니라는 호칭에 송가람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전연이 곧 송가람에게 친구 추가를 신청했다. 전연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조금 전 심원의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사진이었다. 수락을 누른 송가람은 곧 전연의 인스타그램을 찾아냈다. 전연이 기본 그리드에 고정한 피드는 바로 심원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나도 드디어 달달한 연애 시작이다~]분노로 얼룩진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주현이 다시금 커피를 건네자 송가람은 탁, 커피를 쳐냈다. 뜨거운 커피가 주현의 몸에 흘러내렸고 그 고통에 주현이 비명을 질렀다. “팀장님?”송가람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물건을 쓸어버리며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꺼져! 당장 꺼지라고!”마침 송가람 사무실로 들어서며
멈칫한 한현진이 시선을 올려 은서하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 남았어요?”고개를 가로 저은 은서하가 서류철은 안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책상에 놓인 유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한현진이 주세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현이 문을 열고 송가람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서류가 여기저기로 널브러져 엉망진창인 모습이 주현의 눈에 들어왔다. 커피를 손에 든 주현은 뒤뚱거리며 서류를 피해 송가람 앞으로 다가갔다. 커피를 건넨 주현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여기 커피요.”송가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채팅방에서는 심원의 새로운 여자친구에 관해 얘기 중이었다. SNS는 하지도 않던 조용한 심원이 인스타그램에 여자친구와의 사진을 업로드 했다. 송가람의 친구들이 그 사진을 채팅방에 올리며 수다를 떨었다. [낯익은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도 아는 사람 맞아? 처음 보는 사람 같아.][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우리가 알만 한 사람은 아닐 거야. 심 대표님께서 아드님에게 찾아준 맞선 대상이 명문가 딸은 아니라고 들었어. 심원 씨가 외동이라 괜히 재벌가와 사돈을 맺었다가 대가 끊기게 될까 봐 컨트롤이 가능한 평범한 가정의 딸을 소개했다고 하던데.][그러니까 우리가 몰랐던 거겠지.][심 대표님과는 안 그래도 인연이 없었으니 몰랐던 것도 당연한 거지, 뭐. 가람이가 심원 씨와 동창에다 사이도 좋았잖아. 어쩌면 가람이는 심원 씨 여자친구가 누군지 알지도 몰라.”송가람이 심원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했다. 심원과 그 여자의 사진이 버젓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한 손에 밀크티를 쥐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포니테일을 한 채 카메라를 향해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아래 부분에서 뻗어 나온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다른 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남자친구의 시야에서 손을 맞잡은 여자친구의 모습
이어질 다음 경기는 조별 리그였다. 조향 대회의 조별 리그는 팀워크가 중요했다. 자유롭게 팀을 구성할 수 있었고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채택할 수도 있었다. 송가람은 당연히 문채영과 팀을 하려 했다. 문채영의 실력을 등에 업는다면 송가람은 무난히 다음 라운드로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한현진이 걱정되는 건 주세은이었다. 회의 전 한현진은 주세은에게 누구와 팀을 짤 것이 물었었다. 주세은은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뽑은 사람과 하겠다고 대답했다.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선정한 팀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안 맞는 사람과 팀이 되었다간 협력은커녕 오히려 팀원이 주세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잘못하다간 바로 탈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참가자 명단을 훑어보던 한현진은 어쩌면 이시연과 주세인이 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회사 내의 다른 참가자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만약 이시연이 이미 파트너를 정했다면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서로가 난감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다른 참가자의 이름을 확인한 한현진은 비교적 침착한 성격의 참가자 두 명의 이름에 동그라미 표식을 해두었다. 조금 이따 물어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이시연이 자몽 두 개를 들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님, 바쁘세요?”한현진이 서류철을 덮으며 대답했다. “아뇨. 무슨 일이에요?”이시연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몽을 한현진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저 대신 주세은 씨에게 저와 팀을 하면 어떨지 물어봐 주시겠어요?”한현진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시연 씨와 팀을 하겠다는 분이 없어요?”이시연이 난감함 표정을 지었다. “있긴 한데 제가 거절했어요. 전 주세은 씨와 팀을 하고 싶거든요. 전에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했을 때, 사실 저 깜짝 놀랐어요. 이번엔 예선에서도 바로 TOP 10에 들었잖아요.”“저와 성적이 비슷하니까 같이 힘을 합쳐서 포인
직원들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대회를 앞둔 시점에 갑자기 문채영을 스카우트해 송가람과 팀을 맺어준 목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참가자를 응원하기 위한 보너스라고 얘기했지만 상금의 80%는 우승자를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 20%의 상금도 TOP 10에 들어야만 일 인당 4000만 원씩 받을 수 있었다. 난이도가 극상에 가까운 미션에 성공해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국은 그저 겉모습만 화려한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한현진의 제안대로라면 20위 안에만 들어도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 송가람을 보너스 지급 대상에서도 제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참가자들이 보너스를 받을 기회는 자연히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6억의 우승 보너스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금이 높아지면 그만큼 도전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고 송가람까지 제외된 상황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도전 의식을 불태워볼 만했다. 각자의 생각을 가진 참가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굳이 투표를 진행하지 않아도 서해금은 이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올려 한현진을 바라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투표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저도 한 대표 제안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한 대표 제안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다들 원하는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애쓰길 바라요. 대회가 끝나면 제가 직접 파티를 열어 여러분께 보너스를 지급할 거예요.”서해금과 눈을 마주친 한현진이 그녀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럼 미리 여러분의 승리를 기원할게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회의실에 있던 참가자들도 하나둘 그녀를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에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분노로 들끓은 송가람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막 문을 열고 회의실을 나서던 송가람은 서류 심부름을 하러 온 비서와 부딪혔다. 서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