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엔의 가격은 2억 원 정도였다. 송민영 정도의 연예인에게는 눈에 차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에게 카이엔은 꽤 사치스러운 차였다. 방이진 본인은 아우디 A7을 갖고 있었다. 도석문이 사준 것이었다. 그녀의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정기 차량 정비 등 관리를 하기엔 버거웠다. 그러니 유현진의 카이엔을 본 그녀는 당연히 유현진의 스폰서가 사준 차이리라 생각했다. 은근히 비꼬면서도 방이진은 유현진을 질투했다. 전에 그녀가 유현진과 그녀의 스폰서 사진을 퍼뜨렸을 때, 한성이 나서서 해명해 준 덕에 유현진이 루머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방이진은 여전히 그날 밤 유현진을 데리고 나간 사람이 그녀의 스폰서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누가 그 저녁에 비즈니스를 해?’‘그 비즈니스가 제대로 된 비즈니스이기나 하겠어?’방이진이 유현진에게 더 적의를 보이는 것은, 그녀가 방이진의 역할을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송민영 알레르기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방이진은 송민영에게 커피를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송민영 팬들의 악플에 시달렸었다. 다행히 송민영이 나서서 해명해 주어 조용히 넘어갔다. 만약 송민영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누명을 벗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그 덕에 송민영은 요즘 그녀와 자주 연락했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송민영을 섭외했는데 송민영이 방이진을 PD에게 추천했다. 그리고 오늘 한열의 병문안도 송민영이 먼저 데리러 오겠다고 했고, 오는 길에 송민영은 방이진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방이진의 팔로워 수가 급증가하게 되었다. 하긴, 유명 연예인에게 빌붙을 기회를 누구 마다하겠는가?잔뜩 비꼬는 방이진을 유현진은 그저 가볍게 쓱 훑어볼 뿐이었다. 방이진은 유현진이 당연히 자신의 말에 반박할 줄 알았다. 하지만 유현진은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들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이진의 곁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심지어 방이진의 멍청한 말에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안창수: ???“부끄럽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안창수는 한열과 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시크해 보이지만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캐릭터였다. 지난번 촬영장에서 욕조신을 찍을 때, 안창수는 한열에게 극소수의 인원만 남겨두고 촬영장을 비울 건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한열이 안창수에게 데뷔 이래 첫 누드신을 선사하면 되냐고 물었었다. 그는 촬영을 위해서라면 엉덩이 노출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면서. ‘그게 낯을 가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가?’매니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부끄러움을 타는 건, 누구 앞이냐에 따라 다르죠.’그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안 감독님, 먼저 차 한잔하시면서 둘러보고 계세요. 제가 올라가 볼게요.”안창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는 곧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시각 드레스 룸.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매니저는 알몸으로 엉덩이를 쳐들고 옷을 찾고 있는 한열을 발견했다. 매니저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아침 8시부터 옷을 고르더니, 이젠 10시 30분이 다 되어가! 왜 아직도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거야?!”한열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떤 걸 입어도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좀 더 골라보려고요.”“고르긴 뭘 골라. 더 고르다간 네 여신님 가!”한열이 그제야 조급해했다. “아직 날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가요?”“네가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는데, 너라면 안 갈 것 같아?”한열이 입술을 삐죽였다. “좀 제대로 차려입고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그러죠.”“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는데, 네가 뭘 입든 그분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냥 네 평소 스타일대로 입어.”“그래요?”한열이 불신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매니저가 그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겼다.“봐봐.”한열이 알 수가 없다는 듯 물었다. “뭘요?”“네 얼굴을 봐. 굳이 옷을 고를 필요가 있어? 네 얼굴이라면 마대를 뒤집어써도 예뻐.”한열의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그는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매만지며 매니저의
드디어 여신님의 눈을 당당하게 마주 볼 수 있다. 한열의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어댔다.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유현진의 시야에서 보면 한열은 어쩐지… 조금 냉담해 보였다. 상대방이 친구 추가를 거절한 것을 떠올린 유현진은 그가 팬들이 싫어할까 봐 여배우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팬들 덕에 먹고 사는 아이돌이니까, 어쨌든 팬들의 마음을 생각해야 했다. “이 꽃… 현진 씨가 산 거예요?”한열이 나지막이 물었다. 생각에 잠겼던 유현진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한 가지씩 다 골라봤어요.”한열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위해서 꽃을 골랐어.’그는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프리지어 좋아해요.”유현진: …우연히도 그녀가 선물한 꽃다발엔 프리지어가 한 송이도 없었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선물했다고 푸념하는 건가.’유현진도 한열이 좋아하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지 않은 걸 어쩌겠는가…유현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음에, 다음에 제대로 고를게요.”유현진의 말에 한열은 더 기분이 좋아졌다. 꽃다발을 또 선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에게 자신의 연락처도 없었다. ‘다음에 꽃을 선물할 때, 만약 받지 못하면 어떡하지?’한열의 단순한 머리에서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작가님께서 저희 촬영신 대본을 조금 수정하신 거, 아세요?”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감독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한열이 말했다. “대사가 꽤 많아졌더라고요. 감독님께서 미리 맞춰보라고 하셨는데, 시간 돼요?”안창수가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 ‘꽤 열심히 하네.’예전에 차미주가 같이 일을 하던 어떤 아이돌들은 리허설은커녕 대사도 외우지 않고 후시 녹음에만 의지한다고 불만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비겼을 때, 한열은 확실히 촬영에 진심
방이진은 빠질 타이밍을 잘 알고 빠져주는 유현진을 보며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자기 여신님이 눈앞에 있는 요사스러운 여자에게 밀려나자, 한열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디서 나타난 촌닭이야?’한열의 기분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방이진이 또 물었다. “열이 씨가 추가할래요, 아니면 내가 할까요?”한열이 방이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대본 봤어요?”“당연히 봤죠.”“대본도 보셨으면서… 저희 대사는 네 마디밖에 없는 것도 모르세요? 네 마디도 리허설이 필요한 거면, 연기력이 좀 달리는 거 아닌가?”방이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리허설은 무슨, 그녀는 단지 한열의 전화번호를 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처럼 틈새에 겨우 비집고 있는, 실력도 인기도 없는 배우에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유명인들에게 빌붙는 것이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한열의 인기는 송민영도 빌붙고 싶게 만드는 수준이었으니, 방이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유현진이 한열과 연락처를 교환하는 것을 보고 이때다 싶어 그의 전화번호를 따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방이진은 화를 참으며 핑곗거리를 찾았다. “꼭 리허설 때문은 아니에요. 영화 홍보도 그렇고, 계속 연락은 주고받아야 하니까요. 연락처가 있으면 좋잖아요.”한열이 더 매정하게 말했다. “홍보는 주연 배우의 몫이죠. 주연 배우도 아닌데, 굳이 연락할 필요가 있을까요?”방이진의 미소가 점점 어색해졌다. 자신을 조연급이라고 하는 것은 방이진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높여 말하는 것이었다. 주연 배우는 제외하고 다른 배우들의 출연분은 모두 비슷했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의 경력이 모두 방이진보다 적었기 때문에 그녀를 마주치면 모두 선배라고 불러주었다. 방이진은 한열보다도 선배였다. 후배인 한열은 다른 신인 배우들과 달리 방이진의 체면따위는 생각해 주지 않았다. 한열이 말을 이었다. “좀 멀리 떨어져 주시죠. 냄새가 역해서요.”모욕을 주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실을 서술했을
“네가 잘생기긴 했지. 하지만 넌 나이가 있잖아. 어린애의 활기찬 모습이 넌 없으니까. 한열은 얼마나 어려. 피부도 탱탱하고, 꼬집이면 물처럼 흘러내릴 것 같잖아. 한열 팬들 슬로건이 바로 ‘한열과 자지 않은 인생은 의미 없어’ 야. 이것만 봐도 한열이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알겠지.”강한서: …강한서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며 한성우의 장난기가 더욱 불타올랐다. “한열이 영화에서 형수님이랑 커플 연기를 한다며. 배드신이 있는지 모르겠네. 선남선녀의 달달한 모습을 보면 팬들이 아마 미칠걸?”팬들이 미치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강한서가 미쳐 날뛰는 꼴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강한서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한성우의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차미주가 한 달 동안 해주던 밥, 맛있었어?”한성우가 멈칫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밥?”강한서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차미주가 너한테 백혜주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잖아. 내가 노력한 성과를 가로채 얻어먹으니까, 행복해?”한성우: …그는 마른기침을 해댔다. “우린 친구잖아. 네 것 내 것이 어딨어?”강한서가 콧방귀를 뀌며 그의 말을 녹음했다. 한성우가 호기심에 못 이겨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알았어?”강한서가 한성우는 힐끗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한성우: …강한서가 어떻게 알았냐고? 그건 전부 루나 덕분이었다. 차미주는 루나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루나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주변 사람이나 일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한성우가 그녀에게 한 달째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자 그녀는 루나에게 한성우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욕을 해댔다. 루나는 차미주가 하는 말이 유현진과 관련이 있자 데이터를 바로 강한서에게 전송했다. 그러니 강한서가 당연히 한성우가 한 짓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한성우가 한 짓을 알게 됐어도 그는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한성우가 얼
그녀는 아무런 명분도 없이 유상수만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비록 지금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지만, 뒤에서 그녀를 욕하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고 돼지처럼 멍청한 유상수는 계략 방면에서나 두뇌 방면에서나 백혜주보다 많이 뒤떨어졌다. 그리고 백혜주는 절대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갖은 계략을 꾸며가며 본인의 힘으로 지금 자리에 올라왔고 아들과 딸을 낳았다.나이가 50대를 넘어선 유상수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고 아들을 더 중시했다.백혜주는 그에게 아들과 딸을 낳아줬고 그가 사망하게 되면 유씨 가문의 재산은 당연히 두 아이의 것으로 되기에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꽃길을 깔아주고 있었다.한성우도 한주시의 재벌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지만, 백혜주 같은 사람은 그도 처음이었다.20년간 참고 살며 자신의 딸을 유씨 가문 본처에게 맡겨 키우면서 밖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며 자신의 동생인 것처럼 꾸며 같이 밤을 보냈고,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길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 수법과 계략은 그가 살면서 목격했던 불륜녀들보다 더 뛰어났다.다만...“그 가짜 동생 백현석은 왜 그 여자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었던 거지?”“아마 백혜주가 백현석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거나 아니면…”강한서는 뜸을 들여 말했다.“아니면 두 사람의 목표가 같은 거겠지.”“목적이라...”머리가 아주 좋았던 한성우는 바로 깨닫게 되었다.“그러니까 백혜주의 아이가 백현석의 아이란 말이야?!”강한서가 답했다.“아직은 추측일 뿐이야. 일단 증거를 찾게 되면 다시 알려줄게.”“그럼, 사실을 확인한 후에 바로 백현석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야?”한성우는 살짝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아니.”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유상수 스스로 알아차리게 만들 거야. 그럼 더 재밌어지지 않겠냐?”유현진은 아마 백혜주보다 유상수를 더욱 증오하고 있을 것이었다. 유상수가 바로 하현주를 비극의 인생으로 살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이혼하자마자 유현진을 가문에서 쫓
하지만 그 일을 그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그는 주강운의 할아버지가 다른 친구들처럼 그의 집안이 수산업을 하는 집안이라 하찮게 여기고 그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창업을 하면서 자신의 회사가 잘 나가게 되자 그는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주강운의 할아버지 주진철은 그의 출신을 꺼렸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다 하더라도 주진철의 눈엔 여전히 혈통이 고귀하지 않고 낮은 하찮은 사람이었다.주진철은 바로 전형적인 꽉 막힌 고물 같은 사람이었고 그와 다른 속물들과 달랐다. 속물들은 눈치를 보며 누가 잘 나가면 바로 곁에서 아부하는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주진철은 그가 아무리 잘나가고, 잘살아가고 있어도 항상 혈통을 따지며 사람을 대하였다.재벌 집안에서 태어난 강한서 같은 경우는 그의 눈에 아주 존귀한 존재로 보였고 중간에 갑자기 재벌가로 들어가게 된 한성우 같은 경우는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어도 그의 눈엔 여전히 비천한 존재였다.그는 시대가 변한 지 언제인데 왜 아직도 옛날 방식에 꽉 막혀 사는 고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그가 강한서와 친근한 사이가 되었지만 주강운과는 그런 사이가 되지 못했고, 그 원인의 대부분이 바로 주진철이었다.어느 여름날, 그는 주강운의 집으로 찾아가 같이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자고 한 적이 있었다.주강운은 그때 당시 아주 많은 학원에 다녔고 매일매일 집에서 선생님이 내준 숙제만 했었다.한성우의 공부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고 그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바라지 않았었다. 고등학교로 가기 전까지 그는 줄곧 하위권 성적을 차지했었다.그는 주강운에게 수업을 빼먹자며 부추겼고 두 사람은 그렇게 오후 동안 물고기를 잡으면서 놀았다.다시 주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주진철이 두 사람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두 사람에게 작은 칼을 손에 쥐여주며 '물고기가 그렇게 좋으면 안까지 똑똑히 보아라'라고 말했다.그는 주강운에게 칼을 쥐여주며 잡아 온 물고기의 배를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말에 한성우가 바로 답했다.“저녁에 별다른 일이 없으니까 일찍 들어갈 거야.”차미주가 차갑게 웃으며 일부터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럼 기다릴게.”한편, 유현진은 한참 뒤에서야 강한서의 답장을 받게 되었고 내용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그 사진은 바로 자신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그는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고 실험실 책상에 기대어 서 있었다. 무테안경을 쓴 그는 패드에 있는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사진은 우측면에서 찍힌 사진이었고 강한서의 날카로운 턱선이 선명하게 찍혔다. 검은 셔츠를 입은 그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거두고 있었고 단추는 두 개 정도 푼 상태였다. 살짝 튀어나온 그의 목젖은 완벽한 턱선과 아주 조화로웠고 안경 쓴 그의 엄격 근엄 진지한 모습에서 금욕적인 느낌이 온몸에서 풍겨 나왔다.한열의 사진을 보았을 땐 생기있고 활발한 소년미가 느껴졌었다.하지만 강한서가 주는 이런 엄격 근엄 진지한 느낌과 엄청난 카리스마에 굳이 소년미를 풍기지 않아도, 그저 그곳에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은 홀린 듯 쳐다보았다.다만, 이 사진은 강한서가 찍은 사진이 아닌 것 같았다.강한서는 자신의 매력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는 무대 위에서 트로피를 안고 있는 사진이 제일 잘 나온 사진이라고 생각했었다.예전에도 집안 벽에 사진을 걸려고 할 때, 강한서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진을 골라 달라고 부탁했었다.그리고 강한서는 그녀에게 상을 받은 모습이 찍힌 사진을 수두룩 보냈었다.대학 시절 받은 경진 대회 1등 상, 디자인 특별상, 과학기술대회 공로상 등...그가 무조건 트로피를 안고 있는 사진만을 고집했고 사진 속 트로피에 이름까지 선명하게 보여야 만족했었다.당시 그녀는 강한서가 일부러 그녀를 놀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은 모습이 제일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방금 그가 보낸 사진은 아주 완벽한 사진이었다. 강한서는 사실 카메라만 보면 경직되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이 찍어준 사진에서 더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