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집에 너무 오래 살고 있었기에 이미 이 집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사망한 후 정인월은 강한서를 데려가 자기 밑에서 키웠고 강민서는 신미정이 데려왔다. 강민서를 아끼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신의 인생을 위해 강민서를 곁에 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씨 가문에서 나와 재혼을 한다면, 그녀는 두 번 다시 강씨 가문과 같은 재벌 집의 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정인월이 그녀에게 재혼을 하고 싶으면 그녀에게 상응하는 돈을 줄 것이고 아이는 강씨 가문에서 키울 것이라고 했을 때, 신미정은 단호하게 자신이 아이를 직접 키우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반드시 남편의 마지막 뜻에 따라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는 절대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정인월이 돈을 준다고 했으니, 절대 적은 액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미정에게 부족한 건은 돈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필요한 건 바로 강씨 가문이 그녀에게 준 강씨 가문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그에 맞는 지위였다. 이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켜 주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에게 호화롭던 생활을 끝내고 평범했던 예전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강민서를 직접 키울 것을 선택했다. 정인월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고 당연히 그녀를 푸대접하지 않았다. 이 집도 당시 정인월이 신미정과 강민서가 살 수 있도록 사준 것이었다. 하지만 정인월은 신미정을 경계하기 위해 자신의 명의로 샀던 집을 강한서가 성인이 된 뒤 강한서의 명의로 변경해 준 것이다. 물론 그 일로 신미정은 한동안 언짢았지만 꽤 빨리 받아들였다. 강한서는 그녀의 아들이었다. 강한서의 명의든 자기 명의든,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설마 한서가 날 내쫓기야 하겠어?’그때 그녀는 절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강한서가 정말 그녀를 이 집에서 내쫓는 날이 올 줄
때문에 장난은 장난일 뿐, 민경하의 인성과 업무 능력에 대해서 직원들은 모두 인정했다. 강한서도 민경하를 존중해 주고 있는데, 신미정이 내뱉은 말은 확실히 듣기 거북했다. 하지만 민경하는 그녀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태연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사모님, 제가 정말 대표님의 개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전 말을 잘 듣는 개입니다. 주인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제가 왜 아무나 물어뜯겠어요?”신미정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개자식들! 강한서는 내 아들이야. 우리 모자가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어도 난 걔 엄마라고! 걔가 나한테 이렇게 대할 리가 없어! 내가 지금 한서한테 전화할 테니까, 너 딱 기다려!”민경하가 그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마음대로 하세요.”신미정이 굳은 얼굴로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거의 끝나갈 즈음, 강한서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신미정이 화를 꾹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서야, 민 실장이 사람들을 데리고 집에 왔어. 알고 있니?”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민 실장이 얘기 안 했어요? 제가 보낸 거예요.”신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어젯밤 분명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 집은 강씨 가문 소유의 부동산이에요. 거기 계속 사시면 다들 엄마가 아직도 강씨 가문을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재혼하시기 어려울 거예요.”“이 배은망덕한 놈!”신미정은 끓어오르는 화 때문에 가슴이 아파졌다. “널 낳고 기르고 다 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어? 이젠 다 커서 뭐든 혼자 할 수 있으니까 네 친엄마를 내쫓겠다는 거니?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네. 어머니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죠.”강한서는 신미정의 지겹도록 똑같은 레파토리를 더 이상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돈이 필요할 때면 늘 길러준 은혜를 들먹이곤 했다. 강한서는 매번 마음이 약해져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고, 그 때문
송민희는 단지 둘째네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을 뿐, 신미정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말을 마치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신미정이 강씨 가문에서 쫓겨나다니... 세상에 이렇게 좋은 소식이!’그녀가 미치지 않고서야 강단해에게 신미정을 도와주라고 할 리가 없었다!강단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휴대폰을 가로채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제가 왜요? 제 말이 사실이잖아요?”송민희가 화를 냈다. “민서가 사고 쳐서 우리 집에 왔고 한서는 걔를 잡겠다고 우리 집 문을 부수고 당신 아들을 다치게 만들었어요! 그 집안 일에 우리가 왜 끼어들어요? 해결은커녕 우리만 피해를 봤잖아요. 아무도 우리가 도와준 건 기억하지 않는다고요.”강단해가 입술을 짓이기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돼.”“전 이미 충분히 좋게 얘기했어요. 당신 형이 살아계셨으면 형님이 저희를 이렇게 대했겠어요? 제가 왜 미운 놈에게 떡까지 줘야 해요? 이 일이 만약 강씨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당신이 어떻게 돕든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그 사람들 일이잖아요. 저희가 왜 그 흙탕물에 뛰어들어야 해요?”“그리고 며칠 전, 이미 가람이와 차나 한 잔 하기로 해금 씨와 약속을 잡았었어요. 애들한테 자리를 마련해주려고요. 하지만 형님이 동창 모임을 하겠다는 한마디에 물거품이 됐어요!”“형님이 거기 아는 분이 몇이나 있어서요? 그냥 한서와 송가람을 이어주려고 그러는 것뿐이잖아요. 당신이 지금 형님 도와줘봤자, 좀 살 만해지면 저희부터 내칠 거예요!”강단해는 할 말이 없었다. 송민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신미정의 속셈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강한서의 세력은 이미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 송씨 가문과의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회사에서 강단해의 위치는 더 위태로워질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강단해가 입술을 달싹였다. “현우한테 송가람 양이랑 데이트 좀 하라고 해.”그의 말에 송민희
생각해 보니 정인월이 옷을 선물할 때가 된 듯했다. 다만...“조 매니저님, 혹시 모르세요?”유현진이 소개를 하는 남자의 말을 끊었다.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모른다는 말씀이신지?”유현진이 말했다. “전 이제 강씨 가문 사람이 아니에요. 이 옷들, 저한테 보내실 필요 없어요.”조 매니저가 말했다. “저희는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유현진은 이건 아마 정인월의 뜻일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조 매니저가 이곳으로 옷을 보낼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이혼하기 전에는 받아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정인월의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이혼했고, 선물을 받기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때문에 유현진은 조 매니저에게 말했다. “조 매니저님, 잠시만요. 전화 좀 할게요.”조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유현진은 펜션에 있는 정인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인월은 진씨와 낚시를 하고 있었다. 진씨가 유현진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하자 정인월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할머니, 저예요.”정인월이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보고 싶었어?”유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죠. 언제 돌아오세요?”“며칠 더 있으려고.”적어도 강민서가 나온 후여야 했다. 아니면 누군가가 기대를 버리지 못할 테니까. 정인월이 물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 있니?”“아, 네. 조금요.”유현진이 할 말을 정리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할머니, 조 매니저님께서 저한테 옷을 보내려고 오셨어요. 할머니께서 가게에 연락해서 가져가라고 해주세요. 저 옷 많아요. 그리고 오랫동안 촬영도 해야 하고, 옷 입을 시간도 없어요. 집에만 두다가 못 입게 되면 너무 아깝잖아요.”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던 정인월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부탁은 아마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은데.”“네?”“옷은 내가 보낸 게 아니야.”유현진이 멈칫했다. “예전엔 조 매니저님 통해서 보내셨잖아요.”“예전에도 내가 조 매니저를 시켜서
“사모님, 안녕하세요.”유현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강한서 바꿔주세요!”민경하는 옆에 앉아있는 어떤 대표를 흘끗 쳐다보더니 거짓말을 했다. “대표님 회의 중이세요. 무슨 일 있으시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전해 드릴게요.”유현진이 성질을 부렸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멋있어 보이는 줄 아냐고 물어봐요.”“멋있긴 개뿔! 순도 100%, 멍청이!”“순애보인 척하기는! 네가 얼마나 개자식인지 내가 모를 줄 알아?!”“병 주고 약 주면 다인 줄 알아? 꿈도 꾸지 마!”“강한서 이 바보, 멍청이!”...민경하는 유현진이 욕을 시작할 때부터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이혼 후 사모님이 어쩌다 대표님께 “친절한 안부”를 전하는데, 강한서가 못 들어서는 안 되니까. 강한서는 어두운 얼굴로 유현진이 평생토록 할 욕을 다 퍼붓는 것을 들었다. 회의 중인 척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억울함을 못 이기고 반박했을 것이다. 욕을 다 퍼부은 유현진은 꽉 막혔던 마음이 그제야 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됐어요. 전하지 마세요. 앞으로 더 이상 옷은 보내지 말라고만 전해줘요. 다 못 입는다고.”강한서의 굳었던 얼굴이 금세 풀렸다. ‘그런 말은 듣게 하고 싶지는 않나 봐. 아직 나한테 마음 있어.’민경하는 그의 옆에서 못 볼 꼴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팔불출 인증 완료.’전화를 끊은 유현진이 고개를 돌리니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큼”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저 평소엔 안 그래요.”사람들이 전부 침묵했다. ‘됐어. 고객은 왕이야.’비록 그 왕이 조금 다혈질이더라도. 조 매니저가 말했다. “현진 씨, 일단 피팅해보세요. 안 맞는 옷은 바로 바꾸겠습니다.”유현진이 말했다. “아니면 다 가져가시겠어요?”‘2, 30벌은 될 텐데, 저걸 언제 다 입어봐?’“이 옷들은 전부 현진 씨 사이즈에 맞게 제작된 겁니다.
조 매니저 일행을 돌려보낸 유현진은 피곤함이 몰려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차미주는 에너지가 넘쳐 휴드폰을 들고 옷들을 찍어댔다. 그녀는 사진을 찍으면서 말했다. “현진아, 강한서가 어쩌다 사람 노릇 좀 하는데, 왜 전화해서 욕해?”유현진이 태양혈을 꾹꾹 누르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나도 욕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는걸.”“선물을 보내면서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낸 거라고 하는 사람 본 적 있어?”차미주가 말했다. “한성우 그 개자식이 나한테 거북이를 보냈거든, 내가 밥을 해줬다고 조 선생님이 내게주는 감사의 선물이라면서. 내가 힘들게 일주일을 기르고 나서야 그게 개자식이 조 선생님 이름으로 나에게 장난한 거라는 걸 알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날 멍청이라고 놀리는 거였을 거야!”유현진: ...“상황이 다르잖아.”유현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강한서 이 자식은 입이 없어. 좋은 일을 하고도 얘기를 안 하거나, 아니면 대충 얼버무리고 말아. 자기 좋은 모습은 다른 사람이 기억도 못 하게.”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생활 중 강한서가 양보한 것이 꽤 많았다. 다만 그 당시 유현진은 강한서가 좋아하는 사람이 송민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많은 일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입이 무겁기가 벙어리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으니, 오해는 쌓여만 갔고 실망도 점점 커졌다. 그들의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강한서의 무거운 입이 시초였고, 그녀의 의심과 누군가의 이간질에 의해 오해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강한서를 욕한 것은 예전의 자신도 함께 욕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만 더 견디고, 조금만 더 얘기를 나눴더라면, 그들은 이혼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미주가 멈칫하더니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현진아, 나 한 가지 너한테 말 못 했던 거 있어.”“응?”“그러니까, 너랑 강한서가 이혼한다고 난리였을 때 말이야. 넌 우리 집에 있었고, 강한서가 내가 반지를 훔쳤다고 신고했었잖아.”“나중에 네가
유현진이 침묵했다. 확실히 강한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장난으로 108개의 다이아몬드가 달린 목걸이를 갖고 싶다고 말을 해도 강한서는 정말 그녀에게 그런 목걸이를 찾아 선물해 주었다. 유현진은 마음이 널뛰고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왜 이렇게 바보 같아.”차미주는 오히려 또 다른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전남친이 정말 강 대표보다 잘생겼어?”유현진: ...루나가 다가와 차를 따랐다. 유현진은 컵을 옆으로 밀며 태연하게 말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한 명 사귀었는데 2주 만에 헤어지고 진작 연락 안 했지.”‘그리고 누가 강한서 얼굴이랑 비교가 되겠어?’ 한성에 있는 강한서는 휴대폰으로 피드백 데이터를 보며 우울해하고 있었다. ‘첫사랑이 있었다니!’민경하는 어두워진 강한서의 얼굴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차라리 데이터 피드백 끄세요.”민경하는 당시에도 강한서에서 데이터 피드백을 끌 것을 제안했다. 개인 사찰은 둘째치고 유현진의 입은 필터를 걸치지 않고 말을 내뱉으니 그녀의 얘기를 오래 들었다간 강한서의 혈압이 올라갈지도 모를 일이었다.‘이것 봐, 업보가 얼마나 빨리 왔어.’다행히 루나의 피드백 시스템은 하루 종일 모든 것을 감청하지는 않았다. 루나가 유현진과 반경 2M 내에 있을 때만 유현진의 말을 들을 수 있었고 평소에는 피드백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강한서는 아마 하루 종일 화가 날 수도 있었다. 강한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현진이 안전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그래요,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하세요. 전 이미 익숙해졌거든요.’오후가 되자 안창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한열의 상처가 이제 거의 다 나았으니 제작진이 내일 아침 병문안을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유현진에게 일정을 알려주며 그녀더러 알아서 선물을 가져오라고 했고 사진을 찍어야 하니 적당히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유현진은 차미주와 병문안할 때 무엇을 가져가면 좋을지
카이엔의 가격은 2억 원 정도였다. 송민영 정도의 연예인에게는 눈에 차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에게 카이엔은 꽤 사치스러운 차였다. 방이진 본인은 아우디 A7을 갖고 있었다. 도석문이 사준 것이었다. 그녀의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정기 차량 정비 등 관리를 하기엔 버거웠다. 그러니 유현진의 카이엔을 본 그녀는 당연히 유현진의 스폰서가 사준 차이리라 생각했다. 은근히 비꼬면서도 방이진은 유현진을 질투했다. 전에 그녀가 유현진과 그녀의 스폰서 사진을 퍼뜨렸을 때, 한성이 나서서 해명해 준 덕에 유현진이 루머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방이진은 여전히 그날 밤 유현진을 데리고 나간 사람이 그녀의 스폰서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누가 그 저녁에 비즈니스를 해?’‘그 비즈니스가 제대로 된 비즈니스이기나 하겠어?’방이진이 유현진에게 더 적의를 보이는 것은, 그녀가 방이진의 역할을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송민영 알레르기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방이진은 송민영에게 커피를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송민영 팬들의 악플에 시달렸었다. 다행히 송민영이 나서서 해명해 주어 조용히 넘어갔다. 만약 송민영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누명을 벗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그 덕에 송민영은 요즘 그녀와 자주 연락했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송민영을 섭외했는데 송민영이 방이진을 PD에게 추천했다. 그리고 오늘 한열의 병문안도 송민영이 먼저 데리러 오겠다고 했고, 오는 길에 송민영은 방이진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방이진의 팔로워 수가 급증가하게 되었다. 하긴, 유명 연예인에게 빌붙을 기회를 누구 마다하겠는가?잔뜩 비꼬는 방이진을 유현진은 그저 가볍게 쓱 훑어볼 뿐이었다. 방이진은 유현진이 당연히 자신의 말에 반박할 줄 알았다. 하지만 유현진은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들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이진의 곁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심지어 방이진의 멍청한 말에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송민준은 매주 서너 번씩 주승관을 찾아왔다. 말도 많고 멍청한 데다 시끄럽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매번 재미없는 얘기만 늘어놓다 마지막은 꼭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내 동생도 이렇게 컸으면 세은이만큼 귀여웠을 거예요.”그 후 여동생이 아파서 송민준은 두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주승관은 주세은과 함께 송민준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그의 여동생인 송가람을 만났다. 송민준의 말과 달리 주세은은 그의 여동생이 귀엽기는커녕 오히려 멍청하다고 느꼈다. 송민준과 비슷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주세은과 주승관을 배웅하며 송민준은 주세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 “양심도 없는 꼬맹아. 의사에겐 오빠라고 하면서 우리 알고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오빠라고 안 불러?”주세은이 대답했다. “멍청하니까요.”그 말에 송민주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마치 못 들을 충격적인 말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세은은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한 거 맞잖아. 6개월 동안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하나 따지 못하다니. 대체 뭘 배운 거야.’주세은의 말에 자극을 받은 송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면 날 오빠라고 부를 거야?”주세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나보다 똑똑하겠어? 아빠가 가르쳐준 건 이젠 나도 거꾸로 외울 수 있는 수준인데도 아직 기억하지 못하잖아.’송민준이 말했다. “그럼 내가 문제 낼게. 네가 정답을 맞힐 수 있으면 난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인정할게. 하지만 만약 네가 틀리면 앞으론 날 볼 때마다 얌전히 오빠라고 불러.”주세은이 송민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송민준이 말했다.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을까?”“...”“모르겠어?”빨갛게 얼굴을 붉히던 주세은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있는데요?”송민준이 씩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머리에 붙어 있는 만큼.”“...”자신에게 농락당해 얼굴이
송가람은 약 올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나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진 씨는 뭔데 뿌듯해하는 거예요. 현진 씨가 제조한 것도 아니잖아요.”한현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세은이는 제가 특례로 입사시킨 천재잖아요. 제가 왜 뿌듯하면 안 되는 거예요?”말하며 한현진은 서해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 대표님,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했으니 이젠 억울하게 오일을 깨뜨렸다는 누명을 쓴 일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그리고 서하 씨의 보너스 삭감이 정말 규정에 따란 이행된 건지, 아니면 누군가 그걸 빌미로 사적인 화풀이를 하려고 한 건지 회사 감사위원회에 조사를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한현진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향이 비슷하긴 하지만 사용 여부에 대해선 테스트를 진행해 봐야 해.”한현진이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일단 오일을 깨뜨린 일부터 조사하시죠.”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해금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경찰이 도착했어요. 누군가 회사의 재물손괴가 있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고 신고를 해 조사하러 왔다고 하네요.”서해금이 휙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아무래도 경찰에게 맡기는 편이 효율적인 것 같아서요. 값비싼 물건인 만큼 만에 하나 범인을 색출하지 못한다면 저희가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잖아요. 제가 소유하고 있는 지분이 제일 많으니 손실을 제일 많이 보는 것도 저예요. 그러니 저도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린 거예요. 이해하시죠?”서해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현진은 지금의 서해금은 어쩌면 옆에 놓은 물을 자신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현진은 성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해금이 손을 움직이는 순간 성월의 등 뒤로 숨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서해금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신고까지 한 거냐며 난리를 피우는 송가람과 달리 서해금은 몸을 일으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곧 아무
[한 대표님이요...]채팅방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물었다. [한 대표님, 돈을 이렇게 많이 거셨다가 지면 어쩌시려고요.]한현진이 대답했다. [한 번 걸어보는 거죠. 돈방석에 앉게 될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채팅방은 곧 [대표님, 쿨하시네요.]라는 문자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몇십 명의 사람들이 실패에 베팅했다. 심지어 돈을 더 거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딜러가 또 말했다. [송 팀장님께 실패에 2000만 원을 거셨어요.]멈칫한 한현진은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은 마치 한현진이 자신을 쳐다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은 송가람이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말했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미소를 짓던 한현진이 입 모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물었다. “사기당한 40억은 돌려받았어요?”송가람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버럭 화를 내려던 송가람은 자신을 쳐다보는 서해금의 시선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세은은 매번 제조해 낸 오일의 향에 따라 원료의 비율을 조절했다. 1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10가지가 넘는 샘플을 만들어냈지만 넘버 S 오일에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직 없었다. 서해금은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주세은이 시도한 비율은 서해금의 제조 방안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던 샘플과 비슷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오일의 비율을 조절했다. 그러니 주세은이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리가 없었다. 현장에서 제조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전교 일 등인 척하는 전교 꼴찌를 지켜보는 기분이네요. 대체 제가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죠?”넘버 S의 성분 분석에 참여했던 사람이 말했다. “세은 씨가 정확한 오일을 고르긴 했어요. 정말 천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저 우연일 뿐이었네요.”“한 대표님께서 성공에 2000만 원이나 거셨던데 그 돈이
주세은이 제조에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 송가람은 벌써 냉소적인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꽤 전문가답네요. 현진 씨는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하려면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한현진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늦어서 2시간이요. 세은이가 그랬잖아요. 청력에 문제 있어요?”송가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2시간 안에 성공한다면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회사는 불필요한 사람을 키워줄 이유가 없거든요.”한현진이 냉담한 태도로 받아쳤다. “줄곧 필요 없는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었잖아요.”멈칫하던 송가람은 그제야 한현진이 말 한 필요 없는 사람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송가람이 한현진을 반박하려는데 서해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보려거든 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 사람은 나가.”‘얘는 철이 안 들어! 하필 지금 여기서 한현진과 설전을 벌여야겠어?’송가람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녀는 주세은이 창피를 당하기만을 기다렸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주세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제조에 성공해도 걱정, 실패해도 걱정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제조에 성공해 너무 일찍 실력을 드러낸다면 서해금의 경계 대상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대부분은 주세은이 우스운 꼴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낙하산으로 들어온 어린 꼬맹이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것이라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못을 인정하는 게 나을 텐데요.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서 제조에 실패하면 얼마나 창피해요.”“오일을 제조하겠다는 건 핑계고 그저 나대고 싶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전 회사에 저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지금 어린 친구들은 너무 허황한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니까요.”...그나마 눈치를 보며 말을 내뱉는 현장의 사람들과 다르게 단체 채
물론 서해금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꼬맹이에게 그 오일을 제조할 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넘버 S 오일은 한아람이 세상을 뜨기 전 제조해 낸 것이었다. 당시엔 오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해금도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회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해금은 그 오일을 제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향사들과 수천 가지가 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녀는 심지어 화학성분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한아람이 만든 오일을 재현할 수 없었다. 서해금이 재현해 낸 오일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을 때도 딱 2%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2%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향수의 향기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서해금은 넘버 S 오일을 장기 보관할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오일의 휘발을 감소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노력으로도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오일을 주세은이 향만 맡고 제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기회를 줘야 했다. 어차피 서해금은 애초부터 주세은의 입사를 반대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그 눈은 보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 기회에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던 서해금이 말했다. “그럼 너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게.”“아뇨.”주세은이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대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에 주세은을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풍을 떠는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닌 바보를 보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주세운이 두 시간 사이 오일을 제조해 낸다면 그건 회사의 모든 조향사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한현진은 스르륵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세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건 어때?”‘만약 제조에 실패해 서해금이 이 기회를 빌려 회사에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오빠에겐 뭐라고
주세은의 말 한마디에 현장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물론 한현진도 멍해졌다. ‘어린애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도 하네.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서해금도 지금까지 한 병밖에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던데.’만약 오일의 제조는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해 서해금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 이상 오일의 제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의 많은 조향사들은 넘버 S 오일을 본 적이 있었다. 만약 정말 마케팅에 불과하다면 진작 들켰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경쟁자로 가득한 이 업계에 이런 비밀로 캐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말 제조가 어려운 오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껏해야 배상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세은은 말을 내뱉었고 만약 서해금이 정말 주세은에게 제조를 맡긴 후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한현진은 정말 주세은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MZ는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지금 주세은에 대한 한현진의 평가는 그나마 무난한 편이었다. 주위에 몰려 구경 중이던 직원들은 한현진보다 훨씬 직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음식 양념장이라도 만드는 건 줄 아나 봐.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깔린느가 지금껏 향수 업계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어? 진작 라이벌 회사에 뺏겼을 거야.”“서 대표님도 본인이 제조하셨지만 다시 똑같은 오일을 만들지는 못하셨어요. 이제 갓 졸업한 어린 꼬맹이가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예요?”“하룻밤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잖아요.”“만약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제 손에 지지겠어요.”송가람의 얼굴에 은은한 멸시가 감돌았다. 아마도 주세은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본인이 직접 불구덩이에 뛰어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현진은 마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온 학부모 같았다.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사
한현진은 말하며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전 주주의 신분으로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니도 세은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임원인 누군가의 연줄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저와 세은이를 제약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언니와 서 대표님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송가람은 논리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현진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한 방이 되었다. 낄린느의 창시자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입사한 직원이 알고 있는 회사의 대표는 서해금이 전부였다. 깔린느의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서해금을 깔린느의 창시자인 듯 추앙하고 있었다. 예전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경력 2, 30년 이상의 고참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깔린느가 모든 위기를 헤치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부 서해금의 공로로 알고 있었다. 설사 한현진이 회사의 대표로 취임했어도 다들 서해금이 옛정을 생각해 파트너였던 사람의 딸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월이든 송가람이든 한현진의 얘기만 나오면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조차 않던 창시자인 한아람은 애초부터 깔린느의 최대 주주였고 심지어 그녀는 90%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깔린느의 창업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밖에 되지 않는 서해금의 투자금이 부족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해금은 그저 적은 투자금을 들여 깔린느와 파트너쉽을 맺고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는 얘기였다. 자수성가, 커리어우먼, 비즈니스 천재, 조향 천재라는 타이틀은 그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아람 덕에 누린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과 더불어 “주세은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현진이 모든 책임을 진다”던 송가람의 말을 곱씹어 본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은 의미심
한현진의 말에 성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성월은 한현진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해금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진아, CCTV를 확인할 자신 있어? 만약 정말 세은이가 한 짓이면 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니?”“경찰에 신고해야죠.”한현진이 똑바로 서해금을 직시했다. “만약 정말 세은이가 깨뜨린 거라면 비싼 물건이니 경찰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해야겠죠.”서해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현진 씨, 세은이의 입사를 강력 추진한 건 현진 씨였어요. 그래서 엄마도 동의했던 거고요. 하지만 지금 현진 씨는 이렇게 큰 문제를 생기자 모든 책임을 세은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어요. 정말 현진 씨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건가요?”한현진이 잠시 침묵했다. “가람 언니, 그런 얘기는 저희끼리 있을 때 해도 되잖아요. 왜 굳이 이곳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거예요?”한현진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송가람이 일부러 더 그녀를 밀어붙였다. “넘버 S 오일이 깨졌으니 회사 전체의 이익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저희도 직원에게 제대로 된 사건의 진위를 알려야 해요. 그러니 굳이 저희끼리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한현진이 시선을 올렸다. “여기서 얘기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 언니가 계속 제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제가 세은이를 입사시켰기 때문인 거잖아요. 세은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도 당연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겠죠. 그럼 제가 물을게요. 언니의 업무 실수로 인해 저희는 하마터면 홍혜림 씨라는 고객을 잃을 뻔했어요. 그럼 왜 당시 언니를 회사로 불러들인 서 대표님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신 거예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심지어 멀쩡히 회사에 다니고 있잖아요. 언니도 서 대표님 추천으로 입사하신 거잖아요. 왜 그 일에 관해선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는 거예요?”부끄러움에 송가람은 버럭 화를 냈다. “저와 세은이는 달라요. 깔린느는
역시나 성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엔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한 대표님이 호언장담해서 데려온 사람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소문이긴 한데. 나도 그냥 들은 거야. 주세은 씨 경력으론 우리 회사에 입사할 수 없대. 하지만 한 대표님이 세은 씨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취직을 시켜주려고 했지만 서 대표님이 반대하셔서 한 대표님이 만약 주세은 씨가 문제를 일으키면 한 대표님이 책임지고 물러나시기로 약속하셨다고 했어.”“세상에. 하지만 이번 일은 작은 일은 아니잖아.”“우리가 입사할 땐 면접만 4차까지 있었어. 면접도 없이 입사하기에 대단한 실력자인가보다 했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입사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 실력을 보지 못했어.”“넘버 S 오일은 이것 하나밖에 없잖아.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한 대표님이 어떻게 지켜주겠어.”“지키긴 뭘 지켜. 한 대표님 본인도 책임을 면치 못할 텐데. 자신이 꽂은 사람이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어?”...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송가람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음모를 달성한 비열한 인간의 표정이었다. 한현진은 그런 송가람 따위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성월을 직시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대로 가르치고 싶으셨다면 직접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알려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익숙하지도 않은 곳에서 물건을 가져오라고 세은 씨 혼자 보내신 거죠?”성월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땐 다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 일손이 부족한 데다 저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세은 씨를 보낸 거예요. 저장실은 제가 세은 씨와 함께 간 적이 있었어요. 세은 씨도 저장실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한현진이 물었다. “다들 식사 중이었다는 건 그리 급한 업무도 아니었단 얘기겠네요. 왜 하필 사람 없는 점심시간에 세은 씨를 불러서 오일을 가져오게 한 거예요?”한현진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성월이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