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말했다. “나랑 미주 둘이 사는데 무슨 집사가 필요해?”강한서가 말했다. “AI집사.”유현진이 움찔했다.“설마 루나?”강한서가 그녀의 말을 이었다. “루나 2.”루나는 강한서 회사에서 연구해 낸 고지능 로봇이었다. 첫 샘플을 강한서는 집으로 가져왔었다. 루나는 베이맥스를 닮았고 동글동글한 외모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강한서는 유현진에게 사용해 보면서 사용 도중 문제가 있으면 그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유현진은 자신이 첫 사용자인 것을 알고 아주 좋아했었다. 강한서를 도와 로봇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유현진은 로봇이 갖고 있는 기능을 일일이 체험했다. 루나의 청소 기능은 꽤 좋았다. 정원의 잔디나 꽃도 관리할 수 있었다. 유현진은 그 로봇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하루는 유현진이 로봇에게 지시를 내리고 놀러 나갔었는데 돌아오니 루나가 수영장에 뛰어들어 “사망”했었다. 강한서가 루나를 실험실로 가져와 데이터를 복구해 보니 유현진이 집을 나서면서 로봇에게 청소를 지시했다. 하지만 그날 수도관 수리 때문에 단수가 됐었고, 물을 찾을 수 없었던 루나는 정원의 수영장에 물을 가지러 갔다. 물이 기계에 대한 위해를 몰랐던 루나는 기계 전체가 물에 빠져버렸고 그렇게 망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bug 때문에 루나는 회수되어 새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니 판매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루나라는 말에 유현진의 관심은 반으로 감소하고 말았다. “욕조에 빠져서 나한테 구해달라고 하는 거 아냐?”강한서가 말했다. “절대 그럴 일 없어. 루나 2는 위기 보호 설정 기능이 추가됐어. 그리고 경보 장치도 생겼고. 혼자 사는 여자애한테 딱이야.”유현진은 자신감이 넘치는 강한서를 보고 조금 흔들렸다. “얼마야?”강한서가 웃어 보였다. “아직 발매 안 했어. 네가 첫 사용자야.”유현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왜 이 말이 난 날 낚기 위한 함정 같지?”지난번 그녀에서 사용해 보라고 했을 때 루나는 물에 빠져 사망했었고, 그
루나가 억울해하며 말했다. “전 고아가 아니에요. 당연히 아빠가 있죠~”차미주가 고개를 돌리더니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유현진에게 말했다. “이 장난꾸러기 꽤 재밌는걸.”유현진이 말했다. “지난번에 스스로 수영장에 뛰어들어서 고장 난 걸 알면 재밌다고 생각하지 못할걸.”루나가 바로 반박했다. “루나는 이제 물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아빠가 저한테 방수 재질을 사용하셨거든요. 루나를 학교도 다니게 했어요. 엄청 많은 걸 배웠다고요.”“너 학교도 다녀?”“인간 사회에 적응해야 하니까요. 여러분들이 배우는 건 저도 전부 배워야 해요.”루나가 유현진에게 물었다. “언니는 어느 대학교 졸업했어요~”유현진이 장난꾸러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공대 다녔어.”“네? 언니 공부 제대로 안 했어요? 공부를 잘했으면 당연히 저처럼 아이비리그에 갈 수 있었을 텐데.”유현진: …‘역시 강한서 그 개자식이 설계한 물건이야. 입이 방정이군.’루나와 강한서의 유일한 다른 점은 루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어린아이의 목소리를지녔다는 점일 것이다. 유현진을 “비웃은” 루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는 한주공과대학에 다녔어요, 아니면 다인공과대학?”유현진이 말했다. “MIT 다녔어.”루나: …역시 유현진이었다. 루나는 자기보다 학력이 높은 사람을 만나자 슬픈 듯 구석으로 가 충전하기 시작했다. 차미주는 옆에서 배가 아플 정도로 폭소했다. “현진아, 너도 참. 로봇이랑 그런 걸 따지고 있냐.”“쟤 아빠가 쟤를 저렇게 얄밉게 설계했잖아. 쟤도 성숙해져야지.”그러더니 소리쳤다. “충전 끝나면 바닥 좀 닦아.”루나가 억울한 듯 대답했다. “루나는 언니가 행복할 수 있게 노력할게요.”“순진하면서 얄미운 게 난 마음에 들어!”차미주가 말했다. “강한서 회사에서 발매 시작하면 나한테 하나 남겨달라고 해 줘. 엄마 드릴 거야.”유현진이 말했다. “이걸 아주머니한테 가져가.”차미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강한서가 너한테 주는 사랑의
신미정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집에 너무 오래 살고 있었기에 이미 이 집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사망한 후 정인월은 강한서를 데려가 자기 밑에서 키웠고 강민서는 신미정이 데려왔다. 강민서를 아끼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신의 인생을 위해 강민서를 곁에 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씨 가문에서 나와 재혼을 한다면, 그녀는 두 번 다시 강씨 가문과 같은 재벌 집의 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정인월이 그녀에게 재혼을 하고 싶으면 그녀에게 상응하는 돈을 줄 것이고 아이는 강씨 가문에서 키울 것이라고 했을 때, 신미정은 단호하게 자신이 아이를 직접 키우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반드시 남편의 마지막 뜻에 따라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는 절대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정인월이 돈을 준다고 했으니, 절대 적은 액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미정에게 부족한 건은 돈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필요한 건 바로 강씨 가문이 그녀에게 준 강씨 가문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그에 맞는 지위였다. 이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켜 주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에게 호화롭던 생활을 끝내고 평범했던 예전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강민서를 직접 키울 것을 선택했다. 정인월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고 당연히 그녀를 푸대접하지 않았다. 이 집도 당시 정인월이 신미정과 강민서가 살 수 있도록 사준 것이었다. 하지만 정인월은 신미정을 경계하기 위해 자신의 명의로 샀던 집을 강한서가 성인이 된 뒤 강한서의 명의로 변경해 준 것이다. 물론 그 일로 신미정은 한동안 언짢았지만 꽤 빨리 받아들였다. 강한서는 그녀의 아들이었다. 강한서의 명의든 자기 명의든,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설마 한서가 날 내쫓기야 하겠어?’그때 그녀는 절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강한서가 정말 그녀를 이 집에서 내쫓는 날이 올 줄
때문에 장난은 장난일 뿐, 민경하의 인성과 업무 능력에 대해서 직원들은 모두 인정했다. 강한서도 민경하를 존중해 주고 있는데, 신미정이 내뱉은 말은 확실히 듣기 거북했다. 하지만 민경하는 그녀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태연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사모님, 제가 정말 대표님의 개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전 말을 잘 듣는 개입니다. 주인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제가 왜 아무나 물어뜯겠어요?”신미정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개자식들! 강한서는 내 아들이야. 우리 모자가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어도 난 걔 엄마라고! 걔가 나한테 이렇게 대할 리가 없어! 내가 지금 한서한테 전화할 테니까, 너 딱 기다려!”민경하가 그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마음대로 하세요.”신미정이 굳은 얼굴로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거의 끝나갈 즈음, 강한서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신미정이 화를 꾹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서야, 민 실장이 사람들을 데리고 집에 왔어. 알고 있니?”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민 실장이 얘기 안 했어요? 제가 보낸 거예요.”신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어젯밤 분명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 집은 강씨 가문 소유의 부동산이에요. 거기 계속 사시면 다들 엄마가 아직도 강씨 가문을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재혼하시기 어려울 거예요.”“이 배은망덕한 놈!”신미정은 끓어오르는 화 때문에 가슴이 아파졌다. “널 낳고 기르고 다 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어? 이젠 다 커서 뭐든 혼자 할 수 있으니까 네 친엄마를 내쫓겠다는 거니?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네. 어머니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죠.”강한서는 신미정의 지겹도록 똑같은 레파토리를 더 이상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돈이 필요할 때면 늘 길러준 은혜를 들먹이곤 했다. 강한서는 매번 마음이 약해져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고, 그 때문
송민희는 단지 둘째네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을 뿐, 신미정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말을 마치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신미정이 강씨 가문에서 쫓겨나다니... 세상에 이렇게 좋은 소식이!’그녀가 미치지 않고서야 강단해에게 신미정을 도와주라고 할 리가 없었다!강단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휴대폰을 가로채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제가 왜요? 제 말이 사실이잖아요?”송민희가 화를 냈다. “민서가 사고 쳐서 우리 집에 왔고 한서는 걔를 잡겠다고 우리 집 문을 부수고 당신 아들을 다치게 만들었어요! 그 집안 일에 우리가 왜 끼어들어요? 해결은커녕 우리만 피해를 봤잖아요. 아무도 우리가 도와준 건 기억하지 않는다고요.”강단해가 입술을 짓이기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돼.”“전 이미 충분히 좋게 얘기했어요. 당신 형이 살아계셨으면 형님이 저희를 이렇게 대했겠어요? 제가 왜 미운 놈에게 떡까지 줘야 해요? 이 일이 만약 강씨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당신이 어떻게 돕든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그 사람들 일이잖아요. 저희가 왜 그 흙탕물에 뛰어들어야 해요?”“그리고 며칠 전, 이미 가람이와 차나 한 잔 하기로 해금 씨와 약속을 잡았었어요. 애들한테 자리를 마련해주려고요. 하지만 형님이 동창 모임을 하겠다는 한마디에 물거품이 됐어요!”“형님이 거기 아는 분이 몇이나 있어서요? 그냥 한서와 송가람을 이어주려고 그러는 것뿐이잖아요. 당신이 지금 형님 도와줘봤자, 좀 살 만해지면 저희부터 내칠 거예요!”강단해는 할 말이 없었다. 송민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신미정의 속셈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강한서의 세력은 이미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 송씨 가문과의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회사에서 강단해의 위치는 더 위태로워질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강단해가 입술을 달싹였다. “현우한테 송가람 양이랑 데이트 좀 하라고 해.”그의 말에 송민희
생각해 보니 정인월이 옷을 선물할 때가 된 듯했다. 다만...“조 매니저님, 혹시 모르세요?”유현진이 소개를 하는 남자의 말을 끊었다.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모른다는 말씀이신지?”유현진이 말했다. “전 이제 강씨 가문 사람이 아니에요. 이 옷들, 저한테 보내실 필요 없어요.”조 매니저가 말했다. “저희는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유현진은 이건 아마 정인월의 뜻일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조 매니저가 이곳으로 옷을 보낼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이혼하기 전에는 받아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정인월의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이혼했고, 선물을 받기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때문에 유현진은 조 매니저에게 말했다. “조 매니저님, 잠시만요. 전화 좀 할게요.”조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유현진은 펜션에 있는 정인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인월은 진씨와 낚시를 하고 있었다. 진씨가 유현진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하자 정인월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할머니, 저예요.”정인월이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보고 싶었어?”유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죠. 언제 돌아오세요?”“며칠 더 있으려고.”적어도 강민서가 나온 후여야 했다. 아니면 누군가가 기대를 버리지 못할 테니까. 정인월이 물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 있니?”“아, 네. 조금요.”유현진이 할 말을 정리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할머니, 조 매니저님께서 저한테 옷을 보내려고 오셨어요. 할머니께서 가게에 연락해서 가져가라고 해주세요. 저 옷 많아요. 그리고 오랫동안 촬영도 해야 하고, 옷 입을 시간도 없어요. 집에만 두다가 못 입게 되면 너무 아깝잖아요.”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던 정인월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부탁은 아마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은데.”“네?”“옷은 내가 보낸 게 아니야.”유현진이 멈칫했다. “예전엔 조 매니저님 통해서 보내셨잖아요.”“예전에도 내가 조 매니저를 시켜서
“사모님, 안녕하세요.”유현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강한서 바꿔주세요!”민경하는 옆에 앉아있는 어떤 대표를 흘끗 쳐다보더니 거짓말을 했다. “대표님 회의 중이세요. 무슨 일 있으시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전해 드릴게요.”유현진이 성질을 부렸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멋있어 보이는 줄 아냐고 물어봐요.”“멋있긴 개뿔! 순도 100%, 멍청이!”“순애보인 척하기는! 네가 얼마나 개자식인지 내가 모를 줄 알아?!”“병 주고 약 주면 다인 줄 알아? 꿈도 꾸지 마!”“강한서 이 바보, 멍청이!”...민경하는 유현진이 욕을 시작할 때부터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이혼 후 사모님이 어쩌다 대표님께 “친절한 안부”를 전하는데, 강한서가 못 들어서는 안 되니까. 강한서는 어두운 얼굴로 유현진이 평생토록 할 욕을 다 퍼붓는 것을 들었다. 회의 중인 척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억울함을 못 이기고 반박했을 것이다. 욕을 다 퍼부은 유현진은 꽉 막혔던 마음이 그제야 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됐어요. 전하지 마세요. 앞으로 더 이상 옷은 보내지 말라고만 전해줘요. 다 못 입는다고.”강한서의 굳었던 얼굴이 금세 풀렸다. ‘그런 말은 듣게 하고 싶지는 않나 봐. 아직 나한테 마음 있어.’민경하는 그의 옆에서 못 볼 꼴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팔불출 인증 완료.’전화를 끊은 유현진이 고개를 돌리니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큼”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저 평소엔 안 그래요.”사람들이 전부 침묵했다. ‘됐어. 고객은 왕이야.’비록 그 왕이 조금 다혈질이더라도. 조 매니저가 말했다. “현진 씨, 일단 피팅해보세요. 안 맞는 옷은 바로 바꾸겠습니다.”유현진이 말했다. “아니면 다 가져가시겠어요?”‘2, 30벌은 될 텐데, 저걸 언제 다 입어봐?’“이 옷들은 전부 현진 씨 사이즈에 맞게 제작된 겁니다.
조 매니저 일행을 돌려보낸 유현진은 피곤함이 몰려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차미주는 에너지가 넘쳐 휴드폰을 들고 옷들을 찍어댔다. 그녀는 사진을 찍으면서 말했다. “현진아, 강한서가 어쩌다 사람 노릇 좀 하는데, 왜 전화해서 욕해?”유현진이 태양혈을 꾹꾹 누르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나도 욕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는걸.”“선물을 보내면서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낸 거라고 하는 사람 본 적 있어?”차미주가 말했다. “한성우 그 개자식이 나한테 거북이를 보냈거든, 내가 밥을 해줬다고 조 선생님이 내게주는 감사의 선물이라면서. 내가 힘들게 일주일을 기르고 나서야 그게 개자식이 조 선생님 이름으로 나에게 장난한 거라는 걸 알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날 멍청이라고 놀리는 거였을 거야!”유현진: ...“상황이 다르잖아.”유현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강한서 이 자식은 입이 없어. 좋은 일을 하고도 얘기를 안 하거나, 아니면 대충 얼버무리고 말아. 자기 좋은 모습은 다른 사람이 기억도 못 하게.”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생활 중 강한서가 양보한 것이 꽤 많았다. 다만 그 당시 유현진은 강한서가 좋아하는 사람이 송민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많은 일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입이 무겁기가 벙어리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으니, 오해는 쌓여만 갔고 실망도 점점 커졌다. 그들의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강한서의 무거운 입이 시초였고, 그녀의 의심과 누군가의 이간질에 의해 오해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강한서를 욕한 것은 예전의 자신도 함께 욕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만 더 견디고, 조금만 더 얘기를 나눴더라면, 그들은 이혼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미주가 멈칫하더니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현진아, 나 한 가지 너한테 말 못 했던 거 있어.”“응?”“그러니까, 너랑 강한서가 이혼한다고 난리였을 때 말이야. 넌 우리 집에 있었고, 강한서가 내가 반지를 훔쳤다고 신고했었잖아.”“나중에 네가
강한서는 어쩐지 주혁이 한현진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돈이 부족한 상황에 전근까지 당한다면 어느 정도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주혁은 불평은커녕 오히려 한현진에게 아들이 그린 그림을 선물하기까지 한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주혁의 이력은 강한서가 봐도 전혀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굉장히 불운한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주혁의 아들은 선척적으로 청각장애를 가진 것이 아니라 납치사건 때문에 생긴 후유증이었다. 부잣집 아들을 납치하려던 납치범은 실수로 주혁의 아들을 납치했고 납치범은 돈을 요구했지만 부잣집에서는 인질을 구출하려는 경찰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납치범이 납치된 아이를 살해할 것을 고려해 경찰은 그들에게 아이를 잘못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돈을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납치범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다. 주혁의 아들은 비록 구조되었지만 의사로부터 청력을 잃었다는 선고를 받아야했다. 정신질환 가족력이 있던 주혁의 아내는 아들이 납치되기 전까진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납치사건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녀마저도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강한서가 주혁을 한현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주혁의 과거 때문이었다. 아들이 납치당하기 전의 주혁은 지금처럼 성실하고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도박 전과가 있었다. 매번 월급이 지급되면 주혁은 며칠 동안 사라졌다. 도박장이나 PC방에 파묻혀 가진 돈을 전부 잃고 나서야 다시 출근했다. 집에 있는 아이와 아내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고 아내가 발품 팔아 번 돈으로 겨우 가족의 생활을 유지했다. 주혁의 모든 변화는 그의 집에 사건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도박이나 하며 빈둥거리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모든 과거를 뉘우치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가족을 보살폈다. 주혁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주혁을 보며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스스로 잘못
한현진은 순간 주혁에게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던 주혁은 글을 잘 썼다. 정신질환이 있는 아내와 청력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그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아들을 국화와 서예 학원을 보낼 수 있었다. 아들의 인공 달팽이관을 마련하기 위해 급히 돈이 필요하다던 그는 한현진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다 걸려 직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들어가는 지출을 줄이지는 않았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본인은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자식에게는 제일 좋은 것만 주길 원하는 부모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혁의 가정형편으론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대체 어떤 면에서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콕 짚어 얘기하기는 어려웠다. 강한서를 만나고 나서도 한현진의 찌푸린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원율이 퇴근하고 민경하가 운전을 인계받았다. 조수석에 외투를 벗어던진 강한서는 뒤로 돌아가 한현진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왜 그래? 고민 있어?”강한서가 안전벨트를 하며 물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별 일 아냐.”“손에 그건 뭐야?”강한서가 물었다. 한현진이 그림을 강한서에게 펼쳐보였다. “기사님 아드님이 나에게 선물로 준 거야. 초콜릿을 준 적이 있는데 고맙다고 그려줬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어린애에게 작업 걸었어?”한현진이 입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기사님 아들은 이제 고작1 4살인데 무슨 작업을 걸어. 게다가 심지어 만난 적도 없다고. 전에 생일이라고 해서 기사님께 초콜릿을 가져가라고 했었어. 인사성이 좋은 아이라 답례를 준 거고.”강한서가 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래?”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흥, 콧소리를 냈다. 그림을 들고 한참을 자세히 살피던 강한서가 평가했다. “꽤 잘 그렸는데? 14살에 이 정도 수준이면 엄청난 거지.”한현진은 눈앞의 질투쟁이의 말을 무시했다.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너도 국화
은서하는 말없이 서류철을 품에 안고 돌아서 자리를 벗어났다. 회사에서 나온 한현진은 주혁과 마주쳤다. 그는 지금 회사의 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평소엔 회사의 보안을 책임졌고 가끔은 고객이나 임원의 주차를 돕기도 했다. 한현진이 주혁을 발견했을 때,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가까워오자 그는 경계하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한현진의 삭막한 눈빛과 눈이 마주쳤다. 멈칫하던 주혁이 어색하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안녕하세요.”한현진이 인사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인사팀에서 보안팀으로 전근시켜줬어요?”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현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업무에 적응은 했는지, 일은 할 만한지도 묻지 않았다. 강한서가 말한 것처럼, 쓸데없는 동정심은 내려놓았다. 모두에겐 각자의 인생이 있었고 그녀는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한현진은 가방을 메고 두 손은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꽂은 채 원율이 주차장에서 차를 가져와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옆에 서서 손가락을 꽉 움켜쥐던 주혁이 한참이 지나서야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대표님, 이거 제 아들이 그린 그림이에요. 대표님께 전해드리라고 해서요.”멈칫한 한현진은 고개를 돌리자 주혁이 품에서 깨끗한 편지 봉투를 꺼내 두 손 가지런히 한현진 앞에 내밀었다.입술을 짓이긴 한현진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현진은 입을 꾹 닫고 침묵을 지켰다. 그 사이 원율은 정문에 도착해 한현진 앞에 차를 세웠다. 혹여나 한현진이 그림을 받지 않을까, 주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제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도 달게 받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아이가 대표님께 전하는 조그만 마음이에요. 대표님께서 생일 선물로 주신 초콜릿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처음으로 받는 생일 선물이었거든요. 생일이 지나도 몇 번이고 그 초콜릿을 곱씹었어요. 그래서 대표님께 그림 선물로 고마움을 표현한 거라면서 저에게 꼭 전해달라고 했어요.
주현의 손을 잡은 것은 이시연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온 이시연이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 “회사에서 이게 지금 뭐하는 거예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주현이 이시연을 밀쳤다. “이 팀장님은 상관하지 마세요. 한 대표님을 대신해 이 배은망덕한 X를 혼내고 있는 중이니까.”은서하가 그에 질세라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핑계 대지 마세요. 대표님 라인에 붙으려다 대표님께서 선을 그으시니까 저에게 화풀이 하시는 거잖아요.”혹여 그 말이 송가람 귀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겁이 난 주현이 당황한 얼굴로 날뛰며 말했다. “누가 대표님 라인에 붙으려 했다는 거예요! 은혜를 갚을 줄도 모르면서 모함 좀 그만해요. 한 대표님께 돈을 받고도 서 대표님에게 붙은 건 은서하 씨 아니었어요?”은서하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한 대표님 돈 받은 적 없어요. 계속 루머를 퍼뜨리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어요.”이시연이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됐어요, 그만해요. 두 사람 다 적당히 해요. 매일 얼굴 마주칠 동료끼리,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주현은 고모인 성월이 서해금의 오른팔이라는 것을 등에 업고 평소 회사에서 동료들을 괴롭혔었다. 은서하처럼 나약한 성격의 직원은 전부 주현의 직장 내 괴롭힘이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그런 은서하가 주현에게 맞서는 것은 주현에겐 모욕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주현이 비꼬며 말했다. “이 팀장님, 말리지 마세요. 신고하라고 해요. 제가 무서워할 것 같아요? 배신이나 때리는 배은망덕한 인간과 대체 누가 친하게 지내려고 하겠어요? 언제 배신당할 지도 모르는데.”분노로 은서하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더는 입씨름을 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 이시연이 곧바로 은서하의 행동을 제지하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만해요! 회사가 두 사람 소란 피우는 곳인 줄 알아요?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다면 대표님께 찾아가요. 사무실에 계시니까!”그 말에 두 사람은 드디어 흥분을
한현진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전 송 팀장님이 아녜요. 아부 같은 건 저한텐 안 통해요. 그러니 괜히 제 심기를 건드려서 혼났다고 불평하지나 마세요.”주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한 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7층에 도착했다. 은서하와 주현을 비롯한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한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주현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드리운 증오를 숨기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부모를 잘 만난 것이 전부인 주제에, 다들 대표님이라고 불러주니까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그 말을 듣고 있던 동료가 조용히 눈치를 줬다. “듣겠어요. 그만해요.”주현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했다. “들으라고 해요. 깔린느 전체가 서 대표님 거라는 걸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다들 대표님이라고 부르며 비위나 맞춰주니까 정말 대표라도 된 줄 아나 보죠. 은서하 씨 같은 사람도 상황 파악 할 정도인데, 눈치가 없대요?”서로 눈을 마주친 직원들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지난달 급여명세서가 공개되었다. 한현진이 관리하는 부서 직원들의 급여는 평소보다 더 높았다. 심지어 한현진의 부서는 다른 부서보다 늘 더 빨리 퇴근했음에도 말이다. 이건 전부 한현진이 보너스 지급 방식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부서에 지급된 보너스 중 담당 대표의 인센티브를 따로 계산한 후 나머지를 부서 직원들이 균등하게 나누는 방식으로 지급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본인의 인센티브를 따로 계산하지 않고 보너스 전부를 부서 전 직원에게 균등하게 지급했다. 비록 한현진이 받을 보너스는 줄어들었지만 그 덕에 부서의 전 직원은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떤 큰 포부가 있든, 출근은 결국 돈을 벌어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한현진이 조향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는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현진이 실제로 그들의 월급을 올려
사실 그건 조금은 선을 넘는 질문이었다. 특히 한현진의 등에 칼을 꽂은 이 타이밍엔 더 그랬다. 한현진은 자신이 은서하의 편을 들어주었음에도 그녀가 더 이상 송가람의 죄를 추궁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집엔 아픈 노모까지 있는 여자 아이에게 직장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해금이 주는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그건 은서하가 처사를 제대로 못하는 일이 되었고 어쩌면 회사에서도 점점 더 어려운 처지에 내몰릴 수 있었다. 한현진은 은서하의 고충을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서운한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은서하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는 눈빛을 마주한 한현진은 저도 모르게 외할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화장실에 몰래 숨죽여 울던 은서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현진 역시 그런 무력한 순간은 경험했었기에 같은 처지에 놓인 은서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은서하를 용서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결국 냉담한 말투로 “네.”라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은서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에게 말을 더 붙이고 싶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주연과 다른 동료들이 들어오자 은서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주현이 한현진에게 인사를 건네곤 고개를 돌려 은서하를 보며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서하 씨, 월급을 추가 지급 받으셨다면서요. 대표님께서도 따로 위로금까지 챙겨주셨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전화위복 아닌가?”멈칫, 몸을 떤 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하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현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이어갔다. “송 팀장님은 그저 서하 씨에게 농담을 좀 한 것뿐인데 하필이면 한 대표님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을 만나서 상황이 이상하게 됐네요. 그대로 한 대표님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신 덕에 서하 씨는 위로금까지 받았잖아요. 서하 씨는 한 대표
“난 없어도 민 실장은 아는 사람이 많잖아. 형님 소개팅도 민 실장이 주선해준 거였어. 교사, 의사, 공무원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직종은 민 실장이 다 꾀고 있다고.”한현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민 실장님께 부탁 좀 해 봐. 나이는 25살에서 35살 사이, 초혼에 직업은 안정적이고 반듯한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몇 명이든 상관없이 전부 소개해 달라고 해. 미남계로 혼을 쏙 빼서 전부 내 사람으로 만들고 나면 민 실장님 보너스 두둑이 챙겨줘야지.”강한서가 웃음기 가득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이따 민 실장한테 얘기할게.”강민서의 보고서를 수정해주며 멘탈이 붕괴된 민경하는 연이어 몇 번이나 재채기를 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에 등골이 오싹해진 민경하는 순간 휴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시간을 확인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물었다. “나 생일 파티 해주러 가는 거야?”에이, 감탄사를 내뱉은 한현진이 화난 척 말했다. “사람이 무드 없긴. 알아도 모른 척 해야지. 눈치가 없어. 기대감이 완전 사라졌잖아.”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했어. 처음부터 다시 해. 이번엔 내가 제대로 대답할게.”한현진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어딜? 완전 좋아. 너무 기대된다.”한현진: ...“그냥 닥쳐.”강한서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뭘 할지 알아도 기대가 되는 건 똑같아.”말하며 잠시 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 생일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야. 다음은 둘이 아니라 넷일 테니까. 마지막이니까 소중하게 여겨야지.”한현진이 눈웃음 지었다. “괜찮아. 내년에도 아이들은 집에 두고 우리 둘이 보내면 돼.”한현진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이젠 가서 일 봐. 좀 이따 만나, 여보.”전화를 끊은 한현진
강한서는 저돌적인 여자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로 한현진을 화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현진에게 사건의 전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넌 내가 너 몰래 선을 본다고 생각해서 부계정으로 날 추가해 불륜의 증거라도 잡으려고 했던 거야?”강한서가 곧바로 부정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어떻게 널 믿지 않을 수 있겠어?”“그럼 왜 부계정으로 날 속인 거야?!”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 아주머니께서 네가 7, 8명의 연락처를 가져갔다고 하니까 네가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어.”한현진이 불퉁하게 말했다. “연락처를 왜 교환했겠어? 너도 봤잖아! 널 바꿔버릴까, 고민하고 있었어.”본인의 잘못임을 잘 알고 있던 강한서는 나지막이 반성했다. “현진아, 정말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런게 아니야. 난 그냥 질투가 조금 나서 그랬어. 외삼촌과 숙모님께서 너에게 그렇게 많은 맞선 상대를 소개해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야 난 어른들이 날 이렇게까지 안 좋아하시는 건지 알게 돼서 속상했어.”그 말 한 마디는 한현진의 화를 삭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렇게까지 날 안 좋아한다는 말에 한현진은 심지어 마음이 아려왔다.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외삼촌과 숙모는 아직 네가 기억을 회복한 걸 모르시잖아. 두 분은 우리가 이미 끝난 사이라고 생각하고 계셔. 다들 널 안 좋아하는 게 아냐. 게다가 그 사람들은 외삼촌과 숙모가 먼저 소개해 주겠다고 하신게 아니야. 내가 좋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거야.”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네가 먼저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다고?”한현진이 말했다.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잠시 후,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영상 하나를 보냈다. 강한서는 그 영상으로 한현진의 카톡에는 조금 전과 같은 [친목 모임] 그룹 채팅방이 7 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그룹 채팅방에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나머지 멤버는 조금 전 채팅방에 있던 멤버들
한현진이 말했다. [허연석 씨, 저에게 솔로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들어오실래요? 다들 젊은 분들이고 개인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셔서 채팅방에서 마음 놓고 얘기를 나누셔도 돼요. 나중에 친목회가 있을 때면 참석하셔도 되고요.]강한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강한서가 대답했다. [좋아요.]그렇게 한현진은 강한서를 [친목 다짐 7번 방]이라는 이름의 그룹 채팅방에 초대되었다. 강한서가 채팅방에 초대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열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강한서는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곧이어 그의 말괄량이 아내인 한현진이 그룹 공지를 올렸다. 공지엔 강한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개인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강한서가 공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이 그룹 채팅방은 총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강한서는 유일한 남자 멤버였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게다가 채팅방에 있는 전원이 깔린느의 직원이었다. 어리둥절한 강한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쯤, 채팅방에서는 이미 한 여자 아이가 먼저 다가와 강한서에게 말을 걸었다. A: [허연석 씨는 한주가 고향이세요?]강한서가 예의상 그렇다고 대답했다. A: [실례지만 키가 몇이세요?]강한서: 187B: [완전 크시네요!]C: [여자친구가 160cm여도 괜찮으세요?]D: [1살 연상도 괜찮아요?]E: [가영언니(D)가 이렇게 남자 분께 먼저 말 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C: [이번 남자 분은 조건이 너무 좋잖아요. 조건 좋은 사람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D: [한평생 착하게 살았으니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날 때도 됐어.]A: [언니들, 동생들에게 양보 좀 해요. 지금까지 모태솔로라고요. 연애 좀 하게 해줘요!]강한서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남자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들에게 무차별적인 유혹을 당하고 있자니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젠장,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야.’강한서는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