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운전하던 한성우가 갑자기 물었다.“근데 현진 씨 어머님께선 이미 돌아가셨잖아. 그리고 현진 씨도 더 이상 유상수 씨의 딸도 아닌데 이걸 조사해서 뭐 하게?”유현진은 유씨 가문의 재산을 두고 분쟁을 벌일 인물 같아 보이지 않았다. 요컨대 그녀는 강한서가 주겠다던 위자료도 받지 않았던 사람이니 어찌 유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겠는가.유현진과 유상수는 더 이상 부녀 사이가 아니었고 심지어 이 기회에 가족의 연마저 깔끔하게 끊어낼 수 있는데 굳이 왜 다시 유씨 가문을 물고 늘어지려 하는지 그는 이해되지 않았다.차미주가 입을 열었다.“사람이 죽었다고 복수하지 말란 법 있어? 그 두 사람은 함께 어머님의 교통사고를 사주하고 식물인간으로 만들었어. 어머님은 그 두 사람 때문에 7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버티시다가 결국 돌아가셨지. 근데 왜 그 두 사람이 잘 살게 놔둬야 해? 이건 공평하지 않잖아?”한성우는 순간 깜짝 놀랐다.“현진 씨 어머님이 사고 나신 게 유상수 씨가 사주한 거라고?”“그럼? 어머님께서는 이미 유상수를 알몸으로 쫓아낼 준비를 하고 계셨어. 근데 교통사고가 나버렸지. 어머님이 사고를 당하면 제일 큰 이익을 볼 사람은 누구겠어? 그것만으로도 유상수가 용의자일 가능성이 아주 커!’“왜 신고하지 않은 거야?”“현진이가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한테 물어봤거든. 근데 사고 차량은 이미 그때 처리가 되었다더라.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서 사건을 뒤집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래. 그래서 현진이가 탐정 사무소를 찾아갔거든? 근데 탐정이 말하길 유상수와 백여우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두 사람의 관계를 와해시키라고 하더라. 그럼 어쩌면 뜻밖의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될 수도 있대.”차미주는 순간 멈칫거렸다.“이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안 그러면 널 지금 당장 죽여버릴 거야!”한성우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입 무거운 남자야.”차미주를 회사로 데려다준 후 한성우는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뜻이 있는 자, 반드시 이룬다.”그는 이 한마디 좌우명을 갖고 일 년 동안 미친 듯이 한성의 설립 과정, 회사의 히스토리와 현재 상품의 특점과 판매 현황 등을 포함한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 그다음 해 신입사원을 모집할 때, 그는 다시 입사 면접에 도전했고 일사천리로 면접을 통과했다. 마지막 면접은 바로 강한서와의 일대일 면접이었다. 민경하는 이제껏 그런 긴장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간단하게 몇 가지 질문을 한 강한서는 바로 그를 통과시켰다. 강한서와 조금 편한 사이가 된 후 민경하는 강한서에게 그때의 일을 언급했다. 그는 감격스러운 말투로 만약 이력서 뒤에 써준 말이 아니었다면 그가 한성에 다시 도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한서에게 말했다. 강한서가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것과 다름이 없었다. 민경하의 말에 멈칫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그건 민 실장 능력이었죠.”나중에야 민경하는 매년 면접 후 마지막 라운드까지 진입한 사람의 이력서 뒷면에 글을 써주는 것이 강한서의 습관임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은 응원의 메시지였으나 한성이 워낙 들어가기 어려운 회사였고, 면접을 보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 역시 명문대 출신이었으니 면접에 떨어지면 불만들을 늘어놓을 뿐 이력서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 강한서는 매년 이력서에 응원의 메시지를 써주었지만 민경하처럼 자존심을 굽히고 다시 도전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고 인사팀의 부장이 알려주었다. 강한서의 업무 스타일은 많은 사람에게 냉정하고 보수적으로 비추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실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가로 그의 방식은 사실 더 많은 구직자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꽃 도착했어요?”강한서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딴생각에 잠겼던 민경하가 그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음… 그리고 조금은 사랑꾼인 것 같아.’“오늘 받으셨어요.”민경하의 대답에 강한서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는 보낸 꽃을 전부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뭐라고 하던가요?”민경하가
이준은 그런 유현진의 태도를 아주 만족했다. 연기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이준은 생각했다. 오디션 당일, 이준은 빈해시에 신인배우를 캐스팅하러 가야 했다. 때문에 유현진과 함께 오디션장이 갈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회사의 다른 동료에게 그녀를 데리고 오디션 장소에 가주기를 부탁했다. 원래 매니저였던 진희연은 그녀가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다른 배우를 케어하러 갔다. 비록 송민준은 유현진을 특별히 신경써줬지만 회사의 내부 규칙도 지켜야 했다. 지금 유현진 정도로는 아직 전담 매니저의 케어를 받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녀의 휴식기 동안 진희연이 다른 연예인의 일정을 함께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준은 그녀에게 동료의 전화번호를 건넸다. 동료의 이름은 서영이었고 그녀는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가 킹 엔터에서 스카우트해 온 매니저였다. 예전엔 차미주와 같은 회사에 다녔다. 차미주의 말로는 서영도 굉장히 실력 있는 매니저라고 했다. 많은 유명 연예인을 데리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회사 대표와 사이가 틀어져 다른 매니저에게 일을 인계하고 퇴사했었다.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가 설립 후, 그녀는 킹 엔터를 그만두고 이쪽으로 회사를 옮겼다. 그녀는 회사 제일 먼저 계약한 매니저였다. 유현진은 일찍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지만 저녁 6시 40분이 되어도 서영의 전화가 없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영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한참을 울려서야 서영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은 냉담했다. 유현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서영 씨, 도착하셨어요?""아뇨, 길이 좀 막혀서요."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딥블루 클럽까지 가려면 차가 막하지 않아도 삼사십 분은 걸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영은 아직 도착하지도 못했다. 서영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출발한다면 시간을 맞춰 오디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까? "서
유현진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휴대폰은 신호가 없었다. 딥블루 클럽에는 수많은 연예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고객의 신상정보를 지키기 위해 클럽에서는 5층에 신호 차단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유현진은 전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유현진은 그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이 방에는 창문조차 없는 것을 발견했다. 왼쪽 상단에 있는 환풍구가 유일한 출로였다. 창문으로 구조 요청을 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다.‘제기랄!’‘내가 대체 서영에게 뭘 잘못했길래.’유현진을 가둔 후 서영은 오디션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녀를 본 송민영이 직접 물을 떠주며 물었다. “서영 언니, 어떻게 됐어?”“걱정 마요.”서영이 웃으며 송민영이 건네는 물을 받았았다. “오늘 이 오디션 현장에 절대 나타나지 못할 거예요.”차미주가 알아 온 신상정보에 착오가 있었다. 서영은 송민영을 영입하려고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비록 영입에 실패했지만 그 둘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송민영이 먼저 서영에게 자기 매니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현재 제일 핫한 연예인의 매니저가 될 수 있는데,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로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완벽한 파트너가 되었다.“살의”의 오디션은 사실 송민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녀의 영향력과 팬을 고려해 제작사에서는 그녀가 영화의 흥행을 책임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주인공 역할에 두 명의 배우를 추천했다. 한 명은 송민영이었고, 다른 한 명은 유현진이었다. 서영은 처음부터 인지도가 없는 연예인을 견제 상대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전날 송민영이 찾아와 유현진과 송민준이 특별한 사이이고 그 때문에 자신이 오디션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바람에 생각이 바뀌었다. 서영은 송민준과 유현진의 사
강한서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연락이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민경하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휴대폰 신호가 잡히질 않습니다. 지금쯤 이미 딥블루 클럽에 도착하셔서 신호 차단 구역에 계신 것 같은데, 오디션 현장에는 사모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방금 클럽의 경리에게 연락해서 지금 CCTV를 확인하고 있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요.“잠시 머뭇거리던 민경하가 말을 이었다. “사모님께서 아마 당하신 것 같아요.”강한서는 연예계에 대해 잘 몰랐지만 민경하는 아니었다. 유현진은 “법역”이라는 단편 법률 드라마로 하나로 일주일 사이에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은 정황하에서 팬이 수백만으로 늘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드라마 하나로 실검에도 여러 번 올랐으니, 이런 경쟁 상대를 견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연예계에서 유현진처럼 실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모마저 갖춘 사람은 일단 뜨기만 하면 쉽게 탑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연기에 누구보다 진심인 유현진이 이 시간까지 오디션 현장에 나타나지 않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현진을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녀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강한서가 몸을 일으켜 아무런 말 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렵게 강한서를 데려온 양 대표는 그가 가려고 하자 얼른 따라가 그의 앞을 막아서려고 했다. 민경하가 손을 들어 양 대표를 저지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양 대표님, 대표님께서 오늘 급한 일정이 있으셔서요. 다음 주 수요일 한성 그룹 창립 기념일이 있는데, 양 대표님께서도 참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초대장은 제가 나중에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양 대표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한성 그룹 창립 기념일에 초대되는 손님은 극히 드물었다. 이제껏 초대된 손님들은 한성 그룹의 주요 협력업체거나 우호 관계의 브랜드였다. 양 대표는 한성 그룹과 협력한 지 불과 2년 정도였기에 한성 그룹 창립 기념일에 초대되는 일은 상상도 해본
강한서가 유현진을 곁에 두고 싶어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가두어 두려던 적은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그의 곁에서 지내온 유현진이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치 사슬에 묶인 어린 코끼리처럼. 충분히 사슬을 끊을 능력이 있음에도, 그럴 용기가 없어 가만히 있기만 했던 코끼리처럼 말이다. 지금의 유현진은 이제 그 사슬에서 벗어났다. 유현진이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 그의 손으로 다시 그녀를 묶어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민경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오디션이 한창 진행 중인 방을 지나친지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 강한서가 발걸음을 멈췄다. 발밑 카펫의 촉감이 이상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은 어쩐지 축축해져 있었고 카펫의 다른 곳은 밝은 빨간색이었지만 강한서의 발이 닿은 곳은 어둡고 짙은 빨간색이었다. 그 물에 젖은 자국은 그의 발밑에서부터 몇 미터 떨어진 아주 좁은 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민경하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물이 샌 것 같네요. 아닌데, 이거 술 냄새 아니에요?”힐끗 쳐다본 강한서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문틈에서 많은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웨이터 한 명이 달려 나오더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사과했다. “손님, 이쪽으로 걸으시죠. 창고에서 술이 새서 지금 바로 치우라고 하겠습니다.”술이 샜다기에는...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수준에 더 가까웠다. 술이 새어 나오는 문을 훑어보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문 열어요.”흠칫 놀란 웨이터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여긴 직원들 탈의실입니다. 직원 개인 물품도 많고, 사생활 보호...”“열어!”강한서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강한서가 화를 내자 숨기고 있던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그에 웨이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포식자가 가진 위압감은 대단했다. 9시가 되려면
문이 열리자 짙은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유현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술병을 들고 문틈으로 술을 붓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강한서는 가슴이 저렸다. 그는 얼른 유현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민경하의 얼굴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좁고 꽉 막힌 방에 유일한 통풍구도 막혀있어 거의 밀폐된 공간과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전기도 끊겨있었다. 공기마저 탁했다. 누구든 이런 곳에 30분 이상 갇혀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강한서?”유현진은 그의 품에 안겨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한서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입술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 “응.”유현진은 눈을 감고 숨을 내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창가나 베란다로 데려다줘. 바람 좀 쐬고 싶어...”강한서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병원에 데려다줄게.”“베란다로 먼저 가 줘.”유현진이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좀 쉬면 괜찮아. 오디션 봐야 해. 그 사람들 뜻대로 되게 놔둘 수 없어.”긴장으로 굳은 강한서의 얼굴을 유현진이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데려다줘. 부탁해...”부탁...그렇게 해달라고 할 때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더니, 제발 하지 말아줬으면 싶을 때면 꼭 이렇게 그 말을 내뱉었다. 강한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꼭 껴안고 곧장 베란다로 향했다. 확 트인 시야와 신선한 공기가 한 번에 밀려왔다.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가쁘던 숨이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강한서는 말 없이 옆에 앉아 유현진의 등을 토닥였다. 유현진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민경하가 따듯한 물 한 잔을 떠오더니 말했다. “사모님, 물 좀 마시세요.”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고 물 잔을 받은 유현진은 몇 모금 마시더니 다시 민경하에서 컵을 돌려주었다. “이제 오디션 보러 가야 해요.”몸을 일으킨 유현진은
“누구...”“저는 오늘 오디션을 보기로 했던 유현진이라고 합니다.”유현진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봄의 연인” 때도 같은 상황이었다. 만약 그때 한 배우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차이현이 그녀를 써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런 운이 따라줄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안창수 감독에 대해 아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문예 영화든 상업 영화든 가리지 않고 찍는 감독이었고 상을 받은 영화도 적지 않았다. 이런 감독들은 보통 오디션에 늦는 배우를 싫어했다. 유현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서영과 송민영이 나왔다. 서영이 유현진을 보자마자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찾을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인제 와서 무슨 소란이죠? 시간관념도 없이! 감독님께서는 이미 민영이를 윤여령 역으로 캐스팅하기로 하셨어요.”이때 안창수가 고개를 돌려 비서에게 물었다. “이 배우는 누구지?”이미 유현진의 자료를 찾은 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에서 새로 계약한 연예인입니다. 신인이라 아직 작품은 없고, 얼마 전 사극 촬영을 마쳤고 아직 개봉하지는 않았습니다. 단편 극에 출연하여 이름을 조금 알린 것으로 보입니다.”비서가 말을 이었다. “송민영급의 배우도 감독님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해서 오디션 준비를 하는데, 시간관념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브랜드 뉴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런 두 사람을 같은 급으로 취급하다니 조금 웃기네요.”그가 보기에 유현진은 송민영에게 비교 대상도 되지 않는 듯 했다. 인기, 이미지, 출연한 작품. 어느 방면에서 보아도 송민영이 유현진보다 나았다. 서영이 계속 밀치자 화가 난 유현진이 오히려 서영의 손을 잡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왜 늦었는지는, 서영 씨가 제일 잘 아실 텐데요!”서영이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본인이 시간관념이 없는걸, 왜 다른 사람 탓이죠?”서영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유현진은 서영의 손을 뿌리치고 안창수와 그의 스텝들을
물론 서해금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꼬맹이에게 그 오일을 제조할 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넘버 S 오일은 한아람이 세상을 뜨기 전 제조해 낸 것이었다. 당시엔 오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해금도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회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해금은 그 오일을 제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향사들과 수천 가지가 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녀는 심지어 화학성분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한아람이 만든 오일을 재현할 수 없었다. 서해금이 재현해 낸 오일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을 때도 딱 2%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2%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향수의 향기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서해금은 넘버 S 오일을 장기 보관할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오일의 휘발을 감소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노력으로도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오일을 주세은이 향만 맡고 제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기회를 줘야 했다. 어차피 서해금은 애초부터 주세은의 입사를 반대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그 눈은 보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 기회에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던 서해금이 말했다. “그럼 너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게.”“아뇨.”주세은이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대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에 주세은을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풍을 떠는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닌 바보를 보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주세운이 두 시간 사이 오일을 제조해 낸다면 그건 회사의 모든 조향사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한현진은 스르륵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세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건 어때?”‘만약 제조에 실패해 서해금이 이 기회를 빌려 회사에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오빠에겐 뭐라고
주세은의 말 한마디에 현장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물론 한현진도 멍해졌다. ‘어린애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도 하네.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서해금도 지금까지 한 병밖에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던데.’만약 오일의 제조는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해 서해금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 이상 오일의 제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의 많은 조향사들은 넘버 S 오일을 본 적이 있었다. 만약 정말 마케팅에 불과하다면 진작 들켰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경쟁자로 가득한 이 업계에 이런 비밀로 캐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말 제조가 어려운 오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껏해야 배상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세은은 말을 내뱉었고 만약 서해금이 정말 주세은에게 제조를 맡긴 후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한현진은 정말 주세은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MZ는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지금 주세은에 대한 한현진의 평가는 그나마 무난한 편이었다. 주위에 몰려 구경 중이던 직원들은 한현진보다 훨씬 직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음식 양념장이라도 만드는 건 줄 아나 봐.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깔린느가 지금껏 향수 업계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어? 진작 라이벌 회사에 뺏겼을 거야.”“서 대표님도 본인이 제조하셨지만 다시 똑같은 오일을 만들지는 못하셨어요. 이제 갓 졸업한 어린 꼬맹이가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예요?”“하룻밤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잖아요.”“만약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제 손에 지지겠어요.”송가람의 얼굴에 은은한 멸시가 감돌았다. 아마도 주세은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본인이 직접 불구덩이에 뛰어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현진은 마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온 학부모 같았다.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사
한현진은 말하며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전 주주의 신분으로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니도 세은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임원인 누군가의 연줄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저와 세은이를 제약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언니와 서 대표님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송가람은 논리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현진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한 방이 되었다. 낄린느의 창시자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입사한 직원이 알고 있는 회사의 대표는 서해금이 전부였다. 깔린느의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서해금을 깔린느의 창시자인 듯 추앙하고 있었다. 예전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경력 2, 30년 이상의 고참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깔린느가 모든 위기를 헤치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부 서해금의 공로로 알고 있었다. 설사 한현진이 회사의 대표로 취임했어도 다들 서해금이 옛정을 생각해 파트너였던 사람의 딸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월이든 송가람이든 한현진의 얘기만 나오면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조차 않던 창시자인 한아람은 애초부터 깔린느의 최대 주주였고 심지어 그녀는 90%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깔린느의 창업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밖에 되지 않는 서해금의 투자금이 부족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해금은 그저 적은 투자금을 들여 깔린느와 파트너쉽을 맺고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는 얘기였다. 자수성가, 커리어우먼, 비즈니스 천재, 조향 천재라는 타이틀은 그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아람 덕에 누린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과 더불어 “주세은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현진이 모든 책임을 진다”던 송가람의 말을 곱씹어 본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은 의미심
한현진의 말에 성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성월은 한현진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해금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진아, CCTV를 확인할 자신 있어? 만약 정말 세은이가 한 짓이면 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니?”“경찰에 신고해야죠.”한현진이 똑바로 서해금을 직시했다. “만약 정말 세은이가 깨뜨린 거라면 비싼 물건이니 경찰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해야겠죠.”서해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현진 씨, 세은이의 입사를 강력 추진한 건 현진 씨였어요. 그래서 엄마도 동의했던 거고요. 하지만 지금 현진 씨는 이렇게 큰 문제를 생기자 모든 책임을 세은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어요. 정말 현진 씨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건가요?”한현진이 잠시 침묵했다. “가람 언니, 그런 얘기는 저희끼리 있을 때 해도 되잖아요. 왜 굳이 이곳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거예요?”한현진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송가람이 일부러 더 그녀를 밀어붙였다. “넘버 S 오일이 깨졌으니 회사 전체의 이익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저희도 직원에게 제대로 된 사건의 진위를 알려야 해요. 그러니 굳이 저희끼리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한현진이 시선을 올렸다. “여기서 얘기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 언니가 계속 제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제가 세은이를 입사시켰기 때문인 거잖아요. 세은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도 당연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겠죠. 그럼 제가 물을게요. 언니의 업무 실수로 인해 저희는 하마터면 홍혜림 씨라는 고객을 잃을 뻔했어요. 그럼 왜 당시 언니를 회사로 불러들인 서 대표님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신 거예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심지어 멀쩡히 회사에 다니고 있잖아요. 언니도 서 대표님 추천으로 입사하신 거잖아요. 왜 그 일에 관해선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는 거예요?”부끄러움에 송가람은 버럭 화를 냈다. “저와 세은이는 달라요. 깔린느는
역시나 성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엔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한 대표님이 호언장담해서 데려온 사람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소문이긴 한데. 나도 그냥 들은 거야. 주세은 씨 경력으론 우리 회사에 입사할 수 없대. 하지만 한 대표님이 세은 씨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취직을 시켜주려고 했지만 서 대표님이 반대하셔서 한 대표님이 만약 주세은 씨가 문제를 일으키면 한 대표님이 책임지고 물러나시기로 약속하셨다고 했어.”“세상에. 하지만 이번 일은 작은 일은 아니잖아.”“우리가 입사할 땐 면접만 4차까지 있었어. 면접도 없이 입사하기에 대단한 실력자인가보다 했는데, 이렇게 큰 사고를 치다니.”“입사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 실력을 보지 못했어.”“넘버 S 오일은 이것 하나밖에 없잖아.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한 대표님이 어떻게 지켜주겠어.”“지키긴 뭘 지켜. 한 대표님 본인도 책임을 면치 못할 텐데. 자신이 꽂은 사람이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어?”...한현진을 힐끔 쳐다본 송가람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음모를 달성한 비열한 인간의 표정이었다. 한현진은 그런 송가람 따위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성월을 직시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대로 가르치고 싶으셨다면 직접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알려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익숙하지도 않은 곳에서 물건을 가져오라고 세은 씨 혼자 보내신 거죠?”성월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땐 다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 일손이 부족한 데다 저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세은 씨를 보낸 거예요. 저장실은 제가 세은 씨와 함께 간 적이 있었어요. 세은 씨도 저장실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한현진이 물었다. “다들 식사 중이었다는 건 그리 급한 업무도 아니었단 얘기겠네요. 왜 하필 사람 없는 점심시간에 세은 씨를 불러서 오일을 가져오게 한 거예요?”한현진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성월이 결국
구내식당이 워낙 조용했던 터라 가까이 있는 사람은 통화 내용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비록 한현진은 넘버 S 오일이 뭔지 몰랐지만 깔린느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넘버 S 오일은 혼합 오일이었다. [인 드림] 같은 고급 향수의 제조에 사용되는 주요 원료 중 하나였다. 넘버 S 오일의 재고는 100mL 밖에 없었다. 서해금이 우연히 제조해 낸 오일이라 각 오일의 성분과 비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그렇게 넘버 S 오일은 한정판이 되어버렸다. 이 오일은 줄곧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 고급 향수를 제작할 때만 사용되었다. 넘버 S 오일은 깔린느 전체에 단 한 병뿐이었다. 그것이 깨진다면 넘버 S 오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성월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서해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따라가려는 한현진을 은서하가 불러 세웠다. “대표님, 제 일은 됐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지날 수 있을 거예요.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한현진이 은서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나가지 않을 거예요. 서하 씨가 참으면 참을수록 그 사람들은 점점 더 서하 씨를 만만하다고 여기고 더 심하게 굴 거예요. 서하 씨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들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앞으로 서하 씨를 괴롭히려고 할 땐 한 번쯤은 고민해 볼 거예요.”은서하가 멍해졌다. 한현진은 은서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주세은은 덜렁대는 성격의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귀중한 원료는 보통 일반 직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보관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세은이 그 오일을 깨뜨렸을 리가 없었다. 한현진이 다급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일 보관실에 모여있었다. 주세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를 에워싼 사람들은 하나 같이 범인을 심문하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세은은 하얗게 질린 얼굴
한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송가람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갔다. “제 사무실에 있던 금전수 기억해요?”움찔하는 송가람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한현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니가 하는 건 저도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승인하실래요, 아니면 다들 들을 수 있게 제가 가서 가져올까요?”송가람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현진이 그 도청 장치를 발견했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현진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송가람의 사무실에도 도청 장치를 달았다. 송가람과 주현은 사무실에서는 거리낌 없이 모든 얘기를 했었다. 게다가 한현진이 대체 어디서 어떤 얘기를 들은 것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생각에 송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꼭 움켜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송가람의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질 때쯤 멀리서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아, 가람아.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니?”하마터면 자신이 한 일을 승인할 뻔한 송가람은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입가까지 흘러나왔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그녀는 구세주를 만나기라도 한 듯 서해금을 불렀다. “엄마!”한현진이 쯧 혀를 찼다. ‘타이밍 한번 좋게 찾아왔네.’한현진은 몸을 돌려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서해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한현진 앞으로 다가온 서해금이 몸을 곧게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미소 지으며 물었다. “밥도 안 먹고 두 사람 여기서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던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다만 가람 언니가 별다른 이유 없이 직원의 보너스를 삭감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있었어요.”한현진의 말에 반박하려던 송가람은 휴대폰을 꺼내려는 한현진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만약 송가람이 자신의 구역에서 한현진에게 약점을 잡힌 것을 서해금이 알게 된다면 또 그녀를 한바탕 꾸짖을지도 몰랐다. “그래?”서해금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현진이 말이 사실이야?”송
누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비웃음 소리가 하나둘 터져 나왔다. 안규리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한현진이 송가람의 말을 잘랐다. “송 팀장님, 여긴 회사예요. 호칭 주의하시죠.”말문이 막힌 송가람은 이를 악물고 화를 꾹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다들 그저 장난 좀 한 건데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네요.”“제 말이 좀 지나쳤나요?”한현진이 차가운 눈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규리 씨가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놀릴 때는 왜 규리 씨 말이 심하다고 하지 않은 거죠? 이해 능력이 형편없어서 규리 씨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거예요?”송가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서하 씨 형편이 어려우면 회사에 복지 신청해도 된다고 제가 얘기했잖아요.”한현진이 흥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송 팀장님은 이해력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안 좋으신 것 같네요. 서하 씨가 2개월간 감봉 당한 건 송 팀장님 작품 아니었나요? 이제 와서 좋은 사람인 척하겠다는 건가요?”표정이 굳어진 송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서하 씨 보너스가 삭감된 건 인사팀에서 결정한 일이에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헛소리하지 말아요.”한현진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전 서하 씨가 보너스를 삭감당했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요. 조향팀의 일개 팀장에 불과한 송 팀장님이 어떻게 재무팀 직원의 월급 삭감 정황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인사팀 부장이 꿈에서 알려주기라도 했어요?”송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한현진에게 말꼬투리를 잡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간 화가 치민 송가람이 말했다. “대충 제 추측으로 얘기한 것 뿐이에요. 감봉은 보너스를 삭감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하지만 보너스를 전부 삭감당했다는 건 저도 들은 적 없는 얘기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회사에도 징계에 관한 규정이 명확하게 있어요. 설사 서하 씨가 진행한 업무가 전부 규정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은서하는 송가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현진과 가깝게 지내다 또다시 송가람에게 당할까 두렵지는 않은 걸까?한현진은 도무지 이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그런 은서하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은서하와 인사를 나누었다. “서하 씨, 외할머니도 아직 퇴원하지 않으셨을 텐데 오늘은 어떻게 회사에서 점심을 먹는 거예요?”은서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 비꼬며 말했다. “진작 회사에서 먹어야 했어요. 도시락도 매일 구정물 같은 것만 싸 오던데 식욕이 있겠어요? 서하 씨. 구내식당은 직원 할인도 있잖아요. 매달 6만 원만 내면 돼요. 그 정도 돈도 없는 건 아니겠죠. 그 도시락, 서하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전 이제 못 봐주겠어요.”그 말에 은서하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젓가락을 꽉 움켜쥐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이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규리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구내식당을 이용하든 도시락을 싸든 그건 다른 사람 마음이에요. 6만 원으로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뭐 그리 고상한 일 같아요?”안규리라고 불린 사람은 송가람 옆에 앉아 있었다. 한현진도 전에 본 적 있는 재무팀 직원이었다. 안규리가 눈썹을 씰룩였다.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게 고상하다는 얘기는 전 한 적 없어요. 하지만 매일 죽 같은 도시락을 싸 와 식당에서 데워 먹는 모습은 사실 저희 식욕을 떨어뜨리거든요. 다들 안 그래도 일하느라 힘든데 밥 먹을 때도 이렇게 입맛이 떨어져서야 저희더러 어떻게 살라는 거죠?”주현도 안규리의 말을 거들었다. “서하 씨도 돈이 없어 보이지는 않던데요. 전에 한 대표님이 옷 선물을 하셨을 때도 제일 비싼 옷을 가져갔잖아요. 딱 봐도 그런 걸 처음 본 사람은 아니잖아요. 보자마자 제일 좋은 거로 가져갔는데.”“200만 원이 넘는 옷을 입는 사람이 식비 6만 원을 아낀다고요?”“그게 어떻게 같아요? 몇백만 원짜리 옷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잖아요