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라피를 안 마시고?”한성우가 물었다.차미주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가져온 라피는 나한테 사과의 선물로 가져온 거잖아. 네가 그걸 왜 마셔?”“...”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한성우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차미주는 소주를 옆에 두기만 했고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비록 차미주는 라피를 받고 그를 용서한 것 같아 보였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미주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전에 그의 집에서 식사할 때만 해도 그녀는 계속 업무가 많다거나, 최근 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이 어떻다든가 쉴 새 없이 조잘대던 사람이었다.식사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가 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밥 먹을 때 같이 얘기를 나눌 거 아니면 왜 같이 밥을 먹어? 그냥 알아서 각자 챙겨 먹지.”한성우는 12살에 해성시로 오게 되었고 주변 사람과 환경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는 명망 있는 가문의 도련님인 강한서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조기 교육을 받지 않아 공부도 그다지 잘하지 않았고 예의 교육 또한 받지 못했다.그가 해성시로 처음 발을 들일 때, 마치 귀한 명견들 무리 속에 섞여 들어간 촌스러운 시골 견 같았다.그는 이리저리 치이면서 웃음거리로 되기도 했다.그는 할아버지와 같이 생활할 때의 습관을 잘 고치지 못했고 “상류사회”의 습관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는 남들과 달리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무리에 적응해 나가려 애를 썼다.결국, 그는 아주 완벽하게 적응했고 바이브 엔터와 하이 테크로 입지를 굳힌 후 누구도 더는 “물고기 팔이 소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누가 그의 앞에서 “물고기 팔아 출세”했다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친절한 주의”를 주었다.사람들은 평민 출신이었던 그에게 그 단어는 금지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비록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재차
그는 자신이 아마도 차미주에게 대충 이런 감정을 가졌다고 생각했다.비록 차미주는 머리가 조금 멍청했지만, 의리가 있었고 요리도 잘하고 성격이 난폭하긴 하지만 뒤끝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바로 그가 좋아하는 호쾌한 유형의 사람이었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성우는 얼른 그녀와 화해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는 의리도 지키고 요리도 잘하는 여사친을 잃고 싶지 않았다.이윽고 그는 먼저 술병을 들고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도, 아니 미주야. 도시락 일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네 믿음을 배신했어. 그러니까 이 한잔은 내가 사과주로 부은 거니까 마시고 용서해 주라.”차미주는 살짝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간을 팍 찌푸렸다.“이건 또 무슨 속셈이야?”“...”차미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쉽게 사과하는 한성우를 보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성우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나 생각했다.그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난 그냥 정말 사과하려고 그러는 거야. 어젯밤 네가 차에서 내리고 나서 나도 엄청나게 후회했다고.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맛있는 것도 만들어 주고, 게임도 같이 해주고. 근데 내가 도시락 먹고 싶어서 몰래 먹었다가 너를 화나게 만들어버렸잖아.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그리고 그 입맞춤에 관해서는 그는 아직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차미주가 입을 열었다.“네가 잘못한 게 어디 이것뿐이야? 조 선생님 앞에서 나한테 입 맞췄지 않아! 비록 넌 네게 들러붙는 여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그런 거였겠지만, 그래도 내 입장은 생각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조 선생님이 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난 그동안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넌 이렇게 날 엿 먹이냐?”“...”한성우가 그 입맞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 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차미주가 이미 대신 말을 꺼냈다.그녀는 한성우가 자신에게 들러붙는 여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그녀에게 입을 맞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즉, 그녀에겐 그 입맞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었다
한성우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뜨거운 국물에 살짝 닿은 상태였다.“미쳤어? 이거 뜨거운 국물이라고!”차미주는 멍한 표정을 지다가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으앙”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한성우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에 손을 헹구었다.차미주는 울면서 말했다.“진심으로 사과도 안 하고 고기도 못 먹게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내 손가락까지...”한성우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려 했지만, 다시 입을 다물었다.그는 어차피 술 취한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차미주는 더욱 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왜, 왜 나한테 사과 안 해?”“미안해.”한성우는 아주 건성건성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가락 끝을 꼼꼼히 관찰했고 살짝 붉어지긴 했지만, 물집이 생기거나 피나진 않았다.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고작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래도 부족한 거야?”한성우는 치약을 살짝 짜내어 그녀의 손끝에 발라주었다.차미주는 갑자기 몸을 확 돌리더니 그의 멱살을 잡으며 흐릿한 눈으로 말했다.“당연히 부족해! 내 첫 키스도, 내 첫날밤도 네가 다 뺏어갔어! 그런데 내가 왜 굳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널 용서해 줘야 해?”손에 힘을 꽉 주고 멱살을 잡는 차미주에 한성우는 절로 허리를 숙이게 되었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차미주는 미간을 찌푸렸다.“기다려 봐. 생각 좀 해보게.”그녀가 어떻게든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 하는 모습을 본 한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살짝 지었다.2분 뒤, 한성우는 그녀에게 물었다.“생각났어?'차미주는 고개를 들었다.“받은 것 그대로 돌려줄 거야!”“뭐―”한성우가 반응하기도 전에 차미주는 그의 멸살을 확 잡아당기더니 발꿈치를 들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한성우의 눈이 점점 커졌다.'마늘 먹었잖아!'그는 어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는 차미주에 강한서는 한성우에게 연락해 보겠다고 했다.다시 정신을 차린 강한서는 휴대폰을 넣었다.“바로 온대.”그는 말하면서 유현진을 옆으로 끌어당겼다.“안 추워?”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애초에 더운 날씨였던 터라 비가 내리면 당연히 땅의 온도도 내려갈 거로 생각했지만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는 비에 살짝 추워 나기 시작했다.고개를 저은 그녀는 바로 재채기를 했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고 몸을 휙 돌리더니 그녀를 품에 가뒀다.유현진이 나직하게 말했다.“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돼. 나 그 정도로 약하지 않아.”강한서는 고개를 떨구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이미 남편으로서는 실격했지만 남자친구로서는 더는 실격하지 않을 거야.”유현진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후에야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100점 되기엔 아직 멀었어.”강한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럼 추가점수 줄 거야?”유현진은 생각하더니 말했다.“가산점 50점 줄게.”“500점으로 해줘. 내가 이따 돌아가서 이 옷을 입어줄게.”그는 비닐봉지에 담긴 망사옷을 가리키며 말했다.순간 유현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누가 본대!”강한서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가 입고 싶어서 그래.”“... 네가 보기엔 네가 하려는 행동이 음탕하다고 생각되지 않아?”“너도 전에 스스로 입은 적이 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잖아.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강한서가 말한 “전에”는 두 사람이 함께 보낸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날 밤의 기억은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생생했고 그녀는 어떻게든 그 기억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왜 굳이 이런 일로 공평해지려고 하는 거야?”“이런 일이니까 공평해야 하지 않겠어?”강한서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혹시라도 우리 유현진 사모님께서 나의 그 방면에 어떤 질병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계속 나한테 병원 예약해 주려고 했잖아.”“...그만해. 네 말발이 대단하다는 거 알고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고 머릿속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 열기는 하반신으로 집중되어 갑자기 참기 힘들어졌다.목이 마른 느낌에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할짝댔고 입을 벌리던 순간 차미주가 몽롱한 눈빛으로 말했다.“조 선생님께서는 큰 거 좋아하는지, 작은 거 좋아하는지 모르겠네.”“...”그녀의 한마디는 순식간에 찬물이 되어 그에게 확 뿌려졌다.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을 뿐만 아니라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민망해졌다.그는 침대 위에 있던 담요를 차미주에게 덮어주고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나갔다.강한서와 유현진은 그곳에서 10분 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그제야 우산을 가지고 오는 한성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그는 고작 우산을 두 개 가져왔다. 하나는 이미 그가 쓰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강한서와 유현진에게 전해주려고 가지고 온 것이었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하나야?”한성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이 바보 같은 자식, 도대체 어떻게 유현진 씨의 마음을 얻겠다고 생각한 거지?'한성우가 말했다.“도둑이 취해서 두 개 밖에 못 찾았어. 그러면 네가 혼자 써. 나랑 형수님이 같이 쓸 테니까.”그의 말을 들은 강한서의 안색이 파래졌고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현진이 답했다.“난 그래도 괜찮아.”“...”한성우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강한서가 멍해져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방금까지 차미주에게 농락당했던 그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계속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형수님, 여긴 물웅덩이가 깊으니까 제가 업어드릴게요.”강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지난번 캠핑에서 돼지 한 마리도 들지 못한 주제에 가능하겠냐?”유현진은 눈을 치켜뜨더니 이내 강한서를 쳐다봤다.강한서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도 모른 채 계속 한성우를 공격하고 있었다.한성우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거랑 같아? 형수님이 어떻게 돼지 한 마리보다 무겁겠냐?”강한서는 여전히 자신이 한성우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현진이는 55kg이
황급히 쫓아가 봤지만 그래도 붙잡지 못했다. 유현진은 이미 아파트로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강한서는 집까지 쫓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유현진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옆에서 구경하던 한성우가 입을 열었다.“됐어, 그만해. 여자들은 몸무게에 제일 민감해. 아마 오늘 밤까지는 형수님의 화가 풀릴 것 같진 않네.”강한서는 기가 찬 듯 그를 노려봤다.“너 뻔뻔하게 그런 말이 나오냐!”한성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이것도 봐준 거야. 네가 예전에 내 앞에서 얼마나 형수님이 싸준 도시락과 새 옷을 자랑해 댔는데? 겨우겨우 나와 같은 솔로가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다시 마음을 얻으면 내가 짜증이 나잖아.”강한서의 안색이 파래졌다.'도대체 그동안 나한테 뭘 알려준 거야?'집으로 돌아온 유현진은 바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샤워실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차미주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차미주는 곤히 자고 있었고 아직도 빗발이 세게 내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직원에게 내일 아침에 와서 그릇을 수거해 가라고 연락했다.하지만 한참이나 연락을 했지만 받는 사람이 없어 그녀는 하는 수없이 문자를 남겼다.머리를 말리고 잠을 잘 준비를 하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유현진은 그릇을 수거해 가는 직원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문을 열어주었다.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문밖에 있던 사람은 바로 신미정이었다.그녀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옆에는 중년 남성이 있었고 그녀와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그가 바로 신미정의 동생이자 강한서의 삼촌인 신표였다.신미정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지만 메이크업으로 커버했다.밖에 빗발이 세게 내렸지만, 그녀의 몸은 젖은 곳 하나도 없었고 머리도 엉망이지 않았다.유현진은 신미정을 보자마자 바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그러나 신미정은 이미 그녀의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이 얼른 손을 뻗어 문을 확 열어젖혔다.유현진은 문과 부딪치더니 이내 비틀비틀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여긴 무슨 일이시
신미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유현진, 주제 넘게 굴지 마!”유현진은 가소롭게 웃었다.“첫째, 강민서와 전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제가 강민서와 시누이로 지낸 그 몇 년 동안이 어땠는지 모른 척하진 않겠죠. 둘째, 걔가 저한테 뜨거운 물을 붓는 데 성공했든 아니든 이미 사람을 해쳤습니다. 그런 애를 제가 미쳤다고 도와줍니까? 셋째, 이 집은 우리 회사 대표님께서 마련해준 집입니다. 당신 아들과는 상관이 없어요. 가서 따지고 싶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넷째...”유현진은 뜸을 들이더니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말했다.“절 평생 임신도 못 하게 만들어 놓고 제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그녀가 조목조목 말할 때마다 신미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신미정은 유현진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유현진이 이혼하고 난 후 유씨 가문과도 연을 끊으며 지내는 꼴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유현진은 그녀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더 잘살고 있었다.너무 잘살고 있었던 나머지 그녀의 앞에선 꼼짝을 못 하던 유현진이 지금 바락바락 대들고 있었다!신미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물었다.“내가 어떻게 하면 도와줄 건데?”유현진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몇 년간 그녀의 며느리로 살면서 유현진은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허영심이 가득 찬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눈앞의 이익을 중시하며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어떻게든 상대와 친해지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못하는, 유현진과 유씨 가문 같은 사람에게는 항상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었고 더욱이 치밀어 오르는 화까지 참으면서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평소와 다른 그녀의 행동이 그녀가 강민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신미정의 이런 자식 지키기는, 유현진은 그녀가 강한서에게조차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생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날 협박하는 거지?'강한서가 정말로 이 일에서도 강민서를 감싸준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강한서를 고려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했을 것이었다.유현진은 고개를 들고 신미정을 주시하였다.“도와 드릴 순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신미정의 눈이 반짝거렸다.“말해봐.”유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가서 자수하세요. 저에게 평생 임신을 못 하는 약을 탔다고. 그러면 저도 한열 씨에게 찾아가 민서를 봐달라고 부탁해 보죠.”신미정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지금 날 놀리는 거니?”“그럴 리가요.”유현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기회를 드리는 거잖아요. 딸을 구할 수 있는 기회 말이에요.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민서를 위해 이런 희생도 못 해주나요?”신미정은 눈앞에 있는 곱디고운 유현진의 얼굴을 보니 더욱 화가 치밀어올랐고 손을 들어 유현진의 뺨을 내리치려고 했다.먼저 예상하고 있었던 유현진은 바로 뒤로 물러났고 신미정은 헛스윙을 날리게 되었다.그러나 반대편에서 손이 날라오더니 유현진의 뺨을 철썩 때렸다.그녀의 귓가엔 이명 소리가 들렸고 신표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누나, 내가 말했잖아. 이런 년은 그냥 먼저 때리고 시작하는 게 더 빠르다고!”말을 마친 그는 다시 손을 올려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신표는 덩치가 아주 큰 사람이었고 성인 남자도 그의 주먹을 받아 내지 못했기에 유현진 같은 연약한 여자가 견뎌낼 리가 없었다.그녀는 그의 주먹에 맞으면 아마 치아도 부러지게 되리라 생각했다.그래서 신표가 팔을 들자마자 유현진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바로 팔을 뻗어 상대의 급소를 가격했다. 신표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고 바로 허리를 구부리며 급소를 감쌌다.놀란 신미정이 얼른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신표야, 괜찮아?”유현진은 살기 위해 이미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가격한 것이었다. 신표는 자신의 급소가 마치 터진 것 같아 고통에 안색이 창백해졌고 허리를 펴지 못했다.유현진은 이미 휴대폰을 들고 신고하
[한 대표님이요...]채팅방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물었다. [한 대표님, 돈을 이렇게 많이 거셨다가 지면 어쩌시려고요.]한현진이 대답했다. [한 번 걸어보는 거죠. 돈방석에 앉게 될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채팅방은 곧 [대표님, 쿨하시네요.]라는 문자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몇십 명의 사람들이 실패에 베팅했다. 심지어 돈을 더 거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딜러가 또 말했다. [송 팀장님께 실패에 2000만 원을 거셨어요.]멈칫한 한현진은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은 마치 한현진이 자신을 쳐다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은 송가람이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말했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미소를 짓던 한현진이 입 모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물었다. “사기당한 40억은 돌려받았어요?”송가람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버럭 화를 내려던 송가람은 자신을 쳐다보는 서해금의 시선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세은은 매번 제조해 낸 오일의 향에 따라 원료의 비율을 조절했다. 1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10가지가 넘는 샘플을 만들어냈지만 넘버 S 오일에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직 없었다. 서해금은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주세은이 시도한 비율은 서해금의 제조 방안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던 샘플과 비슷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오일의 비율을 조절했다. 그러니 주세은이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리가 없었다. 현장에서 제조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전교 일 등인 척하는 전교 꼴찌를 지켜보는 기분이네요. 대체 제가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죠?”넘버 S의 성분 분석에 참여했던 사람이 말했다. “세은 씨가 정확한 오일을 고르긴 했어요. 정말 천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저 우연일 뿐이었네요.”“한 대표님께서 성공에 2000만 원이나 거셨던데 그 돈이
주세은이 제조에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 송가람은 벌써 냉소적인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꽤 전문가답네요. 현진 씨는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하려면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한현진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늦어서 2시간이요. 세은이가 그랬잖아요. 청력에 문제 있어요?”송가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2시간 안에 성공한다면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회사는 불필요한 사람을 키워줄 이유가 없거든요.”한현진이 냉담한 태도로 받아쳤다. “줄곧 필요 없는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었잖아요.”멈칫하던 송가람은 그제야 한현진이 말 한 필요 없는 사람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송가람이 한현진을 반박하려는데 서해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보려거든 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 사람은 나가.”‘얘는 철이 안 들어! 하필 지금 여기서 한현진과 설전을 벌여야겠어?’송가람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녀는 주세은이 창피를 당하기만을 기다렸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주세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제조에 성공해도 걱정, 실패해도 걱정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제조에 성공해 너무 일찍 실력을 드러낸다면 서해금의 경계 대상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대부분은 주세은이 우스운 꼴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낙하산으로 들어온 어린 꼬맹이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것이라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못을 인정하는 게 나을 텐데요.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서 제조에 실패하면 얼마나 창피해요.”“오일을 제조하겠다는 건 핑계고 그저 나대고 싶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전 회사에 저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지금 어린 친구들은 너무 허황한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니까요.”...그나마 눈치를 보며 말을 내뱉는 현장의 사람들과 다르게 단체 채
물론 서해금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꼬맹이에게 그 오일을 제조할 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넘버 S 오일은 한아람이 세상을 뜨기 전 제조해 낸 것이었다. 당시엔 오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해금도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회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해금은 그 오일을 제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향사들과 수천 가지가 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녀는 심지어 화학성분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한아람이 만든 오일을 재현할 수 없었다. 서해금이 재현해 낸 오일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을 때도 딱 2%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2%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향수의 향기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서해금은 넘버 S 오일을 장기 보관할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오일의 휘발을 감소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노력으로도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오일을 주세은이 향만 맡고 제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기회를 줘야 했다. 어차피 서해금은 애초부터 주세은의 입사를 반대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그 눈은 보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 기회에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던 서해금이 말했다. “그럼 너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게.”“아뇨.”주세은이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대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에 주세은을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풍을 떠는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닌 바보를 보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주세운이 두 시간 사이 오일을 제조해 낸다면 그건 회사의 모든 조향사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한현진은 스르륵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세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건 어때?”‘만약 제조에 실패해 서해금이 이 기회를 빌려 회사에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오빠에겐 뭐라고
주세은의 말 한마디에 현장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물론 한현진도 멍해졌다. ‘어린애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도 하네.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서해금도 지금까지 한 병밖에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던데.’만약 오일의 제조는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해 서해금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 이상 오일의 제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의 많은 조향사들은 넘버 S 오일을 본 적이 있었다. 만약 정말 마케팅에 불과하다면 진작 들켰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경쟁자로 가득한 이 업계에 이런 비밀로 캐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말 제조가 어려운 오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껏해야 배상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세은은 말을 내뱉었고 만약 서해금이 정말 주세은에게 제조를 맡긴 후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한현진은 정말 주세은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MZ는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지금 주세은에 대한 한현진의 평가는 그나마 무난한 편이었다. 주위에 몰려 구경 중이던 직원들은 한현진보다 훨씬 직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음식 양념장이라도 만드는 건 줄 아나 봐.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깔린느가 지금껏 향수 업계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어? 진작 라이벌 회사에 뺏겼을 거야.”“서 대표님도 본인이 제조하셨지만 다시 똑같은 오일을 만들지는 못하셨어요. 이제 갓 졸업한 어린 꼬맹이가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예요?”“하룻밤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잖아요.”“만약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제 손에 지지겠어요.”송가람의 얼굴에 은은한 멸시가 감돌았다. 아마도 주세은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본인이 직접 불구덩이에 뛰어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현진은 마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온 학부모 같았다.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사
한현진은 말하며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전 주주의 신분으로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니도 세은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임원인 누군가의 연줄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저와 세은이를 제약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언니와 서 대표님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송가람은 논리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현진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한 방이 되었다. 낄린느의 창시자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입사한 직원이 알고 있는 회사의 대표는 서해금이 전부였다. 깔린느의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서해금을 깔린느의 창시자인 듯 추앙하고 있었다. 예전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경력 2, 30년 이상의 고참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깔린느가 모든 위기를 헤치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부 서해금의 공로로 알고 있었다. 설사 한현진이 회사의 대표로 취임했어도 다들 서해금이 옛정을 생각해 파트너였던 사람의 딸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월이든 송가람이든 한현진의 얘기만 나오면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조차 않던 창시자인 한아람은 애초부터 깔린느의 최대 주주였고 심지어 그녀는 90%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깔린느의 창업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밖에 되지 않는 서해금의 투자금이 부족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해금은 그저 적은 투자금을 들여 깔린느와 파트너쉽을 맺고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는 얘기였다. 자수성가, 커리어우먼, 비즈니스 천재, 조향 천재라는 타이틀은 그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아람 덕에 누린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과 더불어 “주세은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현진이 모든 책임을 진다”던 송가람의 말을 곱씹어 본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은 의미심
한현진의 말에 성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성월은 한현진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해금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진아, CCTV를 확인할 자신 있어? 만약 정말 세은이가 한 짓이면 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니?”“경찰에 신고해야죠.”한현진이 똑바로 서해금을 직시했다. “만약 정말 세은이가 깨뜨린 거라면 비싼 물건이니 경찰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해야겠죠.”서해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현진 씨, 세은이의 입사를 강력 추진한 건 현진 씨였어요. 그래서 엄마도 동의했던 거고요. 하지만 지금 현진 씨는 이렇게 큰 문제를 생기자 모든 책임을 세은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어요. 정말 현진 씨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건가요?”한현진이 잠시 침묵했다. “가람 언니, 그런 얘기는 저희끼리 있을 때 해도 되잖아요. 왜 굳이 이곳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거예요?”한현진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송가람이 일부러 더 그녀를 밀어붙였다. “넘버 S 오일이 깨졌으니 회사 전체의 이익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저희도 직원에게 제대로 된 사건의 진위를 알려야 해요. 그러니 굳이 저희끼리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한현진이 시선을 올렸다. “여기서 얘기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 언니가 계속 제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제가 세은이를 입사시켰기 때문인 거잖아요. 세은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도 당연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겠죠. 그럼 제가 물을게요. 언니의 업무 실수로 인해 저희는 하마터면 홍혜림 씨라는 고객을 잃을 뻔했어요. 그럼 왜 당시 언니를 회사로 불러들인 서 대표님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신 거예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심지어 멀쩡히 회사에 다니고 있잖아요. 언니도 서 대표님 추천으로 입사하신 거잖아요. 왜 그 일에 관해선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는 거예요?”부끄러움에 송가람은 버럭 화를 냈다. “저와 세은이는 달라요. 깔린느는
역시나 성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엔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한 대표님이 호언장담해서 데려온 사람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소문이긴 한데. 나도 그냥 들은 거야. 주세은 씨 경력으론 우리 회사에 입사할 수 없대. 하지만 한 대표님이 세은 씨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취직을 시켜주려고 했지만 서 대표님이 반대하셔서 한 대표님이 만약 주세은 씨가 문제를 일으키면 한 대표님이 책임지고 물러나시기로 약속하셨다고 했어.”“세상에. 하지만 이번 일은 작은 일은 아니잖아.”“우리가 입사할 땐 면접만 4차까지 있었어. 면접도 없이 입사하기에 대단한 실력자인가보다 했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입사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 실력을 보지 못했어.”“넘버 S 오일은 이것 하나밖에 없잖아.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한 대표님이 어떻게 지켜주겠어.”“지키긴 뭘 지켜. 한 대표님 본인도 책임을 면치 못할 텐데. 자신이 꽂은 사람이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어?”...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송가람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음모를 달성한 비열한 인간의 표정이었다. 한현진은 그런 송가람 따위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성월을 직시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대로 가르치고 싶으셨다면 직접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알려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익숙하지도 않은 곳에서 물건을 가져오라고 세은 씨 혼자 보내신 거죠?”성월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땐 다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 일손이 부족한 데다 저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세은 씨를 보낸 거예요. 저장실은 제가 세은 씨와 함께 간 적이 있었어요. 세은 씨도 저장실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한현진이 물었다. “다들 식사 중이었다는 건 그리 급한 업무도 아니었단 얘기겠네요. 왜 하필 사람 없는 점심시간에 세은 씨를 불러서 오일을 가져오게 한 거예요?”한현진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성월이 결국
구내식당이 워낙 조용했던 터라 가까이 있는 사람은 통화 내용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비록 한현진은 넘버 S 오일이 뭔지 몰랐지만 깔린느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넘버 S 오일은 혼합 오일이었다. [인 드림] 같은 고급 향수의 제조에 사용되는 주요 원료 중 하나였다. 넘버 S 오일의 재고는 100mL 밖에 없었다. 서해금이 우연히 제조해 낸 오일이라 각 오일의 성분과 비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그렇게 넘버 S 오일은 한정판이 되어버렸다. 이 오일은 줄곧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 고급 향수를 제작할 때만 사용되었다. 넘버 S 오일은 깔린느 전체에 단 한 병뿐이었다. 그것이 깨진다면 넘버 S 오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성월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서해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따라가려는 한현진을 은서하가 불러 세웠다. “대표님, 제 일은 됐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지날 수 있을 거예요.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한현진이 은서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나가지 않을 거예요. 서하 씨가 참으면 참을수록 그 사람들은 점점 더 서하 씨를 만만하다고 여기고 더 심하게 굴 거예요. 서하 씨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들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앞으로 서하 씨를 괴롭히려고 할 땐 한 번쯤은 고민해 볼 거예요.”은서하가 멍해졌다. 한현진은 은서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주세은은 덜렁대는 성격의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귀중한 원료는 보통 일반 직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보관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세은이 그 오일을 깨뜨렸을 리가 없었다. 한현진이 다급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일 보관실에 모여있었다. 주세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를 에워싼 사람들은 하나 같이 범인을 심문하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세은은 하얗게 질린 얼굴
한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송가람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갔다. “제 사무실에 있던 금전수 기억해요?”움찔하는 송가람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한현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니가 하는 건 저도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승인하실래요, 아니면 다들 들을 수 있게 제가 가서 가져올까요?”송가람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현진이 그 도청 장치를 발견했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현진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송가람의 사무실에도 도청 장치를 달았다. 송가람과 주현은 사무실에서는 거리낌 없이 모든 얘기를 했었다. 게다가 한현진이 대체 어디서 어떤 얘기를 들은 것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생각에 송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꼭 움켜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송가람의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질 때쯤 멀리서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아, 가람아.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니?”하마터면 자신이 한 일을 승인할 뻔한 송가람은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입가까지 흘러나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그녀는 구세주를 만나기라도 한 듯 서해금을 불렀다. “엄마!”한현진이 쯧 혀를 찼다. ‘타이밍 한번 좋게 찾아왔네.’한현진은 몸을 돌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서해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한현진 앞으로 다가온 서해금이 몸을 곧게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미소 지으며 물었다. “밥도 안 먹고 두 사람 여기서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던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다만 가람 언니가 별다른 이유 없이 직원의 보너스를 삭감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있었어요.”한현진의 말에 반박하려던 송가람은 휴대폰을 꺼내려는 한현진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만약 송가람이 자신의 구역에서 한현진에게 약점을 잡힌 것을 서해금이 알게 된다면 또 그녀를 한바탕 꾸짖을지도 몰랐다. “그래?”서해금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현진이 말이 사실이야?”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