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엔의 가격은 2억 원 정도였다. 송민영 정도의 연예인에게는 눈에 차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에게 카이엔은 꽤 사치스러운 차였다. 방이진 본인은 아우디 A7을 갖고 있었다. 도석문이 사준 것이었다. 그녀의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정기 차량 정비 등 관리를 하기엔 버거웠다. 그러니 유현진의 카이엔을 본 그녀는 당연히 유현진의 스폰서가 사준 차이리라 생각했다. 은근히 비꼬면서도 방이진은 유현진을 질투했다. 전에 그녀가 유현진과 그녀의 스폰서 사진을 퍼뜨렸을 때, 한성이 나서서 해명해 준 덕에 유현진이 루머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방이진은 여전히 그날 밤 유현진을 데리고 나간 사람이 그녀의 스폰서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누가 그 저녁에 비즈니스를 해?’‘그 비즈니스가 제대로 된 비즈니스이기나 하겠어?’방이진이 유현진에게 더 적의를 보이는 것은, 그녀가 방이진의 역할을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송민영 알레르기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방이진은 송민영에게 커피를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송민영 팬들의 악플에 시달렸었다. 다행히 송민영이 나서서 해명해 주어 조용히 넘어갔다. 만약 송민영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누명을 벗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그 덕에 송민영은 요즘 그녀와 자주 연락했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송민영을 섭외했는데 송민영이 방이진을 PD에게 추천했다. 그리고 오늘 한열의 병문안도 송민영이 먼저 데리러 오겠다고 했고, 오는 길에 송민영은 방이진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방이진의 팔로워 수가 급증가하게 되었다. 하긴, 유명 연예인에게 빌붙을 기회를 누구 마다하겠는가?잔뜩 비꼬는 방이진을 유현진은 그저 가볍게 쓱 훑어볼 뿐이었다. 방이진은 유현진이 당연히 자신의 말에 반박할 줄 알았다. 하지만 유현진은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들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이진의 곁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심지어 방이진의 멍청한 말에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안창수: ???“부끄럽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안창수는 한열과 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시크해 보이지만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캐릭터였다. 지난번 촬영장에서 욕조신을 찍을 때, 안창수는 한열에게 극소수의 인원만 남겨두고 촬영장을 비울 건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한열이 안창수에게 데뷔 이래 첫 누드신을 선사하면 되냐고 물었었다. 그는 촬영을 위해서라면 엉덩이 노출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면서. ‘그게 낯을 가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가?’매니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부끄러움을 타는 건, 누구 앞이냐에 따라 다르죠.’그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안 감독님, 먼저 차 한잔하시면서 둘러보고 계세요. 제가 올라가 볼게요.”안창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는 곧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시각 드레스 룸.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매니저는 알몸으로 엉덩이를 쳐들고 옷을 찾고 있는 한열을 발견했다. 매니저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아침 8시부터 옷을 고르더니, 이젠 10시 30분이 다 되어가! 왜 아직도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거야?!”한열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떤 걸 입어도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좀 더 골라보려고요.”“고르긴 뭘 골라. 더 고르다간 네 여신님 가!”한열이 그제야 조급해했다. “아직 날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가요?”“네가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는데, 너라면 안 갈 것 같아?”한열이 입술을 삐죽였다. “좀 제대로 차려입고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그러죠.”“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는데, 네가 뭘 입든 그분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냥 네 평소 스타일대로 입어.”“그래요?”한열이 불신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매니저가 그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겼다.“봐봐.”한열이 알 수가 없다는 듯 물었다. “뭘요?”“네 얼굴을 봐. 굳이 옷을 고를 필요가 있어? 네 얼굴이라면 마대를 뒤집어써도 예뻐.”한열의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그는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매만지며 매니저의
드디어 여신님의 눈을 당당하게 마주 볼 수 있다. 한열의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어댔다.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유현진의 시야에서 보면 한열은 어쩐지… 조금 냉담해 보였다. 상대방이 친구 추가를 거절한 것을 떠올린 유현진은 그가 팬들이 싫어할까 봐 여배우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팬들 덕에 먹고 사는 아이돌이니까, 어쨌든 팬들의 마음을 생각해야 했다. “이 꽃… 현진 씨가 산 거예요?”한열이 나지막이 물었다. 생각에 잠겼던 유현진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한 가지씩 다 골라봤어요.”한열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위해서 꽃을 골랐어.’그는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프리지어 좋아해요.”유현진: …우연히도 그녀가 선물한 꽃다발엔 프리지어가 한 송이도 없었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선물했다고 푸념하는 건가.’유현진도 한열이 좋아하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가 친구 추가를 수락하지 않은 걸 어쩌겠는가…유현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음에, 다음에 제대로 고를게요.”유현진의 말에 한열은 더 기분이 좋아졌다. 꽃다발을 또 선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에게 자신의 연락처도 없었다. ‘다음에 꽃을 선물할 때, 만약 받지 못하면 어떡하지?’한열의 단순한 머리에서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작가님께서 저희 촬영신 대본을 조금 수정하신 거, 아세요?”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감독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한열이 말했다. “대사가 꽤 많아졌더라고요. 감독님께서 미리 맞춰보라고 하셨는데, 시간 돼요?”안창수가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 ‘꽤 열심히 하네.’예전에 차미주가 같이 일을 하던 어떤 아이돌들은 리허설은커녕 대사도 외우지 않고 후시 녹음에만 의지한다고 불만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비겼을 때, 한열은 확실히 촬영에 진심
방이진은 빠질 타이밍을 잘 알고 빠져주는 유현진을 보며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자기 여신님이 눈앞에 있는 요사스러운 여자에게 밀려나자, 한열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디서 나타난 촌닭이야?’한열의 기분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방이진이 또 물었다. “열이 씨가 추가할래요, 아니면 내가 할까요?”한열이 방이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대본 봤어요?”“당연히 봤죠.”“대본도 보셨으면서… 저희 대사는 네 마디밖에 없는 것도 모르세요? 네 마디도 리허설이 필요한 거면, 연기력이 좀 달리는 거 아닌가?”방이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리허설은 무슨, 그녀는 단지 한열의 전화번호를 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처럼 틈새에 겨우 비집고 있는, 실력도 인기도 없는 배우에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유명인들에게 빌붙는 것이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한열의 인기는 송민영도 빌붙고 싶게 만드는 수준이었으니, 방이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유현진이 한열과 연락처를 교환하는 것을 보고 이때다 싶어 그의 전화번호를 따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방이진은 화를 참으며 핑곗거리를 찾았다. “꼭 리허설 때문은 아니에요. 영화 홍보도 그렇고, 계속 연락은 주고받아야 하니까요. 연락처가 있으면 좋잖아요.”한열이 더 매정하게 말했다. “홍보는 주연 배우의 몫이죠. 주연 배우도 아닌데, 굳이 연락할 필요가 있을까요?”방이진의 미소가 점점 어색해졌다. 자신을 조연급이라고 하는 것은 방이진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높여 말하는 것이었다. 주연 배우는 제외하고 다른 배우들의 출연분은 모두 비슷했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의 경력이 모두 방이진보다 적었기 때문에 그녀를 마주치면 모두 선배라고 불러주었다. 방이진은 한열보다도 선배였다. 후배인 한열은 다른 신인 배우들과 달리 방이진의 체면따위는 생각해 주지 않았다. 한열이 말을 이었다. “좀 멀리 떨어져 주시죠. 냄새가 역해서요.”모욕을 주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실을 서술했을
“네가 잘생기긴 했지. 하지만 넌 나이가 있잖아. 어린애의 활기찬 모습이 넌 없으니까. 한열은 얼마나 어려. 피부도 탱탱하고, 꼬집이면 물처럼 흘러내릴 것 같잖아. 한열 팬들 슬로건이 바로 ‘한열과 자지 않은 인생은 의미 없어’ 야. 이것만 봐도 한열이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알겠지.”강한서: …강한서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며 한성우의 장난기가 더욱 불타올랐다. “한열이 영화에서 형수님이랑 커플 연기를 한다며. 배드신이 있는지 모르겠네. 선남선녀의 달달한 모습을 보면 팬들이 아마 미칠걸?”팬들이 미치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강한서가 미쳐 날뛰는 꼴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강한서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한성우의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차미주가 한 달 동안 해주던 밥, 맛있었어?”한성우가 멈칫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밥?”강한서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차미주가 너한테 백혜주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잖아. 내가 노력한 성과를 가로채 얻어먹으니까, 행복해?”한성우: …그는 마른기침을 해댔다. “우린 친구잖아. 네 것 내 것이 어딨어?”강한서가 콧방귀를 뀌며 그의 말을 녹음했다. 한성우가 호기심에 못 이겨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알았어?”강한서가 한성우는 힐끗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한성우: …강한서가 어떻게 알았냐고? 그건 전부 루나 덕분이었다. 차미주는 루나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루나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주변 사람이나 일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한성우가 그녀에게 한 달째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자 그녀는 루나에게 한성우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욕을 해댔다. 루나는 차미주가 하는 말이 유현진과 관련이 있자 데이터를 바로 강한서에게 전송했다. 그러니 강한서가 당연히 한성우가 한 짓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한성우가 한 짓을 알게 됐어도 그는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한성우가 얼
그녀는 아무런 명분도 없이 유상수만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비록 지금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지만, 뒤에서 그녀를 욕하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고 돼지처럼 멍청한 유상수는 계략 방면에서나 두뇌 방면에서나 백혜주보다 많이 뒤떨어졌다. 그리고 백혜주는 절대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갖은 계략을 꾸며가며 본인의 힘으로 지금 자리에 올라왔고 아들과 딸을 낳았다.나이가 50대를 넘어선 유상수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고 아들을 더 중시했다.백혜주는 그에게 아들과 딸을 낳아줬고 그가 사망하게 되면 유씨 가문의 재산은 당연히 두 아이의 것으로 되기에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꽃길을 깔아주고 있었다.한성우도 한주시의 재벌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지만, 백혜주 같은 사람은 그도 처음이었다.20년간 참고 살며 자신의 딸을 유씨 가문 본처에게 맡겨 키우면서 밖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며 자신의 동생인 것처럼 꾸며 같이 밤을 보냈고,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길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 수법과 계략은 그가 살면서 목격했던 불륜녀들보다 더 뛰어났다.다만...“그 가짜 동생 백현석은 왜 그 여자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었던 거지?”“아마 백혜주가 백현석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거나 아니면…”강한서는 뜸을 들여 말했다.“아니면 두 사람의 목표가 같은 거겠지.”“목적이라...”머리가 아주 좋았던 한성우는 바로 깨닫게 되었다.“그러니까 백혜주의 아이가 백현석의 아이란 말이야?!”강한서가 답했다.“아직은 추측일 뿐이야. 일단 증거를 찾게 되면 다시 알려줄게.”“그럼, 사실을 확인한 후에 바로 백현석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야?”한성우는 살짝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아니.”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유상수 스스로 알아차리게 만들 거야. 그럼 더 재밌어지지 않겠냐?”유현진은 아마 백혜주보다 유상수를 더욱 증오하고 있을 것이었다. 유상수가 바로 하현주를 비극의 인생으로 살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이혼하자마자 유현진을 가문에서 쫓
하지만 그 일을 그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그는 주강운의 할아버지가 다른 친구들처럼 그의 집안이 수산업을 하는 집안이라 하찮게 여기고 그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창업을 하면서 자신의 회사가 잘 나가게 되자 그는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주강운의 할아버지 주진철은 그의 출신을 꺼렸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다 하더라도 주진철의 눈엔 여전히 혈통이 고귀하지 않고 낮은 하찮은 사람이었다.주진철은 바로 전형적인 꽉 막힌 고물 같은 사람이었고 그와 다른 속물들과 달랐다. 속물들은 눈치를 보며 누가 잘 나가면 바로 곁에서 아부하는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주진철은 그가 아무리 잘나가고, 잘살아가고 있어도 항상 혈통을 따지며 사람을 대하였다.재벌 집안에서 태어난 강한서 같은 경우는 그의 눈에 아주 존귀한 존재로 보였고 중간에 갑자기 재벌가로 들어가게 된 한성우 같은 경우는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어도 그의 눈엔 여전히 비천한 존재였다.그는 시대가 변한 지 언제인데 왜 아직도 옛날 방식에 꽉 막혀 사는 고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그가 강한서와 친근한 사이가 되었지만 주강운과는 그런 사이가 되지 못했고, 그 원인의 대부분이 바로 주진철이었다.어느 여름날, 그는 주강운의 집으로 찾아가 같이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자고 한 적이 있었다.주강운은 그때 당시 아주 많은 학원에 다녔고 매일매일 집에서 선생님이 내준 숙제만 했었다.한성우의 공부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고 그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바라지 않았었다. 고등학교로 가기 전까지 그는 줄곧 하위권 성적을 차지했었다.그는 주강운에게 수업을 빼먹자며 부추겼고 두 사람은 그렇게 오후 동안 물고기를 잡으면서 놀았다.다시 주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주진철이 두 사람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두 사람에게 작은 칼을 손에 쥐여주며 '물고기가 그렇게 좋으면 안까지 똑똑히 보아라'라고 말했다.그는 주강운에게 칼을 쥐여주며 잡아 온 물고기의 배를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말에 한성우가 바로 답했다.“저녁에 별다른 일이 없으니까 일찍 들어갈 거야.”차미주가 차갑게 웃으며 일부터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럼 기다릴게.”한편, 유현진은 한참 뒤에서야 강한서의 답장을 받게 되었고 내용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그 사진은 바로 자신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그는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고 실험실 책상에 기대어 서 있었다. 무테안경을 쓴 그는 패드에 있는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사진은 우측면에서 찍힌 사진이었고 강한서의 날카로운 턱선이 선명하게 찍혔다. 검은 셔츠를 입은 그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거두고 있었고 단추는 두 개 정도 푼 상태였다. 살짝 튀어나온 그의 목젖은 완벽한 턱선과 아주 조화로웠고 안경 쓴 그의 엄격 근엄 진지한 모습에서 금욕적인 느낌이 온몸에서 풍겨 나왔다.한열의 사진을 보았을 땐 생기있고 활발한 소년미가 느껴졌었다.하지만 강한서가 주는 이런 엄격 근엄 진지한 느낌과 엄청난 카리스마에 굳이 소년미를 풍기지 않아도, 그저 그곳에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은 홀린 듯 쳐다보았다.다만, 이 사진은 강한서가 찍은 사진이 아닌 것 같았다.강한서는 자신의 매력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는 무대 위에서 트로피를 안고 있는 사진이 제일 잘 나온 사진이라고 생각했었다.예전에도 집안 벽에 사진을 걸려고 할 때, 강한서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진을 골라 달라고 부탁했었다.그리고 강한서는 그녀에게 상을 받은 모습이 찍힌 사진을 수두룩 보냈었다.대학 시절 받은 경진 대회 1등 상, 디자인 특별상, 과학기술대회 공로상 등...그가 무조건 트로피를 안고 있는 사진만을 고집했고 사진 속 트로피에 이름까지 선명하게 보여야 만족했었다.당시 그녀는 강한서가 일부러 그녀를 놀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은 모습이 제일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방금 그가 보낸 사진은 아주 완벽한 사진이었다. 강한서는 사실 카메라만 보면 경직되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이 찍어준 사진에서 더
강한서는 어쩐지 주혁이 한현진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돈이 부족한 상황에 전근까지 당한다면 어느 정도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주혁은 불평은커녕 오히려 한현진에게 아들이 그린 그림을 선물하기까지 한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주혁의 이력은 강한서가 봐도 전혀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굉장히 불운한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주혁의 아들은 선척적으로 청각장애를 가진 것이 아니라 납치사건 때문에 생긴 후유증이었다. 부잣집 아들을 납치하려던 납치범은 실수로 주혁의 아들을 납치했고 납치범은 돈을 요구했지만 부잣집에서는 인질을 구출하려는 경찰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납치범이 납치된 아이를 살해할 것을 고려해 경찰은 그들에게 아이를 잘못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돈을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납치범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다. 주혁의 아들은 비록 구조되었지만 의사로부터 청력을 잃었다는 선고를 받아야했다. 정신질환 가족력이 있던 주혁의 아내는 아들이 납치되기 전까진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납치사건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녀마저도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강한서가 주혁을 한현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주혁의 과거 때문이었다. 아들이 납치당하기 전의 주혁은 지금처럼 성실하고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도박 전과가 있었다. 매번 월급이 지급되면 주혁은 며칠 동안 사라졌다. 도박장이나 PC방에 파묻혀 가진 돈을 전부 잃고 나서야 다시 출근했다. 집에 있는 아이와 아내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고 아내가 발품 팔아 번 돈으로 겨우 가족의 생활을 유지했다. 주혁의 모든 변화는 그의 집에 사건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도박이나 하며 빈둥거리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모든 과거를 뉘우치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가족을 보살폈다. 주혁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주혁을 보며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스스로 잘못
한현진은 순간 주혁에게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던 주혁은 글을 잘 썼다. 정신질환이 있는 아내와 청력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그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아들을 국화와 서예 학원을 보낼 수 있었다. 아들의 인공 달팽이관을 마련하기 위해 급히 돈이 필요하다던 그는 한현진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다 걸려 직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들어가는 지출을 줄이지는 않았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본인은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자식에게는 제일 좋은 것만 주길 원하는 부모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혁의 가정형편으론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대체 어떤 면에서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콕 짚어 얘기하기는 어려웠다. 강한서를 만나고 나서도 한현진의 찌푸린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원율이 퇴근하고 민경하가 운전을 인계받았다. 조수석에 외투를 벗어던진 강한서는 뒤로 돌아가 한현진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왜 그래? 고민 있어?”강한서가 안전벨트를 하며 물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별 일 아냐.”“손에 그건 뭐야?”강한서가 물었다. 한현진이 그림을 강한서에게 펼쳐보였다. “기사님 아드님이 나에게 선물로 준 거야. 초콜릿을 준 적이 있는데 고맙다고 그려줬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어린애에게 작업 걸었어?”한현진이 입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기사님 아들은 이제 고작1 4살인데 무슨 작업을 걸어. 게다가 심지어 만난 적도 없다고. 전에 생일이라고 해서 기사님께 초콜릿을 가져가라고 했었어. 인사성이 좋은 아이라 답례를 준 거고.”강한서가 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래?”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흥, 콧소리를 냈다. 그림을 들고 한참을 자세히 살피던 강한서가 평가했다. “꽤 잘 그렸는데? 14살에 이 정도 수준이면 엄청난 거지.”한현진은 눈앞의 질투쟁이의 말을 무시했다.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너도 국화
은서하는 말없이 서류철을 품에 안고 돌아서 자리를 벗어났다. 회사에서 나온 한현진은 주혁과 마주쳤다. 그는 지금 회사의 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평소엔 회사의 보안을 책임졌고 가끔은 고객이나 임원의 주차를 돕기도 했다. 한현진이 주혁을 발견했을 때,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가까워오자 그는 경계하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한현진의 삭막한 눈빛과 눈이 마주쳤다. 멈칫하던 주혁이 어색하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안녕하세요.”한현진이 인사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인사팀에서 보안팀으로 전근시켜줬어요?”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현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업무에 적응은 했는지, 일은 할 만한지도 묻지 않았다. 강한서가 말한 것처럼, 쓸데없는 동정심은 내려놓았다. 모두에겐 각자의 인생이 있었고 그녀는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한현진은 가방을 메고 두 손은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꽂은 채 원율이 주차장에서 차를 가져와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옆에 서서 손가락을 꽉 움켜쥐던 주혁이 한참이 지나서야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대표님, 이거 제 아들이 그린 그림이에요. 대표님께 전해드리라고 해서요.”멈칫한 한현진은 고개를 돌리자 주혁이 품에서 깨끗한 편지 봉투를 꺼내 두 손 가지런히 한현진 앞에 내밀었다.입술을 짓이긴 한현진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현진은 입을 꾹 닫고 침묵을 지켰다. 그 사이 원율은 정문에 도착해 한현진 앞에 차를 세웠다. 혹여나 한현진이 그림을 받지 않을까, 주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제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도 달게 받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아이가 대표님께 전하는 조그만 마음이에요. 대표님께서 생일 선물로 주신 초콜릿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처음으로 받는 생일 선물이었거든요. 생일이 지나도 몇 번이고 그 초콜릿을 곱씹었어요. 그래서 대표님께 그림 선물로 고마움을 표현한 거라면서 저에게 꼭 전해달라고 했어요.
주현의 손을 잡은 것은 이시연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온 이시연이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 “회사에서 이게 지금 뭐하는 거예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주현이 이시연을 밀쳤다. “이 팀장님은 상관하지 마세요. 한 대표님을 대신해 이 배은망덕한 X를 혼내고 있는 중이니까.”은서하가 그에 질세라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핑계 대지 마세요. 대표님 라인에 붙으려다 대표님께서 선을 그으시니까 저에게 화풀이 하시는 거잖아요.”혹여 그 말이 송가람 귀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겁이 난 주현이 당황한 얼굴로 날뛰며 말했다. “누가 대표님 라인에 붙으려 했다는 거예요! 은혜를 갚을 줄도 모르면서 모함 좀 그만해요. 한 대표님께 돈을 받고도 서 대표님에게 붙은 건 은서하 씨 아니었어요?”은서하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한 대표님 돈 받은 적 없어요. 계속 루머를 퍼뜨리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어요.”이시연이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됐어요, 그만해요. 두 사람 다 적당히 해요. 매일 얼굴 마주칠 동료끼리,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주현은 고모인 성월이 서해금의 오른팔이라는 것을 등에 업고 평소 회사에서 동료들을 괴롭혔었다. 은서하처럼 나약한 성격의 직원은 전부 주현의 직장 내 괴롭힘이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그런 은서하가 주현에게 맞서는 것은 주현에겐 모욕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주현이 비꼬며 말했다. “이 팀장님, 말리지 마세요. 신고하라고 해요. 제가 무서워할 것 같아요? 배신이나 때리는 배은망덕한 인간과 대체 누가 친하게 지내려고 하겠어요? 언제 배신당할 지도 모르는데.”분노로 은서하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더는 입씨름을 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 이시연이 곧바로 은서하의 행동을 제지하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만해요! 회사가 두 사람 소란 피우는 곳인 줄 알아요?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다면 대표님께 찾아가요. 사무실에 계시니까!”그 말에 두 사람은 드디어 흥분을
한현진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전 송 팀장님이 아녜요. 아부 같은 건 저한텐 안 통해요. 그러니 괜히 제 심기를 건드려서 혼났다고 불평하지나 마세요.”주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한 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7층에 도착했다. 은서하와 주현을 비롯한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한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주현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드리운 증오를 숨기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부모를 잘 만난 것이 전부인 주제에, 다들 대표님이라고 불러주니까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그 말을 듣고 있던 동료가 조용히 눈치를 줬다. “듣겠어요. 그만해요.”주현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했다. “들으라고 해요. 깔린느 전체가 서 대표님 거라는 걸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다들 대표님이라고 부르며 비위나 맞춰주니까 정말 대표라도 된 줄 아나 보죠. 은서하 씨 같은 사람도 상황 파악 할 정도인데, 눈치가 없대요?”서로 눈을 마주친 직원들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지난달 급여명세서가 공개되었다. 한현진이 관리하는 부서 직원들의 급여는 평소보다 더 높았다. 심지어 한현진의 부서는 다른 부서보다 늘 더 빨리 퇴근했음에도 말이다. 이건 전부 한현진이 보너스 지급 방식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부서에 지급된 보너스 중 담당 대표의 인센티브를 따로 계산한 후 나머지를 부서 직원들이 균등하게 나누는 방식으로 지급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본인의 인센티브를 따로 계산하지 않고 보너스 전부를 부서 전 직원에게 균등하게 지급했다. 비록 한현진이 받을 보너스는 줄어들었지만 그 덕에 부서의 전 직원은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떤 큰 포부가 있든, 출근은 결국 돈을 벌어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한현진이 조향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는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현진이 실제로 그들의 월급을 올려
사실 그건 조금은 선을 넘는 질문이었다. 특히 한현진의 등에 칼을 꽂은 이 타이밍엔 더 그랬다. 한현진은 자신이 은서하의 편을 들어주었음에도 그녀가 더 이상 송가람의 죄를 추궁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집엔 아픈 노모까지 있는 여자 아이에게 직장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해금이 주는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그건 은서하가 처사를 제대로 못하는 일이 되었고 어쩌면 회사에서도 점점 더 어려운 처지에 내몰릴 수 있었다. 한현진은 은서하의 고충을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서운한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은서하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는 눈빛을 마주한 한현진은 저도 모르게 외할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화장실에 몰래 숨죽여 울던 은서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현진 역시 그런 무력한 순간은 경험했었기에 같은 처지에 놓인 은서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은서하를 용서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결국 냉담한 말투로 “네.”라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은서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에게 말을 더 붙이고 싶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주연과 다른 동료들이 들어오자 은서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주현이 한현진에게 인사를 건네곤 고개를 돌려 은서하를 보며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서하 씨, 월급을 추가 지급 받으셨다면서요. 대표님께서도 따로 위로금까지 챙겨주셨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전화위복 아닌가?”멈칫, 몸을 떤 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하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현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이어갔다. “송 팀장님은 그저 서하 씨에게 농담을 좀 한 것뿐인데 하필이면 한 대표님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을 만나서 상황이 이상하게 됐네요. 그대로 한 대표님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신 덕에 서하 씨는 위로금까지 받았잖아요. 서하 씨는 한 대표
“난 없어도 민 실장은 아는 사람이 많잖아. 형님 소개팅도 민 실장이 주선해준 거였어. 교사, 의사, 공무원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직종은 민 실장이 다 꾀고 있다고.”한현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민 실장님께 부탁 좀 해 봐. 나이는 25살에서 35살 사이, 초혼에 직업은 안정적이고 반듯한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몇 명이든 상관없이 전부 소개해 달라고 해. 미남계로 혼을 쏙 빼서 전부 내 사람으로 만들고 나면 민 실장님 보너스 두둑이 챙겨줘야지.”강한서가 웃음기 가득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이따 민 실장한테 얘기할게.”강민서의 보고서를 수정해주며 멘탈이 붕괴된 민경하는 연이어 몇 번이나 재채기를 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에 등골이 오싹해진 민경하는 순간 휴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시간을 확인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물었다. “나 생일 파티 해주러 가는 거야?”에이, 감탄사를 내뱉은 한현진이 화난 척 말했다. “사람이 무드 없긴. 알아도 모른 척 해야지. 눈치가 없어. 기대감이 완전 사라졌잖아.”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했어. 처음부터 다시 해. 이번엔 내가 제대로 대답할게.”한현진이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나 좀 기다려. 갈 데가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어딜? 완전 좋아. 너무 기대된다.”한현진: ...“그냥 닥쳐.”강한서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뭘 할지 알아도 기대가 되는 건 똑같아.”말하며 잠시 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 생일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야. 다음은 둘이 아니라 넷일 테니까. 마지막이니까 소중하게 여겨야지.”한현진이 눈웃음 지었다. “괜찮아. 내년에도 아이들은 집에 두고 우리 둘이 보내면 돼.”한현진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이젠 가서 일 봐. 좀 이따 만나, 여보.”전화를 끊은 한현진
강한서는 저돌적인 여자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로 한현진을 화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현진에게 사건의 전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한현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넌 내가 너 몰래 선을 본다고 생각해서 부계정으로 날 추가해 불륜의 증거라도 잡으려고 했던 거야?”강한서가 곧바로 부정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어떻게 널 믿지 않을 수 있겠어?”“그럼 왜 부계정으로 날 속인 거야?!”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 아주머니께서 네가 7, 8명의 연락처를 가져갔다고 하니까 네가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어.”한현진이 불퉁하게 말했다. “연락처를 왜 교환했겠어? 너도 봤잖아! 널 바꿔버릴까, 고민하고 있었어.”본인의 잘못임을 잘 알고 있던 강한서는 나지막이 반성했다. “현진아, 정말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런게 아니야. 난 그냥 질투가 조금 나서 그랬어. 외삼촌과 숙모님께서 너에게 그렇게 많은 맞선 상대를 소개해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야 난 어른들이 날 이렇게까지 안 좋아하시는 건지 알게 돼서 속상했어.”그 말 한 마디는 한현진의 화를 삭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렇게까지 날 안 좋아한다는 말에 한현진은 심지어 마음이 아려왔다.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외삼촌과 숙모는 아직 네가 기억을 회복한 걸 모르시잖아. 두 분은 우리가 이미 끝난 사이라고 생각하고 계셔. 다들 널 안 좋아하는 게 아냐. 게다가 그 사람들은 외삼촌과 숙모가 먼저 소개해 주겠다고 하신게 아니야. 내가 좋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거야.”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네가 먼저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다고?”한현진이 말했다.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잠시 후,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영상 하나를 보냈다. 강한서는 그 영상으로 한현진의 카톡에는 조금 전과 같은 [친목 모임] 그룹 채팅방이 7 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그룹 채팅방에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나머지 멤버는 조금 전 채팅방에 있던 멤버들
한현진이 말했다. [허연석 씨, 저에게 솔로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들어오실래요? 다들 젊은 분들이고 개인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셔서 채팅방에서 마음 놓고 얘기를 나누셔도 돼요. 나중에 친목회가 있을 때면 참석하셔도 되고요.]강한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강한서가 대답했다. [좋아요.]그렇게 한현진은 강한서를 [친목 다짐 7번 방]이라는 이름의 그룹 채팅방에 초대되었다. 강한서가 채팅방에 초대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열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강한서는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곧이어 그의 말괄량이 아내인 한현진이 그룹 공지를 올렸다. 공지엔 강한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개인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강한서가 공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이 그룹 채팅방은 총 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강한서는 유일한 남자 멤버였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게다가 채팅방에 있는 전원이 깔린느의 직원이었다. 어리둥절한 강한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쯤, 채팅방에서는 이미 한 여자 아이가 먼저 다가와 강한서에게 말을 걸었다. A: [허연석 씨는 한주가 고향이세요?]강한서가 예의상 그렇다고 대답했다. A: [실례지만 키가 몇이세요?]강한서: 187B: [완전 크시네요!]C: [여자친구가 160cm여도 괜찮으세요?]D: [1살 연상도 괜찮아요?]E: [가영언니(D)가 이렇게 남자 분께 먼저 말 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C: [이번 남자 분은 조건이 너무 좋잖아요. 조건 좋은 사람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D: [한평생 착하게 살았으니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날 때도 됐어.]A: [언니들, 동생들에게 양보 좀 해요. 지금까지 모태솔로라고요. 연애 좀 하게 해줘요!]강한서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남자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들에게 무차별적인 유혹을 당하고 있자니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젠장,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야.’강한서는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